한성우가 뭔가를 알아차린 듯 눈을 번뜩였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아주머니를 강한서 인생에서 없애버릴 계획이었던 거예요?”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강한서가 그 여자의 노후자금을 주는 건 말릴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그 여자가 그깟 혈연관계를 빌미로 강한서를 진흙탕에 끌어들이려 한다면 전 그런 기회조차도 줄 생각이 없어요.”말하며 한현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신씨 가문이 파산했으니 잘 됐네요.”가족마저 등을 돌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데다 명성까지 전부 잃었으니 이제 신미정은 그 어떤 파장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한현진의 눈에 갑자기 앞줄에 앉아 있는 강단해의 모습이 들어왔다. 강단해를 본 한현진이 조용해졌다. ‘저 아저씨도 있었지, 참. 작은어머니는 저 시동생과 형수 사이의 일을 전혀 모르시는 건가?’한성 그룹의 발표회는 인공지능 전기차를 피날레로 끝을 맺었다. 클래식 음악이 다시 울려 퍼지고 발표회장의 불빛이 밝아졌다. 한성 그룹의 임원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수많은 취재진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가 끝난 후에는 피로연도 준비되어 있었다. 이 인터뷰는 신제품 관련 질문을 받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도 스캔들이나 캐려는 기레기는 존재했다. 다른 사람과는 정상적인 질문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던 기자들이 강한서의 차례가 오자 질문의 노선을 바꿨다. “강 대표님, 요즘 [산군의 바람]이라는 유명 페이스북 계정에서 언급한 강한서 대표님의 생모 부양권 포기 발언이 사실인가요?”“강 대표님, 인터넷에 떠도는 대표님 관련 스캔들이 이번 신제품의 매출에 영향이 있을 것 같나요?”“강 대표님께서 생모를 버리셨다는 얘기가 인터넷에서 큰 이슈를 얻고 있습니다. 네티즌들이 댓글에 한성 제품 보이콧을 외치고 있는데, 이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기레기들은 마치 개떼처럼 모여들어 강한서를 에워쌌다. 그들은 마이크를 강한서의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그야말로 꼴불견이었다. 강한서는 연예인도 아니었던지라
그 키워드들은 하나씩 검색어 순위에 올랐다. 게다가 관련 피드의 내용은 [산군의 바람]의 한 마디에 아무런 실질적인 증거 없는 단순한 언변으로 여론 몰이를 한 계정의 피드와는 전혀 달랐다. 관련 피드에는 모든 증거가 차례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신미정이 직접 서명하고 손도장까지 찍은 부양 포기 각서, 계좌 이체 기록, 신표가 도박했다는 증거와 신미정이 신표를 대신해 도박 빚을 갚은 영수증까지 전부. 네티즌들은 그 증거들은 한데 모아 간단하게 정리했다. 증거로 올라온 캡쳐본만으로도 신미정이 400억에 가까운 돈을 가져갔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돈은 신미정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데 사용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친정집 동생들을 도와주는 곳에 쓰였다. 인터넷은 순간 토론의 열기로 뜨거워졌다. [부동산 매매도 없이 1년 사이 400억이라니. 역시 재벌은 우리 같은 서민이 상상할 수 있는 삶이 아니야.][한 달에 20억이 넘는 부양비라... 저희 엄마가 이 기사를 못 보게 해주세요. 제가 드리는 20만 원은 엄마에 대한 모욕이라 오해하실까 봐 걱정이에요.][아들은 다리 밑에서 주워온 자식이고, 동생은 친동생네. 감정 완료.] [여론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네요. 한성 홍보팀 정말 대단한데요. 몇 시간 사이 신제품 인기도 급상승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쉽게 강한서 대표의 결백을 주장하다니. 생각들 좀 해봐요. 벼랑 끝에 몰린게 아니라면, 어떤 엄마가 이런 가정사를 인터넷에 폭로하겠어요? 본인 친동생에게 주머니까지 탈탈 털어 주는 사람이 아들에겐 왜 이렇게 각박하게 굴겠어요? 진위를 떠나서, 강한서 대표는 정말 아무 잘못이 없을까요?][사건의 진위를 따지지 않으면 뭘 따지겠다는 거야?][역시 세상은 넓고 미친 X는 많네. 엄마가 강한서 대표 돈으로 삼촌 도박 빚을 갚아줬는데 그 사실을 안 강한서 대표가 자금 지원을 끊었다는 이유로 엄마는 모자 관계를 끊고 심지어 인터넷에 버림받았다는 루머까지 퍼뜨렸는데, 이와중에 강한서 대표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
[이젠 다 어른이 되었으니 저도 고생 끝에 낙이 오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결혼을 하더니 저와 점점 멀어졌죠.]신미정은 송씨 가문의 눈에 날까 두려웠던 것인지 며느리에 관해선 그저 스치듯 짧게 얘기했다. 그녀는 또 긴 편폭을 들여 자신과 신표의 관계를 설명했다. 신표는 어린 시절의 강한서를 구해 준 적이 있었고 신미정은 배은망덕한 인간처럼 그런 동생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신미정은 그것이 잘못된 방법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젠 신씨 가문 일에 손을 뗐다며 지금은 그저 아들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했다.신미정은 아마 실력 있는 사람을 찾아 도움을 받은 것 같았다.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다투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강한서와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그녀에게 그 어떤 좋은 점도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오히려 이 일을 빌어 강한서를 가스라이팅하여 본인이 계속 강씨 가문 사모님이로서의 모든 권한을 누리는 것이 신미종의 목적인 것 같았다. 신표는 이미 신미정에게서 등을 돌렸고 강단해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기에 모든 걸 버리며 신미정을 거둘 수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 신미정에게 강한서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언제든 뒤에서 칼을 꽂을 수 있는 사람을 한현진은 강한서 곁에 둘 수 없었다. 신미정이 페이스북에 올린 장문의 피드에 달린 댓글은 두 패로 나뉘었다. 신미정을 이해한다는 여론은 싱글맘의 힘든 처지를 이해하며 아무런 이유 없이 도박하는 동생을 도운 것도 아니고 아들을 구해준 적이 있으니 당연히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반대 여론은 그저 신미정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태도였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고, 아이를 보살피는 건 엄마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왜 신미정에겐 그것이 아이를 가스라이팅하는 이유가 된 것일까?강한서가 신표의 도박 빚을 갚아주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심지어 10년 동안 신표를 도와주는 신미정을 묵인해줬다. 강한서는 10년을 참고 나서야 더는 돈을 주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것
[사람들은 늘 모성애를 노래해요. 엄마의 사랑이라는 게 위대하긴 하죠. 하지만 모든 엄마에게 모성애가 있는 건 아녜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옭아매고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엄마에게 아이가 반항을 했다고 해서 그게 불효가 되는 건가요?한서는 졸업 후 지금까지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매년 학교에 기부하고 있어요. 학교에 장학금 재단까지 설립해 성적이 우수하고 생활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있고요. 작년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전할 편지를 적어달라고 했어요. 저희는 한서가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유능한 인재가 되길 바란다는 내용을 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한서는 아무런 고민과 걱정 없이 행복하게 자라기를 바란다고 적었더라고요. 한서는 늘 자기 마음속에 있는 어린 꼬마를 안고 살았던 거예요. 한서가 졸업한지 이젠 10여 년이 흘렀어요. 저희도 그동안 자주 연락하지는 않았고요. 그러다 2년 전 제 남편이 수술을 받게 되었고 해외 유학 중인 아이 때문도 저도 양쪽을 오가며 몇 년 사이 체력이 많이 떨어져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어요. 하지만 한서는 어디서 그 소식을 들은 것인지 사람을 보내 제 남편의 입원 수속을 도와줬어요. 한서는 누구보다 훌륭한 학생이었어요. 저희 반 학생이 한서 한 명이 아니었고 선생님으로써 아이들 한 명 한 명, 전부 똑같이 마음을 써야 했어요. 그래서 제가 한서에게 특별히 더 잘해준 것도 아니었어요. 전 그저 한서의 담임을 맡았던 평범한 교사였죠. 게다가 지금은 이미 퇴직했고 한서의 사업에도 그 어떤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럼에도 한서는 담임이었던 저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아준 아이예요. 그런 아이가 또 어떻게 친어머니를 버리는 짓을 할 수 있었겠어요?불과 몇 분 전,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를 보며 아들이 올리지 말라고 설득하더군요. 지금 여론이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으니 제가 쓴 글 때문에 괜히 저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고 말이예요. 하지만 전 무섭지 않아요. 누구 보다 한서가 어떤 아이인지 잘 알고 있는 제가 조용히
한 때는 재벌가 사모님 모임의 중심이었던 여자가 결국은 모든 사람들의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는 이젠 더 이상 이 바닥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강한서의 페이스북은 점차 새로운 댓글이 달리며 악플을 덮어갔다. 실시간 검색어도 점차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했다. 그중 순위가 제일 높은 검색어는 [강한서 수능 성적]이었다. 발표회가 시작하기 전, 많은 사람은 강한서의 일반적인 재벌 2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굳이 다른 점을 얘기하자면 강한서는 그동안 특별한 스캔들도 없이 조용하게 지낸 편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잠잠하게 지내 온 재벌 2세든, 한껏 존재감을 드러낸 재벌 2세든 네티즌에게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재벌 2세는 그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재부로 손쉽게 좋은 환경과 기회를 누리며 살아온, 아무리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일반인은 누리지도 못할 사회적 지위와 재부를 손에 쥘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누군가 강한서의 수능 성적을 공개했을 때,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능 만점???][이게 무슨 어나더레벌의 엄친이야?]특례가 있었던 것은 아닐지 의문이 들었지만 강한서는 단순히 본인의 실력으로 수능 만점을 맞았다. 그리고 곧 고등학교 시절 강한서의 성적도 어쩐 일인지 전부 공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네티즌들은 현재 한성의 핵심팀을 이끄는 사람 역시 강한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팀은 강한서 본인을 포함해 많은 상을 수상한 전적이 있는 팀이었다. 강한서가 대학원 시절 제출한 논문도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곧 많은 대학원생들은 그 논문은 바로 전업 저널에서 읽었었던 논문이며 심지어 자신의 논문에도 인용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전문가는 강한서의 논문은 박사 이상의 학벌을 가진 사람이 쓸 수 있는 수준의 논문이라고 말했다...그렇게 많은 사실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순간 한성 그룹의 젊은 대표야말로 진정한 천재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강한서 본인은 그 어떤 인터
웨이터는 조금 전까지 한현진이 서 있던 곳에 그대로 넘어졌다. 그는 넘어지며 테이블에 부딪혔고 위에 놓였던 술잔과 그릇들이 와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조각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튀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하지 못한 한현진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얼굴도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지 마요. 괜찮아요.”정신을 차린 한현진이 멍하니 자신을 잡아 준 주강운을 쳐다보며 숨을 들이켰다. 한현진은 주강운의 손에서 팔목을 빼며 나지막이 말했다. “고마워요.”주강운의 눈가에 걱정 어린 눈빛이 스쳤다. 하지만 주강운은 그 마음을 꾹 누르며 앞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그는 그저 조금 전까지 한현진을 잡고 있던 손을 꽉 움켜쥐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으면 됐어요.”이때, 강한서는 이미 굳은 얼굴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현진은 그가 주강운에게 주먹을 날리기 전에 먼저 앞으로 다가가 강한서의 손을 잡았다. “얼른 사람 불러서 여기 정리해. 손님들 놀라게 하지 말고.”한현진에게 잡힌 강한서의 손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한현진은 힘을 실어 강한서를 꼭 잡았다. 그녀는 그에게 자기는 괜찮으니 티 내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한현진은 아이들이 뒤에서 뛰어다니다 웨이터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걸 직접 보았다. 이건 그저 우연한 사고였다. 하지만 강한서가 이 일로 화를 낸다면 그가 주강운 앞에서 했던 연기는 전부 물거품이 될 것이다. 강한서는 한현진의 타이름에 점차 진정했다. 그는 분노를 꾹 억누르며 놀라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민경하에게 사람을 불러 이곳을 수습하라고 지시했다. 옆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한성우는 큰 소란에 놀라 다가와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주강운이 말했다. “아이들이 뛰어 놀다가 웨이터를 넘어뜨려서 하마터면 현진 씨에게 부딪힐 뻔했어.”한성우가 놀란 숨을 들이켰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한현진의 배를 힐끔 쳐다보았다. 막 말을 꺼내려던 한성우를 강한서가 노려보았다. 한성우는 순간 마음
왜 굳이 이미 취한 강한서를 방까지 데려다줬을까? 차라리 로비에서 기다리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말이다. 설사 강한서를 편히 쉬게 하려던 의도였다고 해도, 강한서와 함께 방에서 기다리면 될 것을 왜 굳이 로비에서 자신을 기다렸던 걸까?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두 개밖에 없었다. 한현진이 헷갈려 다른 엘리베이터를 탈 리가 없었다. 강한서는 줄곧 유씨 가문 사람들을 혐오했었다. 그러니 그는 멀쩡한 정신엔 유현아가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유현아도 아주 멍청이는 아니었다. 만약 유현아에게 강한서를 유혹할 능력이 있었다면 진작 그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당시 주강운이 물을 마신 건 두통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현진이 강한서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덮칠 수 있도록 시간을 끌기 위한 행동이었던 걸까?그때의 일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한현진의 마음은 점점 더 서늘해졌다. 주강운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자기 첫사랑을 치어 죽인 사람을 도왔던 걸까?“현진 씨?”창백해진 얼굴로 한참을 말이 없는 한현진을 본 주강운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한현진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그녀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손을 뻗어 주강운이 내민 잔을 받으며 말했다. “고마워요.”생기 있는 얼굴이었지만 낯빛이 어두웠다. 이마에도 땀이 송글 맺혀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놀란 모양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지만 정작 입을 여니 그 모든 마음은 그저 한 마디의 가벼운 인사로 흘러나왔다. “요즘 잘 지냈어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지냈어요.”잠시 말이 없던 한현진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저녁에 누군가 강운 씨 휴대폰으로 저에게 전화를 했었어요. 강운 씨 취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날 몸이 안 좋아서 안 갔는데, 집에 잘 들어갔어요?”한현진은 조심스레 그 얘기를 꺼냈다. 마치 주강운이 왜 오지 않았냐고 따질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그렇게 선을 긋
주강운이 엄지로 컵을 쓸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웃으며 덤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지금도 보고 있겠죠. 또 어쩌면 그저 장난으로 한 얘기였을 수도 있고요.”시선을 내린 한현진은 더는 말이 없었다. 주강운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이들을 보며 갑자기 물었다. “전에 장례식에 있었던 꼬마 아가씨는 아직도 한서가 돌보고 있어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서가 아름드리로 데려왔어요.”주강운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아이 가족에게 보내지 않았어요?”한현진이 말했다. “민 실장님 말로는 아이는 직계 가족이 없다고 하던데요. 다른 가족들도 아이를 키우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고아원에 보내자니 강한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냥 잠시 자기 옆에 두고 보살피기로 했어요.”주강운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개인 입양은 안 알아봤어요?”한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저야 그러고 싶죠. 전에 강한서에게 그 얘기를 꺼냈다가 한바탕 싸웠어요. 저더러 아이에게 아량을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 아이와 강한서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았다면 강한서 아이가 아닐까, 의심하고도 남았을 거예요. 어찌나 친자식처럼 아끼는지. 됐어요. 그저 어린 아이 일뿐인걸요. 착하고 말도 예쁘게 하는 애예요. 키우고 싶다면 키우죠, 뭐.”주강운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긍정적이네요.”한현진이 눈웃음 지었다.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서도 가끔 이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을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사실 강한서가 사고를 당하기 전 그 아이에 관해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 전 그 아이를 만난 적이 없었어요. 강한서가 저에게 알려준 이름도 은서가 아니라 문샤론이었어요. 그 이름은 은서 엄마가 지은 거라고 했어요. 은서 부모님이 무궁화가 예쁘게 폈을 때 만났대요.”한현진은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낭만적인 러브스토리겠죠. 아쉽게도 그 끝이 안 좋긴 했지만 말이예요.”주강운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
“넌 원래 은서한테 엄격하게 굴었잖아. 네가 나쁜 사람 역할을 하는 건 네 이미지에도 어울려. 난 평소에 은서한테 너무 따뜻하게 대해줘서 지금 엄하게 얘기해도 내 말은 안 믿을 거야. 그러니까 나쁜 사람은 역시 네가 해야 해. 한 번 더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강한서가 대답할 새도 없이 등 뒤로 갑자기 은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모~”“응.”얼른 대답한 한현진이 몸을 돌리자 은서가 동그랗고 큰 눈을 반짝이며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두 분 연애하시는데 방해한 거예요?”한현진: ...“그건 아닌데...”“그럼 뭐하고 계셨어요?”한현진이 강한서에게 얼른 시작하라며 눈짓을 보냈다. 강한서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현진을 배신했다. “은서야, 현진 이모가 은서한테 할 얘기가 있대.”한현진: ...은서가 한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가 눈빛으로 할 얘기가 뭐냐며 묻고 있었다. 한현진은 속으로 강한서를 의리도 없는 놈이라며 욕을 지껄였다. 단순하고 맑은 은서의 눈을 마주한 한현진은 그 어떤 훈육의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의 속도 모르고 마음 독하게 먹으라며 뒤에서 슬며시 한현진의 허리를 다독였다. 입술을 달싹인 한현진은 계획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그게... 사실은 별 거 아냐. 저녁에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했어.”강한서:...은서가 눈웃음을 지었다. “수제비요! 할머니가 이따가 만드는 법 배워주신다고 하셨어요. 이모가 새우 수제비를 제일 좋아한다면서요. 제가 배워서 만들어드릴게요.”마음이 약해진 한현진은 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 맞다. 잠깐만 기다려요.”은서가 말하고 총총 달려갔다. 어리둥절한 한현진을 뒤로 한 채 잠시 후, 은서가 저금통을 안고 돌아왔다. 아이는 작은 돼지 저금통을 한현진 앞으로 들어 올리며 빨간 얼굴로 말했다. “현진 이모. 혹시 이 돈...”주머니에서 돈다발 하나를 꺼내 한현진에게 꺼낸 은서가
의사로서의 기본적인 도덕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부하 직원을 잘 대할 리가 없었다. 돈만 충분히 준다면 황 닥터의 죄증을 대신 비행기에 실어줄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황 닥터는 외국인이었기에 이 곳에서 불법을 저지른다고 해도 결국 본국으로 송환되어 벌의 제재를 받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황 닥터를 처단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황 닥터의 입국이 금지 당한다면 송가람은 다른 방법으로 약을 구매할 것이다. 그때가 바로 송가람을 일망타진할 좋은 기회였다. 한현진이 알아차렸다는 듯 말했다. “결국은 돈지X로 해결한 거네.”멈칫하던 강한서가 갑자기 말했다. “너 방금 싸울 때 욕했지?”한현진이 눈을 깜박였다. “아닐걸.”“했어!”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았다. “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잊었어?”‘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데?’‘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해주고, 또 뭐가 있더라? 기억이 안 나네.’어제 들었던 태교 수업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한현진은 수면으로 채웠다. 강한서는 본인의 뱉은 말을 지켜 거금을 들여 태교 선생님을 고용해 1 대 1로 집에서 한현진이 수업을 받도록 했다. 유난히 나긋하고 부드러운 선생님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임산부와 아이들을 상대하는 본인의 직업과 찰떡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목소리에 졸음이 솔솔 쏟아졌다. 수업하는 동안 한현진은 졸음이 몰려와 몽롱한 정신 상태를 유지했다. 학창시절 제일 싫어하는 수학 시간에도 이렇게 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노트를 정리했다. 한현진이 하품을 하며 강한서에게 물었다. “기억력도 좋으면서 노트도 작성하는 거야?”그때의 강한서가 뭐라고 했더라?“아무리 좋은 기억력도 작성된 기록보다는 못한 법이니까.”그 한 마디가 태교 수업 중 유일하게 한현진의 기억에 남은 말이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전부 한쪽 귀로 들어가 다른 한쪽으로 흘러나간 탓에 단 한 글자에 머리에 남지 않았
막장 소설을 거부하던 강한서는 강박적으로 소설을 듣기 시작해 결국 소설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니, 왜 막장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하나 같이 멍청하거나 무지하게 구는 거야? 게다가 상남자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틈만 나면 여자 주인공에게 소리나 지르면서, 왜 그러는 거야?”“남자 주인공 미친 거 아냐? 억지로 여자 주인공이 신장 기부를 하게 하다니. 조직 폭력배야?”“이쪽 세계에서는 신고를 하면 판결이라도 받아?”“대체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 여자 주인공이 밀친 거라는 서브 여주인공 말을 믿어? CCTV를 찾아보는 건 불법인가 보지?”“현진아, 지금 나 미안하라고 들려주는 거야?”“난 못 해. 이 소설에 나오는 인간들은 전부 미친 거 같아. 대체 여자 주인공은 저런 남자를 왜 좋아하는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미쳤든 아니든, 소설처럼만 하면 돼. 순진한 척 하는 여우는 자기를 감싸주는 남자에겐 껌뻑 죽는 법이니까.”강한서는 전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머리는 몸보다 성실했다. 일부러 배우지 않아도 그의 머리는 이미 모든 것을 저장했다. 막장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대사를 완벽히 재현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표정은 여전히 어색했지만 다행히 송가람은 표정까지는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다. 아니라면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송가람을 보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는 강한서의 모습을 들켜버렸을 것이다. 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너에게 소설을 들려준 내 노력이 헛되진 않았어. 진보가 빠른걸? 뭔가 유용한 팁이라도 있을까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말했다. “소리를 잘 지르면 돼.”그 말에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1층의 베란다 난간에 기댄 채 강한서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리 와.”“그렇게 나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강한서는 불만스럽게 투덜대면서도 한현진에게로 향했다. 베란다 밖에는 재스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한현진은 난간 너머로 강한서의 목을 끌어안으며
강한서의 얼굴이 분노로 어두워졌다. “한현진 씨는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네요!”한현진이 두 팔을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내가 하나 못 하나 한 번 해 봐.’라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차피 송가람은 애초부터 진심으로 쓰레기 같은 기계 따위를 갖고 싶지 않았다. 단지 두 사람 사이를 틀어지게 하려던 그녀는 목적을 이룬 지금,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한서 오빠, 저 안 받을게요. 화 내지 마세요. 지금은 오빠 건강이 먼저예요. 교수님께서 항상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잖아요.”말하며 송가람은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질책했다. “현진 씨는 여기 한서 오빠의 기억 회복을 돕기 위해 온 거예요, 아니면 화를 돋우려고 있는 거예요?”“착한 척 하는 넌 좀 닥쳐! 지금 여기 네가 낄 자리는 없어.”연기를 빌미로 싸가지 없는 역할을 하려니 이보다 더 속이 시원할 순 없었다. ‘저 착한 척 하는 X에게 진작 이렇게 욕하고 싶었는데.’입가를 파르르 떤 송가람이 성질을 꾹 참으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말했다. “현진 씨, 제가 싫으시면 제가 가면 되잖아요. 이렇게까지 모욕해야겠어요?”한현진이 문을 가리켰다. “얼른 꺼져! 지금 당장 안 꺼지면 네 엄마가 대신 저주 받을 거야.”송가람: ...강한서가 차가운 눈빛으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미친.” 말을 내뱉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아, 정말 미안해. 오늘은 먼저 돌아가. 내가 데려다줄게. 선물은 내가 나중에 따로 준비해서 보내줄게.”송가람은 불이라도 뿜을 것 같은 한현진의 두 눈을 보며 강한서 몰래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곤 강한서의 말에 나긋하게 대답했다. “오빠 말 대로 할게요.”강한서가 배웅하자 송가람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은연중에 계속 한현진을 내보내라는 의미의 말을 던졌다. 입술을 짓이긴 강한서가 말했다. “이번 재검 결과 나오면 다시 얘기해요.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현진 씨를 내보면 할머니가 안 좋아하실 거예요.”정인
송가람이 한현진의 표정 변화를 바로 캐치했다. 그녀는 비록 딱딱한 기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놀란 척 연기하며 말했다. “정말요, 한서 오빠?”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강한서!”강한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현진이 주체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평소에 이 쓰레기 같은 것들을 조금만 건드려도 화를 내면서 송가람은 그저 구경만 했을 뿐인데 선물로 주겠다는 거야? 너 그거 대체 무슨 뜻이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현진의 분노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가람이가 저에게 선물을 줘서 저도 답례를 하겠다는 건데, 뭐 문제 있어요?”“네 생각엔 뭐가 문제인 것 같아?”한현진의 눈이 점점 빨개졌다. “난 건드릴 수도 없는 물건을 송가람이 대체 뭔데 가져가? 넌 진짜 기억을 잃은 거야, 아니면 송가람에게 가지지 말아야 마음을 품은 거야?”강한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란 피우지 마요.”송가람은 기쁜 내색을 하지 않으며 능청스럽게 강한서를 위로했다. “됐어요, 한서 오빠. 현진 씨가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저 필요 없어요. 저 때문에 두 사람 괜히 싸우지 말아요.”강한서가 차갑게 말했다. “내 모형이야. 내가 선물을 하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야. 뭔데 참견이야. 신경 쓰지 말고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한서 오빠, 괜찮아요. 현진 씨 화 많이 난 것 같아요.”한현진이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화 난 거 알았으면 얼른 꺼져!”송가람이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 “한서 오빠...”강한서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한현진 씨! 여긴 내 집이예요. 한현진 씨도 그저 저희 집에 오신 손님에 불과해요. 그러니 그쪽이 제 손님을 쫓아낼 자격은 없어요.”그 자리에 얼어붙은 한현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강한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을 머금은 채 주먹을 꽉 움켜쥔 한현진은 고집스레 눈물을 떨구지 않았다. “강한서, 다
무려 20여 분을 대치하고 나서야 강한서는 책으로 송가람 목에 있던 벌레를 내쳤다. 하늘소는 파닥파닥 움직이더니 갑자기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송가람의 얼굴에 떨어졌다. 꽥, 비명을 지른 송가람은 눈을 뒤집고 그만 기절했다. 송가람이 쓰러지자 벌레는 다시 날아가 버렸다. “가람아?”강한서가 송가람을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한현진에게 말했다. “현진 씨가 운전해요. 제가 가람이 안을게요. 병원에 가야겠어요.”강한서는 말하며 한현진에게 눈짓을 했다. 강한서의 눈빛을 읽은 한현진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귀찮게.”말하며 송가람 곁으로 다가온 한현진이 쪼그려 앉아 송가람의 두 뺨을 내리쳤다. 번쩍 눈을 뜬 송가람이 손을 뻗어 한현진을 밀쳤다. “뭐 하는 거야!”미리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던 한현진이 송가람이 밀치기 전에 먼저 물러섰다. 한현진은 저릿한 손을 흔들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가람 언니, 벌레 때문에 놀라서 쓰러지셨어요. 전 그저 언니를 구해주려고 그런 거예요. 못 믿겠으면 강한서에게 물어봐요.”송가람이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내가 못 들은 줄 알아? 이 타이밍에 사적인 복수를 하겠다는 거잖아!’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인중을 눌렀어도 됐잖아요.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래요.자신을 감싸는 듯 한 강한서의 말에 어깨를 으쓱한 송가람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제가 현진 씨를 오해했어요. 전 현진 씨가 여전히 제가 오빠를 구한 것 때문에 절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은 한현진의 철없는 행동을 나무라는 동시에 강한서에게 자신이 생명의 은인임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강한서가 질책의 눈빛을 담아 한현진을 지켜보았다. 한현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현진은 마치 자신의 행동이 또 강한서의 불만을 자아낼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성질을 꾹 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흥, 콧방귀를 뀌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고개를 숙여 송가람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