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오빠가 아직도 화내고 있을까봐 그랬죠.”말하며 한현진은 아침밥을 송민준에게 건넸다. “아빠는요?”“아빤 쉬러 가셨어. 4시가 되어서야 가셔서 아마 조금 이따 오실 거야.”“오빤 새벽 내내 여기 있었던 거예요?”송민준이 포장을 뜯어 전을 베어 물었다. “어쨌든 예의는 지켜야 하니까.”20여 년을 쌓아온 감정이었다. 신경 쓰지 않는 티를 너무 낸다면 서해금에게 쉽게 들킬 수 있었다. 턱 밑까지 내려온 송민준의 다크서클을 본 한현진은 마음이 아팠다. “내려가면 식당 있어요. 거기서 먹어요. 국이라도 떠줄게요.”송민준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어젯밤 마신 물로 충분히 배가 부르거든.”“...”비꼬는 말투는 어쩌면 유전인 듯 했다. 한현진은 송민준에게서 드디어 까다롭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풋,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 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들은 혹시 전부 그 말투에 질려서 떠난 거 아녜요?”송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서처럼 낯짝이 두꺼운 사람은 아무래도 극소수에 불과하니까.”“...”송민준은 결국엔 한현진에게 이끌려 식당으로 향했다. 그는 송가람이 이번 일로 꽤 크게 다쳤다고 했다. 목과 팔뚝 여러 곳에 긁힌 자국이 있었고 이마에도 퍼렇게 멍이 들었다. 천식 발병 후 병원으로 이송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려 이제 막 깨어난 송가람은 허약하기 그지없는 상태라고 했다. 경찰이 진술을 받으러 다녀왔지만 송가람은 신미정을 사기죄로 고소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이윤하와 신표에게 사건의 초점을 맞춰 두 사람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한현진은 곧 송가람의 계획을 알아차렸다. 송가람은 감히 신미정을 고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신미정을 고소해 승소한다면 그녀와 강한서 사이에는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가 없게 된다. 한현진이 당시 신미정을 피해 만남을 거부하며 그녀를 회사로 끌어들였을 땐 물론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신미정을 처리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비록
한현진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정신을 놓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랑에 이성을 잃은 건 처음부터 끝까지 강한서, 그 멍청이뿐이었다. ‘꽤 불쌍하네.’잠시 생각하던 송민준이 물었다. “만약 그 후로 아주머니가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넌 어쩔 셈이었어? 네 계획은 물거품이 되는 거잖아.”한현진이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절 키워주신 엄마는 저에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도리도 가르쳐주셨지만 용서해야 할 땐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만약 정말 그 후의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건 아직 강한서를 향한 모성애가 남아있다는 얘기고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증거겠죠. 그저 조용하게만 지낸다면 강한서가 죽을 때까지 그 여자를 모신다고 해도 전 상관없었어요.”강한서는 신미정에게 너무 많은 기회를 줬었다. 하지만 신미정은 그 마음을 언제나 실망으로 되갚았다. 어쩌면 잘 된 일이었다. 신미정을 향한 강한서의 마음은 완전히 식어버렸다. 신미정은 결국 한현진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앞으론 계획이 뭐야?”송민준이 물었다. 한현진이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제가 뭘 할지는 전부 그 여자에게 달렸어요.”한현진이 화제를 바꾸며 송민준에게 물었다. “오빠, 조예단 씨는 찾았어요?”송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주병원 근처 작은 아파트에 월세방을 얻어서 지내고 있어. 정기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약을 처방 받고 있어. 지인을 통해 조예단 씨 주치의에게 물어봤더니 난치병이래. 상태도 많이 안 좋은데다 우울증까지 앓고 있어서 장기간 약을 복용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사람도 만나지 않고 이틀에 한 번 장을 보는 게 전부야. 나마지 시간엔 밖에도 잘 나가지 않는 것 같아. 게다가 낯선 사람과 마주치는 걸 굉장히 꺼려하는 눈치야. 조예단 씨 곁에 붙여놓은 사람 말에 의하면 주말 오후엔 아파트 단지나 공원에서 산책하는데 주로 아이들을 보면서 멍 때린대. 오후 내내 말이야.”“두 번이나
“지금은 아들 양육권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 급하게 돈을 벌고 있어요. 그래서 전 희연 언니가 다른 부서로 이동하는 건 별로 바라지 않고요. 업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에요. 안 그래도 아이 때문에 일하는 게 불편했을 텐데 차라리 언니에게 조예단과 접촉하도록 부탁하는데 어떨까 싶어요.”“조예단 씨가 돌아온지도 시간이 꽤 흘렀어요. 고아원에 기부한 걸 제외하면 한주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뿐 별다른 행적은 없었어요. 그렇다는 건 그저 젊은 시절 저지른 잘못을 조금이라도 속죄하고 싶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조예단 씨 본인은 당시 일을 인정할 생각이 없어요. 저 지금 한 가지 일이 떠올랐는데...”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오빠, 조예단 씨가 당시 겪은 화재는 사고일까요, 아니면 인위적으로 일어난 일일가요?”송민준이 반문했다. “너도 방화라고 생각해?”한현진이 말했다. “전 그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당시 마취사를 포함하면 그 일에 개입된 사람은 총 4명이었어요. 그중 2명이 죽었고 한 명은 멀리 해외로 도망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죠. 그리고 나머지 한 명도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가 남편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사망률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사람들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도 아직 60세가 안 됐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한 사고 같진 않아요.”잠시 침묵하던 송민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죽어서까지 지켜야 하는 비밀이라면 그 비밀이라는 건...”송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살인밖엔 없겠네.”한현진이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추측이 제일 합리한 설명이었다. 송민준이 생각하며 물었다. “조예단 씨는 당시의 공범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한현진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는 것 같아요. 오빠가 해외에서 만난 손은혜 씨도 그랬잖아요. 돈을 가진 후엔 혹시 들킬 수도 있으니 서로 다시는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고요. 어떤 사람은 해외로 떠났고 어떤 사람은 직장은 물론 연락처도 전부 바
한현진은 송민준과 함께 송가람이 입원한 병실로 향했다. 그녀는 슈퍼에서 19800원 짜리 과일 바구니까지 샀다. 병실을 문을 열고 송가람을 본 한현진을 깜짝 놀랐다. 송가람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의 양 옆과 목엔 크고 작은 빨간 손톱자국으로 가득했고 이마엔 멍자국이 선명했다. 메이크업을 지운 송가람의 얼굴엔 초췌한 기색이 역력해 생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송민준을 보자마자 송가람은 미소를 지었다. 송민준을 부르는 오빠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그녀는 송민준 뒤에 서 있는 한현진을 발견하고는 꿀꺽, 말을 삼켰다. 그리고 송가람이 하려던 말은 곧 날카로운 소리로 변해 흘러나왔다. “현진 씨는 여기 왜 왔어요? 내가 어떤 꼴인지 구경이라도 하러 온 거예요?”‘쯧. 굳이 몰라도 되는 순간엔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내 의도를 바로 알아차리다니.’송민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가람아, 현진이는 네가 다쳤다는 말에 어젯밤에도 왔었어. 오늘엔 네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과일까지 사서 너 보러 온 건데 왜 말을 그렇게 해?”“쟨 그냥 내가 어떤 꼴인지 구경하러 온 거야!”송가람이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오빠, 쟤가 아줌마를 회사로 끌어들인 거야. 그래서 내가 아줌마에게 속은 거라고.”송민준이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돈도 현진이가 빌려주라고 해서 아주머니께 빌려준 거야? 네가 무슨 목적으로 아주머니께 돈을 빌려줬는지, 굳이 내가 얘기해야 해?”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송가람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현진 씨는 이미 한서 오빠와 이혼했어. 난 한서 오빠를 좋아하는 것도 안 된다는 거야? 현진 씨가 오빠 친동생이면, 20여 년을 함께한 우리는 전부 거짓이 되는 거야? 어떻게 이정도로 편애할 수가 있어?”송민준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송민준은 어쩌면 송가람의 말에 마음이 약해져 흔들렸을 수도 있었다. 아이를 바꾼 건 서해금이었다. 비록 송가람은 오만방자한 성격이긴 했지
“지금이라도 경찰서에 가 상황을 설명하면 될 거예요. 차용증이 없어도 계좌 이체한 내역이 있잖아요. 가족도,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으니 증여로 보긴 어려울 거예요. 언니가 고소해요. 그 여자는 한성 그룹의 주식을 갖고 있으니 주식을 처분한다면 40억 정도는 무조건 돌려받을 수 있을 거예요.”송가람이 한현진의 손을 쳐내며 차갑게 말했다. “이게 네가 날 보러 온 진짜 목적인 거지? 내가 아줌마를 고소해 한서 오빠가 날 미워하게 되면 네가 오빠와 재혼이라도 하려고? 이제야 네가 왜 나와 아줌마를 마주치게 했는지 이해가 되네. 이걸 노리고 있었던 거잖아.”송가람의 반응을 진작 예상하고 있던 한현진은 송가람이 자신의 손을 내치는 순간 한라봉 조각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그덕에 한라봉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한현진은 웃는 얼굴로 송가람을 쳐다보며 쯧, 혀를 차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들켰네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언니가 고소 안 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다쳤으니 아주머니는 가만히 계시려고 하진 않으시겠죠.”송가람의 낯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한현진이 씩 웃으며 한라봉 조각 하나를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톡 터지는 과즙의 달달함이 마음을 녹였다. “아주머니께서 어젯밤 그 여자와 크게 싸우셨어요. 보아하니 치를 떠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마 그 쪽과 사돈을 맺으려고 하시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살짝 언질만 준 한현진이 손에 들고 있던 한라봉을 다 먹고는 몸을 일으켰다. “치료 잘 받아요. 쾌차하길 바라요.”말하며 걸음을 옮기던 한현진이 또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송가람은 경계의 눈빛으로 한현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송가람의 걱정과는 달리 한현진은 그저 책상 곁으로 걸어가 자신이 가져온 과일 바구니에서 한라봉 두개를 꺼냈다. 그녀는 손에 들린 한라봉 두 개를 흔들며 말했다. “꽤 맛있더라고요. 두 개만 가져갈게요.”말을 마친 한현진이 한라봉을 들고 병실을 나섰다. 화가 치민 송가람은 책상 위에
잠시 멍해졌던 주혁이 곧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병원엔 어쩐 일이세요?”한현진과 송민준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전 병문안 왔어요.”말하며 주혁 손에 들린 과일 바구니와 꽃을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도 병문안 오셨어요?”주혁이 대답했다. “네. 친구가 수술을 해서 보러 왔어요.”송민준은 눈앞에 서 있는 수수한 옷차림의 중년 남성을 보며 한현지에게 물었다.“현진아, 이분은 누구야?”“오빠, 이분이 바로 제가 저번에 말했던 주혁 기사님이세요.”한현진은 곧바로 주혁에게 시선을 돌려 송민준을 소개했다. “기사님, 여긴 제 오빠인 송민준 씨예요.”주혁이 조심스럽게 송민준을 향해 목례했다. “송 대표님, 처음 뵙겠습니다.”주혁은 등을 살짝 구부렸다. 그 탓에 수척한 몸이 더욱 왜소해 보였다. 송민준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향하며 주혁을 훑었다. 그리곤 그는 주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뵐게요, 주 기사님.”허리를 숙여 송민준과 악수를 나눈 주혁이 곧 손을 놓았다. 송민준이 미소 지으며 한현진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내가 무섭게 생겼어? 기사님이 날 보지도 않으시네.”움찔한 주혁이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 그게 아니라...”“기사님이 낯을 많이 가리셔서 그래요. 기사님 그만 놀려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농담 좀 한 거야. 자기 사람이라고 감싸기는.”말을 마친 송민준이 주혁에게 말했다. “주 기사님, 안전 운전 부탁드릴게요. 저에겐 하나뿐인 동생이에요. 현진이가 안전하기만 하다면 보너스는 섭섭지 않게 드릴게요.”한현진이 송민준을 툭 쳤다. 갑질하는 부잣집 도련님이나 할 것 같은 그런 말은 넣어두라는 의미였다. 한현진이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기사님, 엘리베이터 안 타세요?”시선을 돌린 주혁이 대답했다. “어느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지 몰라서요. 조금 헷갈리네요.”한주병원의 종합 병동엔 엘리베이터만 6개였다. 한현진이 물었다. “어느 과로 가세요? 제가 봐드릴
한현진은 말했다. “오빠가 강한서 눈치만 안 주면 돼요. 오빠는 한서의 처남인 동시에 친구이기도 하잖아요. 어젯밤 오빠가 날린 주먹 때문에 한서는 속상해서 밤새 잠도 못 잤어요. 오늘 아침에도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채로 출근했다고요.”송병천 쪽은 한현진이 따로 생각해둔 방법이 있었다. 송민준이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걔한테 그 정도라고?”“그러니까 말이예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사람이 자신을 믿지 못하니 안 속상하겠어요?”송민준이 잠시 침묵했다. 한현진이 이젠 그가 속아 넘어갔을 것이라 생각할 때쯤, 송민준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계속 속상하라고 해. 날 속이고 싶으면 몇 년은 더 갈고 닦아야 할 거야.”“...”‘어쩐지 강한서가 계속 오빠를 여우같은 놈이라고 하더라니. 눈치가 너무 빠르잖아.’서해금이 통화를 한 짧은 사이에 송가람은 신미정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며 마음을 바꿨다. 그런 송가람의 말에 서해금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모녀는 병실에서 다투기 시작했다. 서해금의 얼굴이 분노로 파랗게 질려있었다. “넌 네가 신미정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면 강한서가 너와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꿈도 야무지지. 네가 쓰러지고 지금까지 그 자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어. 걔 마음을 아직도 몰라?”송가람은 멍청할 정도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서 오빠가 가운데서 얼마나 난처하겠어요. 게다가 이건 모두 한현진이 꾸민 계략이에요. 제가 아줌마를 고소하게 하려는 수작이라고요. 한현진 뜻대로 되게 놔두진 않을 거예요.”“그게 한현진 계략이라고 해도 그렇지. 신미정은 한현진에게 돈을 빌리러 간건데 왜 네가 나서서 돈을 줘? 이 일에서 넌 빠져.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송가람이 막 입을 열려는 데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서해금이 분노를 가라앉히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병실문을 연 순간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송가람이 고개를 내밀자 그녀의
강한서의 말에 한현진은 멍해졌다. 화가 났지만 불쌍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순간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단순히 삐졌을 뿐이었던 강한서는 한현진의 웃음소리에 욱, 화가 치밀었다. 그건 분명 조롱이 섞인 비웃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안 먹겠다는 이유가 웃겨? 웃긴 뭘 웃어.’한현진은 그저 삐진 강한서의 모습이 귀여웠을 뿐이었다. 예전의 강한서는 한현진의 어떤 행동 때문에 기분이 나빠도 절대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는 늘 뭐든 마음속으로 꾹 참으며 한현진이 추측하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강한서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당연히 그의 마음을 맞출 수가 없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의 그런 문제점을 대놓고 얘기한 후, 그는 바뀌기 시작했다. 기분이 나쁠 땐 전처럼 입을 꾹 닫고 혼자 삭히지 않았다. 그러니 화가 죽을 것 같은데 한현진은 그가 화가 난 줄도 모르는 일도 더는 없었다. 지금의 강한서는 화가 나면 직접적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곤 “얼른 와서 달래줘”라는 표정으로 한현진이 말을 걸어주길 기다렸다. 강한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웃긴 뭘 웃어. 좋은 건 네 오빠에게 주고나서야 날 생각했잖아. 내 순위가 아버님보다, 아이보다 심지어 돈보다 뒤여도 인정할 수 있어. 하지만 대체 내 순위가 왜 송민준에게도 밀려야 하는 거야? 걘 심지어 날 때리기까지 했는데 넌 더 좋은 걸 주면서 그 녀석 마음을 달래준 거야?”한현진은 그제야 강한서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질투심만 큰게 아니라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욕심도 강했다. 일일이 따져가며 한현진 마음속 순위를 하나하나 매겼다. 3위 안에 들지 않는 것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4위마저도 자신이 아니라는 건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쉴새없이 웃기만 하던 한현진이 곧 뭔가를 떠올리고는 강한서에게 물었다. “넌 내가 오빠에게 큰 걸 준 건 어떻게 안 거야?”그 일을 떠올리니 강한서의 마음은 더 아파왔다. 10여 분 전, 송민준은 차단을 풀고 강한서에게 사진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