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준이 강한서에게 화풀이라도 할까 급히 설명했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당시 자궁을 다쳐서 신미정이 보약이라며 한약을 가져다 줬었어요. 저와 강한서 모두 그 약에 손을 썼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그 약이 워낙 냄새가 역해서 도우미가 안 볼 땐 항상 몰래 버려서 얼마 마시지...”“응.”송민준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알아.”한현진이 다시 한 번 송민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건 이미 임신을 한 상태이니 그녀의 몸이 건강하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 안도는 송민준이 강한서를 보자마자 대뜸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 산산조각 났다. 깜짝 놀란 한현진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강한서 앞을 막아서며 다급하게 말했다. “오빠, 뭐 하는 거야!”“현진이 넌 비켜.”송민준이 주먹을 꽉 움켜쥐며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현진이와 결혼하기로 했으면서 대체 왜 제대로 보호하지 않은 거야? 네 엄마가 어떤 인간인지 네가 몰라? 그 여자가 주는 걸 알아보지도 않고 현진이한테 먹여? 현진이가 아이를 낳을 수 없으면 안 낳으면 되잖아. 아이 못 낳으면 죽기라도 해? 그래서 이렇게까지 현진이를 욕보이는 거야?”한현진이 죽을 힘을 다해 송민준을 꼭 잡고 있었다. “강한서는 약 확인했었어, 오빠. 그 여자가 중간에 약을 바꾼 거야. 한서가 어떻게 그런 것까지 생각했겠어. 이미 다 지난 일이야. 왜 이러는 거야?”“그런 생각을 못한 건 쟤가 병X인 거지!”“오빠!”한현진이 발끈하며 송민준을 불렀다. 강한서는 손을 들어 손등으로 입가에 새어나온 피를 닦았다. 그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다정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현진아, 먼저 차에 타. 나 민준이랑 얘기 좀 할게.”한현진이 강한서의 손을 뿌리쳤다. “내가 왜 차에 타! 넌 입이 봉인이라도 된 거야? 평소엔 쫑알쫑알 말만 잘했잖아. 뭐라고 설명 좀 해!”송민준이 냉소 지었다. “그래, 뭐라고 지껄이는지 얘기나 좀 들어보자. 제기랄
한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멍해졌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진 그가 손을 뻗어 살포시 한현진을 잡았다. 송민준이 손을 들어 강한서의 손을 내치며 한현진을 자기 앞으로 휙 끌어당겼다. 그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냥 말로 해. 자꾸 건드리지 말고.”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형님, 예전 일은 전부 제 불찰이에요. 앞으론 절대 현진이 힘들게 안 해요.”“앞으로?”송민준이 냉소 지었다. “일단 너희 집안일부터 잘 처리해.”말하며 송민준은 한현진을 끌어당겼다. “나랑 집에 가.”그러나 한현진은 송민준을 따라가려 하지 않았다. “제 짐이 아직도 아름드리에 있어요. 자꾸 여기저기 옮기려면 귀찮잖아요.”“필요 없어. 전부 새로 사. 우리가 그까짓 돈이 없어?”한현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빠, 저도 성인이에요. 어린 아이 취급하지 마요. 저도 사리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요. 강한서가 잘해주지 않으면 팔다리 멀쩡하니까 내 발로 갈 거예요. 지금은 날 먹여 살릴 능력도 있고 한서에게 의탁할 필요도 없어요. 그리고 저에겐 오빠도 있고 아빠도 있잖아요. 제가 강한서 곁에 있는 건 단지 이 사람 옆에 있으면 행복하기 때문이에요. 어느 날엔가 더 이상 강한서 곁이 행복하지 않다면 언제든 떠날 거예요. 남이 저 대신 결정해 주는 게 아니라, 제가 원할 때면 언제든.”송민준의 마음이 무너졌다. “내가 남이야?”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그렇게 말로 꼬투리 잡으면 재미없어요. 그런 얘기가 아닌거 알잖아요.”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남이라는 한 글자가 지독한 동생 바보에겐 얼마나 큰 상처일지, 한현진이 알기는 할까. 강한서가 가운데서 중재에 나섰다. “현진아, 아니면 오늘 밤엔 본가로 돌아가서 형님과 얘기 좀 나눠.”송민준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선심 쓰는 척 하지 마!”“습—”한현진이 갑자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랫배를 감싸 쥐었다. 화를 내는 것도 순간 잊어버린 송민준이 긴장된 표정으로
한현진은 오빠가 화라도 풀리게 강한서에게도 댓글을 남기라고 부추겼다. 하지만 강한서는 송민준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볼 수 없었고 문자도 보낼 수 없었다. 그의 피드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송민준이 강한서를 차단한 것이다. 한현진이 위로를 건넸다. “괜찮아. 나중에 우리가 싸우면 또 차단 풀고 너 욕할 거야.”“...”‘위로 고마워. 이런 위로라면 다음엔 하지 않는게 나을 것 같아.’농담을 끝내고 강한서는 그제야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음엔 그런 거로 사람 속이지 마. 네가 형님 표정을 못 봐서 그래. 얼마나 놀란 표정이었는데.”한현진이 웃으며 물었다. “난 왜 오빠보다 네 얼굴이 더 창백했던 것 같지?”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도 무서워. 할머니가 도참해야 한다고 어떤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라고 하셨어.”강한서의 눈빛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미신은 전혀 믿지 않던 강한서였지만 아이가 생긴 후로는 그도 한현진도 모두 미신을 믿는 것은 물론 겁도 많아진 것 같았다. 한현진이 강한서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에 살며시 문질렀다. “알겠어. 다신 그런 말 안 할게.”말하며 한현진이 손을 뻗어 강한서의 입가를 쓰다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오빠가 너무 심하게 때렸어. 아직도 아파?”강한서가 피식 웃어버렸다. “이미 충분히 봐준 거야. 네가 걔 싸우는 모습을 못 봐서 그래. 한 주먹으로 코뼈도 부러뜨릴 수 있는 사람이야.”몸싸움을 위해 일부러 격투기까지 배운 사람이었다. 한창 반항기였던 시절엔 지하 격투기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강한서는 송민준이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기에 그가 자신을 어느 정도의 힘으로 때렸는지 알 수 있었다. 힘을 많이 아꼈음에도 충분히 아팠지만 그 덕에 아내의 고백을 들을 수 있었으니 견디기 힘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가 어렸을 땐 착했다고 아빠가 그랬어. 하지만 크면 클수록 점점 삐뚤어졌다고 말이야.”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네 오빠가
어쩌면 정인월도 아이가 많은 것이 복이고 아이를 낳으면 책임감이 생겨 부부관계가 안정된다는 기성세대의 사상을 갖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또 어쩌면 본인의 몸으론 너무 오랜 시간을 버티기 힘든 데다 신미정을 믿을 수도 없으니 최대한 일찍 아이를 가져 신미정의 허황된 생각의 싹을 자르려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떤 이유 때문이든 정인월의 그 선택은 강한서를 불편하게 했다. 다행하게도 강한서와 한현진이 잠자리를 자주는 갖지 않은 덕에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임신한 것이기에 한현진의 건강도 회복되었고 태아도 건강하게 발육할 수 있었다. 만약 지금보다 더 일찍 임신해 아이를 유산하게 되었다면 또 다시 한현진을 아프게 한 것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강한서가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현진아, 미안해.”정인월을 대신해 강한서가 자신에게 건네는 사과임을 한현진은 알고 있었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손등을 토닥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아이가 생겼으니 이제 와서 정인월의 동기를 따져봐야 아무 의미가 없었다. 병원에 다녀온 일을 떠올린 한현진이 말했다. “네 엄마, 외삼촌 그리고 외숙모가 경찰서로 끌려갔어.”강한서가 “응”이라고 대답하며 덤덤하게 말했다. “봤어.”한현진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강한서가 고개를 들어 한현진을 쳐다보며 다정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신경 쓰지마. 난 영원히 너 믿어.”한참을 침묵하던 한현진은 그저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쪽에서 가만히 있는다면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이건 한현진이 강한서를 대신해 신미정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조용하고 평범한 노후를 보낼 것인지, 아니면 패가망신할지는 전부 신미정의 선택에 달려있었다. 강한서가 대답했다. “그래.”송가람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송미준은 한현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곧 병원에 도착할 때가 되자 한현진은 송민준에게 전화했다. 아직 화가 완전히 풀리지
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오빠가 아직도 화내고 있을까봐 그랬죠.”말하며 한현진은 아침밥을 송민준에게 건넸다. “아빠는요?”“아빤 쉬러 가셨어. 4시가 되어서야 가셔서 아마 조금 이따 오실 거야.”“오빤 새벽 내내 여기 있었던 거예요?”송민준이 포장을 뜯어 전을 베어 물었다. “어쨌든 예의는 지켜야 하니까.”20여 년을 쌓아온 감정이었다. 신경 쓰지 않는 티를 너무 낸다면 서해금에게 쉽게 들킬 수 있었다. 턱 밑까지 내려온 송민준의 다크서클을 본 한현진은 마음이 아팠다. “내려가면 식당 있어요. 거기서 먹어요. 국이라도 떠줄게요.”송민준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어젯밤 마신 물로 충분히 배가 부르거든.”“...”비꼬는 말투는 어쩌면 유전인 듯 했다. 한현진은 송민준에게서 드디어 까다롭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풋,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 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들은 혹시 전부 그 말투에 질려서 떠난 거 아녜요?”송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서처럼 낯짝이 두꺼운 사람은 아무래도 극소수에 불과하니까.”“...”송민준은 결국엔 한현진에게 이끌려 식당으로 향했다. 그는 송가람이 이번 일로 꽤 크게 다쳤다고 했다. 목과 팔뚝 여러 곳에 긁힌 자국이 있었고 이마에도 퍼렇게 멍이 들었다. 천식 발병 후 병원으로 이송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려 이제 막 깨어난 송가람은 허약하기 그지없는 상태라고 했다. 경찰이 진술을 받으러 다녀왔지만 송가람은 신미정을 사기죄로 고소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이윤하와 신표에게 사건의 초점을 맞춰 두 사람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한현진은 곧 송가람의 계획을 알아차렸다. 송가람은 감히 신미정을 고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신미정을 고소해 승소한다면 그녀와 강한서 사이에는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가 없게 된다. 한현진이 당시 신미정을 피해 만남을 거부하며 그녀를 회사로 끌어들였을 땐 물론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신미정을 처리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비록
한현진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정신을 놓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랑에 이성을 잃은 건 처음부터 끝까지 강한서, 그 멍청이뿐이었다. ‘꽤 불쌍하네.’잠시 생각하던 송민준이 물었다. “만약 그 후로 아주머니가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넌 어쩔 셈이었어? 네 계획은 물거품이 되는 거잖아.”한현진이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절 키워주신 엄마는 저에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도리도 가르쳐주셨지만 용서해야 할 땐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만약 정말 그 후의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건 아직 강한서를 향한 모성애가 남아있다는 얘기고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증거겠죠. 그저 조용하게만 지낸다면 강한서가 죽을 때까지 그 여자를 모신다고 해도 전 상관없었어요.”강한서는 신미정에게 너무 많은 기회를 줬었다. 하지만 신미정은 그 마음을 언제나 실망으로 되갚았다. 어쩌면 잘 된 일이었다. 신미정을 향한 강한서의 마음은 완전히 식어버렸다. 신미정은 결국 한현진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앞으론 계획이 뭐야?”송민준이 물었다. 한현진이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제가 뭘 할지는 전부 그 여자에게 달렸어요.”한현진이 화제를 바꾸며 송민준에게 물었다. “오빠, 조예단 씨는 찾았어요?”송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주병원 근처 작은 아파트에 월세방을 얻어서 지내고 있어. 정기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약을 처방 받고 있어. 지인을 통해 조예단 씨 주치의에게 물어봤더니 난치병이래. 상태도 많이 안 좋은데다 우울증까지 앓고 있어서 장기간 약을 복용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사람도 만나지 않고 이틀에 한 번 장을 보는 게 전부야. 나마지 시간엔 밖에도 잘 나가지 않는 것 같아. 게다가 낯선 사람과 마주치는 걸 굉장히 꺼려하는 눈치야. 조예단 씨 곁에 붙여놓은 사람 말에 의하면 주말 오후엔 아파트 단지나 공원에서 산책하는데 주로 아이들을 보면서 멍 때린대. 오후 내내 말이야.”“두 번이나
“지금은 아들 양육권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 급하게 돈을 벌고 있어요. 그래서 전 희연 언니가 다른 부서로 이동하는 건 별로 바라지 않고요. 업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에요. 안 그래도 아이 때문에 일하는 게 불편했을 텐데 차라리 언니에게 조예단과 접촉하도록 부탁하는데 어떨까 싶어요.”“조예단 씨가 돌아온지도 시간이 꽤 흘렀어요. 고아원에 기부한 걸 제외하면 한주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뿐 별다른 행적은 없었어요. 그렇다는 건 그저 젊은 시절 저지른 잘못을 조금이라도 속죄하고 싶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조예단 씨 본인은 당시 일을 인정할 생각이 없어요. 저 지금 한 가지 일이 떠올랐는데...”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오빠, 조예단 씨가 당시 겪은 화재는 사고일까요, 아니면 인위적으로 일어난 일일가요?”송민준이 반문했다. “너도 방화라고 생각해?”한현진이 말했다. “전 그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당시 마취사를 포함하면 그 일에 개입된 사람은 총 4명이었어요. 그중 2명이 죽었고 한 명은 멀리 해외로 도망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죠. 그리고 나머지 한 명도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가 남편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사망률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사람들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도 아직 60세가 안 됐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한 사고 같진 않아요.”잠시 침묵하던 송민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죽어서까지 지켜야 하는 비밀이라면 그 비밀이라는 건...”송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살인밖엔 없겠네.”한현진이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추측이 제일 합리한 설명이었다. 송민준이 생각하며 물었다. “조예단 씨는 당시의 공범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한현진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는 것 같아요. 오빠가 해외에서 만난 손은혜 씨도 그랬잖아요. 돈을 가진 후엔 혹시 들킬 수도 있으니 서로 다시는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고요. 어떤 사람은 해외로 떠났고 어떤 사람은 직장은 물론 연락처도 전부 바
한현진은 송민준과 함께 송가람이 입원한 병실로 향했다. 그녀는 슈퍼에서 19800원 짜리 과일 바구니까지 샀다. 병실을 문을 열고 송가람을 본 한현진을 깜짝 놀랐다. 송가람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의 양 옆과 목엔 크고 작은 빨간 손톱자국으로 가득했고 이마엔 멍자국이 선명했다. 메이크업을 지운 송가람의 얼굴엔 초췌한 기색이 역력해 생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송민준을 보자마자 송가람은 미소를 지었다. 송민준을 부르는 오빠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그녀는 송민준 뒤에 서 있는 한현진을 발견하고는 꿀꺽, 말을 삼켰다. 그리고 송가람이 하려던 말은 곧 날카로운 소리로 변해 흘러나왔다. “현진 씨는 여기 왜 왔어요? 내가 어떤 꼴인지 구경이라도 하러 온 거예요?”‘쯧. 굳이 몰라도 되는 순간엔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내 의도를 바로 알아차리다니.’송민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가람아, 현진이는 네가 다쳤다는 말에 어젯밤에도 왔었어. 오늘엔 네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과일까지 사서 너 보러 온 건데 왜 말을 그렇게 해?”“쟨 그냥 내가 어떤 꼴인지 구경하러 온 거야!”송가람이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오빠, 쟤가 아줌마를 회사로 끌어들인 거야. 그래서 내가 아줌마에게 속은 거라고.”송민준이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돈도 현진이가 빌려주라고 해서 아주머니께 빌려준 거야? 네가 무슨 목적으로 아주머니께 돈을 빌려줬는지, 굳이 내가 얘기해야 해?”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송가람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현진 씨는 이미 한서 오빠와 이혼했어. 난 한서 오빠를 좋아하는 것도 안 된다는 거야? 현진 씨가 오빠 친동생이면, 20여 년을 함께한 우리는 전부 거짓이 되는 거야? 어떻게 이정도로 편애할 수가 있어?”송민준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송민준은 어쩌면 송가람의 말에 마음이 약해져 흔들렸을 수도 있었다. 아이를 바꾼 건 서해금이었다. 비록 송가람은 오만방자한 성격이긴 했지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