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너머에서 전해온 건 신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낯선 남자의 음성이었다. 신미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 누구야. 내 동생 휴대폰이 왜 당신 손에 있어? 신표는 어디 있어?”“그 인간?”상대방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지금 여기서 수영 배우는 중이야.”남자는 말하며 휴대폰을 옆으로 가져가 소리쳤다. “어이, 신표! 네 누나가 너한테 얘기하잖아.”수화기에서는 물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울부짖는 신표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었다. “누나! 누나! 빨리 나 좀 구해줘. 이것들이 날 죽이려고 하고 있어. 누— 읍—”신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물속으로 밀어 넣어 꼬르륵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미정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당신 지금 뭐하는 거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다시 전화를 받은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살인이라니? 아줌마, 우린 법을 지키며 사는 착한 시민이야. 불법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줌마 동생이 우리 사장님에게 돈을 빚졌어. 20억이 넘는 돈을 말이야. 사장님이 돈을 못 받아오면 우리 월급도 주지 않겠다잖아. 우리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입장이라 월급날만 꼬박 기다리고 있거든. 돈을 갚지 않겠다고 하니 우리가 독촉해야지, 어쩌겠어.”말하며 남자는 신표의 머리를 끄집어 올렸다. 촥, 하는 물소리와 함께 신표가 물속에서 나왔다. “자, 누나랑 좀 더 얘기해.”잔뜩 겁을 먹은 신표는 똑바로 서 있지 조차 못했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파들파들 떨며 눈물 콧물 쏙 빼며 소리쳤다. “누나! 얼른 이 분들한테 돈 보내줘. 정말 날 죽일 거야...”신미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 빚 전부 청산했다며? 왜 아직도 빚이 20억이나 더 있는 거야. 내가 며칠 전에 너에게 보내준 돈이60억은 되잖아. 그 돈은?”신표가 우물쭈물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신미정의 심장이 저도 모르게 쿵, 내려앉았다. 잠시 후, 그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빌어먹을! 너 또 도박하러 갔어?”신
‘이 년이!’신미정을 깔린느로 한현진을 찾아갔다. 한현진이 그녀를 피하며 만나주지 않았다. 신미정이 아무리 지금은 볼품없는 형편이 되었다고 해도 명문가 출신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행패를 부리는 격 떨어지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러니 한현진이 만나주지 않자 밖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기다리던 한현진은 나오지 않았고 신미정은 송가람과 서해금을 먼저 마주쳤다. 신미정을 다시 마주한 서해금에게는 열성적이던 예전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담담한 말투로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오히려 송가람이 반갑게 신미정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 향수 보러 오셨어요?”신미정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현진이에게 볼 이리 있어서 왔어. 가람아, 날 현진이에게 데려다줄 수 있을까?”송가람이 막 입을 열려는 데 앞에 있던 프런트 직원이 말했다. “송 팀장님, 한 대표님께서 오늘을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어요.”그 말의 의미는 너무도 분명했다. 한현진은 신미정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일부러 만나지 않는 것이었다. 신미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분노를 참으며 송가람에게 부탁했다. “가람아, 아줌마 좀 도와줘. 현진이에게 급한 볼 일이 있어서 그래.”신미정의 편을 들어주려는 송가람을 서해금이 불렀다. “가람아, 가야지.”그러나 송가람은 강한서의 어머니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엄마, 아주머니께서 아직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잖아요.”서해금은 덤덤하게 말했다. “기다리는 건 그쪽 사정이야.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지 마.”“하지만—”서해금이 송가람의 말을 잘랐다. “일이 있으면 본인 아들에게 부탁할 거야. 만약 아들도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신미정을 대하는 강한서의 태도야. 네가 쓸데없는 일에 끼어든다고 강한서가 너에게 고마워하지 않아. 오히려
하지만 신미정은 신표의 도박 빚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회사의 생산 라인에 문제 생겨 주문이 밀린 상태라 자금이 부족하고 얘기했을 뿐이었다. 한현진의 치맛바람에 눈이 먼 강한서는 자신을 도와주려 하지 않았고 더는 갈 곳 없는 막다른 골목이라 어쩔 수 없이 한현진에게 부탁하러 온 것이라고 말했다. 신미정은 강한서에 대한 송가람의 마음이 꽤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현진과 도무지 연락이 닿지 않는 지금, 신미정에게 송가람은 가장 큰 희망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절대 송가람에게 한현진이 임신한 사실을 얘기할 수 없었다. 만약 송가람이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자신과 강한서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을 도와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미정이 송가람을 꼭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며느리로 삼고 싶었던 사람은 언제나 너였어. 넌 한서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잖니. 만약 네가 그때 치료 때문에 해외로 출국하지만 않았다면 한현진에게 기회조차 없었을 거야. 한서가 걔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난 강력하게 반대했었어. 그 몇 년 동안 나와 갈등을 빚었던 걸 마음에 담아뒀다가 송씨 가문 딸로 신분 상승을 하니까 내가 하는 모든 일에 태클을 걸고 있는 거야. 나는 이제 이 나이가 되었으니 난 어떻게 되는 상관없어. 난 그저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았으면 하는 것뿐이야.”“하지만 신표는 한서 외삼촌이잖니. 한서에게 외삼촌은 신표 한 명 뿐이야. 만약 신표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 일로 한서 약점을 잡으려고 할 거야. 가람아, 현진이는 어떻게 이렇게 모질 수가 있니. 한서에게 돕지 말라고 바람을 넣다니, 이건 한서에게 인정머리 없다는 꼬리표를 달아주는 것과 다름이 없잖아.”말하며 신미정을 다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송가람이 신미정에게 휴지를 건넸다. “현진 씨 정말 너무 하네요! 아주머니, 울지 마세요. 제가 한서 오빠에게 전화해 볼게요. 제가 아주머니 대신 한서 오빠에게 상황을 잘 설명할게
신미정은 눈시울을 붉히며 송가람의 손을 잡았다. “가람아, 우리 가람이. 아줌마가 너무 고마워. 정말 너무너무 고마워. 아줌마가 약속할게. 클라이언트가 계약금만 보내주면 제일 먼저 네 돈부터 갚을게.”송가람이 손을 내저으며 쑥쓰럽다는 듯 말했다. “아주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전 진심으로 아주머니와 한서 오빠를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주머니 일인데 제가 어떻게 손 놓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겠어요. 제가 지금 은행에 연락해서 돈 보내드릴게요. 일단 삼촌부터 데려와요.”신미정이 감사의 인사를 아끼지 않으며 한참 동안 아부를 떨었다. 송가람 수중에도 유동자금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만약 평소라면 송민준에게 손을 벌렸겠지만 이번엔 신미정과 관련된 일이었다. 송민준은 줄곧 당시 강씨 가문이 한현진을 하대한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만약 이 돈이 신미정을 위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절대 빌려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서해금에게 부탁하는 것은 더 안 될 일이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자신과 강한서가 인연을 끊길 바라는 사람이었으니까. 이리저리 생각하던 송가람은 자기 명의로 된 별장을 담보로 잡았다. 그녀는 돈을 받자마자 바로 신미정에게 보냈다. 그 소식을 들은 한현진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한현진을 발을 들어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강한서를 툭, 찼다. “감동이야? 40억이야. 자그마치 40억을 바로 보냈어. 집도 필요 없나 봐. 가람 동생이 너한테만은 정말 일편단심인가 봐.”강한서는 한현진의 발을 끌어 자기 허벅지 위에 올리더니 책을 넘기며 대답했다. “너도 50억 줬잖아. 네 마음이 걔보다 더 커.”한현진이 흥, 콧방귀를 꼈다. “잘난 척 좀 하지마. 난 공짜로 준 거 아니야. 내가 준 건 전부 네 삼촌에게서 따왔어. 그쪽은 진짜 줘버렸잖아. 그냥 널 봐서 준 건데, 조금도 감동적이지 않아?”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감동 받길 원해?”한현진이 시선을 피했다. “그냥 물어본 거야.”한현진은 강한서를 떠보고 싶
납치 사건으로 다쳤었던 그 한 달 동안, 강한서는 그 점을 깨닫게 되었다. 다만 그는 송가람의 착각을 바로잡은 적이 없었다. 강한서는 호불호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송가람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까지도 틀린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지 송가람이 원하는 강한서의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욱이 과연 누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금지 약물을 투여할 수 있을까?이토록 각박하고 이기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의 비열한 소유욕에 불과할 뿐이었다. 강한서는 기억이 돌아온 후로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였다. 그는 중상을 입고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었던 그 당시를 떠올렸다. 강한서의 등에 난 상처는 몇 번이고 곪아 찢어졌었다. 매번 간호사가 처치를 도와줄 때면 송가람은 항상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미간을 찌푸렸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혐오였다. 그 당시의 강한서는 한현진을 기억하지 못했다. 송가람은 그에게 자신을 애인이라고 속였다. 비록 강한서는 그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송가람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애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의 상처를 보고도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비록 그 기억은 나중에 최면사에 의해 지워졌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강한서의 추측에 더욱 힘을 실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한현진은 아무리 심하게 다퉜을 때에도 강한서가 아프기만 하면 절대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송가람이 좋아하는 건 고귀하고 자신감 있고 고고하면서 아우라가 빛나는 강한서였다. 그러나 한현진이 좋아하는 강한서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의 장점을 사랑하고 또 그의 결점도 포용할 수 있었다. 강한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한현진의 모습을 봐왔었다. 또 가슴 깊이 그녀의 사랑을 느꼈다. 그랬기에 송가람의 거짓된 사랑에 쉽게 속을 리가 없었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볼에 입 맞추며 나지막이 말했다. “현진아, 나에겐 마음이 하나밖에 없어. 그래서 너밖에
“꼭 봐야 해?”한현진이 말했다. “안 봐도 돼. 하지만 보면 더 행복할 것 같아.”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말했다. “알겠어. 잠깐만 기다려.”말하며 강한서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그런 강한서를 보는 한현진은 기분이 좋았다. 한현진이 아는 강한서라면 절대 그녀가 다른 사람을 보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보여줄 것이 분명했다. 강한서는 꿍꿍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한현진에게 애정공세를 퍼붓던 당시, 강한서는 그녀 곁에 있기 위해 클라우드 아파트로 이사를 왔었다. 그리고 한현진을 유혹하기 위해 가슴이 깊이 파인 민소매에 속옷은 최대한 달라붙는 것으로 입고 다녔다. 퇴근 후엔 헬스장에서 운동까지 했다. 강한서는 행여나 한현진을 유혹하는데 실패할까, 옷을 입는 것에 온갖 꼼수를 다 부렸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임신을 알게 된 후, 강한서는 곧바로 모든 잠옷을 긴옷, 긴바지로 바꿔버렸다. 이번엔 최대한 정직하게, 가릴 수 있는 모든 곳을 가렸다. 잠옷의 단추를 머리 끝까지 잠궈버릴 기세였다. 한현진은 몇 번이나 강한서에게 물었었다. “집이 추워? 왜 이렇게 많이 입어?”처음엔 한현진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임신한 상황이니 그런 생각을 할리가 없었다. 하지만 매일 꽁꽁 싸매고 있는 강한서의 모습이 한현진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강한서의 옷을 벗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옷 속의 풍경이 궁금했다. ‘쇼츠를 못 보게 하니 집에 있는걸 보는 건 괜찮잖아?’하지만 집에 계신 이 분은 갑자기 고상한 척 굴기 시작했다. 못 보게 하면 할수록 더 보고 싶어졌다. 일 분 일 초, 시간이 흘러갔다. 20분이 지났지만 강한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던 한현진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옷 하나 벗는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야?’‘그냥 훌렁 벗으면 안 돼?’한현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손잡이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한현진 앞에 샤워 가운을 입은 강한서가 나타났다. 반짝반짝 눈을 빛내
귓가에는 야릇한 음악이 울려퍼졌고 눈앞에는 해부학 교실이나 병원에서 사용할 것 같은 인체 근육 해부도가 펼쳐졌다. 그 그림을 보고 있던 한현진은 마치 섹시 댄스를 추던 인플루언서들이 해부도의 빨간 근윤으로 변한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하나 같이 기이한 모습으로 허리는 흔들고 골반을 튕기는 모습처럼 보였다. 한현진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녀는 스크린에 비춰진 그림을 가리키며 강한서에게 물었다. “저거 뭐야?”강한서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인체 근육 해부도야. 모든 사람의 피부 안쪽은 전부 이렇게 생겼어. 우린 현상을 통해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해. 본질을 알면 외적인 건 그저 흘러가는 구름처럼 느껴질 거야.”‘본질 같은 소리하네!’한현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이며 다양한 표정을 짓던 한현진이 결국 벌떡 몸을 일으켜 굳은 얼굴로 밖으로 나섰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뒤따라갔다. “어디가?”한현진이 말했다. “오빠한테 갈 거야.”강한서가 어리둥절해졌다. “오빠 회사에서 이번에 남자 신인 배우를 뽑았거든. 하나 같이 잘생기고 복근도 탄탄해.”한현진이 말하며 스크린 속 해부도를 가리켰다. “네가 말한 것처럼 현상을 통해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지 지금 확인하러 가야겠어.”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그는 손을 들어 문 손잡이를 돌리는 한현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가 딱딱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못 가.”한현진이 눈섭을 씰룩였다. “질투하는 거야?”강한서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내가 질투해야 하지 않겠어?”한현진이 가짜 미소를 지었다. “질투할게 뭐가 있다고 그래? 네가 그랬잖아. 모든 사람은 피부 아래는 전부 똑같다고. 외적인 건 그저 흘러가는 구름 같은 거라고 말이야. 난 본질을 보러가는 것뿐이야. 쪼잔하게 굴지마.”말하며 서재를 나가려고 하자 강한서가 한현진의 길을 막으며 이를 악물었다. “네가 다른 남자 구경하러 가겠다는데 쪼잔하게 굴지 말라고?”한현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서가 손을 들어 어깨 뒤를 가리켰다. “등 운동도 했어. 하지만 복근처럼 선명하지는 않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였다. “봐봐.”“그래.”대답한 강한서가 시선을 내리더니 손을 들어 샤워 가운을 어깨에서 벗어내렸다. 막 몸을 돌려 아내에게 자신의 헬스 효과를 자랑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밖에서 서재 문을 열었다. 한현진의 손은 머리보다 빨랐다. 그녀는 홱 강한서를 끌어와 품에 안았고 온몸으로 그의 정조를 지켰다. 문이 비스듬히 열리고 작은 머리 하나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양갈래 머리를 땋아올린 은서가 눈을 깜박였다. “삼촌, 이모. 할머니가 멸치 국수 들실 건지 물어보래요.”문을 등진 한현진은 안고 있는 강한서를 놓을 수가 없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대답하라는 의미였다. 강한서가 말했다. “우린 둘이서 한 그릇만 먹으면 될 것 같아.”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던 은서가 나지막이 물었다. “한서 삼촌, 지금 구애 중이예요?”강한서가 순간 멍해졌다. “뭐라고?”은서가 비밀스레 말했다. “햇살반 도 선생님이 우리반 선생님한테 계속 근육 자랑을 했는데 꽃잎반 선생님이 도 서생님이 구애하는 거라고 했어요. 삼촌, 삼촌도 구애 중이예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구애가 뭔지는 알아?”은서가 조그만 턱을 치켜올렸다. “당연히 알죠. 구애는 상대방과 사귀고 싶고 후대를 번식하고 싶은 거잖아요. 삼촌, 삼촌이랑 이모는 언제 아기를 번식할 거예요?”강한서는 대답 대신 문을 열어 은서를 서재에서 쫓아냈다. 다음 날, 회사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한현진은 늘 그렇듯 주세은 옆에 앉았다. 주세은이 회사에 온지 이미 며칠이 지났다. 지금은 조향팀의 A 구역 3팀에 배치되었다. 입사 전 송민준은 특별히 한현진에게 전화해 당부했었다. 주세은이 밥은 잘 먹는지만 구내식당에서 봐달라는 것이었다.주세은은 내성적이고 인간관계를 잘 처리할 줄 몰랐지만 착한 아이라 사고를 칠 일은 없었다. 만약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다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
시선을 거둔 서해금이 물었다. “아래층은 불 켜졌어요?”누군가 대답했다. “네. 우리 층만 정전인 것 같아요.”머리 위의 CCTV를 확인한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사람 불러서 확인해 보라고 해요. 다른 분들은 모두 자리도 돌아가요.”말하며 서해금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돌아가. 내가 보내 준 자료는 꼭 봐. 검사할 거야.”송가람이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애교 부렸다. “알겠어, 엄마.”모든 사람이 자리로 돌아가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서해금이 입을 꾹 다물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계단엔 창문이 없었다. 복도에선 은은하게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선세등이 켜지지 않아 유난히 어두웠다. 비상계단 복도로 들어선 서해금은 계단 위에 서서 벽에 기대어 담배를 쥐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비상계단의 문을 닫으며 목소리를 낮춘 채 호통 쳤다. “여긴 회사야. 여기서 이런 짓을 하다니, 미친 거야?”“내가 정전 안 시켜서 CCTV에 찍혔으면 네가 이 상황을 해명할 수는 있고?”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상대방의 말투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여기 들어올 땐, 내 의견을 묻긴 했어?”남자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그저 우리 딸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화가 치민 서해금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음에도 분노를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다. “내가 동영상 보내줬잖아. 사진도 보내줬잖아. 지금 당신이 어떤 신분인지, 당신이 몰라서 이래?”“사진이나 동영상은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 목소리를 듣고 싶고,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게 너무 한 거야?”“이게 너무한게 아니면 뭐야? 지금 당신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신분인지 몰라?”스산하게 비추는 불빛에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해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움찔 떠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서해금. 네가 원하던 걸 전부 이루니까 이제 난 필요 없다 이거야?
송가람의 목소리가 비통함에 잠기기 시작했다. “엄마, 설마 아빠 아직도 나한테 화 난 거야?”송가람이 이윤하에게 맞아 입원했을 당시 송병천은 매일 같이 병원에 왔었다. 하지만 송가람을 마주한 송병천은 어린 시절 한없이 다정다감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색함과 냉담함만이 더해졌다. 신미정에게 속은 건 결국 송가람이 아직도 강한서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송병천이 그런 송가람의 마음을 눈치 채고 이미 한 번의 주의를 주었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으니 송병천은 그녀에게 철저히 실망했을 것이다. 강한서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송가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모든 잘못은 한현진이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20여년이 지난 일인데, 왜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은 걸까? 왜 굳이 돌아와 그녀의 아빠와 오빠를 빼앗으려 하는 걸까?한현진이 없던 송가람의 네 식구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가족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이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 인해 부모님은 전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오빠의 마음은 완전히 친동생에게 기울었다. 아빠는 더 이상 전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 엄마는 그저 지분과 재산 생각으로 가득 차 전보다 더 계산적으로 굴었다. 그 혈연관계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한현진이 등장한 후 그녀의 가족을 갈라놓았다. 송가람은 반항이라도 하듯 강한서를 좋아하면서도 송병천과 송민준이 전처럼 예뻐해 주길 발랐다. 서해금이 시선을 올려 송가람을 바라보았다. “네가 한현진에게서 강한서를 빼앗으려고 결정했을 때부터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네 아빠가 마음을 대해 널 20여년 간 키워주고 진심으로 예뻐한 건 사실이지만 한현진은 친딸이야. 게다가 간절히 바랐었지만 결국 잃어버렸던 아이야. 그런 애가 유씨 가문에서 그런 치욕을 당하며 살아왔어. 네 아빠가 조금만 조사하면 한현진이 어떤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금방 알 수 있어. 그럼 네 아빠가 모든 걸 걸고 한현진에게 보상해주려고 하지 않겠어?”“피로연에서 그저 조금 떠봤을 뿐인데 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