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정은 눈시울을 붉히며 송가람의 손을 잡았다. “가람아, 우리 가람이. 아줌마가 너무 고마워. 정말 너무너무 고마워. 아줌마가 약속할게. 클라이언트가 계약금만 보내주면 제일 먼저 네 돈부터 갚을게.”송가람이 손을 내저으며 쑥쓰럽다는 듯 말했다. “아주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전 진심으로 아주머니와 한서 오빠를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주머니 일인데 제가 어떻게 손 놓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겠어요. 제가 지금 은행에 연락해서 돈 보내드릴게요. 일단 삼촌부터 데려와요.”신미정이 감사의 인사를 아끼지 않으며 한참 동안 아부를 떨었다. 송가람 수중에도 유동자금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만약 평소라면 송민준에게 손을 벌렸겠지만 이번엔 신미정과 관련된 일이었다. 송민준은 줄곧 당시 강씨 가문이 한현진을 하대한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만약 이 돈이 신미정을 위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절대 빌려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서해금에게 부탁하는 것은 더 안 될 일이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자신과 강한서가 인연을 끊길 바라는 사람이었으니까. 이리저리 생각하던 송가람은 자기 명의로 된 별장을 담보로 잡았다. 그녀는 돈을 받자마자 바로 신미정에게 보냈다. 그 소식을 들은 한현진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한현진을 발을 들어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강한서를 툭, 찼다. “감동이야? 40억이야. 자그마치 40억을 바로 보냈어. 집도 필요 없나 봐. 가람 동생이 너한테만은 정말 일편단심인가 봐.”강한서는 한현진의 발을 끌어 자기 허벅지 위에 올리더니 책을 넘기며 대답했다. “너도 50억 줬잖아. 네 마음이 걔보다 더 커.”한현진이 흥, 콧방귀를 꼈다. “잘난 척 좀 하지마. 난 공짜로 준 거 아니야. 내가 준 건 전부 네 삼촌에게서 따왔어. 그쪽은 진짜 줘버렸잖아. 그냥 널 봐서 준 건데, 조금도 감동적이지 않아?”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감동 받길 원해?”한현진이 시선을 피했다. “그냥 물어본 거야.”한현진은 강한서를 떠보고 싶
납치 사건으로 다쳤었던 그 한 달 동안, 강한서는 그 점을 깨닫게 되었다. 다만 그는 송가람의 착각을 바로잡은 적이 없었다. 강한서는 호불호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송가람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까지도 틀린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지 송가람이 원하는 강한서의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욱이 과연 누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금지 약물을 투여할 수 있을까?이토록 각박하고 이기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의 비열한 소유욕에 불과할 뿐이었다. 강한서는 기억이 돌아온 후로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였다. 그는 중상을 입고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었던 그 당시를 떠올렸다. 강한서의 등에 난 상처는 몇 번이고 곪아 찢어졌었다. 매번 간호사가 처치를 도와줄 때면 송가람은 항상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미간을 찌푸렸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혐오였다. 그 당시의 강한서는 한현진을 기억하지 못했다. 송가람은 그에게 자신을 애인이라고 속였다. 비록 강한서는 그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송가람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애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의 상처를 보고도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비록 그 기억은 나중에 최면사에 의해 지워졌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강한서의 추측에 더욱 힘을 실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한현진은 아무리 심하게 다퉜을 때에도 강한서가 아프기만 하면 절대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송가람이 좋아하는 건 고귀하고 자신감 있고 고고하면서 아우라가 빛나는 강한서였다. 그러나 한현진이 좋아하는 강한서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의 장점을 사랑하고 또 그의 결점도 포용할 수 있었다. 강한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한현진의 모습을 봐왔었다. 또 가슴 깊이 그녀의 사랑을 느꼈다. 그랬기에 송가람의 거짓된 사랑에 쉽게 속을 리가 없었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볼에 입 맞추며 나지막이 말했다. “현진아, 나에겐 마음이 하나밖에 없어. 그래서 너밖에
“꼭 봐야 해?”한현진이 말했다. “안 봐도 돼. 하지만 보면 더 행복할 것 같아.”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말했다. “알겠어. 잠깐만 기다려.”말하며 강한서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그런 강한서를 보는 한현진은 기분이 좋았다. 한현진이 아는 강한서라면 절대 그녀가 다른 사람을 보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보여줄 것이 분명했다. 강한서는 꿍꿍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한현진에게 애정공세를 퍼붓던 당시, 강한서는 그녀 곁에 있기 위해 클라우드 아파트로 이사를 왔었다. 그리고 한현진을 유혹하기 위해 가슴이 깊이 파인 민소매에 속옷은 최대한 달라붙는 것으로 입고 다녔다. 퇴근 후엔 헬스장에서 운동까지 했다. 강한서는 행여나 한현진을 유혹하는데 실패할까, 옷을 입는 것에 온갖 꼼수를 다 부렸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임신을 알게 된 후, 강한서는 곧바로 모든 잠옷을 긴옷, 긴바지로 바꿔버렸다. 이번엔 최대한 정직하게, 가릴 수 있는 모든 곳을 가렸다. 잠옷의 단추를 머리 끝까지 잠궈버릴 기세였다. 한현진은 몇 번이나 강한서에게 물었었다. “집이 추워? 왜 이렇게 많이 입어?”처음엔 한현진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임신한 상황이니 그런 생각을 할리가 없었다. 하지만 매일 꽁꽁 싸매고 있는 강한서의 모습이 한현진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강한서의 옷을 벗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옷 속의 풍경이 궁금했다. ‘쇼츠를 못 보게 하니 집에 있는걸 보는 건 괜찮잖아?’하지만 집에 계신 이 분은 갑자기 고상한 척 굴기 시작했다. 못 보게 하면 할수록 더 보고 싶어졌다. 일 분 일 초, 시간이 흘러갔다. 20분이 지났지만 강한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던 한현진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옷 하나 벗는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야?’‘그냥 훌렁 벗으면 안 돼?’한현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손잡이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한현진 앞에 샤워 가운을 입은 강한서가 나타났다. 반짝반짝 눈을 빛내
귓가에는 야릇한 음악이 울려퍼졌고 눈앞에는 해부학 교실이나 병원에서 사용할 것 같은 인체 근육 해부도가 펼쳐졌다. 그 그림을 보고 있던 한현진은 마치 섹시 댄스를 추던 인플루언서들이 해부도의 빨간 근윤으로 변한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하나 같이 기이한 모습으로 허리는 흔들고 골반을 튕기는 모습처럼 보였다. 한현진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녀는 스크린에 비춰진 그림을 가리키며 강한서에게 물었다. “저거 뭐야?”강한서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인체 근육 해부도야. 모든 사람의 피부 안쪽은 전부 이렇게 생겼어. 우린 현상을 통해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해. 본질을 알면 외적인 건 그저 흘러가는 구름처럼 느껴질 거야.”‘본질 같은 소리하네!’한현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이며 다양한 표정을 짓던 한현진이 결국 벌떡 몸을 일으켜 굳은 얼굴로 밖으로 나섰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뒤따라갔다. “어디가?”한현진이 말했다. “오빠한테 갈 거야.”강한서가 어리둥절해졌다. “오빠 회사에서 이번에 남자 신인 배우를 뽑았거든. 하나 같이 잘생기고 복근도 탄탄해.”한현진이 말하며 스크린 속 해부도를 가리켰다. “네가 말한 것처럼 현상을 통해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지 지금 확인하러 가야겠어.”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그는 손을 들어 문 손잡이를 돌리는 한현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가 딱딱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못 가.”한현진이 눈섭을 씰룩였다. “질투하는 거야?”강한서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내가 질투해야 하지 않겠어?”한현진이 가짜 미소를 지었다. “질투할게 뭐가 있다고 그래? 네가 그랬잖아. 모든 사람은 피부 아래는 전부 똑같다고. 외적인 건 그저 흘러가는 구름 같은 거라고 말이야. 난 본질을 보러가는 것뿐이야. 쪼잔하게 굴지마.”말하며 서재를 나가려고 하자 강한서가 한현진의 길을 막으며 이를 악물었다. “네가 다른 남자 구경하러 가겠다는데 쪼잔하게 굴지 말라고?”한현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서가 손을 들어 어깨 뒤를 가리켰다. “등 운동도 했어. 하지만 복근처럼 선명하지는 않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였다. “봐봐.”“그래.”대답한 강한서가 시선을 내리더니 손을 들어 샤워 가운을 어깨에서 벗어내렸다. 막 몸을 돌려 아내에게 자신의 헬스 효과를 자랑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밖에서 서재 문을 열었다. 한현진의 손은 머리보다 빨랐다. 그녀는 홱 강한서를 끌어와 품에 안았고 온몸으로 그의 정조를 지켰다. 문이 비스듬히 열리고 작은 머리 하나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양갈래 머리를 땋아올린 은서가 눈을 깜박였다. “삼촌, 이모. 할머니가 멸치 국수 들실 건지 물어보래요.”문을 등진 한현진은 안고 있는 강한서를 놓을 수가 없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대답하라는 의미였다. 강한서가 말했다. “우린 둘이서 한 그릇만 먹으면 될 것 같아.”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던 은서가 나지막이 물었다. “한서 삼촌, 지금 구애 중이예요?”강한서가 순간 멍해졌다. “뭐라고?”은서가 비밀스레 말했다. “햇살반 도 선생님이 우리반 선생님한테 계속 근육 자랑을 했는데 꽃잎반 선생님이 도 서생님이 구애하는 거라고 했어요. 삼촌, 삼촌도 구애 중이예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구애가 뭔지는 알아?”은서가 조그만 턱을 치켜올렸다. “당연히 알죠. 구애는 상대방과 사귀고 싶고 후대를 번식하고 싶은 거잖아요. 삼촌, 삼촌이랑 이모는 언제 아기를 번식할 거예요?”강한서는 대답 대신 문을 열어 은서를 서재에서 쫓아냈다. 다음 날, 회사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한현진은 늘 그렇듯 주세은 옆에 앉았다. 주세은이 회사에 온지 이미 며칠이 지났다. 지금은 조향팀의 A 구역 3팀에 배치되었다. 입사 전 송민준은 특별히 한현진에게 전화해 당부했었다. 주세은이 밥은 잘 먹는지만 구내식당에서 봐달라는 것이었다.주세은은 내성적이고 인간관계를 잘 처리할 줄 몰랐지만 착한 아이라 사고를 칠 일은 없었다. 만약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다
한현진이 송가람을 힐끔 쳐다보고는 간단하게 인사를 건네고 고개를 숙여 식사를 마저했다. 송가람이 수저를 들며 주세은과 대화를 나누었다. “은이야, 팀장님에게 들었어. 어제 팀장이 맡겨주신 일 안 했다며. 어떻게 된 거야?”주세은이 말했다. “팀장님이 맡기신 업무는 다 끝냈어요. 하지만 그 업무는 제 담당이 아니었어요.”송가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은이야, 이제 막 입사한 거라 너에게 맡긴 사소한 일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넌 면접도 건너뛰고 입사한 거잖아. 널 입사시킨 것 자체가 이미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어. 회사엔 보는 눈도 많은데, 할 일은 해야지. 만약 너무 어려운 일인 것 같으면 내가 너희 팀장님에게 간단한 업무부터 맡기라고 할게. 하지만 아무 말 없이 안 하면 안 돼. 네가 그렇게 행동하면 너희 팀장님이 다른 팀원은 어떻게 관리하겠어.”입술을 짓이긴 주세은이 다시 한 번 말했다. “팀장님은 저에게 그 양식을 처리하라고 맡기신 적 없어요. 맡겨주신 업무는 전부 처리했어요.”미간을 찌푸린 송가람이 손가락을 구부려 테이블을 두 번 톡톡, 두드렸다.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은이야, 너 예전엔 거짓말 안 했잖아.”손에 힘이 풀린 주세은의 젓가락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쾅—한현진이 힘을 실어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둔탁한 소리에 송가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눈빛에 불쾌함이 가득했다. 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퇴근 시간까지도 송가람 씨 이런 헛소리를 듣고 있어야겠어요? 야근 수당은 주셨어요?”송가람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전 그저 은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예요. 왜 그렇게 공격적으로 얘기하는 거죠? 대표님이 추천한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은 혼내지도 못한다는 거예요?”송가람의 목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다. 그 덕에 구내 식당에 있던 직원들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어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그게 대화하는
이시연이 한숨을 내뱉었다. “대표님은 모르시겠지만 조향팀은 보이는 것처럼 화목하진 않아요.”이시연은 조향팀 직원의 임금은 기본급과 직책급을 제외하면 성과급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했다. 보너스는 매 팀의 매 달 업무량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얘기한다면 보너스는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 많이 지급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매 팀의 실력과 수준이 천차만별이라 효율이 높은 팀이 완성한 업무량이 더 많았지만 그들이 받은 성과급은 다른 팀의 직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 서해금처럼 명석한 사람이 이런 n/1의 폐단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이런 임금 체제를 고집하는 이유는 사실 조향팀의 몇 명 직원이 이사회 고위 임원의 자녀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출근도 제대로 하지 않고 월급만 가져가는 고스트에 불과했다. 다만 깔린느 모든 부서 중 조향팀의 연봉이 제일 높은 편이라 이곳에 배치되었을 뿐이었다. 누군가 공짜로 월급을 받아가고 있으니 다른 누군가는 더 열심히 해야만 했다. 하지만 더 많은 업무를 본다고 해서 성과급이 더 많아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조향팀의 적지 않은 직원들은 이미 이런 임금 체제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불만은 송가람이나 고위층 임원의 자녀들 앞에서는 감히 티를 낼 수 없었고 결국 아무런 백도 없는 주세은이 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 주세은의 아버지는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고 송씨 가문에서 가장을 잃은 유가족을 가엾게 여겨 갓 졸업한 주세은을 깔린느에 입사시켜 취직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는 것은 조향팀 전원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경력도 없이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월급을 받는데다 “은혜를 베풀었다”는 빌미로 입사한 것이니 주세은은 자연스레 왕따의 대상이 되었다. 팀 회식에도 주세은을 부르지 않았고 그녀에게 배정된 업무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잡일뿐이었다. 조향팀의 핵심 업무에서는 늘 배제되었고 맡은 업무를 아무리 완벽하게 완성해도 늘 이런저런 트집을
탕비실에서 나온 한현진은 얼마 못가 걸음을 멈추었다. 송가람이 복도 코너에 조용히 서서 한현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현진 씨,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요. 현진 씨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에게 어머니와 관계를 끊으라고 부추기는 거예요?”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런 말해도 될지 모르겠을 땐 그냥 닥쳐요! 언니가 뭘 안다고 그래요? 무슨 자격으로 저에게 뭐라고 하는 거죠? 고작 그 여자를 대신해 돈 좀 갚아줬다고 이러는 거예요?”송가람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아주머니께서 어제 하루 종일 현진 씨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안 만나줬다는 거네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가람 언니가 그렇게 쿨하게 돈을 빌려줄 거라고는 저도 생각지 못했네요.”송가람이 멸시하는 듯한 눈빛으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전 현진 씨처럼 그렇게 보고도 못 본 척 지나치는 냉혈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말끝마다 한서 오빠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오빠 어머니에게는 그렇게 잔인하게 굴다니, 그게 좋아하는 거예요?”한현진이 피식, 소리 내 웃었다. “보다시피 전 언니처럼 그렇게 위대한 사람은 아녜요. 전 강한서를 좋아하지만 사랑 때문에 가족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강한서 삼촌의 도박 빚을 갚아줄 만큼 이성을 잃은 건 아니거든요. 강한서도 신경 쓰지 않는 일을 제가 왜요?”그 말에 송가람이 멈칫 했다. “도박 빚이라뇨.”한현진이 일부러 놀란 척 연기했다. “그 여자가 얘기 안 했어요?”“무슨 얘기요?”불안해진 송가람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얘기해.”한현진이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궁금하면 직접 알아봐요. 하지만 언니는 언니의 한서 오빠를 그렇게 좋아하니까 그런 것쯤은 당연히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말을 마친 한현진은 몸을 돌려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송가람을 혼자 그 자리에 내버려 둔 채 자리를 벗어났다. 신표의 도박 중독은 재벌가에선 비밀도 아니었다. 송
“넌 원래 은서한테 엄격하게 굴었잖아. 네가 나쁜 사람 역할을 하는 건 네 이미지에도 어울려. 난 평소에 은서한테 너무 따뜻하게 대해줘서 지금 엄하게 얘기해도 내 말은 안 믿을 거야. 그러니까 나쁜 사람은 역시 네가 해야 해. 한 번 더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강한서가 대답할 새도 없이 등 뒤로 갑자기 은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모~”“응.”얼른 대답한 한현진이 몸을 돌리자 은서가 동그랗고 큰 눈을 반짝이며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두 분 연애하시는데 방해한 거예요?”한현진: ...“그건 아닌데...”“그럼 뭐하고 계셨어요?”한현진이 강한서에게 얼른 시작하라며 눈짓을 보냈다. 강한서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현진을 배신했다. “은서야, 현진 이모가 은서한테 할 얘기가 있대.”한현진: ...은서가 한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가 눈빛으로 할 얘기가 뭐냐며 묻고 있었다. 한현진은 속으로 강한서를 의리도 없는 놈이라며 욕을 지껄였다. 단순하고 맑은 은서의 눈을 마주한 한현진은 그 어떤 훈육의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의 속도 모르고 마음 독하게 먹으라며 뒤에서 슬며시 한현진의 허리를 다독였다. 입술을 달싹인 한현진은 계획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그게... 사실은 별 거 아냐. 저녁에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했어.”강한서:...은서가 눈웃음을 지었다. “수제비요! 할머니가 이따가 만드는 법 배워주신다고 하셨어요. 이모가 새우 수제비를 제일 좋아한다면서요. 제가 배워서 만들어드릴게요.”마음이 약해진 한현진은 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 맞다. 잠깐만 기다려요.”은서가 말하고 총총 달려갔다. 어리둥절한 한현진을 뒤로 한 채 잠시 후, 은서가 저금통을 안고 돌아왔다. 아이는 작은 돼지 저금통을 한현진 앞으로 들어 올리며 빨간 얼굴로 말했다. “현진 이모. 혹시 이 돈...”주머니에서 돈다발 하나를 꺼내 한현진에게 꺼낸 은서가
의사로서의 기본적인 도덕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부하 직원을 잘 대할 리가 없었다. 돈만 충분히 준다면 황 닥터의 죄증을 대신 비행기에 실어줄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황 닥터는 외국인이었기에 이 곳에서 불법을 저지른다고 해도 결국 본국으로 송환되어 벌의 제재를 받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황 닥터를 처단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황 닥터의 입국이 금지 당한다면 송가람은 다른 방법으로 약을 구매할 것이다. 그때가 바로 송가람을 일망타진할 좋은 기회였다. 한현진이 알아차렸다는 듯 말했다. “결국은 돈지X로 해결한 거네.”멈칫하던 강한서가 갑자기 말했다. “너 방금 싸울 때 욕했지?”한현진이 눈을 깜박였다. “아닐걸.”“했어!”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았다. “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잊었어?”‘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데?’‘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해주고, 또 뭐가 있더라? 기억이 안 나네.’어제 들었던 태교 수업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한현진은 수면으로 채웠다. 강한서는 본인의 뱉은 말을 지켜 거금을 들여 태교 선생님을 고용해 1 대 1로 집에서 한현진이 수업을 받도록 했다. 유난히 나긋하고 부드러운 선생님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임산부와 아이들을 상대하는 본인의 직업과 찰떡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목소리에 졸음이 솔솔 쏟아졌다. 수업하는 동안 한현진은 졸음이 몰려와 몽롱한 정신 상태를 유지했다. 학창시절 제일 싫어하는 수학 시간에도 이렇게 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노트를 정리했다. 한현진이 하품을 하며 강한서에게 물었다. “기억력도 좋으면서 노트도 작성하는 거야?”그때의 강한서가 뭐라고 했더라?“아무리 좋은 기억력도 작성된 기록보다는 못한 법이니까.”그 한 마디가 태교 수업 중 유일하게 한현진의 기억에 남은 말이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전부 한쪽 귀로 들어가 다른 한쪽으로 흘러나간 탓에 단 한 글자에 머리에 남지 않았
막장 소설을 거부하던 강한서는 강박적으로 소설을 듣기 시작해 결국 소설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니, 왜 막장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하나 같이 멍청하거나 무지하게 구는 거야? 게다가 상남자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틈만 나면 여자 주인공에게 소리나 지르면서, 왜 그러는 거야?”“남자 주인공 미친 거 아냐? 억지로 여자 주인공이 신장 기부를 하게 하다니. 조직 폭력배야?”“이쪽 세계에서는 신고를 하면 판결이라도 받아?”“대체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 여자 주인공이 밀친 거라는 서브 여주인공 말을 믿어? CCTV를 찾아보는 건 불법인가 보지?”“현진아, 지금 나 미안하라고 들려주는 거야?”“난 못 해. 이 소설에 나오는 인간들은 전부 미친 거 같아. 대체 여자 주인공은 저런 남자를 왜 좋아하는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미쳤든 아니든, 소설처럼만 하면 돼. 순진한 척 하는 여우는 자기를 감싸주는 남자에겐 껌뻑 죽는 법이니까.”강한서는 전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머리는 몸보다 성실했다. 일부러 배우지 않아도 그의 머리는 이미 모든 것을 저장했다. 막장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대사를 완벽히 재현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표정은 여전히 어색했지만 다행히 송가람은 표정까지는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다. 아니라면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송가람을 보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는 강한서의 모습을 들켜버렸을 것이다. 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너에게 소설을 들려준 내 노력이 헛되진 않았어. 진보가 빠른걸? 뭔가 유용한 팁이라도 있을까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말했다. “소리를 잘 지르면 돼.”그 말에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1층의 베란다 난간에 기댄 채 강한서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리 와.”“그렇게 나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강한서는 불만스럽게 투덜대면서도 한현진에게로 향했다. 베란다 밖에는 재스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한현진은 난간 너머로 강한서의 목을 끌어안으며
강한서의 얼굴이 분노로 어두워졌다. “한현진 씨는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네요!”한현진이 두 팔을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내가 하나 못 하나 한 번 해 봐.’라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차피 송가람은 애초부터 진심으로 쓰레기 같은 기계 따위를 갖고 싶지 않았다. 단지 두 사람 사이를 틀어지게 하려던 그녀는 목적을 이룬 지금,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한서 오빠, 저 안 받을게요. 화 내지 마세요. 지금은 오빠 건강이 먼저예요. 교수님께서 항상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잖아요.”말하며 송가람은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질책했다. “현진 씨는 여기 한서 오빠의 기억 회복을 돕기 위해 온 거예요, 아니면 화를 돋우려고 있는 거예요?”“착한 척 하는 넌 좀 닥쳐! 지금 여기 네가 낄 자리는 없어.”연기를 빌미로 싸가지 없는 역할을 하려니 이보다 더 속이 시원할 순 없었다. ‘저 착한 척 하는 X에게 진작 이렇게 욕하고 싶었는데.’입가를 파르르 떤 송가람이 성질을 꾹 참으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말했다. “현진 씨, 제가 싫으시면 제가 가면 되잖아요. 이렇게까지 모욕해야겠어요?”한현진이 문을 가리켰다. “얼른 꺼져! 지금 당장 안 꺼지면 네 엄마가 대신 저주 받을 거야.”송가람: ...강한서가 차가운 눈빛으로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미친.” 말을 내뱉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아, 정말 미안해. 오늘은 먼저 돌아가. 내가 데려다줄게. 선물은 내가 나중에 따로 준비해서 보내줄게.”송가람은 불이라도 뿜을 것 같은 한현진의 두 눈을 보며 강한서 몰래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곤 강한서의 말에 나긋하게 대답했다. “오빠 말 대로 할게요.”강한서가 배웅하자 송가람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은연중에 계속 한현진을 내보내라는 의미의 말을 던졌다. 입술을 짓이긴 강한서가 말했다. “이번 재검 결과 나오면 다시 얘기해요.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현진 씨를 내보면 할머니가 안 좋아하실 거예요.”정인
송가람이 한현진의 표정 변화를 바로 캐치했다. 그녀는 비록 딱딱한 기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놀란 척 연기하며 말했다. “정말요, 한서 오빠?”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강한서!”강한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현진이 주체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평소에 이 쓰레기 같은 것들을 조금만 건드려도 화를 내면서 송가람은 그저 구경만 했을 뿐인데 선물로 주겠다는 거야? 너 그거 대체 무슨 뜻이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현진의 분노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가람이가 저에게 선물을 줘서 저도 답례를 하겠다는 건데, 뭐 문제 있어요?”“네 생각엔 뭐가 문제인 것 같아?”한현진의 눈이 점점 빨개졌다. “난 건드릴 수도 없는 물건을 송가람이 대체 뭔데 가져가? 넌 진짜 기억을 잃은 거야, 아니면 송가람에게 가지지 말아야 마음을 품은 거야?”강한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란 피우지 마요.”송가람은 기쁜 내색을 하지 않으며 능청스럽게 강한서를 위로했다. “됐어요, 한서 오빠. 현진 씨가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저 필요 없어요. 저 때문에 두 사람 괜히 싸우지 말아요.”강한서가 차갑게 말했다. “내 모형이야. 내가 선물을 하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야. 뭔데 참견이야. 신경 쓰지 말고 마음에 드는 거로 골라.”“한서 오빠, 괜찮아요. 현진 씨 화 많이 난 것 같아요.”한현진이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화 난 거 알았으면 얼른 꺼져!”송가람이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 “한서 오빠...”강한서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한현진 씨! 여긴 내 집이예요. 한현진 씨도 그저 저희 집에 오신 손님에 불과해요. 그러니 그쪽이 제 손님을 쫓아낼 자격은 없어요.”그 자리에 얼어붙은 한현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강한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을 머금은 채 주먹을 꽉 움켜쥔 한현진은 고집스레 눈물을 떨구지 않았다. “강한서, 다
무려 20여 분을 대치하고 나서야 강한서는 책으로 송가람 목에 있던 벌레를 내쳤다. 하늘소는 파닥파닥 움직이더니 갑자기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송가람의 얼굴에 떨어졌다. 꽥, 비명을 지른 송가람은 눈을 뒤집고 그만 기절했다. 송가람이 쓰러지자 벌레는 다시 날아가 버렸다. “가람아?”강한서가 송가람을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한현진에게 말했다. “현진 씨가 운전해요. 제가 가람이 안을게요. 병원에 가야겠어요.”강한서는 말하며 한현진에게 눈짓을 했다. 강한서의 눈빛을 읽은 한현진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귀찮게.”말하며 송가람 곁으로 다가온 한현진이 쪼그려 앉아 송가람의 두 뺨을 내리쳤다. 번쩍 눈을 뜬 송가람이 손을 뻗어 한현진을 밀쳤다. “뭐 하는 거야!”미리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던 한현진이 송가람이 밀치기 전에 먼저 물러섰다. 한현진은 저릿한 손을 흔들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가람 언니, 벌레 때문에 놀라서 쓰러지셨어요. 전 그저 언니를 구해주려고 그런 거예요. 못 믿겠으면 강한서에게 물어봐요.”송가람이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내가 못 들은 줄 알아? 이 타이밍에 사적인 복수를 하겠다는 거잖아!’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인중을 눌렀어도 됐잖아요.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래요.자신을 감싸는 듯 한 강한서의 말에 어깨를 으쓱한 송가람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제가 현진 씨를 오해했어요. 전 현진 씨가 여전히 제가 오빠를 구한 것 때문에 절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은 한현진의 철없는 행동을 나무라는 동시에 강한서에게 자신이 생명의 은인임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강한서가 질책의 눈빛을 담아 한현진을 지켜보았다. 한현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현진은 마치 자신의 행동이 또 강한서의 불만을 자아낼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성질을 꾹 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흥, 콧방귀를 뀌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고개를 숙여 송가람에게 물었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긴장감을 제외하면 두려움보다는 흥분이 더 컸다. 주전자가 손을 떠나기 직전, 갑자기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람아, 움직이지 마.”움찔한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강한서가 모든 기억을 회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강한서가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그녀를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 절대 움직이지 마.”송가람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목에서 뭔가 천천히 기어오르는 느낌이 그녀를 간지럽혔다. 온몸에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때 몸을 돌린 한현진은 주전자를 들고 그 자리에 굳어있는 송가람을 보고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곤 곧 송가람의 목에서 기어 다니는 하늘소를 발견했다. 어떤 품종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촉수를 제외한 몸길이만 해도 새끼손가락만큼 길었고 날갯짓하듯 움직이는 부리는 보고만 있어도 두려움을 자아냈다. 한현진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뭐가 저렇게 커.”목에서 기어 다니는 물체가 대체 뭔지, 사람을 무는 건 아닌지, 독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송가람은 그저 그 자리에 굳은 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송가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대체 뭔데요? 놀리지 말고 빨리 떼어줘요.”강한서가 송가람을 달래며 말했다. “말 하지 마. 목에 있는 거 건드리지도 말고. 내가 천천히 가서 떼어줄게.”“네.”대답한 송가람은 더 이상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천천히 가서 떼어준다던 강한서는 정말 그 말처럼 천—천—히,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마치 다리가 불편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현진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너무 발연기잖아. 송가람이 놀라 이성을 잃어서 망정이지, 안 그럼 다 들켰을 거야.’7, 8m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강한서는 2분을 들여 도착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미지의 공포를 마주한 사람에겐 단 1초도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견디기 괴로웠다. 강한서는 드디어 송가람의 뒤로 다가갔다. 하지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눈웃음을 예쁘게 지으며 나지막이 그를 칭찬했다. “연기력 좋던데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서 더 지켜봤다간 은서가 내일 나랑 연을 끊겠다고 하겠어.”한현진이 말했다. “안 그럴 거야. 세뱃돈을 받았으니까 널 조금은 더 참아줄 수 있어.”강한서가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세뱃돈을 받으라고 가르친 거야?”“모함하지 마. 난 가르친 적 없어.”“네가 직접 가르치지 지는 않았겠지만 적지 않게 모범을 보이긴 했지. 평소에 나한테 어떤 식으로 선물을 받아냈는지 잊었어?”한현진: ...한현진은 강한서가 그녀에게 뭔가를 사주게 하기 위해 늘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선물은 내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직접 생각해서 해줘야 의미가 있는 거야. 계속 내가 눈치를 줘야하는 거라면 그건 날 좋아하지 않는 거지.”은서가 한현진의 포인트를 잘 캐치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뻘쭘해진 한현진이 생각했다. ‘앞으로 부부 사이의 이런 낯간지러운 대화는 아이 앞에선 조심해야겠어. 우린 장난으로 하는 얘기였지만 어린애는 진심으로 받아들이잖아. 정신 건강에 안 좋겠어.’강한서가 위층으로 올라간지 얼마 되지 않아 한현진이 내려왔다. 한현진은 캐주얼한 후드티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조금 짧아진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 반듯한 이마를 드러냈다. 빨간 입술의 한현진은 혈색이 좋아 보이기만 했다. 과분하게 건강한 한현진의 심신 역시 송가람에겐 질투의 대상이었다. 강한서가 보이지 않자 송가람도 더 이상 사이좋은 척 가식을 떨지 않았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 큰 병인 건 같지 않아요.”한현진이 씩 웃었다. “심심하면 픽 쓰러지는 가람 언니 체질을 보고나서 열심히 운동을 했더니 효과가 있더라고요. 몸이 안 좋다가도 빨리 회복하던데요.”한현진의 숨은 말뜻을 알아들은 송가람이 째릿, 그녀를 노려보았다. “한현진 씨, 들어와 산지도 이젠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 한서 오빠 기억을 회복하는데
‘이런 거로도 날 엿 먹이는 거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실망한 기색으로 가득한 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이젠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야?”시선을 올린 은서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말했다. “현진 이모가 만약 다른 사람이 준 선물을 받고 싶지 않으면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알려줬어요. 전 이 머리핀 갖고 싶지 않아요.”“현진 이모가 마음에 안 들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한다고도 가르쳤을 텐데?”입을 꼭 닫은 은서가 몇 초 후에야 송가람에게 말했다. “가람 이모, 고마워요. 하지만 전 안 받을래요.”손을 내밀고 있는 송가람은 머리핀을 주기도, 다시 가방에 넣기도 애매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그녀는 한참만에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은서는 뭘 좋아해? 다음에 이모가 사줄게.”은서가 말했다. “제 도움이 필요하세요?”송가람이 멍해졌다. “뭐?”은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불순한 목적을 갖고 있는 거라고요. 이모는 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아무 이유 없이 선물을 주려고 하잖아요. 설마 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거예요?’송가람이 겨우 미소를 지었다. “은서가 이렇게 귀여운데 이모가 왜 은서를 안 좋아하겠어. 현진 이모가 은서에게 농담한 거야.”자신의 앞길을 막는 건 한현진 하나면 충분했다.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꼬맹이가 덧붙은 지금, 송가람은 저도 모르게 오지랖 넓은 강한서를 원망했다. ‘대체 왜 개나 소나 불문하고 곁에 두는 거야. 한서 오빠와 결혼하면 꼭 이 꼬맹이를 다른 곳에 보내버려야겠어.’은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녜요. 가람 이모는 은서 안 좋아해요. 설 연휴에 성우 삼촌, 신우 삼촌, 미주 이모 그리고 다른 삼촌과 이모들도 저에게 세뱃돈을 줬어요. 어른들은 예뻐하는 아이에게만 세뱃돈을 주는 거라고 현진 이모가 그랬어요. 하지만 가람 이모는 저에게 세뱃돈을 안 줬잖아요. 절 싫어하는 게 분명해요.”‘돈귀신 같은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