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번 유현진 씨, 가족분께 연락하셨나요?“이제 간호사가 몇 번째로 유현진을 재촉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흘긋 확인해보았으나 강한서에게 건 전화는 여전히 응답이 없는 상태였다.한주시 북부 환형 육교에서 연속 차량 충돌 사고가 발생하며 버스 한 대가 옆으로 기울다 강에 빠져버렸다. 그로 인해 수십 명의 부상자가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이 하나둘씩 병원에 도착했지만 오직 그녀의 남편은 늦도록 연락되지 않았다.처참했던 사고 현장이 여전히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사고 당시 느꼈던 공포보다 이 순간 밀려오는 서운함에 마음이 더 아팠다.“유현진 씨?”간호사의 부름에 유현진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셔츠는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는데 그 덕분에 새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다. 그녀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몰골이 처참했으나 여전히 품위 있게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연락되지 않는 것을 보니 지금 좀 바쁜 것 같아요. 제가 직접 사인해도 될까요?”“안타깝지만 그럴 수 없어요. 만약 가족분께서 사인할 수 없다면 병원에 남아 좀 더 지켜봐야 할 거예요. 뇌진탕은 빠른 진단을 내릴 수 없으니까요. 병원에선 당신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해요.”유현진은 입술을 꾹 닫고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제가 다시 전화를 걸어 볼게요.”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의료 기기를 담은 플라스틱 카트를 들고 지나가던 두 간호사를 만나자 그녀가 몸을 살짝 움직여 길을 비켜줬다. 그때, 간호사 중 한 명이 말했다.“16번 환자, 누군지 알아요?““아뇨. 누구죠?““송민영 몰라요? 엄청나게 유명해요! 얼마 전에 찍은 핫한 드라마 ’비밀의 연인‘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분이에요.““저런! 그분, 많이 다치셨어요?““조금 늦게 오셨어요. 그리고 팔에 스친 상처가 있긴 한데 그때 이미 약간 아문 상태였어요. 하지만 연예인들 얼굴이 간판이잖아요. 당연히 우리 같은 일반인과 비길 수 없죠. 내가 만약 송민영과 같은 얼굴과 몸매
뜨거운 열기가 귓가에 뿜어지고 달아오른 체온까지 더해 유현진의 귓불을 뜨겁게 달구었다. 다만 그녀는 복부에 난 멍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며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다행히 불이 꺼져있어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의 목젖에 키스했다. 강한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짙은 눈빛으로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를 한입 물었다. 곧이어 유현진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나 오늘 배란기야, 할 때가 됐어.”강한서는 몸이 굳어지더니 눈가에 스친 욕망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살짝 분노에 찬 말투로 물었다.“네 머릿속엔 온통 이 생각뿐이야?”유현진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뜨거웠던 귓불도 서서히 열기가 식었다.“너희 엄마가 계속 날 다그치잖아.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차라리 너 정자 기증할래? 그럼 내가 시험관시술 할게.”강한서가 비난 조로 되물었다.“엄마가 재촉한 게 아니라 네가 사모님 자리를 지키지 못할까 봐 아이라도 낳으려는 거 아니야?”유현진은 가슴을 후벼 파듯 아팠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옅은 미소만 지었다.“맞아, 네가 날 버리면 어떡해?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 둘 사이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지.”강한서는 단추를 채우고 짜증 섞인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런 데 신경 쓰지 마. 난 아이 안 가질 거야.”유현진의 미소 짓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녀는 문밖을 나서려는 강한서를 불러세웠다.“강한서, 넌 대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 아니면 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강한서는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뭐가 다른데?”유현진은 주먹을 꽉 쥐고 대답했다.“같은 뜻이라면 결혼도 아무 의미 없겠지. 이혼해 그냥.”“네 마음대로 해.”강한서는 이 한마디를 내뱉은 후 문을 박차고 나갔다.유현진은 베개를 문에 힘껏 내던졌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다음 날 아침, 조깅을 마치고 돌아온 강한서는 식탁 앞에 앉아 메일을 확인했다.아침을 준비한 지 반나절이 됐지만 그는 도통 수저를
차미주는 꿈속에서 헤매다가 노크 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문을 연 순간 유현진이 한 손에 캐리어를 들고 떡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청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숙박 좀 할 수 있을까?”차미주는 그녀에게 아이스 콜라 한 병 건넸다. 유현진이 콜라를 건네받자 그녀는 불쑥 제 머리를 툭 쳤다.“내 정신 좀 봐. 너 탄산음료 안 마시지? 우유 갖다 줄게.”“아니야, 괜찮아.”유현진은 캔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못 마시는 게 어디 있어?”전에는 임신 준비 때문에 술과 담배, 음료 및 자극적인 것들을 싹 다 멀리했지만 이혼을 앞둔 지금은 이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인 것을.‘임신 준비? 그딴 건 무능한 강한서더러 하라고 해!’“너 정말 강한서 씨랑 이혼할 생각이야?”차미주는 소파의 반대편에 앉으며 확실치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응.”유현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그 사람 또 송민영이랑 만나.”차미주는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그 여잔 대체 왜 이렇게 뻔뻔한 거야? 애초에 결혼할 때도 찾아와 소란을 피우더니 3년이 지난 후 또다시 나타나? 세상에 남자가 없대? 아니 왜 유부남을 물고 늘어지는 거냐고? 강한서 그 자식도 한심해. 놀다 버린 장난감에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야?”유현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지금 대체 누굴 욕하는 거지?’차미주는 마른기침을 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너 지금 이런 사소한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야. 그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넌 그냥 빠지려고? 왜 그런 비겁한 인간들을 봐줘? 끝까지 맞서 싸우란 말이야! 그 여자가 온갖 청순한 척을 다 떨잖아. 사람들 앞에서 그 가면을 확 벗겨버려! 청순은 개뿔, 유부남이나 만나는 뻔뻔스러운 년인 주제에!”“그래서? 내 결혼생활이 파탄 났다는 걸 온 세상에 알려? 남편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가여운 여자로 남아?”유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 결혼은 이미 실패야. 떠날 때까지 비참하게 굴고 싶
“네? 대표님은 아직 주무십니다.”“그럼 침실로 가서 깨워요!”유현진은 살짝 화가 치밀었다. 전화기 너머로 한참 침묵이 흐르더니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질문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심지어 이제 막 잠에서 깬 잠긴 목소리라 한순간 유현진도 저 자신을 의심할 뻔했다.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며칠 뒤에 네 옷장의 옷들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리스트를 작성해서 보내줄게. 앞으론 이런 따분한 일들로 전화 걸지 말았으면 좋겠어!”“따분한 일?”강한서가 차갑게 웃었다.“유현진, 이런 따분한 일들은 네가 가장 좋아하던 일이었잖아. 내가 무슨 속옷을 입는 것까지 일일이 책임졌잖아. 이게 고작 네가 추구하던 삶이 아니었어?”유현진은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심장이 쑤시듯이 아팠다.강한서에게 자신이 그저 이런 이미지였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지만 막상 듣게 되니 느낌이 새삼 달랐다.대체 마음이 얼마나 단단해야 이런 수모를 겪었을 때 아무런 느낌이 없을까?전화기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한참 후에야 유현진이 잠긴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내가 봐도 한심했어. 그러니까 이젠 더이상 책임지지 않겠다고. 얼른 사인해. 우리 둘 사이 빨리 끝내자.”화제가 또다시 이혼으로 돌아왔고 이제 막 화가 가라앉았던 강한서는 금세 분노가 차올랐다.“제발 적당히 해!”유현진은 피식 웃으며 비난 조로 되물었다.“내가 뭘 어쨌는데?”“너 후회하지 마!”강한서는 이 말만 남기고 전화를 툭 끊었다.유현진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자상하게 챙겨주고 묵묵히 헌신했던 지난날들이 강한서에겐 그저 한낱 놀림거리에 불과하다니.매번 그를 위해 여러 장소에서 입을 옷들을 정성껏 챙겨줄 때 정작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엔 짜증이 잔뜩 담겨있었을지도 모른다.종일 하루 세끼와 먹고 입는 것에 신경 쓰는 여자가 얼마나 창피했을까? 그녀가 생각해도 이런 저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어리석어 보였다.“대
곧이어 그녀는 안티카페에서 퇴출당하고 말았다....“왜 넋 놓고 있어?”이때 훤칠한 남자가 프런트 데스크를 두어 번 두드리며 팔꿈치를 괴고 있었다. 그는 턱을 살짝 들고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너더러 넋 놓고 있으라고 월급 주는 줄 알아?”그는 바로 옆 건물의 사장이자 섬블 컴퍼니의 사장인 한성우였다.여직원은 한성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 전혀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사장님도 종일 뵙기 힘들잖아요.”“입만 살았어!”그가 계속 여직원과 말장난을 걸려고 할 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마른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성우는 동작을 멈추고 순간 장난기 어린 표정을 거두며 진지하게 말했다.“박 감독 어디 있어? 지금 바로 내려오라고 해.”“감독님은 녹음 테스트를 하고 계세요.”“녹음 테스트?”한성우는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선셋 스타가 왔어?”여직원이 머리를 끄덕였다.한성우는 살짝 기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고개 돌려 굳은 표정의 강한서를 본 순간 재빨리 마음을 억누르고 정색하며 말했다.“박 감독한테 전화해서 내가 몇 가지 물을 게 있다고 전해.”곧이어 전화가 연결되자 한성우는 스피커폰을 눌렀다.“박 감독, 녹음 테스트는 잘 돼가? 나한테도 목소리가 괜찮은 배우가 있긴 한데.”“괜찮아, 테스트 다 했고 이미 계약도 마쳤어.”박정문은 비록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지만 한성우의 말뜻을 바로 알아챘다. 한성우는 한숨을 돌리고는 일부러 사장 포스를 내며 말했다.“이젠 나랑 상의도 없이 계약까지 하는 거야? 대체 누가 사장이야?”박정문은 전화를 툭 끊었고 한성우는 계속 구시렁댔다.“얘는 내가 점점 안중에 없는 것 같다니까!”이어서 그는 고개 돌려 강한서에게 말했다.“너도 들었지? 이미 계약했대. 다음에 버전 업데이트하고 알맞은 캐릭터가 있으면 그때 다시 써줄게.”‘정상에서’는 최근 섬블 컴퍼니에서 그가 가장 만족하는 작품이라 송민영이 이 완벽함을 망치는 걸 절대 지켜볼 수 없다.강한서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흘겨봤다
유현진과 마주치고 얘기할 기분이 사라진 강한서는 얼마 있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로비로 돌아오자마자 내려오는 박정문을 본 한성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선셋 스타는? 왜 같이 안 내려왔어?”“한참 전에 갔는데? 아래층에 있으면서 못 봤어?”‘현진 씨?’그가 프런트 데스크 여직원을 쳐다보자 여직원이 나지막이 말했다.“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신 그분요, 얼굴도 예쁘시고 사장님한테 고개 끄덕이며 인사하던 그분 있잖아요.”‘현진 씨? 현진 씨가 선셋 스타라고?’그는 순간 이 세상이 너무 판타지 소설 같았다. 강한서의 트로피 와이프가, 게다가 인스타그램에 자주 자랑질만 늘어놓던 졸부가 더빙 계의 최고 성우라니!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강한서가 돈으로 자기 와이프의 일자리를 빼앗아서 송민영에게 넘겨준 셈이 돼버렸다.‘이 스토리... 살아있네!’그의 모습을 본 박정문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눈이 게슴츠레한 게 또 무슨 꿍꿍이야?”한성우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두 글자를 내뱉었다.“비밀.”...‘빌어먹을 개자식 강한서! 그딴 선물 누가 좋아한대? 그 돈으로 가서 네 병이야 고쳐! 난 그딴 거 필요 없어!’그의 말을 곱씹을수록 유현진은 분노가 치밀었다. 휴대폰을 만지던 그때 앱 화면에 뜬 생식 병원 광고 문구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예약 버튼을 눌렀다.개인 정보를 입력하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받기 싫은 듯 느릿느릿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아빠.”“너 어디야?”유상수가 전화한 이유를 가늠할 수 없었던 유현진은 거짓말했다.“수업 중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별일은 아니고. 수업 끝나면 한서랑 같이 집에 좀 와. 아빠 친구가 트러플 선물해줬는데 안사돈이 트러플 좋아한다고 했지? 와서 가져가.”26년 동안 살아오면서 유상수는 정작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건 정확히 알고 있었다. 참으로 씁쓸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알았어
“아빠, 아빠도 회사 운영하시니까 잘 알 거 아니에요. 어느 회사 인턴이 수억짜리 자동차를 몰고 출근하던가요? 한서 지난번에 수천억짜리 프로젝트를 계약할 때도 1억 좀 넘는 벤츠를 타고 고객을 만나러 갔어요. 그런데 얘가 뭐라고 벌써 그리 비싼 차를 타야 하는데요?”그녀의 말에 유상수가 살짝 분노를 터뜨렸다.“회사마다 사정이 다르잖아. 맨날 집에서 호강하며 놀고먹는 네가 뭘 안다고 그래?”“놀고먹는다고요?”유현진은 어이없는 나머지 피식 웃었다.“그때 저한테 일을 포기하라고 설득하실 때는 이렇게 얘기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리고 강씨 가문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어디 저뿐인가요?”“쾅!”유상수는 식탁을 탁 치며 노기등등하게 말했다.“차 좀 빌려달라는데 옛날 일을 왜 들먹여!”그러자 유현아가 재빨리 유상수를 말렸다.“아빠, 진정하세요. 아빠 혈압이 높아서 화내시면 절대 안 돼요. 이 얘기 꺼내는 게 아닌데 다 제 탓이에요. 언니가 빌려주기 싫다면 방법 없죠, 뭐. 화내지 말아요, 아빠.”그녀가 옆에서 말릴수록 유상수는 친딸이 점점 더 성에 차지 않았다.“현아 좀 봐봐. 너보다 어린데 훨씬 철이 들었어!”식사 자리가 결국 서로 기분만 상한 채 끝나버리고 말았다. 유현진이 가기 전 유현아는 트러플 두 박스를 그녀의 차에 넣고는 유리창에 대고 말했다.“언니, 형부 오늘 일 때문에 바빠서 못 온 거 아니지?”그러자 유현진이 그녀를 째려보았다.“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유현아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차 주인은 한 사람만 있는 거 아니야. 남자도 마찬가지고.”그러고는 그녀 대신 유리창 버튼을 누른 뒤 안으로 들어갔다.아파트.차미주는 그녀가 가져온 두 선물 박스를 만지며 말했다.“이거 대여섯 근 정도는 되겠는데? 너희 아빠 강씨 가문에 잘 보이려고 아주 아낌없이 돈을 쓰시는구나. 아빠한테 매번 가져간 선물 시어머니가 쳐다도 안 본다고 말 안 했어?”“말한다고 해서 그만둘 것 같아?”TV 채널을 여러 개 돌려도 송민영의 드라마만
갑자기 끊긴 전화에 기분이 언짢아진 강한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여자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한서야.”강한서는 그녀를 덤덤하게 힐끗 보고는 휴대폰을 거두어들였다. 그의 말투가 차갑기 그지없었다.“대체 무슨 일로 왔어?”송민영은 잘 포장된 선물 상자를 꺼내 그에게 건네며 쑥스럽게 말했다.“요 며칠 집에서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디저트 좀 만들어봤거든. 너한테 주려고 가져왔어.”강한서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고작 이것 때문에 왔어?”순간 마음이 경직된 그녀는 선물 상자를 꽉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그건 아니고... 일도 좀 물어보려고.”강한서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페이스북은 매니저한테 맡겨. 며칠 후에 섬블 컴퍼니에서 계약건 때문에 올 거야. 그때 다시 홍보하면 돼.”송민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전에 한성우에게 “정상에서”의 더빙을 하고 싶다고 여러 번이나 어필했었지만 결국 그를 설득하지 못해 그 일로 오랜 시간 골머리를 앓았었다.사실 게임 더빙을 너무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선셋 스타가 잘되는 꼴을 보기 싫어서였다.얼마 전 “비밀의 연인”이 인기리에 방영할 때 그녀는 더빙 때문에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 네티즌들은 더빙 덕에 그녀의 발연기가 살았다면서 소리를 듣지 않으면 인형극을 보는 것 같다고 그녀를 욕했다.동시에 선셋 스타도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힘들게 촬영한 건 그녀지만 인기를 차지한 건 선셋 스타였다. 이런 상황을 누가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자신의 오리지널 대사도 괜찮다는 걸 증명하기 위하여 그녀는 또 다른 계정에 오리지널 대사 영상을 올렸다. 원래는 다들 그녀를 칭찬할 거라 예상했지만 되레 한바탕 비웃음을 당하고 말았다.영화 평론가들은 그녀의 연기력이 형편없다면서 다시 한번 선셋 스타를 칭찬했다.송민영은 너무도 화가 나 펄쩍 뛰었다. 안 그래도 이 화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는데 마
신미정은 신표가 자신의 편에 서게 하기 위해 몰래 그에게 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도박을 끊는 건 금연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오랜 시간 손을 대지 않을 땐 괜찮았지만 일단 다시 시작하기만 하면 멈추기가 힘들었다. 신표는 또다시 도박장의 단골이 되었고 연년생 아이를 낳은 이윤하는 신표와 회사를 관리할 정력이 없었다. 어렵게 일으킨 회사는 또다시 휘청거렸다. 그러나 그 당시 마침 강한서는 한성을 혼자 이끌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자 신미정은 강씨 가문의 이름으로 신표에게 투자자를 끌어다주었다. 이윤하는 모든 정력을 아이들의 교육 문제에 퍼부었고 회사 일에는 점점 손을 놓게 되었다. 그녀는 신표가 도박을 하든 말든 가만히 놔두었다. 어차피 신씨 가문의 재산은 대부분 이윤하가 관리하고 있었다. 신표가 도박으로 날린 돈은 전부 신미정이 몰래 그에게 준 것이었다. 얼마 전 주강운이 말한 두 사람의 이혼 소송의 원인은 아마 신표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 그쪽으로 몰래 돈을 빼돌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중에 한현진이 강한서와 그 얘기를 꺼냈을 때 강한서는 재산은 어차피 이윤하가 관리하고 있고 내연녀와 새 살림을 꾸릴 용기 따위도 없고 돈이 생기면 바로 도박장으로 달려가는 신표를 어떤 눈 먼 여자가 따라다니겠냐고 했다. 젊은 시절의 신표는 연예인과 견주어도 꿀리지 않는 외모를 가진 남자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곧 50대가 되는 아저씨였다. 그러니 뭘 보고 그런 남자의 내연녀가 되려고 할까? 중년을 향하는 나이가 마음에 들어서? 아니면 도박꾼이라는 직업이 마음에 들어서?이 일은 생각할수록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송민준에게 말했다. “오빠, 이윤하 행적을 알아봐줘요. 채무 상황도요.”다음 날 송민준이 소식을 전해왔다. 이윤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빈해시로 향했다. 그녀의 계좌엔 16억이 들어온 기록이 있었고 그 돈을 보낸 사람은 신표였다. 그리고 신표의 계좌에는 신미정이 한현진에게서 받은 20억이 들어온 기록이
신씨 가문은 진작 신미정이 결혼 후 몰락하기 시작했다. 신씨 가문의 아들딸이 가진 것이라곤 그저 외모가 전부였다. 두 사람은 아무리 힘을 합쳐도 그럴듯한 아이디어 하나 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만약 강씨 가문이 아니었다면 신씨 가문은 진작 재벌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을 것이다.강한서가 신미정이 강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명분으로 동생에게 끌어준 자금줄을 전부 끊은 후 전부터 안 좋던 회사 정황은 나날이 바닥을 찍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신표의 아내가 돈을 빼돌려 도망갔다고? 한현진은 그것이 사실일 거라고 믿지 않았다. 이혼도 하지 않은 상황에 아들딸을 데리고 어디로 도망갈 수 있을까? 설사 도망갔다고 해도 신표에게 돈이 있을 땐 가만히 있다가 하필 돈 떨어진 이 타이밍에?게다가 강한서의 외숙모는 그리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신표는 도박 중독이었다. 신씨 가문 절반 이상의 재산은 전부 신표가 도박으로 날린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아무리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어도 신씨 가문과 어울리는 집안에서는 도박꾼에서 딸을 시집보내기를 원하지 않았다. 신표의 아내인 이윤하는 신씨 가문에서 지방에 있던 지인을 통해 소개 받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정 형편도, 외모도 평범했고 억척스러운 여자였다. 신표는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결혼했고 그가 결혼할 때 강한서는 이미 곧 고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그러니 강한서는 그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강한서의 외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외할머니도 몸이 편치 않으셨다. 결혼식을 준비는 전부 신미정이 짊어지게 되었다. 신미정은 이윤하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윤하를 거칠고 교양 없는 여자라 생각했고 못생기고 평범한 집안 때문에 신씨 가문에 그 어떤 도움에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친이 이윤하를 며느리로 콕 점 찍어둔 상태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결혼을 막을 희망이 보이지 않자 신미정은 결혼식에서 이윤하의 기를 눌러 줄 계획을 세웠다. 예물 교환 순서에 사용될 화
그녀는 그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떠올리며, 멍하니 있던 그 뚱뚱한 물고기를 보다가 참지 못하고 발로 작은 돌멩이를 툭 차 연못에 던졌다.‘퐁당!’ 소리와 함께 뚱뚱한 물고기가 깜짝 놀라 몸을 홱 뒤집었고, 그 꼬리짓에 옆에 있던 작은 잉어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정인월은 눈썹을 씰룩이며 바라봤다.“아이고, 저 건들건들한 짓거리... 왜 우리 큰손주랑 똑같냐?”한현진은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슬그머니 발을 뒤로 뺐다. 그리고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할머니~”그때 은서가 깡충깡충 달려와 한현진의 다리를 꼭 끌어안으며 애교를 부렸다.“이모, 왜 이제 왔어요! 은서 이모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한현진은 은서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이모가 너 주려고 작은 선물 좀 사느라 늦었어.”“선물이요?”은서의 눈이 반짝이며 한현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어디 있어요? 빨리 가요!”한현진은 은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먼저 이 오빠랑 차에 타 있어. 이모는 할머니랑 잠깐 얘기 좀 하고 갈게.”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원율의 손을 잡고 차로 갔다. 아이가 자리를 떠나자, 정인월은 물었다.“그래서, 무슨 얘기를 나눴니?”한현진은 감추지 않고 모든 것을 정인월에게 말했고, 정인월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럼 어떻게 하려고?”한현진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한서 씨를 망치게 두진 않을 거예요. 200억은 신미정의 협박값이 아니에요. 그 돈으로 신미정과 한서 씨의 혈연관계를 끝낼 생각이에요.”그녀는 이어 덧붙였다.“물론, 그 돈이 순순히 그 사람 손에 들어가게 두진 않을 거예요.”할머니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그래. 집안을 정리할 때가 된 것 같구나.”그 말을 하고는 갑자기 기침을 터트렸다. 한현진은 급히 다가가 정인월의 등을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차를 따라 정인월의 잔에 차를 채워드렸다.“할머니, 건강 잘 챙기셔야 해요.”정인월은 차를
“안 돼!”신미정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2주는 너무 길어! 일주일 안에 끝내!”한현진은 살짝 찡그리며 대답했다.“열흘은 줘요. 일주일로는 정말 돈을 마련할 수 없어요.”신미정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한서가 가진 돈이 얼마나 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한현진은 차갑게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설마 나더러 한서 씨에게 돈을 달라고 하라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큰 금액을 요구하면, 당신은 한서 씨가 돈의 용도를 추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면 당신이 내게 돈을 요구하라고 시켰다는 걸 직접 말하길 바라요?”신미정은 강한서의 감정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협박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애초에 그녀가 찾아온 상대는 한현진이었다.하지만 강한서가 한현진을 너무 철저히 보호하고 있어 접근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죽은 남편의 유산을 건드릴 생각을 한 것이었는데, 운 좋게 한현진이 직접 나타난 것이다.한현진의 말에 신미정은 잠시 차분함을 되찾았다. 잠깐 고민한 뒤, 신미정은 입을 열었다.“좋아, 열흘은 줄게. 하지만 열흘 뒤에도 내가 원하는 금액을 못 받으면, 너 기다려!”신미정이 자리를 떠난 뒤, 한현진은 담담하게 말했다.“차 안에 녹화된 영상 복사해 주세요.”원율은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그는 곧 녹화를 복사하기 시작했다. 한현진은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오늘 일은 한서 씨에게 말하지 마요. 그게 어려우면 지금 이 자리에서 떠나요. 제가 두 달 치 월급을 더 챙겨드릴 테니 다른 직장을 찾아요.”원율은 다급히 말했다.“사모님, 대표님이 저를 고용하실 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사모님의 사람입니다. 사모님의 안전에 관련된 일이 아니면 개인적인 일은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한현진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이제 본가로 가요.”원율은 대답하며 녹화 파일이 담긴 휴대폰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는 차를 돌려 강씨 집안의 본가로 향했
한현진은 신미정을 한 번 흘긋 쳐다보며 말했다.“한서 씨는 매달 당신 계좌로 생활비를 송금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동안 당신이 회사 계좌에서 빼돌린 돈의 증거도 가지고 있죠. 당신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신미정은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내가 이기든 지든 상관없어. 그런 추문이 퍼지면, 한성의 주가와 한서 선거 표에 아무 영향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한현진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세상에 이런 뻔뻔하고 비열한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의 인생을 망칠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이었다.서해금과 백혜주는 그렇게 악독해도 자식들만큼은 끝까지 보호했다. 그런데 신미정은 대체 뭔가?한현진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그렇게 많은 돈을 어디에 쓰려고요?”신미정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너랑 상관없어. 돈만 보내면 돼. 기한은 3일이야. 안 주면 바로 한서를 고소할 거야!”한현진은 차분하지만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부모와 자식이라는 증거가 없었으면, 진심으로 한서 씨가 당신 친아들이라는 걸 의심했을 거예요. 당신은 한서 씨를 사랑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낳았어요? 낳았으면 왜 돌보지 않았고요? 한서 씨가 이렇게 어렵게 이룬 걸 왜 또 망치려는 거죠?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예요?”신미정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우리 모자는 원래 잘 지내고 있었어.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네가 재앙이야! 한서가 날 이렇게 대하니 내가 무정한 건 당연하지!”“과시하려고 아들이 물에 빠지도록 내버려둔 게 당신 말로는 잘 지낸 거라고요?”한현진의 말은 신미정의 아픈 곳을 건드린 듯했다. 신미정은 갑자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뭘 알아? 내가 한서를 엄격하게 키우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될 수 있었겠어?”그 뻔뻔한 논리에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신미정은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할 생각이 없는 듯 다시 냉랭한 태도로 물었다.“말 돌리지 말고, 그 돈 줄 거야, 안 줄 거야?”한현진은
한현진은 시선을 거두고 진씨에게 말했다.“아저씨, 은서를 데리러 왔어요.”진씨가 대답했다.“은서는 피아노 연습 중입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따르려던 순간, 신미정이 그녀를 불러 세우고는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한현진, 네가 나를 강씨 집안에서 쫓아내고 우리 모자를 갈라놓았으니 아주 만족스럽겠지?”한현진은 걸음을 멈추고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뭐, 나쁘지 않아요. 당신이 조금 더 오래 갇혀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요.”신미정의 눈에 증오가 스쳤지만, 이내 억눌렀다. 그녀는 손을 꽉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얘기 좀 하자.”한현진은 미소를 지으며 차갑게 말했다.“저희 사이에 대체 무슨 얘기를 할 게 있다고 생각하시죠?”한현진은 신미정이 왜 감옥에 가게 되었는지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를 해치려 했던 여자에게 절대 두 번째 기회를 줄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신미정이 왜 갑자기 시아버지의 유산을 요구하기 시작했을까?비록 신미정이 강씨 집안에서 쫓겨났고, 강한서가 그녀와의 인연을 끊으며 최소한의 생활비만 제공했지만, 강민서는 그녀를 완전히 외면하지 않았다.강민서는 여전히 신미정에게 애정이 남아 있었다. 비록 과거에 함정에 빠뜨린 적이 있더라도, 신미정이 자신을 애지중지 키워준 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신미정이 풀려난 날, 강민서는 그녀를 찾아갔고 약간의 돈도 건넸다.강한서가 이 사실을 한현진에게 말하며 은근히 물었다.“내가 민서를 막아야 할까?”한현진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자기 속셈을 모를 줄 아나!’강한서는 신미정을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막아섰다가 나중에 신미정이 돈 때문에 사고라도 치면 강민서가 자신을 원망하고 사이가 멀어질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하지만 또 막지 않으면 한현진이 오해할까 두려워 문제를 그녀에게 떠넘긴 것이었다.한현진은 애초에 강민서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강민서는 반항적인 성향이 강했기에 억누르
강한서가 주강운을 잘 아는 만큼, 그는 단기간에 성급하게 어떤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니었다.은서는 간민혜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주강운은 최소한 아이를 위해서라도 신중히 행동하며, 이익과 손실을 저울질할 것이 분명했다.한현진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은서를 데려와 펜션에서 지내게 하는 게 어때? 할머니께서 연세도 많으시고, 은서를 돌볼 체력이 없으시잖아. 그리고... 강운 씨 입장에서 보면 은서는 간민혜가 준 치욕의 상징일 텐데, 만약 병이 도져서 은서에게 화풀이라도 한다면 어쩌지?”강한서는 처음엔 주강운이 그럴 리 없다고 말하려 했다. 그를 잘 안다고 믿었으니까.하지만 그 말은 입안에서 맴돌다 삼켜졌다.만약 정말로 그를 이해했다면, 전에 있었던 납치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겠지.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대로 해.”사실 강한서가 한성우를 통해 주강운에게 은서의 출생 비밀을 넌지시 알린 데는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주씨 집안을 이용해 문지상의 진짜 사망 원인을 찾아내려는 계획이었다.강한서는 여전히 문지상이 그런 사람이었을 거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그 어깨장을 그렇게까지 소중히 간직하지 않았을 것이다.다음 날, 한현진은 직접 강씨 집안의 본가로 가서 은서를 데려왔다.그런데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신미정이 구류에서 풀려나 있었다. 그녀는 잔뜩 선물을 들고 정인월을 찾아왔지만, 문전박대를 당한 모양이었다.한현진이 도착했을 때, 그녀는 붉어진 눈으로 진 기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진 기사, 제발 시어머니께 잘 말씀 좀 해줘.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딱 한 번만 만나게 해주면 안 돼?”진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사모님,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어르신께서 몸이 불편하시다며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더는 저희를 곤란하게 하지 말아주세요.”신미정은 계속 사정하며 설득했지만, 진 기사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신미정의 눈빛이 달라졌다.결국 억눌렀던 본심이 드러났다.“내가 강씨 집안을
한현진은 어렴풋이 기억이 떠올랐다.그날 문지상이 간민혜의 죽음을 두고 강한서에게 했던 말이었다.“주씨 집안 사람들이 한 짓이죠, 그렇죠?”그리고 주강운을 언급하며,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죽은 사람이 그 녀석이 아니죠?”문지상은 주강운, 나아가 주씨 집안 전체에 대한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주강운은 문지상을 전혀 몰랐다.그렇다면 문지상의 분노는 간민혜와 관련된 어떤 사건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강한서는 그동안 이 일의 전말을 수없이 되짚어봤지만, 이 부분만큼은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았다.그래서 사건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여겼다. 그날의 교통사고로 인해 차량에 있던 모든 녹음 파일이 전부 소실되었다. 차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간민혜가 위독했던 순간, 그녀는 강한서에게 문지상에게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을 뿐, 주강운에 대해선 단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다.어떤 상황이었길래 사랑했던 연인이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상대에게 한마디조차 남기고 싶지 않을 수 있을까?강한서는 한현진과 이별의 위기를 겪었을 때, 오직 그녀가 살아남기를,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 온 마음을 다했다. 그 많은 사랑을 표현하기에도 시간이 너무 짧다고 느껴질 만큼.하지만 간민혜는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여전히 말할 힘이 있었음에도 주강운에 대해선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강한서는 어렴풋이 간민혜가 주강운을 미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그녀는 삶의 끝자락에서도 그에게 단 한 마디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강한서가 말했다.“둘이 헤어졌을 때는 감정이 가장 좋았을 때였어. 헤어지기 한 달 전만 해도 강운이는 나한테 약혼반지가 너무 비싸면 간민혜가 안 받을까 봐 두렵다고 말했고, 간민혜는 나한테 강운이 건강 상태를 계속 물어보며 걱정했지. 그런데 주씨 집안 사람들을 만나고 난 뒤에, 무시당하고 모욕당한 후로는 완전히 떠났어.”한현진은 찡그리며 말했다.“그 때문이라고? 그런데 당신이 전
한현진은 마음이 복잡하고 초조했다.한편으로는, 만약 정설희의 죽음이 정말로 장준과 관련이 있다면, 장씨 집안이 그 사진을 이용해 강한서를 곤경에 빠뜨릴까 봐 걱정되었다.그들은 이미 대비책을 마련했지만, 적과 같은 손해를 보는 상황은 결코 최선의 해결책이 아니었다.다른 한편으로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주강운이 정서희를 도와 진짜 범인을 찾아내길 바라고 있었다.그녀는 한때 부지런하고 성실했던 소녀가 이렇게 이유도 모른 채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강한서는 그녀의 고민을 알아채고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걱정 마. 네 남편 그렇게 만만한 사람 아니야. 뭐든지 다 막을 수 있어.”한현진은 한숨을 쉬며 강한서를 껴안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당신, 예전에 강운 씨한테 숙주씨 집안 간민혜를 찾으려 했던 일을 알렸지. 그래서 둘이 사고를 당한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껴서 계속 참고 있는 거 아니야?”강한서는 잠시 침묵한 뒤 조용히 답했다.“꼭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야. 현진아, 나랑 강운이는 단지 어릴 적 친구였던 것만이 아니야. 강운이는 날 대신해 얻어맞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어.”이 일은 한성우조차 알지 못했다.그는 단지 주강운이 19살 때 싸움에 휘말려 야구 방망이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 내출혈이 생겼고, 중환자실에 일주일이나 있다가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사실 이 사건은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강한서는 학창 시절 공부에만 몰두하며 연애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다.하지만 그의 뛰어난 외모는 많은 여학생의 관심을 끌었다.인근 예술 대학의 한 여학생이 교류회에서 강한서에게 첫눈에 반해, 여러 번 학교에 찾아왔다.학과 전체가 예술대학 학생이 강한서에게 반했다는 걸 알 정도였다. 하지만 강한서는 그녀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심지어 동기들이 농담 삼아 그녀에 대해 얘기했을 때,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강한서는 단순히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지만, 지나치게 직설적인 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