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을 금지옥엽처럼 살아 온 송가람은 이런 수모를 당한 적이 없었다. 홍혜림의 몇 마디 말에 눈시울을 붉힌 송가람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아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아이 다루듯 모든 것을 받아준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엄마와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었다. 한현진은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안내 데스크를 하면서 그 도리를 깊이 깨우친 적이 있었다. 심지어 홍혜림은 막무가내로 다그친 것도 아니었지만 송가람은 그마저도 견디지 못했다. 통화하러 나갔던 성월이 곧 돌아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홍혜림에게 말했다. “사모님, 서 대표님 전화예요. 전화 받으시라고...”아직도 분노를 터뜨리고 있던 서해금이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뭔데 전화를 받으라 마라야? 나랑 얘기하고 싶으면 직접 오라고 해.”당연히 서해금은 당장 홍혜림을 만나러 올 수 없었다. 그녀는 아직 바다 너머의 한 해안가에 있었다. 그러니 갑자기 날개라도 달린 듯 날아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성월이 얼른 스피커 모드로 전환하자 곧 서해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 저 서 대표예요. 일은 성 비서에게 전해들었어요. 두 아이가 아직 철이 없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네요.”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그래, 콩 심은데서 콩 나는 법이지. 은근히 비꼬는 모습은 자기 엄마를 꼭 닮긴 했어.’의심할 것도 없이 송가람의 잘못이 분명했지만 서해금은 마치 두 사람 잘못인 듯 얘기했다. 진윤이 목소리를 높이며 입을 열었다. “서 대표님, 철이 없는 건 대표님 따님이시죠. 한 대표님은 오후 내내 최선을 다해 엄마가 시향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면 안 되잖아요. 안 그래요?”한현진이 놀란 눈으로 진윤을 쳐다보았다. ‘어... 이 잘생긴 소년, 혹시 열이랑 같이 빌런을 분별하는 수업이라도 받은 거야?’진윤의 말에 휴대폰 너머는
이번엔 서해금이 입을 열기도 전에 한현진이 앞으로 나서며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모님, 오늘 불쾌한 시향을 경험하게 해드려 정말 죄송해요. 시간도 많이 지체했고 마음에 드시는 제품을 찾지도 못했으니 정말 송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한현진은 말하며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그동안 깔린느를 지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이번엔 저희가 사모님을 만족시키지 못했어요. 이 ‘인 드림’은 저희가 사모님께 드리는 사죄의 인사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지금 바로 계약 해지를 도와드릴게요. 물론 회원을 해지하셔도 전에 저희 회사에서 구매하신 제품은 여전히 VVIP 고객님 맞춤 애프터서비스를 받으실 수 있어요. 이건 사모님께 대한 저희 마음이에요.”멈칫한 홍혜림은 자신을 잡지도, 심지어 칭찬으로 추켜세우지도 않는 한현진을 의외라는 듯 훑어보았다. 서해금을 포함한 깔린느의 모든 사람은 은근히 아부하는 말투로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었다. 홍혜림에게 쇼핑은 유쾌한 일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바로 결단력 있게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였다. 서해금과 송가람에게는 분명하게도 그런 태도를 보아낼 수 없었다. 보상을 진행하겠다고 하면서도 직접적으로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어찌됐든”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마치 홍혜림이 생트집을 잡기라도 한다는 듯이 말이다. 애초부터 그들의 잘못이었다.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 걸까?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어린 나이의 부대표는 그들처럼 말을 빙빙 돌리지도 않았다. 한현진의 태도에 홍혜림은 순간 분노로 꽉 막혔던 숨이 조금은 내려가는 것 같았다. 게다가 홍혜림이 한현진이 눈치도 있다고 느낀 점은 바로 자신이 “인 드림”을 눈독들였다는 것을 파악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진귀한 제품의 가격은 홍혜림에겐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방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좋은 평판을 얻으려고 하는 태도가 홍혜림은 꽤 마음에 들었다. 서해금은 덜컹, 마음이 내려앉았다. 비록 현장에 없었지만 느
엘리베이터 안에서 홍혜림 옆에 서 있던 진윤이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단정한 자세로 서 있는 한현진은 수시로 엘리베이터의 반짝이며 변하는 숫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실물은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하얀 느낌이었다. 피부가 어찌나 하얀지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라 화면에서 보던 메이크업 후의 모습보다는 공격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련함 한 스푼을 얹은 느낌이라 더 눈이 갔다. 진윤은 몰래 휴대폰을 꺼내 슬그머니 한현진의 옆 모습을 찍어 “한현진 전 남편”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에게 전송했다. [아저씨, 저 연애해요~]한성 그룹 대표 사무실.강한서는 손으로 턱을 받치고 모니터의 데이터를 훑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한현진 쪽 일은 잘 되어가고 있는지 걱정이었다. 강한서가 알고 있는 한현진의 말빨이라면 충분히 잘 어르고 달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한현진은 비굴하지도, 도도하지도 않은 태도로 일관할 것이고 거기에 노란 머리의 서포트까지 더해진다면 아마 해결할 수 있을 테지.사람은 정말이지 이상한 생물이었다. 한현진이 그와 결혼 후 집에서 현모양처 같은 전업주부로 있을 때 강한서는 직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얼마를 벌든 세상을 많이 알아야 사람도 밝아질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강한서는 매번 마음과는 다른 말을 내뱉었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은 늘 불쾌하게 대화를 마쳐야 했다. 하지만 한현진이 일이 시작한 지금, 강한서는 또 유치원에 보낸 딸이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지 불안해 하는 아빠의 마음으로 한현진을 걱정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쯤, 휴대폰이 진동하고 카톡 이름이 “한현진 현남친”인 사람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대화창을 연 강한서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소년이 또다시 문자를 보냈다. [방금 저한테 말을 걸었을 때 전 심지어 저희 아이 이름까지 생각해뒀어요. 실물도 정말 너무 예쁘잖아요! 아저씨는 어떻게 누나 깔린느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안 거예요? 살의 무대인사에
소년은 잠깐의 침묵 후 쉴 새 없이 문자를 전송했다. [형님, 형님. 제가 잘못했어요.]강한서: [알고 싶어?]소년: [완전요!]강한서와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 진윤은 한현진을 따라 사무실에 도착했다. 바로 그때, 강한서가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에 홍혜림이 고개를 돌려 진윤을 바라보자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했다. “엄마, 저 전화 받고 올게요.”말을 마친 진윤이 휴대폰을 들고 쪼르르 밖으로 나갔다. “형님, 우리 형님. 형님이 현진 누나 연락처 알려주시면 오늘부터 형님을 친형으로 모실게요.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강한서가 진윤의 말을 잘랐다. “지금 어떻게 됐어?”진윤이 말했다. “엄마가 계약 해지하려고 하세요.”진윤은 간단하게 응접실에서 있었던 일을 강한서에게 전했다. 그리곤 사건의 스포트라이트를 전부 자신이 영웅처럼 나타나(본인 기준) 한현진을 구해준 것에 집중시켰다. 그는 마지막엔 꽤 득의 양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형님, 지금 누나들은 전부 저처럼 열정적이고 밝은 연하를 좋아해요. 형님은 나이로는 전혀 우세가 없다고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너희 엄마가 회원을 해지하면 네 현진 누나가 과연 네 친구 추가를 받아줄까?”진윤은 유치한 강한서의 말에 그만 할말을 잃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엄마!”한현진은 이미 협의서를 가져와 홍혜림에게 사인하도록 했다. 그 순간 진윤이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와 소리쳤다. “엄마!”깜짝 놀라 움찔 손을 떤 홍혜림이 서류에 올챙이 모양의 점을 찍어버렸다. 홍혜림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진윤을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소란스럽게 뭐하는 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정말 해지하시려고요?”홍혜림이 대답했다. “지금 사인하려는 거 안 보여?”“엄마, 정말 해지하셔도 괜찮겠어요? 그동안 향수 많이 쓰셨지만 깔린느를 제일 좋아하셨잖아요. 저희 회사에서 전에 출시했던 바디로션도 깔린느와의 콜라보로 제조한 향이었잖아요. 그덕에 최대 매출을
한현진은 조용히 홍혜림의 말을 머리에 새겼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홍혜림과의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홍혜림은 고집스레 “인 드림”의 값을 지불했다. 한현진은 본인에 대한 평가를 신경 쓰지 않을진 몰라도 홍혜림은 절대 다른 사람이 그녀가 향수 하나 때문에 계약을 해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도록 놔둘 생각이 없었다. 한현진이 홍혜림을 배웅하는 동안, 진윤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진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느낀 한현진은 그 시선을 따라 그녀의 뒤에 있던 테이블의 디퓨저에 닿았다. 한현진은 진윤이 자신의 편을 들며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일부러 도와주려고 한 말을 아닐지라도 말이다. 걸음을 옮겨 디퓨저를 가져온 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디퓨저는 정신을 집중시키는 효능이 있어요. 괜찮으시다면 가져가셔서 서재에 두세요. 효율이 많이 올라갈 거예요.”그러자 홍혜림이 말했다. “저희 아들은 디퓨저를 안 좋—”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먼저 앞으로 나서며 디퓨저를 받았다. 그가 귓불을 붉히며 말했다. “고마워요, 한 대표님.”홍혜림은 진윤의 행동에 할 말을 잃었다. 진윤은 휴대폰을 움켜쥐고 몇 번이나 한현진의 전화번호를 물어볼 타이밍을 엿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형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주눅이 들어 입을 열지도 못했다. ‘난 팬클럽 회장이라고. 이건 너무 못났잖아. 사인해 달라고 부를 용기도 없다니.’진윤은 결국 한현진이 웃으며 배웅을 마칠 때까지도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한현진이 선물로 준 디퓨저를 손에 들고 서 있던 진윤은 그제야 사진을 찍어 “한현진 전남편”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현진 누나가 선물로 줬어요!]몇 초 후, 강한서는 자신과 한현진의 웨딩사진을 전송했다. [현진이가 직접 내 사무실에 가져온 거야.]사진을 확인한 진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형님 심지어 기술직이시네요. 포토샵 완전 진짜 같잖아요. 합성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요. 형님, 저도 합성 해줘요
강한서가 답장했다. [업무용 계정을 개인 전화번호로 만드는 배우 본 적 있어?]어쩐지... 조금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진윤이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한현진”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안에는 한현진의 사진이 올려져 있었고 심지어 진윤은 인터넷에서 본 적도 없는 사진들이었다. 순간 진윤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역시 어린 애는 속이기 쉽다니까.’‘연애? 그냥 솔로로 지내.’같은 시각,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홍혜림과 작성한 계약 이전 서류를 강한서에게 전송했다. [나 아주머니 손에서 고객 뺏었어! 대단하지?]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답장했다. [완전 대단해. 어떻게 한 거야?]한현진이 눈꼬리가 휘게 미소 지었다. [우리 저녁에 클라우드로 음식 포장해 가자. 미주네랑 간단하게 축하 파티해야겠어. 그때 자세히 얘기해 줄게.]강한서: [기대돼.]멈칫하던 한현진이 문자를 전송했다. [네 그 말, 너무 아부 같아. 좀 도도하게 굴어봐.]강한서: [하, 그것도 자랑이라고 하는 거야?]한현진: [캡쳐했어. 다음에 네가 나 괴롭히면 인스타그램에 올려버릴 거야. 네가 나 가스라이팅한다고.]강한서: [...]한현진은 지금 이 순간 강한서가 짓고 있을 표정을 떠올리며 계속 문자를 작성했다.[왜 답장 안 해? 무시하는 거야?]강한서: [반성 중이야.][뭘?]강한서: [오늘 점심에 밥 먹을 때 팀원들이 와이프가 한 달 용돈으로 얼마를 주는지 얘기하는 걸 들었거든.][어떤 사람은 40만 원, 또 어떤 사람은 60만 원을 받더라고. 그 얘기를 들으니까 이해가 안 되서 말이야. 넌 왜 나에게 100만 원이나 주는 거야? 넌 내가 돈을 헤프게 쓴다고 생각해? 왜 그렇게 용돈을 많이 주는 거지? 나에게 100만 원은 너무 많아.]한현진은 입 안에 머금었던 물을 그대로 뿜어버렸다. [너 한성우 씨랑 같이 스피치 학원이라도 다니는 거야? 입만 점점 번지르르해지고 있어.]강한서가 눈을 깔고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교수님이 그러셨잖아. 임신은 굉장히
송가람은 순간 뜨끔했지만 그녀는 곧 한현진이 절대 진실을 밝힐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송가람은 다시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운천’을 누설한 사람은 당연히 밝혀낼 거예요. 지금 제게 묻고 있는 건 ‘운천’이 판매 불가능한 제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사모님이 시향하도록 진행했냐는 거예요. 오늘 일이 이 지경까지 된 것에 정말 현진 씨 책임은 전혀 없어요?”너무 어이가 없었던 한현진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그렇게 안 했으면요? 사모님께 직접 ‘운천’은 시향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화만 내시고 돌아가게 했어야 했나요? 깔린느가 저 때문에 이 고객을 잃도록 놔뒀어야 했어요? 일이 송 팀장님 예상과는 다르게 진행되어서 화가 나셨어요?”정곡을 찔린 송가람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제가 뭘 예상했다는 거예요? ‘운천’이 누설된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모함하지 말아요.”한현진이 송가람을 슥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운천’이 누설된 일에 송 팀장도 연루되어 있다고 했어요?”말문이 막힌 송가람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현진 씨는 정말 말도 함부로 하면서 막무가내로 구네요. 한서 오빠는 어떻게 현진 씨 같은 사람을 좋아할 수 있었던 거예요?”한현진이 서서히 시선을 올렸다. “송 팀장님은 본인의 한서 오빠에 대해선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 보네요. 한서 오빠는 저처럼 첫 째도 얼굴, 둘째도 얼굴, 셋째도 얼굴인 사람을 좋아해요. 설마 강한서가 여자의 내면만 본다고 생각한 건 아니죠? 송 팀장님도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면서 왜 강한서는 얼굴을 안 볼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한현진에게 한 방 먹이기는커녕 도리어 모욕을 당한 송가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사무실을 벗어나려했다. 한현진이 그런 송가람을 불렀다. “송 팀장님, 다음에 제 사무실에 들어오실 땐 잊지 말고 노트해주세요. 기본적인 매너도 지키지 않고선 큰일도 할 수 없어요. 서 대표님께서 송
사무실로 들어선 주혁이 문을 닫고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멈칫하던 한현진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기사님? 무슨 일 있으세요?”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대표님, 오늘 저희 아들 생일이라 선물을 좀 보내주고 싶은데, 반차 좀 쓸 수 있을까요? 2시간 정도면 될 것 같아요.”한현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그리고 저희 회사에는 기사님 휴가 신청을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어요. 2층으로 가시면 지 부장님 계세요. 이번엔 제가 먼저 사인해 드릴게요. 다음엔 직접 지 부장님 찾으시면 돼요.”말을 마친 한현진은 주혁의 텅 빈 손을 쳐다보았다. “그... 휴가 신청서는요?”주혁이 조금은 뻘쭘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까 봐 아직 작성하지 않았어요.”“아무 이유도 없이 반차 쓰시는 것도 아닌데요. 게다가 지금은 기사님이 해주실 일도 없어요. 아이 동년은 한 번뿐이잖아요. 함께 할 수 있을 때 곁에 있어줘야죠.”한현진이 말하며 컴퓨터에서 휴가 신청서를 프린트했다. 그녀는 펜과 함께 종이를 주혁에게 건넸다. “작성하시면 사인해 드릴게요. 인사팀에 제출하시고 가시면 돼요.”신청서를 건네받은 주혁은 컵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는 허리를 굽혀 휴가 신청서를 작성했다. 옆에 앉아 마침 주혁의 글씨체가 보인 한현진이 놀라워했다. “기사님, 글 잘 쓰시네요.”보여지는 주혁의 이미지와는 달리 정갈하고 예쁜 글씨체였다. 한현진은 주혁이 중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정도 학력을 가진 사람이 이런 필체를 쓸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주혁이 겸손하게 말했다. “대충 쓴 거예요. 평소 아들과 글씨 연습을 하면서 아들한테 배웠어요.”“그래도 엄청 대단하신 거죠.”한현진이 물 한 잔을 비웠을 때쯤 휴가 신청서 작성을 마친 주혁이 사인을 받기 위해 그녀에게 신청서를 건넸다. 신청서를 건네받은 한현진이 펜을 가져와 사인하려고 했다. 주혁은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텀블러를 들고 천천히 뚜껑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
시선을 거둔 서해금이 물었다. “아래층은 불 켜졌어요?”누군가 대답했다. “네. 우리 층만 정전인 것 같아요.”머리 위의 CCTV를 확인한 서해금이 태연하게 말했다. “사람 불러서 확인해 보라고 해요. 다른 분들은 모두 자리도 돌아가요.”말하며 서해금이 송가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도 돌아가. 내가 보내 준 자료는 꼭 봐. 검사할 거야.”송가람이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애교 부렸다. “알겠어, 엄마.”모든 사람이 자리로 돌아가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서해금이 입을 꾹 다물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계단엔 창문이 없었다. 복도에선 은은하게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선세등이 켜지지 않아 유난히 어두웠다. 비상계단 복도로 들어선 서해금은 계단 위에 서서 벽에 기대어 담배를 쥐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비상계단의 문을 닫으며 목소리를 낮춘 채 호통 쳤다. “여긴 회사야. 여기서 이런 짓을 하다니, 미친 거야?”“내가 정전 안 시켜서 CCTV에 찍혔으면 네가 이 상황을 해명할 수는 있고?”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상대방의 말투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당신 마음대로 여기 들어올 땐, 내 의견을 묻긴 했어?”남자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그저 우리 딸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화가 치민 서해금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음에도 분노를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다. “내가 동영상 보내줬잖아. 사진도 보내줬잖아. 지금 당신이 어떤 신분인지, 당신이 몰라서 이래?”“사진이나 동영상은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 목소리를 듣고 싶고,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 게 너무 한 거야?”“이게 너무한게 아니면 뭐야? 지금 당신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신분인지 몰라?”스산하게 비추는 불빛에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해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움찔 떠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서해금. 네가 원하던 걸 전부 이루니까 이제 난 필요 없다 이거야?
송가람의 목소리가 비통함에 잠기기 시작했다. “엄마, 설마 아빠 아직도 나한테 화 난 거야?”송가람이 이윤하에게 맞아 입원했을 당시 송병천은 매일 같이 병원에 왔었다. 하지만 송가람을 마주한 송병천은 어린 시절 한없이 다정다감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색함과 냉담함만이 더해졌다. 신미정에게 속은 건 결국 송가람이 아직도 강한서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송병천이 그런 송가람의 마음을 눈치 채고 이미 한 번의 주의를 주었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으니 송병천은 그녀에게 철저히 실망했을 것이다. 강한서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송가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모든 잘못은 한현진이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20여년이 지난 일인데, 왜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은 걸까? 왜 굳이 돌아와 그녀의 아빠와 오빠를 빼앗으려 하는 걸까?한현진이 없던 송가람의 네 식구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가족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이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 인해 부모님은 전처럼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오빠의 마음은 완전히 친동생에게 기울었다. 아빠는 더 이상 전처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 엄마는 그저 지분과 재산 생각으로 가득 차 전보다 더 계산적으로 굴었다. 그 혈연관계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한현진이 등장한 후 그녀의 가족을 갈라놓았다. 송가람은 반항이라도 하듯 강한서를 좋아하면서도 송병천과 송민준이 전처럼 예뻐해 주길 발랐다. 서해금이 시선을 올려 송가람을 바라보았다. “네가 한현진에게서 강한서를 빼앗으려고 결정했을 때부터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네 아빠가 마음을 대해 널 20여년 간 키워주고 진심으로 예뻐한 건 사실이지만 한현진은 친딸이야. 게다가 간절히 바랐었지만 결국 잃어버렸던 아이야. 그런 애가 유씨 가문에서 그런 치욕을 당하며 살아왔어. 네 아빠가 조금만 조사하면 한현진이 어떤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금방 알 수 있어. 그럼 네 아빠가 모든 걸 걸고 한현진에게 보상해주려고 하지 않겠어?”“피로연에서 그저 조금 떠봤을 뿐인데 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