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요?”한현진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모님은 오후 내내 여기서 시향 하셨어요. 사모님께서도 향으로 향수를 구분하실 수 있다고요. 조향팀 팀장 일원으로써 향을 분별하는 건 기본 자질이잖아요. 오후 내내 향도 구분하지 못하다가 어떻게 진윤 씨가 별로라고 하니까 바로 생각났다는 거죠? 송 팀장님은 청력으로 향을 구분하시는 거예요?”“전...”송가람이 당황하며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그녀는 성월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대형 사고라는 것을 직감한 성월이 몰래 휴대폰을 꺼내 밖으로 나가 서해금에게 연락했다. 한현진은 차분하고 조리정연하게 자초지종을 낱낱이 늘어놓았다. 재벌집 사모님 역시 혹독한 서열 다툼을 거쳐 이 자리에 온 사람이라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만큼 순진할 리가 없었다. 홍혜림 역시 단번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그녀를 이용해 파놓은 함정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는 바로 눈앞에 있는 깔린느의 부대표였다. 그 사실을 간파한 홍혜림은 더욱 더 화가 치밀었다. 깔린느의 내부 분쟁 따위는 그녀의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누군가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면 절대 가만 둘 위인이 아니었다. 홍혜림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제가 당신 회사 기밀을 유출하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회사 직원이 저에게 직접 전화 했어요. 새로 나온 ‘운천’이라는 향수가 있다면서 말이예요.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향수라면서 어찌나 번지르르하게 말은 잘하던지. 꼭 직접 회사에 방문해 시향을 해보라고 해서 온 거였어요.”말하며 홍혜림은 휴대폰을 꺼내 통화기록을 뒤졌다. “이게 바로 저에게 연락한 전화번호예요. 저에게 연락한 그 사람은 제가 깔린느에서 주문한 내역까지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 회사 내부 직원이 분명하겠죠.”홍혜림이 보여준 전화번호를 힐끔 쳐다본 한현진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박 비서님, 사모님께서 알려주신 이 번호 적어두고 신호하세요. 대체 누가 멋대로 회사의 제품을 누설한
20여 년을 금지옥엽처럼 살아 온 송가람은 이런 수모를 당한 적이 없었다. 홍혜림의 몇 마디 말에 눈시울을 붉힌 송가람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아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아이 다루듯 모든 것을 받아준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엄마와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었다. 한현진은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안내 데스크를 하면서 그 도리를 깊이 깨우친 적이 있었다. 심지어 홍혜림은 막무가내로 다그친 것도 아니었지만 송가람은 그마저도 견디지 못했다. 통화하러 나갔던 성월이 곧 돌아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홍혜림에게 말했다. “사모님, 서 대표님 전화예요. 전화 받으시라고...”아직도 분노를 터뜨리고 있던 서해금이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뭔데 전화를 받으라 마라야? 나랑 얘기하고 싶으면 직접 오라고 해.”당연히 서해금은 당장 홍혜림을 만나러 올 수 없었다. 그녀는 아직 바다 너머의 한 해안가에 있었다. 그러니 갑자기 날개라도 달린 듯 날아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성월이 얼른 스피커 모드로 전환하자 곧 서해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 저 서 대표예요. 일은 성 비서에게 전해들었어요. 두 아이가 아직 철이 없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네요.”한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그래, 콩 심은데서 콩 나는 법이지. 은근히 비꼬는 모습은 자기 엄마를 꼭 닮긴 했어.’의심할 것도 없이 송가람의 잘못이 분명했지만 서해금은 마치 두 사람 잘못인 듯 얘기했다. 진윤이 목소리를 높이며 입을 열었다. “서 대표님, 철이 없는 건 대표님 따님이시죠. 한 대표님은 오후 내내 최선을 다해 엄마가 시향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면 안 되잖아요. 안 그래요?”한현진이 놀란 눈으로 진윤을 쳐다보았다. ‘어... 이 잘생긴 소년, 혹시 열이랑 같이 빌런을 분별하는 수업이라도 받은 거야?’진윤의 말에 휴대폰 너머는
이번엔 서해금이 입을 열기도 전에 한현진이 앞으로 나서며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모님, 오늘 불쾌한 시향을 경험하게 해드려 정말 죄송해요. 시간도 많이 지체했고 마음에 드시는 제품을 찾지도 못했으니 정말 송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한현진은 말하며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그동안 깔린느를 지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이번엔 저희가 사모님을 만족시키지 못했어요. 이 ‘인 드림’은 저희가 사모님께 드리는 사죄의 인사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지금 바로 계약 해지를 도와드릴게요. 물론 회원을 해지하셔도 전에 저희 회사에서 구매하신 제품은 여전히 VVIP 고객님 맞춤 애프터서비스를 받으실 수 있어요. 이건 사모님께 대한 저희 마음이에요.”멈칫한 홍혜림은 자신을 잡지도, 심지어 칭찬으로 추켜세우지도 않는 한현진을 의외라는 듯 훑어보았다. 서해금을 포함한 깔린느의 모든 사람은 은근히 아부하는 말투로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었다. 홍혜림에게 쇼핑은 유쾌한 일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바로 결단력 있게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였다. 서해금과 송가람에게는 분명하게도 그런 태도를 보아낼 수 없었다. 보상을 진행하겠다고 하면서도 직접적으로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어찌됐든”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마치 홍혜림이 생트집을 잡기라도 한다는 듯이 말이다. 애초부터 그들의 잘못이었다.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 걸까?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어린 나이의 부대표는 그들처럼 말을 빙빙 돌리지도 않았다. 한현진의 태도에 홍혜림은 순간 분노로 꽉 막혔던 숨이 조금은 내려가는 것 같았다. 게다가 홍혜림이 한현진이 눈치도 있다고 느낀 점은 바로 자신이 “인 드림”을 눈독들였다는 것을 파악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진귀한 제품의 가격은 홍혜림에겐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방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좋은 평판을 얻으려고 하는 태도가 홍혜림은 꽤 마음에 들었다. 서해금은 덜컹, 마음이 내려앉았다. 비록 현장에 없었지만 느
엘리베이터 안에서 홍혜림 옆에 서 있던 진윤이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단정한 자세로 서 있는 한현진은 수시로 엘리베이터의 반짝이며 변하는 숫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실물은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하얀 느낌이었다. 피부가 어찌나 하얀지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라 화면에서 보던 메이크업 후의 모습보다는 공격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련함 한 스푼을 얹은 느낌이라 더 눈이 갔다. 진윤은 몰래 휴대폰을 꺼내 슬그머니 한현진의 옆 모습을 찍어 “한현진 전 남편”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에게 전송했다. [아저씨, 저 연애해요~]한성 그룹 대표 사무실.강한서는 손으로 턱을 받치고 모니터의 데이터를 훑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한현진 쪽 일은 잘 되어가고 있는지 걱정이었다. 강한서가 알고 있는 한현진의 말빨이라면 충분히 잘 어르고 달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한현진은 비굴하지도, 도도하지도 않은 태도로 일관할 것이고 거기에 노란 머리의 서포트까지 더해진다면 아마 해결할 수 있을 테지.사람은 정말이지 이상한 생물이었다. 한현진이 그와 결혼 후 집에서 현모양처 같은 전업주부로 있을 때 강한서는 직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얼마를 벌든 세상을 많이 알아야 사람도 밝아질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강한서는 매번 마음과는 다른 말을 내뱉었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은 늘 불쾌하게 대화를 마쳐야 했다. 하지만 한현진이 일이 시작한 지금, 강한서는 또 유치원에 보낸 딸이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지 불안해 하는 아빠의 마음으로 한현진을 걱정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쯤, 휴대폰이 진동하고 카톡 이름이 “한현진 현남친”인 사람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대화창을 연 강한서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소년이 또다시 문자를 보냈다. [방금 저한테 말을 걸었을 때 전 심지어 저희 아이 이름까지 생각해뒀어요. 실물도 정말 너무 예쁘잖아요! 아저씨는 어떻게 누나 깔린느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안 거예요? 살의 무대인사에
소년은 잠깐의 침묵 후 쉴 새 없이 문자를 전송했다. [형님, 형님. 제가 잘못했어요.]강한서: [알고 싶어?]소년: [완전요!]강한서와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 진윤은 한현진을 따라 사무실에 도착했다. 바로 그때, 강한서가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에 홍혜림이 고개를 돌려 진윤을 바라보자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했다. “엄마, 저 전화 받고 올게요.”말을 마친 진윤이 휴대폰을 들고 쪼르르 밖으로 나갔다. “형님, 우리 형님. 형님이 현진 누나 연락처 알려주시면 오늘부터 형님을 친형으로 모실게요.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강한서가 진윤의 말을 잘랐다. “지금 어떻게 됐어?”진윤이 말했다. “엄마가 계약 해지하려고 하세요.”진윤은 간단하게 응접실에서 있었던 일을 강한서에게 전했다. 그리곤 사건의 스포트라이트를 전부 자신이 영웅처럼 나타나(본인 기준) 한현진을 구해준 것에 집중시켰다. 그는 마지막엔 꽤 득의 양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형님, 지금 누나들은 전부 저처럼 열정적이고 밝은 연하를 좋아해요. 형님은 나이로는 전혀 우세가 없다고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너희 엄마가 회원을 해지하면 네 현진 누나가 과연 네 친구 추가를 받아줄까?”진윤은 유치한 강한서의 말에 그만 할말을 잃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엄마!”한현진은 이미 협의서를 가져와 홍혜림에게 사인하도록 했다. 그 순간 진윤이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와 소리쳤다. “엄마!”깜짝 놀라 움찔 손을 떤 홍혜림이 서류에 올챙이 모양의 점을 찍어버렸다. 홍혜림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진윤을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소란스럽게 뭐하는 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정말 해지하시려고요?”홍혜림이 대답했다. “지금 사인하려는 거 안 보여?”“엄마, 정말 해지하셔도 괜찮겠어요? 그동안 향수 많이 쓰셨지만 깔린느를 제일 좋아하셨잖아요. 저희 회사에서 전에 출시했던 바디로션도 깔린느와의 콜라보로 제조한 향이었잖아요. 그덕에 최대 매출을
한현진은 조용히 홍혜림의 말을 머리에 새겼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홍혜림과의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홍혜림은 고집스레 “인 드림”의 값을 지불했다. 한현진은 본인에 대한 평가를 신경 쓰지 않을진 몰라도 홍혜림은 절대 다른 사람이 그녀가 향수 하나 때문에 계약을 해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도록 놔둘 생각이 없었다. 한현진이 홍혜림을 배웅하는 동안, 진윤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진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느낀 한현진은 그 시선을 따라 그녀의 뒤에 있던 테이블의 디퓨저에 닿았다. 한현진은 진윤이 자신의 편을 들며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일부러 도와주려고 한 말을 아닐지라도 말이다. 걸음을 옮겨 디퓨저를 가져온 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디퓨저는 정신을 집중시키는 효능이 있어요. 괜찮으시다면 가져가셔서 서재에 두세요. 효율이 많이 올라갈 거예요.”그러자 홍혜림이 말했다. “저희 아들은 디퓨저를 안 좋—”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먼저 앞으로 나서며 디퓨저를 받았다. 그가 귓불을 붉히며 말했다. “고마워요, 한 대표님.”홍혜림은 진윤의 행동에 할 말을 잃었다. 진윤은 휴대폰을 움켜쥐고 몇 번이나 한현진의 전화번호를 물어볼 타이밍을 엿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형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주눅이 들어 입을 열지도 못했다. ‘난 팬클럽 회장이라고. 이건 너무 못났잖아. 사인해 달라고 부를 용기도 없다니.’진윤은 결국 한현진이 웃으며 배웅을 마칠 때까지도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한현진이 선물로 준 디퓨저를 손에 들고 서 있던 진윤은 그제야 사진을 찍어 “한현진 전남편”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현진 누나가 선물로 줬어요!]몇 초 후, 강한서는 자신과 한현진의 웨딩사진을 전송했다. [현진이가 직접 내 사무실에 가져온 거야.]사진을 확인한 진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형님 심지어 기술직이시네요. 포토샵 완전 진짜 같잖아요. 합성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요. 형님, 저도 합성 해줘요
강한서가 답장했다. [업무용 계정을 개인 전화번호로 만드는 배우 본 적 있어?]어쩐지... 조금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진윤이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한현진”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안에는 한현진의 사진이 올려져 있었고 심지어 진윤은 인터넷에서 본 적도 없는 사진들이었다. 순간 진윤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역시 어린 애는 속이기 쉽다니까.’‘연애? 그냥 솔로로 지내.’같은 시각,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홍혜림과 작성한 계약 이전 서류를 강한서에게 전송했다. [나 아주머니 손에서 고객 뺏었어! 대단하지?]강한서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답장했다. [완전 대단해. 어떻게 한 거야?]한현진이 눈꼬리가 휘게 미소 지었다. [우리 저녁에 클라우드로 음식 포장해 가자. 미주네랑 간단하게 축하 파티해야겠어. 그때 자세히 얘기해 줄게.]강한서: [기대돼.]멈칫하던 한현진이 문자를 전송했다. [네 그 말, 너무 아부 같아. 좀 도도하게 굴어봐.]강한서: [하, 그것도 자랑이라고 하는 거야?]한현진: [캡쳐했어. 다음에 네가 나 괴롭히면 인스타그램에 올려버릴 거야. 네가 나 가스라이팅한다고.]강한서: [...]한현진은 지금 이 순간 강한서가 짓고 있을 표정을 떠올리며 계속 문자를 작성했다.[왜 답장 안 해? 무시하는 거야?]강한서: [반성 중이야.][뭘?]강한서: [오늘 점심에 밥 먹을 때 팀원들이 와이프가 한 달 용돈으로 얼마를 주는지 얘기하는 걸 들었거든.][어떤 사람은 40만 원, 또 어떤 사람은 60만 원을 받더라고. 그 얘기를 들으니까 이해가 안 되서 말이야. 넌 왜 나에게 100만 원이나 주는 거야? 넌 내가 돈을 헤프게 쓴다고 생각해? 왜 그렇게 용돈을 많이 주는 거지? 나에게 100만 원은 너무 많아.]한현진은 입 안에 머금었던 물을 그대로 뿜어버렸다. [너 한성우 씨랑 같이 스피치 학원이라도 다니는 거야? 입만 점점 번지르르해지고 있어.]강한서가 눈을 깔고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교수님이 그러셨잖아. 임신은 굉장히
송가람은 순간 뜨끔했지만 그녀는 곧 한현진이 절대 진실을 밝힐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송가람은 다시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운천’을 누설한 사람은 당연히 밝혀낼 거예요. 지금 제게 묻고 있는 건 ‘운천’이 판매 불가능한 제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사모님이 시향하도록 진행했냐는 거예요. 오늘 일이 이 지경까지 된 것에 정말 현진 씨 책임은 전혀 없어요?”너무 어이가 없었던 한현진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그렇게 안 했으면요? 사모님께 직접 ‘운천’은 시향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화만 내시고 돌아가게 했어야 했나요? 깔린느가 저 때문에 이 고객을 잃도록 놔뒀어야 했어요? 일이 송 팀장님 예상과는 다르게 진행되어서 화가 나셨어요?”정곡을 찔린 송가람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제가 뭘 예상했다는 거예요? ‘운천’이 누설된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모함하지 말아요.”한현진이 송가람을 슥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운천’이 누설된 일에 송 팀장도 연루되어 있다고 했어요?”말문이 막힌 송가람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현진 씨는 정말 말도 함부로 하면서 막무가내로 구네요. 한서 오빠는 어떻게 현진 씨 같은 사람을 좋아할 수 있었던 거예요?”한현진이 서서히 시선을 올렸다. “송 팀장님은 본인의 한서 오빠에 대해선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 보네요. 한서 오빠는 저처럼 첫 째도 얼굴, 둘째도 얼굴, 셋째도 얼굴인 사람을 좋아해요. 설마 강한서가 여자의 내면만 본다고 생각한 건 아니죠? 송 팀장님도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면서 왜 강한서는 얼굴을 안 볼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한현진에게 한 방 먹이기는커녕 도리어 모욕을 당한 송가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사무실을 벗어나려했다. 한현진이 그런 송가람을 불렀다. “송 팀장님, 다음에 제 사무실에 들어오실 땐 잊지 말고 노트해주세요. 기본적인 매너도 지키지 않고선 큰일도 할 수 없어요. 서 대표님께서 송
남자의 말에 신하리가 대답했다.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인사는 너무 빠른 것 같아요.”남자가 말을 이었다. “너도 이젠 어린 나이 아니잖아. 아버지와 아주머니께서도 계속 네 결혼 때문에 걱정이 많으셔. 특히 아주머니는 흰머리까지 많아지셨어. 만나는 사람도 생겼으니 빨이 집에 데려와 인사 드려야지. 그래야 아주머니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거야.”입술을 짓이기던 신하리가 말을 이었다. “이제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게다가 요리는 저보다 몇 살이나 어리고 아직 한창 일에 집중해야 되는 시기라 저희는 최근 몇 년 사이엔 결혼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굳이 이렇게 일찍 집에 인사드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몇 년 후 열이도 배우로 자리 잡고 저희도 여전히 좋은 감정으로 잘 만나고 있어서 열이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땐 얘기하지 않으셔도 저희가 먼저 인사드리러 갈 거예요.”신하리는 남자가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다른 일 없으면 먼저 끊을게요. 열이가 요즘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서 스트레스가 많거든요. 요즘엔 또 말도 안 되는 루머에 시달리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 내서 옆에 있어주고 싶어요. 그래서 이번 주 가족 모임엔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두 분께 전해주세요.”말을 마친 신하리가 전화를 뚝 끊었다. 전화가 끊기기 바로 직전, 신하리는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둔탁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인 것 같았다. 물론 신하리는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수없이도 봐왔었다. 전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떨렸지만 이젠 그녀의 마음에 별다른 파장을 일으키지 않았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힘들었던 일도, 영원히 지나지 않을 것 같던 일도 결국은 시간이 모두 해결해 주었다. 생각에 잠겼던 신하리가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한열이 고개를 갸우뚱한 채 이상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신하리는 조금 전 자신이 꼬집었던 한열
‘이렇게 뻔뻔한 여자였어?’‘사랑하긴 개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들어 안 도와주면 죽어버리겠다는 표정으로 사정하지만 않았어도 난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거라고.’신하리의 이런 뻔뻔한 거짓말은 한열도, 수화기 너머의 남자도 믿지 않았다. 남자는 심지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괜히 볼멘소리하지 마. 네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온 가족이 다 알아.”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신하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얼마나 세게 휴대폰을 꽉 움켜쥔 건지 손톱마저도 조금 하얗게 질려있었다. 시선을 내린 신하리가 실소를 터뜨렸다. “하도 시간이 오래 되어서 잊으셨나보네요.”“뭘?”신하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제 첫사랑은 남자였어요. 처음 좋아했던 사람도 남자였고요.”신하리의 옆에 앉아있던 한열은 그녀의 통화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한열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신하리를 힐끔 쳐다보며 생각했다.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지, 그럼 여자겠어?’하지만 한열과 달리 윤명훈은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마음에 폭풍이 몰아쳤다. ‘설마 신하리에 대한 루머가 사실이었다는 거야?’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풋, 소리 내 웃었다. “장난하지 마.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넌 키스신도 한 번 찍은 적 없어. 너희 바닥에서야 그런 널 도도하다고 하겠지만 난 알아. 넌 남자와 스킨십조차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심지어 숨결만 느껴져도 본능적으로 구역질을 하잖아. 그런 네가 남자친구를 사귀어?”이를 악문 신하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주연이 얘기 안 해요?”“뭘?”“그날 제작발표회에서 제가 주연이 보는 앞에서 제 남자친구와 키스한 거.”...상대방이 말이 없자 신하리가 말을 이었다. “주연이 안 믿을 것 같아서 보여준 거예요. 맞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살짝 만지는 것도 전 역겨워요. 주연도 같은 생각이었겠죠.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잘 아니까. 저도 열이를 만나고 나서야 알게
한열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하리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의 말에 속상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 분명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를 위해 돌을 막아줬을 리가 없었다. 그런 마음에 아니라면, 그에게 장난을 치며 관심을 끌었을 리가 없었다. ‘조금 전 내가 너무 상처 되는 말을 하긴 했어.’여전히 고민하는 한열의 귓가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한열이 멍한 표정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신하리가 배를 끌어안은 채 폭소하고 있었다. 눈물까지 찔끔 흘린 그녀는 웃느라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똥강아지, 너 솔직하게 얘기해. 태어나서 한 번도 연애해 본 적 없지?”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는 신하리의 얼굴엔 슬픔이라곤 전혀 없이 온통 장난기뿐이었다. 그제야 또라이 같은 여자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한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윤명훈도 운전석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티베탄 마스티프는 사촌 누나 앞에서만 순한 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한열을 길들이는 사람이 있다니. 역시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이 있는 법이었다. 수치와 분노를 동시에 느낌 한열이 바득 이를 갈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신하리를 물어버릴 것처럼 말했다. “제가 사귀었던 사람은 신하리 씨가 손가락 다 사용해도 부족할 거예요!”“소꿉놀이 같은 연애 말하는 거야?”신하리가 야유 섞인 말투로 한열을 놀렸다. “설마 첫 키스 상대가 나였던 거 아냐?”순간 뜨끔한 한열의 몸이 어색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저 한열을 놀리려던 신하리는 그의 반응에 당황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정말 나야?!”한열이 창피함을 못 이겨 버럭 화를 냈다. “아니거든요!”하지만 한열은 거짓말엔 너무 소질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신하리에게 이렇게 빨리 모태 솔로라는 사실을 들켰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거짓말이 소용없다는 것을 인식한 한열이 자포자기하며 말했다. “제가 신하리 씨와 전에 했던 건 첫키스 아녜요. 제가 일부러 신하리 씨 기분 더럽게 하려고 한
한열이 입술을 짓이겼다. “제가 신하리 씨와 공개 연애를 선택한 건 신하리 씨가 저에게 감독님을 소개해주길 바랐기 때문이었어요. 우린 서로가 원하는 걸 해주기로 계약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제가 신하리 씨를 도와준 거라고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신하리 씨는 이번에 저 때문에 진짜로 다쳤어요. 이건 제가 신하리 씨에게 빚 진 거예요.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뭐든지 얘기해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까.”멈칫한 신하리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눈앞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탑 아이돌을 쳐다보았다. ‘이 바닥에 아직도 이렇게 단순한 자식이 있었어?’아무리 신하리가 한열에게 유리한 계약 조건을 달았다고 하더라도 계약 연애는 한열에겐 이득보단 손해가 더 많았다. 게다가 유명한 감독과 작품을 하고 싶다면 사촌 형인 송민준에게 부탁해도 충분했다. 굳이 신하리와 엮일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 한열의 SNS 댓글은 눈에 띌 정도로 악플이 늘었다. 여자친구인 신하리도 공개 연애 후 수많은 악플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극단적인 성향을 지닌 팬들은 그녀의 영정사진을 만들어 죽은 쥐과 칼날과 함께 넣어 택배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니 한열 쪽 상황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 전 신하리가 한열 대신 돌을 맞은 건 그가 얼굴을 다쳐 연예계 생활에 영향을 끼칠까 봐 걱정된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죄책감 때문에 한열에게 이렇게라도 빚을 갚아야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이 자식, 정말 멍천한 거였잖아? 이렇게까지 정중하게 신세를 졌다며 은혜를 갚겠다고 하다니. 이런 멍청해서야 대체 어떻게 인지도를 올릴 수 있었던 거야?’‘고담시 한씨 가문은 모두가 알아주는 명문가잖아. 그런 집안에서 대체 어떻게 이렇게 멍청한 아들이 나올 수 있는 거지? 눈치 빠르고 꿍꿍이가 많은 사촌 누나와 형에, 심지어 12살짜리 막내 동생도 쟤보다는 똑똑하겠어.’잡혀가서도 인질범 편을 들어줄 것 같은 한열의 모습에 신하리는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졌다. 한
윤명훈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인터넷에 떠도는 스캔들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동안, 이 미친 인간들은 경찰서 앞에서 소란을 피웠다. 한열의 반항적인 성격을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윤명훈은 충분히 버거웠다. ‘하지만 이젠 한 명이 더 늘었잖아. 젠장. 그 놈의 돈 벌기가 점점 더 힘드네!’비록 화가 치밀긴 했지만 의식을 잃은 신하리와 한열 몸에 묻은 피를 보자 윤명훈도 걱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신하리 씨는 어때?”“안 죽어요.”한열이 신하리가 꼬집던 허리를 어루만지며 쓰러진 척 연기하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연기할래요?”그제야 천천히 눈을 뜬 신하리는 한열의 눈빛과 반말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 누나 연기가 좀 실감났어?”흥, 콧방귀를 뀐 한열이 시선이 저도 모르게 신하리의 뒤통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머리숱이 많아 얼마나 많이 다친 건지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날아온 돌멩이는 힘이 꽤 실려있었다. 옆에 있던 한열의 귀에도 돌멩이가 무겁게 머리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신하리는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제외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녀는 심지어 티슈를 뽑아 뒤통수의 피를 닦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열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티슈로 상처 닦으면 안 돼요. 더럽잖아요.”“더러우면 걸레라고 하겠지, 왜 티슈라고 부르겠어?”신하리가 억지스러운 논리를 늘어놓았다. “티슈로 엉덩이를 닦을 땐 왜 더럽다고 하지 않는 거야?”한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가 티슈로 엉덩이를 닦지, 치질을 닦는 건 아니잖아요.”멈칫하던 신하리가 순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장난스레 말했다. “너 아이돌 이미지는 버린 거야? 아이돌 입에서 어떻게 엉덩이니, 치질이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어?”한열이 불퉁한 말투로 대답했다. “머리 상처에 출혈이 꽤 있었어요. 티슈로 닦으면 상처에 먼지가 붙어서 염증이 날 거예요. 나중에 흉터
한열의 마음에 남아있던 감동이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두 사람이 신고를 마치고 나오자 경찰서 밖은 이미 수많은 기자와 팬들로 둘러싸였다. 경찰서 앞이었던 만큼 경찰들이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 현장은 그나마 평화로웠다. 한열이 신하리를 감싸며 차에 오르던 그때,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열!”한열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란 크기의 돌멩이가 한열을 향해 날아왔다. 한열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앞으로 누군가 나타나 온 몸으로 돌멩이를 막았다. 신하리였다. 그 돌은 신하리의 뒤통수에 부딪혔다. 극심한 통증에 신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몸이 앞으로 휘청였다. 한열이 무의식적으로 신하리를 부축했다. 미간을 찌푸린 신하리가 손을 뻗어 돌멩이에 맞은 곳을 만졌다. 뜨뜻하고 축축한 촉감이 느껴졌다. 손바닥을 펼치자 빨간색의 피로 흥건했다. 신하리의 부축하고 있던 한열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의 얼굴은 섬뜩할 정도로 창백했다. 돌을 던진 사람이 큰소리로 질타했다. “개 같은 자식!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투표해서 널 데뷔시켰는데. 연애도 부족해서 이젠 뭐, 성추행? 팬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아?”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심지어 옆에서 질서를 유지하던 결찰들도 미처 반응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돌을 던진 그 사람이 달려들려고 하자 경찰이 얼른 앞으로 나서 제압했다. 그 사람은 심지어 바닥에 제압당한 채 여전히 욕설을 내뱉으며 난동을 부렸다. “네가 이런 인간이란 걸 진작 알았다면 차라리 지나가는 강아지에게 투표를 했을 거야! 넌 정말 네가 연기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정말 팬들이 네 재능에 반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 그 반반한 얼굴 아니었으면 너에게 투표한 사람이 있긴 했을 것 같아? 팬들 덕에 넌 아이돌이 될 수 있었던 거야. 팬들이 아니면 넌 아무 것도 아니라고!”구경 중이던 사람들과 기자들이 미친 듯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한열은 신하리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그녀의
신하리는 말하며 예쁜 눈웃음을 지었다. “저 정신병 있는 거 다들 아시죠?”그 말에 사람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얼마 전, 신하리가 한 드라마 촬영 중 현장에서 갑자기 귀신에 쓰인 사람처럼 아무런 안정장비도 하지 않은 채 6미터가 넘는 곳에서 뛰어내려 뼈가 부러진 사건이 있었다. 다들 신하리에게 왜 뛰어내렸냐고 묻자 그녀는 아래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그러나 당시 상황을 증명해 줄 동영상은 없었고 그 사건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처럼 듣고 지나보냈었지만 지금 신하리의 입으로 직접 그녀에게 정신병이 있다고 말하니 그때의 사건을 떠올린 사람들은 순산 오싹함을 느껴야 했다. 이건 분명한 경고였다. 마치 난 심신이 미약한 사람이라 너에게 정말 염산을 뿌려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으니 내 말을 장난으로 가볍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신하리의 등장으로 [아기 고양이]의 라이브 방송의 인기는 더 뜨거워졌다. 댓글에도 다양한 의견이 더 많아졌다. [사랑에 눈이 먼 연예인 1위! 보상은 산에서 산나물 캐기 18년!][신하리 미친 거 아녜요? 이렇게 대놓고 협박이라니.][면전에 협박하는데 아직도 신고하지 않는다고? 증거가 없는 거야, 아님 애초부터 한열을 모함하고 있었던 거야?][성추행을 한 사람도 경찰서에 신고했는데 당한 사람은 대체 뭐가 무서워서 신고하지 않는 거야.][지난번에 스스로 신고한 인간은 아직도 감옥에서 사회봉사 중이예요.][만약 지금 당장 신고한다면 전 아기 고구마 말을 믿을 거예요. 계속 이런 식으로 수작을 부리는 건 오히려 한열을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작당 모의에 더 가까워 보여요.][지금 루머를 퍼뜨리는 건 너무 쉬운 일이 됐어요. 스크린샷 몇 장이면 바로 스토리를 짤 수 있으니까요.]여론이 점차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멀어지자 [아기 고구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지금 저 협박하시는 거예요? 아
신하리의 라이브 방송 연결 요청에 [아기 고구마]가 잠시 멍해졌다. 무의식적으로 옆을 바라보던 그녀가 곧 시선을 돌렸다. 많은 사람들은 그 미세한 행동을 포착하지 못했지만 한현진에겐 들키고 말았다. [아기 고구마]는 혼자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 듯 했다. 그녀의 옆에는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라이브 방송을 시청하던, 궁금증 해소를 위해 모인 사람들과 진실 규명을 바라는 팬들이 미친 듯이 댓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겁쟁이! 네가 그러고도 무슨 남자야! 사건이 터지면 뒤로 물러나 여자친구가 나서서 모든 걸 감당하게 하다니. 네 팬이었다는 게 너무 후회돼!][끼리끼리는 과학이라잖아요. 한열이 이런 쓰레기라면 신하리도 그리 좋은 인간은 아니지 않겠어요? 연결해요.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죠.][언니! 얼른 입도 벙긋 못하게 증거를 뿌려버려요. 저런 인간은 아이돌을 할 자격이 없어요.][경찰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난 영원히 한열을 믿을 거야!][덕질에 도덕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나보네.]...[아기 고구마]는 사람들의 부추김에 신하리와 라이브 방송을 연결했다.신하리의 모습이 라이브 방송 화면에 나타나자 카메라는 신하리의 얼굴을 향해 바짝 다가갔다. 후드 차림에 화장도 하지 않은 신하리가 카메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그쪽 대신 경찰에 신고했어요. 얼른 오세요.”카메라가 홱 회전하며 한주 용하구의 경찰서 대문을 비췄다. 그에 라이브 방송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순간 멍해졌다. ‘신하리, 미친 거야? 어제 저녁에도 한열 대신 해명해주더니.’[아기 고구마]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전, 전 신고한다고 안 했어요.”신하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한열이 그쪽을 성추행했다면서 신고를 안 해요? 성모 마리아세요? 방송으로 울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보다 신고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어요? 경찰은 그쪽을 도와줄 수 있는데도 싫다고요?”네티즌들도 신하리의 말을 따라 댓글을 남겼다. [맞아요
알겠다고 대답한 한현진이 전화를 끊기 전 호기심을 못 이겨 물었다. “오빠, 문채영 씨와는 어떻게 됐어요?”멈칫한 송민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서 그 자식 혹시 네 옆에 있어?”한현진이 움찔하며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가로젓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한현진이 대답했다. “아뇨. 샤워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말을 믿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개의치 않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걔한테 내 말 똑바로 전해. 다음에 또 이렇게 입을 가볍게 놀렸다간 내가 그 입을 꿰매 버릴 거라고.”강한서: ...그 말에 한현진이 어색하게 하하, 웃어버렸다. “사실 강한서는 별말 안 했어요...”송민준은 더는 아무 말 없이 일찍 쉬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송민준의 얼굴이 공개된 후, 한열의 바람 스캔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사람들도 점차 한현진이 한열의 사촌누나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열의 성추문은 여전히 일파만파 퍼져나갔다.한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은 [아기 고구마]였다. 이 계정은 피드를 올릴 때마다 다음 업로드 시간을 예고하며 다음엔 마치 증거를 공개할 것처럼 사람들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에 [아기 고구마] 계정의 팔로워는 점차 늘어갔다. 하지만 예고와는 달리 매번 터무니없는 사실들만 업로드 했고 그 피드의 내용으로는 한열이 여자 연예인을 성추행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정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다.하룻밤 사이, 한열의 팔로우는 십만 명 이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열의 회사 측에서는 변호사가 작성한 소장을 공개하며 이미 경찰에 신고를 마쳤고 루머를 퍼뜨린 사람을 찾아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한열의 회사에서 소장을 공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 고구마]도 페이스북에 점심 열두시부터 라이브 방송으로 빼박 증거를 공개해 한열과 직접 맞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에 네티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