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비용이 굳은 한성우는 바로 주사위를 옆에 있는 사람에게 던져버리고는 술 두 잔을 들어 하나를 주강운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주강운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사무실에서 오는 거야?”“응.”이라고 대답한 주강운이 한성우가 건네는 술잔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넌 차미주 씨와 왜 싸운 거야?”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성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술자리에선 술만 마셔. 기분 나쁜 얘기는 뭐 하러 꺼내?”주강운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미주 씨는 의리도 있고 좋은 사람이야. 너보다 많이 어리잖아. 네가 더 이해해 줘야지.”“내가 참아준 게 적다고 생각해?”한성우가 술잔을 내려놓고 표정을 굳혔다. “내가 아무리 많은 여자를 만났어도 다른 여자에겐 간 쓸개 다 내준 적 있었어? 의리 있지. 그 마음이 친구에게만 전부 집중되어 있어서 문제지. 언제 날 생각해 준 적이 있긴 해? 미주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식사라도 한 끼 하고 싶다고 해도 싫다잖아. 내가 그렇게 창피해?”그 말을 들은 주강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자는 원래 쑥스러움이 많잖아. 아마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러는 걸 거야. 너희 지금 안정적으로 잘 만나고 있는데 지금 당장 급하게 밀어붙일 필요는 없잖아.”한성우가 손을 내저었다. “술이나 마시자고 부른 거야. 설교나 들으려는 게 아니라고. 더 얘기하면 안 마실 거야.”그러자 주강운은 말없이 술잔을 들어 한성우의 잔에 짠, 부딪혔다. 술 몇 잔을 마신 주강운이 신우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여정 씨 부서 옮긴다고 하지 않았어? 옮겼어?”신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에 완전히 매달리고 있어서 옮기려고 하지 않아. 하고 싶은 대로 놔두려고. 그 일을 하는 게 좋다잖아. 여정이가 행복해하면 나도 좋아.”고개를 끄덕인 주강운이 툭 던지듯 물었다. “여정 씨 경찰로 근무한 지 얼마나 됐지?”잠시 생각하던 신우가 말했다. “아마 6, 7년 정도 된 것 같아.”“6, 7년...”주강운이 신우의 말을
신우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그가 얼른 한성우를 말렸다. “물 마셔. 아니면 내가 화장실까지 같이 가줄게.”한성우가 신우를 밀치며 주강운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나 진짜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대체 그 여자 어디가 좋은 거야. 너와 헤어지고 바로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자를 대체 왜 좋아하는 거야? 설마 간민혜 씨가 사고를 당했을 때 뱃속의 아이가 네 아이라서, 그래서 죄책감에 잊지 못하는 거야?”신우는 당장이라도 주사위로 한성우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전엔 왜 한성우가 술에 취하면 이렇게 말이 많아지는 걸 몰랐을까? 게다가 일부러 상대방의 아킬레스건을 쿡쿡 쑤시고 있었다. 불안에 떠는 신우와는 달리 주강운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술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신 주강운이 덤덤하게 말했다. “간민혜가 누군데?”“너 정말 기억 안 나? 기억도 못 하면서 왜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려고 하지 않는 거야?”한성우가 자기 심장을 쿡쿡 누르며 말했다. “지난번에 내가 미주와 쇼핑하러 갔다가 아주머니를 만났어. 내가 여자친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시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너희는 하나둘씩 가정을 이루는데 우리 강운이는 언제쯤 제 짝을 만날 수 있을까?’라고 하셨어. 아주머니가 그 말씀을 하실 때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알아?”한성우가 또다시 술 한 잔을 들이켰다. 그의 눈빛은 이미 흐릿해져 있었다. 그가 주강운을 잡아끌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얘기는 자식인 우리가 할 수는 없어. 하지만 만약 당시 너희 가족이 간민혜 씨를 받아들였다면 나중의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만약 그 아이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곧 7살이 될 거고. 난 그때 뭐 한다고 해외를 돌아다니고 있었을까. 만약 내가 있었다면 최소한 널 위해 아이는 지킬 수 있었을 텐데.”주강운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하기만 했다. 하지만 신우는 그가 잡은 술잔에 담긴 술 위로 은은하게 퍼지는 파동을 눈치챘다. 아마 주강운의 마음은 보이는 것만큼 평온하지는 않은 듯했다. 신우는 손
잠시 후, 한성우가 룸으로 돌아왔다. 술기운이 올라온 주강운이 소파에 기대앉아 한 손으로 넥타이를 끌어내렸다. 고개를 돌려 한성우를 보자 그는 술에 찌든 모습으로 소파 등받이 엎드려 있었다. 손에는 아직도 술잔을 든 채 “건배”라며 중얼거렸다. 신우는 주강운과 비슷하게 알딸딸한 정도였다. 비록 많이 마시기는 했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휴대폰을 확인한 신우가 소파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차 부를게. 먼저 성우 데려다줘야겠어.”주강운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 말을 들은 한성우가 혀가 잔뜩 꼬인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 안 돌아가. 돌아가려면 너희나 가. 난 오늘 여기서 잘 거야.”신우가 멈칫,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 잘 거라고? 미주 씨가 알면 어쩌려고.”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알면 알았지, 뭐. 내가 걔를 무서워할 것 같아? 부모님께 인사도 못 가게 하면서. 그만 만나고 싶으면 그러라고 해.”한성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테이블 위에 올려둔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힐끔 쳐다본 신우가 “도둑이”라고 뜬 이름에 허리를 숙여 휴대폰을 가져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낯선 목소리에 차미주가 멍해졌다. “누구세요?”“전 신우라고 해요.”멈칫하던 신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차미주 씨?”차미주가 물었다. “한성우는요? 전화 좀 받으라고 해요.”“성우가 많이 취했어요.”신우는 굉장히 솔직하게도 조금 전 한성우가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성우가 오늘은 안 돌아갈 거라고 하네요. 술집에서 잘 거라고.”차미주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시죠?”신우가 차미주에게 위치를 알려주자 그녀가 바득 이를 갈았다. “신우 씨, 죄송하지만 잠시 성우 좀 챙겨주시겠어요? 제가 곧 데리러 갈게요.”“네.”잠시 후, 차미주가 운전해 한성우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신우와 주강운이 한성우를 둘러업고 차에 집어넣었다. 한성우는 전혀 협조적이지 않은 태도로 두 손으로 차 문을 꽉 잡아당겼다.
차미주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연기하지 마. 온몸으로 여자 화장품 냄새를 풍기고 있어, 너. 정말 내가 냄새도 못 맡는다고 생각하는 거야?”한성우가 팔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래?”그는 말하며 피식 웃어버렸다. “날 만지지도 않았으면서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네가 어떻게 맡아? 개코야?”“헛소리 그만 지껄여. 너 뭐 하는 거야. 술 마시면서 취한 척이나 하고. 나한테 데리러 오라고 하면서 나더러 먼저 전화하라고?”한성우가 뒷좌석에 기대어 앉으며 뒤에서 물 한 병을 꺼냈다. 병뚜껑을 따며 한성우가 말했다. “이 정도로 안 마시면 쟤네가 날 그냥 보내줬을 것 같아?”차미주가 입을 삐죽였다.“그런 능력도 없으면서 왜 술을 마시자고 한 거야?”한성우가 생각했다. ‘난 마시고 싶어서 마신 줄 알아? 이게 다 꿍꿍이가 많은 네 친구 덕분이지.’한성우는 머릿속의 불만과는 달리 듣기 좋은 말을 골라 대답했다. “자랑하려는 거잖아. 난 이제 밖에서 취해도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다고.”차미주가 한성우를 쏘아보며 말했다. “미친 X.”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휴대폰을 들어 한현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임무 완수.]한현진에게서 곧바로 답장이 왔다. 그녀는 차미주의 학창 시절 사진을 십수 장을 한성우에게 전송했다. 활동에 참석했을 때의 사진, 여행 사진 그리고 수상할 때 찍은 사진도 있었다. 전부 학창 시절 차미주가 제일 빛나던 순간의 사진을 고른 것이었다. 사진 속의 차미주는 귀엽고 생명력이 흘러넘쳤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확인한 한성우는 하마터면 물에 사레가 들린 뻔했다. 차미주가 휴지를 뽑아 한성우에게 던졌다. “천천히 마셔. 뺏어 먹는 사람 없어.”“음.” 소리를 내며 대답한 한성우가 기침을 계속하며 한현진이 보낸 사진을 일일이 저장했다. 한성우가 조용히 생각했다. ‘꿍꿍이가 많긴 하지만 눈치는 있네.’한성우는 직접적으로 주강운에게 은서가 바로 간민혜의 아이라고 알려줄 수가 없었다. 주강운이 바보가 아닌 이상,
한현진은 눈앞의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성월이 가져온 이력서와 일일이 대조하며 상대방을 살폈다. 제일 젊은 운전기사는 회사 임원의 운전기사로 있었던 경력이 있는 듯 말투에는 오만함이 조금 섞여 있었다. 매번 한현진이 질문할 때면 그는 습관처럼 “전에 모셨던 대표님은...” 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의 첫 마디를 들은 한현진은 뒤의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두 번째 운전기사에게 제일 늦게 몇 시까지 야근할 수 있는지, 연봉은 얼마를 원하는지 물었다. 두 번째 사람은 넌지시 요구를 던졌다. 전에 일하던 곳의 일당은 10만 원에서 15만 원 정도였고 8시간 근무했다고 했다. 그는 회사에서 기숙사를 제공해 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한현진은 그 요구엔 특별한 불만이 없었다. 그녀가 궁금한 건 단 한 가지였다. “그 정도면 일당이 꽤 높았던 것 같은데 왜 그만두신 거죠?”갑자기 말문이 막힌 운전기사는 한참을 우물쭈물하더니 회사가 지겨워져 이직하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남자가 다녔던 회사를 확인한 한현진이 손을 들어 박해서를 불렀다. 귓속말도 나지막이 얘기를 전하자 박해서가 알겠다며 자료를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박해서가 한현진에게 속삭였다. 그의 말을 들은 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남자의 이력서를 옆으로 밀어버렸다. 한현진의 시선이 제일 마지막 지원자에게로 향했다. 남자의 이력서에는 45세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물은 그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였다. 마른 몸매에 보통의 외모를 갖고 있었다. 사람들 틈에 끼어있으면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흔하디흔한 얼굴이었다. 그는 몸에 맞지 않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아마도 면접을 위해 일부러 준비한 옷 같았다. 하지만 양복 안에는 셔츠가 아니라 짙은 회색의 맨투맨이었다. 옷깃은 살짝 울퉁불퉁 올라와 있어 반듯한 모양은 아니었다. 너무 오래 입은 탓인 듯했다. 남자는 등을 구부리고 있었고 어깨도 습관적으로 잔뜩 움츠렸다. 다른 두 명의 운전기사가 본인
그 남자는 늑골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몸조차 일으키지 못했다. 멍해졌던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발차기를 날린 사람을 쳐다보았다. 방금 그녀가 고용한 운전기사인 주혁이었다. 그는 평온한 태도로 보호하듯 한현진 앞을 막아섰다. 그는 몸으로 한현진과 주먹을 날리려던 남자 사이를 막고 있었다. 박해서도 재빨리 앞으로 다가와 현장에 있던 사람들과 협력해 남자를 바닥에 제압했다. “대표님, 괜찮으세요?”성월이 얼른 다가와 물었다. 정신을 차린 한현진이 차가운 얼굴로 목소리를 낮춘 채 입을 열었다. “성 비서님. 이게 바로 성 비서님이 고르고 고른 운전기사인가요? 자기 감정 하나 제어하지 못하고 심지어 사기 전과가 있다는 것도 성 비서님은 알아낼 수 없었던 건가요?”굳은 표정의 성월은 안색도 어두워졌다. “대표님, 저희는 줄곧 운전 경력과 사고 유무만 보고 운전기사를 채용해 왔어요. 전 회사에서 그만둔 이유까지는 일반적으로 알아보지 않아요.”“전에 어떻게 일하셨든 저와 상관없어요. 지금은 제 운전기사를 뽑는 거잖아요. 제가 성 비서님께 뭐라고 했었죠?”말문이 막힌 성월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한 대표님. 이건 제 실수예요.”한현진이 차가운 태도로 말했다. “2000자 내로 경위서 써서 내일 회의 시작 전에 제 사무실에 제출하세요.”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서로 마주 보았다. 성월은 서해금의 심복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누구든 성월에겐 예의를 갖추었다. 설사 가끔 업무적인 실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서해금조차도 성월에게 벌을 주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 온 부대표는 성월의 체면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성월 본인 역시 직원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나지막이 말했다. “한 대표님, 제 직속 상사는 서 대표님이세요. 전 서 대표님 지시에만 따라요. 지금은 그저 잠시 한 대표님에게 협조하고 있는 것뿐이고요. 인사 채용에 실수가 생긴 것은 저만의 책임이 아니에요. 한 대표님께서
고개를 끄덕인 한현진이 말을 이으려는데 송가람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현— 한 대표님. 잠시 나오시죠. 할 얘기가 있어서요.”그러자 한현진은 더 이상 다른 말 없이 주혁에게 말했다. “인사팀에서 입사 수속을 도와줄 거예요. 인사팀에서 시키시는 대로 하시면 돼요.”말을 마친 한현진이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고개를 돌려 한현진이 나간 쪽을 바라보던 주혁이 인사팀 부장이 부르는 소리에 다시 몸을 돌려 서류를 작성했다. 송가람은 복도에서 한현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송가람에게 다가간 한현진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송가람이 덤덤하게 말했다. “오빠 11시면 착륙한대요. 알고 있어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항에 데리러 갈 거예요?”한현진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같이 가요.”송가람의 대답에 한현진이 멈칫했다. “가람 언니도 가려고요?”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제가 가면 뭐 문제라도 있어요? 오빠는 현진 씨만의 오빠가 아니에요. 제 오빠이기도 하다고요! 저희는 20여 년을 함께 살았어요.”한현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러던가요.”송가람이 공항에 가든 안 가든 한현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똑똑해진 송가람의 모습이 의외였을 뿐이었다. 만약 두 사람이 따로 공항에 간다면 송민준은 송가람의 차에 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요즘 두 사람 사이에는 냉랭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송가람 본인도 그걸 느꼈을 테니 한현진과 함께 간다는 것은 사실은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뜻이었다. 비록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20여 년의 감정이 전부 거짓은 아니었다. 송민준과의 사이가 틀어진다면 그건 이성적이지 않은 판단이었다. 송가람도 그것을 인지했거나 아니면 서해금이 시킨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서해금의 지시라면 그녀의 목적은 단순히 화해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박해서는 두 사람을 태우고 공항으로 향했다. 3월이 거의 지나는 시점이라 날씨도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특히 점심엔 기온이
한현진은 기가 막혀 웃음을 터뜨렸다. “강한서가 그래요?”송가람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는 저희 두 집안이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라요. 그리고 여자인 현진 씨를 너무 뻘쭘한 상황에 두는 것도 원하지 않고요. 사실 우리 집도 아름드리에서 그리 멀지 않잖아요. 정말 오빠가 보고 싶으면 운전해서 잠깐이면 도착할 수 있어요. 그러면 선도 지킬 수 있고 오빠도 난감한 상황을 피할 수 있잖아요. 현진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며칠 내내 선물한 꽃다발이 정말 송가람을 붕 뜨게 만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녀는 강한서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송가람은 본인이 아름드리의 안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현진을 아름드리에서 내쫓으려 하고 있었다. “사실 전 어디서 지내든 아무 상관 없어요. 하지만 저를 아름드리로 데려간 건 강한서예요. 제가 아름드리에 있는 게 불편하다면 직접 와서 얘기하라고 해요. 강한서 한 마디면 바로 아름드리에서 나갈 테니까.”송가람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현진 씨, 한서 오빠 성격에 어떻게 직접 사람을 내쫓을 수 있겠어요. 현진 씨도 한서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요.”“강한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어서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더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침대까지 주문 제작한 사람이 왜 절 내보내려고 가람 언니에게 그런 말을 전했을까요? 가람 언니, 정말 강한서가 그렇게 얘기하라고 한 거예요? 아니면 제가 아름드리에 있는 게 싫어서 그런 말을 지어낸 거예요?”말문이 막힌 송가람의 표정이 분노가 드리웠다. “전 단지 저희 집안 입장을 생각해 현진 씨에게 제안을 한 것뿐이에요. 현진 씨가 듣고 싶지 않다면 안 들으면 그만이죠.”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전 아름드리에서 나올 수 있어요. 강한서에게 직접 와서 얘기하라고 해요. 강한서가 얘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 저에게 아름드리에서 나오라고 설득하는 사람은 전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