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비용이 굳은 한성우는 바로 주사위를 옆에 있는 사람에게 던져버리고는 술 두 잔을 들어 하나를 주강운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주강운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사무실에서 오는 거야?”“응.”이라고 대답한 주강운이 한성우가 건네는 술잔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넌 차미주 씨와 왜 싸운 거야?”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성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술자리에선 술만 마셔. 기분 나쁜 얘기는 뭐 하러 꺼내?”주강운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미주 씨는 의리도 있고 좋은 사람이야. 너보다 많이 어리잖아. 네가 더 이해해 줘야지.”“내가 참아준 게 적다고 생각해?”한성우가 술잔을 내려놓고 표정을 굳혔다. “내가 아무리 많은 여자를 만났어도 다른 여자에겐 간 쓸개 다 내준 적 있었어? 의리 있지. 그 마음이 친구에게만 전부 집중되어 있어서 문제지. 언제 날 생각해 준 적이 있긴 해? 미주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식사라도 한 끼 하고 싶다고 해도 싫다잖아. 내가 그렇게 창피해?”그 말을 들은 주강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자는 원래 쑥스러움이 많잖아. 아마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러는 걸 거야. 너희 지금 안정적으로 잘 만나고 있는데 지금 당장 급하게 밀어붙일 필요는 없잖아.”한성우가 손을 내저었다. “술이나 마시자고 부른 거야. 설교나 들으려는 게 아니라고. 더 얘기하면 안 마실 거야.”그러자 주강운은 말없이 술잔을 들어 한성우의 잔에 짠, 부딪혔다. 술 몇 잔을 마신 주강운이 신우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여정 씨 부서 옮긴다고 하지 않았어? 옮겼어?”신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에 완전히 매달리고 있어서 옮기려고 하지 않아. 하고 싶은 대로 놔두려고. 그 일을 하는 게 좋다잖아. 여정이가 행복해하면 나도 좋아.”고개를 끄덕인 주강운이 툭 던지듯 물었다. “여정 씨 경찰로 근무한 지 얼마나 됐지?”잠시 생각하던 신우가 말했다. “아마 6, 7년 정도 된 것 같아.”“6, 7년...”주강운이 신우의 말을
신우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그가 얼른 한성우를 말렸다. “물 마셔. 아니면 내가 화장실까지 같이 가줄게.”한성우가 신우를 밀치며 주강운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나 진짜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대체 그 여자 어디가 좋은 거야. 너와 헤어지고 바로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자를 대체 왜 좋아하는 거야? 설마 간민혜 씨가 사고를 당했을 때 뱃속의 아이가 네 아이라서, 그래서 죄책감에 잊지 못하는 거야?”신우는 당장이라도 주사위로 한성우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전엔 왜 한성우가 술에 취하면 이렇게 말이 많아지는 걸 몰랐을까? 게다가 일부러 상대방의 아킬레스건을 쿡쿡 쑤시고 있었다. 불안에 떠는 신우와는 달리 주강운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술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신 주강운이 덤덤하게 말했다. “간민혜가 누군데?”“너 정말 기억 안 나? 기억도 못 하면서 왜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려고 하지 않는 거야?”한성우가 자기 심장을 쿡쿡 누르며 말했다. “지난번에 내가 미주와 쇼핑하러 갔다가 아주머니를 만났어. 내가 여자친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시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너희는 하나둘씩 가정을 이루는데 우리 강운이는 언제쯤 제 짝을 만날 수 있을까?’라고 하셨어. 아주머니가 그 말씀을 하실 때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알아?”한성우가 또다시 술 한 잔을 들이켰다. 그의 눈빛은 이미 흐릿해져 있었다. 그가 주강운을 잡아끌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얘기는 자식인 우리가 할 수는 없어. 하지만 만약 당시 너희 가족이 간민혜 씨를 받아들였다면 나중의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만약 그 아이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곧 7살이 될 거고. 난 그때 뭐 한다고 해외를 돌아다니고 있었을까. 만약 내가 있었다면 최소한 널 위해 아이는 지킬 수 있었을 텐데.”주강운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하기만 했다. 하지만 신우는 그가 잡은 술잔에 담긴 술 위로 은은하게 퍼지는 파동을 눈치챘다. 아마 주강운의 마음은 보이는 것만큼 평온하지는 않은 듯했다. 신우는 손
잠시 후, 한성우가 룸으로 돌아왔다. 술기운이 올라온 주강운이 소파에 기대앉아 한 손으로 넥타이를 끌어내렸다. 고개를 돌려 한성우를 보자 그는 술에 찌든 모습으로 소파 등받이 엎드려 있었다. 손에는 아직도 술잔을 든 채 “건배”라며 중얼거렸다. 신우는 주강운과 비슷하게 알딸딸한 정도였다. 비록 많이 마시기는 했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휴대폰을 확인한 신우가 소파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차 부를게. 먼저 성우 데려다줘야겠어.”주강운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 말을 들은 한성우가 혀가 잔뜩 꼬인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 안 돌아가. 돌아가려면 너희나 가. 난 오늘 여기서 잘 거야.”신우가 멈칫,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 잘 거라고? 미주 씨가 알면 어쩌려고.”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알면 알았지, 뭐. 내가 걔를 무서워할 것 같아? 부모님께 인사도 못 가게 하면서. 그만 만나고 싶으면 그러라고 해.”한성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테이블 위에 올려둔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힐끔 쳐다본 신우가 “도둑이”라고 뜬 이름에 허리를 숙여 휴대폰을 가져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낯선 목소리에 차미주가 멍해졌다. “누구세요?”“전 신우라고 해요.”멈칫하던 신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차미주 씨?”차미주가 물었다. “한성우는요? 전화 좀 받으라고 해요.”“성우가 많이 취했어요.”신우는 굉장히 솔직하게도 조금 전 한성우가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성우가 오늘은 안 돌아갈 거라고 하네요. 술집에서 잘 거라고.”차미주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시죠?”신우가 차미주에게 위치를 알려주자 그녀가 바득 이를 갈았다. “신우 씨, 죄송하지만 잠시 성우 좀 챙겨주시겠어요? 제가 곧 데리러 갈게요.”“네.”잠시 후, 차미주가 운전해 한성우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신우와 주강운이 한성우를 둘러업고 차에 집어넣었다. 한성우는 전혀 협조적이지 않은 태도로 두 손으로 차 문을 꽉 잡아당겼다.
차미주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연기하지 마. 온몸으로 여자 화장품 냄새를 풍기고 있어, 너. 정말 내가 냄새도 못 맡는다고 생각하는 거야?”한성우가 팔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래?”그는 말하며 피식 웃어버렸다. “날 만지지도 않았으면서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네가 어떻게 맡아? 개코야?”“헛소리 그만 지껄여. 너 뭐 하는 거야. 술 마시면서 취한 척이나 하고. 나한테 데리러 오라고 하면서 나더러 먼저 전화하라고?”한성우가 뒷좌석에 기대어 앉으며 뒤에서 물 한 병을 꺼냈다. 병뚜껑을 따며 한성우가 말했다. “이 정도로 안 마시면 쟤네가 날 그냥 보내줬을 것 같아?”차미주가 입을 삐죽였다.“그런 능력도 없으면서 왜 술을 마시자고 한 거야?”한성우가 생각했다. ‘난 마시고 싶어서 마신 줄 알아? 이게 다 꿍꿍이가 많은 네 친구 덕분이지.’한성우는 머릿속의 불만과는 달리 듣기 좋은 말을 골라 대답했다. “자랑하려는 거잖아. 난 이제 밖에서 취해도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다고.”차미주가 한성우를 쏘아보며 말했다. “미친 X.”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휴대폰을 들어 한현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임무 완수.]한현진에게서 곧바로 답장이 왔다. 그녀는 차미주의 학창 시절 사진을 십수 장을 한성우에게 전송했다. 활동에 참석했을 때의 사진, 여행 사진 그리고 수상할 때 찍은 사진도 있었다. 전부 학창 시절 차미주가 제일 빛나던 순간의 사진을 고른 것이었다. 사진 속의 차미주는 귀엽고 생명력이 흘러넘쳤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확인한 한성우는 하마터면 물에 사레가 들린 뻔했다. 차미주가 휴지를 뽑아 한성우에게 던졌다. “천천히 마셔. 뺏어 먹는 사람 없어.”“음.” 소리를 내며 대답한 한성우가 기침을 계속하며 한현진이 보낸 사진을 일일이 저장했다. 한성우가 조용히 생각했다. ‘꿍꿍이가 많긴 하지만 눈치는 있네.’한성우는 직접적으로 주강운에게 은서가 바로 간민혜의 아이라고 알려줄 수가 없었다. 주강운이 바보가 아닌 이상,
한현진은 눈앞의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성월이 가져온 이력서와 일일이 대조하며 상대방을 살폈다. 제일 젊은 운전기사는 회사 임원의 운전기사로 있었던 경력이 있는 듯 말투에는 오만함이 조금 섞여 있었다. 매번 한현진이 질문할 때면 그는 습관처럼 “전에 모셨던 대표님은...” 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의 첫 마디를 들은 한현진은 뒤의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두 번째 운전기사에게 제일 늦게 몇 시까지 야근할 수 있는지, 연봉은 얼마를 원하는지 물었다. 두 번째 사람은 넌지시 요구를 던졌다. 전에 일하던 곳의 일당은 10만 원에서 15만 원 정도였고 8시간 근무했다고 했다. 그는 회사에서 기숙사를 제공해 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한현진은 그 요구엔 특별한 불만이 없었다. 그녀가 궁금한 건 단 한 가지였다. “그 정도면 일당이 꽤 높았던 것 같은데 왜 그만두신 거죠?”갑자기 말문이 막힌 운전기사는 한참을 우물쭈물하더니 회사가 지겨워져 이직하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남자가 다녔던 회사를 확인한 한현진이 손을 들어 박해서를 불렀다. 귓속말도 나지막이 얘기를 전하자 박해서가 알겠다며 자료를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박해서가 한현진에게 속삭였다. 그의 말을 들은 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남자의 이력서를 옆으로 밀어버렸다. 한현진의 시선이 제일 마지막 지원자에게로 향했다. 남자의 이력서에는 45세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물은 그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였다. 마른 몸매에 보통의 외모를 갖고 있었다. 사람들 틈에 끼어있으면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흔하디흔한 얼굴이었다. 그는 몸에 맞지 않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아마도 면접을 위해 일부러 준비한 옷 같았다. 하지만 양복 안에는 셔츠가 아니라 짙은 회색의 맨투맨이었다. 옷깃은 살짝 울퉁불퉁 올라와 있어 반듯한 모양은 아니었다. 너무 오래 입은 탓인 듯했다. 남자는 등을 구부리고 있었고 어깨도 습관적으로 잔뜩 움츠렸다. 다른 두 명의 운전기사가 본인
그 남자는 늑골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몸조차 일으키지 못했다. 멍해졌던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발차기를 날린 사람을 쳐다보았다. 방금 그녀가 고용한 운전기사인 주혁이었다. 그는 평온한 태도로 보호하듯 한현진 앞을 막아섰다. 그는 몸으로 한현진과 주먹을 날리려던 남자 사이를 막고 있었다. 박해서도 재빨리 앞으로 다가와 현장에 있던 사람들과 협력해 남자를 바닥에 제압했다. “대표님, 괜찮으세요?”성월이 얼른 다가와 물었다. 정신을 차린 한현진이 차가운 얼굴로 목소리를 낮춘 채 입을 열었다. “성 비서님. 이게 바로 성 비서님이 고르고 고른 운전기사인가요? 자기 감정 하나 제어하지 못하고 심지어 사기 전과가 있다는 것도 성 비서님은 알아낼 수 없었던 건가요?”굳은 표정의 성월은 안색도 어두워졌다. “대표님, 저희는 줄곧 운전 경력과 사고 유무만 보고 운전기사를 채용해 왔어요. 전 회사에서 그만둔 이유까지는 일반적으로 알아보지 않아요.”“전에 어떻게 일하셨든 저와 상관없어요. 지금은 제 운전기사를 뽑는 거잖아요. 제가 성 비서님께 뭐라고 했었죠?”말문이 막힌 성월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한 대표님. 이건 제 실수예요.”한현진이 차가운 태도로 말했다. “2000자 내로 경위서 써서 내일 회의 시작 전에 제 사무실에 제출하세요.”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서로 마주 보았다. 성월은 서해금의 심복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누구든 성월에겐 예의를 갖추었다. 설사 가끔 업무적인 실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서해금조차도 성월에게 벌을 주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 온 부대표는 성월의 체면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성월 본인 역시 직원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나지막이 말했다. “한 대표님, 제 직속 상사는 서 대표님이세요. 전 서 대표님 지시에만 따라요. 지금은 그저 잠시 한 대표님에게 협조하고 있는 것뿐이고요. 인사 채용에 실수가 생긴 것은 저만의 책임이 아니에요. 한 대표님께서
고개를 끄덕인 한현진이 말을 이으려는데 송가람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현— 한 대표님. 잠시 나오시죠. 할 얘기가 있어서요.”그러자 한현진은 더 이상 다른 말 없이 주혁에게 말했다. “인사팀에서 입사 수속을 도와줄 거예요. 인사팀에서 시키시는 대로 하시면 돼요.”말을 마친 한현진이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고개를 돌려 한현진이 나간 쪽을 바라보던 주혁이 인사팀 부장이 부르는 소리에 다시 몸을 돌려 서류를 작성했다. 송가람은 복도에서 한현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송가람에게 다가간 한현진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송가람이 덤덤하게 말했다. “오빠 11시면 착륙한대요. 알고 있어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항에 데리러 갈 거예요?”한현진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같이 가요.”송가람의 대답에 한현진이 멈칫했다. “가람 언니도 가려고요?”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제가 가면 뭐 문제라도 있어요? 오빠는 현진 씨만의 오빠가 아니에요. 제 오빠이기도 하다고요! 저희는 20여 년을 함께 살았어요.”한현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러던가요.”송가람이 공항에 가든 안 가든 한현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똑똑해진 송가람의 모습이 의외였을 뿐이었다. 만약 두 사람이 따로 공항에 간다면 송민준은 송가람의 차에 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요즘 두 사람 사이에는 냉랭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송가람 본인도 그걸 느꼈을 테니 한현진과 함께 간다는 것은 사실은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뜻이었다. 비록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20여 년의 감정이 전부 거짓은 아니었다. 송민준과의 사이가 틀어진다면 그건 이성적이지 않은 판단이었다. 송가람도 그것을 인지했거나 아니면 서해금이 시킨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서해금의 지시라면 그녀의 목적은 단순히 화해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박해서는 두 사람을 태우고 공항으로 향했다. 3월이 거의 지나는 시점이라 날씨도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특히 점심엔 기온이
한현진은 기가 막혀 웃음을 터뜨렸다. “강한서가 그래요?”송가람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는 저희 두 집안이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라요. 그리고 여자인 현진 씨를 너무 뻘쭘한 상황에 두는 것도 원하지 않고요. 사실 우리 집도 아름드리에서 그리 멀지 않잖아요. 정말 오빠가 보고 싶으면 운전해서 잠깐이면 도착할 수 있어요. 그러면 선도 지킬 수 있고 오빠도 난감한 상황을 피할 수 있잖아요. 현진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며칠 내내 선물한 꽃다발이 정말 송가람을 붕 뜨게 만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녀는 강한서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송가람은 본인이 아름드리의 안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현진을 아름드리에서 내쫓으려 하고 있었다. “사실 전 어디서 지내든 아무 상관 없어요. 하지만 저를 아름드리로 데려간 건 강한서예요. 제가 아름드리에 있는 게 불편하다면 직접 와서 얘기하라고 해요. 강한서 한 마디면 바로 아름드리에서 나갈 테니까.”송가람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현진 씨, 한서 오빠 성격에 어떻게 직접 사람을 내쫓을 수 있겠어요. 현진 씨도 한서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요.”“강한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어서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더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침대까지 주문 제작한 사람이 왜 절 내보내려고 가람 언니에게 그런 말을 전했을까요? 가람 언니, 정말 강한서가 그렇게 얘기하라고 한 거예요? 아니면 제가 아름드리에 있는 게 싫어서 그런 말을 지어낸 거예요?”말문이 막힌 송가람의 표정이 분노가 드리웠다. “전 단지 저희 집안 입장을 생각해 현진 씨에게 제안을 한 것뿐이에요. 현진 씨가 듣고 싶지 않다면 안 들으면 그만이죠.”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전 아름드리에서 나올 수 있어요. 강한서에게 직접 와서 얘기하라고 해요. 강한서가 얘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 저에게 아름드리에서 나오라고 설득하는 사람은 전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