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은 기가 막혀 웃음을 터뜨렸다. “강한서가 그래요?”송가람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는 저희 두 집안이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라요. 그리고 여자인 현진 씨를 너무 뻘쭘한 상황에 두는 것도 원하지 않고요. 사실 우리 집도 아름드리에서 그리 멀지 않잖아요. 정말 오빠가 보고 싶으면 운전해서 잠깐이면 도착할 수 있어요. 그러면 선도 지킬 수 있고 오빠도 난감한 상황을 피할 수 있잖아요. 현진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며칠 내내 선물한 꽃다발이 정말 송가람을 붕 뜨게 만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녀는 강한서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송가람은 본인이 아름드리의 안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현진을 아름드리에서 내쫓으려 하고 있었다. “사실 전 어디서 지내든 아무 상관 없어요. 하지만 저를 아름드리로 데려간 건 강한서예요. 제가 아름드리에 있는 게 불편하다면 직접 와서 얘기하라고 해요. 강한서 한 마디면 바로 아름드리에서 나갈 테니까.”송가람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현진 씨, 한서 오빠 성격에 어떻게 직접 사람을 내쫓을 수 있겠어요. 현진 씨도 한서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요.”“강한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어서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더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침대까지 주문 제작한 사람이 왜 절 내보내려고 가람 언니에게 그런 말을 전했을까요? 가람 언니, 정말 강한서가 그렇게 얘기하라고 한 거예요? 아니면 제가 아름드리에 있는 게 싫어서 그런 말을 지어낸 거예요?”말문이 막힌 송가람의 표정이 분노가 드리웠다. “전 단지 저희 집안 입장을 생각해 현진 씨에게 제안을 한 것뿐이에요. 현진 씨가 듣고 싶지 않다면 안 들으면 그만이죠.”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전 아름드리에서 나올 수 있어요. 강한서에게 직접 와서 얘기하라고 해요. 강한서가 얘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 저에게 아름드리에서 나오라고 설득하는 사람은 전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주세은이 송가람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가람 언니, 안녕하세요.”송가람이 주세은의 손을 잡고 캐리어를 가져왔다. “가자. 일단 차에 타. 가서 짐 풀고 밥 먹으러 가자.”주세은은 거절하지 않고 송가람을 따라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한현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송민준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가자. 그렇게 보지 마. 두 사람 진작부터 알던 사이야. 은이가 국내엔 친구가 없으니 가람이와 가깝게 지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야.”한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그걸 신경 쓰는 게 아니에요. 넌 그저 생각보다 너무 어려 보여서요. 정말 오빠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실력이 있어요?”송민준이 한현진을 끌며 말했다. “지금 어린 애들 우습게 보지 마. 은이의 천부적인 재능은 네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거야.”“그게 아니라. 전 은이가 너무 어려서 걱정이에요. 조향팀엔 전부 여우 같은 사람들뿐이잖아요. 저렇게 순진한 아이를 그곳에 두는 건 너무 모험이 아닌가 싶어요.”송민준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한현진이 그런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왜요?”“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다른 사람도 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거야. 그들이 상상도 못할 수를 써야 손 쓸 틈도 없게 만들 수 있어.”송민준이 한현진의 머리카락을 쓸며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 조카들은 어때?”한현진이 살풋 미소 지었다. “너무 잘 있어요. 나중에 초음파 사진 보여줄게요.”잠시 말을 멈춘 한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빠도 이젠 서둘러야죠. 조카들이 뛰어다닐 때까지도 혼자면 오빠는 받는 것도 없이 우리 애들한테 세뱃돈만 줘야 할 거예요.”“내가 그 정도 돈도 없을까 봐?”“오빠가 돈은 많죠. 하지만 강한서 돈을 굳게 할 순 없어요.”송민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팔이 안으로 잘도 굽었네. 다음엔 강한서가 있을 때 똑같이 얘기해 봐.”한현진이 송민준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제가 얼마 전에 친구를 만났었는데 솔로인
순간 멍해졌던 송민준이 대답했다. “응. 있어.”“어디예요?”송민준이 한 방문을 가리켰다. 주세은이 말했다. “제가 오빠 방에서 지내고 오빠가 동생분 방에서 지내는 건 괜찮아요?”주세은의 말에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송민준이 곧 대답했다. “그래도 되긴 하지. 하지만 내가 방을 자주 쓰지 않아서 일상용품이 부족할 거야. 지내기 조금 불편할 텐데.”한현진이 말했다. “괜찮아요. 좀 이따 은이가 짐을 다 풀면 식사부터 해요. 그리고 방에 뭐가 부족한지 확인하고 사러 가면 되죠.”송가람이 말했다. “사실 그냥 내 방에서 지내면 되는데. 내 방엔 뭐든 다 있어.”주세은이 예의 바르게 말했다. “가람 언니, 제가 몽유병이 있어서요. 자주 증상을 보이는 편이라 혼자 있는 게 편해요.”주세은의 말에 더는 설득할 수 없어진 송가람이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그래, 그럼. 어차피 같은 집에 있을 텐데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 부르면 돼.”한현진이 눈썹을 씰룩였다. 워낙 다정한 송가람의 모습에 주세은과 친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송가람을 대하는 주세은의 태도는 예의 있게 선을 지키는 편에 가까웠다. 오히려 송민준을 대하는 태도가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아니면 여자가 남자 침실에서 지내겠다고 할 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충 짐을 푼 후 송민준은 두 사람을 데리고 밥 먹으러 집을 나섰다. 아직 어색한 탓인지 주세은은 말이 없었다. 쿨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순한 사람인 것 같았다. 밥을 먹을 때도 식사 예절이 바른 것이 눈에 보였다. 반찬 투정 없이 집어주는 대로 잘 먹으며 예의 바르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이제 막 아버지를 잃은 아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송민준은 조세은이 조향 천재라고 했다. 하지만 주세은은 인간관계에는 조금 둔감한 편이었다. 아마 천재는 모두 일반인과는 다른 부분이 있는 듯했다. 주세은의 어머니는 일 때문에 늘 바빴기에 그녀와 지내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러니 주세
[너 이건 날 벼랑 끝으로 내모는 거야. 내가 어떻게 너한테 뭐라 그래.]한현진이 문자를 작성했다. [넌 아무 말이나 하면 돼. 내가 알아서 할게.]잠시 후, 강한서가 한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현진은 일부러 송가람 가까이에 다가가서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진작 한현진의 휴대폰이 울리는 것을 듣고 있던 송가람은 한현진이 휴대폰을 꺼내자 저도 모르게 발신 번호를 확인했다. 송가람의 예상대로 강한서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송가람의 시선을 느낀 한현진이 도도한 눈빛으로 송가람을 쓱 훑더니 그녀가 보는 앞에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 들어간다고 했잖아요. 왜 재촉하는 거예요?”한현진은 일부러 짜증 나는 척 연기했다. 강한서가 말했다. “재밌는 이야기해줄게.”한현진: “할 얘기 있으면 빨리 해요.”강한서: “이탈리아의 날씨는 어떤지 알아?”한현진이 얼굴을 굳혔다. “고작 그 얘기나 하려고 전화한 거예요?”강한서: “습하게띠?”한현진이 냉소 지었다. “그렇게 말한 거 맞아요. 뭐 문제 있어요? 강한서 씨, 지금 그거 따지려고 전화한 거예요?”강한서: “습하게띠? 스파게티.” 한현진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손바닥을 꼬집으며 억지로 연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애를 썼다. “그 여자 말이면 뭐든지 다 믿는 거예요? 강한서 씨는 머리가 없어요?”비록 송가람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었지만 수화기 너머의 강한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버럭 화를 내는 한현진의 모습을 보며 강한서가 좋은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판단했다. 송가람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씩 올라갔다. 강한서가 웃으며 물었다. “어때? 지난번 그 아재 개그보단 고급스럽지 않아?”한현진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말했으면 어쩔 건데? 멍청한 자식! 애초부터 네가 들어와 살라고 한 거잖아. 이제 와서 나더러 나가라고? 꿈 깨는 게 좋을 거야.”말을 마친 한현진이 뚝 전화를 끊었다. 송가람이 걱정하는 척 한현진에게 물었다. “
두 쌍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공기 중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물론 이 상황이 뻘쭘한 건 한현진이었다. 비록 주세은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한현진은 그녀가 자신의 통화 내용을 들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은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주세은은 한현진과 짧게 인사를 나눈 후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나온 한현진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송민준에게 다가가 물었다. “가람 언니는요?”“전화를 받더니 친구가 찾는다고 먼저 갔어.”그러내며 대꾸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오빠, 주세은과는 무슨 사이예요?”송민준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사이긴? 은이는 기장님 딸이잖아.”“그게 다예요? 방금 주세은이 먹다 남긴 음식을 오빠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바로 먹어버렸잖아요.”송민준이 말했다. “만약 내가 안 먹으면 은이는 토할 때까지 꾸역꾸역 입에 넣을 거야. 기장님이 항상 먹을 만큼 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거든. 나도 처음 은이와 밥을 먹을 땐 너처럼 계속 음식을 담아줬었다. 주는 대로 잘 먹어서 먹성이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날 바로 소화불량으로 병원에 갔어.”“은이가 어렸을 때 편식을 심하게 해서 기장님이 모셔온 베이비시터가 쉽게 습관을 고치려고 은이를 자주 굶겼었어. 배가 고프면 뭐든지 잘 먹었으니까. 그때 기장님네 부부는 일로 한창 바쁘던 시기라 몇 년 동안 딸이 학대당하는 줄로 몰랐던 거야. 계속 아이가 식욕이 좋은 줄로만 알았지. 하지만 어느 날 베이비시터가 2주일간 휴가를 가고 부부가 직접 아이를 살펴보면서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 챘어.”“은이는 주는 음식은 절대 거절하지 않아. 무조건 전부 깨끗하게 먹어버렸어. 나중에 기장님은 엄청난 노력을 퍼부어 그 버릇을 고쳐야 했어. 그 덕분에 효과도 조금 있었어. 마치 조금 전처럼 말이야. 다 먹을 수 없는 음식은 다른 사람에게 권하는 거야. 하지만 음식을 받은 사람은 전부 먹어야 해. 은이 대신 버리는 게 아니라.”한현진
한현진의 분석에 송민준도 더 신중해졌다. 그는 도일준 본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한현진의 판단이 더 신뢰도가 높았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사람이 도일준이 아니라는 거야?”한현진은 어쩐지 점점 더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흐릿한 막에 가려진 듯 그 정체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한현진은 머릿속으로 그날 본 남자의 모습을 반복해 곱씹었다. 야윈 몸매에 비교적 작은 키, 꽁꽁 싸맨 얼굴. 옷 사이로 보이던 피부는 일반 남자처럼 거칠지는 않고 오히려 부드러운 편이었다...“오빠, 화재 사고로 사망했다던 도일준 씨 약혼녀 이름이 뭐예요? 사진은 있어요?”송민준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진은 없어. 도일준 씨 아버지의 친구 분 말씀으로는 그 여자는 당시 한주에서 수강하면서 알게 된 여자라고 했어. 그 여자 분도 의...”뚝, 송민준이 말을 멈췄다. 그는 획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바라보았다. “현진아, 도일준 씨 이름 초성 순서를 거꾸로 해봐.”“ㅈㅇㄷ... 조예단!”한현진이 순간 눈을 커다랗게 떴다. 송민준이 조용히 하라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쉽게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던 한현진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입을 열었다. 떨리는 한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마취사잖아요.”송민준도 흥분된 마음을 쉽게 진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줄곧 찾던 그 사람이 완전히 다른 모습, 다른 이름으로 이미 주변에서 모습을 보였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 없었다. 만약 우연하게 한현진과 마주쳐 의심을 사지 않았다면 송민준이 아무리 발이 닳도록 돌아쳐도 절대 머리카락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송민준이 마음을 진정시키며 속삭였다. “일단 내가 몰래 그 사람이 사는 곳을 알아보고 가까워질 기회를 노려볼게. 만약 그 사람이 정말 조예단이라면 그럼... 당시 그 화재도 어쩌면 사고가 아닐지도 몰라. 먼저 조예단 씨 태도를 떠볼 필요가 있어. 먼저 눈치 채게 해서는 안 돼.
“경고하는데 차에서 얌전히 있어. 새로 오신 기사님이라 어떤 사람인지 나도 아직 잘 몰라. 겉보기엔 믿을 만한 사람인 것 같긴 하지만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대외적인 네 모습 그래도 차에서도 연기해야 해. 알겠어?”차가 아직 도착도 하기 전에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일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억이 돌아온 사실을 한현진에게 들켰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강한서는 점점 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예를 들면 식사 자리에서 지인을 만나면 한현진은 여전히 두 사람의 불화를 보여주기 위해 애를 썼지만 강한서는 이미 그녀의 젓가락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부릅뜨고 강한서에게 눈치를 주면 그는 그제야 어색한 변명을 내뱉었다. “위생에 신경 좀 쓰죠. 괜히 저에게 병 옮기지 마시고요. 짜증나니까.”그러면 한현진의 인생 연기를 펼치며 강한서와 대판 “싸움”을 벌이고는 서로 차갑게 식은 얼굴로 밥을 먹었다. 이런 일을 여러 차례 겪고 난 후 한현진은 이젠 강한서와 함께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억 상실이 실제가 아닌 연기라는 사실은 언젠가 사랑에 눈이 먼 강한서 때문에 들통 날 것이다. 한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연기력을 못 믿을 수는 있어도 선생님으로써의 네 자질도 못 믿는 건 아니지?”한현진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괜히 칭찬하려고 하지마. 난 너 못 믿어. 또 들키는 날엔 각방 쓸 줄 알아.”역시나 각방 협박은 꽤 효과가 있었다. 강한서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알았어.”잠시 후, 주혁이 운전한 차가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한현진에게 인사를 건넨 주혁은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그 어떤 호기심 어린 눈빛도 보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덤덤한 태도로 뒤쪽으로 돌아가 두 사람이 차에 탈 수 있도록 문을 열고 대기했다. 한현진 역시 강한서를 소개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다만 차에 탄 후 주혁에게 말했다. “이 사람 먼저 데려다줘요. 한성그룹 앞에서 잠깐
강한서가 보낸 메시지를 보고 멈칫한 한현진이 발을 들어 강한서의 발등을 꾹 딛었다. 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그는 고통을 참으며 발을 빼냈다. 입을 앙다문 강한서가 그 메시지를 삭제하고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형님은 유전자가 좋으시니까.]강한서를 한성 그룹에 데려다 준 주혁은 한현진을 태우고 깔린느로 향했다. 주차장에 도착한 차가 주차를 하려는데 포르쉐 한 대가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들어와 같은 자리에 주차하려했다. 한현진의 차는 이제 3분의 1 정도만 들어간 채 더 이상 주차할 수 없었다. 상대방은 깜빡이를 켜고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며 그들이 후진하도록 했다. 주혁이 막 후진 하려는데 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저희가 먼저 온 거예요.”주혁은 어쩔 수 없이 움직임을 멈추고 차를 멈춰세웠다. 한현진의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상대방의 차도 주차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의 대치 후 상대방의 차문이 열리고 차에서 내린 송가람이 차창을 두드렸다. 주혁이 조금씩 창문을 내렸다. 세련된 메이크업의 송가람은 하늘색의 한복 스타일의 원피스를 입고 긴머리는 비녀로 뒤에 고정했다.송가람은 스스로 골격이 작은 몸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원피스로는 특유의 분위기를 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한복 스타일의 원피스는 그녀의 깡마른 몸매에 딱 어울리는 코디였다. 게다가 청아한 분위기를 더해주기도 했다. 다만 청순가련한 얼굴에 드리워진 표정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아저씨, 차 좀 뒤로 빼주실래요? 저 지금 주차하려는 거 안 보여요? 그리고 여긴 저희 회사 전용 주차 공간이에요. 여기에 주차하면 안 돼요.”주혁은 사람과의 소통이 어색한 듯 핸들을 꽉 움켜쥐고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한현진이 안전벨트를 풀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송가람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느 매너 없는 인간이 이렇게 주차 자리를 뺏나 했더니 같은 회사 식구였네요.”말하며 한현진은 송가람의 포르쉐를 힐끔 쳐다보았다. “새 차 뽑았어요? 멋지네
남자의 말에 신하리가 대답했다.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인사는 너무 빠른 것 같아요.”남자가 말을 이었다. “너도 이젠 어린 나이 아니잖아. 아버지와 아주머니께서도 계속 네 결혼 때문에 걱정이 많으셔. 특히 아주머니는 흰머리까지 많아지셨어. 만나는 사람도 생겼으니 빨이 집에 데려와 인사 드려야지. 그래야 아주머니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거야.”입술을 짓이기던 신하리가 말을 이었다. “이제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게다가 요리는 저보다 몇 살이나 어리고 아직 한창 일에 집중해야 되는 시기라 저희는 최근 몇 년 사이엔 결혼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굳이 이렇게 일찍 집에 인사드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몇 년 후 열이도 배우로 자리 잡고 저희도 여전히 좋은 감정으로 잘 만나고 있어서 열이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땐 얘기하지 않으셔도 저희가 먼저 인사드리러 갈 거예요.”신하리는 남자가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다른 일 없으면 먼저 끊을게요. 열이가 요즘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서 스트레스가 많거든요. 요즘엔 또 말도 안 되는 루머에 시달리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 내서 옆에 있어주고 싶어요. 그래서 이번 주 가족 모임엔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두 분께 전해주세요.”말을 마친 신하리가 전화를 뚝 끊었다. 전화가 끊기기 바로 직전, 신하리는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둔탁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인 것 같았다. 물론 신하리는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수없이도 봐왔었다. 전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떨렸지만 이젠 그녀의 마음에 별다른 파장을 일으키지 않았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힘들었던 일도, 영원히 지나지 않을 것 같던 일도 결국은 시간이 모두 해결해 주었다. 생각에 잠겼던 신하리가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한열이 고개를 갸우뚱한 채 이상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신하리는 조금 전 자신이 꼬집었던 한열
‘이렇게 뻔뻔한 여자였어?’‘사랑하긴 개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들어 안 도와주면 죽어버리겠다는 표정으로 사정하지만 않았어도 난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거라고.’신하리의 이런 뻔뻔한 거짓말은 한열도, 수화기 너머의 남자도 믿지 않았다. 남자는 심지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괜히 볼멘소리하지 마. 네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온 가족이 다 알아.”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신하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얼마나 세게 휴대폰을 꽉 움켜쥔 건지 손톱마저도 조금 하얗게 질려있었다. 시선을 내린 신하리가 실소를 터뜨렸다. “하도 시간이 오래 되어서 잊으셨나보네요.”“뭘?”신하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제 첫사랑은 남자였어요. 처음 좋아했던 사람도 남자였고요.”신하리의 옆에 앉아있던 한열은 그녀의 통화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한열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신하리를 힐끔 쳐다보며 생각했다.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지, 그럼 여자겠어?’하지만 한열과 달리 윤명훈은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마음에 폭풍이 몰아쳤다. ‘설마 신하리에 대한 루머가 사실이었다는 거야?’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풋, 소리 내 웃었다. “장난하지 마.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넌 키스신도 한 번 찍은 적 없어. 너희 바닥에서야 그런 널 도도하다고 하겠지만 난 알아. 넌 남자와 스킨십조차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심지어 숨결만 느껴져도 본능적으로 구역질을 하잖아. 그런 네가 남자친구를 사귀어?”이를 악문 신하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주연이 얘기 안 해요?”“뭘?”“그날 제작발표회에서 제가 주연이 보는 앞에서 제 남자친구와 키스한 거.”...상대방이 말이 없자 신하리가 말을 이었다. “주연이 안 믿을 것 같아서 보여준 거예요. 맞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살짝 만지는 것도 전 역겨워요. 주연도 같은 생각이었겠죠.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잘 아니까. 저도 열이를 만나고 나서야 알게
한열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하리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의 말에 속상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 분명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를 위해 돌을 막아줬을 리가 없었다. 그런 마음에 아니라면, 그에게 장난을 치며 관심을 끌었을 리가 없었다. ‘조금 전 내가 너무 상처 되는 말을 하긴 했어.’여전히 고민하는 한열의 귓가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한열이 멍한 표정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신하리가 배를 끌어안은 채 폭소하고 있었다. 눈물까지 찔끔 흘린 그녀는 웃느라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똥강아지, 너 솔직하게 얘기해. 태어나서 한 번도 연애해 본 적 없지?”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는 신하리의 얼굴엔 슬픔이라곤 전혀 없이 온통 장난기뿐이었다. 그제야 또라이 같은 여자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한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윤명훈도 운전석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티베탄 마스티프는 사촌 누나 앞에서만 순한 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한열을 길들이는 사람이 있다니. 역시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이 있는 법이었다. 수치와 분노를 동시에 느낌 한열이 바득 이를 갈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신하리를 물어버릴 것처럼 말했다. “제가 사귀었던 사람은 신하리 씨가 손가락 다 사용해도 부족할 거예요!”“소꿉놀이 같은 연애 말하는 거야?”신하리가 야유 섞인 말투로 한열을 놀렸다. “설마 첫 키스 상대가 나였던 거 아냐?”순간 뜨끔한 한열의 몸이 어색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저 한열을 놀리려던 신하리는 그의 반응에 당황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정말 나야?!”한열이 창피함을 못 이겨 버럭 화를 냈다. “아니거든요!”하지만 한열은 거짓말엔 너무 소질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신하리에게 이렇게 빨리 모태 솔로라는 사실을 들켰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거짓말이 소용없다는 것을 인식한 한열이 자포자기하며 말했다. “제가 신하리 씨와 전에 했던 건 첫키스 아녜요. 제가 일부러 신하리 씨 기분 더럽게 하려고 한
한열이 입술을 짓이겼다. “제가 신하리 씨와 공개 연애를 선택한 건 신하리 씨가 저에게 감독님을 소개해주길 바랐기 때문이었어요. 우린 서로가 원하는 걸 해주기로 계약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제가 신하리 씨를 도와준 거라고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신하리 씨는 이번에 저 때문에 진짜로 다쳤어요. 이건 제가 신하리 씨에게 빚 진 거예요.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뭐든지 얘기해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까.”멈칫한 신하리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눈앞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탑 아이돌을 쳐다보았다. ‘이 바닥에 아직도 이렇게 단순한 자식이 있었어?’아무리 신하리가 한열에게 유리한 계약 조건을 달았다고 하더라도 계약 연애는 한열에겐 이득보단 손해가 더 많았다. 게다가 유명한 감독과 작품을 하고 싶다면 사촌 형인 송민준에게 부탁해도 충분했다. 굳이 신하리와 엮일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 한열의 SNS 댓글은 눈에 띌 정도로 악플이 늘었다. 여자친구인 신하리도 공개 연애 후 수많은 악플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극단적인 성향을 지닌 팬들은 그녀의 영정사진을 만들어 죽은 쥐과 칼날과 함께 넣어 택배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니 한열 쪽 상황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 전 신하리가 한열 대신 돌을 맞은 건 그가 얼굴을 다쳐 연예계 생활에 영향을 끼칠까 봐 걱정된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죄책감 때문에 한열에게 이렇게라도 빚을 갚아야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이 자식, 정말 멍천한 거였잖아? 이렇게까지 정중하게 신세를 졌다며 은혜를 갚겠다고 하다니. 이런 멍청해서야 대체 어떻게 인지도를 올릴 수 있었던 거야?’‘고담시 한씨 가문은 모두가 알아주는 명문가잖아. 그런 집안에서 대체 어떻게 이렇게 멍청한 아들이 나올 수 있는 거지? 눈치 빠르고 꿍꿍이가 많은 사촌 누나와 형에, 심지어 12살짜리 막내 동생도 쟤보다는 똑똑하겠어.’잡혀가서도 인질범 편을 들어줄 것 같은 한열의 모습에 신하리는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졌다. 한
윤명훈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인터넷에 떠도는 스캔들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동안, 이 미친 인간들은 경찰서 앞에서 소란을 피웠다. 한열의 반항적인 성격을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윤명훈은 충분히 버거웠다. ‘하지만 이젠 한 명이 더 늘었잖아. 젠장. 그 놈의 돈 벌기가 점점 더 힘드네!’비록 화가 치밀긴 했지만 의식을 잃은 신하리와 한열 몸에 묻은 피를 보자 윤명훈도 걱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신하리 씨는 어때?”“안 죽어요.”한열이 신하리가 꼬집던 허리를 어루만지며 쓰러진 척 연기하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연기할래요?”그제야 천천히 눈을 뜬 신하리는 한열의 눈빛과 반말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 누나 연기가 좀 실감났어?”흥, 콧방귀를 뀐 한열이 시선이 저도 모르게 신하리의 뒤통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머리숱이 많아 얼마나 많이 다친 건지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날아온 돌멩이는 힘이 꽤 실려있었다. 옆에 있던 한열의 귀에도 돌멩이가 무겁게 머리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신하리는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제외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녀는 심지어 티슈를 뽑아 뒤통수의 피를 닦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열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티슈로 상처 닦으면 안 돼요. 더럽잖아요.”“더러우면 걸레라고 하겠지, 왜 티슈라고 부르겠어?”신하리가 억지스러운 논리를 늘어놓았다. “티슈로 엉덩이를 닦을 땐 왜 더럽다고 하지 않는 거야?”한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가 티슈로 엉덩이를 닦지, 치질을 닦는 건 아니잖아요.”멈칫하던 신하리가 순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장난스레 말했다. “너 아이돌 이미지는 버린 거야? 아이돌 입에서 어떻게 엉덩이니, 치질이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어?”한열이 불퉁한 말투로 대답했다. “머리 상처에 출혈이 꽤 있었어요. 티슈로 닦으면 상처에 먼지가 붙어서 염증이 날 거예요. 나중에 흉터
한열의 마음에 남아있던 감동이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두 사람이 신고를 마치고 나오자 경찰서 밖은 이미 수많은 기자와 팬들로 둘러싸였다. 경찰서 앞이었던 만큼 경찰들이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 현장은 그나마 평화로웠다. 한열이 신하리를 감싸며 차에 오르던 그때,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열!”한열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란 크기의 돌멩이가 한열을 향해 날아왔다. 한열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앞으로 누군가 나타나 온 몸으로 돌멩이를 막았다. 신하리였다. 그 돌은 신하리의 뒤통수에 부딪혔다. 극심한 통증에 신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몸이 앞으로 휘청였다. 한열이 무의식적으로 신하리를 부축했다. 미간을 찌푸린 신하리가 손을 뻗어 돌멩이에 맞은 곳을 만졌다. 뜨뜻하고 축축한 촉감이 느껴졌다. 손바닥을 펼치자 빨간색의 피로 흥건했다. 신하리의 부축하고 있던 한열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의 얼굴은 섬뜩할 정도로 창백했다. 돌을 던진 사람이 큰소리로 질타했다. “개 같은 자식!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투표해서 널 데뷔시켰는데. 연애도 부족해서 이젠 뭐, 성추행? 팬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아?”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심지어 옆에서 질서를 유지하던 결찰들도 미처 반응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돌을 던진 그 사람이 달려들려고 하자 경찰이 얼른 앞으로 나서 제압했다. 그 사람은 심지어 바닥에 제압당한 채 여전히 욕설을 내뱉으며 난동을 부렸다. “네가 이런 인간이란 걸 진작 알았다면 차라리 지나가는 강아지에게 투표를 했을 거야! 넌 정말 네가 연기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정말 팬들이 네 재능에 반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 그 반반한 얼굴 아니었으면 너에게 투표한 사람이 있긴 했을 것 같아? 팬들 덕에 넌 아이돌이 될 수 있었던 거야. 팬들이 아니면 넌 아무 것도 아니라고!”구경 중이던 사람들과 기자들이 미친 듯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한열은 신하리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그녀의
신하리는 말하며 예쁜 눈웃음을 지었다. “저 정신병 있는 거 다들 아시죠?”그 말에 사람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얼마 전, 신하리가 한 드라마 촬영 중 현장에서 갑자기 귀신에 쓰인 사람처럼 아무런 안정장비도 하지 않은 채 6미터가 넘는 곳에서 뛰어내려 뼈가 부러진 사건이 있었다. 다들 신하리에게 왜 뛰어내렸냐고 묻자 그녀는 아래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그러나 당시 상황을 증명해 줄 동영상은 없었고 그 사건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처럼 듣고 지나보냈었지만 지금 신하리의 입으로 직접 그녀에게 정신병이 있다고 말하니 그때의 사건을 떠올린 사람들은 순산 오싹함을 느껴야 했다. 이건 분명한 경고였다. 마치 난 심신이 미약한 사람이라 너에게 정말 염산을 뿌려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으니 내 말을 장난으로 가볍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신하리의 등장으로 [아기 고양이]의 라이브 방송의 인기는 더 뜨거워졌다. 댓글에도 다양한 의견이 더 많아졌다. [사랑에 눈이 먼 연예인 1위! 보상은 산에서 산나물 캐기 18년!][신하리 미친 거 아녜요? 이렇게 대놓고 협박이라니.][면전에 협박하는데 아직도 신고하지 않는다고? 증거가 없는 거야, 아님 애초부터 한열을 모함하고 있었던 거야?][성추행을 한 사람도 경찰서에 신고했는데 당한 사람은 대체 뭐가 무서워서 신고하지 않는 거야.][지난번에 스스로 신고한 인간은 아직도 감옥에서 사회봉사 중이예요.][만약 지금 당장 신고한다면 전 아기 고구마 말을 믿을 거예요. 계속 이런 식으로 수작을 부리는 건 오히려 한열을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작당 모의에 더 가까워 보여요.][지금 루머를 퍼뜨리는 건 너무 쉬운 일이 됐어요. 스크린샷 몇 장이면 바로 스토리를 짤 수 있으니까요.]여론이 점차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멀어지자 [아기 고구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지금 저 협박하시는 거예요? 아
신하리의 라이브 방송 연결 요청에 [아기 고구마]가 잠시 멍해졌다. 무의식적으로 옆을 바라보던 그녀가 곧 시선을 돌렸다. 많은 사람들은 그 미세한 행동을 포착하지 못했지만 한현진에겐 들키고 말았다. [아기 고구마]는 혼자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 듯 했다. 그녀의 옆에는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라이브 방송을 시청하던, 궁금증 해소를 위해 모인 사람들과 진실 규명을 바라는 팬들이 미친 듯이 댓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겁쟁이! 네가 그러고도 무슨 남자야! 사건이 터지면 뒤로 물러나 여자친구가 나서서 모든 걸 감당하게 하다니. 네 팬이었다는 게 너무 후회돼!][끼리끼리는 과학이라잖아요. 한열이 이런 쓰레기라면 신하리도 그리 좋은 인간은 아니지 않겠어요? 연결해요.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죠.][언니! 얼른 입도 벙긋 못하게 증거를 뿌려버려요. 저런 인간은 아이돌을 할 자격이 없어요.][경찰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난 영원히 한열을 믿을 거야!][덕질에 도덕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나보네.]...[아기 고구마]는 사람들의 부추김에 신하리와 라이브 방송을 연결했다.신하리의 모습이 라이브 방송 화면에 나타나자 카메라는 신하리의 얼굴을 향해 바짝 다가갔다. 후드 차림에 화장도 하지 않은 신하리가 카메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그쪽 대신 경찰에 신고했어요. 얼른 오세요.”카메라가 홱 회전하며 한주 용하구의 경찰서 대문을 비췄다. 그에 라이브 방송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순간 멍해졌다. ‘신하리, 미친 거야? 어제 저녁에도 한열 대신 해명해주더니.’[아기 고구마]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전, 전 신고한다고 안 했어요.”신하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한열이 그쪽을 성추행했다면서 신고를 안 해요? 성모 마리아세요? 방송으로 울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보다 신고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어요? 경찰은 그쪽을 도와줄 수 있는데도 싫다고요?”네티즌들도 신하리의 말을 따라 댓글을 남겼다. [맞아요
알겠다고 대답한 한현진이 전화를 끊기 전 호기심을 못 이겨 물었다. “오빠, 문채영 씨와는 어떻게 됐어요?”멈칫한 송민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서 그 자식 혹시 네 옆에 있어?”한현진이 움찔하며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가로젓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한현진이 대답했다. “아뇨. 샤워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말을 믿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개의치 않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걔한테 내 말 똑바로 전해. 다음에 또 이렇게 입을 가볍게 놀렸다간 내가 그 입을 꿰매 버릴 거라고.”강한서: ...그 말에 한현진이 어색하게 하하, 웃어버렸다. “사실 강한서는 별말 안 했어요...”송민준은 더는 아무 말 없이 일찍 쉬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송민준의 얼굴이 공개된 후, 한열의 바람 스캔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사람들도 점차 한현진이 한열의 사촌누나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열의 성추문은 여전히 일파만파 퍼져나갔다.한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은 [아기 고구마]였다. 이 계정은 피드를 올릴 때마다 다음 업로드 시간을 예고하며 다음엔 마치 증거를 공개할 것처럼 사람들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에 [아기 고구마] 계정의 팔로워는 점차 늘어갔다. 하지만 예고와는 달리 매번 터무니없는 사실들만 업로드 했고 그 피드의 내용으로는 한열이 여자 연예인을 성추행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정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다.하룻밤 사이, 한열의 팔로우는 십만 명 이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열의 회사 측에서는 변호사가 작성한 소장을 공개하며 이미 경찰에 신고를 마쳤고 루머를 퍼뜨린 사람을 찾아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한열의 회사에서 소장을 공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 고구마]도 페이스북에 점심 열두시부터 라이브 방송으로 빼박 증거를 공개해 한열과 직접 맞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에 네티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