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멍해졌던 송민준이 대답했다. “응. 있어.”“어디예요?”송민준이 한 방문을 가리켰다. 주세은이 말했다. “제가 오빠 방에서 지내고 오빠가 동생분 방에서 지내는 건 괜찮아요?”주세은의 말에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송민준이 곧 대답했다. “그래도 되긴 하지. 하지만 내가 방을 자주 쓰지 않아서 일상용품이 부족할 거야. 지내기 조금 불편할 텐데.”한현진이 말했다. “괜찮아요. 좀 이따 은이가 짐을 다 풀면 식사부터 해요. 그리고 방에 뭐가 부족한지 확인하고 사러 가면 되죠.”송가람이 말했다. “사실 그냥 내 방에서 지내면 되는데. 내 방엔 뭐든 다 있어.”주세은이 예의 바르게 말했다. “가람 언니, 제가 몽유병이 있어서요. 자주 증상을 보이는 편이라 혼자 있는 게 편해요.”주세은의 말에 더는 설득할 수 없어진 송가람이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그래, 그럼. 어차피 같은 집에 있을 텐데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 부르면 돼.”한현진이 눈썹을 씰룩였다. 워낙 다정한 송가람의 모습에 주세은과 친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송가람을 대하는 주세은의 태도는 예의 있게 선을 지키는 편에 가까웠다. 오히려 송민준을 대하는 태도가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아니면 여자가 남자 침실에서 지내겠다고 할 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충 짐을 푼 후 송민준은 두 사람을 데리고 밥 먹으러 집을 나섰다. 아직 어색한 탓인지 주세은은 말이 없었다. 쿨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순한 사람인 것 같았다. 밥을 먹을 때도 식사 예절이 바른 것이 눈에 보였다. 반찬 투정 없이 집어주는 대로 잘 먹으며 예의 바르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이제 막 아버지를 잃은 아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송민준은 조세은이 조향 천재라고 했다. 하지만 주세은은 인간관계에는 조금 둔감한 편이었다. 아마 천재는 모두 일반인과는 다른 부분이 있는 듯했다. 주세은의 어머니는 일 때문에 늘 바빴기에 그녀와 지내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러니 주세
[너 이건 날 벼랑 끝으로 내모는 거야. 내가 어떻게 너한테 뭐라 그래.]한현진이 문자를 작성했다. [넌 아무 말이나 하면 돼. 내가 알아서 할게.]잠시 후, 강한서가 한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현진은 일부러 송가람 가까이에 다가가서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진작 한현진의 휴대폰이 울리는 것을 듣고 있던 송가람은 한현진이 휴대폰을 꺼내자 저도 모르게 발신 번호를 확인했다. 송가람의 예상대로 강한서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송가람의 시선을 느낀 한현진이 도도한 눈빛으로 송가람을 쓱 훑더니 그녀가 보는 앞에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 들어간다고 했잖아요. 왜 재촉하는 거예요?”한현진은 일부러 짜증 나는 척 연기했다. 강한서가 말했다. “재밌는 이야기해줄게.”한현진: “할 얘기 있으면 빨리 해요.”강한서: “이탈리아의 날씨는 어떤지 알아?”한현진이 얼굴을 굳혔다. “고작 그 얘기나 하려고 전화한 거예요?”강한서: “습하게띠?”한현진이 냉소 지었다. “그렇게 말한 거 맞아요. 뭐 문제 있어요? 강한서 씨, 지금 그거 따지려고 전화한 거예요?”강한서: “습하게띠? 스파게티.” 한현진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손바닥을 꼬집으며 억지로 연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애를 썼다. “그 여자 말이면 뭐든지 다 믿는 거예요? 강한서 씨는 머리가 없어요?”비록 송가람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었지만 수화기 너머의 강한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버럭 화를 내는 한현진의 모습을 보며 강한서가 좋은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판단했다. 송가람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씩 올라갔다. 강한서가 웃으며 물었다. “어때? 지난번 그 아재 개그보단 고급스럽지 않아?”한현진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말했으면 어쩔 건데? 멍청한 자식! 애초부터 네가 들어와 살라고 한 거잖아. 이제 와서 나더러 나가라고? 꿈 깨는 게 좋을 거야.”말을 마친 한현진이 뚝 전화를 끊었다. 송가람이 걱정하는 척 한현진에게 물었다. “
두 쌍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공기 중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물론 이 상황이 뻘쭘한 건 한현진이었다. 비록 주세은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한현진은 그녀가 자신의 통화 내용을 들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은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주세은은 한현진과 짧게 인사를 나눈 후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나온 한현진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송민준에게 다가가 물었다. “가람 언니는요?”“전화를 받더니 친구가 찾는다고 먼저 갔어.”그러내며 대꾸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오빠, 주세은과는 무슨 사이예요?”송민준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사이긴? 은이는 기장님 딸이잖아.”“그게 다예요? 방금 주세은이 먹다 남긴 음식을 오빠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바로 먹어버렸잖아요.”송민준이 말했다. “만약 내가 안 먹으면 은이는 토할 때까지 꾸역꾸역 입에 넣을 거야. 기장님이 항상 먹을 만큼 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거든. 나도 처음 은이와 밥을 먹을 땐 너처럼 계속 음식을 담아줬었다. 주는 대로 잘 먹어서 먹성이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날 바로 소화불량으로 병원에 갔어.”“은이가 어렸을 때 편식을 심하게 해서 기장님이 모셔온 베이비시터가 쉽게 습관을 고치려고 은이를 자주 굶겼었어. 배가 고프면 뭐든지 잘 먹었으니까. 그때 기장님네 부부는 일로 한창 바쁘던 시기라 몇 년 동안 딸이 학대당하는 줄로 몰랐던 거야. 계속 아이가 식욕이 좋은 줄로만 알았지. 하지만 어느 날 베이비시터가 2주일간 휴가를 가고 부부가 직접 아이를 살펴보면서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 챘어.”“은이는 주는 음식은 절대 거절하지 않아. 무조건 전부 깨끗하게 먹어버렸어. 나중에 기장님은 엄청난 노력을 퍼부어 그 버릇을 고쳐야 했어. 그 덕분에 효과도 조금 있었어. 마치 조금 전처럼 말이야. 다 먹을 수 없는 음식은 다른 사람에게 권하는 거야. 하지만 음식을 받은 사람은 전부 먹어야 해. 은이 대신 버리는 게 아니라.”한현진
한현진의 분석에 송민준도 더 신중해졌다. 그는 도일준 본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한현진의 판단이 더 신뢰도가 높았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사람이 도일준이 아니라는 거야?”한현진은 어쩐지 점점 더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흐릿한 막에 가려진 듯 그 정체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한현진은 머릿속으로 그날 본 남자의 모습을 반복해 곱씹었다. 야윈 몸매에 비교적 작은 키, 꽁꽁 싸맨 얼굴. 옷 사이로 보이던 피부는 일반 남자처럼 거칠지는 않고 오히려 부드러운 편이었다...“오빠, 화재 사고로 사망했다던 도일준 씨 약혼녀 이름이 뭐예요? 사진은 있어요?”송민준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진은 없어. 도일준 씨 아버지의 친구 분 말씀으로는 그 여자는 당시 한주에서 수강하면서 알게 된 여자라고 했어. 그 여자 분도 의...”뚝, 송민준이 말을 멈췄다. 그는 획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바라보았다. “현진아, 도일준 씨 이름 초성 순서를 거꾸로 해봐.”“ㅈㅇㄷ... 조예단!”한현진이 순간 눈을 커다랗게 떴다. 송민준이 조용히 하라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쉽게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던 한현진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입을 열었다. 떨리는 한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마취사잖아요.”송민준도 흥분된 마음을 쉽게 진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줄곧 찾던 그 사람이 완전히 다른 모습, 다른 이름으로 이미 주변에서 모습을 보였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 없었다. 만약 우연하게 한현진과 마주쳐 의심을 사지 않았다면 송민준이 아무리 발이 닳도록 돌아쳐도 절대 머리카락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송민준이 마음을 진정시키며 속삭였다. “일단 내가 몰래 그 사람이 사는 곳을 알아보고 가까워질 기회를 노려볼게. 만약 그 사람이 정말 조예단이라면 그럼... 당시 그 화재도 어쩌면 사고가 아닐지도 몰라. 먼저 조예단 씨 태도를 떠볼 필요가 있어. 먼저 눈치 채게 해서는 안 돼.
“경고하는데 차에서 얌전히 있어. 새로 오신 기사님이라 어떤 사람인지 나도 아직 잘 몰라. 겉보기엔 믿을 만한 사람인 것 같긴 하지만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대외적인 네 모습 그래도 차에서도 연기해야 해. 알겠어?”차가 아직 도착도 하기 전에 한현진은 강한서에게 일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억이 돌아온 사실을 한현진에게 들켰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강한서는 점점 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예를 들면 식사 자리에서 지인을 만나면 한현진은 여전히 두 사람의 불화를 보여주기 위해 애를 썼지만 강한서는 이미 그녀의 젓가락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부릅뜨고 강한서에게 눈치를 주면 그는 그제야 어색한 변명을 내뱉었다. “위생에 신경 좀 쓰죠. 괜히 저에게 병 옮기지 마시고요. 짜증나니까.”그러면 한현진의 인생 연기를 펼치며 강한서와 대판 “싸움”을 벌이고는 서로 차갑게 식은 얼굴로 밥을 먹었다. 이런 일을 여러 차례 겪고 난 후 한현진은 이젠 강한서와 함께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억 상실이 실제가 아닌 연기라는 사실은 언젠가 사랑에 눈이 먼 강한서 때문에 들통 날 것이다. 한현진의 말에 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연기력을 못 믿을 수는 있어도 선생님으로써의 네 자질도 못 믿는 건 아니지?”한현진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괜히 칭찬하려고 하지마. 난 너 못 믿어. 또 들키는 날엔 각방 쓸 줄 알아.”역시나 각방 협박은 꽤 효과가 있었다. 강한서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알았어.”잠시 후, 주혁이 운전한 차가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한현진에게 인사를 건넨 주혁은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그 어떤 호기심 어린 눈빛도 보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덤덤한 태도로 뒤쪽으로 돌아가 두 사람이 차에 탈 수 있도록 문을 열고 대기했다. 한현진 역시 강한서를 소개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다만 차에 탄 후 주혁에게 말했다. “이 사람 먼저 데려다줘요. 한성그룹 앞에서 잠깐
강한서가 보낸 메시지를 보고 멈칫한 한현진이 발을 들어 강한서의 발등을 꾹 딛었다. 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그는 고통을 참으며 발을 빼냈다. 입을 앙다문 강한서가 그 메시지를 삭제하고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형님은 유전자가 좋으시니까.]강한서를 한성 그룹에 데려다 준 주혁은 한현진을 태우고 깔린느로 향했다. 주차장에 도착한 차가 주차를 하려는데 포르쉐 한 대가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들어와 같은 자리에 주차하려했다. 한현진의 차는 이제 3분의 1 정도만 들어간 채 더 이상 주차할 수 없었다. 상대방은 깜빡이를 켜고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며 그들이 후진하도록 했다. 주혁이 막 후진 하려는데 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저희가 먼저 온 거예요.”주혁은 어쩔 수 없이 움직임을 멈추고 차를 멈춰세웠다. 한현진의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상대방의 차도 주차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의 대치 후 상대방의 차문이 열리고 차에서 내린 송가람이 차창을 두드렸다. 주혁이 조금씩 창문을 내렸다. 세련된 메이크업의 송가람은 하늘색의 한복 스타일의 원피스를 입고 긴머리는 비녀로 뒤에 고정했다.송가람은 스스로 골격이 작은 몸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원피스로는 특유의 분위기를 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한복 스타일의 원피스는 그녀의 깡마른 몸매에 딱 어울리는 코디였다. 게다가 청아한 분위기를 더해주기도 했다. 다만 청순가련한 얼굴에 드리워진 표정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아저씨, 차 좀 뒤로 빼주실래요? 저 지금 주차하려는 거 안 보여요? 그리고 여긴 저희 회사 전용 주차 공간이에요. 여기에 주차하면 안 돼요.”주혁은 사람과의 소통이 어색한 듯 핸들을 꽉 움켜쥐고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한현진이 안전벨트를 풀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송가람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느 매너 없는 인간이 이렇게 주차 자리를 뺏나 했더니 같은 회사 식구였네요.”말하며 한현진은 송가람의 포르쉐를 힐끔 쳐다보았다. “새 차 뽑았어요? 멋지네
비록 한현진이 주차 자리를 양보했지만 그녀가 던진 말들은 가시처럼 송가람의 가슴에 콕 박혔다. 경고이자 모욕이었다. 한현진은 단순히 송가람에게 주차 자리를 양보한 것이라 아니었다. 한현진은 송가람에게 똑똑히 알려준 것이다. 송씨 가문의 친딸이 돌아왔으니 송씨 가문의 모든 것은 그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져갈 수 있다고. 한현진이 송가람에게 내어준 것은 단지 은덕을 베푸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주혁이 주차를 마치자 한현진이 그에게 말했다. “기사님, 구내식당 담당자 분에게 가셔서 식권 발급받으세요. 아침, 점심 전부 거기서 드시면 돼요. 매달 월급에서 5만 원씩 차감할 거예요. 나머지는 회사에서 부담할 거고요. 제가 이미 식당 담당자님께 얘기해뒀어요.”한현진이 말을 이었다. “도시락 가져오셔도 돼요. 드실만큼 배식하시고 남기지만 않으면 상관없어요.”주혁의 아들은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의 집에는 지적장애가 있는 아내뿐이었다. 혼자서는 생활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가족을 보살피기 위해 안정적인 직업으로 이직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구내식당은 퀼리티도 꽤 괜찮은 편이라 집에 가져간다면 아내의 식사 걱정을 덜 수도 있었다. 물론 한현진의 인류애가 넘쳐나서 이런 복지를 주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직원의 고민을 해결하면 상대방은 더욱 마음을 놓고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누구든 쉬운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감사의 인사를 전하던 주혁이 곧이어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한현진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뭐가요?”주혁이 말을 더듬었다. “그... 조금 전 일 말이예요. 여쭤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창문을 열어서 죄송해요.”한현진이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전 또 뭐라고. 괜찮아요.”그럼에도 주혁은 다시 한 번 사과하고는 말을 이었다. “다음에 또 그 분과 마주치면 비켜주어야 하나요, 아니면 비켜주지 말까요?”“양보해줘요.”한현진이 미소 지으며 말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요?”“그쪽은 입 없어요? 올라가서 물어보면 되잖아요. 얼른 이거 놔요. 더 지체하시면 저희 지각해요.”뻘쭘해진 주혁이 엘리베이터 문을 막고 있던 손을 놓으려는데 송가람이 갑자기 말했다. “아저씨. 타세요. 제가 데려다드릴게요.”주혁이 황망히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 2층에 도착하자 송가람은 주혁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녀는 주혁을 데리고 식권을 발급받고 사용방법까지 가르쳐주었다.. 식권을 손에 꼭 쥔 주혁이 송가람에게 고맙다며 인사했다.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송가람을 주혁이 불렀다. “송가람 씨.”송가람이 고개를 돌렸다. “또 무슨 일이시죠?”주머니에서 비닐봉지를 꺼낸 주혁이 떨리는 손으로 송가람에게 건넸다. “이건 저희 집사람이 삶은 계란이에요. 도와주셔서 고마워요.송가람은 주혁이 건넨 계란을 내려다보았다. 계란을 쥐고 있는 주혁의 손은 거뭇거뭇했고 손톱 틈 사이에는 심지어 검댕이가 희미하게 보이기도 했다. 고된 일을 하는 사람 대부분의 손은 이럴 수밖에 없었다. 깊은 지문 사이에 먼지가 끼고 시간이 오래될수록 씻어내기가 어려워졌다. 시선을 거둔 송가람이 미소 지었다. “아내분이 준비해주신 아침이잖아요. 이걸 저에게 주시면 아저씨는 뭘 드시려고요?”주혁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전, 전 이미 먹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말하며 주혁은 또 다시 계란을 송가람 쪽으로 내밀었다. “받으세요. 집에서 기른 닭이 낳은 계란이에요. 토종란이라 영양가가 높아요.”잠시 침묵하던 송가람이 손을 뻗어 계란을 받았다. “고마워요.”손바닥에 올려진 계란은 심지어 아직도 따뜻했다. 아마도 몸에 품고 있었던 것 같았다. 손을 흔들어 인사한 송가람이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밖으로 나온 송가람은 계란을 엘리베이터 입구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졌다. 작은 도움만 줘도 감격하는 사람은 이용하기 딱 좋았다. 한현진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별로였다. 송가람이 사무실에 도착한지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