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칫하던 주강운이 물었다. “어디로 가면 돼?”한성우가 주소를 알려주었다. 주강운이 물었다. “한서도 가?”한성우가 짜증 난 말투로 말했다. “그 배은망덕한 놈 얘기는 꺼내지도 마. 기억을 잃더니 우리가 뭐 자기한테 빚이라도 진 것처럼 굴잖아. 그리고 한현진 씨도 똑같아. 매번 내가 미주랑 싸우기만 하면 헤어지라고 부추기잖아. 우리 사이는 전부 그 인간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오늘도 이 일 때문에 미주가 또 나한테 화를 냈다니까. 짜증 나게.”시간을 확인한 주강운이 말했다. “위치 보내줘. 좀 이따 택시 타고 갈게.”주강운이 만나기로 약속한 바에 도착했을 때, 한성우와 신우는 이미 룸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룸에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도 다른 재벌가의 아들딸도 있었다. 주강운이 룸으로 들어섰을 때 그들은 모여 게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한성우는 입에 담배를 물고 주사위를 돌리며 옆에 앉은 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유머러스한 멘트를 날리는 한성우의 모습은 바람둥이 그 자체였다. 여자들은 한성우의 말에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 앉은 신우는 시끌벅적한 한성우 주변에 비하면 비교적 조용한 썰렁한 편이었다. 신우는 애초부터 유흥을 즐기는 재벌 2세들과는 달랐다. 예전부터 이런 자리엔 신학이 어쩌다 한 번 나오고는 했다. 하지만 신학은 미친놈과도 다름이 없었다. 술에 취해 다른 사람을 중상에 이르도록 폭행한 사건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친구들은 신학을 술자리에 잘 부르지 않게 되었다. 예전의 신우라면 절대 이런 자리엔 나오지 않았다. 고여정과 결혼 후 신우는 인기가 많아지기라도 한 듯 가끔 술자리에 들러 친구들과 모임을 가졌다. 비록 말은 별로 없었지만 인사를 건네는 사람에게는 예의 있게 말을 건네기도 했다. 모두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니 서로 비즈니스를 함께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서로 인맥을 쌓는다면 앞으로 일을 함에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예전의 신우는 매너는 몸에 밴 사람이었지만 융통성이 부족해 너무 딱딱
모임 비용이 굳은 한성우는 바로 주사위를 옆에 있는 사람에게 던져버리고는 술 두 잔을 들어 하나를 주강운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주강운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사무실에서 오는 거야?”“응.”이라고 대답한 주강운이 한성우가 건네는 술잔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넌 차미주 씨와 왜 싸운 거야?”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성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술자리에선 술만 마셔. 기분 나쁜 얘기는 뭐 하러 꺼내?”주강운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미주 씨는 의리도 있고 좋은 사람이야. 너보다 많이 어리잖아. 네가 더 이해해 줘야지.”“내가 참아준 게 적다고 생각해?”한성우가 술잔을 내려놓고 표정을 굳혔다. “내가 아무리 많은 여자를 만났어도 다른 여자에겐 간 쓸개 다 내준 적 있었어? 의리 있지. 그 마음이 친구에게만 전부 집중되어 있어서 문제지. 언제 날 생각해 준 적이 있긴 해? 미주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식사라도 한 끼 하고 싶다고 해도 싫다잖아. 내가 그렇게 창피해?”그 말을 들은 주강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자는 원래 쑥스러움이 많잖아. 아마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러는 걸 거야. 너희 지금 안정적으로 잘 만나고 있는데 지금 당장 급하게 밀어붙일 필요는 없잖아.”한성우가 손을 내저었다. “술이나 마시자고 부른 거야. 설교나 들으려는 게 아니라고. 더 얘기하면 안 마실 거야.”그러자 주강운은 말없이 술잔을 들어 한성우의 잔에 짠, 부딪혔다. 술 몇 잔을 마신 주강운이 신우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여정 씨 부서 옮긴다고 하지 않았어? 옮겼어?”신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에 완전히 매달리고 있어서 옮기려고 하지 않아. 하고 싶은 대로 놔두려고. 그 일을 하는 게 좋다잖아. 여정이가 행복해하면 나도 좋아.”고개를 끄덕인 주강운이 툭 던지듯 물었다. “여정 씨 경찰로 근무한 지 얼마나 됐지?”잠시 생각하던 신우가 말했다. “아마 6, 7년 정도 된 것 같아.”“6, 7년...”주강운이 신우의 말을
신우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그가 얼른 한성우를 말렸다. “물 마셔. 아니면 내가 화장실까지 같이 가줄게.”한성우가 신우를 밀치며 주강운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나 진짜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대체 그 여자 어디가 좋은 거야. 너와 헤어지고 바로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자를 대체 왜 좋아하는 거야? 설마 간민혜 씨가 사고를 당했을 때 뱃속의 아이가 네 아이라서, 그래서 죄책감에 잊지 못하는 거야?”신우는 당장이라도 주사위로 한성우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전엔 왜 한성우가 술에 취하면 이렇게 말이 많아지는 걸 몰랐을까? 게다가 일부러 상대방의 아킬레스건을 쿡쿡 쑤시고 있었다. 불안에 떠는 신우와는 달리 주강운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술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신 주강운이 덤덤하게 말했다. “간민혜가 누군데?”“너 정말 기억 안 나? 기억도 못 하면서 왜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려고 하지 않는 거야?”한성우가 자기 심장을 쿡쿡 누르며 말했다. “지난번에 내가 미주와 쇼핑하러 갔다가 아주머니를 만났어. 내가 여자친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시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너희는 하나둘씩 가정을 이루는데 우리 강운이는 언제쯤 제 짝을 만날 수 있을까?’라고 하셨어. 아주머니가 그 말씀을 하실 때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알아?”한성우가 또다시 술 한 잔을 들이켰다. 그의 눈빛은 이미 흐릿해져 있었다. 그가 주강운을 잡아끌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얘기는 자식인 우리가 할 수는 없어. 하지만 만약 당시 너희 가족이 간민혜 씨를 받아들였다면 나중의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만약 그 아이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곧 7살이 될 거고. 난 그때 뭐 한다고 해외를 돌아다니고 있었을까. 만약 내가 있었다면 최소한 널 위해 아이는 지킬 수 있었을 텐데.”주강운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하기만 했다. 하지만 신우는 그가 잡은 술잔에 담긴 술 위로 은은하게 퍼지는 파동을 눈치챘다. 아마 주강운의 마음은 보이는 것만큼 평온하지는 않은 듯했다. 신우는 손
잠시 후, 한성우가 룸으로 돌아왔다. 술기운이 올라온 주강운이 소파에 기대앉아 한 손으로 넥타이를 끌어내렸다. 고개를 돌려 한성우를 보자 그는 술에 찌든 모습으로 소파 등받이 엎드려 있었다. 손에는 아직도 술잔을 든 채 “건배”라며 중얼거렸다. 신우는 주강운과 비슷하게 알딸딸한 정도였다. 비록 많이 마시기는 했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휴대폰을 확인한 신우가 소파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차 부를게. 먼저 성우 데려다줘야겠어.”주강운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 말을 들은 한성우가 혀가 잔뜩 꼬인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 안 돌아가. 돌아가려면 너희나 가. 난 오늘 여기서 잘 거야.”신우가 멈칫,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 잘 거라고? 미주 씨가 알면 어쩌려고.”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알면 알았지, 뭐. 내가 걔를 무서워할 것 같아? 부모님께 인사도 못 가게 하면서. 그만 만나고 싶으면 그러라고 해.”한성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테이블 위에 올려둔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힐끔 쳐다본 신우가 “도둑이”라고 뜬 이름에 허리를 숙여 휴대폰을 가져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낯선 목소리에 차미주가 멍해졌다. “누구세요?”“전 신우라고 해요.”멈칫하던 신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차미주 씨?”차미주가 물었다. “한성우는요? 전화 좀 받으라고 해요.”“성우가 많이 취했어요.”신우는 굉장히 솔직하게도 조금 전 한성우가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성우가 오늘은 안 돌아갈 거라고 하네요. 술집에서 잘 거라고.”차미주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시죠?”신우가 차미주에게 위치를 알려주자 그녀가 바득 이를 갈았다. “신우 씨, 죄송하지만 잠시 성우 좀 챙겨주시겠어요? 제가 곧 데리러 갈게요.”“네.”잠시 후, 차미주가 운전해 한성우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신우와 주강운이 한성우를 둘러업고 차에 집어넣었다. 한성우는 전혀 협조적이지 않은 태도로 두 손으로 차 문을 꽉 잡아당겼다.
차미주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연기하지 마. 온몸으로 여자 화장품 냄새를 풍기고 있어, 너. 정말 내가 냄새도 못 맡는다고 생각하는 거야?”한성우가 팔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래?”그는 말하며 피식 웃어버렸다. “날 만지지도 않았으면서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네가 어떻게 맡아? 개코야?”“헛소리 그만 지껄여. 너 뭐 하는 거야. 술 마시면서 취한 척이나 하고. 나한테 데리러 오라고 하면서 나더러 먼저 전화하라고?”한성우가 뒷좌석에 기대어 앉으며 뒤에서 물 한 병을 꺼냈다. 병뚜껑을 따며 한성우가 말했다. “이 정도로 안 마시면 쟤네가 날 그냥 보내줬을 것 같아?”차미주가 입을 삐죽였다.“그런 능력도 없으면서 왜 술을 마시자고 한 거야?”한성우가 생각했다. ‘난 마시고 싶어서 마신 줄 알아? 이게 다 꿍꿍이가 많은 네 친구 덕분이지.’한성우는 머릿속의 불만과는 달리 듣기 좋은 말을 골라 대답했다. “자랑하려는 거잖아. 난 이제 밖에서 취해도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다고.”차미주가 한성우를 쏘아보며 말했다. “미친 X.”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휴대폰을 들어 한현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임무 완수.]한현진에게서 곧바로 답장이 왔다. 그녀는 차미주의 학창 시절 사진을 십수 장을 한성우에게 전송했다. 활동에 참석했을 때의 사진, 여행 사진 그리고 수상할 때 찍은 사진도 있었다. 전부 학창 시절 차미주가 제일 빛나던 순간의 사진을 고른 것이었다. 사진 속의 차미주는 귀엽고 생명력이 흘러넘쳤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확인한 한성우는 하마터면 물에 사레가 들린 뻔했다. 차미주가 휴지를 뽑아 한성우에게 던졌다. “천천히 마셔. 뺏어 먹는 사람 없어.”“음.” 소리를 내며 대답한 한성우가 기침을 계속하며 한현진이 보낸 사진을 일일이 저장했다. 한성우가 조용히 생각했다. ‘꿍꿍이가 많긴 하지만 눈치는 있네.’한성우는 직접적으로 주강운에게 은서가 바로 간민혜의 아이라고 알려줄 수가 없었다. 주강운이 바보가 아닌 이상,
한현진은 눈앞의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성월이 가져온 이력서와 일일이 대조하며 상대방을 살폈다. 제일 젊은 운전기사는 회사 임원의 운전기사로 있었던 경력이 있는 듯 말투에는 오만함이 조금 섞여 있었다. 매번 한현진이 질문할 때면 그는 습관처럼 “전에 모셨던 대표님은...” 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의 첫 마디를 들은 한현진은 뒤의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두 번째 운전기사에게 제일 늦게 몇 시까지 야근할 수 있는지, 연봉은 얼마를 원하는지 물었다. 두 번째 사람은 넌지시 요구를 던졌다. 전에 일하던 곳의 일당은 10만 원에서 15만 원 정도였고 8시간 근무했다고 했다. 그는 회사에서 기숙사를 제공해 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한현진은 그 요구엔 특별한 불만이 없었다. 그녀가 궁금한 건 단 한 가지였다. “그 정도면 일당이 꽤 높았던 것 같은데 왜 그만두신 거죠?”갑자기 말문이 막힌 운전기사는 한참을 우물쭈물하더니 회사가 지겨워져 이직하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남자가 다녔던 회사를 확인한 한현진이 손을 들어 박해서를 불렀다. 귓속말도 나지막이 얘기를 전하자 박해서가 알겠다며 자료를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박해서가 한현진에게 속삭였다. 그의 말을 들은 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남자의 이력서를 옆으로 밀어버렸다. 한현진의 시선이 제일 마지막 지원자에게로 향했다. 남자의 이력서에는 45세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물은 그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였다. 마른 몸매에 보통의 외모를 갖고 있었다. 사람들 틈에 끼어있으면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흔하디흔한 얼굴이었다. 그는 몸에 맞지 않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아마도 면접을 위해 일부러 준비한 옷 같았다. 하지만 양복 안에는 셔츠가 아니라 짙은 회색의 맨투맨이었다. 옷깃은 살짝 울퉁불퉁 올라와 있어 반듯한 모양은 아니었다. 너무 오래 입은 탓인 듯했다. 남자는 등을 구부리고 있었고 어깨도 습관적으로 잔뜩 움츠렸다. 다른 두 명의 운전기사가 본인
그 남자는 늑골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몸조차 일으키지 못했다. 멍해졌던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발차기를 날린 사람을 쳐다보았다. 방금 그녀가 고용한 운전기사인 주혁이었다. 그는 평온한 태도로 보호하듯 한현진 앞을 막아섰다. 그는 몸으로 한현진과 주먹을 날리려던 남자 사이를 막고 있었다. 박해서도 재빨리 앞으로 다가와 현장에 있던 사람들과 협력해 남자를 바닥에 제압했다. “대표님, 괜찮으세요?”성월이 얼른 다가와 물었다. 정신을 차린 한현진이 차가운 얼굴로 목소리를 낮춘 채 입을 열었다. “성 비서님. 이게 바로 성 비서님이 고르고 고른 운전기사인가요? 자기 감정 하나 제어하지 못하고 심지어 사기 전과가 있다는 것도 성 비서님은 알아낼 수 없었던 건가요?”굳은 표정의 성월은 안색도 어두워졌다. “대표님, 저희는 줄곧 운전 경력과 사고 유무만 보고 운전기사를 채용해 왔어요. 전 회사에서 그만둔 이유까지는 일반적으로 알아보지 않아요.”“전에 어떻게 일하셨든 저와 상관없어요. 지금은 제 운전기사를 뽑는 거잖아요. 제가 성 비서님께 뭐라고 했었죠?”말문이 막힌 성월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한 대표님. 이건 제 실수예요.”한현진이 차가운 태도로 말했다. “2000자 내로 경위서 써서 내일 회의 시작 전에 제 사무실에 제출하세요.”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서로 마주 보았다. 성월은 서해금의 심복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누구든 성월에겐 예의를 갖추었다. 설사 가끔 업무적인 실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서해금조차도 성월에게 벌을 주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 온 부대표는 성월의 체면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성월 본인 역시 직원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나지막이 말했다. “한 대표님, 제 직속 상사는 서 대표님이세요. 전 서 대표님 지시에만 따라요. 지금은 그저 잠시 한 대표님에게 협조하고 있는 것뿐이고요. 인사 채용에 실수가 생긴 것은 저만의 책임이 아니에요. 한 대표님께서
고개를 끄덕인 한현진이 말을 이으려는데 송가람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현— 한 대표님. 잠시 나오시죠. 할 얘기가 있어서요.”그러자 한현진은 더 이상 다른 말 없이 주혁에게 말했다. “인사팀에서 입사 수속을 도와줄 거예요. 인사팀에서 시키시는 대로 하시면 돼요.”말을 마친 한현진이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고개를 돌려 한현진이 나간 쪽을 바라보던 주혁이 인사팀 부장이 부르는 소리에 다시 몸을 돌려 서류를 작성했다. 송가람은 복도에서 한현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송가람에게 다가간 한현진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송가람이 덤덤하게 말했다. “오빠 11시면 착륙한대요. 알고 있어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항에 데리러 갈 거예요?”한현진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같이 가요.”송가람의 대답에 한현진이 멈칫했다. “가람 언니도 가려고요?”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제가 가면 뭐 문제라도 있어요? 오빠는 현진 씨만의 오빠가 아니에요. 제 오빠이기도 하다고요! 저희는 20여 년을 함께 살았어요.”한현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러던가요.”송가람이 공항에 가든 안 가든 한현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똑똑해진 송가람의 모습이 의외였을 뿐이었다. 만약 두 사람이 따로 공항에 간다면 송민준은 송가람의 차에 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요즘 두 사람 사이에는 냉랭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송가람 본인도 그걸 느꼈을 테니 한현진과 함께 간다는 것은 사실은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뜻이었다. 비록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20여 년의 감정이 전부 거짓은 아니었다. 송민준과의 사이가 틀어진다면 그건 이성적이지 않은 판단이었다. 송가람도 그것을 인지했거나 아니면 서해금이 시킨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서해금의 지시라면 그녀의 목적은 단순히 화해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박해서는 두 사람을 태우고 공항으로 향했다. 3월이 거의 지나는 시점이라 날씨도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특히 점심엔 기온이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