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우가 멍하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제야 지금 전화를 끊는 건 매너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화 받은 아주머니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야. 내가 언제 아이가 생겼다고 했어.’아주머니의 말과 갑자기 전화를 끊은 한성우의 책임을 회피하는 듯 한 행동은 여자를 임신하게 해놓고 책임지지도 않는 쓰레기와 비슷했다. 한성우는 안절부절 못하며 서성거렸다. 그는 머리속으로 최대한 빨리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조금 이따 다시 전화를 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아이디어 하나가 스쳤다. 차미주가 최고의 증인이었다. 자신이 허튼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줄 증인.곧바로 화장실에서 나온 한성우는 차미주의 방 문앞에서 그녀를 불렀다. “도둑아, 너 안에 있어?”방 안에서는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차미주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 왜?”“별 일은 아니고, 문 열어. 할 말 있어.”한성우는 말하며 김경선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어찌되었든 김경선이 딸을 사랑하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차미주만 있다면 딸을 생각해서라도 한성우를 조금이라도 봐 줄 수도 있었다. 차미주의 방문을 등지고 선 한성우는 휴대폰을 높이 들고 셀카 찍는 자세를 취했다. 차미주와 자신이 모두 앵글에 담길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모든 준비를 마친 한성우가 밖에서 또 다시 차미주를 불렀다. “도둑아, 빨리 나와.”조금은 짜증 섞인 차미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촉하지 마. 금방 나가.”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한성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나와. 나랑 잠깐 얘기하고 다시 들어가도 돼.”“알겠어, 알겠어.”차미주는 거울을 보며 옷깃을 끌어올렸다. ‘젠장, 이건 대체 어떤 놈이 디자인 한 거야. 올리면 허리도 안 가려지고, 내리면 가슴이 안 가려지잖아. 이렇게 짧은 바지에 저렇게 긴 꼬리까지 달리다니.’‘캣우먼 코스튬은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 현진이는 대
김경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가 친척은 한성우를 열성적으로 환영했다. “세상에. 경선아, 미주가 능력도 좋아.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만나다니. 보기만 해도 화면이 훤하네.”“어쩐지 내가 전에 친구 아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니까 시큰둥해하더라니. 미주가 이미 만나는 사람이 있었네. 두 사람 벌써 합가까지 했어? 어울리는 것 좀 봐봐.”“자네, 나이가 몇이야? 어디 사람인가? 직업은?”“아이까지 생겼는데 식은 언제 올려?”...한성우가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아이라니요. 아주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자네가 방금 전화해서 애가 어쩌고 했잖아. 미주가 임신한 거 아냐?”한성우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상대방은 키워드 하나만 듣고 자기 마음대로 한성우의 말을 재해석했다. 심지어 한성우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말이다. 지금 한성우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은 미래의 장모님이었다. 아무리 뻘쭘해도 함부로 전화를 끊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의 결혼생활이 행복할지 아닐지는 전부 장모님이 그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큼, 목을 가다듬은 한성우가 해명했다. “아주머니께서 잘못 들으신 거예요. 제 말은 미주는 지금 나이가 어리고 이제 막 커리어를 쌓고 있으니 급하게 아이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거였어요. 먼저 미주가 본인 인생을 먼저 즐기게 하고 싶어요. 그리고 한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아이를 갖고 싶어요. 저는 미주가 제 옆에서 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요.”옆에 있던 아주머니들은 한성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김경선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눈앞의 젊은이를 빤히 살펴보았다. 진지한 상대방의 눈빛은 김경선에게 그의 결심과 진심을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김경선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당시 그녀가 결혼하기 전 차미주의 아버지도 이렇게 진지한 고백을 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결말은 결국 이혼이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약속할 때, 그 마음이 진심인
한성우의 눈빛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의 반응에 희망을 본 차미주가 한 번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었다. “야옹.”꿀꺽 침을 삼킨 한성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누가 너더러 이렇게 입으래?”첫 연애라 경험이 없었던 차미주는 뻣뻣하게 한성우의 어깨를 감싸안고 애교 섞인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말했다. “이런 거 싫어?”이상한 목소리에 한성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차미주의 머리에 달린 고양이 귀를 잡아당기더니 웃으며 물었다. “성대가 뭐 어디 끼이기라도 한 거야?”그 말은 겨우 잡아놓은 분위기를 단꺼번에 망쳐버렸다. 차미주가 한성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이를 악물었다. “미친 X이 웃긴 뭘 웃어!”차미주의 곁으로 옮겨 앉은 한성우가 그녀를 품에 안고 웃으며 말했다. “그냥 편하게 말하면 되잖아. 그렇게 톤 올리면 안 힘들어?”무드라고는 없는 한성우를 차미주가 툭 쳐냈다. 화가 잔뜩 난 차미주가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킨 순간 찌익 소리와 함께 바지가 잡아당겨지는 것 같았다. 상황 파악을 하는 차미주의 귓가로 유유한 한성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꼬리 떨어졌어.”차미주가 고기를 돌리자 한성우의 엉덩이 밑에 깔린 부들부들한 자신의 꼬리가 보였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적인 힘에 꼬리가 떨어진 것이었다. 힘없이 축 처진 꼬리가 침대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고 심지어 꼬리 끝에는 천 한 조각이 달려있었다. 그리고 한성우는 고개를 숙여 차미주의 엉덩이 쪽을 보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바지 안쪽으로 스쳤다. 차미주가 손을 뻗어 만져보니 바지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바람은 바로 그곳을 타고 들어온 것이었다. 한성우가 친절하게도 차미주에게 귀띔했다. “너 엉덩이...”차미주는 두 손을 등 뒤로 보내 엉덩이에 난 구멍을 가리며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닥쳐!”한성우는 부끄러움과 난감함이 섞인 차미주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앉아. 앉으며 가려져.”침
차미주의 행동에 한성우가 어리둥절해졌다. “죽고 싶은 거야?”차미주는 한성우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럼 참지 마. 내가 안 된다고 한 적도 없잖아.”손을 뻗어 차미주의 볼을 꼬집은 한성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차미주가 한성우와 관계를 가지려는 동기가 잘못되었다. 그녀가 관계를 가지려는 목적은 임신을 해 엄마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그건 한성우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관계는 두 사람이 다른 이유 없이 그저 사랑하는 마음만이 가득한 그 순간에 함께 쾌락을 즐기는 것이었다. “...”‘이미 일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 아직도 때가 아니라고?’‘내가 요즘 얼마나 애써서 오늘 겨우 진전이 보이는데, 얘는 대체 뭐 하는 거야?’미간을 잔뜩 찌푸린 차미주가 한성우를 밀어냈다. “지금이 아니면 대체 그 때라는 게 언제라는 거야?”한성우가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내가 어머님 공략에 성공하면.”차미주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너... 너 뭘 안 거야?”한성우가 차미주를 품에 안았다. 낮게 깔린 그의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뭘 알아?”차미주는 한성우가 진실을 알게 되는 걸 원하지 않으니 한성우는 모른 척해줄 생각이었다. 투박하게 유혹하는 차미주의 모습이 사실은 꽤 흥미롭기도 했다. 한성우는 이제야 생각이 조금 정리가 되었다. 조금 전 차미주를 데리고 영상통화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김경선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한성우였다. 그러니 굳이 차미주를 그 사이에 끌어들여 모녀 사이를 갈라놓는다면 그건 너무도 비호감을 유발하는 방법이었다. 한성우가 모른 척하자 차미주의 의심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엄마를 공략한다는 게 무슨 뜻인데?”“내가 너와 결혼하려면 먼저 어머님 허락부터 받아야 되잖아. 어머님께 인사 드리게 해달라고 해도 안 된다고 하니까 그럼 어머님이 날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거구나, 한 거지. 그럼 당연히 내
“23번 유현진 씨, 가족분께 연락하셨나요?“이제 간호사가 몇 번째로 유현진을 재촉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흘긋 확인해보았으나 강한서에게 건 전화는 여전히 응답이 없는 상태였다.한주시 북부 환형 육교에서 연속 차량 충돌 사고가 발생하며 버스 한 대가 옆으로 기울다 강에 빠져버렸다. 그로 인해 수십 명의 부상자가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이 하나둘씩 병원에 도착했지만 오직 그녀의 남편은 늦도록 연락되지 않았다.처참했던 사고 현장이 여전히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사고 당시 느꼈던 공포보다 이 순간 밀려오는 서운함에 마음이 더 아팠다.“유현진 씨?”간호사의 부름에 유현진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셔츠는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는데 그 덕분에 새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다. 그녀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몰골이 처참했으나 여전히 품위 있게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연락되지 않는 것을 보니 지금 좀 바쁜 것 같아요. 제가 직접 사인해도 될까요?”“안타깝지만 그럴 수 없어요. 만약 가족분께서 사인할 수 없다면 병원에 남아 좀 더 지켜봐야 할 거예요. 뇌진탕은 빠른 진단을 내릴 수 없으니까요. 병원에선 당신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해요.”유현진은 입술을 꾹 닫고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제가 다시 전화를 걸어 볼게요.”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의료 기기를 담은 플라스틱 카트를 들고 지나가던 두 간호사를 만나자 그녀가 몸을 살짝 움직여 길을 비켜줬다. 그때, 간호사 중 한 명이 말했다.“16번 환자, 누군지 알아요?““아뇨. 누구죠?““송민영 몰라요? 엄청나게 유명해요! 얼마 전에 찍은 핫한 드라마 ’비밀의 연인‘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분이에요.““저런! 그분, 많이 다치셨어요?““조금 늦게 오셨어요. 그리고 팔에 스친 상처가 있긴 한데 그때 이미 약간 아문 상태였어요. 하지만 연예인들 얼굴이 간판이잖아요. 당연히 우리 같은 일반인과 비길 수 없죠. 내가 만약 송민영과 같은 얼굴과 몸매
뜨거운 열기가 귓가에 뿜어지고 달아오른 체온까지 더해 유현진의 귓불을 뜨겁게 달구었다. 다만 그녀는 복부에 난 멍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며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다행히 불이 꺼져있어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의 목젖에 키스했다. 강한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짙은 눈빛으로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를 한입 물었다. 곧이어 유현진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나 오늘 배란기야, 할 때가 됐어.”강한서는 몸이 굳어지더니 눈가에 스친 욕망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살짝 분노에 찬 말투로 물었다.“네 머릿속엔 온통 이 생각뿐이야?”유현진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뜨거웠던 귓불도 서서히 열기가 식었다.“너희 엄마가 계속 날 다그치잖아.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차라리 너 정자 기증할래? 그럼 내가 시험관시술 할게.”강한서가 비난 조로 되물었다.“엄마가 재촉한 게 아니라 네가 사모님 자리를 지키지 못할까 봐 아이라도 낳으려는 거 아니야?”유현진은 가슴을 후벼 파듯 아팠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옅은 미소만 지었다.“맞아, 네가 날 버리면 어떡해?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 둘 사이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지.”강한서는 단추를 채우고 짜증 섞인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런 데 신경 쓰지 마. 난 아이 안 가질 거야.”유현진의 미소 짓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녀는 문밖을 나서려는 강한서를 불러세웠다.“강한서, 넌 대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 아니면 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강한서는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뭐가 다른데?”유현진은 주먹을 꽉 쥐고 대답했다.“같은 뜻이라면 결혼도 아무 의미 없겠지. 이혼해 그냥.”“네 마음대로 해.”강한서는 이 한마디를 내뱉은 후 문을 박차고 나갔다.유현진은 베개를 문에 힘껏 내던졌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다음 날 아침, 조깅을 마치고 돌아온 강한서는 식탁 앞에 앉아 메일을 확인했다.아침을 준비한 지 반나절이 됐지만 그는 도통 수저를
차미주는 꿈속에서 헤매다가 노크 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문을 연 순간 유현진이 한 손에 캐리어를 들고 떡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청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숙박 좀 할 수 있을까?”차미주는 그녀에게 아이스 콜라 한 병 건넸다. 유현진이 콜라를 건네받자 그녀는 불쑥 제 머리를 툭 쳤다.“내 정신 좀 봐. 너 탄산음료 안 마시지? 우유 갖다 줄게.”“아니야, 괜찮아.”유현진은 캔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못 마시는 게 어디 있어?”전에는 임신 준비 때문에 술과 담배, 음료 및 자극적인 것들을 싹 다 멀리했지만 이혼을 앞둔 지금은 이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인 것을.‘임신 준비? 그딴 건 무능한 강한서더러 하라고 해!’“너 정말 강한서 씨랑 이혼할 생각이야?”차미주는 소파의 반대편에 앉으며 확실치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응.”유현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그 사람 또 송민영이랑 만나.”차미주는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그 여잔 대체 왜 이렇게 뻔뻔한 거야? 애초에 결혼할 때도 찾아와 소란을 피우더니 3년이 지난 후 또다시 나타나? 세상에 남자가 없대? 아니 왜 유부남을 물고 늘어지는 거냐고? 강한서 그 자식도 한심해. 놀다 버린 장난감에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야?”유현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지금 대체 누굴 욕하는 거지?’차미주는 마른기침을 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너 지금 이런 사소한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야. 그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넌 그냥 빠지려고? 왜 그런 비겁한 인간들을 봐줘? 끝까지 맞서 싸우란 말이야! 그 여자가 온갖 청순한 척을 다 떨잖아. 사람들 앞에서 그 가면을 확 벗겨버려! 청순은 개뿔, 유부남이나 만나는 뻔뻔스러운 년인 주제에!”“그래서? 내 결혼생활이 파탄 났다는 걸 온 세상에 알려? 남편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가여운 여자로 남아?”유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 결혼은 이미 실패야. 떠날 때까지 비참하게 굴고 싶
“네? 대표님은 아직 주무십니다.”“그럼 침실로 가서 깨워요!”유현진은 살짝 화가 치밀었다. 전화기 너머로 한참 침묵이 흐르더니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질문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심지어 이제 막 잠에서 깬 잠긴 목소리라 한순간 유현진도 저 자신을 의심할 뻔했다.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며칠 뒤에 네 옷장의 옷들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리스트를 작성해서 보내줄게. 앞으론 이런 따분한 일들로 전화 걸지 말았으면 좋겠어!”“따분한 일?”강한서가 차갑게 웃었다.“유현진, 이런 따분한 일들은 네가 가장 좋아하던 일이었잖아. 내가 무슨 속옷을 입는 것까지 일일이 책임졌잖아. 이게 고작 네가 추구하던 삶이 아니었어?”유현진은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심장이 쑤시듯이 아팠다.강한서에게 자신이 그저 이런 이미지였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지만 막상 듣게 되니 느낌이 새삼 달랐다.대체 마음이 얼마나 단단해야 이런 수모를 겪었을 때 아무런 느낌이 없을까?전화기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한참 후에야 유현진이 잠긴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내가 봐도 한심했어. 그러니까 이젠 더이상 책임지지 않겠다고. 얼른 사인해. 우리 둘 사이 빨리 끝내자.”화제가 또다시 이혼으로 돌아왔고 이제 막 화가 가라앉았던 강한서는 금세 분노가 차올랐다.“제발 적당히 해!”유현진은 피식 웃으며 비난 조로 되물었다.“내가 뭘 어쨌는데?”“너 후회하지 마!”강한서는 이 말만 남기고 전화를 툭 끊었다.유현진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자상하게 챙겨주고 묵묵히 헌신했던 지난날들이 강한서에겐 그저 한낱 놀림거리에 불과하다니.매번 그를 위해 여러 장소에서 입을 옷들을 정성껏 챙겨줄 때 정작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엔 짜증이 잔뜩 담겨있었을지도 모른다.종일 하루 세끼와 먹고 입는 것에 신경 쓰는 여자가 얼마나 창피했을까? 그녀가 생각해도 이런 저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어리석어 보였다.“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