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주가 한성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현진이는 그렇게 가벼운 애가 아니야. 현진이가 강한서를 좋아한 건 그때 교통사고에서 강한서가 현진이를 차에서 꺼내줬기 때문이야. 현진이가 그랬어. 그냥 지나가는 사람일 뿐인데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인성이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니 생각해봐. 강한서가 왜 아무 연고도 없이 그 교통사고 현장에 나타났겠어?”“구경하려고?”욱, 화가 올라온 차미주가 한성우를 걷어찼다. “내가 지금 너한테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잖아. 넌 왜 말장난인데.”한성우가 피식 웃을 흘리더니 차미주를 품에 안았다. “알겠어, 알겠어. 이젠 장난 안 할게. 얘기해.”차미주가 말했다. “강한서와 주강운은 죽마고우잖아. 주강운이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강한서가 현장에 달려갔겠지. 그러다 우연히 현진이를 만난거고.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퍼즐이 맞춰지잖아.”농담은 하고 있었지만 한성우는 사실 차미주가 하는 모든 말을 놓치지 않고 전부 듣고 있었다. 전혀 흠 잡을 데 없이 논리적인 추측이었다. 다만...“형수님이 본게 임산부가 확실해?”“그냥 임산부가 아니라 곧 출산을 앞둔 것 같았대. 배가 엄청 컸대.”차미주가 한성우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며 비밀스럽게 얘기했다. “혹시, 은서가 당시 간민혜 씨 배속에 있던 아이 아닐까? 그 사고로 어른과 아이 모두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간민혜 씨만 사망한 거지. 살아있던 아이는 강한서가 숨긴 거 아닐까?”미간을 찌푸린 한성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은서가 간민혜 씨와 주강운의 딸이라고?”차미주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떻게 주 변호사님 딸이 되는 거야? 난 간민혜 씨와 강한서 아이 같아. 두 사람이 눈이 맞아서 주 변호사님을 배신한 거지.”“...”“은서가 강한서 딸이 아니라면, 강한서는 미친 거 아냐? 왜 그 아이 때문에 현진이와 싸워? 전엔 못 느꼈었는데 지금 이렇게 생각해 보니까 어쩐지 은서가 강한서와 닮은 것 같아. 눈이며 코며 그리고 그 입까지
한현진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성우처럼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도 왜 얼른 소문을 퍼뜨리지 않고 오히려 한현진이 차미주가 얘기하도록 부추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걸까? ‘대체 어떤 뇌구조를 갖고 있는 거야.’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한현진도 더 이상은 방법이 없었다. 필살기를 꺼낼 수밖에.[성우 오라버니는 저와 미주가 어떤 사인지 제일 잘 알잖아요. 전에 두 사람이 만난다고 했을 때 제가 제일 반대했었잖아요.]한성우가 말했다. [형수님이 그 얘기를 꺼낼 자격이 있어요?]한현진이 말했다. [성우 씨에게 전 여친이 얼마나 많았어요. 게다가 그 어떤 사람과도 오래 만남을 유지하지 못했었잖아요. 전 성우 씨가 가벼운 마음으로 미주를 만나다가 미주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계속 반대했던 거잖아요.]한성우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 한현진의 말에 수긍한 것이 분명했다. 한현진이 말을 이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니까 저도 성우 씨가 진심으로 미주를 좋아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나중엔 반대하지 않았잖아요. 그때 성우 씨가 꾀병을 부리며 미주를 속였을 때도 제가 의사를 찾아서 성우 씨가 먹을 음식 레시피를 받아왔었어요. 심지어 강한서에게 대신 음식 효과를 테스트하기도 했다고요. 정말 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제가 그렇게까지 신경 썼겠어요?]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구경거리가 없어질까 봐 그렇게 열정적으로 굴었던 거겠지. 그리고 그게 날 돕는 거야? 그 보약 덕에 몇날 며칠을 코피를 흘렸다고!’하지만 한현진이 강한서에게도 보약을 먹었다는 말에 한성우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졌다. 한성우가 입술을 짓이기며 대답했다. [저한테 감정 호소는 하지 마요. 방금 제 장모님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성우 씨 그 병, 아주머니 귀에까지 들어갔어요. 아주머니께서는 성우 씨가 정말 그쪽으론 문제가 있는 줄 아시고 미주에게 그런 요구를 하신 거예요. 결혼이 하고 싶으면 먼저 임신을 하라고요.
차미주가 부끄러운 듯 말했다. [내가 봤는데 너무 노출이 심한 것 같아. 내가 이걸 어떻게 입어.]한현진이 말했다. [그냥 입어. 입고 코스프레용 의상인데 어떠냐고 성우 씨에게 직접 물어봐.]차미주는 충격에 사로잡힌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문자를 작성 중인 한현진에게 한성우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현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도둑이가 직접 현진 씨에게 얘기한 거예요?”“네. 아니면 제가 어떻게 성우 씨에게 먼저 아이를 가지라고 조언할 수 있겠어요? 성우 씨가 저한테 미주가 부모님을 만나 뵈는 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봐달라고 했잖아요. 미주는 진작 아주머니께 얘기했고 아주머니께서는 그런 조건을 내거셨죠. 미주는 본인이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성우 씨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 봐 계속 말을 하지 못했던 거예요.”한성우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 분은 정말 본인 딸이 손해 볼 걱정은 안 하시나 봐요.”한현진이 말했다. “아주머니는 성우 씨보다도 돈이 많잖아요. 아주머니께 사위는 그저 딸의 비위를 맞춰주는 장난감 같은 거예요. 장난감이 말을 듣지 않으면 바꾸면 그만이죠. 주인이 손해 볼 게 뭐가 있어요. 다음 사위는 말을 잘 듣는 놈일 테니까요.”한성우가 바득, 이를 갈았다. “제대로 된 비유를 못할 바엔 차라리 닥쳐요.”말이 없던 한성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형수님 혹시 미주 어머니 전화번호 알아요?”한현진은 곧바로 차미주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한성우에게 알려주었다. 학창시절 차미주의 어머니가 과일을 잔뜩 사들고 기숙사에 온 적이 있었다. 당시의 한현진은 말을 예쁘게 한 덕에 차미주의 어머니와 얘기가 잘 통했고 그렇게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비록 한 번도 연락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전화번호를 저장한 한성우는 장모님이라는 이름으로 번호를 저장했다. 한현진이 아부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제가 아는 건 전부 얘기 드렸어요. 제 일은 어떻게...”한성우는 누구보다 빠르게 모르쇠를 시전했다. “죄송해요. 부탁
한성우가 멍하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제야 지금 전화를 끊는 건 매너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화 받은 아주머니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야. 내가 언제 아이가 생겼다고 했어.’아주머니의 말과 갑자기 전화를 끊은 한성우의 책임을 회피하는 듯 한 행동은 여자를 임신하게 해놓고 책임지지도 않는 쓰레기와 비슷했다. 한성우는 안절부절 못하며 서성거렸다. 그는 머리속으로 최대한 빨리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조금 이따 다시 전화를 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아이디어 하나가 스쳤다. 차미주가 최고의 증인이었다. 자신이 허튼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줄 증인.곧바로 화장실에서 나온 한성우는 차미주의 방 문앞에서 그녀를 불렀다. “도둑아, 너 안에 있어?”방 안에서는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차미주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 왜?”“별 일은 아니고, 문 열어. 할 말 있어.”한성우는 말하며 김경선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어찌되었든 김경선이 딸을 사랑하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차미주만 있다면 딸을 생각해서라도 한성우를 조금이라도 봐 줄 수도 있었다. 차미주의 방문을 등지고 선 한성우는 휴대폰을 높이 들고 셀카 찍는 자세를 취했다. 차미주와 자신이 모두 앵글에 담길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모든 준비를 마친 한성우가 밖에서 또 다시 차미주를 불렀다. “도둑아, 빨리 나와.”조금은 짜증 섞인 차미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촉하지 마. 금방 나가.”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한성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나와. 나랑 잠깐 얘기하고 다시 들어가도 돼.”“알겠어, 알겠어.”차미주는 거울을 보며 옷깃을 끌어올렸다. ‘젠장, 이건 대체 어떤 놈이 디자인 한 거야. 올리면 허리도 안 가려지고, 내리면 가슴이 안 가려지잖아. 이렇게 짧은 바지에 저렇게 긴 꼬리까지 달리다니.’‘캣우먼 코스튬은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 현진이는 대
김경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가 친척은 한성우를 열성적으로 환영했다. “세상에. 경선아, 미주가 능력도 좋아.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만나다니. 보기만 해도 화면이 훤하네.”“어쩐지 내가 전에 친구 아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니까 시큰둥해하더라니. 미주가 이미 만나는 사람이 있었네. 두 사람 벌써 합가까지 했어? 어울리는 것 좀 봐봐.”“자네, 나이가 몇이야? 어디 사람인가? 직업은?”“아이까지 생겼는데 식은 언제 올려?”...한성우가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아이라니요. 아주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자네가 방금 전화해서 애가 어쩌고 했잖아. 미주가 임신한 거 아냐?”한성우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상대방은 키워드 하나만 듣고 자기 마음대로 한성우의 말을 재해석했다. 심지어 한성우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말이다. 지금 한성우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은 미래의 장모님이었다. 아무리 뻘쭘해도 함부로 전화를 끊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의 결혼생활이 행복할지 아닐지는 전부 장모님이 그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큼, 목을 가다듬은 한성우가 해명했다. “아주머니께서 잘못 들으신 거예요. 제 말은 미주는 지금 나이가 어리고 이제 막 커리어를 쌓고 있으니 급하게 아이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거였어요. 먼저 미주가 본인 인생을 먼저 즐기게 하고 싶어요. 그리고 한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아이를 갖고 싶어요. 저는 미주가 제 옆에서 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요.”옆에 있던 아주머니들은 한성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김경선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눈앞의 젊은이를 빤히 살펴보았다. 진지한 상대방의 눈빛은 김경선에게 그의 결심과 진심을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김경선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당시 그녀가 결혼하기 전 차미주의 아버지도 이렇게 진지한 고백을 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결말은 결국 이혼이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약속할 때, 그 마음이 진심인
한성우의 눈빛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의 반응에 희망을 본 차미주가 한 번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었다. “야옹.”꿀꺽 침을 삼킨 한성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누가 너더러 이렇게 입으래?”첫 연애라 경험이 없었던 차미주는 뻣뻣하게 한성우의 어깨를 감싸안고 애교 섞인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말했다. “이런 거 싫어?”이상한 목소리에 한성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차미주의 머리에 달린 고양이 귀를 잡아당기더니 웃으며 물었다. “성대가 뭐 어디 끼이기라도 한 거야?”그 말은 겨우 잡아놓은 분위기를 단꺼번에 망쳐버렸다. 차미주가 한성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이를 악물었다. “미친 X이 웃긴 뭘 웃어!”차미주의 곁으로 옮겨 앉은 한성우가 그녀를 품에 안고 웃으며 말했다. “그냥 편하게 말하면 되잖아. 그렇게 톤 올리면 안 힘들어?”무드라고는 없는 한성우를 차미주가 툭 쳐냈다. 화가 잔뜩 난 차미주가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킨 순간 찌익 소리와 함께 바지가 잡아당겨지는 것 같았다. 상황 파악을 하는 차미주의 귓가로 유유한 한성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꼬리 떨어졌어.”차미주가 고기를 돌리자 한성우의 엉덩이 밑에 깔린 부들부들한 자신의 꼬리가 보였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적인 힘에 꼬리가 떨어진 것이었다. 힘없이 축 처진 꼬리가 침대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고 심지어 꼬리 끝에는 천 한 조각이 달려있었다. 그리고 한성우는 고개를 숙여 차미주의 엉덩이 쪽을 보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바지 안쪽으로 스쳤다. 차미주가 손을 뻗어 만져보니 바지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바람은 바로 그곳을 타고 들어온 것이었다. 한성우가 친절하게도 차미주에게 귀띔했다. “너 엉덩이...”차미주는 두 손을 등 뒤로 보내 엉덩이에 난 구멍을 가리며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닥쳐!”한성우는 부끄러움과 난감함이 섞인 차미주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앉아. 앉으며 가려져.”침
차미주의 행동에 한성우가 어리둥절해졌다. “죽고 싶은 거야?”차미주는 한성우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럼 참지 마. 내가 안 된다고 한 적도 없잖아.”손을 뻗어 차미주의 볼을 꼬집은 한성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차미주가 한성우와 관계를 가지려는 동기가 잘못되었다. 그녀가 관계를 가지려는 목적은 임신을 해 엄마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그건 한성우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관계는 두 사람이 다른 이유 없이 그저 사랑하는 마음만이 가득한 그 순간에 함께 쾌락을 즐기는 것이었다. “...”‘이미 일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 아직도 때가 아니라고?’‘내가 요즘 얼마나 애써서 오늘 겨우 진전이 보이는데, 얘는 대체 뭐 하는 거야?’미간을 잔뜩 찌푸린 차미주가 한성우를 밀어냈다. “지금이 아니면 대체 그 때라는 게 언제라는 거야?”한성우가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내가 어머님 공략에 성공하면.”차미주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너... 너 뭘 안 거야?”한성우가 차미주를 품에 안았다. 낮게 깔린 그의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뭘 알아?”차미주는 한성우가 진실을 알게 되는 걸 원하지 않으니 한성우는 모른 척해줄 생각이었다. 투박하게 유혹하는 차미주의 모습이 사실은 꽤 흥미롭기도 했다. 한성우는 이제야 생각이 조금 정리가 되었다. 조금 전 차미주를 데리고 영상통화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김경선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한성우였다. 그러니 굳이 차미주를 그 사이에 끌어들여 모녀 사이를 갈라놓는다면 그건 너무도 비호감을 유발하는 방법이었다. 한성우가 모른 척하자 차미주의 의심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엄마를 공략한다는 게 무슨 뜻인데?”“내가 너와 결혼하려면 먼저 어머님 허락부터 받아야 되잖아. 어머님께 인사 드리게 해달라고 해도 안 된다고 하니까 그럼 어머님이 날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거구나, 한 거지. 그럼 당연히 내
멈칫하던 주강운이 물었다. “어디로 가면 돼?”한성우가 주소를 알려주었다. 주강운이 물었다. “한서도 가?”한성우가 짜증 난 말투로 말했다. “그 배은망덕한 놈 얘기는 꺼내지도 마. 기억을 잃더니 우리가 뭐 자기한테 빚이라도 진 것처럼 굴잖아. 그리고 한현진 씨도 똑같아. 매번 내가 미주랑 싸우기만 하면 헤어지라고 부추기잖아. 우리 사이는 전부 그 인간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오늘도 이 일 때문에 미주가 또 나한테 화를 냈다니까. 짜증 나게.”시간을 확인한 주강운이 말했다. “위치 보내줘. 좀 이따 택시 타고 갈게.”주강운이 만나기로 약속한 바에 도착했을 때, 한성우와 신우는 이미 룸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룸에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도 다른 재벌가의 아들딸도 있었다. 주강운이 룸으로 들어섰을 때 그들은 모여 게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한성우는 입에 담배를 물고 주사위를 돌리며 옆에 앉은 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유머러스한 멘트를 날리는 한성우의 모습은 바람둥이 그 자체였다. 여자들은 한성우의 말에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 앉은 신우는 시끌벅적한 한성우 주변에 비하면 비교적 조용한 썰렁한 편이었다. 신우는 애초부터 유흥을 즐기는 재벌 2세들과는 달랐다. 예전부터 이런 자리엔 신학이 어쩌다 한 번 나오고는 했다. 하지만 신학은 미친놈과도 다름이 없었다. 술에 취해 다른 사람을 중상에 이르도록 폭행한 사건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친구들은 신학을 술자리에 잘 부르지 않게 되었다. 예전의 신우라면 절대 이런 자리엔 나오지 않았다. 고여정과 결혼 후 신우는 인기가 많아지기라도 한 듯 가끔 술자리에 들러 친구들과 모임을 가졌다. 비록 말은 별로 없었지만 인사를 건네는 사람에게는 예의 있게 말을 건네기도 했다. 모두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니 서로 비즈니스를 함께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서로 인맥을 쌓는다면 앞으로 일을 함에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예전의 신우는 매너는 몸에 밴 사람이었지만 융통성이 부족해 너무 딱딱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