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주가 한성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현진이는 그렇게 가벼운 애가 아니야. 현진이가 강한서를 좋아한 건 그때 교통사고에서 강한서가 현진이를 차에서 꺼내줬기 때문이야. 현진이가 그랬어. 그냥 지나가는 사람일 뿐인데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인성이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니 생각해봐. 강한서가 왜 아무 연고도 없이 그 교통사고 현장에 나타났겠어?”“구경하려고?”욱, 화가 올라온 차미주가 한성우를 걷어찼다. “내가 지금 너한테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잖아. 넌 왜 말장난인데.”한성우가 피식 웃을 흘리더니 차미주를 품에 안았다. “알겠어, 알겠어. 이젠 장난 안 할게. 얘기해.”차미주가 말했다. “강한서와 주강운은 죽마고우잖아. 주강운이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강한서가 현장에 달려갔겠지. 그러다 우연히 현진이를 만난거고.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퍼즐이 맞춰지잖아.”농담은 하고 있었지만 한성우는 사실 차미주가 하는 모든 말을 놓치지 않고 전부 듣고 있었다. 전혀 흠 잡을 데 없이 논리적인 추측이었다. 다만...“형수님이 본게 임산부가 확실해?”“그냥 임산부가 아니라 곧 출산을 앞둔 것 같았대. 배가 엄청 컸대.”차미주가 한성우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며 비밀스럽게 얘기했다. “혹시, 은서가 당시 간민혜 씨 배속에 있던 아이 아닐까? 그 사고로 어른과 아이 모두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간민혜 씨만 사망한 거지. 살아있던 아이는 강한서가 숨긴 거 아닐까?”미간을 찌푸린 한성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은서가 간민혜 씨와 주강운의 딸이라고?”차미주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떻게 주 변호사님 딸이 되는 거야? 난 간민혜 씨와 강한서 아이 같아. 두 사람이 눈이 맞아서 주 변호사님을 배신한 거지.”“...”“은서가 강한서 딸이 아니라면, 강한서는 미친 거 아냐? 왜 그 아이 때문에 현진이와 싸워? 전엔 못 느꼈었는데 지금 이렇게 생각해 보니까 어쩐지 은서가 강한서와 닮은 것 같아. 눈이며 코며 그리고 그 입까지
한현진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성우처럼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도 왜 얼른 소문을 퍼뜨리지 않고 오히려 한현진이 차미주가 얘기하도록 부추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걸까? ‘대체 어떤 뇌구조를 갖고 있는 거야.’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한현진도 더 이상은 방법이 없었다. 필살기를 꺼낼 수밖에.[성우 오라버니는 저와 미주가 어떤 사인지 제일 잘 알잖아요. 전에 두 사람이 만난다고 했을 때 제가 제일 반대했었잖아요.]한성우가 말했다. [형수님이 그 얘기를 꺼낼 자격이 있어요?]한현진이 말했다. [성우 씨에게 전 여친이 얼마나 많았어요. 게다가 그 어떤 사람과도 오래 만남을 유지하지 못했었잖아요. 전 성우 씨가 가벼운 마음으로 미주를 만나다가 미주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계속 반대했던 거잖아요.]한성우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 한현진의 말에 수긍한 것이 분명했다. 한현진이 말을 이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니까 저도 성우 씨가 진심으로 미주를 좋아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나중엔 반대하지 않았잖아요. 그때 성우 씨가 꾀병을 부리며 미주를 속였을 때도 제가 의사를 찾아서 성우 씨가 먹을 음식 레시피를 받아왔었어요. 심지어 강한서에게 대신 음식 효과를 테스트하기도 했다고요. 정말 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제가 그렇게까지 신경 썼겠어요?]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구경거리가 없어질까 봐 그렇게 열정적으로 굴었던 거겠지. 그리고 그게 날 돕는 거야? 그 보약 덕에 몇날 며칠을 코피를 흘렸다고!’하지만 한현진이 강한서에게도 보약을 먹었다는 말에 한성우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졌다. 한성우가 입술을 짓이기며 대답했다. [저한테 감정 호소는 하지 마요. 방금 제 장모님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성우 씨 그 병, 아주머니 귀에까지 들어갔어요. 아주머니께서는 성우 씨가 정말 그쪽으론 문제가 있는 줄 아시고 미주에게 그런 요구를 하신 거예요. 결혼이 하고 싶으면 먼저 임신을 하라고요.
차미주가 부끄러운 듯 말했다. [내가 봤는데 너무 노출이 심한 것 같아. 내가 이걸 어떻게 입어.]한현진이 말했다. [그냥 입어. 입고 코스프레용 의상인데 어떠냐고 성우 씨에게 직접 물어봐.]차미주는 충격에 사로잡힌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문자를 작성 중인 한현진에게 한성우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현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도둑이가 직접 현진 씨에게 얘기한 거예요?”“네. 아니면 제가 어떻게 성우 씨에게 먼저 아이를 가지라고 조언할 수 있겠어요? 성우 씨가 저한테 미주가 부모님을 만나 뵈는 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봐달라고 했잖아요. 미주는 진작 아주머니께 얘기했고 아주머니께서는 그런 조건을 내거셨죠. 미주는 본인이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성우 씨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 봐 계속 말을 하지 못했던 거예요.”한성우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 분은 정말 본인 딸이 손해 볼 걱정은 안 하시나 봐요.”한현진이 말했다. “아주머니는 성우 씨보다도 돈이 많잖아요. 아주머니께 사위는 그저 딸의 비위를 맞춰주는 장난감 같은 거예요. 장난감이 말을 듣지 않으면 바꾸면 그만이죠. 주인이 손해 볼 게 뭐가 있어요. 다음 사위는 말을 잘 듣는 놈일 테니까요.”한성우가 바득, 이를 갈았다. “제대로 된 비유를 못할 바엔 차라리 닥쳐요.”말이 없던 한성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형수님 혹시 미주 어머니 전화번호 알아요?”한현진은 곧바로 차미주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한성우에게 알려주었다. 학창시절 차미주의 어머니가 과일을 잔뜩 사들고 기숙사에 온 적이 있었다. 당시의 한현진은 말을 예쁘게 한 덕에 차미주의 어머니와 얘기가 잘 통했고 그렇게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비록 한 번도 연락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전화번호를 저장한 한성우는 장모님이라는 이름으로 번호를 저장했다. 한현진이 아부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제가 아는 건 전부 얘기 드렸어요. 제 일은 어떻게...”한성우는 누구보다 빠르게 모르쇠를 시전했다. “죄송해요. 부탁
한성우가 멍하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제야 지금 전화를 끊는 건 매너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화 받은 아주머니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야. 내가 언제 아이가 생겼다고 했어.’아주머니의 말과 갑자기 전화를 끊은 한성우의 책임을 회피하는 듯 한 행동은 여자를 임신하게 해놓고 책임지지도 않는 쓰레기와 비슷했다. 한성우는 안절부절 못하며 서성거렸다. 그는 머리속으로 최대한 빨리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조금 이따 다시 전화를 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아이디어 하나가 스쳤다. 차미주가 최고의 증인이었다. 자신이 허튼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줄 증인.곧바로 화장실에서 나온 한성우는 차미주의 방 문앞에서 그녀를 불렀다. “도둑아, 너 안에 있어?”방 안에서는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차미주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 왜?”“별 일은 아니고, 문 열어. 할 말 있어.”한성우는 말하며 김경선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어찌되었든 김경선이 딸을 사랑하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차미주만 있다면 딸을 생각해서라도 한성우를 조금이라도 봐 줄 수도 있었다. 차미주의 방문을 등지고 선 한성우는 휴대폰을 높이 들고 셀카 찍는 자세를 취했다. 차미주와 자신이 모두 앵글에 담길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모든 준비를 마친 한성우가 밖에서 또 다시 차미주를 불렀다. “도둑아, 빨리 나와.”조금은 짜증 섞인 차미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촉하지 마. 금방 나가.”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한성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나와. 나랑 잠깐 얘기하고 다시 들어가도 돼.”“알겠어, 알겠어.”차미주는 거울을 보며 옷깃을 끌어올렸다. ‘젠장, 이건 대체 어떤 놈이 디자인 한 거야. 올리면 허리도 안 가려지고, 내리면 가슴이 안 가려지잖아. 이렇게 짧은 바지에 저렇게 긴 꼬리까지 달리다니.’‘캣우먼 코스튬은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 현진이는 대
김경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가 친척은 한성우를 열성적으로 환영했다. “세상에. 경선아, 미주가 능력도 좋아.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만나다니. 보기만 해도 화면이 훤하네.”“어쩐지 내가 전에 친구 아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니까 시큰둥해하더라니. 미주가 이미 만나는 사람이 있었네. 두 사람 벌써 합가까지 했어? 어울리는 것 좀 봐봐.”“자네, 나이가 몇이야? 어디 사람인가? 직업은?”“아이까지 생겼는데 식은 언제 올려?”...한성우가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아이라니요. 아주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자네가 방금 전화해서 애가 어쩌고 했잖아. 미주가 임신한 거 아냐?”한성우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상대방은 키워드 하나만 듣고 자기 마음대로 한성우의 말을 재해석했다. 심지어 한성우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말이다. 지금 한성우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은 미래의 장모님이었다. 아무리 뻘쭘해도 함부로 전화를 끊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의 결혼생활이 행복할지 아닐지는 전부 장모님이 그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큼, 목을 가다듬은 한성우가 해명했다. “아주머니께서 잘못 들으신 거예요. 제 말은 미주는 지금 나이가 어리고 이제 막 커리어를 쌓고 있으니 급하게 아이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거였어요. 먼저 미주가 본인 인생을 먼저 즐기게 하고 싶어요. 그리고 한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아이를 갖고 싶어요. 저는 미주가 제 옆에서 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요.”옆에 있던 아주머니들은 한성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김경선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눈앞의 젊은이를 빤히 살펴보았다. 진지한 상대방의 눈빛은 김경선에게 그의 결심과 진심을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김경선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당시 그녀가 결혼하기 전 차미주의 아버지도 이렇게 진지한 고백을 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결말은 결국 이혼이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약속할 때, 그 마음이 진심인
한성우의 눈빛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의 반응에 희망을 본 차미주가 한 번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었다. “야옹.”꿀꺽 침을 삼킨 한성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누가 너더러 이렇게 입으래?”첫 연애라 경험이 없었던 차미주는 뻣뻣하게 한성우의 어깨를 감싸안고 애교 섞인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말했다. “이런 거 싫어?”이상한 목소리에 한성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차미주의 머리에 달린 고양이 귀를 잡아당기더니 웃으며 물었다. “성대가 뭐 어디 끼이기라도 한 거야?”그 말은 겨우 잡아놓은 분위기를 단꺼번에 망쳐버렸다. 차미주가 한성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이를 악물었다. “미친 X이 웃긴 뭘 웃어!”차미주의 곁으로 옮겨 앉은 한성우가 그녀를 품에 안고 웃으며 말했다. “그냥 편하게 말하면 되잖아. 그렇게 톤 올리면 안 힘들어?”무드라고는 없는 한성우를 차미주가 툭 쳐냈다. 화가 잔뜩 난 차미주가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킨 순간 찌익 소리와 함께 바지가 잡아당겨지는 것 같았다. 상황 파악을 하는 차미주의 귓가로 유유한 한성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꼬리 떨어졌어.”차미주가 고기를 돌리자 한성우의 엉덩이 밑에 깔린 부들부들한 자신의 꼬리가 보였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적인 힘에 꼬리가 떨어진 것이었다. 힘없이 축 처진 꼬리가 침대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고 심지어 꼬리 끝에는 천 한 조각이 달려있었다. 그리고 한성우는 고개를 숙여 차미주의 엉덩이 쪽을 보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바지 안쪽으로 스쳤다. 차미주가 손을 뻗어 만져보니 바지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바람은 바로 그곳을 타고 들어온 것이었다. 한성우가 친절하게도 차미주에게 귀띔했다. “너 엉덩이...”차미주는 두 손을 등 뒤로 보내 엉덩이에 난 구멍을 가리며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닥쳐!”한성우는 부끄러움과 난감함이 섞인 차미주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앉아. 앉으며 가려져.”침
차미주의 행동에 한성우가 어리둥절해졌다. “죽고 싶은 거야?”차미주는 한성우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럼 참지 마. 내가 안 된다고 한 적도 없잖아.”손을 뻗어 차미주의 볼을 꼬집은 한성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차미주가 한성우와 관계를 가지려는 동기가 잘못되었다. 그녀가 관계를 가지려는 목적은 임신을 해 엄마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그건 한성우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관계는 두 사람이 다른 이유 없이 그저 사랑하는 마음만이 가득한 그 순간에 함께 쾌락을 즐기는 것이었다. “...”‘이미 일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 아직도 때가 아니라고?’‘내가 요즘 얼마나 애써서 오늘 겨우 진전이 보이는데, 얘는 대체 뭐 하는 거야?’미간을 잔뜩 찌푸린 차미주가 한성우를 밀어냈다. “지금이 아니면 대체 그 때라는 게 언제라는 거야?”한성우가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내가 어머님 공략에 성공하면.”차미주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너... 너 뭘 안 거야?”한성우가 차미주를 품에 안았다. 낮게 깔린 그의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뭘 알아?”차미주는 한성우가 진실을 알게 되는 걸 원하지 않으니 한성우는 모른 척해줄 생각이었다. 투박하게 유혹하는 차미주의 모습이 사실은 꽤 흥미롭기도 했다. 한성우는 이제야 생각이 조금 정리가 되었다. 조금 전 차미주를 데리고 영상통화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김경선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한성우였다. 그러니 굳이 차미주를 그 사이에 끌어들여 모녀 사이를 갈라놓는다면 그건 너무도 비호감을 유발하는 방법이었다. 한성우가 모른 척하자 차미주의 의심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엄마를 공략한다는 게 무슨 뜻인데?”“내가 너와 결혼하려면 먼저 어머님 허락부터 받아야 되잖아. 어머님께 인사 드리게 해달라고 해도 안 된다고 하니까 그럼 어머님이 날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거구나, 한 거지. 그럼 당연히 내
멈칫하던 주강운이 물었다. “어디로 가면 돼?”한성우가 주소를 알려주었다. 주강운이 물었다. “한서도 가?”한성우가 짜증 난 말투로 말했다. “그 배은망덕한 놈 얘기는 꺼내지도 마. 기억을 잃더니 우리가 뭐 자기한테 빚이라도 진 것처럼 굴잖아. 그리고 한현진 씨도 똑같아. 매번 내가 미주랑 싸우기만 하면 헤어지라고 부추기잖아. 우리 사이는 전부 그 인간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오늘도 이 일 때문에 미주가 또 나한테 화를 냈다니까. 짜증 나게.”시간을 확인한 주강운이 말했다. “위치 보내줘. 좀 이따 택시 타고 갈게.”주강운이 만나기로 약속한 바에 도착했을 때, 한성우와 신우는 이미 룸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룸에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도 다른 재벌가의 아들딸도 있었다. 주강운이 룸으로 들어섰을 때 그들은 모여 게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한성우는 입에 담배를 물고 주사위를 돌리며 옆에 앉은 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유머러스한 멘트를 날리는 한성우의 모습은 바람둥이 그 자체였다. 여자들은 한성우의 말에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 앉은 신우는 시끌벅적한 한성우 주변에 비하면 비교적 조용한 썰렁한 편이었다. 신우는 애초부터 유흥을 즐기는 재벌 2세들과는 달랐다. 예전부터 이런 자리엔 신학이 어쩌다 한 번 나오고는 했다. 하지만 신학은 미친놈과도 다름이 없었다. 술에 취해 다른 사람을 중상에 이르도록 폭행한 사건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친구들은 신학을 술자리에 잘 부르지 않게 되었다. 예전의 신우라면 절대 이런 자리엔 나오지 않았다. 고여정과 결혼 후 신우는 인기가 많아지기라도 한 듯 가끔 술자리에 들러 친구들과 모임을 가졌다. 비록 말은 별로 없었지만 인사를 건네는 사람에게는 예의 있게 말을 건네기도 했다. 모두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니 서로 비즈니스를 함께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서로 인맥을 쌓는다면 앞으로 일을 함에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예전의 신우는 매너는 몸에 밴 사람이었지만 융통성이 부족해 너무 딱딱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