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상이 말했다.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한성 그룹의 강한서 씨. 제가 당신 찾을 수 있어요.”강한서가 다시 거절하려고 했지만 문지상이 말을 이었다. “강한서 씨는 주강운 제일 친한 친구잖아요. 그 인간이 내 아내와 딸을 이 지경으로 내몰았으니 친구인 강한서 씨가 대신 이정도 죄를 갚는 건 충분히 할 수 있겠죠.”“...”문지상이 말했다. “지금은 정말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래요. 아직 못한 일이 있어요. 아이는 강한서 씨 곁에 있는게 제일 안전해요. 강씨 가문 사람이라면, 아무도 쉽고 못 건드릴 거예요. 나중에 모든 것이 해결되면 제가 아이 데리러 올 거예요. 그러니 그때까지만 잘 숨겨줘요. 절대 그 아이의 신분이 노출되어서는 안 돼요. 그 아이는 민혜가 남기고 간 유일한 핏줄이에요. 절대 그 아이까지 휘말려서는 안 돼요...”당시의 강한서는 문지상이 말 한 “휘말리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체 무슨 일이기에 갓 태어난 아이를, 그것도 아직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기를 두고 가야만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문지상은 필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전화 한 통을 받은 그는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떠나기 전, 문지상은 주강운에게 한 마디만 전해달라고 했다. 간민혜의 일은 이게 끝이 아니라고. 강한서는 그 말을 전하지 못했다. 주씨 가문에서 주강운을 해외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주강운의 해리성 장애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그의 가문에선 많은 교수를 모셔와 주강운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들은 한결같이 주강운의 해리성 장애는 간민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주강운의 어머니는 심지어 그의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 절대 두 번 다시는 간민혜의 이름을 언급하지 말라며 부탁했다. 심지어 인맥을 동원해 그 교통사고에서 주강운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강한서는 주씨 가문의 결정이 맞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주강운이 기억을 되찾은 후 간민혜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또다시 미친 X처럼 발병할까, 그것이 걱정이었
편지 봉투를 건네받은 한현진이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한현진은 안에 증명서 같은 물건이 들어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편지 봉투에 든 물건은 경찰 견장이었다. 물건을 확인한 한현진이 멍해졌다. 그녀는 조금 전 강한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빛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어. 이름도, 과거도, 미래도 없는 사람들이.”한현진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문지상 씨는 마약수사팀 형사였던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어. 나한테 명확하게 얘기한 적 없어. 하지만 아마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하우스클럽의 사건이 있기 전, 은서를 보러 한 번 왔었어. 출장을 간다고 했어. 이번엔 좀 오래 걸릴 거라고. 그러면서 은서가 다 나으면 데리러 온다고 했었거든.”말을 이어가던 강한서의 목소리가 점점 잠겼다. “그게 내가 문지상 씨를 마지막으로 본 거였어. 그 뒤로 내 계좌로 매년 돈이 들어왔어. 돈을 보낸 사람은 문지상 씨였고. 하지만 한 번도 나타난 적은 없어. 난 줄곧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생각했지. 여전히 임무를 마치지 못해서 은서를 보러 오지 못하는 거라고. 그래도 은서에게 돈은 보냈으니까. 본인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니까.”“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명예롭게 은서를 집으로 데려갈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어떻게 6년 전에 이미 사망했을 수가 있는 거지? 심지어 약물 과다 투여로 추락사했다니. 문지상 씨가 마약에 손댔을 리가 없어...”“경찰 측에서는 문지상 씨의 사망 소식을 전한 적도 없어.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한 적도 없었던 사람처럼, 모든 정도가 전부 말살되었어.”한 번도 변한 적 없던 강한서의 신념이 지금 이 순간,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문지상의 죽음은 범죄 수사를 위한 희생으로조차 기록되지 않았다. 그의 자료는 전부 말살되었다. 마치 팀의 오점을 지우기라도 하듯. 은서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문지상의 남겨진 아이를 책임질 사람도 없었고 심지어 그의 죽음
나중에라도 정설희의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 장씨 가문에서 강한서를 방패막이로 삼을 것을 막을 목적으로 하우스클럽에서 있었던 사고를 조사해 장씨 가문을 제압할 증거를 확보할 계획이었다. 이렇게 지나간 옛일을 알아내게 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손등을 토닥토닥 다독이며 나지막이 물었다. “나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어.”“뭔데?”한현진이 말했다. “주강운 씨는 왜 널 원망하는 거야?”주강운이 간민혜를 잊도록 최면 당한건 강한서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강한서는 주강운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어떻게든 그를 도와주려 했다. 강한서에 대한 주강운의 적의는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나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야.”그는 당시의 상황을 반복적으로 회상했다. 강한서의 전화를 받고 주강운이 간민혜를 찾으러 간 후에 일어난 일이 유일하게 강한서가 모르는 부분이었다. 설마 그 시간 사이 그들과 주시윤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걸까? 그게 강한서와는 또 어떤 관련이 있을까?한현진이 제안했다. “아니면 네가 그냥 직접적으로 강운 씨에게 물어봐.”“어떻게 물어? 납치 사건이 너와 연관되어 있냐고 물어? 네가 강운이면 그렇다고 인정하겠어?”강한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강운이는 간민혜 씨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어. 강운이는 생각이 많은 애야. 절대 얘기하지 않을 거야. 직접적으로 묻는 건 오히려 역효과일 거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다시 질문했다. “너 강운이랑 만나서 또 무슨 얘기했어?”“아.”한현진이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했다. “별 말 안 했어. 그냥 내가 막 뭐라고 해서 분위기가 좀 안 좋았어.”강한서가 의아한 눈빛을 짓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 줄곧 강운이를 안쓰러워했잖아. 강운이 몸에 난 상처만 보면 마음 약해지고. 이번엔 어떻게 욕할 생각을 한 거야?”말문이 막힌 한현진이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다 너 때문이잖아. 강
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지금처럼 계속 끌려 다닐 수만은 없어. 나도 강운이가 왜 날 원망하는지 알아야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강운이는 절대 그만두지 않을 거야.”주강운의 해리성 장애의 제일 큰 증상은 바로 편집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한현진은 강한서가 준 임무를 깔끔하게 완성했다. [불굴의 남매단]의 알람이 울렸다. 휴대폰 화면을 힐끔 쳐다본 한성우는 한현진이 보낸 문자임을 확인하고는 코웃음을 치더니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얼마 전 차미주를 덮치라던 한현진의 태도를 잊을 수가 없었다. ‘의리 있는 척 가식 떨긴.’그가 문자를 확인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예 보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잠시 후, 차미주가 방에서 나오며 휴대폰을 한성우에게 건넸다. “개자식, 현진이랑 강한서 싸웠어.”“오.”한성우는 별다른 리액션 없이 짧게 대답했다. “두 사람 자주 싸우잖아. 이상할 것도 없지. 네가 그렇게 오랫동안 이혼하라고 설득해도 두 사람 여전히 꼭 붙어 있었잖아. 신경 쓰지 마. 다 싸우고 나면 괜찮을 거야.”“이번엔 달라.”차미주가 한성우의 다리 옆에 붙어 앉으며 그에게 쫑알거렸다. “현진이 임신하고 입맛이 변했잖아. 어제 새벽에 물만두가 먹고 싶다고 강한서에게 사오라고 했는데 강한서가 싫다고 했대. 영업하는 가게가 없다고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말이야. 하지만 오늘 아침 은서가 히비스커스 호텔의 새우 만두가 먹고 싶다고 하니까 이번엔 두말 않고 바로 4, 50km가 되는 거리를 운전해서 다녀왔대. 현진이가 그 사실을 알고 강한서에게 따지니까 강한서가 괜히 어린 아이와 비교하며 트집잡는다고 해서 현진이가 지금까지 울고 있다잖아.”한성우가 멈칫하더니 말했다. “형수님이...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었어?”한성우가 알고 있는 한현진은 강한서가 원하는 것을 사오지 않으면 그를 때리면 때렸지 홀로 주저앉아 울 캐릭터가 아니었다. 한현진의 좌우명은 다른 사람을 화 나게는 해도 절대 내가 화 날 일은 만들지 말
차미주가 한성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현진이는 그렇게 가벼운 애가 아니야. 현진이가 강한서를 좋아한 건 그때 교통사고에서 강한서가 현진이를 차에서 꺼내줬기 때문이야. 현진이가 그랬어. 그냥 지나가는 사람일 뿐인데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인성이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니 생각해봐. 강한서가 왜 아무 연고도 없이 그 교통사고 현장에 나타났겠어?”“구경하려고?”욱, 화가 올라온 차미주가 한성우를 걷어찼다. “내가 지금 너한테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잖아. 넌 왜 말장난인데.”한성우가 피식 웃을 흘리더니 차미주를 품에 안았다. “알겠어, 알겠어. 이젠 장난 안 할게. 얘기해.”차미주가 말했다. “강한서와 주강운은 죽마고우잖아. 주강운이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강한서가 현장에 달려갔겠지. 그러다 우연히 현진이를 만난거고.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퍼즐이 맞춰지잖아.”농담은 하고 있었지만 한성우는 사실 차미주가 하는 모든 말을 놓치지 않고 전부 듣고 있었다. 전혀 흠 잡을 데 없이 논리적인 추측이었다. 다만...“형수님이 본게 임산부가 확실해?”“그냥 임산부가 아니라 곧 출산을 앞둔 것 같았대. 배가 엄청 컸대.”차미주가 한성우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며 비밀스럽게 얘기했다. “혹시, 은서가 당시 간민혜 씨 배속에 있던 아이 아닐까? 그 사고로 어른과 아이 모두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간민혜 씨만 사망한 거지. 살아있던 아이는 강한서가 숨긴 거 아닐까?”미간을 찌푸린 한성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은서가 간민혜 씨와 주강운의 딸이라고?”차미주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떻게 주 변호사님 딸이 되는 거야? 난 간민혜 씨와 강한서 아이 같아. 두 사람이 눈이 맞아서 주 변호사님을 배신한 거지.”“...”“은서가 강한서 딸이 아니라면, 강한서는 미친 거 아냐? 왜 그 아이 때문에 현진이와 싸워? 전엔 못 느꼈었는데 지금 이렇게 생각해 보니까 어쩐지 은서가 강한서와 닮은 것 같아. 눈이며 코며 그리고 그 입까지
한현진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성우처럼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도 왜 얼른 소문을 퍼뜨리지 않고 오히려 한현진이 차미주가 얘기하도록 부추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걸까? ‘대체 어떤 뇌구조를 갖고 있는 거야.’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한현진도 더 이상은 방법이 없었다. 필살기를 꺼낼 수밖에.[성우 오라버니는 저와 미주가 어떤 사인지 제일 잘 알잖아요. 전에 두 사람이 만난다고 했을 때 제가 제일 반대했었잖아요.]한성우가 말했다. [형수님이 그 얘기를 꺼낼 자격이 있어요?]한현진이 말했다. [성우 씨에게 전 여친이 얼마나 많았어요. 게다가 그 어떤 사람과도 오래 만남을 유지하지 못했었잖아요. 전 성우 씨가 가벼운 마음으로 미주를 만나다가 미주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계속 반대했던 거잖아요.]한성우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 한현진의 말에 수긍한 것이 분명했다. 한현진이 말을 이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니까 저도 성우 씨가 진심으로 미주를 좋아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나중엔 반대하지 않았잖아요. 그때 성우 씨가 꾀병을 부리며 미주를 속였을 때도 제가 의사를 찾아서 성우 씨가 먹을 음식 레시피를 받아왔었어요. 심지어 강한서에게 대신 음식 효과를 테스트하기도 했다고요. 정말 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제가 그렇게까지 신경 썼겠어요?]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구경거리가 없어질까 봐 그렇게 열정적으로 굴었던 거겠지. 그리고 그게 날 돕는 거야? 그 보약 덕에 몇날 며칠을 코피를 흘렸다고!’하지만 한현진이 강한서에게도 보약을 먹었다는 말에 한성우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졌다. 한성우가 입술을 짓이기며 대답했다. [저한테 감정 호소는 하지 마요. 방금 제 장모님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성우 씨 그 병, 아주머니 귀에까지 들어갔어요. 아주머니께서는 성우 씨가 정말 그쪽으론 문제가 있는 줄 아시고 미주에게 그런 요구를 하신 거예요. 결혼이 하고 싶으면 먼저 임신을 하라고요.
차미주가 부끄러운 듯 말했다. [내가 봤는데 너무 노출이 심한 것 같아. 내가 이걸 어떻게 입어.]한현진이 말했다. [그냥 입어. 입고 코스프레용 의상인데 어떠냐고 성우 씨에게 직접 물어봐.]차미주는 충격에 사로잡힌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문자를 작성 중인 한현진에게 한성우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현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도둑이가 직접 현진 씨에게 얘기한 거예요?”“네. 아니면 제가 어떻게 성우 씨에게 먼저 아이를 가지라고 조언할 수 있겠어요? 성우 씨가 저한테 미주가 부모님을 만나 뵈는 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봐달라고 했잖아요. 미주는 진작 아주머니께 얘기했고 아주머니께서는 그런 조건을 내거셨죠. 미주는 본인이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성우 씨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 봐 계속 말을 하지 못했던 거예요.”한성우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 분은 정말 본인 딸이 손해 볼 걱정은 안 하시나 봐요.”한현진이 말했다. “아주머니는 성우 씨보다도 돈이 많잖아요. 아주머니께 사위는 그저 딸의 비위를 맞춰주는 장난감 같은 거예요. 장난감이 말을 듣지 않으면 바꾸면 그만이죠. 주인이 손해 볼 게 뭐가 있어요. 다음 사위는 말을 잘 듣는 놈일 테니까요.”한성우가 바득, 이를 갈았다. “제대로 된 비유를 못할 바엔 차라리 닥쳐요.”말이 없던 한성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형수님 혹시 미주 어머니 전화번호 알아요?”한현진은 곧바로 차미주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한성우에게 알려주었다. 학창시절 차미주의 어머니가 과일을 잔뜩 사들고 기숙사에 온 적이 있었다. 당시의 한현진은 말을 예쁘게 한 덕에 차미주의 어머니와 얘기가 잘 통했고 그렇게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비록 한 번도 연락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전화번호를 저장한 한성우는 장모님이라는 이름으로 번호를 저장했다. 한현진이 아부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제가 아는 건 전부 얘기 드렸어요. 제 일은 어떻게...”한성우는 누구보다 빠르게 모르쇠를 시전했다. “죄송해요. 부탁
한성우가 멍하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제야 지금 전화를 끊는 건 매너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화 받은 아주머니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야. 내가 언제 아이가 생겼다고 했어.’아주머니의 말과 갑자기 전화를 끊은 한성우의 책임을 회피하는 듯 한 행동은 여자를 임신하게 해놓고 책임지지도 않는 쓰레기와 비슷했다. 한성우는 안절부절 못하며 서성거렸다. 그는 머리속으로 최대한 빨리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조금 이따 다시 전화를 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아이디어 하나가 스쳤다. 차미주가 최고의 증인이었다. 자신이 허튼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줄 증인.곧바로 화장실에서 나온 한성우는 차미주의 방 문앞에서 그녀를 불렀다. “도둑아, 너 안에 있어?”방 안에서는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차미주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 왜?”“별 일은 아니고, 문 열어. 할 말 있어.”한성우는 말하며 김경선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어찌되었든 김경선이 딸을 사랑하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차미주만 있다면 딸을 생각해서라도 한성우를 조금이라도 봐 줄 수도 있었다. 차미주의 방문을 등지고 선 한성우는 휴대폰을 높이 들고 셀카 찍는 자세를 취했다. 차미주와 자신이 모두 앵글에 담길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모든 준비를 마친 한성우가 밖에서 또 다시 차미주를 불렀다. “도둑아, 빨리 나와.”조금은 짜증 섞인 차미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촉하지 마. 금방 나가.”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한성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나와. 나랑 잠깐 얘기하고 다시 들어가도 돼.”“알겠어, 알겠어.”차미주는 거울을 보며 옷깃을 끌어올렸다. ‘젠장, 이건 대체 어떤 놈이 디자인 한 거야. 올리면 허리도 안 가려지고, 내리면 가슴이 안 가려지잖아. 이렇게 짧은 바지에 저렇게 긴 꼬리까지 달리다니.’‘캣우먼 코스튬은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 현진이는 대
남자의 말에 신하리가 대답했다.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인사는 너무 빠른 것 같아요.”남자가 말을 이었다. “너도 이젠 어린 나이 아니잖아. 아버지와 아주머니께서도 계속 네 결혼 때문에 걱정이 많으셔. 특히 아주머니는 흰머리까지 많아지셨어. 만나는 사람도 생겼으니 빨이 집에 데려와 인사 드려야지. 그래야 아주머니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거야.”입술을 짓이기던 신하리가 말을 이었다. “이제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게다가 요리는 저보다 몇 살이나 어리고 아직 한창 일에 집중해야 되는 시기라 저희는 최근 몇 년 사이엔 결혼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굳이 이렇게 일찍 집에 인사드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몇 년 후 열이도 배우로 자리 잡고 저희도 여전히 좋은 감정으로 잘 만나고 있어서 열이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땐 얘기하지 않으셔도 저희가 먼저 인사드리러 갈 거예요.”신하리는 남자가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다른 일 없으면 먼저 끊을게요. 열이가 요즘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서 스트레스가 많거든요. 요즘엔 또 말도 안 되는 루머에 시달리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 내서 옆에 있어주고 싶어요. 그래서 이번 주 가족 모임엔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두 분께 전해주세요.”말을 마친 신하리가 전화를 뚝 끊었다. 전화가 끊기기 바로 직전, 신하리는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둔탁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인 것 같았다. 물론 신하리는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수없이도 봐왔었다. 전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떨렸지만 이젠 그녀의 마음에 별다른 파장을 일으키지 않았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힘들었던 일도, 영원히 지나지 않을 것 같던 일도 결국은 시간이 모두 해결해 주었다. 생각에 잠겼던 신하리가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한열이 고개를 갸우뚱한 채 이상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신하리는 조금 전 자신이 꼬집었던 한열
‘이렇게 뻔뻔한 여자였어?’‘사랑하긴 개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들어 안 도와주면 죽어버리겠다는 표정으로 사정하지만 않았어도 난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거라고.’신하리의 이런 뻔뻔한 거짓말은 한열도, 수화기 너머의 남자도 믿지 않았다. 남자는 심지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괜히 볼멘소리하지 마. 네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온 가족이 다 알아.”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신하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얼마나 세게 휴대폰을 꽉 움켜쥔 건지 손톱마저도 조금 하얗게 질려있었다. 시선을 내린 신하리가 실소를 터뜨렸다. “하도 시간이 오래 되어서 잊으셨나보네요.”“뭘?”신하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제 첫사랑은 남자였어요. 처음 좋아했던 사람도 남자였고요.”신하리의 옆에 앉아있던 한열은 그녀의 통화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한열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신하리를 힐끔 쳐다보며 생각했다.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지, 그럼 여자겠어?’하지만 한열과 달리 윤명훈은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마음에 폭풍이 몰아쳤다. ‘설마 신하리에 대한 루머가 사실이었다는 거야?’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풋, 소리 내 웃었다. “장난하지 마.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넌 키스신도 한 번 찍은 적 없어. 너희 바닥에서야 그런 널 도도하다고 하겠지만 난 알아. 넌 남자와 스킨십조차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심지어 숨결만 느껴져도 본능적으로 구역질을 하잖아. 그런 네가 남자친구를 사귀어?”이를 악문 신하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주연이 얘기 안 해요?”“뭘?”“그날 제작발표회에서 제가 주연이 보는 앞에서 제 남자친구와 키스한 거.”...상대방이 말이 없자 신하리가 말을 이었다. “주연이 안 믿을 것 같아서 보여준 거예요. 맞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살짝 만지는 것도 전 역겨워요. 주연도 같은 생각이었겠죠.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잘 아니까. 저도 열이를 만나고 나서야 알게
한열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하리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의 말에 속상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 분명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를 위해 돌을 막아줬을 리가 없었다. 그런 마음에 아니라면, 그에게 장난을 치며 관심을 끌었을 리가 없었다. ‘조금 전 내가 너무 상처 되는 말을 하긴 했어.’여전히 고민하는 한열의 귓가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한열이 멍한 표정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신하리가 배를 끌어안은 채 폭소하고 있었다. 눈물까지 찔끔 흘린 그녀는 웃느라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똥강아지, 너 솔직하게 얘기해. 태어나서 한 번도 연애해 본 적 없지?”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는 신하리의 얼굴엔 슬픔이라곤 전혀 없이 온통 장난기뿐이었다. 그제야 또라이 같은 여자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한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윤명훈도 운전석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티베탄 마스티프는 사촌 누나 앞에서만 순한 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한열을 길들이는 사람이 있다니. 역시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이 있는 법이었다. 수치와 분노를 동시에 느낌 한열이 바득 이를 갈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신하리를 물어버릴 것처럼 말했다. “제가 사귀었던 사람은 신하리 씨가 손가락 다 사용해도 부족할 거예요!”“소꿉놀이 같은 연애 말하는 거야?”신하리가 야유 섞인 말투로 한열을 놀렸다. “설마 첫 키스 상대가 나였던 거 아냐?”순간 뜨끔한 한열의 몸이 어색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저 한열을 놀리려던 신하리는 그의 반응에 당황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정말 나야?!”한열이 창피함을 못 이겨 버럭 화를 냈다. “아니거든요!”하지만 한열은 거짓말엔 너무 소질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신하리에게 이렇게 빨리 모태 솔로라는 사실을 들켰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거짓말이 소용없다는 것을 인식한 한열이 자포자기하며 말했다. “제가 신하리 씨와 전에 했던 건 첫키스 아녜요. 제가 일부러 신하리 씨 기분 더럽게 하려고 한
한열이 입술을 짓이겼다. “제가 신하리 씨와 공개 연애를 선택한 건 신하리 씨가 저에게 감독님을 소개해주길 바랐기 때문이었어요. 우린 서로가 원하는 걸 해주기로 계약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제가 신하리 씨를 도와준 거라고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신하리 씨는 이번에 저 때문에 진짜로 다쳤어요. 이건 제가 신하리 씨에게 빚 진 거예요.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뭐든지 얘기해요.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까.”멈칫한 신하리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눈앞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탑 아이돌을 쳐다보았다. ‘이 바닥에 아직도 이렇게 단순한 자식이 있었어?’아무리 신하리가 한열에게 유리한 계약 조건을 달았다고 하더라도 계약 연애는 한열에겐 이득보단 손해가 더 많았다. 게다가 유명한 감독과 작품을 하고 싶다면 사촌 형인 송민준에게 부탁해도 충분했다. 굳이 신하리와 엮일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 한열의 SNS 댓글은 눈에 띌 정도로 악플이 늘었다. 여자친구인 신하리도 공개 연애 후 수많은 악플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극단적인 성향을 지닌 팬들은 그녀의 영정사진을 만들어 죽은 쥐과 칼날과 함께 넣어 택배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니 한열 쪽 상황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 전 신하리가 한열 대신 돌을 맞은 건 그가 얼굴을 다쳐 연예계 생활에 영향을 끼칠까 봐 걱정된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죄책감 때문에 한열에게 이렇게라도 빚을 갚아야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이 자식, 정말 멍천한 거였잖아? 이렇게까지 정중하게 신세를 졌다며 은혜를 갚겠다고 하다니. 이런 멍청해서야 대체 어떻게 인지도를 올릴 수 있었던 거야?’‘고담시 한씨 가문은 모두가 알아주는 명문가잖아. 그런 집안에서 대체 어떻게 이렇게 멍청한 아들이 나올 수 있는 거지? 눈치 빠르고 꿍꿍이가 많은 사촌 누나와 형에, 심지어 12살짜리 막내 동생도 쟤보다는 똑똑하겠어.’잡혀가서도 인질범 편을 들어줄 것 같은 한열의 모습에 신하리는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졌다. 한
윤명훈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인터넷에 떠도는 스캔들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동안, 이 미친 인간들은 경찰서 앞에서 소란을 피웠다. 한열의 반항적인 성격을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윤명훈은 충분히 버거웠다. ‘하지만 이젠 한 명이 더 늘었잖아. 젠장. 그 놈의 돈 벌기가 점점 더 힘드네!’비록 화가 치밀긴 했지만 의식을 잃은 신하리와 한열 몸에 묻은 피를 보자 윤명훈도 걱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신하리 씨는 어때?”“안 죽어요.”한열이 신하리가 꼬집던 허리를 어루만지며 쓰러진 척 연기하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연기할래요?”그제야 천천히 눈을 뜬 신하리는 한열의 눈빛과 반말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 누나 연기가 좀 실감났어?”흥, 콧방귀를 뀐 한열이 시선이 저도 모르게 신하리의 뒤통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머리숱이 많아 얼마나 많이 다친 건지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날아온 돌멩이는 힘이 꽤 실려있었다. 옆에 있던 한열의 귀에도 돌멩이가 무겁게 머리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신하리는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제외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녀는 심지어 티슈를 뽑아 뒤통수의 피를 닦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열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티슈로 상처 닦으면 안 돼요. 더럽잖아요.”“더러우면 걸레라고 하겠지, 왜 티슈라고 부르겠어?”신하리가 억지스러운 논리를 늘어놓았다. “티슈로 엉덩이를 닦을 땐 왜 더럽다고 하지 않는 거야?”한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가 티슈로 엉덩이를 닦지, 치질을 닦는 건 아니잖아요.”멈칫하던 신하리가 순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장난스레 말했다. “너 아이돌 이미지는 버린 거야? 아이돌 입에서 어떻게 엉덩이니, 치질이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어?”한열이 불퉁한 말투로 대답했다. “머리 상처에 출혈이 꽤 있었어요. 티슈로 닦으면 상처에 먼지가 붙어서 염증이 날 거예요. 나중에 흉터
한열의 마음에 남아있던 감동이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두 사람이 신고를 마치고 나오자 경찰서 밖은 이미 수많은 기자와 팬들로 둘러싸였다. 경찰서 앞이었던 만큼 경찰들이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 현장은 그나마 평화로웠다. 한열이 신하리를 감싸며 차에 오르던 그때,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열!”한열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란 크기의 돌멩이가 한열을 향해 날아왔다. 한열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앞으로 누군가 나타나 온 몸으로 돌멩이를 막았다. 신하리였다. 그 돌은 신하리의 뒤통수에 부딪혔다. 극심한 통증에 신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몸이 앞으로 휘청였다. 한열이 무의식적으로 신하리를 부축했다. 미간을 찌푸린 신하리가 손을 뻗어 돌멩이에 맞은 곳을 만졌다. 뜨뜻하고 축축한 촉감이 느껴졌다. 손바닥을 펼치자 빨간색의 피로 흥건했다. 신하리의 부축하고 있던 한열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의 얼굴은 섬뜩할 정도로 창백했다. 돌을 던진 사람이 큰소리로 질타했다. “개 같은 자식!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투표해서 널 데뷔시켰는데. 연애도 부족해서 이젠 뭐, 성추행? 팬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아?”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심지어 옆에서 질서를 유지하던 결찰들도 미처 반응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돌을 던진 그 사람이 달려들려고 하자 경찰이 얼른 앞으로 나서 제압했다. 그 사람은 심지어 바닥에 제압당한 채 여전히 욕설을 내뱉으며 난동을 부렸다. “네가 이런 인간이란 걸 진작 알았다면 차라리 지나가는 강아지에게 투표를 했을 거야! 넌 정말 네가 연기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정말 팬들이 네 재능에 반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 그 반반한 얼굴 아니었으면 너에게 투표한 사람이 있긴 했을 것 같아? 팬들 덕에 넌 아이돌이 될 수 있었던 거야. 팬들이 아니면 넌 아무 것도 아니라고!”구경 중이던 사람들과 기자들이 미친 듯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한열은 신하리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그녀의
신하리는 말하며 예쁜 눈웃음을 지었다. “저 정신병 있는 거 다들 아시죠?”그 말에 사람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얼마 전, 신하리가 한 드라마 촬영 중 현장에서 갑자기 귀신에 쓰인 사람처럼 아무런 안정장비도 하지 않은 채 6미터가 넘는 곳에서 뛰어내려 뼈가 부러진 사건이 있었다. 다들 신하리에게 왜 뛰어내렸냐고 묻자 그녀는 아래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그러나 당시 상황을 증명해 줄 동영상은 없었고 그 사건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처럼 듣고 지나보냈었지만 지금 신하리의 입으로 직접 그녀에게 정신병이 있다고 말하니 그때의 사건을 떠올린 사람들은 순산 오싹함을 느껴야 했다. 이건 분명한 경고였다. 마치 난 심신이 미약한 사람이라 너에게 정말 염산을 뿌려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으니 내 말을 장난으로 가볍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신하리의 등장으로 [아기 고양이]의 라이브 방송의 인기는 더 뜨거워졌다. 댓글에도 다양한 의견이 더 많아졌다. [사랑에 눈이 먼 연예인 1위! 보상은 산에서 산나물 캐기 18년!][신하리 미친 거 아녜요? 이렇게 대놓고 협박이라니.][면전에 협박하는데 아직도 신고하지 않는다고? 증거가 없는 거야, 아님 애초부터 한열을 모함하고 있었던 거야?][성추행을 한 사람도 경찰서에 신고했는데 당한 사람은 대체 뭐가 무서워서 신고하지 않는 거야.][지난번에 스스로 신고한 인간은 아직도 감옥에서 사회봉사 중이예요.][만약 지금 당장 신고한다면 전 아기 고구마 말을 믿을 거예요. 계속 이런 식으로 수작을 부리는 건 오히려 한열을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작당 모의에 더 가까워 보여요.][지금 루머를 퍼뜨리는 건 너무 쉬운 일이 됐어요. 스크린샷 몇 장이면 바로 스토리를 짤 수 있으니까요.]여론이 점차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멀어지자 [아기 고구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지금 저 협박하시는 거예요? 아
신하리의 라이브 방송 연결 요청에 [아기 고구마]가 잠시 멍해졌다. 무의식적으로 옆을 바라보던 그녀가 곧 시선을 돌렸다. 많은 사람들은 그 미세한 행동을 포착하지 못했지만 한현진에겐 들키고 말았다. [아기 고구마]는 혼자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 듯 했다. 그녀의 옆에는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라이브 방송을 시청하던, 궁금증 해소를 위해 모인 사람들과 진실 규명을 바라는 팬들이 미친 듯이 댓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겁쟁이! 네가 그러고도 무슨 남자야! 사건이 터지면 뒤로 물러나 여자친구가 나서서 모든 걸 감당하게 하다니. 네 팬이었다는 게 너무 후회돼!][끼리끼리는 과학이라잖아요. 한열이 이런 쓰레기라면 신하리도 그리 좋은 인간은 아니지 않겠어요? 연결해요.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죠.][언니! 얼른 입도 벙긋 못하게 증거를 뿌려버려요. 저런 인간은 아이돌을 할 자격이 없어요.][경찰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난 영원히 한열을 믿을 거야!][덕질에 도덕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나보네.]...[아기 고구마]는 사람들의 부추김에 신하리와 라이브 방송을 연결했다.신하리의 모습이 라이브 방송 화면에 나타나자 카메라는 신하리의 얼굴을 향해 바짝 다가갔다. 후드 차림에 화장도 하지 않은 신하리가 카메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그쪽 대신 경찰에 신고했어요. 얼른 오세요.”카메라가 홱 회전하며 한주 용하구의 경찰서 대문을 비췄다. 그에 라이브 방송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순간 멍해졌다. ‘신하리, 미친 거야? 어제 저녁에도 한열 대신 해명해주더니.’[아기 고구마]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전, 전 신고한다고 안 했어요.”신하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한열이 그쪽을 성추행했다면서 신고를 안 해요? 성모 마리아세요? 방송으로 울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보다 신고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어요? 경찰은 그쪽을 도와줄 수 있는데도 싫다고요?”네티즌들도 신하리의 말을 따라 댓글을 남겼다. [맞아요
알겠다고 대답한 한현진이 전화를 끊기 전 호기심을 못 이겨 물었다. “오빠, 문채영 씨와는 어떻게 됐어요?”멈칫한 송민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서 그 자식 혹시 네 옆에 있어?”한현진이 움찔하며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가로젓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한현진이 대답했다. “아뇨. 샤워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말을 믿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개의치 않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걔한테 내 말 똑바로 전해. 다음에 또 이렇게 입을 가볍게 놀렸다간 내가 그 입을 꿰매 버릴 거라고.”강한서: ...그 말에 한현진이 어색하게 하하, 웃어버렸다. “사실 강한서는 별말 안 했어요...”송민준은 더는 아무 말 없이 일찍 쉬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송민준의 얼굴이 공개된 후, 한열의 바람 스캔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사람들도 점차 한현진이 한열의 사촌누나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열의 성추문은 여전히 일파만파 퍼져나갔다.한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은 [아기 고구마]였다. 이 계정은 피드를 올릴 때마다 다음 업로드 시간을 예고하며 다음엔 마치 증거를 공개할 것처럼 사람들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에 [아기 고구마] 계정의 팔로워는 점차 늘어갔다. 하지만 예고와는 달리 매번 터무니없는 사실들만 업로드 했고 그 피드의 내용으로는 한열이 여자 연예인을 성추행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정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다.하룻밤 사이, 한열의 팔로우는 십만 명 이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열의 회사 측에서는 변호사가 작성한 소장을 공개하며 이미 경찰에 신고를 마쳤고 루머를 퍼뜨린 사람을 찾아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한열의 회사에서 소장을 공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 고구마]도 페이스북에 점심 열두시부터 라이브 방송으로 빼박 증거를 공개해 한열과 직접 맞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에 네티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