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주가 한성우에게 다가와 물을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앉아서 좀 쉴래?”한성우가 웃으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휴대폰을 들고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네 마음이 불편하면 형수님 찾아가서 말해. 어디가 아픈지, 콕 짚어주면서 말해. 절대 강압적으로 형수님한테 뭔가를 요구하지 말고. 그냥 널 마음 아파하게만 만들라고!”“연애에도 수단이 필요한 법이야. 직진만 하지 말고, 상대방 모르게 뭔가를 하려고 하지도 말고. 꼭 알게 해야 해. 심지어 과장되게 생색도 내면서.”“연애 중에 제삼자가 나타났을 땐, 그 사람을 상대할 게 아니라, 네 애인을 공략해야 한다고! 멍청한 놈이나 상대방을 상대하는 거야. 널 미쳐 날뛰는 쪼잔한 놈으로 만들면, 그 사람은 목적을 달성한 거라고!”강한서가 한성우의 말을 바로잡았다. “제삼자 같은 건 없어. 현진이는 나만 좋아해.”“네네네, 너만 좋아하겠지. 그럼 가서 형수님이랑 통화해, 난 차가 와서. 나중에 얘기해.”차미주가 걸어오자 한성우는 급히 전화를 끊었다. 강한서는 휴대폰을 들고 한성우가 했던 얘기를 떠올리며 생각에 빠졌다. 유현진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침대 시트를 바꾸는 강한서를 마주했다. 그녀는 그의 모습에 의아해졌다. 강한서처럼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자란 도련님은 침대 시트를 바꾸기는커녕, 시트의 앞뒷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머리의 물기를 털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시트 바꾼 지 며칠 되지도 않았잖아. 왜 바꾸는 거야?”강한서는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대답했다. “너 어제 이 시트가 불편하다며?”“난 그냥 조금 까끌까끌하다고 했을 뿐인데?”유현진이 강한서를 도와 시트 모서리를 잡아주며 말했다. “전에 내가 너한테 치약은 아래서 위로 짜고, 갈아입은 옷은 빨래 바구니에 넣으라고 할 때는 잘 까먹더니, 오늘은 침대 시트가 까끌까끌한 걸 알아차리다니. 너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이렇게 부지런한 척하는 거지?”강한서가 말했다. “꿍꿍이가 있긴 하지.”유현진이 멈
강한서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다른 사람 휴대폰을 함부로 보는 건 매너 없는 거 아니야?”유현진이 시선을 위로 향하며 말했다. “함부로 다른 사람 생일을 휴대폰 비밀번호로 설정하는 건 매너 있는 거야?”강한서: ...“이리 와.”유현진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강한서가 도도하게 말했다. “제대로 불러. 강아지 부르듯 부르지 말고.”유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올 거야, 말 거야?”강한서는 우물쭈물하며 입술을 달싹이더니 “다음은 없어.”라며 유현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가 유현진의 앞으로 다가오자, 유현진이 바로 그를 침대로 밀어뜨렸다. 그녀도 뒤따라 침대에 누우며 그의 품에 안겼다.멈칫하던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 아직 샤워 안 했어.”유현진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괜찮아. 너 냄새 난다고 싫어하지 않아.”강한서: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안전 교육 상식을 가르쳤다. “성관계 전엔 깨끗이 씻는 게 제일 좋아. 80%의 여성질환은 깨끗하지 않은 성생활로 인한 거야. 그중 대부분은 성관계 파트너가 생식기관 위생에 신경 쓰지 않아서 감염되는 거라고.”유현진: ...“아는게 많네.”강한서가 겸손한 태도로 얘기했다. “지난번 너랑 병원에 갔을 때, 병원에서 나눠주는 HPV 홍보 글에서 읽었어.”“아~”유현진이 말을 길게 늘어뜨리더니 갑자기 그의 귓가에 바짝 다가갔다. “하지만 난 못 참겠는걸.”강한서는 온몸의 근육이 순식간에 긴장했다가 다시 천천히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의 귀는 눈에 띄게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목젖이 꿀꺽 움직였다. “아니면, 욕실로 가서...”“여기서 해.”유현진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유혹적이었다. “욕실엔 의자가 없잖아. 서 있기 싫어.”방금까지 강한서의 귀는 조금 붉은 정도였다면 지금은 완전히 새빨개졌다. 서 있고 싶지 않아...서 있고...강한서의 머릿속에는 떠오르는 미성년자 관람 불가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의 눈은 더욱
유현진의 말에 굳었던 강한서의 얼굴이 확 피었다. 하지만 그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내가 너 안 믿는다고 한 적 없는데, 왜 이렇게까지 공식적인 해명 글을 썼어?”유현진은 그런 강한서를 맞춰주지 않고 얼른 말했다. “그럼 업로드 안 할게.”그에 강한서는 눈보다 빠르게 손을 움직여 그녀의 휴대폰을 낚아채 피드를 업로드했다. 글을 올리고 고개를 돌리자 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유현진을 마주했다. 그 순간, 그는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유현진이 그에게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 “넌 수영선수보다도 대단해.”강한서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현진이 그에게 설명했다. “넌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뜰 거야. 그러니 안 대단해?”강한서: ......한성우와 차미주는 비행기에서 내려 차에 올라탔다. 그들은 두 시간을 더 달려서야 마을에 도착했다. 이미 저녁 11시였다.농촌 마을은 도시와 달라 그 시간엔 길거리의 많은 가게들이 대부분 문을 닫았다. 가끔 무인 편의점이나 성인용품 가게만 있을 뿐이었고, 거리에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한성우는 땀범벅이 된 차미주를 보고는 참지 못하고 직접 물건을 들었다. 차미주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거의 다 왔어.”“오는 길 내내 네가 들었잖아. 잠깐 쉬어. 거의 다 왔는데, 서두르지 마.”한성우는 말하며 휴지를 꺼내 차미주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었다. 차미주는 그제야 휴지를 받아 들고 짐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엄마가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춤추러 간 게 분명해! 그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 “우린 둘이잖아. 아주머니 혼자서 스쿠터를 타고 오셔도 우리 둘을 다 데리고 가는 건 무리야.”차미주: ...차미주의 엄마가 자신이 스쿠터를 타고 온다는 말을 들으면 화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렸을 적 그녀는 도매하기 위해 삼륜차를 타고 다니다 당시의 라이벌에게 놀림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업을 시작한 뒤 그녀의 엄
비틀거리던 한성우는 거대하고 복슬복슬한 물체에 의해 그대로 쓰러졌다. 곧이어 축축한 혀가 그의 머리를 핥았다. 한성우의 등에는 소름이 쫙 돋았고, 그는 순간 손을 뻗어 반격하려고 했다. “때리지 마, 때리지 마!”차미주가 얼른 다가와 목줄을 잡아당겨 한성우를 덮친 물체를 떼어냈다. 거리가 벌어지자 한성우는 그제야 자신을 덮친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그건 크기가 80cm 정도 되는 코카서스 셰퍼드였는데, 두 발로 일어서면 차미주보다도 컸다. 그의 털은 회색과 흰색에 얼룩무늬가 있었고, 볼륨감이 있으면서 광택이 났다. 근육질의 몸매를 가지고도 차미주에게 끌려온 코카서스 셰퍼드는 오히려 잔뜩 흥분해 그녀의 곁을 빙빙 맴돌았다. 아담한 차미주가 하마터면 놓칠뻔했고, 그녀가 투덜투덜 소리를 질렀다. “복실아, 복실아! 진정해!”전엔 강아지를 무섭다고 느낀 적이 없는 한성우였지만, 이제 보니 무섭고 아니고는 체형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가 이제껏 봤었던 대형견은 기껏해야 골든레트리버 정도였으니 말이다. 코카서스 셰퍼드, 강아지가 사납고 아니고를 떠나, 일단 그 어마어마한 체형만으로도 열에서 아홉은 다리에 힘이 빠질 것이었다. 강아지는 지나치게 활발한 편이었다. 낯선 사람을 보고 잔뜩 흥분해 굳이 한성우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한성우는 두피까지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는 어쩐지 차미주의 힘으로는 저렇게 거대한 강아지를 붙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먼저 나갔다가, 네가 걜 묶으면 다시 들어올게.”차미주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얘 말 잘 들어.”말이 끝나기 무섭게 복실이는 갑자기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 한성우에게 달려들었다.한성우도 더 이상 환자 행세를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차미주가 목줄을 놓친 순간, 그는 바로 도망쳤다. 복실이는 한성우가 그와 놀아주려는 줄 알고 그의 뒤를 쫓아갔다. 차미주네 집 마당은 작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형견에게는 그 공간은 작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한성우: ...복실은 그의 천적임이 틀림없었다![번외]어느 날, 강한서가 일을 하는 동안, 유현진에게서 문자가 왔다. 유현진: 「요즘 HR 진짜 비싸네.」강한서: 「괜찮은 것 같은데.」유현진: 「작년엔 지금보다 쌌어.」강한서가 멈칫했다. 「너 HR 필요해?」유현진: 「요즘 일이 너무 바빠서, 밤도 많이 새고. 좀 진정시킬 필요가 있는 것 같아.」강한서는 요즘 그녀가 밤을 새우며 촬영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의 다크서클은 이미 턱까지 내려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강한서는 마음이 아팠다. 「내가 알아볼게.」유현진이 얼른 답장했다. 「고맙습니다, 여보~」차미주가 옆에서 엄지를 치켜들었다. “너 이런 식으로 돈을 모은 거구나?”유현진은 낯이 두꺼운 편이었다. “표현할 기회를 주는 거야.”차미주는 자신도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현진이 방금 강한서에게 했던 수법을 한성우에게 쓸 생각이었다. 한성우가 빠르게 답장했다. 「지난번 고객이 회사에 보낸 거 있어. 조금 이따 너희 집으로 보내라고 할게.」차미주가 유현진의 말투를 따라 했다.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냐? 다른 사람한테서 받은 걸 나한테 주다니.」한성우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그는 어쩐지 그 말투가 눈에 익은 것 같았다. 전혀 차미주답지 않은 말투였다. 오히려, 강한서네 돈 밝히는 여인네와 비슷한 것 같았다. 한성우는 생각하며 차미주를 달랬다. 「화 풀어. 너 아직 임신 중이라 아무거나 쓰면 안 돼. 아이한테 안 좋아. 아이 낳으면, 우리 본사 가서 대량 구매하자.」차미주는 한성우의 말에 바로 마음을 풀었다. 유현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성우를 믿어? 아이 낳으면, 또 모유 수유 기간이라 안 된다고 할 거야. 몇년 동안 한성우가 너한테 말로만 했던 약속이 얼마야, 그거로는 부족해?”차미주: ...한성우는 태생이 검소(깍쟁이)했다. 결혼 후, 그 성격은 더욱 두드러졌다. 결혼 전 끊었던 각 클럽의 VIP 카드는, 비즈니스를 위해 자주 다니는 두
차미주는 난처해하며 복실이 대신 설명했다. “복실이는 아마 네가 좋은가 봐. 나 쟤가 누굴 보고 저렇게 흥분하는 거 처음 봐.”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복실은 “쫙” 소리를 내며 옷에서 천 조각을 뜯어냈다.한성우: ...차미주의 외할머니는 자애로우신 분이셨다. 안쓰러운 한성우의 모습을 보더니, 얼른 입을 열었다. “미주야, 내 방에 네 아빠가 전에 입던 옷이 있단다. 가서 옷 좀 가져와 먼저 친구가 씻고 갈아입을 수 있게 하렴. 그리고 내일 아침에 같이 가서 옷 두어 벌 사.”차미주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얼른 위층으로 옷을 가지러 올라갔다. 한성우는 몸 곳곳에 가시가 박히고 더러운 상태라 소파에 앉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래서는 그는 얌전히 거실에 서 있었다. 꼴은 좀 볼품없었지만 말은 여전히 예쁘게 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미주가 친구와 함께 온다고 해서, 난 여자애일 줄 알았지, 사내놈일 줄은 몰랐네.”한성우가 멈칫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미주가 할머니한테 절 친구라고 해요?”할머니는 의아해하며 물었다.“아니라는 건가?”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미주가 무슨 사이라고 하면 무슨 사이인 거죠. 미주 말이 다 맞아요.”할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미주 말이 맞아? 말투로 보아하니, 설마 남자친구?’한성우를 보던 할머니의 눈빛이 갑자기 바뀌었다. 그녀는 한성우를 이리저리 관찰했다. ‘허우대는 멀쩡한 것이, 예의도 바른 것 같고. 얼굴은... 너무 더러워서 잘 모르겠지만 강아지한테 쫓겨서 저 지경이 된 걸 보면 어쩐지 조금 모자 보이는 것 같은데.’“이름이?”한성우가 말했다. “한성우예요. 밝을 성에, 뛰어날 우를 써요. 성우라고 불러주시면 돼요.”차미주가 옷을 가지러 간 사이, 아래층에서 한성우는 이미 할머니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할머니는 계속 “성우야”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그 호칭이 얼마나 다정하게 들리는지 몰랐다. 차미주가 내려오자 할머니는 그녀를 불러
개의치 않아 하는 차미주를 보니, 그가 괜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집에 아직도 아빠 옷이 있네.”“이 옷은 엄마가 산 건데 아빠가 왜 가져가?”차미주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처음엔 외삼촌한테 주려고 했는데, 삼촌한텐 작고 버리기엔 아까워서 뒀어. 택도 안 뗀 옷들도 많아. 거의 골동품이라니까.”“넌 아빠랑 사이가 안 좋아?”그녀의 집안에 어우러지려면, 자세히 알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실수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쁘다고 할 수도 없어. 어쨌든 아빠랑 지낸 시간이 길지는 않으니까. 아빠는 여기 사람이 아니거든. 엄마는 아빠가 살던 곳으로 시집을 갔다가, 그곳에서 6, 7년을 살았어. 나중에 날 데리고 외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고. 그리고 2년 후 이혼했지.”“내가 어릴 땐, 아빠는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었어. 일 년 동안 며칠 만날까 말까였지. 졸업하고는 학교에 남았는데, 엄마는 아빠를 따라 도시에 있길 원하지 않았거든. 그 일로 두 분이 갈등이 생겼고, 분가하다가 이혼. 사실 아빠는 나한테 꽤 잘해줘. 하지만 엄마와의 사이는 여전히 살얼음판이지. 아빠도 일찍 재혼하셨고, 그쪽에서 남동생도 낳으셨어. 하지만 새 아내가 우리랑 연락하는 걸 예민하게 받아들이거든. 그래서 나도 웬만하면 먼저 연락 안 해.”한성우는 차미주의 말에서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그건 바로 장모님이 장인어른을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론은 그것이었다. 조심히 만날 것.차미주는 욕실 문을 열었다. 그녀는 수건을 포함한 물건들을 한성우에게 밀어주었다. “얼른 씻어. 더러워진 옷은 밖에 두는 거 잊지 말고.”한성우가 말했다. “등이 아픈 것 같아.”“그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안 아플 리가 있어? 강아지가 쫓아가는데 도망가다니, 너 바보야?”“나도 도망가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 큰 애가 혓바닥을 내밀고 침을 뚝뚝 흘리면서 뒤에서 쫓아오는데, 나도 모르게 그런 거라고.”차미주가 살풋 웃었다. “겁에 잔뜩 질려서는, 그러고
그 편지는 여자아이의 부모가 직접 쓴 손 편지였다. 천자가 넘는 장편의 글이었는데, 진심을 담아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한편, 그들의 딸이 당시 백화점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한 것도 있었다. 아이는 자신과 유현진이 거의 비슷한 시간에 가게로 들어섰고 당시 유현진이 두 명의 미성년자와 다투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두 명의 미성년자 중 한 사람이 유현진의 마스크를 잡아당겼고, 휴대폰을 유현진의 얼굴에 들이밀었기 때문에 유현진이 휴대폰을 밀어냈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가 넘어진 것도 유현진이 민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한 여자가 유현진과 다투면서 유현진을 밀었고, 유현진은 뒤로 밀려나면서 실수로 부딪힌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는 자신도 그저 구경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했다. 처음 현실에서 배우를 만나는 거라 궁금하기도 했고, 심지어 유현진은 요즘 송민영을 밀친 사건으로 핫한 인물이었으니 친구들과 얘기를 하려고 영상을 촬영한 것이라고 했다. 더 잘 나오도록 촬영하기 위해 아이는 굉장히 가까이 서 있었다. 비록 당시 현장 분위기는 굉장히 과열되었지만, 대부분은 시비를 건 두 사람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고, 끊임없이 유현진을 질책했다. 유현진은 말이 적었고 폭력을 휘두른 적도 없었다. 심지어 컵이 날아왔을 때, 여자아이를 밀어버렸다. 아이의 부모는 감사 편지의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저와 제 남편도 미디어 관련 업계에 종사하고 있어요. 전에 인터넷에 떠돌던 부정적인 뉴스 때문에 유현진 씨에 대해 그다지 호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아무래도 당시 동영상이 너무 분명하게 찍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유현진 씨는 계속 그 일에 대해 사과하거나 대응하지 않았죠.아이가 저한테 유현진 씨가 아이를 위해 날아온 컵을 막아줬다고 했을 때, 전 정말 의외였고 충격이었어요.제 딸이 묘사한 유현진 씨는, 요즘 기사에 알려진 인성이 바닥을 친 연예인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거든요.유현진 씨는 자신이 사람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자랑하며 여기저기 떠벌리지도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