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주는 난처해하며 복실이 대신 설명했다. “복실이는 아마 네가 좋은가 봐. 나 쟤가 누굴 보고 저렇게 흥분하는 거 처음 봐.”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복실은 “쫙” 소리를 내며 옷에서 천 조각을 뜯어냈다.한성우: ...차미주의 외할머니는 자애로우신 분이셨다. 안쓰러운 한성우의 모습을 보더니, 얼른 입을 열었다. “미주야, 내 방에 네 아빠가 전에 입던 옷이 있단다. 가서 옷 좀 가져와 먼저 친구가 씻고 갈아입을 수 있게 하렴. 그리고 내일 아침에 같이 가서 옷 두어 벌 사.”차미주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얼른 위층으로 옷을 가지러 올라갔다. 한성우는 몸 곳곳에 가시가 박히고 더러운 상태라 소파에 앉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래서는 그는 얌전히 거실에 서 있었다. 꼴은 좀 볼품없었지만 말은 여전히 예쁘게 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미주가 친구와 함께 온다고 해서, 난 여자애일 줄 알았지, 사내놈일 줄은 몰랐네.”한성우가 멈칫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미주가 할머니한테 절 친구라고 해요?”할머니는 의아해하며 물었다.“아니라는 건가?”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미주가 무슨 사이라고 하면 무슨 사이인 거죠. 미주 말이 다 맞아요.”할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미주 말이 맞아? 말투로 보아하니, 설마 남자친구?’한성우를 보던 할머니의 눈빛이 갑자기 바뀌었다. 그녀는 한성우를 이리저리 관찰했다. ‘허우대는 멀쩡한 것이, 예의도 바른 것 같고. 얼굴은... 너무 더러워서 잘 모르겠지만 강아지한테 쫓겨서 저 지경이 된 걸 보면 어쩐지 조금 모자 보이는 것 같은데.’“이름이?”한성우가 말했다. “한성우예요. 밝을 성에, 뛰어날 우를 써요. 성우라고 불러주시면 돼요.”차미주가 옷을 가지러 간 사이, 아래층에서 한성우는 이미 할머니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할머니는 계속 “성우야”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그 호칭이 얼마나 다정하게 들리는지 몰랐다. 차미주가 내려오자 할머니는 그녀를 불러
개의치 않아 하는 차미주를 보니, 그가 괜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집에 아직도 아빠 옷이 있네.”“이 옷은 엄마가 산 건데 아빠가 왜 가져가?”차미주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처음엔 외삼촌한테 주려고 했는데, 삼촌한텐 작고 버리기엔 아까워서 뒀어. 택도 안 뗀 옷들도 많아. 거의 골동품이라니까.”“넌 아빠랑 사이가 안 좋아?”그녀의 집안에 어우러지려면, 자세히 알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실수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쁘다고 할 수도 없어. 어쨌든 아빠랑 지낸 시간이 길지는 않으니까. 아빠는 여기 사람이 아니거든. 엄마는 아빠가 살던 곳으로 시집을 갔다가, 그곳에서 6, 7년을 살았어. 나중에 날 데리고 외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고. 그리고 2년 후 이혼했지.”“내가 어릴 땐, 아빠는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었어. 일 년 동안 며칠 만날까 말까였지. 졸업하고는 학교에 남았는데, 엄마는 아빠를 따라 도시에 있길 원하지 않았거든. 그 일로 두 분이 갈등이 생겼고, 분가하다가 이혼. 사실 아빠는 나한테 꽤 잘해줘. 하지만 엄마와의 사이는 여전히 살얼음판이지. 아빠도 일찍 재혼하셨고, 그쪽에서 남동생도 낳으셨어. 하지만 새 아내가 우리랑 연락하는 걸 예민하게 받아들이거든. 그래서 나도 웬만하면 먼저 연락 안 해.”한성우는 차미주의 말에서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그건 바로 장모님이 장인어른을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론은 그것이었다. 조심히 만날 것.차미주는 욕실 문을 열었다. 그녀는 수건을 포함한 물건들을 한성우에게 밀어주었다. “얼른 씻어. 더러워진 옷은 밖에 두는 거 잊지 말고.”한성우가 말했다. “등이 아픈 것 같아.”“그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안 아플 리가 있어? 강아지가 쫓아가는데 도망가다니, 너 바보야?”“나도 도망가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 큰 애가 혓바닥을 내밀고 침을 뚝뚝 흘리면서 뒤에서 쫓아오는데, 나도 모르게 그런 거라고.”차미주가 살풋 웃었다. “겁에 잔뜩 질려서는, 그러고
그 편지는 여자아이의 부모가 직접 쓴 손 편지였다. 천자가 넘는 장편의 글이었는데, 진심을 담아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한편, 그들의 딸이 당시 백화점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한 것도 있었다. 아이는 자신과 유현진이 거의 비슷한 시간에 가게로 들어섰고 당시 유현진이 두 명의 미성년자와 다투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두 명의 미성년자 중 한 사람이 유현진의 마스크를 잡아당겼고, 휴대폰을 유현진의 얼굴에 들이밀었기 때문에 유현진이 휴대폰을 밀어냈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가 넘어진 것도 유현진이 민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한 여자가 유현진과 다투면서 유현진을 밀었고, 유현진은 뒤로 밀려나면서 실수로 부딪힌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는 자신도 그저 구경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했다. 처음 현실에서 배우를 만나는 거라 궁금하기도 했고, 심지어 유현진은 요즘 송민영을 밀친 사건으로 핫한 인물이었으니 친구들과 얘기를 하려고 영상을 촬영한 것이라고 했다. 더 잘 나오도록 촬영하기 위해 아이는 굉장히 가까이 서 있었다. 비록 당시 현장 분위기는 굉장히 과열되었지만, 대부분은 시비를 건 두 사람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고, 끊임없이 유현진을 질책했다. 유현진은 말이 적었고 폭력을 휘두른 적도 없었다. 심지어 컵이 날아왔을 때, 여자아이를 밀어버렸다. 아이의 부모는 감사 편지의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저와 제 남편도 미디어 관련 업계에 종사하고 있어요. 전에 인터넷에 떠돌던 부정적인 뉴스 때문에 유현진 씨에 대해 그다지 호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아무래도 당시 동영상이 너무 분명하게 찍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유현진 씨는 계속 그 일에 대해 사과하거나 대응하지 않았죠.아이가 저한테 유현진 씨가 아이를 위해 날아온 컵을 막아줬다고 했을 때, 전 정말 의외였고 충격이었어요.제 딸이 묘사한 유현진 씨는, 요즘 기사에 알려진 인성이 바닥을 친 연예인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거든요.유현진 씨는 자신이 사람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자랑하며 여기저기 떠벌리지도
「인터넷에 떠도는 영상은 각도에 문제가 있어요. 유현진 씨는 애초에 전혀 힘을 쓰지 않았어요. 제가 유현진 씨 등 뒤에서 똑똑히 봤어요. 하지만 다른 한 분이 너무 인기가 많은 분이라, 저도 계속 유현진 씨를 위해 해명할 수가 없었어요. 요 며칠 유현진 씨에게 악플이 달리는 것을 보면서 마음에 내키질 않았어요. 제가 진작 나서서 해명해야 했어요.」「저는 당시 송민영 씨의 보호 장비를 책임졌던 스태프 중의 한 명입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송민영 씨가 저에게 무릎 보호대를 하나 더 추가해달라고 했어요. 일반 보호 장비로도 이미 충분히 그날 액션신 촬영이 가능했거든요. 전혀 하나를 더 추가할 필요가 없었어요. 송민영 씨는 아마 그날 자신이 다칠 것을 예상하고 있는 것 같았아요.」...이런 발언이 하나둘 많아지면서, 인터넷의 여론은 완전히 역전되기 시작했다. 송인명은 병원에서 그 실검들을 보며, 분노가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번호는 없는 번호가 되어 있었다. 그는 본인이 송민영에게 연락하겠다며, 그녀가 먼저 자신에게 연락하는 것은 싫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전화가 통하지 않자 화가 치민 송민영은 임효우에게 한바탕 화풀이를 해댔다. 그러더니 임효우에게 실검을 내려버리라고 소리 질렀다. 화를 꾹 누르고 있던 임효우는, 결국엔 굳을 얼굴로 송민영이 시키는 일을 하러 나섰다. 하지만 그쪽의 피드백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실검을 내려주기를 거부했다. 지금의 SNS는 정말이지 얼굴이 두껍다고 할 수 있었다. 돈만 쥐여주면 어떤 더러운 기사든 전부 내려주었다. 하지만 이번엔, 의외로 돈도 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이 이런 태도로 나온다는 것은 한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이미 다른 사람의 돈을 받은 것이다. 임효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언니, 실검 못 내려요. 아니면 저희도 지금 페이스북 업로드해서 그날 일에 대해 해명하는 게 어때요. 오해라고 하면, 아직은 늦지 않았을 거예요.”송민영
그다음엔, 이소원이 자살 전 썼던 유서가 공개되었다. 유서에는 자신과 송민영이 식사했던 그날 밤의 정황이 자세히 적혀있었다. 이소원도 처음엔 송민영을 의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제일 친구로 생각했다. 성폭행을 당한 후 극도의 공포감에 제일 먼저 송민영을 찾아가 대책을 논의했다. 그녀는 신고를 생각했지만 송민영이 그런 그녀를 막았다. 송민영은 계약을 앞두고 있다는 핑계로 이소원이 신고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만약 일이 커지면, 비록 이소원이 피해자라고 하더라도 제작사 측에서는 무조건 캐스팅에 대해 다시 고민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신고를 하더라도 계약을 체결할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고 했다. 그 당시 이소원은 완전히 혼자였다. 그러니 송민영이라는 절친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려 잠에서 깨어나며 그날 일에 고통스럽게 시달릴 때, 그녀의 사진들이 인터넷에 퍼지기 시작했다. 문란하다, 더럽다. 온갖 듣기 싫은 단어들이 칼날처럼 그녀를 찔렀다. 이소원은 놀라고 두려운 마음에 황급히 송민영에게 연락했지만 도저히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일은 미친 듯이 커져갔고 전에 함께 했던 제작진도 하나둘 이소원을 언팔로우했다. 아직 미방이었던 드라마와 소속사는 심지어 위약금을 청구했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에 그녀가 오디션을 봤던 캐릭터에 송민영이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공식 계정에 올라왔다. 이소원은 경악으로 물든 얼굴로 기사를 확인했다. 그녀는 마침내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인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 당시 바로 신고를 선택했다. 경찰은 이소원을 성폭행했던 사람을 서로 데려와 조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두 사람은 원나잇이라고 잡아뗐다. 시간도 이미 너무 지나, 성폭행당했다는 흔적은 이미 찾을 수가 없었다. 호텔 직원도 두 사람이 체크인할 때, 이소원은 의식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성폭행 당했다는 증거가 없었고, 결국 입건되지 않았다. 그 성폭행범은 심지어 인터넷에 루머를 퍼뜨려 그날 밤의
법을 어기지 않고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문제라면, 사람들은 모두 모른 척 눈감아 줬다. 팬클럽 회장이 탈덕을 했다는 것은 당연히 큰 이슈가 있다는 뜻이었다. 송민영의 팬카페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녀에 관한 화제가 실검에 십여 개가 올라갔다. 그녀가 데뷔한 뒤, 아마 오늘이 제일 핫한 하루일지도 몰랐다. 유현진은 사과를 먹으며 페이스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옆에 앉아 메일에 답장하고 있는 강한서에게 물었다. “이 유서, 가짜지.”유서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만약 유서가 있었다면, 그 당시 공개하는 것이 제일 좋은 타이밍이었다. 왜 이제야 공개됐을까. 강한서가 말했다. “가짜면 또 어떤데?”유현진이 다가와 말했다. “증거를 위조하는 건, 불법이야.”강한서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유서’는 진작 불태웠어. 이건 기껏해야 루머 정도야. 다만 경찰 측에서는 지금 그런 작은 일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야. 성폭행 사건을 재조사해야 하는 것만으로 이미 일은 충분히 많을 테니까.”유현진이 말했다. “ 정직하고 법을 지키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이건 내가 두 번째로 이런 불법을 저지르는 거야.”유현진이 그의 말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럼 네가 처음으로 불법을 저지른 건 무슨 일 때문이야?”그녀는 그 일을 기억했다가 강한서가 그녀를 괴롭히면 신고를 해버릴 생각이었다. 강한서는 유현진을 따라 그녀의 귀 가까이에 다가갔다. “속도위반.”유현진: !!!“넌 겁도 없어. 속도위반으로 잡혀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강한서가 생각하며 말했다.“그렇게 심각하진 않을 텐데.”유현진이 그를 째려보았다. “너 면허를 어떻게 딴 거야? 요즘 뉴스도 안 봐?”강한서가 웃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내 말은 혼인신고도 안 하고 성관계를 가지는 걸 말한 거야. 이런 건 경찰에서도 그저 대충 몇 마디만 하고 끝내겠지.”유현진: ...‘속도위반이라는 게, 그걸 얘기하는 거였어!’“우린 언제 그걸 합법화할
유현진은 요즘 머릿속에 19금 화면으로 가득 찬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한서. 시크한 모습 유지해. 멘트가 느끼한 남자는 아무리 잘생겨도 못생겨 보이는 거 알아?”강한서: ...그가 불퉁하게 말했다. “한성우는 늘 이렇게 얘기하잖아.”“그게 바로 성우 씨 그런 캐릭터가 드라마에서는 본부장 역할밖에 할 수 없고, 넌 멋있는 대표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야.”유현진이 한껏 여유 있는 모습으로 말했다. “너 계속 그렇게 느끼해지면, 본부장 역할도 할 수 없어. 기껏해야 부장님이겠지.”강한서: ...‘그러니까 지금, 난 아직도 얼굴 때문에 현진이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거야?’강한서는 순간 우울해졌다. 대화를 나누던 중 유현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가 발신 번호를 확인하자, 유상수였다. 그녀는 강한서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현진아, 너 괜찮지.”유현진이 강한서와 눈을 맞췄다. 그녀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유 대표님께서 어쩐 일이세요.”유상수는 걱정 어린 말투로 말했다. “너한테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얘기를 안 했어.”유현진이 귀찮다는 듯 얘기했다. “대표님이 묻지 않으셨잖아요.”“난 어제야 기사를 봤어. 바로 너한테 전화를 하고 싶었는데, 네가 전화를 받을 기분이 아닐 것 같아서 미뤘지. 그때 네가 연기를 배운다고 했을 때부터 난 반대했었잖니. 연예계는 전부 오합지졸이라고. 네 엄마도 그 일로 나와 싸웠었고. 지금 보렴, 결국 너만 피해를 봤잖니.”유현진은 뒷북을 치는 유상수의 말에 속이 메슥거렸다. 유상수는 전형적인, 자식을 억압하는 자기중심적인 부모였다. 자식이 이쪽으로 가고 싶어 하면, 그는 굳이 자식에서 저쪽으로 가라고 강요했다. 만약 자식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걸 선택하면, 그는 끊임없이 옆에서 찬물을 끼얹었다. 자식이 본인이 원하던 분야에도 최고가 된다고 해도 그는 절대 단 한마디의
“지난번 내가 한 얘기는, 생각해 봤어?”유현진이 모른 척 물었다. “무슨 얘기요?”유상수: ...“내가 널 양딸로 입양하겠다는 얘기 말이야. 네가 빽이 없으니까 그것들이 감히 널 괴롭히는 거야. 전에 유씨 가문에선, 네가 언제 그런 수모를 당해봤겠어?“‘말이나 못 하면!’예전에 그녀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던 건 그들이 강한서와 강씨 가문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녀가 당했던 수모야말로, 전부 유씨 가문에 의한 것이었다. 유상수는 이젠 아예 유현진에게 잘 보이려고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녀에게 뭐 대단한 것이라도 줄 수 있을 듯 굴었다. 유현진을 욕하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며 강한서를 쿡 찔렀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겠냐는 의미였다. 강한서는 입 모양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러겠다고 해.유현진은 강한서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더니 말했다. “곧 아줌마랑 결혼하시잖아요. 그 일은 나중에 얘기하시죠. 아무래도 혼자서 결정하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유상수는 유현진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아지자 바로 말을 이었다. “당연히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어. 넌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네가 동의하기만 하면, 내가 바로 공식적으로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공개할 거란다.”유현진이 말했다. “혼자 결정하셨다가 아줌마가 오지 않으시면, 분위기가 이상해질까 봐 그러죠.”백혜주를 설득하는 건,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하던 유상수가 말했다. “그럼 결혼식 당일 공개하면 되겠구나. 겹경사잖니.”유현진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저야 괜찮죠. 하지만... 아줌마가 기분 나빠하시지 않을까요?”“넌 오기만 하면 돼. 우리 집에선 내 말이 법이야.”유현진이 천천히 대답했다. “알겠어요.”전화를 끊기 전, 유상수는 다시 당부했다. “잊지 말고 한서도 데리고 와. 사람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이거야말로 그의 진짜 목적인 듯했다. 유현진이 말했다. “시간이 될지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