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내가 한 얘기는, 생각해 봤어?”유현진이 모른 척 물었다. “무슨 얘기요?”유상수: ...“내가 널 양딸로 입양하겠다는 얘기 말이야. 네가 빽이 없으니까 그것들이 감히 널 괴롭히는 거야. 전에 유씨 가문에선, 네가 언제 그런 수모를 당해봤겠어?“‘말이나 못 하면!’예전에 그녀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던 건 그들이 강한서와 강씨 가문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녀가 당했던 수모야말로, 전부 유씨 가문에 의한 것이었다. 유상수는 이젠 아예 유현진에게 잘 보이려고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녀에게 뭐 대단한 것이라도 줄 수 있을 듯 굴었다. 유현진을 욕하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며 강한서를 쿡 찔렀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겠냐는 의미였다. 강한서는 입 모양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러겠다고 해.유현진은 강한서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더니 말했다. “곧 아줌마랑 결혼하시잖아요. 그 일은 나중에 얘기하시죠. 아무래도 혼자서 결정하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유상수는 유현진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아지자 바로 말을 이었다. “당연히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어. 넌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네가 동의하기만 하면, 내가 바로 공식적으로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공개할 거란다.”유현진이 말했다. “혼자 결정하셨다가 아줌마가 오지 않으시면, 분위기가 이상해질까 봐 그러죠.”백혜주를 설득하는 건,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하던 유상수가 말했다. “그럼 결혼식 당일 공개하면 되겠구나. 겹경사잖니.”유현진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저야 괜찮죠. 하지만... 아줌마가 기분 나빠하시지 않을까요?”“넌 오기만 하면 돼. 우리 집에선 내 말이 법이야.”유현진이 천천히 대답했다. “알겠어요.”전화를 끊기 전, 유상수는 다시 당부했다. “잊지 말고 한서도 데리고 와. 사람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이거야말로 그의 진짜 목적인 듯했다. 유현진이 말했다. “시간이 될지
그녀가 한낱 엑스트라였을 때 그녀도 자신이 어느 날 갑자기 뜨는 상상을 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건 그저 상상일 뿐이었다. 바쁜 스케줄이 그녀의 대부분 시간을 차지했고 그녀는 그런 아름다운 꿈을 꿀 여유조차 없었다. 매일 잠들기 전, 그녀는 내일 제작진이 몇 끼나 해결해 줄 수 있는지, 그녀가 사비로 식비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이번 달은 그래도 며칠은 더 살 수 있겠네, 얼마를 더 받을 수 있을까, 집엔 얼마를 보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기 바빴다.만약 강한서가 누군가를 통해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녀의 생활을 아마 계속 그렇게 평범하고 바빴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나타났고 한 장의 계약서로 그녀를 화려한 세상으로 끌어들였다. 그녀는 자신이 일약 스타가 되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꿈에서조차 상상한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 쉬워졌다. 돈이든, 유명세든 말이다. 채혈을 한 번 하기만 하면, 강한서는 그녀에게 드라마나 모델 계약서를 주었다. 그녀는 거의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다른 사람은 이루지 못해 안달인 것을 손에 쥐었다. 그녀는 점차 연예계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인맥도 늘었으며 그녀의 위치도 점점 더 높아졌다. 예전 그녀는 하루에 5만 원이었고, 언제면 하루에 20만 원을 벌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녀가 드라마 하나에 10억의 출연료를 받게 되었을 때, 그녀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사람이란 것이 원래 그랬다. 하나를 가지면 두 개를 갖고 싶고, 두 개를 가지면 세 개를 욕심냈다. 그렇게 천 개, 만 개를 원했다…강한서가 송민영을 띄워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위에는, 내려오는 계단이 없었다. 한 발만 잘못 내딛어도 곧 지옥으로 떨어졌다. 만약 강한서가 그녀의 일을 전부 끊지 않았다면, 만약 브랜드 뉴 엔터에서 그녀의 앞길을 막지 않았다면, 그녀가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강한서는 송민영이 하는 미친 소리를 들으며 갑자기 비웃음을 흘렸다. “우리 거래는 애초부터 명확했어. 네가 원
그렇게 된다면 그녀가 한 짓들이 전부 까발려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상상만 해도 송민영은 두려움에 몸이 떨려오는 것 같았다.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강한서에게 통하지 않자 바로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유현진은 아직 그 여자아이의 존재를 모르는 거지?”강한서는 느긋하게 고개를 들더니 휴대폰을 꽉 움켜쥐고 태연하게 말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수많은 얼음 조각이 된 것 같은 그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느껴졌고 송민영은 저도 모르게 오한을 느끼게 되었다.그녀는 여전히 겁도 없이 말했다.“은서라는 아이 말이야. 유현진은 아직 그 여자아이 존재를 모르고 있는 거지? 몰래 그렇게 큰 딸을 뒀다는 거 유현진이 알기라도 하면 정말로 끝까지 너를 선택하고, 평생을 함께할 것 같아?”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숨소리마저 느껴지지 않아 너무나도 무서웠다. 하지만 송민영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네가 날 도와주지 않는다면, 은서의 존재를 내가 알릴 거야. 너 죽고, 나 죽고 한번 끝까지 갈 거야!”“너 죽고, 나 죽고...”강한서는 그녀가 한 말을 곱씹으며 음험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가당키나 해?!”송민영은 두려운 듯 살짝 움찔거리더니 이내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네가 날 도와주기만 한다면, 나도...”“지성거리 83번지.”강한서는 뜬금없이 주소를 읊었다. 그러나 송민영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송민영,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정말로 널 어쩌지 못할 거라 생각해?”강한서는 마치 저승에서 보낸 사자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은서의 존재를 알린다고 해도 난 상관없어. 하지만 그것의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될 거야.”송민영은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하! 어차피 넌 법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해!”강한서는 베란다 난간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시도해 보든가.”“강한서, 내 충전기 어디에다 뒀어?”이때, 유현진의 목소리가
강한서는 거실에 서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유현진이 거실로 내려오는 모습에 그는 전화를 끊고 그녀를 보며 물었다.“찾았어?”“응.”유현진은 대답하긴 했지만, 마음은 이미 딴 곳에 있는 것 같았다.“왜 그래?”그런 그녀의 모습에 강한서가 물었다.유현진은 그를 보며 말했다.“서랍에 유전자 검사, 그거 정말이야?”강한서는 멈칫하였다.“봤어?”유현진은 그를 째려보았다.“보라고 일부러 충전기를 그 안에 넣어둔 거 아니야?”보통 사람이라면 충전기를 쓰고 굳이 깊숙한 서랍 안에 넣어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강한서는 웃더니 대답했다.“그냥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그랬어.”그는 송씨 집안 사람들의 방법을 찬성하지 않았다.일말의 소식도 유현진에게 흘리지 않고 바로 찾아가는 건,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유현진은 한동안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만약 송민영의 일로 유현진이 스트레스를 받아 힘들어할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일찍 이렇게 했을 것이다.그는 원래 유현진이 그 자료를 발견하고 며칠 동안이나 혼자 끙끙 고민하다 그에게 물어볼 줄 알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녀는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유현진도 아주 많이 심란했다.강한서는 혹여라도 그녀가 자료를 이해하지 못할까 봐 아주 상세하게 만들어 넣어두었다. 그래서인지 그 자료에는 송민준뿐만 아니라 송민준의 친모 한아람의 자료도 있었고 그녀와 송병천, 그리고 송민준의 친자확인 검사서도 있었다.그녀와 송민준은 어릴 때만 닮아 있었지만, 한아람과는 지금도 똑 닮아 있었다. 눈썹뿐만 아니라 얼굴 곳곳이 다 닮아 있었다. 그녀와 유일하게 다른 점은 얼굴선이었다. 한아람의 얼굴선과 이목구비는 유현진보다 더 뚜렷했고 기품이 있었으며 더 온화해 보였다.어릴 때도 그녀는 다소 의문이었다. 그녀는 하현주뿐만 아니라 유상수와도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학교 학부모 면담 때거나 친구를 집으로 데려와도 전부 똑같은 말을 했었다. ‘너는
강한서도 그녀가 말한 엄마가 하현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현주가 이 일을 알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여하간에 하현주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많은 유현진의 검진 결과가 있는 것을 보아 아마도 유현진이 자신의 딸이 아닐 거라고 예상하였을 것이다. 유현진의 혈액형은 그들 부부 사이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었으니까.강한서는 뜸을 들이다 말했다.“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민준이가 지금 알아보고 있어. 하지만 너에 대한 사랑은 거짓이 아닐 거야.”유현진은 또 한 번 침묵했다.너무나도 긴 침묵에 걱정되었던 강한서는 바로 입을 열고 위로하려 했다. 하지만 유현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방금 자료에서 본 건데, 그분이 돌아가신 날짜와 내 생일이 같더라. 혹시 나 낳고 바로 돌아가신 거야?”“응.”강한서는 대답했다.그러자 유현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나 때문에...”“너 때문이 아니야.”강한서는 바로 말허리를 잘랐다.“그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네가 세상에 나오길 바랐어. 하지만 언제나 뜻밖이 있기 마련이지. 이건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네가 이 세상에 건강하게 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아주 큰 기쁨이야.”유현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나 머리가 조금 복잡해.”“괜찮아.”강한서는 그녀를 끌어안고 귓가에 뽀뽀했다.“네 마음이 정리되기 전까지 그 사람들을 안 만나도 돼.”“응.”유현진은 한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민준 오빠랑 나, 어릴 때 정말 많이 닮았네.”강한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 아주 많이.”“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거야?”“응.”강한서는 대답했다. 그는 심지어 그때 송민준과 한아람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여동생일까, 아니면 남동생일까 하며 맞춰보기도 했었다.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로 신기한 인연이었다.유현진은 민경하가 그간 묻지 못했던 것도 물었다.“그럼 나랑 결혼한 거, 설마 내가 민준 오빠랑 닮아서 그런 거야? 죽마고우이니까 포기가 안 되
“송여우가 잡혔어!”차미주는 너무 기쁜 나머지 나무 위에 있다는 것조차 까먹고 벌떡 일어났다.“난 송여우 인성만 문제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악랄한 짓까지 했을 줄이야! 역시 안 좋은 소문 돌던 연예인들은 뒤끝이 항상 이렇게 법으로 끝난다니까!”그런 그녀의 모습에 한성우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야, 너 얌전히 앉아 있어! 나뭇가지가 네 생각처럼 그리 단단하지 않아. 네 몸무게를 못 버티고 끊어질 거란 말이야!”그러나 차미주는 그가 말 한 글자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이미 송민영이 드디어 경찰에 잡혔다는 소식으로 가득했고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그 여자가 연예계에서 얼마나 갑질을 해 댔는데, 드디어 대가를 치르게 되었네! 이런 상황이면 징역형 몇 년이나 받을 수 있을까? 너무 솜방망이 처벌받아도 안 될 것 같은데.”차미주는 작은 입을 열심히 놀리고 있었다.“동료를 성폭행할 생각까지 하다니, 분명 세금도 떼먹고 있을 거야. 그 여자 방이진과도 사이가 좋았으니 어쩌면 같이 약도 했을지도 모르겠네! 안 되겠어, 나도 얼른 신고해 줘야지.”그녀는 이내 다시 나무에 앉더니 휴대폰을 고쳐 들었다.“탈세 신고하려면 어디에다 전화해야 하는 거지?”“126.”한성우는 불안불안한 마음으로 그녀를 보며 재촉했다.“너 일단 내려와서 전화해. 위에서 그러는 건 위험해.”“알았어, 알았어.”차미주는 대답을 하면서 바로 번호를 꾹꾹 눌렀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발밑에서 ‘빠직' 소리가 났다. 나뭇가지가 끊어진 것이다. 곧이어 차미주의 짧은 비명이 들리더니 그대로 나무에서 떨어지게 되었다.한성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바로 손에 든 사과를 던지고 그녀를 받으러 다가갔다.그러나 옷깃조차 스치지도 못한 채 차미주는 잔디밭에 떨어지게 되었다.한성우는 그녀를 잡지 못한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재빨리 차미주 곁으로 달려갔다.“괜찮아?”차미주는 엉덩이를 문지르면서 말했다.“아니 왜 사과를 땅에다 버려. 아프잖아.”나무는
“최소한 이 줄은 마저 다 따야 갈 수 있을걸.”차미주는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는 그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흥, 그러길래 누가 따라오라고 했어? 집에서 편히 쉬고 있으면 될 것을, 네가 굳이 따라와서 무료 노동을 해주겠다고 한 거잖아. 심지어 나까지 힘들게 만들어 놓고 말이야!”“...”한성우는 원래 아주머니 앞에서 잘 보이려고 했다.아침부터 일어나자마자 차미주는 그를 데리고 시장으로 가서 편한 옷을 몇 벌 사려고 했다.그러나 두 사람이 외출하기 직전에 마침 외출 준비하고 있는 차미주의 엄마 김경선을 마주치게 되었다.그는 아무 생각 없이 김경선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고, 김경선은 사과 농장으로 가서 사과 따러 가야 한다고 했다. 그녀의 말에 한성우는 바로 김경선에게 잘 보일 기회라고 생각해 스스로 먼저 도와주겠다고 말했다.그는 미래의 장모님에게서 점수를 따둘 생각에 차미주가 그에게 보낸 눈빛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렇게 과수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사과 따는 것이 그리 간단한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아무리 한 나무에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다고 해도 사과의 색깔과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심지어 어떤 사과나무는 다른 품종과 다른 품종과 접목한 것이었기에 따면서 분류해 줘야 했다.두 사람은 아침부터 지금까지 총 7그루의 사과를 땄고 부단히 허리를 굽히면서 나무에 오르기도 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열심히 사과를 땄지만, 여전히 한 줄이나 남아있었다.차미주의 말에 한성우는 저도 모르게 변명했다.“난 아주머니께서 힘드실까 봐 우리라도 도와드리자고 말한 거야. 아주머니께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일하시면 좋잖아.”“우리 엄마를 걱정해서라고? 너무 기뻐서 웃음밖에 안 나오네. 우리 둘의 무료 노동 덕에 엄마는 하루 알바비를 아끼게 된다고!”“...”그가 입을 열고 반박하려던 순간, 등 뒤로 온화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둘이서 뭐 해요?”차미주는 깜짝 놀라더니 바로 몸을 일으켰다.“엄마.”김경선은 자외선을 피하고자 전신 무장한 상태
차미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할머니께서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다니신 거야.'한성우는 오히려 빨리 입을 열었다.“아저씨, 아주머니들 안녕하세요.”“그래그래. 도시에서 온 놈이라고 하던데, 인사성은 싹싹 바르고 좋네.”“아이고 참으로 잘생겼네. 키도 훤칠하니, 183인가?”한성우는 미소를 지으며 바로잡았다.“185.6이에요.”“아이고, 그렇게나 커? 사내 총각 이름은 뭔가?”“그냥 성우라고 불러주시면 돼요.”넉살이 좋았던 한성우는 바로 아주머니들과 섞여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런 그의 모습에 차미주는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한성우는 인싸 중의 핵인싸였고 어디서든 잘 어울려 지냈기 때문이다.그녀는 물을 많이 마셨던 탓에 화장실에 가게 되었고 이곳엔 한성우만 덩그러니 남아 과일 상자를 옮기고 있었다.아주머니들은 한성우가 참 잘생겼다며 이내 끌고 와 사과를 분리하는 일에 끼워주었고 덕택에 일도 한결 편해졌다.한성우는 그들에게 과일을 분리하는 법을 배우면서 수다를 떨었다.“아주머니, 여긴 과일 분리하는 기계가 없는 거예요? 전부 수작업으로 직접 분리하시는 거예요?”“있지, 근데 그 기계는 크기만 분리할 수 있더라고. 이런 생채기가 난 것들은 분리가 안 돼. 그래서 직접 사람이 해야 해. 그래야 하나하나 포장 잘해서 상자에 넣을 수 있거든.”“그럼 생채기가 난 사과는 어떻게 처리하는 거예요?”“사과술이나 식초 만드는 곳에 보내지. 아니면 통조림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든가.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공장 하나씩은 소유하고 있어. 만들고 나면 전국 각지에 배송하는 거지 뭐. 그래도 남는 거 있으면 가져다가 돼지 사료로 쓰고 그래. 여기 올 때 알록달록한 지붕 봤지? 거기가 돼지농장이여. 이따 미주가 오면 데려가서 구경시켜달라고 해. 어차피 그거 다 미주네 것이여.”한성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전부 미주네 농장이라고요?”“아, 미주가 말 안 한 거여? 여기 과수원도 전부 미주네 과수원이여.”“...”한성우는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이 이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