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내가 한 얘기는, 생각해 봤어?”유현진이 모른 척 물었다. “무슨 얘기요?”유상수: ...“내가 널 양딸로 입양하겠다는 얘기 말이야. 네가 빽이 없으니까 그것들이 감히 널 괴롭히는 거야. 전에 유씨 가문에선, 네가 언제 그런 수모를 당해봤겠어?“‘말이나 못 하면!’예전에 그녀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던 건 그들이 강한서와 강씨 가문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녀가 당했던 수모야말로, 전부 유씨 가문에 의한 것이었다. 유상수는 이젠 아예 유현진에게 잘 보이려고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녀에게 뭐 대단한 것이라도 줄 수 있을 듯 굴었다. 유현진을 욕하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며 강한서를 쿡 찔렀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겠냐는 의미였다. 강한서는 입 모양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러겠다고 해.유현진은 강한서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더니 말했다. “곧 아줌마랑 결혼하시잖아요. 그 일은 나중에 얘기하시죠. 아무래도 혼자서 결정하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유상수는 유현진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아지자 바로 말을 이었다. “당연히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어. 넌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네가 동의하기만 하면, 내가 바로 공식적으로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공개할 거란다.”유현진이 말했다. “혼자 결정하셨다가 아줌마가 오지 않으시면, 분위기가 이상해질까 봐 그러죠.”백혜주를 설득하는 건,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하던 유상수가 말했다. “그럼 결혼식 당일 공개하면 되겠구나. 겹경사잖니.”유현진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저야 괜찮죠. 하지만... 아줌마가 기분 나빠하시지 않을까요?”“넌 오기만 하면 돼. 우리 집에선 내 말이 법이야.”유현진이 천천히 대답했다. “알겠어요.”전화를 끊기 전, 유상수는 다시 당부했다. “잊지 말고 한서도 데리고 와. 사람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이거야말로 그의 진짜 목적인 듯했다. 유현진이 말했다. “시간이 될지
그녀가 한낱 엑스트라였을 때 그녀도 자신이 어느 날 갑자기 뜨는 상상을 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건 그저 상상일 뿐이었다. 바쁜 스케줄이 그녀의 대부분 시간을 차지했고 그녀는 그런 아름다운 꿈을 꿀 여유조차 없었다. 매일 잠들기 전, 그녀는 내일 제작진이 몇 끼나 해결해 줄 수 있는지, 그녀가 사비로 식비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이번 달은 그래도 며칠은 더 살 수 있겠네, 얼마를 더 받을 수 있을까, 집엔 얼마를 보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기 바빴다.만약 강한서가 누군가를 통해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녀의 생활을 아마 계속 그렇게 평범하고 바빴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나타났고 한 장의 계약서로 그녀를 화려한 세상으로 끌어들였다. 그녀는 자신이 일약 스타가 되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꿈에서조차 상상한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 쉬워졌다. 돈이든, 유명세든 말이다. 채혈을 한 번 하기만 하면, 강한서는 그녀에게 드라마나 모델 계약서를 주었다. 그녀는 거의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다른 사람은 이루지 못해 안달인 것을 손에 쥐었다. 그녀는 점차 연예계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인맥도 늘었으며 그녀의 위치도 점점 더 높아졌다. 예전 그녀는 하루에 5만 원이었고, 언제면 하루에 20만 원을 벌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녀가 드라마 하나에 10억의 출연료를 받게 되었을 때, 그녀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사람이란 것이 원래 그랬다. 하나를 가지면 두 개를 갖고 싶고, 두 개를 가지면 세 개를 욕심냈다. 그렇게 천 개, 만 개를 원했다…강한서가 송민영을 띄워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위에는, 내려오는 계단이 없었다. 한 발만 잘못 내딛어도 곧 지옥으로 떨어졌다. 만약 강한서가 그녀의 일을 전부 끊지 않았다면, 만약 브랜드 뉴 엔터에서 그녀의 앞길을 막지 않았다면, 그녀가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강한서는 송민영이 하는 미친 소리를 들으며 갑자기 비웃음을 흘렸다. “우리 거래는 애초부터 명확했어. 네가 원
그렇게 된다면 그녀가 한 짓들이 전부 까발려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상상만 해도 송민영은 두려움에 몸이 떨려오는 것 같았다.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강한서에게 통하지 않자 바로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유현진은 아직 그 여자아이의 존재를 모르는 거지?”강한서는 느긋하게 고개를 들더니 휴대폰을 꽉 움켜쥐고 태연하게 말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수많은 얼음 조각이 된 것 같은 그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느껴졌고 송민영은 저도 모르게 오한을 느끼게 되었다.그녀는 여전히 겁도 없이 말했다.“은서라는 아이 말이야. 유현진은 아직 그 여자아이 존재를 모르고 있는 거지? 몰래 그렇게 큰 딸을 뒀다는 거 유현진이 알기라도 하면 정말로 끝까지 너를 선택하고, 평생을 함께할 것 같아?”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숨소리마저 느껴지지 않아 너무나도 무서웠다. 하지만 송민영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네가 날 도와주지 않는다면, 은서의 존재를 내가 알릴 거야. 너 죽고, 나 죽고 한번 끝까지 갈 거야!”“너 죽고, 나 죽고...”강한서는 그녀가 한 말을 곱씹으며 음험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가당키나 해?!”송민영은 두려운 듯 살짝 움찔거리더니 이내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네가 날 도와주기만 한다면, 나도...”“지성거리 83번지.”강한서는 뜬금없이 주소를 읊었다. 그러나 송민영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송민영,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정말로 널 어쩌지 못할 거라 생각해?”강한서는 마치 저승에서 보낸 사자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은서의 존재를 알린다고 해도 난 상관없어. 하지만 그것의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될 거야.”송민영은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하! 어차피 넌 법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해!”강한서는 베란다 난간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시도해 보든가.”“강한서, 내 충전기 어디에다 뒀어?”이때, 유현진의 목소리가
강한서는 거실에 서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유현진이 거실로 내려오는 모습에 그는 전화를 끊고 그녀를 보며 물었다.“찾았어?”“응.”유현진은 대답하긴 했지만, 마음은 이미 딴 곳에 있는 것 같았다.“왜 그래?”그런 그녀의 모습에 강한서가 물었다.유현진은 그를 보며 말했다.“서랍에 유전자 검사, 그거 정말이야?”강한서는 멈칫하였다.“봤어?”유현진은 그를 째려보았다.“보라고 일부러 충전기를 그 안에 넣어둔 거 아니야?”보통 사람이라면 충전기를 쓰고 굳이 깊숙한 서랍 안에 넣어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강한서는 웃더니 대답했다.“그냥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그랬어.”그는 송씨 집안 사람들의 방법을 찬성하지 않았다.일말의 소식도 유현진에게 흘리지 않고 바로 찾아가는 건,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유현진은 한동안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만약 송민영의 일로 유현진이 스트레스를 받아 힘들어할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일찍 이렇게 했을 것이다.그는 원래 유현진이 그 자료를 발견하고 며칠 동안이나 혼자 끙끙 고민하다 그에게 물어볼 줄 알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녀는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유현진도 아주 많이 심란했다.강한서는 혹여라도 그녀가 자료를 이해하지 못할까 봐 아주 상세하게 만들어 넣어두었다. 그래서인지 그 자료에는 송민준뿐만 아니라 송민준의 친모 한아람의 자료도 있었고 그녀와 송병천, 그리고 송민준의 친자확인 검사서도 있었다.그녀와 송민준은 어릴 때만 닮아 있었지만, 한아람과는 지금도 똑 닮아 있었다. 눈썹뿐만 아니라 얼굴 곳곳이 다 닮아 있었다. 그녀와 유일하게 다른 점은 얼굴선이었다. 한아람의 얼굴선과 이목구비는 유현진보다 더 뚜렷했고 기품이 있었으며 더 온화해 보였다.어릴 때도 그녀는 다소 의문이었다. 그녀는 하현주뿐만 아니라 유상수와도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학교 학부모 면담 때거나 친구를 집으로 데려와도 전부 똑같은 말을 했었다. ‘너는
강한서도 그녀가 말한 엄마가 하현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현주가 이 일을 알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여하간에 하현주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많은 유현진의 검진 결과가 있는 것을 보아 아마도 유현진이 자신의 딸이 아닐 거라고 예상하였을 것이다. 유현진의 혈액형은 그들 부부 사이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었으니까.강한서는 뜸을 들이다 말했다.“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민준이가 지금 알아보고 있어. 하지만 너에 대한 사랑은 거짓이 아닐 거야.”유현진은 또 한 번 침묵했다.너무나도 긴 침묵에 걱정되었던 강한서는 바로 입을 열고 위로하려 했다. 하지만 유현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방금 자료에서 본 건데, 그분이 돌아가신 날짜와 내 생일이 같더라. 혹시 나 낳고 바로 돌아가신 거야?”“응.”강한서는 대답했다.그러자 유현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나 때문에...”“너 때문이 아니야.”강한서는 바로 말허리를 잘랐다.“그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네가 세상에 나오길 바랐어. 하지만 언제나 뜻밖이 있기 마련이지. 이건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네가 이 세상에 건강하게 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아주 큰 기쁨이야.”유현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나 머리가 조금 복잡해.”“괜찮아.”강한서는 그녀를 끌어안고 귓가에 뽀뽀했다.“네 마음이 정리되기 전까지 그 사람들을 안 만나도 돼.”“응.”유현진은 한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민준 오빠랑 나, 어릴 때 정말 많이 닮았네.”강한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 아주 많이.”“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거야?”“응.”강한서는 대답했다. 그는 심지어 그때 송민준과 한아람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여동생일까, 아니면 남동생일까 하며 맞춰보기도 했었다.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로 신기한 인연이었다.유현진은 민경하가 그간 묻지 못했던 것도 물었다.“그럼 나랑 결혼한 거, 설마 내가 민준 오빠랑 닮아서 그런 거야? 죽마고우이니까 포기가 안 되
“송여우가 잡혔어!”차미주는 너무 기쁜 나머지 나무 위에 있다는 것조차 까먹고 벌떡 일어났다.“난 송여우 인성만 문제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악랄한 짓까지 했을 줄이야! 역시 안 좋은 소문 돌던 연예인들은 뒤끝이 항상 이렇게 법으로 끝난다니까!”그런 그녀의 모습에 한성우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야, 너 얌전히 앉아 있어! 나뭇가지가 네 생각처럼 그리 단단하지 않아. 네 몸무게를 못 버티고 끊어질 거란 말이야!”그러나 차미주는 그가 말 한 글자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이미 송민영이 드디어 경찰에 잡혔다는 소식으로 가득했고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그 여자가 연예계에서 얼마나 갑질을 해 댔는데, 드디어 대가를 치르게 되었네! 이런 상황이면 징역형 몇 년이나 받을 수 있을까? 너무 솜방망이 처벌받아도 안 될 것 같은데.”차미주는 작은 입을 열심히 놀리고 있었다.“동료를 성폭행할 생각까지 하다니, 분명 세금도 떼먹고 있을 거야. 그 여자 방이진과도 사이가 좋았으니 어쩌면 같이 약도 했을지도 모르겠네! 안 되겠어, 나도 얼른 신고해 줘야지.”그녀는 이내 다시 나무에 앉더니 휴대폰을 고쳐 들었다.“탈세 신고하려면 어디에다 전화해야 하는 거지?”“126.”한성우는 불안불안한 마음으로 그녀를 보며 재촉했다.“너 일단 내려와서 전화해. 위에서 그러는 건 위험해.”“알았어, 알았어.”차미주는 대답을 하면서 바로 번호를 꾹꾹 눌렀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발밑에서 ‘빠직' 소리가 났다. 나뭇가지가 끊어진 것이다. 곧이어 차미주의 짧은 비명이 들리더니 그대로 나무에서 떨어지게 되었다.한성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바로 손에 든 사과를 던지고 그녀를 받으러 다가갔다.그러나 옷깃조차 스치지도 못한 채 차미주는 잔디밭에 떨어지게 되었다.한성우는 그녀를 잡지 못한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재빨리 차미주 곁으로 달려갔다.“괜찮아?”차미주는 엉덩이를 문지르면서 말했다.“아니 왜 사과를 땅에다 버려. 아프잖아.”나무는
“최소한 이 줄은 마저 다 따야 갈 수 있을걸.”차미주는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는 그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흥, 그러길래 누가 따라오라고 했어? 집에서 편히 쉬고 있으면 될 것을, 네가 굳이 따라와서 무료 노동을 해주겠다고 한 거잖아. 심지어 나까지 힘들게 만들어 놓고 말이야!”“...”한성우는 원래 아주머니 앞에서 잘 보이려고 했다.아침부터 일어나자마자 차미주는 그를 데리고 시장으로 가서 편한 옷을 몇 벌 사려고 했다.그러나 두 사람이 외출하기 직전에 마침 외출 준비하고 있는 차미주의 엄마 김경선을 마주치게 되었다.그는 아무 생각 없이 김경선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고, 김경선은 사과 농장으로 가서 사과 따러 가야 한다고 했다. 그녀의 말에 한성우는 바로 김경선에게 잘 보일 기회라고 생각해 스스로 먼저 도와주겠다고 말했다.그는 미래의 장모님에게서 점수를 따둘 생각에 차미주가 그에게 보낸 눈빛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렇게 과수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사과 따는 것이 그리 간단한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아무리 한 나무에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다고 해도 사과의 색깔과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심지어 어떤 사과나무는 다른 품종과 다른 품종과 접목한 것이었기에 따면서 분류해 줘야 했다.두 사람은 아침부터 지금까지 총 7그루의 사과를 땄고 부단히 허리를 굽히면서 나무에 오르기도 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열심히 사과를 땄지만, 여전히 한 줄이나 남아있었다.차미주의 말에 한성우는 저도 모르게 변명했다.“난 아주머니께서 힘드실까 봐 우리라도 도와드리자고 말한 거야. 아주머니께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일하시면 좋잖아.”“우리 엄마를 걱정해서라고? 너무 기뻐서 웃음밖에 안 나오네. 우리 둘의 무료 노동 덕에 엄마는 하루 알바비를 아끼게 된다고!”“...”그가 입을 열고 반박하려던 순간, 등 뒤로 온화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둘이서 뭐 해요?”차미주는 깜짝 놀라더니 바로 몸을 일으켰다.“엄마.”김경선은 자외선을 피하고자 전신 무장한 상태
차미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할머니께서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다니신 거야.'한성우는 오히려 빨리 입을 열었다.“아저씨, 아주머니들 안녕하세요.”“그래그래. 도시에서 온 놈이라고 하던데, 인사성은 싹싹 바르고 좋네.”“아이고 참으로 잘생겼네. 키도 훤칠하니, 183인가?”한성우는 미소를 지으며 바로잡았다.“185.6이에요.”“아이고, 그렇게나 커? 사내 총각 이름은 뭔가?”“그냥 성우라고 불러주시면 돼요.”넉살이 좋았던 한성우는 바로 아주머니들과 섞여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런 그의 모습에 차미주는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한성우는 인싸 중의 핵인싸였고 어디서든 잘 어울려 지냈기 때문이다.그녀는 물을 많이 마셨던 탓에 화장실에 가게 되었고 이곳엔 한성우만 덩그러니 남아 과일 상자를 옮기고 있었다.아주머니들은 한성우가 참 잘생겼다며 이내 끌고 와 사과를 분리하는 일에 끼워주었고 덕택에 일도 한결 편해졌다.한성우는 그들에게 과일을 분리하는 법을 배우면서 수다를 떨었다.“아주머니, 여긴 과일 분리하는 기계가 없는 거예요? 전부 수작업으로 직접 분리하시는 거예요?”“있지, 근데 그 기계는 크기만 분리할 수 있더라고. 이런 생채기가 난 것들은 분리가 안 돼. 그래서 직접 사람이 해야 해. 그래야 하나하나 포장 잘해서 상자에 넣을 수 있거든.”“그럼 생채기가 난 사과는 어떻게 처리하는 거예요?”“사과술이나 식초 만드는 곳에 보내지. 아니면 통조림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든가.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공장 하나씩은 소유하고 있어. 만들고 나면 전국 각지에 배송하는 거지 뭐. 그래도 남는 거 있으면 가져다가 돼지 사료로 쓰고 그래. 여기 올 때 알록달록한 지붕 봤지? 거기가 돼지농장이여. 이따 미주가 오면 데려가서 구경시켜달라고 해. 어차피 그거 다 미주네 것이여.”한성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전부 미주네 농장이라고요?”“아, 미주가 말 안 한 거여? 여기 과수원도 전부 미주네 과수원이여.”“...”한성우는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이 이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