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준은 코웃음을 쳤다.“누구는 말이야. 그곳에 코빼기도 나타나지 않았으면서 뻔뻔하게 다른 사람을 뭐라 하더라.”정곡을 찔린 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송민준은 그제야 속이 상쾌해지는 기분이었고 심지어 더 강한서를 자극하려 했다.“강운이는 그래도. 중요한 순간에 아주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니까. 우리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께서도 강운이를 엄청나게 좋아하셔. 역시 너보단 강운이가 현진이한테 더 어울려.”강한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그런 말 같지 않은 소리 좀 작작 해! 현진이는 강운이 같은 타입 안 좋아하니까!”송민준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네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현진이가 강운이랑 이어지지 못한 거잖아. 네가 현진이랑 이혼할 때 깔끔하게 마음도 정리했다면 현진이는 아주 자유롭게 강운이를 만났을 거야. 강운이도 분명 현진이를 좋아할 거라고. 한번 해볼래?”강한서는 그런 송민준의 말에도 자극을 받지 않았다. 그는 제일 힘이 있는 목소리로 바로 꼬리를 내렸다.“안 해볼래.”송민준이 그를 욕했다.“겁쟁이 자식!”송민준이 말을 마치자마자 유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준 오빠는 왜 자꾸만 널 욕하는 거야?”강한서는 고개를 들고 아까와는 달리 아주 부드럽고 다정한, 소심한 한 마리의 새끼 양 같은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몰라, 내가 싫은가 봐.”“...”송민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이 여우 같은 놈!'더는 강한서를 욕하기도 귀찮았던 송민준은 바로 물었다.“현진 씨, 괜찮아요? 왜 연락을 안 받았어요?”“아, 전 괜찮아요. 연락이 너무 많이 와서 제가 휴대폰을 꺼두고 있었어요. 그래도 이준 씨한테만 답장을 해드렸는데, 말씀 안 하시던가요?”“말했어요. 하지만 그래도 현진 씨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연락했었어요.”유현진은 미소를 지었다.“전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에요. 다만... 또 회사에 피해를 끼쳤네요.”“이건 피해가 아니에요.”송민준은 이 일을 부추긴 사람을 떠올리더니 안색이 잔뜩 어두워
강한서도 그릇을 다시 그녀의 앞으로 밀었다.“에이, 선생님이야말로 고생하셨죠. 그러니 첫입은 역시 네가 먹어야지.”유현진은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그냥 옆에서 말만 했잖아. 제일 많이 고생한 건 너지. 그러니까 사양하지 말고 먹어.”강한서도 다시 한번 사양했다.“생선은 상처 회복에 잘 되니까 네가 먹어야 해.”유현진은 물러나지 않았다.“아니지. 생선은 두뇌를 활성화해 준다고 했으니까 매일 출근하며 머리를 쓰는 네가 먹어야 해.”강한서는 다시 한번 자신의 앞으로 온 구린 매운탕을 보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우리 그냥 배달 음식 시켜 먹자.”유현진은 고집스럽게 말했다.“이 매운탕 버리기는 아깝잖아. 꽤 비싼 물고기였단 말이야.”“그렇긴 하지.”강한서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나에게 낭비하지 않는 방법이 있어.”유현진은 아주 궁금했다.“뭔데?”강한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휴대폰을 들고 와 매운탕을 사진으로 찍더니 한열에게 전송했다.한열은 마침 소파에 누워서 휴대폰으로 낮에 있었던 쇼핑몰 사건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강한서가 보낸 사진을 받게 되었다.「뭐예요?」강한서가 답장했다.「이소원 씨 자료를 제공해 줘서 고맙다고. 이건 네 현진이 누나가 직접 만든 매운탕이야. 그러니까 주소 찍어. 이따 사람 시켜 보내줄게.」한열은 바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누나가 한 거라고요?」강한서는 아주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그래. 현진이가 오후에 특별히 시장에 손수 장을 봤어. 신선한 민물고기를 사 오기 위해 말이야. 직접 사러 가지 않았다면 오늘 그런 일도 없었겠지.」한열은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누나가 나한테 만들어 줄 매운탕을 위해 직접 장 보러 갔다고요?」「당연하지.」조금 전까지 감동을 하던 한열은 뭔가 찝찝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이내 보기 드물게 머리를 굴리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답장했다.「그런데 그걸 흔쾌히 나한테 정말 준다고요?」한열은 강한서의 질투를 본 적
“...”유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윽고 반 시간 후, 그 매운탕은 한열의 집으로 배송되었다.한열은 슈퍼 아이돌로서 항상 몸매 관리에 신경을 써왔고 자신에 대해서도 아주 엄격했다. 그는 아이돌이 된 후로부터 방송이 아니라면 저녁에 음식을 아주 적게 먹었고 8시가 되면 바로 모든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밤샘 촬영을 할 때도 모든 스태프가 야식을 시켜 먹기도 했지만, 그는 절대 음식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그래서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마자 이미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있던 매니저가 문을 열어주려고 했지만, 한열이 잽싸게 뛰쳐나와 문을 열었다. 한열은 바로 커다란 냄비와 과일을 한가득 들고 들어왔고 매니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던 매니저는 배달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했다.“아까 물어볼 때는 안 먹는다며. 그래서 내 것만 시켰는데, 너 새로 시킨 거야?”한열은 조심스럽게 냄비를 들고 코웃음을 쳤다.“누가 배달로 냄비까지 배달해 줘요?”매니저는 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설마 팬이 보낸 건 아니지? 이 자식, 너 설마 팬이랑 연락하고 있었던 거야? 그간 팬이랑 사적으로 연락하다가 들키고 망한 연예인이 몇이 되는 줄 알아? 당장 그 팬이랑 연락 끊어!”한열은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뭐래!”말을 마친 그는 냄비를 안고 주방으로 갔다.매니저는 바로 그를 따라갔다.“그럼 누가 너한테 선물한 건데?”기분이 아주 좋았던 한열은 자랑스럽게 말했다.“여신님이 직접 나를 위해 만들어 준 매운탕이에요.”매니저는 당연히 안 믿는 눈치였다.“갑자기 왜 너한테 매운탕을 끓여준 건데?”“당연히 이소원 씨 사건 자료를 찾아줘서 그런 거죠. 고맙다고 보답으로 끓여준 거래요.”매니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나한테 말 안 했어? 이소원 씨 사건에 대한 증거는 애초에 별로 없었는데, 너 대체 뭘 찾아준 거냐?”“찾고 싶으면 당연히 증거쯤이야 쉽게 찾을 수 있죠.”한열은 더는 이소원에 관해 얘
비록 국물 색깔은 그럴싸했지만 맛은 비리고, 짜고, 맵고, 심지어 이상한 탄 맛도 났다.오묘하고 기이한 맛에 그는 한가지 결론밖에 내릴 수 없었다.이건 먹으면 안 된다!한열은 믿을 수가 없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맛없고 이상한 음식은 처음이었다.“왜 그래, 맛없어?”매니저는 반응 차이가 심한 한열을 보며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한열은 ‘선셋스타'의 골수팬이었고 어떻게든 유현진의 이미지를 지키려 했다.이윽고 그는 양심에 찔린 거짓말을 했다.“아니요, 엄청 맛있어요.”“그럼 왜 뱉어?”한열이 여전히 뻔뻔하게 말했다.“뜨거워서요. 안 돼요?”매니저는 머리가 단순한 한열을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난 먼저 씻고 잘 거니까 너도 얼른 먹고 일찍 자. 내일도 스케줄이 있어.”“네, 네. 알았어요.”한열은 매니저를 주방에서 쫓아내곤 매운탕을 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버리기엔 여신님의 성의라 차마 버릴 수가 없었고, 안 버린다고 하기엔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떻게 이 눈앞에 있는 매운탕을 처리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순간, 강한서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에게 나눠주는 것이다.방금까지 그는 절대 나눠줄 생각 없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아주 좋은 아이디어였다!이 고통을 그 혼자만 느낄 수 없다.이윽고 그는 빠르게 다시 포장하여 사람을 불러 브랜드 뉴 엔터로 보냈다.송민준은 사무실에서 여전히 야근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박해서는 물건을 받은 후 송민준의 집에서 보내온 것으로 생각해 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그의 사무실로 들고 왔다.그렇게 그날 밤, 송민준은 바로 차로 한열의 집까지 찾아갔고 그 집에서는 한열의 비명만 울려 퍼졌다.요리를 만든 진정한 범인은 따로 있었는데 말이다.유현진이 세수를 하고 있을 때, 강한서는 민경하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강한서는 안방에서 나가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CCTV는 확인했습니다. 엘리베이터에 있던 어떤 꼬마가 사모님 마스크를
#전화를 끊기 직전에 민경하가 갑자기 물었다.“대표님, 대표님께선... 괜찮으시죠?”강한서는 뜬금없는 그의 말에 되물었다.“뭐가 괜찮다는 거죠?”민경하는 헛기침을 내뱉었다.“큼, 그러니까 인터넷에 떠도는 건 전부 사실이 아니니 믿지 마세요. 여론 때문에 화를 내지도 마시고요. 전부 헛소리이니까 굳이 화낼 필요 없다고 봐요.”“???”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민경하는 멈칫하였다.“설마, 아직 기사를 확인하지 않으신 겁니까?”“무슨 기사가 났다고 그러는 거죠?”민경하는 침묵했다.“대표님께서 직접 보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전 마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끊겠습니다.”강한서가 화를 내기 전에 민경하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강한서가 페이스북을 확인했을 때 안색이 서서히 어두워졌다.실검엔 #금욕적인 변호사와 미모의 여배우 커플 주식 당장 사#가 차지하고 있었다.그는 그 해시태그를 눌렀다. 그러자 주강운이 유현진을 뒤에 숨기고 지키는 사진과 영상이 그의 화면 전체를 지배하였다.주강운이 유현진을 위해 안티팬과 적대하고 있을 때 지은 냉정한 표정과 지적인 모습은 그의 우아한 품위를 보여주었다. 특히 훤칠하게 생긴 외모 덕에 유현진과 함께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선남선녀였다.이윽고 그 영상이 인터넷 곳곳에 퍼지게 된 후, 당시 상황을 제외한 변호사와 유현진의 관계도 화젯거리가 되었고 네티즌들이 열렬히 토론하고 있는 화젯거리 중 하나이기도 했다.강한서는 해시태그를 클릭하자마자 바로 꺼버렸어야 했지만, 마음과 달리 손은 이미 댓글을 눌러 확인하고 있었다.「3분! 3분 내로 당장 이 변호사의 신상정보 나한테 알려줘!」「변호사가 같이 쇼핑도 해주나? 혹시 남자친구인 거 아니야?」「아직은 사귀는 사이는 아닌 것 같아요. 변호사가 유현진을 지킬 때 손은 유현진 어깨에 올려뒀거든요. 만약 정말로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라면 더 다정하게 안고 있지 않았을까요?」「와, 분노치가 극에 달했으면서도 매너손을 유
아직은 친구. 그 말에는 분명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분명, 이 말을 여전히 대시하는 중이라, 아직은 친구라는 뜻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의 피드 아래 댓글을 단 네티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주강운에게 유현진을 어떻게 만났는지, 진도는 어느 정도로 나갔는지 물어보았고, 심지어 여자에게 어떻게 대시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강한서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그의 분노도 점점 더 끓어올랐다. 그는 유현진의 커리어에 영향을 줄까 봐, 한성우 앞에서만 애정 행각을 벌이며 자랑할 수 있었다. 연예인을 자주 상대하는 변호사인 주강운의 이렇게 모호한 대답이 막 뜨기 시작한 배우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를 리가 없었다. 강한서는 굳은 얼굴로 한성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때 한성우는 막 비행기에서 내려 여전히 병약한 환자인 척 연기하고 있었다. 그의 캐리어도 차미주가 들었다. 그가 뻔뻔하기 때문이 아니라 차미주의 죄책감이 너무 컸기에, 그의 상처가 벌어질까 봐 그를 아무것도 못 하게 했다. 그는 오는 내내 달콤한 부담감에 빠진 채, 차미주의 뒤를 따랐다. 그는 차미주가 너무 단순해 속이기 쉽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귀한 보물을 찾다니 역시 보는 눈이 좋다며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행복하고 또 먹을 복도 많았다. 강한서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자 그는 참지 못하고 또 까불었다. “지금이 몇 시인데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거야? 넌 밤 생활이 없을지 몰라도, 난 있다고.”강한서는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닥치고, 계정이나 하나 없애줘.”한성우: ???“누구?”강한서가 이를 갈며 말했다. “주강운!”한성우: ...한성우는 몇분을 거쳐서야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야 이 좀팽아, 강운이한테 연락해서 삭제하라고 하면 되잖아. 계정을 없애버리라니, 네가 미친 거지.”“너야말로 미쳤어. 만약 그 말을 조준이 차미주에게 한 거라면
차미주가 한성우에게 다가와 물을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앉아서 좀 쉴래?”한성우가 웃으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휴대폰을 들고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네 마음이 불편하면 형수님 찾아가서 말해. 어디가 아픈지, 콕 짚어주면서 말해. 절대 강압적으로 형수님한테 뭔가를 요구하지 말고. 그냥 널 마음 아파하게만 만들라고!”“연애에도 수단이 필요한 법이야. 직진만 하지 말고, 상대방 모르게 뭔가를 하려고 하지도 말고. 꼭 알게 해야 해. 심지어 과장되게 생색도 내면서.”“연애 중에 제삼자가 나타났을 땐, 그 사람을 상대할 게 아니라, 네 애인을 공략해야 한다고! 멍청한 놈이나 상대방을 상대하는 거야. 널 미쳐 날뛰는 쪼잔한 놈으로 만들면, 그 사람은 목적을 달성한 거라고!”강한서가 한성우의 말을 바로잡았다. “제삼자 같은 건 없어. 현진이는 나만 좋아해.”“네네네, 너만 좋아하겠지. 그럼 가서 형수님이랑 통화해, 난 차가 와서. 나중에 얘기해.”차미주가 걸어오자 한성우는 급히 전화를 끊었다. 강한서는 휴대폰을 들고 한성우가 했던 얘기를 떠올리며 생각에 빠졌다. 유현진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침대 시트를 바꾸는 강한서를 마주했다. 그녀는 그의 모습에 의아해졌다. 강한서처럼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자란 도련님은 침대 시트를 바꾸기는커녕, 시트의 앞뒷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머리의 물기를 털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시트 바꾼 지 며칠 되지도 않았잖아. 왜 바꾸는 거야?”강한서는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대답했다. “너 어제 이 시트가 불편하다며?”“난 그냥 조금 까끌까끌하다고 했을 뿐인데?”유현진이 강한서를 도와 시트 모서리를 잡아주며 말했다. “전에 내가 너한테 치약은 아래서 위로 짜고, 갈아입은 옷은 빨래 바구니에 넣으라고 할 때는 잘 까먹더니, 오늘은 침대 시트가 까끌까끌한 걸 알아차리다니. 너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이렇게 부지런한 척하는 거지?”강한서가 말했다. “꿍꿍이가 있긴 하지.”유현진이 멈
강한서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다른 사람 휴대폰을 함부로 보는 건 매너 없는 거 아니야?”유현진이 시선을 위로 향하며 말했다. “함부로 다른 사람 생일을 휴대폰 비밀번호로 설정하는 건 매너 있는 거야?”강한서: ...“이리 와.”유현진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강한서가 도도하게 말했다. “제대로 불러. 강아지 부르듯 부르지 말고.”유현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올 거야, 말 거야?”강한서는 우물쭈물하며 입술을 달싹이더니 “다음은 없어.”라며 유현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가 유현진의 앞으로 다가오자, 유현진이 바로 그를 침대로 밀어뜨렸다. 그녀도 뒤따라 침대에 누우며 그의 품에 안겼다.멈칫하던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 아직 샤워 안 했어.”유현진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괜찮아. 너 냄새 난다고 싫어하지 않아.”강한서: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안전 교육 상식을 가르쳤다. “성관계 전엔 깨끗이 씻는 게 제일 좋아. 80%의 여성질환은 깨끗하지 않은 성생활로 인한 거야. 그중 대부분은 성관계 파트너가 생식기관 위생에 신경 쓰지 않아서 감염되는 거라고.”유현진: ...“아는게 많네.”강한서가 겸손한 태도로 얘기했다. “지난번 너랑 병원에 갔을 때, 병원에서 나눠주는 HPV 홍보 글에서 읽었어.”“아~”유현진이 말을 길게 늘어뜨리더니 갑자기 그의 귓가에 바짝 다가갔다. “하지만 난 못 참겠는걸.”강한서는 온몸의 근육이 순식간에 긴장했다가 다시 천천히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의 귀는 눈에 띄게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목젖이 꿀꺽 움직였다. “아니면, 욕실로 가서...”“여기서 해.”유현진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유혹적이었다. “욕실엔 의자가 없잖아. 서 있기 싫어.”방금까지 강한서의 귀는 조금 붉은 정도였다면 지금은 완전히 새빨개졌다. 서 있고 싶지 않아...서 있고...강한서의 머릿속에는 떠오르는 미성년자 관람 불가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의 눈은 더욱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