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는 일부러 시크한 표정을 지으며 유현진을 보더니 불퉁한 어투로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애교라고, 발광이 아니라.”유현진의 입가가 바르르 떨려왔다.“강한서, 그만하는 게 좋을 거야!”강한서는 바로 트집 잡을 것을 발견했다.“이거 봐. 나한테는 인내심이 하나도 없잖아. 인내심이 1분도 안 가는데 걔한테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긋나긋하게 말하고. 지난번에 승마할 때도 그래. 분명 내가 더 많이 다쳤는데 넌 걔를 잡고 뒤도 안 돌아보고 가더라. 걔한테 너무 잘해주는 것 같다고 생각 안 해?”유현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너 그때 멀쩡하게 일어나지 않았어?”강한서는 바로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나 어깨 탈골되었어! 주강운 걔는 그저 살짝 긁힌 것뿐이라고. 병원 가면서 피가 굳지 않았어?!”“... 그럼 왜 그때 말하지 않은 건데?”원래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유현진의 한 마디에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억울해졌다.“넌 그때 나한테 다짜고짜 화를 냈잖아. 갑자기 웬 승마냐고. 모든 탓을 나한테로 돌리는데,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강한서는 시선을 떨구었다.“그리고 너 어차피 그때 날 원망하고 있었잖아.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도 안 쓸 거면서.”유현진은 입술을 달싹이다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난 그때 확실히 네가 다친 줄 몰랐어. 하지만 주 변호사님이 다쳐서 너한테 화를 냈던 거 아니야. 난... 네가 다칠까 봐 두려웠어.”강한서가 낙마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순간 심장이 멈추게 되었다. 그가 다시 일어나는 모습에 그녀는 바로 그에게 달려가 다짜고짜 화를 냈다.강한서에게 화를 낸 건, 첫째는 두려워서였고 두 번째는 이혼한 강한서에게 위로를 받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두 가지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에 충돌하니 그녀는 결국 모든 탓을 강한서에게 돌리게 된 것이었다.강한서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마음 한구석이 누그러진 그는 얼른 그녀의 손을 잡으며 천천
“어, 안 돼!”유현진은 삐친 척 말했다.“치사해!”얘기를 나누던 와중에 강한서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유현진은 힐끔 확인했고 주강운의 연락이었다. 강한서는 유현진을 보며 다시 한번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옷 갈아입을래, 아니면 내가 전화를 받을까?”유현진은 이를 갈며 패배를 인정하였다.“내가 갈아입으면 되잖아!”원하던 바를 이룬 강한서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그럼 얼른 입어.”유현진은 울며 겨자 먹기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사실, 두 사람은 이미 오래된 부부 사이였기에 서로 앞에서 옷을 벗는 게 딱히 민망한 일은 아니었다.하지만 한쪽이 그걸 거부하고, 다른 한쪽이 그걸 지켜보겠다고 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게 된다.강한서의 표정은 회사 중요한 서류를 보는 것보다 더욱 진지해졌고, 그 얼굴로 옷을 벗기 시작한 유현진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녀는 순간 수치스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그녀는 강한서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천천히 옷을 벗어버린 그녀는 한복 세트를 입기 시작했다.사람이 마음이 급하면 항상 버벅대기 마련이었다.유현진은 급하게 옷을 입으려고 하면 할수록 제대로 잘 입어지지 않았고 팔이 제자리를 찾아가지 않는가 하면 허리 부분이 이상하게 헐렁했다.그녀가 허둥지둥 움직이며 계속 옷고름을 묶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언제 일어났는지 모를 강한서가 그녀의 손을 잡고 나직하게 말했다.“내가 도와줄게.”유현진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 버렸다.“넌 할 줄 모르잖아.”강한서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그럼 가르쳐줘.”이윽고 유현진의 가르침에 강한서는 드디어 한복을 그녀에게 입혔다.강한서는 시선을 떨군 채 그녀를 지그시 보았다.그녀는 그저 한복 의상을 입고 있었고 아무런 메이크업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에 피부가 하얗고 입술에 혈색이 돌았던 터라 마치 폐위당한 중전의 퇴폐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졌고 도도하고 세련돼 보였다.강한서는 그녀가 처음 이 의상을 입게 된 걸 보자마자 드는 생각이 바로 직접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기고 싶
유현진의 귀가 빨갛게 익어버렸다.그녀는 강한서가 자신의 비위를 맞춰주는 상상을 수도 없이 해왔다. 그리고 그 상상이 이렇게 쉽게 현실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다만 이 상황은 조금 어딘가 이상했다.유현진은 그를 밀어내며 나직하게 말했다.“일단 나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그러나 강한서는 그녀를 다시 끌어당겨 품에 안고 그녀의 귀를 살짝 깨물더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6000만 원이나 이 의상을 왜 산 것 같아?”유현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너...”강한서는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얼른 입술을 포갰다. 그리고 번쩍 들어 올렸다.떨어질까 두려웠던 유현진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꽉 끌어안았다.강한서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더 진득하게 키스를 했다.사실, 이 방면에서 강한서는 아주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여하간에 그녀가 여우 코스프레 의상을 입고 그를 유혹해도 꿈쩍하지 않던 사람이었으니까.그렇게 그녀는 한동안 강한서가 성적 불능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강한서의 성적 로망은 그런 수인 코스프레가 아니라 그녀의 드라마 속 캐릭터였다.강한서가 그녀를 아래에 깔고 누웠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그가 흥분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의 뜨거운 온기는 그녀를 나른하게 녹아들게 했고 목소리도 떨려왔다.너무나 흥분해 버린 그는 행동이 전처럼 그다지 부드럽지 않았고 다소 급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녀의 옷을 다 벗겨버리기도 전에 그는 이미 허리 짓을 하고 있었다.유현진은 느껴지는 고통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게 되었다.강한서는 하던 허리 짓을 멈추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나직하게 물었다.“아파?”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더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살짝 아프긴 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그녀는 오히려 거칠게 대하는 것이 더 좋았다.강한서는 그녀의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둘렀다. 그리고 그녀의 턱을 잡더니 고개를 들게 했고 이내 귓가에 대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아프면 내 얼굴을 봐.
한성우가 의아한 어투로 물었다.“어떤 모임?”주강운이 뜸을 들이며 평온하게 말했다.“너 친구랑 함께 모일 거라고 하지 않았어? 한서가 나한테 알려주던데, 아니야?”“?”‘내가 주최한 모임을, 내가 모른다고?'‘강한서 이 자식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한성우가 제일 잘하는 것은 바로 말을 맞춰주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아, 그래. 그랬지. 그래서 올 거지?”“아직 잘 모르겠어. 이번 주에 재판이 두 개나 있거든. 갈 수 있으면 갈게.”주강운이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래서 너희들은 다 파트너 데리고 올 거야? 아니면 우리끼리만 모이는 거야?”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술판엔 당연히 남자들만 모여야지. 여자들이 끼게 되면 흥도 깨져.”특히 유현진이 말이다. 강한서는 그가 술잔에 따라주는 대로 마셨기에 유현진이 있으면 항상 강한서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주강운이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어.”전화를 끊자 차미주가 말했다.“여자가 끼면 흥이 깨진다는 사람이 여자친구를 사귀어?”한성우가 어색하게 웃었다.“너도 가고 싶은 거라면 너만 끼워줄게. 넌 절대 방해가 되지 않아.”차미주는 삐친 척 말했다.“난 지금 널 매일매일 간호해 주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그런데 이번엔 술 취한 것까지 보살펴달라고? 지금 새로운 방식으로 날 괴롭히는 거야?”“내가 언제 그랬는데?”차미주는 자신의 다크써클을 짚으며 말했다.“이거 봐. 내 상태를 보라고! 오늘 택배 가지러 갔다가 아주머니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최근에 삿된 것이라도 만졌냐고 그랬어! 전에 생기발랄하던 내 기운이 싹 사라지고 없대!”한성우는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눈 밑에 짙게 걸려 있는 다크써클을 보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최근, 확실히 그가 너무한 것 같았다.그는 다쳤다는 이유로 수시로 차미주에게 연락했다.차미주는 죄책감에 번마다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사실 그는 그녀를 불러 집안일을 시키고 싶은
그녀의 절친한 친구라면 확실히 그런 말을 할 사람이었다.비록 유현진이 ‘양다리'를 경멸하는 것은 맞지만 차미주는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다만 그의 말을 다시 떠올리니 그녀는 다시 난처해졌다.“그럼 어떻게 해?”한성우는 차미주가 선뜻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나섰으면 했다. 하지만 그가 이런 생각을 차미주에게 말했다간 차미주는 분명 펄쩍 뛰며 그를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다.이윽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나중에 친구한테 야구 동영상이라도 내려받아달라고 해놓고 나 혼자 따로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는 거지.”차미주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한성우가 말한 ‘야구 동영상'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녀는 민망함을 느꼈다.어색한 공기가 흘렀지만, 그녀는 호기심을 숨길 수가 없었다.“모자이크 처리된 거야?”“...”‘지금 날 이성으로 보지 않은 것도 모자라 나한테 이런 걸 묻는 거야?'한성우가 답했다.“초짜나 모자이크로 가려지지 않는 걸 봐. 왜냐하면, 자극적인 걸 원하니까 그것만 하는 영상만 즐겨보거든. 하지만 난 스토리가 있는 걸 좋아해. 예를 들면 선생님과 학생의 금단의 사랑이나,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등 강압적인 그런 스토리가 있는 선정적인 고수위의 야동 말이야. 스토리가 있을수록 몰입도가 높아지거든.”차미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고 한참 우물쭈물하다 두 글자를 내뱉었다.“변태!”한성우가 옅게 웃어버렸다.“그래서 넌 어느 쪽을 좋아해?”차미주가 지금 무슨 상상에 빠졌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곧 터질 것 같았다.그녀는 한성우를 째려보더니 이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허! 내가 그걸 왜 너한테 알려줘?!”한성우가 느긋하게 말했다.“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 보니까 사실은 나보다 더 변태인 거 아니야?”차미주는 그의 낚시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걱정하지 마. 변태 중에서도 네가 제일 변태니까.”한성우가 한참을 웃었다.시계는 이미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차미주는 저도 모르게 몰려오는 피곤
차미주가 세상에서 무서워하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익사한 사람이었다.어릴 때 그녀는 어머니랑 함께 친척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친척이 낚시를 하다가 갑자기 심정지를 일으키며 낚시터에 빠져 익사하게 되었고 수색대가 닷새를 거쳐 겨우 시체를 찾아 건져냈었다.그때 당시 아주 어렸던 그녀는 호기심에 아직 뚜껑을 덮지 않은 관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관 속에는 물에 불어 두 배나 퉁퉁 커진 시체가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녀는 놀라 그해 동안 내내 악몽을 꾸게 되었었다.그녀의 꿈속엔 항상 익사한 친척이 몸집이 두 배나 부어오른 채 물속에서 그녀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그리고 현재, 아래층의 이웃이 익사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그녀는 순간 집에 들어가기가 무서워졌다.한성우는 그런 그녀의 안색에 나직하게 물었다.“왜 그래?”정신이 든 그녀가 바로 입을 열었다.“이 시간에 자기에는 좀 이르지 않을까 싶어서. 같이 게임을 하지 않을래?”한성우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더니 무언가 알아챈 듯했다.그는 태연하게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말했다.“오늘 게임 점검 날이잖아. 그래서 내일 아침 7시 즈음에야 점검이 끝나는데, 잊었어?”“...”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는 그녀에 한성우가 말했다.“그럼 영화나 볼까? 친구가 나한테 영화 쿠폰 보내줬거든. 나 아직 안 봤는데, 같이 볼래?”행여라도 마음이 바뀔까 봐 차미주는 바로 대답했다.“그래, 난 좋아.”이윽고 두 사람은 거실에 앉아 모든 전등을 껐고 빔프로젝터로 영화를 틀었다.영화는 유럽에서 제작된 영화였고 광고가 끝나자 차미주가 쿠션을 꼬옥 끌어안은 채 물었다.“어떤 장르인데?”한성우는 그녀에게 담요를 건넸다.“듣기로는 로맨스라고 했어.”차미주는 대충 대답하고는 담요를 무릎 위에 덮었다.영화는 참으로 허무맹랑한 내용이었다. 남주는 어느 조폭 세력의 보스 설정이었고 여주는 그런 보스에게 찍혀버린 평범한 여자 설정이었다.하지만 남주와 여주의 미모가 대박이었고 보면 볼
한성우는 그녀가 바닥으로 부딪치게 될까 봐 얼른 팔을 뻗어 그녀를 받으려고 했다. 결국, 그녀는 그의 몸 위로 넘어지게 되었다.그녀가 다치게 될까 봐 그는 넘어질 때 휙 몸을 돌려 자신의 등이 먼저 바닥으로 떨어지게 했고 차미주는 그렇게 그의 단단한 몸에 부딪히게 되었다.‘쿵'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의 머리가 먼저 바닥에 닿았다.차미주는 얼른 그의 머리를 감싸면서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녀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한성우는 무의식적인 그녀의 행동에 순간 마음이 사르르 녹아드는 것 같았다.“아파?”차미주가 그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물었다.“날 밀쳐내면 되었잖아. 왜 나를 안고 같이 넘어져.”한성우가 답했다.“나도 밀쳐내려고 했지. 근데 네가 날 꽉 잡고 놓아주지 않더라.”그 말을 들은 차미주는 바닥을 짚더니 그의 몸 위에서 일어나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아주 넘어져 죽어버리지 그랬어!”한성우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웃으면서 일어났다.“나 정말 아팠어.”차미주는 전혀 안쓰럽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두 글자를 내뱉었다.“쌤통!”한성우는 몸을 일으키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너 먼저 알아서 놀고 있어. 난 화장실 좀 다녀올게.”차미주는 그를 상대하기조차 싫었다.한성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 문을 닫자마자 그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고개를 숙인 채 눈치 없이 빳빳해진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예전에 그는 차미주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전혀 꼴리지 않는다는 말을 내뱉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내뱉은 말과는 달리 그저 몸이 부딪친 것만으로도 쉽게 빳빳해져 있었다.그는 심지어 이런 일에 이렇게 인내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차미주의 맑은 두 눈을 보니 순간 그녀를 보며 생겨버린 성욕이 수치스럽게 느껴졌다.거짓말을 들키게 되는 것보다 이 사실을 알고 그녀가 놀라게 될까 봐 더욱 두려웠다.그는 순간 강한서가 예전에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정말로 누군가를 사랑
주강운이 웃으며 말했다. “아뇨, 그냥 배가 안 고파서요.”주강운의 어머니가 말했다. “배가 안 고파도 먹어야지. 매일 밤을 새우면 몸이 견디겠어?”주강운은 “네.”라고 대답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요, 어머니. 조금 이따 먹을게요.”“대충 넘기려고 하지 말고, 지금 먹어. 너 안 먹으면 나도 안 갈 거야.”그에 주강운은 어쩔 수 없이 그릇을 들고 연와를 먹기 시작했다. 사실 주강운은 연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은근한 비린 맛에 예민한 편이었다. 매번 다 먹고 나면 속이 뒤집어질 듯 메슥거렸지만 그는 거절할 줄을 몰랐다. 주강운의 어머니는 말을 잘 듣는 아들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침대맡에 앉아 주강운의 옷을 갰다. 그녀는 옷을 개며 입을 열었다. “강운아, 너 여자친구 사귀었니?”주강운은 행동을 멈추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어디서 들으셨어요?”“같이 게임을 하는 친구들한테 들었어. 신진우 결혼식에서 네가 어떤 여자와 같이 참석한 걸 봤다면서. 나한테 네 여자친구인지 묻더라고.”그녀의 말에 주강운은 감정이 없는 억지 미소를 보였다. “아주머니들께서 제 일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네요.”주강운의 어머니가 말했다. “전에 내가 조건이 좋은 여자애를 좀 봐달라고 했었거든. 그분들도 널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괜히 일을 그르칠까 봐.”그녀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네가 데려온 그 여자애, 어디서 일하고 있어? 나이는? 사진은 있니?”주강운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물었다. “만약 제가 좋다고 하면, 교제 허락하실 거예요? 어떤 집안 딸이든?”주강운의 어머니는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그래도 서로 부모님을 뵙고, 가족들에게 인사는 시켜야지. 아무래도 두 가정의 일이잖니.”주강운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는 어쩐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괴이함이 묻어있었다. 주강운의 어머니는 움찔하며 나지막이 물었다. “왜 그러니?”주강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