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악플에 분노한 작가가 자신이 쓴 대본 원고를 인터넷에 올리면서 글을 게시했다. 글의 내용은 대본의 발언권이 인기에 따라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진정으로 작가의 손에 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대본은 전문가인 작가에게 맡겨야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대본을 수정해 결국 그 잘못을 뒤집어 쓰게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글이 업로드되자 인터넷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많은 작가들이 그 글을 리트윗하며 일은 점점 커졌고 심지어 어떤 방송사에서도 그 일에 대해 입장을 표명했다. 인터넷에서 일이 일파만파 커졌지만, 그 논란은 반나절 뿐이었고 곧 잠잠해졌다. “장미의 배반” 시청률은 그 사건 이후 완전히 바닥을 쳤고 마지막 회에 다다랐을 때에는 실검을 살 수도 없어졌다. 반년 후, 송민영은 그 작품으로 인해 “백상삼류대상”에서 올해 최고 실망 여배우로 선정되었다. 물론 송민영은 그 상을 받지 않았다. 그것만 아니라면 나머지는 그런대로 연기력을 인정받는 상이었으니 말이다. “장미의 배반”은 송민영이 이미지 변화에 실패한 작품이었다. 그 작품 이후, 송민영은 또 로맨스물로 돌아갔고 여전히 그녀만의 “판타지”를 찍었다. 하지만 “장미의 배반”은 그녀의 팬들에 의해 위키백과에서 삭제되었고 그녀의 필모에서는 그 작품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필모를 아무도 수정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지금 인터넷에서 “장미의 배반”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송민영의 팬들에 의해 안티가 되고 말 것이다. 그 사람은 전혀 비웃을 의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송민영 본인도 당연히 그 작품에 대해서는 입을 꼭 닫았다. 그러니 유현진의 질문은 송민영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과도 같았고 그녀의 얼굴은 역시나 일그러져 있었다. 이미지 변신에 실패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패 후 자신도 입을 꾹 닫고 다른 사람들마저도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유현진은 전형적으로 아픈 곳만 콕콕 찌르는 스타일이었다.
송민영은 감히 모험을 할 수도 없었고, 해서도 안 됐다. 수술을 한 그때부터, 이미 그녀의 손엔 아무런 카드도 남아있지 않았다. 송민영은 어쩔 수 없이 분노를 삼켜야만 했다. “현진 씨, 함부로 얘기하지 마세요. 저 남자친구 없어요. 기자들이 마음대로 쓴 거예요.”유현진이 씩 웃더니 말했다. “그래요? 당시 육교에서 있었던 연쇄 추돌 사고, 제 두 눈으로 그분이 병원에 언니 보러 오신 걸 봤었어요. 일반 친구가 그렇게 자상할 수 있어요?”한성에서 일하고 있던 강한서는 갑자기 여러 번 재채기를 했다. 사람을 몰아세우는 유현진에 송민영은 조금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없다면 없는 거예요. 이게 재밌어요?”유현진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장난이에요. 언니도 농담하는 거 좋아하시면서, 그렇게 화낼 거 없잖아요.”유현진의 말에 송민영은 꽉 막히는 답답함을 느꼈다. 유현진은 더 이상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메이크업을 받으러 갔다. 솔직히 말해서, 만약 송민영이 죽은 듯 지낸다면 유현진은 그녀를 절벽으로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 만약 송민영이 조금이라도 똑똑한 사람이라면 그저 조용히 돈을 벌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인기는 금방 식지는 않을 테니까. 조금 더 노력해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면 자신의 능력으로 연예계에서 자리 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녀는 똑똑하지도 않아 어떻게든 유현진을 건드리려고 했다. 그녀를 자신만의 라이벌로 여기면서 말이다.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송민영이 “차상” 출연을 포기하고 “평화의 세상” 같은 삼류 작품을 선택한 것을 보며 유현진은 한편으로는 그녀와 같은 배우가 존재할 필요도 있다고 느꼈다. 최소한 팬들에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대본을 고를 줄도 모르면서 연기를 하는 송민영처럼 말이다. 한편, 한열의 매니저는 그가 참지 못하고 유현진을 대신해 나서기라도 할까 봐 한열을 꾹 누
전화를 걸자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었다. 송민영은 자신의 이름을 말한 뒤 전화를 끊었고, 다시 전화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통화가 연결되었다. 휴대폰 너머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사람의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송민영은 휴대폰을 꼭 움켜쥐고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상대방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송민영이 주먹을 꽉 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부탁하신 거, 이미 시키신 대로 했어요. 그러니 이제는 그쪽이 절 도와줘야 하지 않겠어요?”휴대폰 너머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음성변조를 사용했기 때문인지 차가운 목소리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송민영이 상대방이 거절할거라 생각하고 있던 그때,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뭘 도와달라는 거죠?”송민영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봄의 연인’의 편성을 취소해 주세요.”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대방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 송민영은 어쩐지 부끄럽고 분해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왜 웃죠?”그 사람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정식 절차를 걸쳐 편성이 결정된 드라마를, 저더러 어떻게 취소해 달라는 거죠? 제 능력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요.”“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숨겨졌던 일도 조사해 내셨는데, 배우 과거를 알아내는 일쯤이야 쉽지 않겠어요?”송민영의 말에 그는 비웃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들도 그쪽처럼 숨겨야 할 약점이 많은 줄 아나 보죠?”송민영은 그의 비웃음 따위는 무시하고 말했다. “유현진이 결혼 사실을 숨기고 대중을 속이는 건, 약점에 속하겠죠? 유현진을 폭로하시면 되겠네요.”상대방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결혼 사실을 숨긴 게 무슨 불륜을 저지르거나 남의 가정에 제삼자로 끼어든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스캔들이 된다고 그래요? 결혼 사실을 숨겼다고 작품이 보이콧되는 배우 본 적 있으세요?”송민영은 조금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럼 뭐 어쩌
송민영이 유현진을 질투하는 것은 같은 나이임에도 그녀와 달리 유현진은 순조로운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이혼을 했어도 연예계에 발을 들였고, 그녀가 가는 길엔 늘 귀인이 있었다. 첫 작품에 바로 차이현과 같은 실력 있는 감독을 만났고 또 브랜드 뉴 엔터와 같은 큰 회사의 러브콜을 받았다. 하지만 송민영은, 자기 몸을 팔아서 겨우 위로 올라갈 기회를 얻었다. 이제 겨우 새로운 작품이 대박을 터뜨리려는데, “봄의 연인”이 다크호스처럼 나타나 그녀의 길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평화의 세상”의 제작진들과 이번 드라마가 올해의 시청률 1위를 차지하면 “가화만사성”이라는 정극에 그녀를 캐스팅하기로 얘기가 되어있었다. 이것이 그녀가 “차상”을 포기하고 논란이 많은 “평화의 세상”을 선택한 이유였다. “가화만사성”의 감독은 신하리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송민영이 “평화의 세상”에 출연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가화만사성”에 출연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평화의 세상”의 시청률은 하락했고 “봄의 연인”은 오히려 상승세를 보였다. 만약 이대로 그녀가 가만히 앉아 죽기만을 기다린다면, 정말 유현진이 말한 것처럼 한 철 인기를 누리는 것이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송민영은 마음을 굳혔다. 그녀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사람을 준비해 둘게요...”유현진은 메이크업을 마쳤다. 그녀는 거울을 바라보며 귓가의 잔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한열과 눈이 마주쳤다. 한열을 “쓱” 시선을 피했다. 유현진: ...‘톱배우는 다 이런 건가?’함께 촬영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갔다. 그녀와 한열은 커플을 연기했지만 마주치는 신은 많지 않았다. 매번 촬영이 끝나면 유현진은 한열과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는 늘 도도한 얼굴로 휴대폰에 열중했다. 마치 사람을 상대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 그녀는 늘 하려던 인사를 삼켜야 했다. 한열은 곧 마지막 촬영이었고, 그가 자신을 대신해 뜨거운 물을 막아준 적도 있었지만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된 인사를 못 했
밥은 먹을 수 있지만, 상대의 남자친구는 반드시 현장에 있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한열이 멋지게 차려입고 약속 장소로 향했을 때, 그는 문을 열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강한서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유현진을 마주했다. 강한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유현진은 그의 손등을 꼬집었고 강한서는 그녀의 손등은 잡아 자신의 손바닥에 올렸다. 그러더니 천천히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겨 그에게 인사했다. “왔어요?”한열: ...“왔어요”라는 한 마디가 이상하게도 송민준에게 지배되는 두려움을 떠올리게 했다. 이 자식도 그에게 어른스러운 말투를 썼다. 한열은 강한서에게 별다른 호감이 없었다. 어쨌든 그가 보기엔 여신과 결혼했음에도 그녀를 아껴주지 않아 이혼한 남자는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들어 한열을 마주한 유현진은 눈웃음을 지으며 그를 향해 손짓했다. “앉아요. 아직 주문 안 했어요. 메뉴 보세요.”이미 한발 물러났던 한열은 머뭇거리더니 문을 닫고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여신님이랑 밥을 먹는 자리이지, 이 인간을 보러 온 게 아니야. 나무라고 생각해!’강한서와 유현진은 같은 쪽에 앉아 있었다. 한열은 의자를 끌어와 유현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유현진은 메뉴판을 그에게 밀어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태국 요리 잘해요. 팬분들이 태국 요리 좋아하신다고 해서요. 이 집은 어떤지 한번 드셔보세요.”한열이 나지막이 말했다. “전 먹는 건 안 가려요. 현진 씨 좋아하시는 거로 주문해요.”유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하나 골라보세요. 아이돌은 다이어트 심하게 하는 거 알아요. 드실 수 있는 거로 주문해요. 전 나중에 제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할게요.”그녀의 말에 한열은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진지하게 메뉴를 골랐다. 강한서는 자기 앞의 갓 스물이 넘은 선머슴 같은 아이를 훑어보고 있었다. ‘이 자식은 현진이가 자기 사촌 누나인 줄도 모르고, 날 라이벌이라고 생각하고 있네.’한열이 고른 메뉴를 보며 강한서 미간의
한열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버지한테 들은 얘기가 없는데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어요. 어머니한테 들었는데, 집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면서요.”한열: ...사실 그는 처음엔 강한서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점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저희 부모님을 아세요?”강한서가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휴대폰 너머로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한열이 눈을 부릅떴다. 정말 하연희의 목소리였다. 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하 선생님. 저예요, 한서.”“한서야, 오랜만에 전화를 다 하네. 요즘 어떠니, 바빠?”“조금요. 일이 많이 밀려서 정신이 없어요. 민준이한테 들었는데 곧 한주에 오신다면서요. 날짜는 정하셨어요?”한열이 불현듯 끼어들었다. “엄마 한주 와?”그의 목소리에 하연희가 멈칫하더니 말했다. “열이? 너 한서랑 같이 있어?”한열이 입술을 앙다물며 내키지 않는듯한 말투로 말했다. “같이 밥 먹고 있어.”“너희 둘... 어떻게 알게 된 거야?”한열이 입을 꾹 닫고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강한서가 대답했다. “한열 씨가 제 여자친구랑 같이 촬영하거든요. 촬영장에 놀러 가서 만났어요.”한열: ...그 말에 하연희는 굉장히 기뻐하며 인연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녀는 강한서와 한참 수다를 떨더니 그에게 한열을 잘 부탁한다며 나중에 한주에 가면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 전화를 끊은 강한서가 한열을 쳐다보았다. “이제 믿겠어?”한열이 입술을 삐죽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현진이 오히려 수다스럽게 굴었다. “한열 씨 어머니는 네 선생님이고 아버지는 형이라니, 어쩐지 이상한 것 같아. 나이도 안 맞는 것 같고.”강한서가 말했다. “형이 21살에 아빠가 됐어. 하 선생님은 형보다 6살 연상이시고. 내가 4살 때, 우리 집에서 3년 동안 내 과외를 해주셨거든. 생각해 보면 두 분 우리 집에서 만나신 거지.”유현진은 얼른 마음속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한열은 주량이 좋은 편이었다. 물론 유현진도 주량이 좋았지만 강한서는 술을 잘 못 마셨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량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식사하는 동안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히려 유현진이 술을 많이 마셔 얼굴이 빨개지고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동생,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 너처럼 톱스타가 되면 일 년에 얼마를 벌 수 있어?”한열: ...강한서는 태연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돈을 탐내지 않고 그저 주머니 사정만 궁금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발전한 거야.’한열이 말이 없자 유현진은 자기가 알아서 추측했다. “60억?”한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100억?”한열이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200억?”이번엔 한열이 가만히 있었다. 유현진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세금 떼고?”한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진은 바로 그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동생, 어떻게 하면 너처럼 톱스타가 될 수 있는지 알려줘. 나도 작은 거 몇 장 벌고 싶어.”한열: ...강한서는 그녀의 손을 끌어와 자신의 팔에 올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네가 빌붙을 곳은 여기야.”유현진은 그의 팔을 감싸 안으며 취기가 잔뜩 묻은 말투도 말했다. “너보다 더 많이 벌어야 해.”강한서는 그녀의 볼에 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리고? 프로포즈하러 올 거야?”유현진이 고개를 가로젓더니 한참 후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많이 벌면, 네 시간을 살 수 있어.”그녀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널 그렇게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나랑 동해 갈 시간도 없고.”그녀의 말에 강한서는 멈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한껏 풀어진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엔 부드러움이 가득했다. 그가 말했다. “올해 첫눈이 오면, 가자.”“두 주일 가도 돼?”강한서는 생각하더니 말했다. “휴가를 최대한 10날 이상으로 빼볼게.”그의 말에 유현진은 바로 기분이 좋아졌다. 만약 이때 강한서의 대답이 “네가
강한서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소개받지 않아도 돼. 게임 버그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계속 연기나 하면서 게임 투자 손실을 메꿔도 상관은 없어. 돌려막기만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 건지고 다 잃으면 송민준 놀림거리나 되겠지.”한열: ...그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제 뒷조사하셨어요?”강한서는 그의 분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품에 안긴 사람을 위로 끌어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내 여자친구 옆에 대체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그냥 쓸데없는 말 했다고 생각해.”그러더니 그는 유현진을 안고 몸을 돌렸다. 잠시 망설이던 한열이 그를 불러세웠다. “많은 사람을 고용해 봤지만 한 명도 최적화에 성공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 친구라는 분, 뭐 하는 사람이에요? 정말 할 수 있어요?”강한서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걸으면서 물었다. “네가 보기에 ‘정상에서’ 이 게임, 어떤 것 같아?”한열이 그 나이다운 대답을 했다. “쩔죠!”강한서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 게임 최적화를 계속 걔가 하고 있었어. 그 정도 수준이면, 합격인가?”한열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런 거라면 너무 합격이지.’하지만 곧 이성이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는 경계하는 표정으로 강한서를 바라보았다. “굳이 절 도와주려는 목적이 뭐죠?”“문 열어줘.”두 사람은 이미 차에 도착했고 강한서가 한열에게 눈짓했다. 한열이 차 문을 열자 강한서가 조심스럽게 유현진의 머리를 감싸며 천천히 그녀를 뒷좌석에 내려놓았다. 차 문이 닫힌 뒤, 강한서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한열을 쳐다보았다. “현진이가 널 동생으로 대하면, 넌 걔 가족이나 다름없어. 내가 널 도우면 그건 현진이를 돕는 게 되는 거지.”한열은 그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설마 저랑 경쟁해서 우위가 없을까 봐 절 매수하려는 거 아니죠?”강한서: ...그는 순간, 송민준이 한열을 쳐다보는 표정이, 지금 자신이 그를 바라보는 표정과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