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걸자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었다. 송민영은 자신의 이름을 말한 뒤 전화를 끊었고, 다시 전화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통화가 연결되었다. 휴대폰 너머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사람의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송민영은 휴대폰을 꼭 움켜쥐고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상대방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송민영이 주먹을 꽉 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부탁하신 거, 이미 시키신 대로 했어요. 그러니 이제는 그쪽이 절 도와줘야 하지 않겠어요?”휴대폰 너머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음성변조를 사용했기 때문인지 차가운 목소리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송민영이 상대방이 거절할거라 생각하고 있던 그때,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뭘 도와달라는 거죠?”송민영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봄의 연인’의 편성을 취소해 주세요.”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대방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 송민영은 어쩐지 부끄럽고 분해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왜 웃죠?”그 사람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정식 절차를 걸쳐 편성이 결정된 드라마를, 저더러 어떻게 취소해 달라는 거죠? 제 능력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요.”“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숨겨졌던 일도 조사해 내셨는데, 배우 과거를 알아내는 일쯤이야 쉽지 않겠어요?”송민영의 말에 그는 비웃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들도 그쪽처럼 숨겨야 할 약점이 많은 줄 아나 보죠?”송민영은 그의 비웃음 따위는 무시하고 말했다. “유현진이 결혼 사실을 숨기고 대중을 속이는 건, 약점에 속하겠죠? 유현진을 폭로하시면 되겠네요.”상대방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결혼 사실을 숨긴 게 무슨 불륜을 저지르거나 남의 가정에 제삼자로 끼어든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스캔들이 된다고 그래요? 결혼 사실을 숨겼다고 작품이 보이콧되는 배우 본 적 있으세요?”송민영은 조금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럼 뭐 어쩌
송민영이 유현진을 질투하는 것은 같은 나이임에도 그녀와 달리 유현진은 순조로운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이혼을 했어도 연예계에 발을 들였고, 그녀가 가는 길엔 늘 귀인이 있었다. 첫 작품에 바로 차이현과 같은 실력 있는 감독을 만났고 또 브랜드 뉴 엔터와 같은 큰 회사의 러브콜을 받았다. 하지만 송민영은, 자기 몸을 팔아서 겨우 위로 올라갈 기회를 얻었다. 이제 겨우 새로운 작품이 대박을 터뜨리려는데, “봄의 연인”이 다크호스처럼 나타나 그녀의 길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평화의 세상”의 제작진들과 이번 드라마가 올해의 시청률 1위를 차지하면 “가화만사성”이라는 정극에 그녀를 캐스팅하기로 얘기가 되어있었다. 이것이 그녀가 “차상”을 포기하고 논란이 많은 “평화의 세상”을 선택한 이유였다. “가화만사성”의 감독은 신하리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송민영이 “평화의 세상”에 출연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가화만사성”에 출연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평화의 세상”의 시청률은 하락했고 “봄의 연인”은 오히려 상승세를 보였다. 만약 이대로 그녀가 가만히 앉아 죽기만을 기다린다면, 정말 유현진이 말한 것처럼 한 철 인기를 누리는 것이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송민영은 마음을 굳혔다. 그녀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사람을 준비해 둘게요...”유현진은 메이크업을 마쳤다. 그녀는 거울을 바라보며 귓가의 잔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한열과 눈이 마주쳤다. 한열을 “쓱” 시선을 피했다. 유현진: ...‘톱배우는 다 이런 건가?’함께 촬영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갔다. 그녀와 한열은 커플을 연기했지만 마주치는 신은 많지 않았다. 매번 촬영이 끝나면 유현진은 한열과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는 늘 도도한 얼굴로 휴대폰에 열중했다. 마치 사람을 상대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 그녀는 늘 하려던 인사를 삼켜야 했다. 한열은 곧 마지막 촬영이었고, 그가 자신을 대신해 뜨거운 물을 막아준 적도 있었지만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된 인사를 못 했
밥은 먹을 수 있지만, 상대의 남자친구는 반드시 현장에 있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한열이 멋지게 차려입고 약속 장소로 향했을 때, 그는 문을 열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강한서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유현진을 마주했다. 강한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유현진은 그의 손등을 꼬집었고 강한서는 그녀의 손등은 잡아 자신의 손바닥에 올렸다. 그러더니 천천히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겨 그에게 인사했다. “왔어요?”한열: ...“왔어요”라는 한 마디가 이상하게도 송민준에게 지배되는 두려움을 떠올리게 했다. 이 자식도 그에게 어른스러운 말투를 썼다. 한열은 강한서에게 별다른 호감이 없었다. 어쨌든 그가 보기엔 여신과 결혼했음에도 그녀를 아껴주지 않아 이혼한 남자는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들어 한열을 마주한 유현진은 눈웃음을 지으며 그를 향해 손짓했다. “앉아요. 아직 주문 안 했어요. 메뉴 보세요.”이미 한발 물러났던 한열은 머뭇거리더니 문을 닫고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여신님이랑 밥을 먹는 자리이지, 이 인간을 보러 온 게 아니야. 나무라고 생각해!’강한서와 유현진은 같은 쪽에 앉아 있었다. 한열은 의자를 끌어와 유현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유현진은 메뉴판을 그에게 밀어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태국 요리 잘해요. 팬분들이 태국 요리 좋아하신다고 해서요. 이 집은 어떤지 한번 드셔보세요.”한열이 나지막이 말했다. “전 먹는 건 안 가려요. 현진 씨 좋아하시는 거로 주문해요.”유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하나 골라보세요. 아이돌은 다이어트 심하게 하는 거 알아요. 드실 수 있는 거로 주문해요. 전 나중에 제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할게요.”그녀의 말에 한열은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진지하게 메뉴를 골랐다. 강한서는 자기 앞의 갓 스물이 넘은 선머슴 같은 아이를 훑어보고 있었다. ‘이 자식은 현진이가 자기 사촌 누나인 줄도 모르고, 날 라이벌이라고 생각하고 있네.’한열이 고른 메뉴를 보며 강한서 미간의
한열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버지한테 들은 얘기가 없는데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어요. 어머니한테 들었는데, 집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면서요.”한열: ...사실 그는 처음엔 강한서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점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저희 부모님을 아세요?”강한서가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휴대폰 너머로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한열이 눈을 부릅떴다. 정말 하연희의 목소리였다. 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하 선생님. 저예요, 한서.”“한서야, 오랜만에 전화를 다 하네. 요즘 어떠니, 바빠?”“조금요. 일이 많이 밀려서 정신이 없어요. 민준이한테 들었는데 곧 한주에 오신다면서요. 날짜는 정하셨어요?”한열이 불현듯 끼어들었다. “엄마 한주 와?”그의 목소리에 하연희가 멈칫하더니 말했다. “열이? 너 한서랑 같이 있어?”한열이 입술을 앙다물며 내키지 않는듯한 말투로 말했다. “같이 밥 먹고 있어.”“너희 둘... 어떻게 알게 된 거야?”한열이 입을 꾹 닫고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강한서가 대답했다. “한열 씨가 제 여자친구랑 같이 촬영하거든요. 촬영장에 놀러 가서 만났어요.”한열: ...그 말에 하연희는 굉장히 기뻐하며 인연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녀는 강한서와 한참 수다를 떨더니 그에게 한열을 잘 부탁한다며 나중에 한주에 가면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 전화를 끊은 강한서가 한열을 쳐다보았다. “이제 믿겠어?”한열이 입술을 삐죽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현진이 오히려 수다스럽게 굴었다. “한열 씨 어머니는 네 선생님이고 아버지는 형이라니, 어쩐지 이상한 것 같아. 나이도 안 맞는 것 같고.”강한서가 말했다. “형이 21살에 아빠가 됐어. 하 선생님은 형보다 6살 연상이시고. 내가 4살 때, 우리 집에서 3년 동안 내 과외를 해주셨거든. 생각해 보면 두 분 우리 집에서 만나신 거지.”유현진은 얼른 마음속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한열은 주량이 좋은 편이었다. 물론 유현진도 주량이 좋았지만 강한서는 술을 잘 못 마셨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량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식사하는 동안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히려 유현진이 술을 많이 마셔 얼굴이 빨개지고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동생,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 너처럼 톱스타가 되면 일 년에 얼마를 벌 수 있어?”한열: ...강한서는 태연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돈을 탐내지 않고 그저 주머니 사정만 궁금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발전한 거야.’한열이 말이 없자 유현진은 자기가 알아서 추측했다. “60억?”한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100억?”한열이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200억?”이번엔 한열이 가만히 있었다. 유현진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세금 떼고?”한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진은 바로 그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동생, 어떻게 하면 너처럼 톱스타가 될 수 있는지 알려줘. 나도 작은 거 몇 장 벌고 싶어.”한열: ...강한서는 그녀의 손을 끌어와 자신의 팔에 올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네가 빌붙을 곳은 여기야.”유현진은 그의 팔을 감싸 안으며 취기가 잔뜩 묻은 말투도 말했다. “너보다 더 많이 벌어야 해.”강한서는 그녀의 볼에 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리고? 프로포즈하러 올 거야?”유현진이 고개를 가로젓더니 한참 후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많이 벌면, 네 시간을 살 수 있어.”그녀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널 그렇게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나랑 동해 갈 시간도 없고.”그녀의 말에 강한서는 멈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한껏 풀어진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엔 부드러움이 가득했다. 그가 말했다. “올해 첫눈이 오면, 가자.”“두 주일 가도 돼?”강한서는 생각하더니 말했다. “휴가를 최대한 10날 이상으로 빼볼게.”그의 말에 유현진은 바로 기분이 좋아졌다. 만약 이때 강한서의 대답이 “네가
강한서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소개받지 않아도 돼. 게임 버그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계속 연기나 하면서 게임 투자 손실을 메꿔도 상관은 없어. 돌려막기만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 건지고 다 잃으면 송민준 놀림거리나 되겠지.”한열: ...그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제 뒷조사하셨어요?”강한서는 그의 분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품에 안긴 사람을 위로 끌어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내 여자친구 옆에 대체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그냥 쓸데없는 말 했다고 생각해.”그러더니 그는 유현진을 안고 몸을 돌렸다. 잠시 망설이던 한열이 그를 불러세웠다. “많은 사람을 고용해 봤지만 한 명도 최적화에 성공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 친구라는 분, 뭐 하는 사람이에요? 정말 할 수 있어요?”강한서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걸으면서 물었다. “네가 보기에 ‘정상에서’ 이 게임, 어떤 것 같아?”한열이 그 나이다운 대답을 했다. “쩔죠!”강한서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 게임 최적화를 계속 걔가 하고 있었어. 그 정도 수준이면, 합격인가?”한열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런 거라면 너무 합격이지.’하지만 곧 이성이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는 경계하는 표정으로 강한서를 바라보았다. “굳이 절 도와주려는 목적이 뭐죠?”“문 열어줘.”두 사람은 이미 차에 도착했고 강한서가 한열에게 눈짓했다. 한열이 차 문을 열자 강한서가 조심스럽게 유현진의 머리를 감싸며 천천히 그녀를 뒷좌석에 내려놓았다. 차 문이 닫힌 뒤, 강한서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한열을 쳐다보았다. “현진이가 널 동생으로 대하면, 넌 걔 가족이나 다름없어. 내가 널 도우면 그건 현진이를 돕는 게 되는 거지.”한열은 그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설마 저랑 경쟁해서 우위가 없을까 봐 절 매수하려는 거 아니죠?”강한서: ...그는 순간, 송민준이 한열을 쳐다보는 표정이, 지금 자신이 그를 바라보는 표정과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열이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형이 저 인간한테 전화했어요?”매니저는 당연히 인정하지 않았다. “한성 그룹의 도련님을, 내가 무슨 수로 연락해?”한열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팔이 밖으로 굽는 이 매니저 말고는, 그가 여신과 “데이트”한다는 사실을 발설할 사람은 없었다. “그럼 저 인간이 어떻게 온 건데요?”매니저가 말했다. “네가 그 사람 전 와이프를 보는 눈빛을 그 사람이 모를 것 같아? 눈이 먼 것도 아니고. 계속 널 경계하고 있었어. 네가 전에 현진 씨랑 배드신 찍을 때, 현진 씨가 왜 계속 NG를 냈는지 알아?”그의 말에 한열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를 모르는 것이 분명한 얼굴이었다. 그의 매니저는 안쓰럽다는 말투로 말했다. “전남편이 두 사람 머리 위에서 반사판을 들고 서 있었잖아! 정말 전남편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왜 그 사람 앞에서 너한테 다가가지 못했겠어?”멍해진 한열은 어렴풋이 마스크를 쓰고 있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남자의 눈이 천천히 강한서의 눈과 겹쳐 보였다. 한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그제야 그날의 유현진이 왜 그렇게 어색하게 행동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젠장! 개 같네!’차 안. 유현진은 진정하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강한서가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유현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대답했다. “목 아래에 뭐가 있어.”강한서는 이상하다는 듯 손을 뻗어 만져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그러더니 그는 유현진을 달래며 말했다.“꺼냈어. 누워.”유현진은 그제야 다시 누웠다. 하지만 곧 다시 튀어 오르듯 일어나 앉아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있어.”강한서는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찾아보았다. 하지만 뭐가 있다는 것인지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유현진이 세 번째로 목 아래에 뭔가가 있다고 말했을 때, 강한서는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는 자신의 바지 주머니를 만지더니 그 안에서 반지 하나를 꺼냈다.바로 이것이 유현진이 계
손님이 가게로 들어오는 소리에 그는 그제야 리모컨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물건 보러 오셨어요, 아니면 픽업하러 오셨어요?”유현진이 말했다. “악세서리 보러 왔어요. 사장님, 가게에 있는 금반지 다 보여주세요. 저희 반지 좀 보려고요.”알겠다고 대답한 가게 사장이 유리 뚜껑이 있는 악세서리 함을 두 사람 앞에 하나씩 꺼냈다. 한번 쓱 훑어보던 강한서는 이 가게의 스타일이 의외로 괜찮다는 것을 발견했다. 많은 디자인은 시중에 없는 것들이었다. 심플한 디자인도 있고 빈티지 스타일도 있었다. 아무리 간단한 무늬라도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유현진은 카운터에 엎드려 꼼꼼하게 고르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디자인이 그녀는 실망스러운 것 같았다. 사장님이 물었다. “두 분 어떤 디자인 원하세요. 저한테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 만약 원하는 디자인이 없으면 저희가 제작도 해드리거든요. 사지만 보여주시면 할 수 있어요.”유현진이 말했다. “깔끔하고 심플한 커플링이요.”유현진의 말에 사장님이 세 가지 디자인을 꺼내 유현진에게 건넸다. “이건 어떠세요?”고개를 숙여 반지를 확인하던 유현진의 눈에 반쪽은 광택을 내고 다른 반쪽은 스크럽이 있는 반지가 들어왔다. 반지의 가운데는 구름 모양으로 조각을 내었다. 간단하면서도 느낌 있는 디자인이었다. 그녀가 급히 사장님에게 물었다. “남자 반지도 있나요?”“있어요.”사장님은 대답하며 한 쌍의 반지를 모두 꺼냈다. “만약 반지 사이즈가 맞지 않으시면 제가 손님 사이즈에 맞게 제작해 드릴게요.”유현진은 남자 반지를 꺼내더니 강한서의 손을 끌어와 그의 손가락에 끼워보았다. 공교롭게도 그의 손가락에 꼭 들어맞았다. 고개를 숙여 반지를 보던 강한서가 막 입을 열려는데, 유현진이 다른 한 쌍을 자기 손가락에 끼웠다. 강한서: ...‘이렇게 무드가 없다고?’‘약혼반지를 그냥 이렇게 대충 낀다고?’“얼마예요?”유현진이 카운터에 몸을 기대며 사장님에게 물었다. 사장님은 반지 무게를 재더니 가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