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TV를 보다 다시 유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놀란 표정을 짓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정말... 닮았네.”“그렇지?”유현진은 눈웃음을 예쁘게 지으며 말했다.“이건 나랑 친구가 같이 찍은 사진이야. 그 친구가 그때 우리 둘이 함께 찍으면 누구도 못 알아볼 거라고 했었거든.”“...”그는 속으로 생각했다.‘술 취한 거 아니었나? 왜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거지? 얼굴도 발그레하지 않고 정신도 말짱한 것 같은데, 착각인가?'그러나 사장님은 이미 그녀의 장난에 속아 넘어간 것 같았다.“정말이네요. 눈은 아주 똑 닮았는데 입이 살짝 다른 것 같네요.”유현진은 바로 드라마를 찢고 나온 중전의 표정을 지으며 다시 사장님에게 물었다.“이러면은요?”사장님은 바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너무 닮았네요.”유현진은 가까이 다가가 사장님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사장님, 좀 싸게 해주세요. 1g에 1500원이라도 깎아주세요. 그럼 제가 같이 사진 찍어드릴게요. 나중에라도 만약 저 여배우가 뜨기라도 한다면 저와 함께 찍은 사진은 대문짝만하게 내걸면 되잖아요. 그러면 분명 많은 사람이 연예인 다녀갔다던 가게라면서 사진 찍으러 올 거예요. 손님도 많아지고 직접 다른 사람에게 광고 홍보를 의뢰하는 것보다 더 나을걸요? 심지어 광고비도 한 푼도 안 쓰게 되잖아요.”사장님은 눈썹을 꿈틀거렸다.“나를 속이는 거라면 그만둬요. 내가 정말로 연예인 이름을 걸고 사진을 내걸면 그 연예인이 날 초상권 침해로 고소하면 벌금만 광고비보다 더 나갈 거예요.”“에이, 사장님은 저랑 사진을 찍으시는 거잖아요. 사진에 이름도 안 써뒀는데 어떻게 알고 고소를 하겠어요? 그럼 전 그 배우랑 닮았으니까 저도 초상권을 침해한 거네요, 아닌가요? 이 얼굴이 저 배우만 쓸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아무리 배우 측에서 끝까지 고소한다고 해도 사람들의 관심만 더 받게 될 뿐 초상권 침해로 판결받을 수 없을 거예요.”너무나도 기세등등하게 말하는 유현진에 사장님은 완벽하게
“그래도 금이 더 가치가 있잖아. 네가 전에 사준 결혼반지도 작년에 금은방으로 가서 물어봤더니 2억 좀 넘게 쳐주더라고. 그때 우리가 6억 주고 산 거잖아. 가격 차이가 너무 나. 그리고 네가 결혼식 때 선물한 금팔찌는 이번 해 금값이 오르면서 전보다 200만 원이나 올랐어! 그래도 금이 다이아보다 더 안전하잖아. 만약 네가 어느 날 갑자기 파산이라도 하게 되면 우린 그 금으로 그래도 생활할 정도는 될 거야.”“...”역시 그녀였다.그는 유현진에게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는 줄 알았지만 결국은 현실적인 이유였다.유현진의 마음속에는 역시 돈이 일 순위를 차지하고 있었다.“그럼 왜 하필 저 가게로 온 건데?”강한서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걸으면서 물었다.방금 그 가게의 위치는 보통 사람이라면 찾기 힘든 곳에 있었다. 유현진이 그런 가게를 단번에 찾아갔다는 것은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소리였다.역시 그의 예상대로 유현진이 말했다.“학교 다닐 때 미주가 아주머니한테 어버이날 선물을 사드리려고 했거든. 근데 걔가 유명한 주얼리 가게들은 브랜드값이라고 추가한다 하더라고. 그래서 나를 데리고 이리저리 쏘다니면서 가격을 비교해 보고 결국 아까 우리가 갔던 그 주얼리 가게를 선택하게 된 거야. 그리고 거기서 귀걸이 한 세트를 샀지.”“사실 나도 예전에 그 가게에서 목걸이 하나를 눈여겨보고 있었거든. 줄은 얇고 약간 미니 뱀 같은 디자인이었나? 하여튼 반짝반짝 빛도 나고 예뻤어. 엄마한테 선물하고 싶었지. 하지만 그때는 나한테 돈이 없었거든. 아빠한테... 아니 유상수한테 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어. 달라고 하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엄청 뭐라 하거든.”“여하간에 그 사람은 식물인간이 된 사람한테 드는 병원비만으로도 부담이 되고 스트레스가 되었으니 당연히 더는 선물 같은 것도 엄마한테 선물하지 않았거든. 난 돈이 없으니 아르바이트로 쇼핑몰 모델 일을 하면서 하루에 10만 원씩 받았었어. 레이싱 모델은 하루에 20만 원에서 25만 원 정도 버는데 난 운 좋게
강한서는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너무나도 슬프게 우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그녀는 울음소리를 최대한 참으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 덕에 울음소리는 별로 크지 않았지만 흐느낄수록 더욱 세게 떨리는 어깨에 보는 사람도 가슴이 아프게 만들었다.그를 배웅하던 담당자가 그에게 그녀가 겪은 일을 말해주었다.그녀가 바로 방금 어떤 남자에게 성추행을 당한 레이싱 모델이었고 상대에게 뺨까지 맞았다는 것이었다.그녀의 보호자를 불러오긴 했지만, 그녀의 편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녀가 창피하다며 급여도 못 받게 했다고 했다. 그래서 아마 많이 속상한 듯했다.강한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모며 물었다.“알바비가 얼마죠?”옆에 있던 담당자가 솔직하게 말해주었다.6날 전부 채우면 160만 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오늘 사건으로 주최 측에 영향을 주게 되어 배상금만 160만 원이 훌쩍 넘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가 알바비를 못 받을 확률이 훨씬 더 높았고 그녀에게 배상금을 요구하지 않은 것만 해도 이미 많이 봐줬다는 뜻으로 말했다. 여하간에 사람은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담당자의 말을 들은 강한서는 그저 한 가지 궁금한 점만 물었다.“만약 담당자님이 이곳처럼 뻥 뚫린 환경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담당자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내 황당하기 그지없는 회사의 규정만을 줄줄이 읊었고, 결론은 회사의 이미지를 지키겠다는 뜻이었다.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여자였던 담당자는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면서 그를 밀어내려는 태세를 보였다.강한서는 그녀의 몸에 손을 대기도 전에 허공에서 손을 멈추었다. 이내 의아한 눈길로 여담당자를 보면서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여자가 자신을 보호하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우선으로 고려하지 않았다면 회사의 이미지도 그럼 그저 우스갯소리가 되겠네요.”강한서의 말 때문인지, 아니면 VIP 고객
유현진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내가 취해 있을 때, 나한테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짓이라도 하려고?”강한서는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네가 맨정신일 때 너랑 형언할 수 없는 짓을 하는 걸 더 좋아해.”“... 10점 감점이야.”“...”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아직도 점수가 감점되는 거야? 그거 나랑 정식으로 사귀게 되면 없어지는 거 아니었어?”“내가 언제부터 너랑 정식으로 사귀고 있었는데?”유현진은 한 입으로 두말하기 시작했다.“넌 아직 인턴 기간이라고. 정직원으로 승급하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너한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감정해야지.”“...”‘아니, 내가 지금 연애도 회사 출근하는 형식으로 해야 하는 거야?'강한서는 순간 말하고 싶지 않아졌다.유현진은 그의 손을 잡으며 앞으로 먼저 걸어갔다. 그러다 갑자기 입을 열었다.“유상수가 결혼식 올린대.”강한서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유현진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아까 만나기 전에 이미 나한테 연락이 왔었거든. 시간과 날짜를 이미 다 정해뒀다고 하더라. 다음 주 주말에 할거래.”강한서는 순간 정신이 들었다. 어쩐지 오늘 밤의 유현진은 평소보다 더 감성적이었고 말끝마다 유상수를 언급하고 있었다.“가려고?”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가야지. 그렇게 직접 연락까지 했는데 가야지. 난 내 두 눈으로 직접 그 두 사람이 망하는 꼴을 볼 거야.”강한서는 입술을 틀어 물더니 몇 초 뒤에야 나직하게 말했다.“너 혹시 네가 어머님이랑 안 닮았다는 생각 해본 적 있어?”“난 외할아버지를 닮았어.”유현진은 자신 있게 답했다.“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우리 외할아버지께서 젊었을 때 아주 미남이셨다고 했어. 그러니 분명 한 세대를 뛰어넘고 미모가 유전된 거지.”“... 난 네가 외할아버님이랑도... 안 닮았다고 생각해.”“넌 전에 나랑 송가람 씨도 헷갈렸잖아. 괜찮아, 정상이야 너.”강한서의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내가 말했잖아. 잘못 본 게 아니라고.”유현진은
유현진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뻔뻔한 얼굴로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코어 힘을 좀 더 키우면 되겠어. 다른 건 그래도 봐줄 만해.”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도망치려 했다.그러나 강한서는 그녀를 도망치게 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녀의 허리를 꽈악 끌어안더니 이내 세면대 위에 그녀를 앉혔다.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나온 덕에 욕실 안은 수증기로 가득 찼고 유현진의 등 뒤에 있던 거울도 뽀얗게 수증기가 한층 생기게 되었다. 강한서는 팔을 거울로 턱 받치고 고개를 떨군 채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선생님,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예전에 그런 죄도 있었거든요, 음란죄라고. 선생님 같은 사람들이 그런 죄를 저지르죠. 플러팅은 시도 때도 없이 해놓고 도망가 버리는 무책임한 사람 말이에요. 가볍게는 3년, 심하게는 10년 징역이라고 하더군요.”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고 샤워기에서 흐르는 물소리와 섞여 아주 섹시하게 들려왔다.유현진은 원래 고개를 돌려 그의 뜨거운 시선을 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순간 강한서가 알몸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시 고개를 드니 뜨거운 그의 시선과 마주하게 되었다. 유현진은 순간 눈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평소와 같은 어투로 말했다.“헛소리야. 그거 네가 만들어 낸 거지? 나도 알아,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한쪽이 거부하면 성추행이라는 거.”강한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더 바짝 다가가 그녀의 귀를 살짝 깨물었고 한 글자씩 느릿하게 말했다.“97년 때 음란죄가 취소되었어. 그때의 선생님은 나이가 아직 어렸으니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하지만 난 법을 지키는 착한 시민으로서 선생님이 이렇게 자꾸 플러팅해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지. 그러니까... 벌을 받아야지...”그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고 그의 입술이 곧 그녀의 얼굴에 닿을 정도였다.강한서는 평소처럼 진지하게 말했지만, 유현진은 다소 낯 뜨거운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매력을 모두 꺼내 보여주고 있었기에 유현진은 안 넘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다 유현진은 결국 휴대폰을 들고 이준에게 연락하게 되었다.이준은 마침 샤워를 마치고 나와 대본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걸려 온 유현진의 전화에 그는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여하간에 늦은 시각이었기에 급한 일이 아니라면 유현진은 그에게 연락하는 법이 없었다.이윽고 그는 통화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이준 씨. 저예요.”유현진은 다소 우물쭈물하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이준은 눈치를 채지 못했고 오히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인기가 많아져서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잠이 안 와요?”“...하하, 이준 씨 참 재밌는 분이시네요.”유현진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어색하게 말했다.이준은 예전에 그녀에게 놀림을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이내 소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유현진이 말했다.“아, 별건 아니에요. 그냥 전에 촬영할 때 입은 중전마마 의상이 있을까요?”“그건 아마 소품팀에서 관리하고 있을 거예요. 왜 그래요?”유현진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아, 그래요. 그 의상 세트 혹시 촬영팀에서 팔기도 하나요? 기념으로 사고 싶어서요.”이준은 멈칫했다.“그 의상 세트는 한복의 장인께서 직접 한땀 한땀 만드신 거라 2000만 원은 족히 넘을 거예요. 현진 씨 출연료가 얼마 안 되는 거로 알고 있는데, 2000만 원을 주고 기념으로 집에다 전시하다니요.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되신 건 아니에요?”유현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하하, 그럼 제가 안 물어본 거로... 강한서! 내 휴대폰 이리 줘!”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더니 휴대폰 너머로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6000만 원을 드리죠. 가격에 만족하신다면 제가 당장 사람을 시켜 가져오라고 할게요.”유현진은 발꿈치를 들며 휴대폰을 빼앗으려 애를 썼다.“강한서! 이 호구야! 그 의상은 2000만 원이야. 돈이 너무 많아서 왜, 어디다 써야 할지 모르겠어?”이준이 멈칫하더니 바로 답했다
유현진은 여전히 거부했다.“다 같은 옷인데 뭐가 볼 게 있다고 그래?”강한서는 그녀를 빤히 보더니 휴대폰을 들고는 누군가에게 연락했다.유현진은 그가 연락하고 있는 상대가 누군지 궁금해질 무렵, 강한서는 스피커폰으로 전환했고 주강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한서?”“!!!”유현진은 생각했다.‘이 자식이 지금 뭘 하는 거야?'강한서는 아주 태연하게 “응.”이라고 대답했다.주강운의 목소리는 다소 피곤하게 들려왔다.“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 이렇게 늦은 시각에 무슨 일이야?”강한서는 느긋하게 말했다.“성우가 이번 주에 모임을 만들겠다고 하던데, 너도 지난번에 데리고 온 여자친구를 데려와야 할 것 같아. 괜찮겠냐?”“...”유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강운은 뜸을 들이며 답했다.“너희 둘은 모임을 할 때 파트너를 데리고 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나?”강한서는 표정 변화 없이 뻔뻔하게 한성우에게 뒤집어씌웠다.“성우가 네 여자친구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전에 진우 씨가 결혼할 때 제대로 인사를 못 했다면서 말이야.”유현진의 안색이 어두워졌고 얼른 그에게 전화를 끊으라는 사인을 보냈다.강한서는 의상 세트를 가리키며 알아서 선택하라는 의미의 눈빛을 보냈다.유현진은 바로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주강운은 입술을 틀어 물며 말했다.“최근에 업무로 많이 바쁘다고 했어. 아마 함께 갈 수는 없을 거야.”강한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음악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았나? 음악 선생님인데 바쁠 수가 있나? 차현진 씨 설마 우리랑 만나기 싫어서 핑계를 대는 거 아니냐?”주강운은 순간 조용해졌다.“내가 이따 물어볼게.”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유현진은 드디어 큰 소리를 내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강한서는 몸을 뒤로 기대며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원하는 보상을 못 받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라도 해야지 않겠어? 그래야 나도 공평함을 느끼지.”“그래서 주 변호사님을 난처하게 만들겠다는
“그래요?”배우로 자신의 연기력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주강운에 유현진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일부러 듣기 좋은 말만 골라 말해주시는 건 아니죠?”주강운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 변호사 사무실로 오게 되면 아실 거예요. 우리 사무실 직원은 전부 현진 씨 팬이거든요.”유현진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강운 씨도요?'주강운도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1호 팬일걸요. 제가 직원들과 현진 씨 드라마와 야근을 선택하라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직원들은 전부 현진 씨 드라마가 재밌다며 드라마를 선택했어요.”유현진은 즐거운 듯 웃었다. 그녀가 이어서 말하려던 순간 허리 부근에서 손길이 느껴지더니 강한서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는 진득하게 그녀의 목에 키스했고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아!'하며 소리를 내게 되었다. 그녀는 하마터면 음 이탈로 닭과 같은 목소리를 낼 뻔했다.주강운이 멈칫하더니 바로 물었다.“현진 씨? 괜찮아요?”유현진은 강한서의 머리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를 떼어낼 생각이었지만 강한서는 오히려 더 찰싹 들러붙으며 입술을 여전히 그녀의 목에 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손을 움직이며 그녀의 옷 속에 쑥 넣었다.뜨거운 그의 손길이 그녀의 살결에 닿자 유현진은 바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강한서의 손을 꽉 잡고 눈을 부릅뜬 채 입 모양만 벙긋벙긋 냈다.“미쳤어?”강한서는 그만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계속 그녀의 목에 키스하다 어느덧 그의 입술은 빗장뼈까지 내려오게 되었고 살짝 이로 깨물기도 했다.유현진은 이런 자극에 아주 약한 사람이었고 숨소리마저 야릇하게 변해갔다.바로 이때, 휴대폰 너머로 주강운의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현진 씨? 괜찮아요? 왜 말이 없어요?”“아, 그, 그게... 아니,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유현진은 살짝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더는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나중에 다시 연락해요.”말을 마친 그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휴대폰을 대충 아무 곳에다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
“넌 원래 은서한테 엄격하게 굴었잖아. 네가 나쁜 사람 역할을 하는 건 네 이미지에도 어울려. 난 평소에 은서한테 너무 따뜻하게 대해줘서 지금 엄하게 얘기해도 내 말은 안 믿을 거야. 그러니까 나쁜 사람은 역시 네가 해야 해. 한 번 더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강한서가 대답할 새도 없이 등 뒤로 갑자기 은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모~”“응.”얼른 대답한 한현진이 몸을 돌리자 은서가 동그랗고 큰 눈을 반짝이며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두 분 연애하시는데 방해한 거예요?”한현진: ...“그건 아닌데...”“그럼 뭐하고 계셨어요?”한현진이 강한서에게 얼른 시작하라며 눈짓을 보냈다. 강한서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현진을 배신했다. “은서야, 현진 이모가 은서한테 할 얘기가 있대.”한현진: ...은서가 한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가 눈빛으로 할 얘기가 뭐냐며 묻고 있었다. 한현진은 속으로 강한서를 의리도 없는 놈이라며 욕을 지껄였다. 단순하고 맑은 은서의 눈을 마주한 한현진은 그 어떤 훈육의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의 속도 모르고 마음 독하게 먹으라며 뒤에서 슬며시 한현진의 허리를 다독였다. 입술을 달싹인 한현진은 계획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그게... 사실은 별 거 아냐. 저녁에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했어.”강한서:...은서가 눈웃음을 지었다. “수제비요! 할머니가 이따가 만드는 법 배워주신다고 하셨어요. 이모가 새우 수제비를 제일 좋아한다면서요. 제가 배워서 만들어드릴게요.”마음이 약해진 한현진은 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 맞다. 잠깐만 기다려요.”은서가 말하고 총총 달려갔다. 어리둥절한 한현진을 뒤로 한 채 잠시 후, 은서가 저금통을 안고 돌아왔다. 아이는 작은 돼지 저금통을 한현진 앞으로 들어 올리며 빨간 얼굴로 말했다. “현진 이모. 혹시 이 돈...”주머니에서 돈다발 하나를 꺼내 한현진에게 꺼낸 은서가
의사로서의 기본적인 도덕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부하 직원을 잘 대할 리가 없었다. 돈만 충분히 준다면 황 닥터의 죄증을 대신 비행기에 실어줄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황 닥터는 외국인이었기에 이 곳에서 불법을 저지른다고 해도 결국 본국으로 송환되어 벌의 제재를 받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황 닥터를 처단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황 닥터의 입국이 금지 당한다면 송가람은 다른 방법으로 약을 구매할 것이다. 그때가 바로 송가람을 일망타진할 좋은 기회였다. 한현진이 알아차렸다는 듯 말했다. “결국은 돈지X로 해결한 거네.”멈칫하던 강한서가 갑자기 말했다. “너 방금 싸울 때 욕했지?”한현진이 눈을 깜박였다. “아닐걸.”“했어!”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았다. “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잊었어?”‘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데?’‘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해주고, 또 뭐가 있더라? 기억이 안 나네.’어제 들었던 태교 수업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한현진은 수면으로 채웠다. 강한서는 본인의 뱉은 말을 지켜 거금을 들여 태교 선생님을 고용해 1 대 1로 집에서 한현진이 수업을 받도록 했다. 유난히 나긋하고 부드러운 선생님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임산부와 아이들을 상대하는 본인의 직업과 찰떡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목소리에 졸음이 솔솔 쏟아졌다. 수업하는 동안 한현진은 졸음이 몰려와 몽롱한 정신 상태를 유지했다. 학창시절 제일 싫어하는 수학 시간에도 이렇게 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노트를 정리했다. 한현진이 하품을 하며 강한서에게 물었다. “기억력도 좋으면서 노트도 작성하는 거야?”그때의 강한서가 뭐라고 했더라?“아무리 좋은 기억력도 작성된 기록보다는 못한 법이니까.”그 한 마디가 태교 수업 중 유일하게 한현진의 기억에 남은 말이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전부 한쪽 귀로 들어가 다른 한쪽으로 흘러나간 탓에 단 한 글자에 머리에 남지 않았
막장 소설을 거부하던 강한서는 강박적으로 소설을 듣기 시작해 결국 소설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니, 왜 막장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하나 같이 멍청하거나 무지하게 구는 거야? 게다가 상남자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틈만 나면 여자 주인공에게 소리나 지르면서, 왜 그러는 거야?”“남자 주인공 미친 거 아냐? 억지로 여자 주인공이 신장 기부를 하게 하다니. 조직 폭력배야?”“이쪽 세계에서는 신고를 하면 판결이라도 받아?”“대체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 여자 주인공이 밀친 거라는 서브 여주인공 말을 믿어? CCTV를 찾아보는 건 불법인가 보지?”“현진아, 지금 나 미안하라고 들려주는 거야?”“난 못 해. 이 소설에 나오는 인간들은 전부 미친 거 같아. 대체 여자 주인공은 저런 남자를 왜 좋아하는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미쳤든 아니든, 소설처럼만 하면 돼. 순진한 척 하는 여우는 자기를 감싸주는 남자에겐 껌뻑 죽는 법이니까.”강한서는 전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머리는 몸보다 성실했다. 일부러 배우지 않아도 그의 머리는 이미 모든 것을 저장했다. 막장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대사를 완벽히 재현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표정은 여전히 어색했지만 다행히 송가람은 표정까지는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다. 아니라면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송가람을 보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는 강한서의 모습을 들켜버렸을 것이다. 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너에게 소설을 들려준 내 노력이 헛되진 않았어. 진보가 빠른걸? 뭔가 유용한 팁이라도 있을까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말했다. “소리를 잘 지르면 돼.”그 말에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1층의 베란다 난간에 기댄 채 강한서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리 와.”“그렇게 나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강한서는 불만스럽게 투덜대면서도 한현진에게로 향했다. 베란다 밖에는 재스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한현진은 난간 너머로 강한서의 목을 끌어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