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보다 일찍 도착한 유건 일행은 이미 말을 타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주정빈과 유강석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유건은 시연을 주시하며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를 본 부지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왜 갑자기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말을 타자고 하나 했더니, 알고 보니 여기 우리 고 대표님의 아내가 계시네.” 유건은 지하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다 멈췄다. 지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 아내가 방이 없어서 곤란해하는 거 보고도 안 도와줄 거야?” ‘도와주라고?’ 유건의 입술에 미소가 살짝 번졌지만, 곧 자리를 떴다.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옆에 딴 남자가 이미 있지.’ “시연아.” 그때, 은범이 차를 주차하고 시연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시연은 입을 삐죽 내밀며 방을 예약하지 못한 일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마. 작은 문제야.” 은범은 우주를 그녀에게 맡기고 말했다. “내가 해결할게. 걱정하지 마.” 그가 나서자마자, 문제는 금세 해결되었다. 은범은 두 장의 방 키를 들고 시연에게 흔들며 말했다. “다 됐어.” 그는 짐을 들고 설명했다. “내가 VIP 카드가 있어서 사전 예약 없이도 가능해.” 시연이 여전히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은범은 부드럽게 말했다. “왜 화가 나 있어?” 시연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성빈이도 못 오게 됐어...” 알고 보니 그 일 때문에 화가 난 거였다. “괜찮아.” 은범은 미소 지으며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우리는 우주를 위해 온 거잖아. 우주가 기뻐하는 게 가장 중요해. 나머지는 사소한 문제야.” 시연은 그의 말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미소를 지었다. “응.”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분위기가 훈훈했다. “우주 손 잘 잡고, 방에 짐부터 놓으러 가자.” “그래.” 이 광경을 목격한 지하는 깜짝 놀라며 유건을 쳐
그 순간, 시연은 유건의 눈빛 속에 순식간에 지나가는 감정을 알아차렸다.‘아마 내 착각이겠지.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내가 할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 유건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뭔데?” 남자의 커다랗고 잘생긴 얼굴이 눈앞에 다가오자, 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잠시 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시선을 고정하고 입을 열었다. “저한테 더 이상 잘해주지 마세요.” 예전에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감정이 오갔던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시연도 한때 잠깐 유건 때문에 흔들렸었지만, 현실이 그녀를 깨우쳐주었다. ‘이 남자는... 장소미 남자 친구야.’‘내가 이혼하지 않는 건 단지 장소미 일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잖아!’ ‘그런데도 만약 내가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결국 상처받는 건... 결국 나인데...’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야. 그런 실수는 하면 안 돼.’ “뭐라고?” 유건의 미소가 사라지고, 눈빛이 어두워졌다. “무슨 뜻이야?” 시연은 고개를 조금 숙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날 지하철역 입구에서 하려다 못한 말인데요... 오늘 제대로 말할게요. 앞으로 저한테 잘해주지 마세요. 조금이라도요. 저... 저한테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시연의 머리 위에 늘 떠 있다가 언젠가 떨어질 것 같던 위태로운 칼이 드디어 떨어진 듯했다. 비록 자기 몸에 닿아 아프긴 했지만, 더는 그 칼이 떨어질까 늘 불안해하며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는 알 수 없는 해방감도 있었다. ‘나는 받은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이 사람이 계속 나한테 잘해주면 자꾸 이 사람이 장소미의 남자 친구라는 사실을 잊게 되고...’시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왜냐하면, 자꾸 잘해주시면 제가 그 은혜를 꼭 갚아야 할 것 같아서요.” ‘하.’ 유건이 소리 없이 코웃음을 쳤다. ‘갚아? 갚긴 뭘 갚겠다는 거야?’
“뭐?” 유건은 갑자기 몸을 돌려 잔디밭 위의 가녀린 여자를 응시했다. 점점 더 찌푸려지는 남자의 눈썹... ‘진짜 울고 있잖아!’ 그는 뒤에 있던 정기환에게 눈짓했다. “가서 물어봐. 무슨 일인지.” “네, 형님.” ‘젠장!’ 유건의 시선은 은범의 두 손이 시연의 어깨 위에 놓인 모습을 정확히 잡아냈는데, 가슴속 깊은 곳에서 두 갈래의 불길이 치솟는 기분이었다. ...“다 내 잘못이야.” 은범은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얼굴로 말했다. “우주를 잘 봤어야 했는데... 내가 방금 이곳 매니저랑 얘기했어. 지금 우주를 찾고 있다고 했어.” 알고 보니, 아까 시연이 우주와 은범이 한참 뛰어다니는 걸 보고 잠깐 쉬라고 불렀지만, 신나게 놀던 우주는 쉬는 것을 마다했고, 은범이 물 한 모금 마시는 사이에 우주가 사라진 것이다. 시연은 걱정이 가득했지만, 이 일이 은범의 잘못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책하며 말했다. “네 잘못 아니야. 나 때문이야. 우주가 특별한 상황인데도 내가 방심했어. 내가 누나로서 제대로 돌보지 못했어...” 우주는 여느 아이들과는 달랐다. 여기에 지형도 낯설어 시연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기서 기다릴 수 없어. 나도 찾아볼게!” “시연아!” 은범은 그녀를 막아섰지만, 이내 말했다. “내가 같이 갈게.” “그래, 여러 사람이 함께 찾을수록 더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기환은 곧 상황을 알아내 유건에게 보고했다. “형님, 우리도 같이 찾아야 할까요?” 이 일을 몰랐다면 상관없겠지만, 알게 된 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시연의 ‘더 이상 잘해주지 마세요’라는 말이 유건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이런 상황에서 자기를 돕는 내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겠지.’ 유건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무 말도 하기 전에, 지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걸 묻냐? 잃어버린 게 너희 형님의 처남이라고! 찾는
‘아이를 지울 수 없었던 건, 언젠가 세 식구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핸드폰 벨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유건이 전화를 받으며 짧게 말했다. “곧 도착한다.” 잠시 멈춘 뒤,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노은범에게도 연락해.” [형님, 그게...]기환은 잠시 망설였다. [지하가 분명 이번 기회에 형님이 시연 씨에게 점수를 딸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형님,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요.] 하지만 유건은 참을성이 없었다. “뭐야? 두 번 말해야 알아듣겠어?” [아닙니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전화를 끊고, 유건이 곧바로 마장 뒤편으로 향하고 있을 때, 가는 길에 은범과 마주쳤다. “고 대표님.” 은범은 특유의 차분하고도 점잖은 얼굴로 물었다. “방금 전화, 고 대표님 쪽에서 온 건가요?” “네.”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한 후,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대체 무슨 일이야?’ 은범은 더욱 의아했다. ‘고유건이 여기에 왜 있는 거지? 게다가 시연이랑 관련된 일에 이렇게 적극적이라니. 둘 사이가 정말 단순히 환자와 의사 사이가 전부일까?’ ...승마장 뒤편의 인공 숲.지금 우주는 숲속의 바위 위에 갇혀 있었다. 알고 보니, 연을 날리던 중 바람이 너무 강해 연이 숲속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우주는 고집스럽게 연을 찾으러 숲으로 들어갔고, 결국 바위 위에 걸린 연을 발견했다. 문제는 바위 위로 올라가는 건 쉬웠지만, 내려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유건이 도착했을 때, 우주는 연을 품에 안고 바위 위에 앉은 채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래에서는 정민환과 정기환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대치 상태를 이어가고 있었다. “왜 안 끌어내리고 있어?” 유건이 묻자, 민환이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형님, 이 아이는 도무지 대화가 안 돼요. 가까이 가기만 해도 소리를 지르면서 발버둥 칩니다. 못 믿
민환과 기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유건을 바라보았다.‘이렇게 가버린다고? 시연 씨가 오기 전에 점수 딸 기회를 이대로 그냥 날려버린다고?’ “노은범 씨.” 유건은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시연 씨에게 이 일 말하지 마요.” 말을 끝내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입가에는 희미한 쓴웃음이 스쳤다. ‘그 사람... 내게 잘해주지 말라고 했으니까, 굳이 내가 우주를 구한 사실을 알 필요도 없지.’ ...“우주야!”시연은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가던 중 은범을 만났다. 은범의 등에 업힌 우주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시연은 간단히 우주의 상태를 확인하고,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은범아, 정말 고마워. 이번 일로 괜히 너에게 폐를 끼쳤네.” 은범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준 데다, 예상치 못한 상황까지 자신을 위해서 해결해야 하니까 시연은 은범에게 아주 미안했다. 은범은 입을 열려다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유건에 대한 이야기를 시연에게 하지 않기로 했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시연을 향한 유건의 마음이 단순한 호기심만은 아니란 걸.‘괜히 경쟁 상대를 만들고 싶지 않아.’ 은범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는 말 할 필요 없어. 하나도 번거로운 거 없었어.” 시연은 우주의 상태에만 신경을 쏟아 은범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 얼른 방으로 들어가자. 우주 씻기고, 깨면 밥도 먹이고 약도 먹여야 하니까.” “그래. 들어가자.” ...‘CLOUD’에서의 시간은 나름 즐거웠다.은범과 시연은 우주를 데리고 ‘CLOUD’에서 하루를 더 머물고, 일요일 저녁이 되자 비로소 시연은 우주를 태산 요양병원으로 데려다주었다. 떠나려는 순간, 우주는 시연의 손을 꼭 붙잡으며 눈망울을 깜빡였다. “우주야, 누나랑 헤어지기 아쉬워? 누나가 다음 주에 또 올게.” “마..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올해 합격통지서는 우편으로 발송됐고, 너희 집 주소로 보냈다던데? 수령인은... 장소미야.”진아는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소미가 일부러 너를 방해하려고 통지서를 중간에 가로챈 것 같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연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혹시 떨어질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첫 관문부터 장소미한테 발목이 잡힐 줄이야!’ “시연아.” 진아는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면접 시작 시간은 10시야. 아직 시간이 있어.” ‘맞아!’ 시연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 내 합격통지서를 반드시 찾아야 해.’ 시연은 곧바로 지씨 저택으로 향했다.‘합격통지서를 반드시 되찾아야 해!’ “진아야, 내 자리 좀 비워달라고 말해줘!” “알겠어, 얼른 가!” ...시연은 서두르며 지씨 저택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준 것은 한 가정부였다. “시연 아가씨...” 그녀는 문을 열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시연은 가정부를 차갑게 바라보며 물었다. “내 합격통지서 어디 있어요?” ‘...!’ 가정부는 당황해서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그, 그게... 저는 잘 몰라요...” ‘흥.’ 시연은 가정부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속으로 냉소했다. ‘거짓말이야. 이 집안사람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이렇게 함부로 대해. 내가 직접 찾아봐야겠어.’ 시연은 가정부의 대답에 신경 쓰지 않고 이내 2층으로 향했다. 그녀는 공구함에 든 망치를 꺼내 들고 잡동사니 방으로 향했다. “시연 아가씨?!”가정부는 깜짝 놀라며 급히 장미리와 지동성에게 각각 전화를 걸었다. 시연은 가정부의 말을 아예 무시한 채 장소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망치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서랍과 옷장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시연 아가씨,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사모님이 아시면 큰일 나요!” 가정부는 뒤따라오며 만류했지만, 시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몇 분도 지나
“무슨 일이야?” 지동성이 황급히 뛰어오자,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보, 당신 딸 좀 봐! 여길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들었어! 경찰에 신고할 거야!” 시연은 장미리를 비스듬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침을 뱉어 장미리의 얼굴에 튀겼다. “퉤!” “악...!” 장미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얼굴을 손으로 훑었다. 이내 광분한 듯 소리쳤다. “미쳤어! 이 정신 나간 년이! 너 정말 미쳤구나!” 짝!그 모습을 본 지동성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시연의 뺨을 후려쳤다. “네 어머니한테 당장 사과해! 버릇없이 굴지 마!” 시연은 고개를 살짝 돌렸지만, 맞은 곳에 아프다는 감각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차가운 절망과 끓어오르는 분노가 뒤섞여 온몸을 휘감았다. ‘하하...’ 갑자기, 시연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눈을 부릅뜨고 아버지를 노려보면서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하하... 이 사람들이, 내 모든 것을 망쳤어!!’‘가족, 학업, 사랑까지!! 이 원한은, 천 년이 지나도 풀지 않을 거야!!’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눈물을 닦아내고, 시연은 편지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봉투에 넣은 뒤, 품에 꼭 안았다. “지시연, 너 뭘 가져가는 거야?!!” 지동성이 말을 잇자, 시연은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붙이면서 이를 악물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 내 물건이에요!!” 그 눈빛에 순간적으로 지동성이 움츠러들었다. 결국, 지동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시연을 막지도 못했다. 집을 나서자마자, 시연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고, 우선 장소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음만 길게 울릴 뿐, 소미는 받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바로 유건의 번호를 눌렀다. 마침 회의 중이던 유건은 핸드폰 화면이 반짝이는 걸 보고 잠깐 멍해졌다. 남자의 손을 살짝 들어 회의 중단을 알린 후, 창가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장, 소, 미, 어디 있어요?]
시연은 꼭 성공해야만 했다. 그래야 시연과 동생 우주가 사람답게 살 희망이 있다. “놔!!!” 소미는 가까스로 시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벌떡 일어나서 그녀를 비웃으며 손가락질했다. “당연히 알지! 합격통지서가 너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그러니까 찢어서 버렸지!” ‘뭐?!’ 시연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하며 입술이 떨렸다. “...다시 말해봐.” “벌써 말했잖아.” 소미는 귀찮다는 듯이 귀 옆으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끊어 말하며, 독을 퍼부었다. “찢었어. 네 합격통지서, 내가 갈기갈기 찢어서 버렸다고.” 이어 그녀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너 공부 잘하는 거 알아! 그래서 뭐? 네 앞길, 내가 직접 망쳤어! 넌 평생 나한테 밟히게 돼 있어!” “...” 시연은 입을 벌렸지만,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눈앞의 소미가 완전히 악마처럼 보였다. ‘이 악마는, 아버지가 우리 엄마를 배신했다는 살아 있는 증거야!! 내 아버지를 빼앗고, 우리 가족을 산산조각냈어!!’ ‘이제는 내 미래까지 짓밟으려 하고 있어!!’ ‘그리고 저 악마의 입술이 꿈틀거리면서, 또다시 독을 내뱉고 있어!!’시연이 두 주먹을 굳게 쥐자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그러다, 그녀는 이성을 놓아버린 듯이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악!” 소미를 바닥에 눕혀 버렸다. 시연은 양손으로 소미의 목을 졸라 움켜쥐었다. 시연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지만, 눈빛은 메마른 듯했다. “네가 뭔데?! 은이가 그동안 보낸 편지를 가로채?! 우릴 3년이나 떨어뜨려 놓았잖아! 이제 와서 또 내 합격통지서까지?” “내가 왜 그랬냐고? 넌 너무 역겨우니까! 어릴 때부터 남자들한테 꼬리나 살살 치는 주제에 어디가 잘났다고 그래? 그러니까 노은범도 널 좋아했잖아!” 은범과 시연이 사귀었을 때, 소미는 질투로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간신히 내가 얻은 자릴, 또 네
문 밖.유건, 은범, 그리고 진주는 침묵 속에 서 있었다.가장 먼저 진주의 핸드폰이 울렸다.“엄마. 네, 이제 끝났어요. 곧 갈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진주는 은범을 바라보았다.“은범아, 우리 엄마가 집에 빨리 들어오래.”하지만 은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말 한마디 없이 굳어 있었다.그는 무조건 시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진주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그럼 나 먼저 갈게.”“응...”은범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절대 시연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그러나 그때, 은범의 핸드폰이 울렸다.강수희였다.“어머니.”[은범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진주를 안 데려다준 거니? 서로 친해지는 건 좋지만, 너무 늦으면 진주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야.]은범은 진주를 한 번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강수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이제 늦었으니, 무조건 진주 데려다줘야 해. 알겠지?]이를 악물며, 은범은 짧게 대답했다.“알았어요.”전화를 끊고, 그는 진주를 향해 말했다.“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어?”진주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회의실 문을 가리켰다.“그래도 돼?”“너랑 같이 왔잖아.”은범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너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게 맞지.”시연에게는 나중에 충분히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이성적인 사람이니까.“가자.”“응.”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건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눈빛 가득한 냉소를 띄웠다.‘역시 믿을 수 없는 놈이었어.’그는 긴 다리를 내디뎌 은범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 비꼬는 듯한 미소.“어디 가려고?”“고 대표님...”은범이 답하려 했지만, 유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내가 있는 한, 넌 한 발짝도 못 움직여.”은범은 얼굴을 찌푸리며 침착하게 말했다.“고 대표님, 전 친구를 집에 데려다줘야 합니다.”“헛소리 좀 그만하지 그래?”유건의 분노가 폭발했다.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몇 걸음 떨어진 곳.노은범과 하진주가 나란히 서 있었다.그리고 시연과 마주쳤다.“시, 시연아.”은범은 당황해 더듬거렸다.진주는 은범을 한 번 바라보더니 옅게 미소 지었다.“친구야?”“응, 아니... 아니야. 내가 좋아한다던 그 사람이야.”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부정했고, 더 이상 진주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서둘러 시연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시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뜻밖의 조우에 시연은 잠시 놀랐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교수님이 여기서 회의 중이셔. 놓고 가신 자료를 가져다주러 왔어.”그녀가 유건에게 한 말과 똑같았다.“그렇구나.”은범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연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엔 허공을 잡았다.시연은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난 것이었다.은범은 순간 멍해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시연아?”시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엔 명확한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교수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먼저 가볼게. 그리고 널 방해하면 안 되잖아.”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려 했다.은범은 당황했다.시연이 오해했다고 확신했다.“시연아...”“잠시만요.”진주가 갑자기 시연의 앞을 가로막았다.여자의 직감은 빠르다. 이 짧은 순간에도 진주는 분위기를 감지했다.시연과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말했다.“죄송하지만, 잠깐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시겠어요?”“...”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시간 없어서요. 비켜주세요.”거절이었다.진주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강단 있게 나섰다.그녀는 시연의 팔을 잡았다.“잠깐이면 돼요! 금방 끝날 말이에요.”그녀는 은범을 흘끗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당신이 은범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오해하신 것 같아요.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냥 친구일 뿐이거든요.”“하고 싶으신 말, 다 하신 거예요?”
유건은 결국 함정에 빠졌다. 재빨리 걸음을 멈추고 시연을 놓아주었다.“배가 어떻게 아파? 심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지시연!”유건은 당황하며 몇 걸음에 따라잡아 그녀를 끌어안았다.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뭔가 반응할 새도 없이, 유건의 넓고 따뜻한 손이 여자의 눈을 가렸다.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보지 마.”“뭐를요...?”시연은 놀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왜 이러는 건데요? 안 가려도 돼요...”‘안 가리면 어떡하라고?!’유건은 앞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노은범이 하진주에게 자기 재킷을 벗어 걸쳐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걸 시연이가 본다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유건 씨!”시연이 저항하자,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너, 으음...”시연이 놀라서 입을 열려는 순간, 유건이 그녀를 덮치듯 입을 맞췄다.‘뭐야?!’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놔... 윽...”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유건은 더욱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남자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점점 더 강렬해졌다.시연은 필사적으로 유건의 가슴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번쩍 들었다.찰싹!깨끗한 타격음이 울리며 유건의 뺨이 돌아갔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미안해, 나는...”그는 단지 시연이 은범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키스하고 나서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녀를 원했고, 가까이하고 싶었으며, 심지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혐오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너무나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우리... 그래도 예전에는 부부였고, 이 사람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일 이유라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이제 우리는 이혼을 앞둔 상태잖아!
연회장으로 돌아온 유건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그는 소미를 한 번 바라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자, 별로 재미없어.”소미는 아무런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너무 늦게 자면 두 사람한테 안 좋잖아.”“네.”소미는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다.‘어떡하지? 이 사람, 아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지금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지도 몰라.’“왜 그래?”유건은 소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몸이 안 좋아?”“아니에요.”소미는 웃으며 얼버무렸다.“그냥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자.”“괜찮아요...”“아니.”유건은 단호했다. 그녀가 지금 상태에서 혼자 다니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는 결국 화장실 입구까지 소미를 데려다주었다.“천천히 다녀와.”“네.”소미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이 남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다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유건은 조금 떨어진 흡연 구역으로 이동했다.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시연이 책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시연이? 여기 온 이유는 뭘까?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찾는 거야?”“네?”시연이 놀라 돌아보았다.유건을 보자,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여기 B동 6층 맞나요?”유건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6층은 맞는데, 여긴 B동이 아니라 C동이야.”“아.”시연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두드렸다.“아, 진짜! 또 길을 잘못 들었네요.”“또?”유건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무심코 물었다.“길을 자주 잃어버려?”시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사실, 자주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방향 감각이 떨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진주를 힐끗 바라보았다.“내가 보기엔 진주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우리 은범이 복이 없는 탓이지, 뭐.”진주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이모, 그런 말씀 마세요. 과찬이세요.”“진주야.”강수희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주의 손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지난번에 은범이랑 같이 연극 봤다면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은범이의 뭐가 마음에 안들었니?”“그게...”진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지난번에 은범과 미리 조율한 대로, 진주는 연극을 본 후 자기 부모님께 자신이 은범을 향한 마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진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거였고, 은범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수희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진주는 은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모, 은범이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만, 저희는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이 말이 강수희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그럼,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면 되잖아? 제발, 은범이에게 기회를 줘 봐, 응?”“어머니!”은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왔다.그는 먼저 방혜령에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오랜만이네요.”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 이모는 어머니를 뵈러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내가 이러는 건...”“괜찮아.”방혜령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시선을 은범에게 두었다.“이제 많이 컸네? 그런데 너희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그녀는 딸을 한번 흘긋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너희, 한 번 본 걸로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아? 좀 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게 맞지 않나?”강수희가 기뻐하며 맞장구쳤다.“내 말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어머니!”“엄마!”은범과 진주가 동시에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고, 방혜령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과장실 문 앞에서, 시연은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형수님.]“지한 씨.”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건 씨와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당연하죠. 형님도 여기 계세요.]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유건의 무심한 어조.“심폐 프로젝트팀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 당신이 한 일이에요?”질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개입했다면, 바로 이해할 터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남자의 답이 돌아왔다.[그래.]전혀 놀랍지 않았다. 시연은 눈을 감았지만,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여자의 침묵에, 유건은 비웃듯 말했다.[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벌인 일이라는 이유만으로?]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멍청하긴...]유건이 낮게 욕했다.[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간다는 게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설명해야 하냐?]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팀에 들어가면 분명 시연의 수입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경험과 기술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돈 때문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지시연.]유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나와 관계를 끊는 게 중요해? 아니면 네 미래가 더 중요해?]책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시연도 알고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결정을 내렸다.“고마워요, 유건 씨.”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다행이네. 이 여자, 결국 받아들였어!’하지만 시연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유건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예전엔 내가 잘못했어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요. 앞으로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되길 바랄게요.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유건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저 여자, 부와 명예를 누려야 마땅해. 하지만 지금은...’...차에 돌아온 지한은 유건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즉, 유건의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묵직한 어둠과 슬픔을 느낀 것.‘설마, 또 형수님한테 혼난 건가? 그게 아니면, 이번엔 진짜로 맞기라도 한 건가?’“형님...”“지한아.”유건의 시선이 멍하니 허공을 가로질렀다.“방법을 좀 찾아봐. 시연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내가 돈을 건네면, 시연이는 절대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연이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하는 건 아닐 거야.’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연이가 돈과 명예를 탐하는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 한심해!’...시연은 임진아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에 양석현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교수님.”[시연아, 내일 오전에 내 사무실로 와. 할 말이 있어.]“네, 교수님.”양석현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은 교대 근무도 마치지 못한 채 서둘러 외과로 향했다.양석현은 회진을 마친 후에야 시간을 냈고, 시연을 과장실로 데려갔다.“일찍 왔구나. 앉아.”시연은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교수님, 무슨 일이신가요?”‘혹시 내가 1학년 실험 수업을 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 걸까?’“뭘 그렇게 긴장해?”양석현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도, 결국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야.”그는 서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시연에게 건넸다.“이걸 작성하면, 너는 공식적으로 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가게 될 거거든.”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교수님, 이게... 정말 규정에 맞는 건가요?”“규정대로라면, 맞지 않지.”양석현이 웃었다.“원래는 네가 대학원에 합격하면 팀에 넣을 생각이었어. 그 자체도 예외적인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아직 대학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양석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말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