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은 조용히 걸어가며 물었다.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유건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단지 얼굴에 짙은 불만이 드러내고 있었다. 시연이 자신을 놔두고 그냥 나가버린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는 대꾸도 없이 묵묵부답. 시연은 잠시 망설였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나는 책 좀 볼게요.” 그러면서 보호자 침대 쪽을 가리켰는데, 그녀도 유건이가 허락하지 않으면, 안 가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자 유건은 코웃음을 쳤다. “갈 거면 그냥 가. 나한테 허락까지 받아야 해?” ‘아까 나를 간병인에게 맡겼을 땐, 물어보기라도 했나?’ “그럼 책 좀 볼게요.” 시연은 남자의 비아냥을 가볍게 넘겼고, 그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책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유건은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밀려왔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야.’ 그가 원하는 건, 시연이가 단순히 병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연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건은 답답한 마음에 몸을 뒤척였다. 그는 뒤돌아 누워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아서 참다못해 다시 돌아누웠다. 그리고 시연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여보.” “네?” 시연이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마치 대기 중이었던 간병인처럼 바로 책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혹시 필요한 거 있어요?” 유건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잠이 안 와.” ‘...그래서?’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이제 나더러 자장가라도 불러 달라는 건가?’ “눈 감고 숫자 세봐요.” 시연은 참고 부드럽게 말했다. “금방 잠들 거예요.” “싫어.” 유건은 단칼에 거절했다. “너무 일러. 잠이 안 와.” “그치만, 지금 당신 몸 상태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해요.” “누워 있기만 하면 돼. 너는 그냥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되고.” 시연은 체념하며 말했다. “그럼 책 가져와서 여
시연은 장난이 아니었다. 평소 예능을 거의 보지 않았는데, 막상 보기 시작하니 꽤 재미있었다. “푸흣...” 그녀는 소파에 기댄 채 피식 웃음이 터졌다. 유건은 정작 방송은 보지 않고, 여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재미있어?” “네.” 시연은 눈을 떼지 않은 채 가볍게 대답했다. “꽤 볼 만하네요. 근데 장소미, 생각보다 예능감 있네요.” 그러면서 슬쩍 유건을 바라보았다. “연예인으로 자리 잘 잡은 거 같아요. 인기 많죠?” “그렇지, 아마도.” 유건은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는 시연이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장소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이 여자, 질투도 안 나고, 신경도 안 쓰이나?’ ‘혹시, 나에게 애정이 없어서?’ 그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오자, 유건의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불쾌함을 참을 수 없었다. “채널 바꿔!” 순간적으로 남자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안 돼요!”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보고 싶다면서요? 재미있잖아요, 그냥 봐요.” “내가 언제 보고 싶다고 했어?” 유건은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채널 바꾸라고 했잖아!” “아니, 분명 본인이 고른 거잖아요.” 시연은 너무나 어이없었다. ‘아까 분명 당신이 보자고 했잖아?’하지만, 그녀는 남자의 잔뜩 구겨진 표정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리모컨을 들었다. “알았어요. 바꿀게요.” 한 채널, 또 한 채널...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뭘 보고 싶은지도 말하지 않았다. 답답해진 시연이 결국 선택했다. “그럼 영화 봐요. 이거 괜찮네요.” 할리우드 영화였기에 유건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드디어 마무리된 느낌에, 시연은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이리 와.” “네?” 시연이 고개를 돌리자, 유건이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 와서 누우라고.” ‘또 시작이네...’ 시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지만,
시연은 살짝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유건의 허리에 올려져 있던 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바로 그때, 유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신음을 흘렸다. “으...” 시연은 순간 놀라며 움찔했다. “왜 그래요? 상처 건드렸어요?” ‘나를 이렇게 끌어안고 자다 보니, 분명 무리가 간 것 같아...’ “음... 그럴 수도 있지.” 유건은 찡그린 얼굴로 말하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연은 더 걱정되었다. “봐봐요, 어딜 다쳤나 확인해야죠.” 그녀는 재빨리 손을 뻗어 유건의 병원복 단추를 풀려고 했다. 하지만, 여자의 손목이 단단히 붙잡혔다. 그리고 잠시 후, 푹-시연은 남자의 품에 다시 끌려들어 갔다. “잠깐만요... 상처를 확인해야 해요.” 시연은 당황하며 중얼거렸지만, 유건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그녀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남자의 목소리는 깊고, 어딘가 애정이 얽혀 있었다. “내 상처가 터지면, 걱정할 거야?” 시연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유건의 상처는 괜찮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지?’ ‘내 반응을 확인하려는 걸까?’ 시연은 천천히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 “장난치지 마요. 이따가 회진할 때 올게요.” 그녀는 유건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지만, 손목은 여전히 유건에게 잡혀 있었다. 유건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대답 안 해?” 그는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내가 다치면, 마음이 아파?” 시연은 피식 웃었고, 살며시 손을 뺐다. “그런 걱정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에요.”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적어도 지금은, 내가 걱정할 처지가 아니지 않나요?” 유건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졌다. “무슨 뜻이야?” ‘너는 내 아내야. 그럼 당연히 나를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시연이 문을 열고 한 발을 내디뎠다. “지시연.” 뒤에서 유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서늘한 음색, 그 아래 은밀하게 깔린 분노의 기운이 날카롭게 퍼져나갔다.“거기 서.” 시연의 어깨가 순간 움찔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문이 닫혔다. “젠장...” 유건의 날카로운 옆선이 차갑게 굳어졌다. ‘대체 어떻게 해야 저 속이 풀리려나?’ ‘끝까지 날 들었다 놨다 해야 직성이 풀리려나?’ ‘미친...’ “유건 씨...” 옆에서 장소미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입술을 깨물었고,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미안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괜히 와서... 진 선생님이 오해한 거겠죠? 제가 가서 얘기해 볼까요?” “그럴 필요 없어.” 유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설명이라니, 그건 지시연이 질투할 때나 필요한 건데, 지시연은 애초에 관심조차 없다고.’‘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아니, 어쩌면 내가 장소미랑 엮이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럼...” 소미는 속으로 안도하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제가 간병인을 불러서 방을 치우게 하고, 닭곰탕도 다시 떠 올까요?” “그래, 고마워.” 유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여자가 신경 쓰지 않는데, 나도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없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간병인이 방을 정리했고, 소미가 닭곰탕을 다시 떠 왔다. 유건은 연거푸 두 그릇을 비웠다. 그런데도... 시연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편, 시연은 병실을 나와 1층 로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실험 보고서를 챙겨올걸.’ ‘보고서를 수정하는 게 그냥 멍하니 있는 것보단 나았을 텐데.’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결혼은 했지만, 남편의 여자를 위해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신세라니.’ ‘이혼할 수도 없고, 남편을 비난할 수도 없는 상황...’ 시연의 가슴이 답답했고, 가슴이 점점 더 조여오는 느낌이었다. 바
그건 고유건의 뼛속까지 새겨진 품성이었다. “시연아...” 진아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속이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미안해, 내가 정말 아무 도움도 못 돼서.” “됐어, 울지 마.” 시연은 웃으며 휴지를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이제 네가 다 알았으니까, 이 일에 대해 성빈이랑 잘 이야기해 봐. 괜히 충동적으로 또 무슨 일을 저지르지 않게.” “걱정하지 마, 잘 말릴게.” 진아는 지난번 진성빈의 일만 떠올려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잘 지켜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진아는 시연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너도 약속해.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혼자 끙끙 앓지 않겠다고.” “응, 약속할게.” 겨우 진아를 달래 눈물을 그치게 한 후, 시연이 말했다. “점심 같이 먹을래?” “응?” 진아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시간 있어? 고유건을 안 챙겨도 돼?” “안 챙겨도 돼.” 시연은 장소미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좀 늦게 돌아가는 게 좋겠어.’시연이 진아의 팔을 잡고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가자, 학식 말고 뒷골목에서 먹자.” “좋지!” 진아는 밝게 웃었다. 둘은 뒷골목에서 밥을 먹고, 잠시 쇼핑하다가 오후 세 시가 다 되어 병원으로 돌아갔다. 병동 입구에 들어서면서 시연은 문득 생각했다. ‘장소미는 이제 갔겠지?’ 하지만 예상과 달리, 병실 앞에는 주지한이 초조한 얼굴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수님, 왜 이제야 오셨어요?!” 시연은 멈칫하며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지한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직접 들어가 봐요. 형님이... 아직까지 밥을 안 드셨어요.” “밥을 안 먹었다고요?” 시연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직접 들어가서 여쭤보세요.” “알겠어요.” 시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병실 문을 열었는데,
이 정도로 티 나는 투정을 시연이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단지 그녀는 유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고, 굳이 신경 써서 맞춰 줄 마음도 없었지만, 이 남자를 달래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도 온종일 불만 가득한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연은 유건을 바라보며 잔잔하게 웃었다. “밥 안 먹으면 안 돼요. 몸 상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주방 쪽으로 향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와 말했다. “죽도 있고, 닭곰탕도 있고, 반찬도 좀 있어요. 데워줄까요?” 유건은 침대에 반쯤 기대앉아 있었지만, 여전히 기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못마땅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질려서 안 먹고 싶어.” ‘고작 두 끼 먹었을 뿐인데? 역시 까다로운 재벌 도련님...’ 시연은 어쩔 수 없이 물었다. “그럼 뭐 먹고 싶어요?” “나보고 생각하라고?” 유건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반문했다. 그 말투에 시연은 살짝 머쓱해졌다. ‘아, 또 내 잘못이야?’ 유건이 아직 소화하기 힘든 음식은 먹을 수 없는 상태라는 걸 떠올린 시연은 다시 물었다. “그럼... 국수는 어때요? 아니면 만둣국은요?” 유건은 대답하는 대신, 되려 묻는 쪽을 택했다. “너, 밖에서 그렇게 오래 있다 왔는데, 점심은 뭐 먹었어? 누구랑 먹었냐고.” “나요?” 시연은 순간 멍해졌다가 솔직히 답했다. “진아랑 같이 뒷골목에서 국수 한 그릇 먹었어요.” 그제야 유건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다행히 남자랑 있었던 건 아니네.’ 그러고는 콧방귀를 뀌듯 말했다. “나도 국수 먹을래.” 남자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시연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지한 씨한테 말해서...” “잠깐.” 시연이가 돌아서려던 순간, 유건이는 그녀의 손목이 덥석 잡혔다. 시연은 갸웃하며 물었다. “왜요?” 유건은 마치 멍청이를 보는 것처럼 그녀를
유건은 느릿느릿 젓가락을 집어 들며 참지 못하고 말했다. “간장 좀 넣어봐, 색깔 좀 내게. 그리고 그냥 면만 삶은 거야? 채소는? 계란도 안 넣었어?” “있어요, 다 있어요!” 시연은 눈을 반짝이며 면 그릇을 가리켰다. “다 밑에 있어요. 계란후라이도 있어요.” “오?” 유건은 피식 웃으며 젓가락을 아래로 넣어 건져 올렸다. 채소가 나왔다. 그리고... 그 밑에 있던 계란도. ‘음... 새까맣잖아?’ 유건이 순간 멈칫했다. ‘이건... 탄 거 아닌가?’ “잘 안됐어요.” 시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탔는데, 한쪽 면은 멀쩡해. 뒤집어서 먹으면 되잖아요...” “하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건은 결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시연의 볼이 붉어졌다. “그만 웃어요! 뭐가 그렇게 웃기다고 그래요?” “푸흣...!” 남자의 웃음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럼 먹지 마요!” 화가 난 시연이 면 그릇을 치우려고 했다. “맛없게 만든 게 내 잘못이에요? 당신이 해달라고 했잖아요!” “이거 놔요.” 유건은 여자의 손목을 가볍게 잡으며 웃음을 거뒀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했다. “안 먹는다고 한 적 없어. 배고파서 먹을 거야.” 그리고 손가락을 툭, 탁자에 두드렸다. “먹여줘.” 시연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유건을 바라봤다. “진짜 먹을 거예요?” “응.”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와이프가 해준 건데, 안 먹을 수 있나?’ “그래요...” 시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 유건은 망설임 없이 입을 벌려 한입에 먹었다. “맛있어요?” 시연은 조심스레 물었다가, 살짝 말을 바꿨다. “아니, 먹을 만해요?” “응.” 입에 가득 찬 채로, 그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짓으로 계속 먹여달라고 했다. 한 젓가락, 또 한 젓가락.
오후 3시. 시연은 병실로 돌아왔다. 4시에 웨딩드레스 치수를 재기로 했으니,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지금이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병실 안은 조용했다. “유건 씨?” 사방을 둘러봤지만, 병실 안에는 유건이 없었다. ‘어디 간 거지? 곧 나가야 하는데...’ 시연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각. 유건은 장소미의 병실에 있었다. 유건에 비하면 소미의 부상은 훨씬 가벼웠다. 단순한 타박상 정도였고, 오늘 퇴원이 예정되어 있었으니 말이다.다만, 퇴원 전 마지막으로 종합검진을 받았고, 그 결과를 본 후 소미는 유건을 불러들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소미는 말을 마친 뒤, 조금 전까지 울었던 흔적이 남은 붉은 눈가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유건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유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왜 이제야 안 거야?”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도 묵직했다. “그게...” 소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도 이런 건 처음이라... 그리고 원래 생리가 불규칙했어요. 게다가 요즘 바빴기도 해서... 전혀 생각을 못 했어요.”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아랫배 위에 손을 올렸다. “3개월 됐대요. 그날 밤...” 그 말에 유건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늘이 날 이렇게까지 조롱하는 건가...?’ 그는 이미 결심했었다. 시연과 결혼해서 정식 부부가 되기로. 시연이 가진 아이가 자신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이기로. 그런데 이제 와서...‘장소미가 임신했다고?’ ‘그것도... 3개월...’ ‘로얄호텔에서의 단 한 번으로...’ ‘한쪽은 내 아내. 한쪽은 내 친자식...’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유건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이마 위로 툭 튀어나온 혈관이 도드라졌다. 태양혈이 욱신거리며 터질 듯한 두통이 몰려왔다. 그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화면에 ‘시연’ 두 글자가 떴다.
문 밖.유건, 은범, 그리고 진주는 침묵 속에 서 있었다.가장 먼저 진주의 핸드폰이 울렸다.“엄마. 네, 이제 끝났어요. 곧 갈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진주는 은범을 바라보았다.“은범아, 우리 엄마가 집에 빨리 들어오래.”하지만 은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말 한마디 없이 굳어 있었다.그는 무조건 시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진주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그럼 나 먼저 갈게.”“응...”은범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절대 시연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그러나 그때, 은범의 핸드폰이 울렸다.강수희였다.“어머니.”[은범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진주를 안 데려다준 거니? 서로 친해지는 건 좋지만, 너무 늦으면 진주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야.]은범은 진주를 한 번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강수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이제 늦었으니, 무조건 진주 데려다줘야 해. 알겠지?]이를 악물며, 은범은 짧게 대답했다.“알았어요.”전화를 끊고, 그는 진주를 향해 말했다.“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어?”진주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회의실 문을 가리켰다.“그래도 돼?”“너랑 같이 왔잖아.”은범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너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게 맞지.”시연에게는 나중에 충분히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이성적인 사람이니까.“가자.”“응.”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건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눈빛 가득한 냉소를 띄웠다.‘역시 믿을 수 없는 놈이었어.’그는 긴 다리를 내디뎌 은범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 비꼬는 듯한 미소.“어디 가려고?”“고 대표님...”은범이 답하려 했지만, 유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내가 있는 한, 넌 한 발짝도 못 움직여.”은범은 얼굴을 찌푸리며 침착하게 말했다.“고 대표님, 전 친구를 집에 데려다줘야 합니다.”“헛소리 좀 그만하지 그래?”유건의 분노가 폭발했다.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몇 걸음 떨어진 곳.노은범과 하진주가 나란히 서 있었다.그리고 시연과 마주쳤다.“시, 시연아.”은범은 당황해 더듬거렸다.진주는 은범을 한 번 바라보더니 옅게 미소 지었다.“친구야?”“응, 아니... 아니야. 내가 좋아한다던 그 사람이야.”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부정했고, 더 이상 진주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서둘러 시연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시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뜻밖의 조우에 시연은 잠시 놀랐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교수님이 여기서 회의 중이셔. 놓고 가신 자료를 가져다주러 왔어.”그녀가 유건에게 한 말과 똑같았다.“그렇구나.”은범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연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엔 허공을 잡았다.시연은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난 것이었다.은범은 순간 멍해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시연아?”시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엔 명확한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교수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먼저 가볼게. 그리고 널 방해하면 안 되잖아.”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려 했다.은범은 당황했다.시연이 오해했다고 확신했다.“시연아...”“잠시만요.”진주가 갑자기 시연의 앞을 가로막았다.여자의 직감은 빠르다. 이 짧은 순간에도 진주는 분위기를 감지했다.시연과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말했다.“죄송하지만, 잠깐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시겠어요?”“...”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시간 없어서요. 비켜주세요.”거절이었다.진주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강단 있게 나섰다.그녀는 시연의 팔을 잡았다.“잠깐이면 돼요! 금방 끝날 말이에요.”그녀는 은범을 흘끗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당신이 은범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오해하신 것 같아요.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냥 친구일 뿐이거든요.”“하고 싶으신 말, 다 하신 거예요?”
유건은 결국 함정에 빠졌다. 재빨리 걸음을 멈추고 시연을 놓아주었다.“배가 어떻게 아파? 심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지시연!”유건은 당황하며 몇 걸음에 따라잡아 그녀를 끌어안았다.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뭔가 반응할 새도 없이, 유건의 넓고 따뜻한 손이 여자의 눈을 가렸다.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보지 마.”“뭐를요...?”시연은 놀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왜 이러는 건데요? 안 가려도 돼요...”‘안 가리면 어떡하라고?!’유건은 앞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노은범이 하진주에게 자기 재킷을 벗어 걸쳐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걸 시연이가 본다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유건 씨!”시연이 저항하자,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너, 으음...”시연이 놀라서 입을 열려는 순간, 유건이 그녀를 덮치듯 입을 맞췄다.‘뭐야?!’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놔... 윽...”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유건은 더욱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남자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점점 더 강렬해졌다.시연은 필사적으로 유건의 가슴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번쩍 들었다.찰싹!깨끗한 타격음이 울리며 유건의 뺨이 돌아갔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미안해, 나는...”그는 단지 시연이 은범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키스하고 나서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녀를 원했고, 가까이하고 싶었으며, 심지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혐오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너무나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우리... 그래도 예전에는 부부였고, 이 사람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일 이유라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이제 우리는 이혼을 앞둔 상태잖아!
연회장으로 돌아온 유건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그는 소미를 한 번 바라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자, 별로 재미없어.”소미는 아무런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너무 늦게 자면 두 사람한테 안 좋잖아.”“네.”소미는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다.‘어떡하지? 이 사람, 아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지금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지도 몰라.’“왜 그래?”유건은 소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몸이 안 좋아?”“아니에요.”소미는 웃으며 얼버무렸다.“그냥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자.”“괜찮아요...”“아니.”유건은 단호했다. 그녀가 지금 상태에서 혼자 다니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는 결국 화장실 입구까지 소미를 데려다주었다.“천천히 다녀와.”“네.”소미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이 남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다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유건은 조금 떨어진 흡연 구역으로 이동했다.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시연이 책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시연이? 여기 온 이유는 뭘까?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찾는 거야?”“네?”시연이 놀라 돌아보았다.유건을 보자,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여기 B동 6층 맞나요?”유건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6층은 맞는데, 여긴 B동이 아니라 C동이야.”“아.”시연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두드렸다.“아, 진짜! 또 길을 잘못 들었네요.”“또?”유건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무심코 물었다.“길을 자주 잃어버려?”시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사실, 자주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방향 감각이 떨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진주를 힐끗 바라보았다.“내가 보기엔 진주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우리 은범이 복이 없는 탓이지, 뭐.”진주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이모, 그런 말씀 마세요. 과찬이세요.”“진주야.”강수희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주의 손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지난번에 은범이랑 같이 연극 봤다면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은범이의 뭐가 마음에 안들었니?”“그게...”진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지난번에 은범과 미리 조율한 대로, 진주는 연극을 본 후 자기 부모님께 자신이 은범을 향한 마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진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거였고, 은범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수희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진주는 은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모, 은범이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만, 저희는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이 말이 강수희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그럼,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면 되잖아? 제발, 은범이에게 기회를 줘 봐, 응?”“어머니!”은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왔다.그는 먼저 방혜령에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오랜만이네요.”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 이모는 어머니를 뵈러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내가 이러는 건...”“괜찮아.”방혜령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시선을 은범에게 두었다.“이제 많이 컸네? 그런데 너희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그녀는 딸을 한번 흘긋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너희, 한 번 본 걸로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아? 좀 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게 맞지 않나?”강수희가 기뻐하며 맞장구쳤다.“내 말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어머니!”“엄마!”은범과 진주가 동시에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고, 방혜령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과장실 문 앞에서, 시연은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형수님.]“지한 씨.”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건 씨와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당연하죠. 형님도 여기 계세요.]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유건의 무심한 어조.“심폐 프로젝트팀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 당신이 한 일이에요?”질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개입했다면, 바로 이해할 터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남자의 답이 돌아왔다.[그래.]전혀 놀랍지 않았다. 시연은 눈을 감았지만,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여자의 침묵에, 유건은 비웃듯 말했다.[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벌인 일이라는 이유만으로?]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멍청하긴...]유건이 낮게 욕했다.[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간다는 게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설명해야 하냐?]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팀에 들어가면 분명 시연의 수입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경험과 기술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돈 때문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지시연.]유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나와 관계를 끊는 게 중요해? 아니면 네 미래가 더 중요해?]책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시연도 알고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결정을 내렸다.“고마워요, 유건 씨.”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다행이네. 이 여자, 결국 받아들였어!’하지만 시연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유건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예전엔 내가 잘못했어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요. 앞으로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되길 바랄게요.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유건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저 여자, 부와 명예를 누려야 마땅해. 하지만 지금은...’...차에 돌아온 지한은 유건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즉, 유건의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묵직한 어둠과 슬픔을 느낀 것.‘설마, 또 형수님한테 혼난 건가? 그게 아니면, 이번엔 진짜로 맞기라도 한 건가?’“형님...”“지한아.”유건의 시선이 멍하니 허공을 가로질렀다.“방법을 좀 찾아봐. 시연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내가 돈을 건네면, 시연이는 절대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연이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하는 건 아닐 거야.’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연이가 돈과 명예를 탐하는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 한심해!’...시연은 임진아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에 양석현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교수님.”[시연아, 내일 오전에 내 사무실로 와. 할 말이 있어.]“네, 교수님.”양석현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은 교대 근무도 마치지 못한 채 서둘러 외과로 향했다.양석현은 회진을 마친 후에야 시간을 냈고, 시연을 과장실로 데려갔다.“일찍 왔구나. 앉아.”시연은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교수님, 무슨 일이신가요?”‘혹시 내가 1학년 실험 수업을 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 걸까?’“뭘 그렇게 긴장해?”양석현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도, 결국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야.”그는 서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시연에게 건넸다.“이걸 작성하면, 너는 공식적으로 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가게 될 거거든.”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교수님, 이게... 정말 규정에 맞는 건가요?”“규정대로라면, 맞지 않지.”양석현이 웃었다.“원래는 네가 대학원에 합격하면 팀에 넣을 생각이었어. 그 자체도 예외적인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아직 대학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양석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말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