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자신이 병원에 온 건 유건을 간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크게 불편한 곳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지?’ 시연은 담담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내가 잘못했어요. 그럼 지금 뭘 해주면 돼요?” “이리 와.” 유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시연이 가볍게 걸음을 옮기자, 남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 씻고 싶어.” “그건 안 돼요.” 시연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의사처럼 덧붙였다. “상처에 물 닿으면 안 된다고요.” 그러자 유건은 비틀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씻어야겠어. 안 씻으면 찝찝해서 몸도 안 좋아질 거 같거든?” 몸을 뒤로 젖히며 힘없이 손을 들어 보였다. “네가 알아서 해 봐.” ‘이거 완전 생떼 아니야?’ 시연은 불쾌한 감정을 꾹 눌러 담고, 침착하게 말했다. “목욕은 안 돼요. 대신, 몸을 닦아줄 수는 있어요.” “그럼 그걸로 하지.” 유건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래요.”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럼 남자 간병인을 불러올게요. 그게 더 편할 거예요. 아!!” 그녀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목이 남자에게 강하게 붙잡혔다. 순간, 통증이 퍼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유건이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묻자, 시연은 당황해서 찌푸린 얼굴로 되물었다. “씻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간병인을 부르려고요.” “그럼 넌 뭐 하는 사람인데?” “나요?” 시연이 말을 더듬었다. “내가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뭐가?” 유건이 여자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자, 뜨거운 남자의 숨결이 여자의 피부에 닿았다. “우린 부부야. 내 몸, 네가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아? 만진 적도 있고, 심지어...” “그만해요!” 시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당황한 나머지 남자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시연은 조용히 걸어가며 물었다.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유건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단지 얼굴에 짙은 불만이 드러내고 있었다. 시연이 자신을 놔두고 그냥 나가버린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는 대꾸도 없이 묵묵부답. 시연은 잠시 망설였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나는 책 좀 볼게요.” 그러면서 보호자 침대 쪽을 가리켰는데, 그녀도 유건이가 허락하지 않으면, 안 가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자 유건은 코웃음을 쳤다. “갈 거면 그냥 가. 나한테 허락까지 받아야 해?” ‘아까 나를 간병인에게 맡겼을 땐, 물어보기라도 했나?’ “그럼 책 좀 볼게요.” 시연은 남자의 비아냥을 가볍게 넘겼고, 그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책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유건은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밀려왔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야.’ 그가 원하는 건, 시연이가 단순히 병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연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건은 답답한 마음에 몸을 뒤척였다. 그는 뒤돌아 누워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아서 참다못해 다시 돌아누웠다. 그리고 시연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여보.” “네?” 시연이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마치 대기 중이었던 간병인처럼 바로 책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혹시 필요한 거 있어요?” 유건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잠이 안 와.” ‘...그래서?’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이제 나더러 자장가라도 불러 달라는 건가?’ “눈 감고 숫자 세봐요.” 시연은 참고 부드럽게 말했다. “금방 잠들 거예요.” “싫어.” 유건은 단칼에 거절했다. “너무 일러. 잠이 안 와.” “그치만, 지금 당신 몸 상태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해요.” “누워 있기만 하면 돼. 너는 그냥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되고.” 시연은 체념하며 말했다. “그럼 책 가져와서 여
시연은 장난이 아니었다. 평소 예능을 거의 보지 않았는데, 막상 보기 시작하니 꽤 재미있었다. “푸흣...” 그녀는 소파에 기댄 채 피식 웃음이 터졌다. 유건은 정작 방송은 보지 않고, 여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재미있어?” “네.” 시연은 눈을 떼지 않은 채 가볍게 대답했다. “꽤 볼 만하네요. 근데 장소미, 생각보다 예능감 있네요.” 그러면서 슬쩍 유건을 바라보았다. “연예인으로 자리 잘 잡은 거 같아요. 인기 많죠?” “그렇지, 아마도.” 유건은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는 시연이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장소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이 여자, 질투도 안 나고, 신경도 안 쓰이나?’ ‘혹시, 나에게 애정이 없어서?’ 그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오자, 유건의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불쾌함을 참을 수 없었다. “채널 바꿔!” 순간적으로 남자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안 돼요!”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보고 싶다면서요? 재미있잖아요, 그냥 봐요.” “내가 언제 보고 싶다고 했어?” 유건은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채널 바꾸라고 했잖아!” “아니, 분명 본인이 고른 거잖아요.” 시연은 너무나 어이없었다. ‘아까 분명 당신이 보자고 했잖아?’하지만, 그녀는 남자의 잔뜩 구겨진 표정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리모컨을 들었다. “알았어요. 바꿀게요.” 한 채널, 또 한 채널...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뭘 보고 싶은지도 말하지 않았다. 답답해진 시연이 결국 선택했다. “그럼 영화 봐요. 이거 괜찮네요.” 할리우드 영화였기에 유건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드디어 마무리된 느낌에, 시연은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이리 와.” “네?” 시연이 고개를 돌리자, 유건이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 와서 누우라고.” ‘또 시작이네...’ 시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지만,
시연은 살짝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유건의 허리에 올려져 있던 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바로 그때, 유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신음을 흘렸다. “으...” 시연은 순간 놀라며 움찔했다. “왜 그래요? 상처 건드렸어요?” ‘나를 이렇게 끌어안고 자다 보니, 분명 무리가 간 것 같아...’ “음... 그럴 수도 있지.” 유건은 찡그린 얼굴로 말하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연은 더 걱정되었다. “봐봐요, 어딜 다쳤나 확인해야죠.” 그녀는 재빨리 손을 뻗어 유건의 병원복 단추를 풀려고 했다. 하지만, 여자의 손목이 단단히 붙잡혔다. 그리고 잠시 후, 푹-시연은 남자의 품에 다시 끌려들어 갔다. “잠깐만요... 상처를 확인해야 해요.” 시연은 당황하며 중얼거렸지만, 유건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그녀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남자의 목소리는 깊고, 어딘가 애정이 얽혀 있었다. “내 상처가 터지면, 걱정할 거야?” 시연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유건의 상처는 괜찮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지?’ ‘내 반응을 확인하려는 걸까?’ 시연은 천천히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 “장난치지 마요. 이따가 회진할 때 올게요.” 그녀는 유건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지만, 손목은 여전히 유건에게 잡혀 있었다. 유건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대답 안 해?” 그는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내가 다치면, 마음이 아파?” 시연은 피식 웃었고, 살며시 손을 뺐다. “그런 걱정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에요.”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적어도 지금은, 내가 걱정할 처지가 아니지 않나요?” 유건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졌다. “무슨 뜻이야?” ‘너는 내 아내야. 그럼 당연히 나를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시연이 문을 열고 한 발을 내디뎠다. “지시연.” 뒤에서 유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서늘한 음색, 그 아래 은밀하게 깔린 분노의 기운이 날카롭게 퍼져나갔다.“거기 서.” 시연의 어깨가 순간 움찔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문이 닫혔다. “젠장...” 유건의 날카로운 옆선이 차갑게 굳어졌다. ‘대체 어떻게 해야 저 속이 풀리려나?’ ‘끝까지 날 들었다 놨다 해야 직성이 풀리려나?’ ‘미친...’ “유건 씨...” 옆에서 장소미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입술을 깨물었고,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미안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괜히 와서... 진 선생님이 오해한 거겠죠? 제가 가서 얘기해 볼까요?” “그럴 필요 없어.” 유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설명이라니, 그건 지시연이 질투할 때나 필요한 건데, 지시연은 애초에 관심조차 없다고.’‘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아니, 어쩌면 내가 장소미랑 엮이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럼...” 소미는 속으로 안도하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제가 간병인을 불러서 방을 치우게 하고, 닭곰탕도 다시 떠 올까요?” “그래, 고마워.” 유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여자가 신경 쓰지 않는데, 나도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없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간병인이 방을 정리했고, 소미가 닭곰탕을 다시 떠 왔다. 유건은 연거푸 두 그릇을 비웠다. 그런데도... 시연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편, 시연은 병실을 나와 1층 로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실험 보고서를 챙겨올걸.’ ‘보고서를 수정하는 게 그냥 멍하니 있는 것보단 나았을 텐데.’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결혼은 했지만, 남편의 여자를 위해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신세라니.’ ‘이혼할 수도 없고, 남편을 비난할 수도 없는 상황...’ 시연의 가슴이 답답했고, 가슴이 점점 더 조여오는 느낌이었다. 바
그건 고유건의 뼛속까지 새겨진 품성이었다. “시연아...” 진아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속이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미안해, 내가 정말 아무 도움도 못 돼서.” “됐어, 울지 마.” 시연은 웃으며 휴지를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이제 네가 다 알았으니까, 이 일에 대해 성빈이랑 잘 이야기해 봐. 괜히 충동적으로 또 무슨 일을 저지르지 않게.” “걱정하지 마, 잘 말릴게.” 진아는 지난번 진성빈의 일만 떠올려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잘 지켜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진아는 시연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너도 약속해.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혼자 끙끙 앓지 않겠다고.” “응, 약속할게.” 겨우 진아를 달래 눈물을 그치게 한 후, 시연이 말했다. “점심 같이 먹을래?” “응?” 진아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시간 있어? 고유건을 안 챙겨도 돼?” “안 챙겨도 돼.” 시연은 장소미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좀 늦게 돌아가는 게 좋겠어.’시연이 진아의 팔을 잡고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가자, 학식 말고 뒷골목에서 먹자.” “좋지!” 진아는 밝게 웃었다. 둘은 뒷골목에서 밥을 먹고, 잠시 쇼핑하다가 오후 세 시가 다 되어 병원으로 돌아갔다. 병동 입구에 들어서면서 시연은 문득 생각했다. ‘장소미는 이제 갔겠지?’ 하지만 예상과 달리, 병실 앞에는 주지한이 초조한 얼굴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수님, 왜 이제야 오셨어요?!” 시연은 멈칫하며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지한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직접 들어가 봐요. 형님이... 아직까지 밥을 안 드셨어요.” “밥을 안 먹었다고요?” 시연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직접 들어가서 여쭤보세요.” “알겠어요.” 시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병실 문을 열었는데,
이 정도로 티 나는 투정을 시연이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단지 그녀는 유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고, 굳이 신경 써서 맞춰 줄 마음도 없었지만, 이 남자를 달래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도 온종일 불만 가득한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연은 유건을 바라보며 잔잔하게 웃었다. “밥 안 먹으면 안 돼요. 몸 상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주방 쪽으로 향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와 말했다. “죽도 있고, 닭곰탕도 있고, 반찬도 좀 있어요. 데워줄까요?” 유건은 침대에 반쯤 기대앉아 있었지만, 여전히 기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못마땅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질려서 안 먹고 싶어.” ‘고작 두 끼 먹었을 뿐인데? 역시 까다로운 재벌 도련님...’ 시연은 어쩔 수 없이 물었다. “그럼 뭐 먹고 싶어요?” “나보고 생각하라고?” 유건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반문했다. 그 말투에 시연은 살짝 머쓱해졌다. ‘아, 또 내 잘못이야?’ 유건이 아직 소화하기 힘든 음식은 먹을 수 없는 상태라는 걸 떠올린 시연은 다시 물었다. “그럼... 국수는 어때요? 아니면 만둣국은요?” 유건은 대답하는 대신, 되려 묻는 쪽을 택했다. “너, 밖에서 그렇게 오래 있다 왔는데, 점심은 뭐 먹었어? 누구랑 먹었냐고.” “나요?” 시연은 순간 멍해졌다가 솔직히 답했다. “진아랑 같이 뒷골목에서 국수 한 그릇 먹었어요.” 그제야 유건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다행히 남자랑 있었던 건 아니네.’ 그러고는 콧방귀를 뀌듯 말했다. “나도 국수 먹을래.” 남자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시연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지한 씨한테 말해서...” “잠깐.” 시연이가 돌아서려던 순간, 유건이는 그녀의 손목이 덥석 잡혔다. 시연은 갸웃하며 물었다. “왜요?” 유건은 마치 멍청이를 보는 것처럼 그녀를
유건은 느릿느릿 젓가락을 집어 들며 참지 못하고 말했다. “간장 좀 넣어봐, 색깔 좀 내게. 그리고 그냥 면만 삶은 거야? 채소는? 계란도 안 넣었어?” “있어요, 다 있어요!” 시연은 눈을 반짝이며 면 그릇을 가리켰다. “다 밑에 있어요. 계란후라이도 있어요.” “오?” 유건은 피식 웃으며 젓가락을 아래로 넣어 건져 올렸다. 채소가 나왔다. 그리고... 그 밑에 있던 계란도. ‘음... 새까맣잖아?’ 유건이 순간 멈칫했다. ‘이건... 탄 거 아닌가?’ “잘 안됐어요.” 시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탔는데, 한쪽 면은 멀쩡해. 뒤집어서 먹으면 되잖아요...” “하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건은 결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시연의 볼이 붉어졌다. “그만 웃어요! 뭐가 그렇게 웃기다고 그래요?” “푸흣...!” 남자의 웃음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럼 먹지 마요!” 화가 난 시연이 면 그릇을 치우려고 했다. “맛없게 만든 게 내 잘못이에요? 당신이 해달라고 했잖아요!” “이거 놔요.” 유건은 여자의 손목을 가볍게 잡으며 웃음을 거뒀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했다. “안 먹는다고 한 적 없어. 배고파서 먹을 거야.” 그리고 손가락을 툭, 탁자에 두드렸다. “먹여줘.” 시연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유건을 바라봤다. “진짜 먹을 거예요?” “응.”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와이프가 해준 건데, 안 먹을 수 있나?’ “그래요...” 시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 유건은 망설임 없이 입을 벌려 한입에 먹었다. “맛있어요?” 시연은 조심스레 물었다가, 살짝 말을 바꿨다. “아니, 먹을 만해요?” “응.” 입에 가득 찬 채로, 그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짓으로 계속 먹여달라고 했다. 한 젓가락, 또 한 젓가락.
“그럼 다행이네요.”시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다행이야... 아무 일도 아니어서.’“그나저나...”오선화는 진료차트를 정리하며, 마치 일상 대화하듯 조용히 말을 꺼냈다.“이제 6개월 차에 들어섰어. 곧 임신 후반기인데, 슬슬 휴식은 생각 안 해?”“휴식이요?”시연은 잠깐 멍해졌다. 그 생각은 진심으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오선화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부터는 배도 더 많이 나올 거고, 몸도 훨씬 무거워질 거야. 부기도 생기고, 움직이기도 불편해지고.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것도 괜찮지 않나?”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일할 수 있어요.”오선화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뭔가 걸리는 게 있어? 고 대표님이 계시니까, 병원에서도 대놓고 뭐라고 하진 않잖아.”“네... 알고 있어요.”시연은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야.’ “저보다 선배인 선생님들도 다들 만삭까지 일하세요. 7개월까지 야간 당직도 서시고요. 저야 그에 비하면 충분히 배려받고 있는 거죠.”‘그 배려가... 전부 고유건 덕분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어.’“게다가 가만히 있는 것보다 이렇게 일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출산도 더 수월하다고 하잖아요?”“그건 맞아.” 오선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더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나는 그냥 권유만 한 거야.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컨디션 안 좋을 땐 꼭 쉬어야 해, 알지?”“네. 그럴게요.”시연은 산모 수첩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교수님, 수고하세요.”“그래, 잘 가.”시연이 문을 나서자 방 안의 공기가 살짝 무거워졌다.오선화는 웃음을 거두고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그러고는 이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통화 목록을 스르륵 넘긴 오 교수의 손이, 한 이름에서 멈췄다.바로 ‘고유건’이었다. 오선화는 깊게 한숨을 쉬고, 전화를 걸 준비했다.
그날 오후, 은범은 곧장 회사로 향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부사장 이지혁과 비서가 며칠 사이 벌어진 상황을 보고했다.“GP그룹이 우리와의 협약을 전면 종료했어요.”“GP그룹?”은범의 표정이 굳어졌다. ‘GP그룹... 고유건... 왜 갑자기...?’이번 협약은 처음부터 은범이 직접 유건과 만나 성사한 것이었다. 물론, 사적인 일로 둘 사이에 약간의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연을 둘러싼 복잡한 사정.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일 뿐.‘우린 둘 다 공사 구분은 확실한 사람들이었잖아...’은범은 이해할 수 없었다.“협약은 계속 수익이 나고 있었잖아요. GP 측에서 계약 종료 사유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정확히 말하지 않았어요.”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입장은 아주 확고했어요. 위약금은 예정대로 지급하겠다고 했고요. 환불 어음은 이미 발송했다고 합니다.”‘그렇게 빨리?’은범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떤 설득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모든 절차가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더 불안했다.“그래서 일단 수령하진 않았습니다. 돌아오시면 같이 상의하려고 했거든요.” “잘하셨어요.”‘보상보다 중요한 건, 이 협력이 가진 미래 가능성이었는데...’은범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고 대표님한테 직접 연락해 볼게요.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야 하니까요.”“네, 애초에 사장님께서 직접 성사한 건이니까... 사장님께서 움직이는 게 맞죠.”은범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GP그룹으로 향했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GP그룹 본사 건물에 도착한 은범은 곧장 로비 데스크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고 대표님 뵈러 왔습니다. 전해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로비 데스크 직원은 정중하게 미소 지었다.“안녕하세요, 혹시 예약은 하셨을까요?”“아니요.”“죄송하지만, 고 대표님과의 면담은 반드시 사전 예약이 필요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그건 알지...’은범은 고개를
“고 대표님!”하은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유건 앞을 가로막았다. 눈빛엔 분노가 가득했다.“이렇게 그냥 가시면 안 되죠!”“뭐라고?”유건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어서 시선엔 의아함과 경멸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시연이 말이에요.” 하은은 안쪽을 가리켰다.“시연이는 고 대표님의 아내잖아요. 근데, 아내 앞에서 애인이랑 나가는 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애인’이라는 단어가 뱉어지는 순간, 유건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리고 눈가의 웃음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지금... 누가 감히 소미 씨한테 그런 말을 해?”그 말에 하은은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곧 더 큰 화가 치밀었다.“제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그리고, 장소미 씨는 또 뭐예요? 고 대표님한테 아내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행동하는 거, 무슨 의미인데요? 그리고 고 대표님이 장소미 씨를 감싸면, 시연이는 뭐가 되는 건데요?!” ‘시연이를 뭐로 보는 건지, 내가 대신 물어야겠어!’하지만 유건은 피식 웃었다. 차가운 비웃음이었다.‘그럼 지시연은 나를 뭐로 봤을까?’그러나 이런 생각을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비켜.”“싫어요!”그 말에 유건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목소리엔 더 이상 감정이 없었다.“솔직히, 너한텐 손쓸 가치도 못 느끼겠지만... 이쯤 되면 진짜 귀찮네.”“뭐라고요?”하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해졌다. ‘지금... 나한테 이런 말을...?’“비킬 거야, 안 비킬 거야?”“하은아!”그때, 시연이 급히 달려왔고, 하은의 팔을 잡아끌며 중간에 섰다.“이런 사람들이랑 뭐 하러 싸워? 가고 싶다잖아. 그냥 보내줘. 누가 어딜 가든, 그건 자유잖아.”그러면서 하은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가서 라면이나 먹자. 아까 건 너무 불었으니까, 새로 하나 뜯어야겠어.”시연의 말투는 덤덤했고, 시선은 여전히 유건을 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유건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유건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간 이식 얘기, 우주한테 물어본 적 있어?”“뭐라고요?”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그걸... 저 사람이... 지금 왜 묻지?’찰나의 정적. 그리고 곧, 시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나는 우주의 보호자예요. 우주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해요.”하지만 유건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내가 알기론, 우주는 올해로 만 14세야. 이미 법적으로 자기 결정권이 생긴 셈이지.”남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만큼 분명했다.“게다가 우주는 신체 조건도 아주 좋잖아.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기증 가능 기준에 부합해.”유건의 말은 아주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논리는, 결국 ‘장소미’를 위한 것이었다.‘하... 정말 대단하다, 고유건.’시연은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무심한 듯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장소미를 스치듯 바라봤다.‘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말이 되는구나.’“우주의 열네 살이, 일반 아이들의 열네 살과 같다고 생각해요?”시연은 미세한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우주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내가 결정하는 거라고요.”그 말에 유건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는 톤을 낮추면서도 힘을 실어 말했다.“지나치게 독단적이네.”“우주는 똑똑한 아이야. 심리적으로 결핍이 있는 거지, 지능이 낮은 건 아니잖아. 만약 언젠가 지 사장이 세상을 떠나고, 우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자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그 말에 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 입꼬리에 걸려 있던 억지 미소조차 사라졌다.“자책이요...?”시연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냉소가 섞인 차가운 어린 목소리로 유건을 향해 말했다.“잘 들어요. 우린 인생에서 많은 걸 후회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미안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그 ‘누군가’ 안에 지동성은 절대 포함되지 않아요.”그 말에 유건의 이
하은은 눈치가 빨라서 괜히 시연에게 짐이 될까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시연은 역시 장미리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우리 엄마요? 죽은 지 십몇 년 됐는데, 오늘 좀비처럼 부활이라도 한 거예요?”하은은 그제야 시연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다. “아! 그럼 내가 지금 바로 무당 선생님한테 연락할게!”“얼른 해줘.”두 사람은 말 그대로 티키타카였다. 장미리의 얼굴은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지시연! 넌 진짜 싹수가 없어!”“맞아요.”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라는 사람도 죽은 거나 다름없죠.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으니, 예의 따윈 배운 적 없어요.”그녀는 팔을 쭉 뻗어 문을 가리켰다.“무슨 용건인지는 상관없고, 지금 당장 나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엄마’라는 말 좀 들먹이지 마세요. 혹시라도 다음에 또 그런 말을 뱉는다면... 당신 입, 내가 부숴놓을 수도 있어요.”시연의 눈빛이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서릿발 같았다.“진심이에요. 장난 아니니까, 절대 시도하지 마세요.”“너... 너 진짜...!”장미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시연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말솜씨에서도, 기세에서도 밀렸으니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물러설 수 없었다.“네 아빠... 쓰러졌어. 지금 혼수상태야.”그 말에 시연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 정도라고...?’눈빛 속에 망설임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그럼 그분 옆에서 간병이라도 해주셔야죠. 여긴 왜 와서 소란인데요?”“너...”“지시연!”자기 엄마가 밀리는 걸 보다 못한 소미가 나섰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진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우리가 왜 너를 찾아왔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나야 모르지.”시연은 흰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그럼 알려줘 봐. 여기엔 왜 온 건지.”소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흐흑... 흐윽...]전화기 너머로 장미리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아빠 비서한테 전화 왔어... 회사에서 멀쩡히 있다가 갑자기 쓰러졌대! 지금 병원으로 이송됐고, 나도 지금 가는 중이야! 소미야, 네가 더 가까우니까 먼저 좀 가봐!]“알겠어요, 엄마!”소미는 전화를 끊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눈가엔 금세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유건 씨... 우리 아빠가 또 쓰러지셨어요...”사정을 들은 유건은 곧장 몸을 일으켜, 여자의 팔을 부드럽게 받쳐주었다.“괜찮아, 지금 당장 같이 가자. 내가 함께할게.”“네... 유건 씨가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저 혼자였으면 무너졌을지도 몰라요.”...장미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지동성은 응급실을 거쳐 병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이번엔 지난번보다도 훨씬 상태가 심각했다.지동성은 입원했지만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담당 교수도 장담할 수 없었다.“지금은 경과를 보셔야 합니다. 언제 의식이 돌아올지는...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흑...”병상 옆 의자에 앉은 장미리는 눈물을 뚝뚝 흘렸고,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이걸 어쩌면 좋아... 네 아빠, 갈수록 심해지는데... 간이식도 아직 못 받았는데...”갑자기 장미리는 고개를 번쩍 들어 유건을 바라봤다.“고 대표님, 간 이식 소식은 아직도 없는 건가요?”이전에 유건은 간 이식 대기자를 대신 알아봐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직은 연락이 없습니다.”그는 도와주기로 했고, 실제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이런 일은 결국 ‘운’과 ‘순번’이 따라야 하는 법이었다. 돈이 많다고 먼저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흐흑... 흐으...”장미리는 더욱 흐느껴 울며, 소미의 손을 꼭 붙잡았다.“소미야... 네 아빠, 의식도 없고... 이대로면... 정말 오래 못 버틸 수도 있어...”“그럴 리 없어요, 엄마. 아직 방법이 있을 거예요.”소미는
여자애는 두 손을 들고 조심스레 다가왔다.“진짜 살짝만, 살짝만 만져볼게요.”말처럼, 여자애의 손끝은 아주 조심스러웠다.“와... 아기가 있는 배는 이런 느낌이구나! 선생님, 진짜 대단해요. 엄마 되는 거, 완전 힘든 일인데...”시연은 조용히 웃으며 물었다.“근데,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누굴 찾는 건가요?”“저요?”여자애는 손을 거두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리고 어깨에 멘 가방을 툭 내려놓았다.“혹시 변이준 있어요? 저 보고 오라 그랬거든요.”‘이준 선배님?’“수술 들어가셨어요.”“헉, 진짜요?”여자애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아싸, 잘됐다!”그 말과 동시에, 다시 가방을 어깨에 멨다.“선생님, 나중에 변이준이 오면 전해주세요. 저 왔다 갔다고, 없어서 먼저 간다고요!”시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애는 벌써 휙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도망치듯 사라지는 뒷모습이었다.“어... 네...”시연은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여기가 무슨 호랑이굴이라도 되는 건가? 저렇게까지... 도망갈 일인가?” 그래도, 궁금했다. ‘저 친구... 선배님이랑 어떤 사이지?’‘여동생일까? 닮은 구석은 없었는데...’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둘 다... 눈에 띄게 수려했다는 정도?’오후 2시쯤, 변이준이 수술을 마치고 내려왔다.머리는 아직 축축했지만, 얼굴은 늘 그렇듯 환했다.시연은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선배님, 의뢰하신 처방은 이미 내려놨어요. 환자도 약을 복용 중이고요.”“역시, 고마워!”이준은 환하게 웃으며,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훑었다. 그때, 시연은 문득 오전 일을 떠올렸다.“아, 맞다. 오늘 오전에 어떤 여자분이 선배님을 찾아왔었어요. 근데 안 계셔서 그냥 간다고 하시던데요?”“그냥... 갔다고?”그 말을 들은 이준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하... 그 녀석, 말을 좀 듣고 살면 어디 덧나나...”이준은 수건을 손에 쥔 채, 더 이상 머리를
단 한 마디. 그 말에 시연은 마치 얼음물에 던져진 듯 몸이 굳었다. ‘맞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따갑지?’그리고 뺨이 화끈거릴 정도로 따가운 말이 그녀를 후려쳤다.“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유건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냉소가 담긴 웃음이었다.“내가 왜 양석현 교수 프로젝트에 투자했을 것 같아?” “내가 마음이 약해서? 돈이 남아돌아서? 밤에 잠이 안 와서?”순간, 남자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유건의 눈빛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아니, 다 아니야. 널 위해서였어. 널 아끼니까, 널 좋아하니까, 돈을 쓰는 것도 아깝지 않았던 거야.”그 말을 끝내고, 유건은 웃었다. 이번엔 대놓고, 조롱이 담긴 웃음이었다.“근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왜 또 돈을 써야 하지? 지금의 네가, 그럴 가치가 있나? 차라리 그 돈으로 비둘기 밥이나 주는 게 더 낫겠는데?” 시연은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유건은 한 손을 들어 휘휘 저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이제 가고,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마. 너랑 엮이는 거, 진심으로 지긋지긋해. 너랑 관련된 모든 일은 다 끝났어.”그는 돌아섰다. 단호하고 차가운 걸음이었다.“유...” 시연은 반사적으로 불러보려 했지만, 목에 걸린 그의 이름은 한 글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못 해...’온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심장도, 생각도, 감정도 전부 마비된 채로.그 순간, 유건이 다시 멈춰 섰다. 하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그저 등을 보인 채로 담담하게 말했다.“그래도 일부러 찾아왔고, 부부였던 정은 있으니까... 지원금은 지한이 통해서 처리하도록 할게. 하지만 이번뿐이야. 다음은 없어.”그는 그 말을 끝으로 차로 향했고, 조용히 문을 열고 올라탔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그대로 떠나버렸다.그리고 시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가을 오후의 바람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지한이 보기엔, 시연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간 듯했다. 너무 오래 기다렸으니, 그럴 법도 했다.하지만 바로 그때, 화장실에서 막 나온 시연은 멀리서 유건과 지한이 정문을 지나 계단 아래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저기 있다...!’더는 생각할 틈이 없어서 시연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유건 씨!”문 앞에서 유건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놀란 듯 고개를 돌리자, 시연이 급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여자의 걸음은 빨랐고, 숨이 찰 정도로 다급했다. 유건의 미간이 스르륵 좁혀졌다.‘저 여자... 아직도 안 갔던 거야?’“유건 씨! 잠깐만요!”시연은 허리를 짚으며, 거의 뛰다시피 정문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건은 다시 한번 얼굴을 찌푸렸다.‘배가 저렇게 불렀는데도... 뛰고 있어?’ 하지만 곧 속으로 비웃듯 생각했다.‘뛰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유건 씨...” 시연은 겨우 도착해,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잠깐이면 돼요. 몇 분이면 되는데... 시간 좀 줄 수 있어요?”맑은 눈망울이 간절히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유건은 잠시 목이 메는 듯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비웃듯 느릿하게 말했다.“신기하네. 네가 먼저 날 찾을 줄은 몰랐거든.”“그게 아니라, 나...”그러나 시연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유건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근데 난, 너한테 줄 시간이 없어. 단 1분도.”차가운 눈매, 건조한 말투. 남자의 입꼬리는 비쭉 올라갔지만, 표정엔 온기가 없었다.그러고는 단호히 돌아섰다. 그 차가운 뒷모습은 조금의 여지도 없이 닫혀 있었다. 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췄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이런 식으로, 날 밀어내던 사람...’유건의 본모습을, 그녀는 잠시 잊고 있었다. 시연의 몸속으로 한기 같은 게 퍼지며, 두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그저 멍하니 유건이 차에 올라 문을 닫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