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시연은 병실로 돌아왔다. 4시에 웨딩드레스 치수를 재기로 했으니,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지금이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병실 안은 조용했다. “유건 씨?” 사방을 둘러봤지만, 병실 안에는 유건이 없었다. ‘어디 간 거지? 곧 나가야 하는데...’ 시연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각. 유건은 장소미의 병실에 있었다. 유건에 비하면 소미의 부상은 훨씬 가벼웠다. 단순한 타박상 정도였고, 오늘 퇴원이 예정되어 있었으니 말이다.다만, 퇴원 전 마지막으로 종합검진을 받았고, 그 결과를 본 후 소미는 유건을 불러들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소미는 말을 마친 뒤, 조금 전까지 울었던 흔적이 남은 붉은 눈가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유건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유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왜 이제야 안 거야?”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도 묵직했다. “그게...” 소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도 이런 건 처음이라... 그리고 원래 생리가 불규칙했어요. 게다가 요즘 바빴기도 해서... 전혀 생각을 못 했어요.”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아랫배 위에 손을 올렸다. “3개월 됐대요. 그날 밤...” 그 말에 유건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늘이 날 이렇게까지 조롱하는 건가...?’ 그는 이미 결심했었다. 시연과 결혼해서 정식 부부가 되기로. 시연이 가진 아이가 자신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이기로. 그런데 이제 와서...‘장소미가 임신했다고?’ ‘그것도... 3개월...’ ‘로얄호텔에서의 단 한 번으로...’ ‘한쪽은 내 아내. 한쪽은 내 친자식...’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유건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이마 위로 툭 튀어나온 혈관이 도드라졌다. 태양혈이 욱신거리며 터질 듯한 두통이 몰려왔다. 그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화면에 ‘시연’ 두 글자가 떴다.
“딸.” 장미리는 딸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이렇게 해도 괜찮겠어? 너 정말 임신한 것도 아닌데, 나중에 들통나면 어쩌려고?” “흥.” 소미는 코웃음을 쳤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면서도, 그 안에는 단단한 집착이 서려 있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면 돼요. 적어도 지금, 그 사람은 날 버릴 수 없으니까요. 내 말이 틀렸나요?”“맞아.” 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다 지시연 때문이야!” 딸의 손을 꼭 잡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 “엄마가 도와줄게. 그 여자가 네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니, 정말 웃기지도 않아! 이 엄만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엄마...” 소미는 창백한 얼굴로 어머니 품에 기댔다. “정말... 이제는 방법이 없어. 나, 정말 고유건을 좋아해.” ‘단순히 남자의 돈과 권력이 아니고,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한다고.’ ‘난 이미 마음속 깊이 고유건이라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어. 이젠 그 남자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아!’‘이생에서, 내가 원하는 남자는 오직 한 사람, 고유건뿐이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유건은 핸드폰을 꺼내 시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신호음이 울리더니 이내 통화 중으로 바뀌었다. ‘받지 않는 게 아니라... 통화 중?’ 그는 이를 악물고 전화를 끊었고, 바로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병실 문을 열자마자, 시연의 전화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유건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집에 간 것도, 일부러 내 전화를 피한 것도 아니었어.’ “응, 좋아. 그럼 그렇게 하자.” 시연은 통화를 마친 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문 앞에 서 있는 유건과 눈이 마주쳤다. “돌아왔네요.”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 유건은 곧장 다가가, 여자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낮고도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부터 와 있었
실험 수업은 45분 만에 끝이 났고, 시연은 수업 시간에 아주 충실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끝나고 나니, 머리가 텅 빈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장소미가 보내준 사진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눈을 반쯤 감았다. ‘이 사진이 없었으면, 나는 장소미의 말을 믿지 않았을 거야.’ ‘어젯밤까지만 해도 나한테 잘살아 보자고 했었는데...’ ‘잘살아 보자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시연이는 핸드폰을 꼭 쥔 채 계속 서 있었다. “형수님?” 익숙한 목소리에 여자의 정신을 차렸다. 정기환이었다. 유건의 지시로 시연을 데리러 온 기환은, 시연이 한참을 나오지 않자 걱정이 됐는지 직접 강의실 앞으로 찾아왔다. “수업은 끝났어요? 이제 돌아가도 되나요?” “네.” 시연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가요.” ... 병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시연이가 말했던 한 시간을 훌쩍 넘긴 상태였다. 유건은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봤다. 시연이 가방을 내려놓고, 옷장에 다녀오는 것을 보고서야 유건이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수업이 늦게 끝난 건가?” “네.” 시연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교수님께서 이제 부드러운 음식을 먹어도 된다고 하셨어요. 성애 이모님께 전화해서 준비해 달라고 할게요. 저녁은 같이 먹어요.”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 않은 여자의 모습.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건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니면, 단순히 기분 탓일까?’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할게.”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시연은 유건의 몸을 조심스레 닦아주고 옷을 갈아입혔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누워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다. 어느새, 시연의 귓가에 들려오던 남자의 숨소리가 점점 고르게 변하자, 시연은 조용히 눈을 떴다. 허리에 느껴지는 무게... 남자의 팔이 감싸
하지만 시연은 그러지 않았다. 시연은 유건의 품에 기대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좋아요.” 그 후, 두 사람은 함께 씻고 아침을 먹었다. 교수님들이 회진을 돌고 간호사가 치료를 마친 뒤, 별다른 문제 없이 오후 3시가 되었다. 출발하기 전, 시연은 유건의 상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괜찮아 보이는데요...” 혹시라도 모를 일을 대비해 그녀는 다시 한번 유건에게 붕대를 감아줬다. 이후, 운전기사가 차를 몰아 둘을 웨딩숍으로 데려갔다. 이곳은 G시에서 오래된 맞춤 웨딩숍이었다. 장인이 프랑스와 G시를 오가며 운영하는 곳으로, 한 달 중 보름만 여기에 머물렀다. 오늘은 치수만 재고 스타일을 선택하는 날이라, 장인은 없었다. 대신, 점장이 직접 나와 두 사람을 맞이했다. “고 대표님, 사모님, 안으로 들어오시죠. 아, 신랑 신부님은 따로 치수를 재셔야 합니다.” 점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안내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치수 재고 나면 디자인을 함께 고르실 수 있어요.” 유건은 시연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갔다 와. 여기서 기다릴게.” “네.” 신부의 치수는 더 정밀하게 측정해야 했기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시연이 나오자, 유건은 이미 끝나 있었다. 하지만 창가에 서서 전화를 받는 모습이었고, 멀리서도 봐도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전화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 대표님, 안 오실 건가요? 소미가 오후 내내 세 번인가 네 번이나 토했어요! 지금 거의 못 서 있을 정도라니까요!]조애린이었다. “알겠어.” 유건의 미간이 깊이 좁혀지던 그 순간, 시연과 눈이 마주쳤다. 유건은 잠시 멈칫하더니, 전화를 짧게 끊어버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시연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남자의 표정은 깊고 조용했다. “치수는 다 쟀어? 점장이 디자인 샘플을 가져오는 중일 거야. 원하는 걸 고르되, 굳이 하나만 고를 필요는 없어. 부분별로 네
“사모님?” 디자인 샘플을 품에 안고 온 점장이 시연을 보고 멈칫했다. 왜냐하면 시연이는 당장이라도 나가려는 모습이어서 점장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디자인 샘플 가져왔습니다. 앉으시면 하나씩 설명해드릴게요.” “괜찮아요.” 시연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네?” 점장이 당황했다. ‘이게 말이 되나?’ ‘이 사모님은 우리 매장에서 가장 중요한 고객인데, 디자인도 안 보고 그냥 간다고?’ ‘이걸 우리 사장님이 알면, 내 자리도 위험해질 수 있어!’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희가 실수한 부분이 있나요? 만약 그랬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점장은 오해한 듯했다. “아니에요.” 시연은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고, 그렇다고 이곳에 남아 있는 것도 쉽지 않았다. 유건도 어차피 떠났고, 시연에게 웨딩드레스가 더는 의미가 없었다. 그래도 점장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 같아 잠시 고민하더니, 그녀는 간단히 말했다. “그럼... 제가 못 보더라도, 점장님이 직접 골라주시면 어때요?” “네?!” 점장이 깜짝 놀라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우리 샵의 웨딩드레스는 기본이 수십억 이상인데, 어떻게 내가 신랑과 신부를 대신해서 골라주는 거야?’ “그건 좀... 사모님, 저희가 전문가긴 하지만, 취향은 다 다르니까요.” “괜찮아요.” 시연은 무심하게 말했다. “점장님이 전문가시잖아요. 믿어요. 어떤 걸 골라도 저는 만족할 거예요.” “그래도...” 점장은 여전히 난처한 기색이었다. 이건 전문성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선택의 영역이었다. “그냥 그렇게 해주세요.” 더는 신경 쓰기 귀찮아진 시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급해서 이만 가볼게요.” “사모님...!” 점장의 부르는 소리를 뒤로한 채, 시연은 매장을 빠져나왔다. 마치 도망치듯. ...촬영장, 휴게실
[확실해? 정말 안 말릴 거야?] 소미는 고개를 숙인 채, 입꼬리를 아주 살짝 말아 올렸다. 여자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안 말려. 기억해 둬, 이번 일은 우릴 통해서 나온 게 아니야.] 조애린의 답장은 금방 도착했다. [걱정하지 마, 알아서 할게.] 핸드폰을 닫은 소미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온몸이 묘하게 가벼워졌다. ‘속이 다 시원해!’ ...지씨 저택 앞에 도착하자, 유건은 여전히 소미를 품에 안은 채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대문을 지나 2층까지 올라갔고, 장미리가 바로 뒤를 따랐다. “고 대표님, 제가 도울게요.” “괜찮습니다.” 유건은 고개를 저으며 소미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불을 당겨 그녀의 몸을 감쌌다. “여사님, 만두 좀 부탁드릴게요. 소미 씨가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아이고, 알겠어요!” 장미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쉽게 나가지 않은 채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저기, 고 대표님... 소미한테 시간을 좀 달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게... 얼마나 더 필요한 건가요?” “엄마!” 소미가 당황하며 소리쳤고,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만해요!” “아니, 엄마는...” 장미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고 대표님, 우리 소미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는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고 묻고 싶어요!” “엄마!” 소미가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이제 그만해요! 유건 씨도 다 생각이 있을 거예요.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 “알았다, 알았어.” 딸에게 면박당하자, 장미리는 마지못해 물러났지만, 떠나기 전에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다 자기를 위한 건 줄도 모르고...” 방 안이 조용해졌다. 소미는 미안한 듯 유건을 바라봤다. “걱정돼서 저러시는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나도 알아.” 유건은 짧게 대답하며 미간이 살짝 찌푸렸다. “요즘 몸이 안 좋으면, 촬영장엔 가
은범은 평소에 거짓말하지 않기에, 시연은 은범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날마다 기다리고, 애타게 바라봤을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내가 이런 은범이를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야...’ ‘그리고 어떤 말들은 확실히 해야 할 때가 왔어.’ “같이 밥 먹자.” 은범의 얼굴이 환해졌다. “응, 좋아.” 시연은 대충 먹자고 했지만, 은범은 그녀의 입맛에 맞춰 단골집을 골랐다. 은범이 주문한 음식도, 시연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졌다. 음식이 나오자, 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참기 위해 애써 눈을 깜빡였다. 그때,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화면을 확인하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은범은 두어 초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안 받아도 돼?” “응.” 시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고 문자야.” “아...” 지금 시연의 마음은 반가움도, 실망도 아니었다. 은범은 그저 묵묵히 그녀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 “왜 이렇게 늦게까지 밥도 못 먹었어? 그 사람은, 너한테 신경도 안 써?” 그는 이름을 말하진 않았지만, 시연은‘그 사람’이 유건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가 임진아에게 이야기했고, 진성빈도 알게 되었으니, 당연히 은범도 알게 됐을 것이었다. 시연은 밥 한 숟갈을 떴다. “난 애가 아니야, 배고프면 알아서 먹으면 돼.” 은범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니까... 고유건이 정말 신경도 안 쓴다는 건가?’ 사실, 은범은 시연과 유건의 일을 성빈에게 듣고 나서,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내가... 너무 늦었나 봐.’ ‘나는 진작 시연의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졌어야 했어. 하지만 항상 보고 싶은 걸 어떡해?’ 은범은 가슴이 저렸다. “시연아, 그 사람... 너한테 잘해?” 시연은 잠시 행동을 멈추고 충분했지만, 그 몇 초의 침묵이면 충분했다. 은범이 확신에 찬 어투로 물었다. “잘 못 해주지, 맞지?” “왜 그렇게 생각해?” 시연은 고개를 들어
“너 괜찮아?” 시연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흘렀는데, 이건 명백한 저혈당 증상이었다. 그녀는 보통은 배가 너무 고플 때만 발작했지만... ‘오늘은 다르네.’ ‘아마... 임신 때문일지도...’ 은범은 그녀의 체질을 알고 있어서 바로 한 손을 주머니로 넣었다. 곧, 남자의 손끝에 닿은 작은 사탕이 나타났다. 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아직도 이걸 챙기고 다닌다고?’ “자, 시연아.” 은범은 조용히 포장을 벗기고, 시연에게 내밀었다. 시연은 사탕을 받아 들고 입에 넣었다. 여자의 입안에서 퍼지는 단맛과 달리, 마음은 너무도 씁쓸했다. “좀 괜찮아?” 은범은 여전히 시연을 반쯤 안은 채, 온 신경을 그녀에게 쏟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증상이 비교적 심각했기에 시연도 나아지는 걸 느끼지 못했다.은범은 망설임 없이 바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병실로 데려다줄게!” 몸이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서, 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녀가 은범의 품에 안긴 채 병실 앞에 도착했을 때, 정민환은 병실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져, 말까지 더듬었다. “이... 이보세요! 당장 우리 형수님 내려놔요!” 은범이 날카롭게 노려봤다. “몸이 안 좋아서 걷지도 못하는데, 내려놓으라고요?” “아, 그건...!” 민환은 할 말을 잃었고, 결국 문을 열어주었다. 은범은 지체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 시연이 힘겹게 손끝으로 보호자 침대를 가리켰다. “응.” 그는 조심스럽게 여자를 내려놓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좀 괜찮아?” “응...” 시연의 목소리는 작았고, 아직 기운이 없어 보였다. 은범은 테이블 위에서 티슈를 뽑아, 그녀의 이마와 뺨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더 필요한 거 있어?” “아니, 됐어...” “괜히 사양하지 마.” 그는 주변을 훑어보다가 깨달았다. ‘그 남자는 여기 없네.’ ‘고유
“그럼 다행이네요.”시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다행이야... 아무 일도 아니어서.’“그나저나...”오선화는 진료차트를 정리하며, 마치 일상 대화하듯 조용히 말을 꺼냈다.“이제 6개월 차에 들어섰어. 곧 임신 후반기인데, 슬슬 휴식은 생각 안 해?”“휴식이요?”시연은 잠깐 멍해졌다. 그 생각은 진심으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오선화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부터는 배도 더 많이 나올 거고, 몸도 훨씬 무거워질 거야. 부기도 생기고, 움직이기도 불편해지고.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것도 괜찮지 않나?”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일할 수 있어요.”오선화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뭔가 걸리는 게 있어? 고 대표님이 계시니까, 병원에서도 대놓고 뭐라고 하진 않잖아.”“네... 알고 있어요.”시연은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야.’ “저보다 선배인 선생님들도 다들 만삭까지 일하세요. 7개월까지 야간 당직도 서시고요. 저야 그에 비하면 충분히 배려받고 있는 거죠.”‘그 배려가... 전부 고유건 덕분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어.’“게다가 가만히 있는 것보다 이렇게 일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출산도 더 수월하다고 하잖아요?”“그건 맞아.” 오선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더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나는 그냥 권유만 한 거야.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컨디션 안 좋을 땐 꼭 쉬어야 해, 알지?”“네. 그럴게요.”시연은 산모 수첩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교수님, 수고하세요.”“그래, 잘 가.”시연이 문을 나서자 방 안의 공기가 살짝 무거워졌다.오선화는 웃음을 거두고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그러고는 이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통화 목록을 스르륵 넘긴 오 교수의 손이, 한 이름에서 멈췄다.바로 ‘고유건’이었다. 오선화는 깊게 한숨을 쉬고, 전화를 걸 준비했다.
그날 오후, 은범은 곧장 회사로 향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부사장 이지혁과 비서가 며칠 사이 벌어진 상황을 보고했다.“GP그룹이 우리와의 협약을 전면 종료했어요.”“GP그룹?”은범의 표정이 굳어졌다. ‘GP그룹... 고유건... 왜 갑자기...?’이번 협약은 처음부터 은범이 직접 유건과 만나 성사한 것이었다. 물론, 사적인 일로 둘 사이에 약간의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연을 둘러싼 복잡한 사정.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일 뿐.‘우린 둘 다 공사 구분은 확실한 사람들이었잖아...’은범은 이해할 수 없었다.“협약은 계속 수익이 나고 있었잖아요. GP 측에서 계약 종료 사유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정확히 말하지 않았어요.”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입장은 아주 확고했어요. 위약금은 예정대로 지급하겠다고 했고요. 환불 어음은 이미 발송했다고 합니다.”‘그렇게 빨리?’은범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떤 설득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모든 절차가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더 불안했다.“그래서 일단 수령하진 않았습니다. 돌아오시면 같이 상의하려고 했거든요.” “잘하셨어요.”‘보상보다 중요한 건, 이 협력이 가진 미래 가능성이었는데...’은범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고 대표님한테 직접 연락해 볼게요.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야 하니까요.”“네, 애초에 사장님께서 직접 성사한 건이니까... 사장님께서 움직이는 게 맞죠.”은범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GP그룹으로 향했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GP그룹 본사 건물에 도착한 은범은 곧장 로비 데스크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고 대표님 뵈러 왔습니다. 전해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로비 데스크 직원은 정중하게 미소 지었다.“안녕하세요, 혹시 예약은 하셨을까요?”“아니요.”“죄송하지만, 고 대표님과의 면담은 반드시 사전 예약이 필요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그건 알지...’은범은 고개를
“고 대표님!”하은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유건 앞을 가로막았다. 눈빛엔 분노가 가득했다.“이렇게 그냥 가시면 안 되죠!”“뭐라고?”유건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어서 시선엔 의아함과 경멸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시연이 말이에요.” 하은은 안쪽을 가리켰다.“시연이는 고 대표님의 아내잖아요. 근데, 아내 앞에서 애인이랑 나가는 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애인’이라는 단어가 뱉어지는 순간, 유건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리고 눈가의 웃음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지금... 누가 감히 소미 씨한테 그런 말을 해?”그 말에 하은은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곧 더 큰 화가 치밀었다.“제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그리고, 장소미 씨는 또 뭐예요? 고 대표님한테 아내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행동하는 거, 무슨 의미인데요? 그리고 고 대표님이 장소미 씨를 감싸면, 시연이는 뭐가 되는 건데요?!” ‘시연이를 뭐로 보는 건지, 내가 대신 물어야겠어!’하지만 유건은 피식 웃었다. 차가운 비웃음이었다.‘그럼 지시연은 나를 뭐로 봤을까?’그러나 이런 생각을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비켜.”“싫어요!”그 말에 유건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목소리엔 더 이상 감정이 없었다.“솔직히, 너한텐 손쓸 가치도 못 느끼겠지만... 이쯤 되면 진짜 귀찮네.”“뭐라고요?”하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해졌다. ‘지금... 나한테 이런 말을...?’“비킬 거야, 안 비킬 거야?”“하은아!”그때, 시연이 급히 달려왔고, 하은의 팔을 잡아끌며 중간에 섰다.“이런 사람들이랑 뭐 하러 싸워? 가고 싶다잖아. 그냥 보내줘. 누가 어딜 가든, 그건 자유잖아.”그러면서 하은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가서 라면이나 먹자. 아까 건 너무 불었으니까, 새로 하나 뜯어야겠어.”시연의 말투는 덤덤했고, 시선은 여전히 유건을 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유건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유건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간 이식 얘기, 우주한테 물어본 적 있어?”“뭐라고요?”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그걸... 저 사람이... 지금 왜 묻지?’찰나의 정적. 그리고 곧, 시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나는 우주의 보호자예요. 우주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해요.”하지만 유건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내가 알기론, 우주는 올해로 만 14세야. 이미 법적으로 자기 결정권이 생긴 셈이지.”남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만큼 분명했다.“게다가 우주는 신체 조건도 아주 좋잖아.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기증 가능 기준에 부합해.”유건의 말은 아주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논리는, 결국 ‘장소미’를 위한 것이었다.‘하... 정말 대단하다, 고유건.’시연은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무심한 듯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장소미를 스치듯 바라봤다.‘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말이 되는구나.’“우주의 열네 살이, 일반 아이들의 열네 살과 같다고 생각해요?”시연은 미세한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우주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내가 결정하는 거라고요.”그 말에 유건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는 톤을 낮추면서도 힘을 실어 말했다.“지나치게 독단적이네.”“우주는 똑똑한 아이야. 심리적으로 결핍이 있는 거지, 지능이 낮은 건 아니잖아. 만약 언젠가 지 사장이 세상을 떠나고, 우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자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그 말에 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 입꼬리에 걸려 있던 억지 미소조차 사라졌다.“자책이요...?”시연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냉소가 섞인 차가운 어린 목소리로 유건을 향해 말했다.“잘 들어요. 우린 인생에서 많은 걸 후회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미안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그 ‘누군가’ 안에 지동성은 절대 포함되지 않아요.”그 말에 유건의 이
하은은 눈치가 빨라서 괜히 시연에게 짐이 될까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시연은 역시 장미리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우리 엄마요? 죽은 지 십몇 년 됐는데, 오늘 좀비처럼 부활이라도 한 거예요?”하은은 그제야 시연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다. “아! 그럼 내가 지금 바로 무당 선생님한테 연락할게!”“얼른 해줘.”두 사람은 말 그대로 티키타카였다. 장미리의 얼굴은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지시연! 넌 진짜 싹수가 없어!”“맞아요.”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라는 사람도 죽은 거나 다름없죠.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으니, 예의 따윈 배운 적 없어요.”그녀는 팔을 쭉 뻗어 문을 가리켰다.“무슨 용건인지는 상관없고, 지금 당장 나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엄마’라는 말 좀 들먹이지 마세요. 혹시라도 다음에 또 그런 말을 뱉는다면... 당신 입, 내가 부숴놓을 수도 있어요.”시연의 눈빛이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서릿발 같았다.“진심이에요. 장난 아니니까, 절대 시도하지 마세요.”“너... 너 진짜...!”장미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시연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말솜씨에서도, 기세에서도 밀렸으니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물러설 수 없었다.“네 아빠... 쓰러졌어. 지금 혼수상태야.”그 말에 시연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 정도라고...?’눈빛 속에 망설임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그럼 그분 옆에서 간병이라도 해주셔야죠. 여긴 왜 와서 소란인데요?”“너...”“지시연!”자기 엄마가 밀리는 걸 보다 못한 소미가 나섰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진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우리가 왜 너를 찾아왔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나야 모르지.”시연은 흰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그럼 알려줘 봐. 여기엔 왜 온 건지.”소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흐흑... 흐윽...]전화기 너머로 장미리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아빠 비서한테 전화 왔어... 회사에서 멀쩡히 있다가 갑자기 쓰러졌대! 지금 병원으로 이송됐고, 나도 지금 가는 중이야! 소미야, 네가 더 가까우니까 먼저 좀 가봐!]“알겠어요, 엄마!”소미는 전화를 끊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눈가엔 금세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유건 씨... 우리 아빠가 또 쓰러지셨어요...”사정을 들은 유건은 곧장 몸을 일으켜, 여자의 팔을 부드럽게 받쳐주었다.“괜찮아, 지금 당장 같이 가자. 내가 함께할게.”“네... 유건 씨가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저 혼자였으면 무너졌을지도 몰라요.”...장미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지동성은 응급실을 거쳐 병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이번엔 지난번보다도 훨씬 상태가 심각했다.지동성은 입원했지만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담당 교수도 장담할 수 없었다.“지금은 경과를 보셔야 합니다. 언제 의식이 돌아올지는...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흑...”병상 옆 의자에 앉은 장미리는 눈물을 뚝뚝 흘렸고,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이걸 어쩌면 좋아... 네 아빠, 갈수록 심해지는데... 간이식도 아직 못 받았는데...”갑자기 장미리는 고개를 번쩍 들어 유건을 바라봤다.“고 대표님, 간 이식 소식은 아직도 없는 건가요?”이전에 유건은 간 이식 대기자를 대신 알아봐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직은 연락이 없습니다.”그는 도와주기로 했고, 실제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이런 일은 결국 ‘운’과 ‘순번’이 따라야 하는 법이었다. 돈이 많다고 먼저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흐흑... 흐으...”장미리는 더욱 흐느껴 울며, 소미의 손을 꼭 붙잡았다.“소미야... 네 아빠, 의식도 없고... 이대로면... 정말 오래 못 버틸 수도 있어...”“그럴 리 없어요, 엄마. 아직 방법이 있을 거예요.”소미는
여자애는 두 손을 들고 조심스레 다가왔다.“진짜 살짝만, 살짝만 만져볼게요.”말처럼, 여자애의 손끝은 아주 조심스러웠다.“와... 아기가 있는 배는 이런 느낌이구나! 선생님, 진짜 대단해요. 엄마 되는 거, 완전 힘든 일인데...”시연은 조용히 웃으며 물었다.“근데,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누굴 찾는 건가요?”“저요?”여자애는 손을 거두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리고 어깨에 멘 가방을 툭 내려놓았다.“혹시 변이준 있어요? 저 보고 오라 그랬거든요.”‘이준 선배님?’“수술 들어가셨어요.”“헉, 진짜요?”여자애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아싸, 잘됐다!”그 말과 동시에, 다시 가방을 어깨에 멨다.“선생님, 나중에 변이준이 오면 전해주세요. 저 왔다 갔다고, 없어서 먼저 간다고요!”시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자애는 벌써 휙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도망치듯 사라지는 뒷모습이었다.“어... 네...”시연은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여기가 무슨 호랑이굴이라도 되는 건가? 저렇게까지... 도망갈 일인가?” 그래도, 궁금했다. ‘저 친구... 선배님이랑 어떤 사이지?’‘여동생일까? 닮은 구석은 없었는데...’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둘 다... 눈에 띄게 수려했다는 정도?’오후 2시쯤, 변이준이 수술을 마치고 내려왔다.머리는 아직 축축했지만, 얼굴은 늘 그렇듯 환했다.시연은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선배님, 의뢰하신 처방은 이미 내려놨어요. 환자도 약을 복용 중이고요.”“역시, 고마워!”이준은 환하게 웃으며,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훑었다. 그때, 시연은 문득 오전 일을 떠올렸다.“아, 맞다. 오늘 오전에 어떤 여자분이 선배님을 찾아왔었어요. 근데 안 계셔서 그냥 간다고 하시던데요?”“그냥... 갔다고?”그 말을 들은 이준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하... 그 녀석, 말을 좀 듣고 살면 어디 덧나나...”이준은 수건을 손에 쥔 채, 더 이상 머리를
단 한 마디. 그 말에 시연은 마치 얼음물에 던져진 듯 몸이 굳었다. ‘맞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따갑지?’그리고 뺨이 화끈거릴 정도로 따가운 말이 그녀를 후려쳤다.“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유건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냉소가 담긴 웃음이었다.“내가 왜 양석현 교수 프로젝트에 투자했을 것 같아?” “내가 마음이 약해서? 돈이 남아돌아서? 밤에 잠이 안 와서?”순간, 남자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유건의 눈빛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아니, 다 아니야. 널 위해서였어. 널 아끼니까, 널 좋아하니까, 돈을 쓰는 것도 아깝지 않았던 거야.”그 말을 끝내고, 유건은 웃었다. 이번엔 대놓고, 조롱이 담긴 웃음이었다.“근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왜 또 돈을 써야 하지? 지금의 네가, 그럴 가치가 있나? 차라리 그 돈으로 비둘기 밥이나 주는 게 더 낫겠는데?” 시연은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유건은 한 손을 들어 휘휘 저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이제 가고,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마. 너랑 엮이는 거, 진심으로 지긋지긋해. 너랑 관련된 모든 일은 다 끝났어.”그는 돌아섰다. 단호하고 차가운 걸음이었다.“유...” 시연은 반사적으로 불러보려 했지만, 목에 걸린 그의 이름은 한 글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못 해...’온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심장도, 생각도, 감정도 전부 마비된 채로.그 순간, 유건이 다시 멈춰 섰다. 하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그저 등을 보인 채로 담담하게 말했다.“그래도 일부러 찾아왔고, 부부였던 정은 있으니까... 지원금은 지한이 통해서 처리하도록 할게. 하지만 이번뿐이야. 다음은 없어.”그는 그 말을 끝으로 차로 향했고, 조용히 문을 열고 올라탔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그대로 떠나버렸다.그리고 시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가을 오후의 바람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지한이 보기엔, 시연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간 듯했다. 너무 오래 기다렸으니, 그럴 법도 했다.하지만 바로 그때, 화장실에서 막 나온 시연은 멀리서 유건과 지한이 정문을 지나 계단 아래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저기 있다...!’더는 생각할 틈이 없어서 시연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유건 씨!”문 앞에서 유건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놀란 듯 고개를 돌리자, 시연이 급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여자의 걸음은 빨랐고, 숨이 찰 정도로 다급했다. 유건의 미간이 스르륵 좁혀졌다.‘저 여자... 아직도 안 갔던 거야?’“유건 씨! 잠깐만요!”시연은 허리를 짚으며, 거의 뛰다시피 정문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건은 다시 한번 얼굴을 찌푸렸다.‘배가 저렇게 불렀는데도... 뛰고 있어?’ 하지만 곧 속으로 비웃듯 생각했다.‘뛰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유건 씨...” 시연은 겨우 도착해,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잠깐이면 돼요. 몇 분이면 되는데... 시간 좀 줄 수 있어요?”맑은 눈망울이 간절히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유건은 잠시 목이 메는 듯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비웃듯 느릿하게 말했다.“신기하네. 네가 먼저 날 찾을 줄은 몰랐거든.”“그게 아니라, 나...”그러나 시연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유건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근데 난, 너한테 줄 시간이 없어. 단 1분도.”차가운 눈매, 건조한 말투. 남자의 입꼬리는 비쭉 올라갔지만, 표정엔 온기가 없었다.그러고는 단호히 돌아섰다. 그 차가운 뒷모습은 조금의 여지도 없이 닫혀 있었다. 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췄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이런 식으로, 날 밀어내던 사람...’유건의 본모습을, 그녀는 잠시 잊고 있었다. 시연의 몸속으로 한기 같은 게 퍼지며, 두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그저 멍하니 유건이 차에 올라 문을 닫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