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빈은 코를 문지르며 머쓱하게 웃었다. “내 잘못이야. 다시는 안 그럴게.” “그 말 꼭 지키세요, 성빈 도련님.” 진아는 비웃듯 말했다. “은범이한테도 전해. 시연이는 지금 대학원 준비하느라 바쁜데, 자기 집안 문제로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고.” “알았어.” 성빈은 대충 대답하다가,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근데 대학원? 아까 하려던 말 못 했는데, 시연이 특별전형 석사 과정 아니었어?” “그건...” 진아는 순간 말을 멈추더니,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다 이내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특별전형 석사 과정... 그거, 그 늙은 마녀랑 그 딸년이 다 망쳐놨어. 시연이가 너한텐 말하지 말랬어.” “뭐? 그런 일이 있었어?” 성빈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미쳤네. 완전히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잖아!” “야, 진짜 그러지 마라.” 진아가 황급히 성빈의 팔을 붙잡았다. “네가 이럴까 봐 시연이가 숨긴 거야. 이미 지난 일이고. 그냥 모른 척 넘어가자.” 성빈은 차갑게 웃었다. “그래, 알았어.” 하지만, 성빈이 이런 문제를 정말로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시연이는 가족도 없잖아. 그럼 내가 친오빠처럼 챙겨야지.’ ...유건은 시연을 차에 태우며 문을 닫았다. 남자의 손길은 다소 거칠었다. “이제 말할 수 있겠어?” “...네.” 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건은 코웃음을 쳤다. “절친들이랑 밥 먹는다고 했지. 근데 설명 좀 해봐. 노은범은 언제부터 네 절친이 된 거야?” 시연은 이마를 짚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몰랐어요. 약속한 적 없고, 거기 온다는 것도 몰랐어요.” 한동안 차 안은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노은범을 알아요?” ‘이 사람은 단순히 은범이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분명히 우리 과거까지도 알고 있을 거야.’ 유건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런 식으로 오해받을 줄 알았으면, 애초에 말도 꺼내지 말걸.’ 시연은 한숨을 삼키며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오늘 은범이와 있었던 일은 내 잘못이 있었어요. 하지만, 절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에요.” “근데, 당신의 첫 반응이 뭐였는지 알아요? 나를 가벼운 여자라고 단정 지었잖아요.” 유건은 순간 당황했다. “나는...” “내 말 끝까지 들어주세요.” 시연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당신이 나를 못 믿는 건 이해해요.” “그럼 화내지 마. 앞으로 안 그럴게.” 유건은 진심으로 다급했다. “이해한다고 했지, 받아들인다고는 안 했어요.” 시연은 쓸쓸하게 웃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정말 결혼했다고 쳐요. 앞으로 이런 비슷한 일이 또 생긴다면, 당신은 확실히 지금과 다르게 행동한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유건은 입을 다물었다. “...보장할 수 없죠?” 시연은 가늘게 속눈썹을 떨며 조용히 말했다.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기반은 신뢰예요. 그런데, 당신은 나를 믿지 않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그만해.” 유건은 그녀를 놓아주며 한걸음 물러섰다. 얼굴에 드리운 불쾌함과 짙은 분노가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말을 그럴싸하게 꾸미긴. 솔직히 말해봐. 그냥 네 첫사랑 돌아오니까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거 아니야?” 그는 숨이 턱 막혔다. ‘이제 뭐라고 해도 소용없겠네.’ 둘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유건은 입꼬리를 비틀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네가 진짜로 그 사람이랑 잘될 거라고 생각해?” “그 자식이 제대로 된 놈이었으면, 3년 전에 널 그렇게 버리고 가지도 않았어.” 시연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내 과거를 조사했어요?” “조사 아니야. 그냥 알아본 거지.” 유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결혼할 여잔데, 그 정도는 당연히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 ‘어이가 없네. 이제 남의 사생활을
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담담히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병원 일 때문에요.” “그래?”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금방 씻고 올게. 바로 옆에 있을 테니까.” 그는 고개를 숙여 시연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 일어섰다. “샤워하고 올게.” “네.” 그가 욕실로 향하자, 시연의 얼굴에서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어떻게 저럴 수 있지?’ 방금까지도 그렇게 싸웠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진짜 결혼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할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건가?’ ...유건이 씻고 나왔을 때, 시연은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다가와 여자 곁에 누웠다. 한 손으로 시연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여보, 여보...” 남자의 체온이 점점 뜨거워졌다. 순간, 시연은 두려움이 밀려와서 유건을 밀어내며 조용히 말했다. “안 돼요.” 유건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왜? 꽤 여러 날 지났잖아. 괜찮을 거야. 조심할게.” “그게 아니라...” 순간, 시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침을 삼켰다. “그냥... 피곤해서요. 오늘은 안 하고 싶어요.” 말이 끝나자,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유건은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화났나? 근데 나 진짜 하고 싶지 않아.’ 시연은 숨을 고르며 남자의 반응을 살폈지만, 입술이 살짝 벌어져, 불규칙한 숨이 새어 나왔다. 이런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유건은, 억눌렀던 분노가 결국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그는 비웃음을 흘리며,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지고, 차갑게 가라앉아갔다. ‘또... 나를 오해하겠지?’ “내가 한 말, 진짜로 흘려들었구나?” 그는 낮고 거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첫사랑 돌아오니까, 이제 나한테는 순결한 척하겠다는 거야?” ‘뭐?’ 시연은 순간 당황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나, 유건은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
진아는 전화로는 도저히 시연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못할 것 같았다. 시연은 곧바로 경찰서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진아가 초조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시연아, 드디어 왔구나!” “응.”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가면서 말해.” “응... 사실 성빈이 누나도 와 있어. 지금 안에서 성빈이랑 얘기 중이야.” ...경찰서 안. 성빈은 팔짱을 낀 채 눈앞의 누나를 향해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나, 나한테 그렇게 화내서 뭐 해? 이건 예전처럼 장난 수준이 아니야. 똑똑히 들어. 네가 건드린 상대는 고유건이라고.” “뭐?” 성빈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다친 건 장소미잖아. 고유건이랑 무슨 상관인데?” 성빈의 누나인 진하유는 한숨을 푹 내쉬며 동생의 이마를 쿡 찔렀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장소미가 누구야? 고유건의 여자야! 그러면 네가 고유건이랑 상관없는 일이겠어?” 성빈은 입을 다물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너한테 말해봤자 소용없어.” 하유는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나는 가볼게. 가서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너는 괜히 더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얌전히 있어!” 그녀는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안으로 들어오는 시연과 진아를 마주쳤다. 하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왔어. 부탁 좀 할게. 이놈, 좀 말려줘.” “네, 조심히 가세요.” “진아야! 시연아!” 성빈이 손을 흔들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어쩐 일이야? 이렇게 아름다운 손님들이 오다니, 경찰서 분위기가 확 살겠는데?” “너, 진짜 웃음이 나오냐?” 시연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성빈을 바라보았다. “너 이제 애도 아니잖아. 도대체 왜 장소미를 쳤어?” “쳐서 다친 게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당한 거지!” 성빈은 억울한 듯 목을 바짝 세웠다. “그 여자가 네 합격통지서 찢어버렸어. 네 앞길을 막았다고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해?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성빈이가 무사한 거잖아.’ “이럴 땐 좀 알아서 행동해. 네 안전보다 중요한 게 어딨어?” “나는 괜찮아...” 성빈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지금 경찰서에 잡혀 있는 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데.’ 시연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만 괜찮으면 끝이야? 그러면 너희 가족들은? 나랑 진아는? 네가 다치거나 일이 더 커지면, 우리 마음은 편할 것 같아?” “그래도, 장소미한테 가서 비는 건 절대 안 돼!” ‘얘가 진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찰서 문이 열렸다. 은범이 변호사와 함께 들어왔다. 성빈의 눈이 반짝 빛났다. “와! 역시 네가 올 줄 알았다. 친구를 이렇게 내버려둘 리가 없지!”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해라.” 은범은 차갑게 그를 흘겨보며, 곧바로 시연을 바라봤다. “성빈이 말이 맞아. 괜히 네가 나설 필요 없어.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랑 진아는 밖에서 기다려.” 그가 오자, 시연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래... 은범이가 있으면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야.’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병원. 장소미는 간병인과 매니저 조애린의 도움을 받아 갓 깁스를 한 다리를 조심스럽게 거치대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때, 병실 문이 급하게 열렸다. 유건이었다. 그는 소미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모든 스케줄을 정리하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왔다. “고 대표님 오셨네요.” 조애린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날게요. 두 분,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 그녀는 소미를 힐끔 보며 눈짓을 보냈다. ‘기회야, 잘 잡아.’ 소미는 피식 웃었다. ‘이렇게까지 바로 달려와 주는 걸 보면... 아직 희망이 있는 거 아닐까?’ 하지만, 유건은 자리를 뜨라는 그녀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잠깐 있어. 할 말이
경찰서. 은범과 변호사가 안에서 나오자, 진아와 시연이 재빨리 다가갔다. “어때?” 은범은 살짝 미간을 좁히며 확실한 답을 주지는 않았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야. 변호사가 시간을 좀 더 쓰면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나만 믿어, 알겠지?”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은범은 변호사를 먼저 배웅한 뒤, 그제야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제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차에 올라탄 후, 먼저 진아를 집에 내려주고, 그다음 시연을 기숙사까지 데려다줬다. 도착하자, 시연은 차에서 내리며 은범과 함께 숙소 입구까지 걸어갔다. “은범아!” 그가 차로 돌아가려는 순간, 시연이 불렀다. 은범은 곧장 돌아섰다. “왜?” 시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상황이 진전되면 전화해 줄 수 있어?” ‘아무리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도, 성빈이 일은 결국 나 때문인데...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잖아.’ 은범은 잠시 멈칫하다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운전 조심해.” 시연은 은범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며 그가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성빈이 문제, 생각보다 심각한 거 아닌가...?’ 머릿속이 복잡해진 채, 시연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기숙사 앞. 시연이가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누군가 옆에 다가왔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뭐 보고 있어?” 낯익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순간, 시연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건 씨?” 그녀는 고개를 들자, 유건이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언제 왔어요? 전화라도 하지.” 유건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슬랙스에 단정한 셔츠, 언제나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그는 짧게 웃었다. ‘놀라긴 했지... 근데 기분 좋은 놀람은 아니야.’ 유건은 아무
시연이 양갈비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유건도 모르게 입에 군침이 돌았다. ‘이렇게 잘 먹는 건 처음 보네.’ 시연은 순식간에 한 접시를 비워버렸다. 그런데, 시연이 뼈를 깨끗이 발라내며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접시를 내려다봤다. ‘더 먹고 싶나?’ 유건은 피식 웃으며, 서빙 직원에게 손을 들었다. “소갈비 한 접시 더 주세요.” “네, 고 대표님.” 시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쑥스러운 듯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별거 아...” 그때, 유건의 핸드폰이 울렸다. ‘주재호?’ 화면을 확인한 그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재호야.” 그는 잠시 시연을 보며 말했다.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네.”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건이 창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봤다. 그 순간, 유건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래, 장소미 사고 건 말이야. 이건 네가 맡아.” 순간, 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큰일 났다.’ ‘주재호... G 시 최고의 변호사. 이 사람이 맡으면, 이길 확률 100%...’ ‘이 사람이 장소미한테 주재호 변호사를 붙였다고?’ ‘그러면 성빈이는?’ 순간, 시연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안 돼, 이거 은범이에게 알려줘야 해.’ 시연은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유건이 전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왜 그래?” 유건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아...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시연은 애써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유건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가 자리를 뜨는 순간 그 미소는 차갑게 사라졌다. ‘뭐야? 지금 분명 뭔가 숨기고 있는데.’ 시연은 서둘러 식당 구석으로 가서, 핸드폰을 열어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은범아.” 그리고, 단 몇 걸음 뒤에서. 그 목소리를 유건은 똑똑히 들었
유건이 화가 났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은 불길처럼 이글거렸고,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애써 참고 있었다. 그러다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어디 가려고요?” “집에 가야지.” 유건은 싸늘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니면, 아직도 밥 먹을 기분이야?” ‘...이 분위기에, 내가 무슨 입맛이 남아 있겠어.’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유건은 아무 말 없이 차고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는 차 문을 열고 그녀를 태우더니, 자신도 조용히 운전석에 앉았다. 차가 출발했다. 차 안은 숨 막힐 정도로 조용했다. 운전하는 내내, 유건은 전방만 똑바로 응시한 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핸들을 쥐고 있는 유건의 손가락이 심하게 경직돼 있었다. “할 말 없어?” 갑자기, 유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요?” “나한테 할 말 없냐고?”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시연을 흘겨보았다. ‘이게 무슨 뜻이지?’ ‘장소미 일은 이미 다 알았을 텐데, 굳이 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남자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 침묵이 유건을 더 자극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떠봤는데도, 이 여자는 끝까지 모른 척인 거야?’ ‘아주 좋아. 그럼, 나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지.’ 그는 입술을 꽉 다물고, 기어를 한 단계 올렸다. 차는 빠른 속도로 본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도착하자, 유건은 차에서 내렸다. 시연도 조용히 따라 내려섰다. 그러나,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유건이 먼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여자의 손목이 다시 한번 붙잡혔다. “어디 가려고?” “나... 할아버지 뵈러 가려고요.” 시연은 애써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단둘이 같이 있는 건 너무 숨 막혀.’
그날 밤.임진아는 다급히 시연이 사는 곳으로 찾아왔다.“야... 이게 뭐야? 진짜로 나온 거야?”짐이 구석구석 정리되어 있었지만, 분위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응, 가짜로는 안 되지. 진짜로 나온 거야.”진아는 멍하니 둘러보다가 툭 내뱉었다.“근데 두 사람... 싸우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근데 매번 이러다가 또 돌아갔잖아. 이번엔 진짜야?”시연은 잠깐 말이 없다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응, 이번엔 진짜야.”그리고, 은범의 병실에서 벌어졌던 일을 털어놨다.“뭐??!”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야, 그래서! 도대체 왜 그 침대에 누워 있었던 건데? 은범이가 널 안은 것도 아니고, 설마 네가 알아서 올라간 거야? 도무지 기억 안 나?”시연은 진아를 쳐다보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기억 상실 드립은 그만. 너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보지?”“하긴...” 진아는 입을 삐죽였다. ‘그럴 리가 없지. 시연이가 은범한테 그런 마음 있을 리 없어.’“그럼... 진짜로 뭔가 이상한 거 아냐?”시연은 말없이 일어났다. 안방에서 두 개의 종이봉투를 들고 나왔다.“그건 또 뭐야?”“은범이 어머니가 준 거야. 임부복.”“뭐...?”진아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헐... 그 아줌마? 그 아줌마가 임부복을 챙겨줘? 몰라보게 바뀌었네... 예전엔 널 사람 취급도 안 하더니.”곧바로 뭔가 떠오른 듯, 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시연아... 설마... 노은범 어머니가... 널 침대에 올려놓은 거 아니야?”시연은 작게 웃었다.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그 안엔 감정이 억눌려 있었다.“그럴지도.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요즘 지나치게 친절하더라.”“세상에... 역겨워! 전엔 널 그렇게 무시하고 수치 주던 인간이,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꾼다고? 자기 아들을 살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눈이 돌아간 모양이지?” 진아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외쳤다.“그래서..
“놔둬. 우리 고 대표, 요즘 상태 안 좋아. 그냥... 내버려둬.”...차 안.지한이 조심스럽게 운전대를 잡으며 물었다.“형님, 어디로 모실까요?”유건은 창밖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무심했다.“갈 데가 어디 있겠냐. 본가로 가자.”“네, 형님.”지한은 운전대를 돌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결국 돌아가시긴 하네... 형수님 그런 식으로 떠났는데, 형님은... 아직 포기 못하셨구나.’ ...고씨 가문 본가.차에서 내리자마자, 유건은 곧장 현관을 박차고 들어갔다. 걸음은 빠르고, 눈빛은 날카로웠다.하지만 집 안은 조용했고, 시연은 없었다.유건은 믿기지 않는 듯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안방, 서재, 게스트룸, 드레스룸...어디에도 시연은 없었다.‘정말 가버린 거야?’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와 왕성애와 이호민을 불러세웠다.“지시연, 어딨습니까?”넥타이를 세차게 잡아당기는 그의 목소리엔 급박함이 섞여 있었다. “예...?”이호민은 순간 얼이 빠졌다. “사모님요? 나가셨는데요... 도련님이 나가라고 하셨잖아요.”“내가?”“네... 저희도 다 들었어요. 기환이가 전화했을 때,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고... 그 말, 솔직히 ‘더 이상 상관 없다’는 뜻 아니었나요?”“이모님,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유건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제가... 그랬다고요?”왕성애가 나섰다.“네, 저도 들었는걸요. ‘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라는 게, 무슨 뜻인 줄 모르세요? 도련님, 그건 사모님을 쫓아내는 말이었다고요.” 유건은 할 말이 막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진짜... 그랬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기환이 급하게 전화했을 때, 술에 올라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그 한마디가 시연을 보낸 거였다.“됐어요. 알겠어요.”짧게 대답한 유건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도련님!”이호민이 다급히
“고... 고 대표님...”무대에서 내려온 댄서가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목소리는 부끄러움과 설렘이 섞여, 낮게 떨렸다.“제... 예명은 시연이에요.”뚝-순간, 공기 자체가 얼어붙은 듯했다. 주변의 시끄러운 음악,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시연... 시연이라니...’유건은 천천히 그 이름을 되뇌었다.입꼬리는 올라갔지만, 그것이 웃음인지, 비웃음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래, 시연이구나.”목소리는 가볍지만, 그 안에 도사린 감정은 날이 서 있었다. 유건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가까이서 본 지하는 알아챘다.“고 대표님... 감사해요. 오늘... 무대를 봐주셔서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여자는 작게 고개를 숙이며 술병을 들었다.“고 대표님... 어느 잔이... 쓰시던 건가요?”그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같은 잔으로, 같은 술을, 같이 나누자는 은근한 제안.지하와 강석, 정빈은 아무 말 없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일 터지겠는데...’유건은 천천히 턱을 들어, 가장 가까이 있는 잔을 가리켰다. “저거.”“네, 고 대표님.”여자는 긴장한 손으로 잔을 집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닿기 직전, 유건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탁-그대로 테이블 위로 꾹 눌렀다.“고... 고 대표님?”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유건은 피식 웃었고, 웃음 끝에 감도는 건 조롱과 냉기였다.“너, 누구야?”“네...?”“아무나 내 잔에 손을 얹어도 된다고 생각했어? 내가 개나 소나 ‘고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상대해 줄 거라고 생각했냐고.” “저... 죄송합니다...”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야, 분명 아까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꺼져.”낮고 가라앉은 유건의 목소리. 그러나 그 말은 날카롭고 차갑게 뼛속까지 파고들었다.“네...?”“꺼지라고.”쾅!술잔이 바닥에 내던져졌고, 깨진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꺅!”여자가
유건은 지하의 어깨에 팔을 걸쳤고, 약간 술에 취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야, 그거 알아? 아까 무대 위에 있던 애, 나 걔한테 걸었다? 오늘의 ‘댄스 퀸’은 무조건 걔가 될 것 같았거든. 어때, 춤 괜찮았지?” 지하는 눈을 살짝 흘기며 잔을 들었다. ‘와... 진짜 맛이 갔구나.’ “응, 잘 추더라.”“그런데 유건아...” 무언가 진지하게 말을 꺼내려던 찰나, 벌떡 일어난 유건이 무대를 향해 우렁찬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좋아!”“잘한다! 브라보!”지하는 어이가 없어 술잔을 내려놨다. ‘진짜 망가졌네, 망가졌어.’무대가 끝났고, 분위기도 한풀 꺾였다. 유건은 흥이 남은 얼굴로 말했다.“자, 술 마시러 가자.”오늘은 일부러 룸을 잡지 않고, 메인 홀 자리에 앉았다. 유건이 일부러 ‘시끄럽고 복잡한 곳’에 머물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조용한 데 가면,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질 테니까.’ 정빈은 이미 술을 채워두고 있었는데, 유건은 자리에 앉자마자 잔을 집어 단숨에 비웠다. 강석이 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때? 얘기는 좀 들어봤어?’지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방법이 없어. 지금은 완전히 벽이야, 벽.’그 순간, 클럽 매니저가 다가왔다.“고 대표님, 지하 도련님, 주 대표님, 강석 도련님, 반갑습니다.” 정중히 인사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아, 그리고 고 대표님, ‘댄스 배틀’ 결과 나왔습니다. 고 대표님이 베팅하신 8번 참가자가 오늘의 ‘댄스 퀸’으로 선정되었어요.”“그래?” 유건이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상금은 현금으로 환전해 드릴까요, 아니면 칩으로 보관해 드릴까요?”“필요 없어.” 유건은 손을 툭 내저으며 말했다. “그냥 술값에 써. 테이블이나 돌리라고.”“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매니저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런 분들한텐 돈보다 기분이지.’“그리고... 약속대로 오늘의 ‘댄스 퀸’이 술을 한 잔 따라드
“그렇게까지요...?”이호민은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바로 시연을 위해 차량을 호출했고, 기환은 말없이 그녀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었다.“집사님, 이모님, 기환 씨...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시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조용히 차에 올랐다. 창문이 올라가며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가려졌고, 차는 조용히 대문을 빠져나갔다.남겨진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대문 앞, 서로 눈을 바라보며 굳어 있었다.“기환아...” 이호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넌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그게...”기환은 한숨을 내쉬며, 하는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병실에서 벌어진 일, 유건이 본 장면, 그리고 그 뒤에 생긴 오해까지... 사실대로, 차분히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예요.”이야기가 끝나자, 왕성애와 이호민은 동시에 외쳤다.“말도 안 돼! 사모님이 바람을 피워? 그건 아니지! 그럴 리 없어!”이호민의 얼굴이 붉어졌고, 왕성애는 황급히 팔짱을 풀며 어이없어했다.“사모님이 어떤 사람인데! 기환아, 정말 그 상황을 믿는 건 아니지?” “솔직히 말해서요...” 기환도 고개를 숙였다. “저도 믿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형님이 두 눈으로 직접 보셨어요. 그 자리엔 저도 있었고요.”차 안.시연은 두 팔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차 안은 너무 조용했다. 조용해서, 오히려 더 춥게 느껴졌다.‘추워... 정말 추워.’몸이 추운 게 아니라, 마음 깊숙한 데서 올라오는 냉기가 뼈를 때렸다.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시연의 감정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심지어 눈을 감아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앞으로 그 여자 일로 날 귀찮게 하지 마.”그 말은 정말이지 두 사람 사이에 마침표를 찍는 말이었다. ‘진짜... 끝이구나.’시연의 눈가가 점점 뜨거워졌고, 감정을 참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사모님?”짐을 정리하던 시연의 방에 왕성애가 들어섰다. 뒤이어, 이호민도 들어왔다.요즘 병원 쪽에 매달려 있던 이호민은 부부 사이의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줄 몰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호민은 바닥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유건 도련님이 또 사모님을 속상하게 했나요? 괜찮아요, 사모님. 속상한 게 있으면 어르신께 말씀드리세요.”“어르신은 누구보다 사모님을 아끼시잖아요. 원래 부부는 조금씩 다투기도 해요. 집까지 나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손을 뻗어 캐리어를 대신 들려 했다.하지만 시연은 고개를 저었고, 쓴웃음과 함께 말했다.“집사님, 그게 아니에요. 유건 씨가 저를 속상하게 한 게 아니라... 제가 유건 씨 속을 뒤집어놨어요. 지금은... 절 보고 싶지도 않을 거예요.”이호민과 왕성애는 동시에 얼어붙었다.‘어떻게 된 거지...? 저런 말까지 나올 정도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시연은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백팩을 둘러맸다. “이모님, 집사님...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 이만 가볼게요.”그 말에, 왕성애와 이호민은 허겁지겁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가는 시연을 서둘러 붙잡았다.“사모님, 잠시만요.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시는 거 아닐까요? 유건 도련님이 돌아오시면, 다시 얘기 나눠보는 건 어떠세요?” “맞아요. 도련님 성격 급한 거 사모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홧김에 한 말일 수도 있어요.”시연은 멈추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단호하게 말했다.“유건 씨가 돌아와서 저를 보면 더 화가 날 거예요. 전... 그걸 더 보고 싶지 않아요.”‘그 사람한테 더 미운 존재가 되기 전에 조용히 사라지는 게, 내가 그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예의야.’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도련님이 그렇게까지...’고씨 가문 본가 대문 앞. 그 순간, 정기환이 막 대문에 들어서고 있었다.“형수님?”그는 시연이 캐리어를 끌고
유건의 분노는, 무너지는 파도처럼 쏟아졌다.하지만, 시연은 물러서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남자의 눈을 또렷하게 마주 보며 조용히 말했다.“지금... 많이 화났어요?”그 말에 유건은 순간 얼이 빠졌다. ‘뭐?!! 이 여자,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이 상황에서 ‘많이 화났냐’고 묻는다고?’시연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용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조금은 멍한 목소리에 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톤이었다.“잘 모르겠어요. 지금 내가 당신을 좋아하느냐 마느냐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에요?” ‘그게 네 진실한 마음이라고?’ 유건은 순간 말문이 막혔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아니면...” 시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동자에 짙은 의문을 담았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진짜 의문이었다.“당신은 고씨 가문의 도련님이고, 당연히 모든 걸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는 법적으로 당신의 ‘아내’라는 타이틀이 있으니까...”“당신이 날 좋아하지 않더라도, 나는 무조건 당신을 좋아해야 하고, ‘배신’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좋아해야 하고, 배신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냐고?’ 시연의 말이 유건의 가슴을 도려냈다.‘좋아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럼 우린 대체 뭐였지?’ “혼인 중에 외도라니, 네 진심이 그거였어?” 유건의 목소리는 저음으로 가라앉았지만, 안에 담긴 분노는 더 짙었다.“내 진심이... 그거였냐고요?” 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그리고 문득, 아까 자신이 본 그 나비난 화분이 떠올랐다. 유건이 가장 먼저 들렀던 곳... 바로 장소미가 있는 곳. 시연은 아내였지만, 유건의 ‘첫 번째’가 아니었다. 늘 ‘두 번째’, 늘 ‘장소미의 다음’이었다.시연은 씁쓸하게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서로서로... 똑같지 뭐...”“뭐라고?” 유건이 날카롭게 물었다.“아...” 시연은 힘없이 웃었다. “맞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이젠 굳이
유건은 분명히 봤다. 두 눈으로, 직접. 그런데도 그는 아직도 무언가 기대하고 있었다.‘혹시,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그게 정말... 단순한 우연이었을지도 몰라.’‘아니면, 어쩌면... 진짜로, 오해일 수도 있잖아.’되뇔수록, 마음은 더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고유건,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네 자존심은? 너답던 원칙은 다 어디로 갔어?’유건의 감정은 맹렬히 소용돌이쳤다. 그러는 사이 문밖의 시연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그러다 유건의 시선이 책상 위 어딘가에 멈췄다. 작은 노트 하나.그 작은 책상은 시연의 것이었다. 평소에 시연이 쓰던 전공 서적과 자료들이 정리돼 있었고, 그 위에는 익숙하지 않은, 낯선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무심코 들춰본 노트 속. 글자와 숫자들이 정돈된 필체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이건... 가계부?’두 페이지를 더 넘긴 순간, 유건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장난해?’4000만 원, 우주의 첫 치료비. 그 뒤엔 우주의 식중독 입원비, 시연 어머니 묘지 이전 비용... 그녀가 ‘고씨 가문'에, 아니, 유건에게 ‘빚진’ 항목들만 정리된... ‘일종의 청구 리스트’였다.‘이게... 뭐야?!’순간, 유건의 심장이 ‘툭’하고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분노가 밀물처럼 되살아났다.그중 한 줄에서 남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바로 시연 어머니 묘지 이전비였다. ‘묘지 이전? 그런 일이 있었던 거야?’ ‘그땐 우린 이미 결혼했는데... 난 아무것도 몰랐어!’‘저 여자는 단 한 마디도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아니, 말하기조차 싫었던 거겠지. 나란 존재가 그 정도였다는 거잖아.’그러던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똑- 똑-유건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문 안 잠겼어.”밖에 있던 시연은 그 말에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저렇게 말투가...?’‘기분이 상했나, 저 정도로?’ 속으로 작게 숨을 내쉬며, 시연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유건은 작은 책상
‘정말... 그냥 가버린 거야?’시연은 멍하니 서 있었다. 유건이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연의 온몸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정말... 끝난 걸까?’ 무기력한 체념이 밀려오고, 그녀의 마음속은 새까맣게 비어버린 듯했다. 시연은 마침 잘못을 저지르고 버림받은 아이처럼 혼란스러웠고, 무서웠다. “형수님!”지한이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멍하니 계시면 어떡해요! 형님 진짜 화나셨어요!”“지금 안 따라가면... 후회할지도 몰라요!”“아... 네!” 시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바로 허겁지겁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발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천천히요.” 지한이 팔을 내밀었다. 시연은 지한의 손을 잡고 균형을 잡으며 슬리퍼를 신었다.그때, 시연의 시선이 강수희에게 향했다. ‘왜... 내가 침대에 있었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강수희는 눈을 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시연아, 어서 가보렴. 고 대표님한테 잘 설명해. 오해일 뿐이잖니?”“네...” 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더 묻지 않았다. 지금은 유건이 먼저니까 무조건 그를 잡아야 했다.하지만 병실을 나서자 유건의 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형님, 본가로 가셨어요. 형수님도 어서 타세요.”“알겠어요.”...본가에 도착하자, 왕성애가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사모님, 도련님이랑 싸우셨어요? 도련님 얼굴이... 귀신 본 사람보다 더 창백하더라고요. 도련님의 그렇게 화난 얼굴을 본 게... 몇 년 만인지 몰라요.”시연은 말없이 웃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다른 남자랑 침대에 있던 걸 들켰다’라고 할 수도 없잖아.’유건이 화내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상상 이상으로 격렬했을 터.“이모님, 저 이만 올라가 볼게요.”“얼른 가봐요.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요. 얘기만 잘하면 다 풀릴 거예요.”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마주 내려오던 가사도우미들의 손에 익숙한 화분이 들려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