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 은범과 변호사가 안에서 나오자, 진아와 시연이 재빨리 다가갔다. “어때?” 은범은 살짝 미간을 좁히며 확실한 답을 주지는 않았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야. 변호사가 시간을 좀 더 쓰면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나만 믿어, 알겠지?”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은범은 변호사를 먼저 배웅한 뒤, 그제야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제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차에 올라탄 후, 먼저 진아를 집에 내려주고, 그다음 시연을 기숙사까지 데려다줬다. 도착하자, 시연은 차에서 내리며 은범과 함께 숙소 입구까지 걸어갔다. “은범아!” 그가 차로 돌아가려는 순간, 시연이 불렀다. 은범은 곧장 돌아섰다. “왜?” 시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상황이 진전되면 전화해 줄 수 있어?” ‘아무리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도, 성빈이 일은 결국 나 때문인데...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잖아.’ 은범은 잠시 멈칫하다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운전 조심해.” 시연은 은범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며 그가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성빈이 문제, 생각보다 심각한 거 아닌가...?’ 머릿속이 복잡해진 채, 시연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기숙사 앞. 시연이가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누군가 옆에 다가왔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뭐 보고 있어?” 낯익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순간, 시연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건 씨?” 그녀는 고개를 들자, 유건이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언제 왔어요? 전화라도 하지.” 유건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슬랙스에 단정한 셔츠, 언제나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그는 짧게 웃었다. ‘놀라긴 했지... 근데 기분 좋은 놀람은 아니야.’ 유건은 아무
시연이 양갈비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유건도 모르게 입에 군침이 돌았다. ‘이렇게 잘 먹는 건 처음 보네.’ 시연은 순식간에 한 접시를 비워버렸다. 그런데, 시연이 뼈를 깨끗이 발라내며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접시를 내려다봤다. ‘더 먹고 싶나?’ 유건은 피식 웃으며, 서빙 직원에게 손을 들었다. “소갈비 한 접시 더 주세요.” “네, 고 대표님.” 시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쑥스러운 듯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별거 아...” 그때, 유건의 핸드폰이 울렸다. ‘주재호?’ 화면을 확인한 그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재호야.” 그는 잠시 시연을 보며 말했다.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네.”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건이 창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봤다. 그 순간, 유건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래, 장소미 사고 건 말이야. 이건 네가 맡아.” 순간, 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큰일 났다.’ ‘주재호... G 시 최고의 변호사. 이 사람이 맡으면, 이길 확률 100%...’ ‘이 사람이 장소미한테 주재호 변호사를 붙였다고?’ ‘그러면 성빈이는?’ 순간, 시연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안 돼, 이거 은범이에게 알려줘야 해.’ 시연은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유건이 전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왜 그래?” 유건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아...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시연은 애써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유건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가 자리를 뜨는 순간 그 미소는 차갑게 사라졌다. ‘뭐야? 지금 분명 뭔가 숨기고 있는데.’ 시연은 서둘러 식당 구석으로 가서, 핸드폰을 열어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은범아.” 그리고, 단 몇 걸음 뒤에서. 그 목소리를 유건은 똑똑히 들었
유건이 화가 났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은 불길처럼 이글거렸고,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애써 참고 있었다. 그러다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어디 가려고요?” “집에 가야지.” 유건은 싸늘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니면, 아직도 밥 먹을 기분이야?” ‘...이 분위기에, 내가 무슨 입맛이 남아 있겠어.’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유건은 아무 말 없이 차고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는 차 문을 열고 그녀를 태우더니, 자신도 조용히 운전석에 앉았다. 차가 출발했다. 차 안은 숨 막힐 정도로 조용했다. 운전하는 내내, 유건은 전방만 똑바로 응시한 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핸들을 쥐고 있는 유건의 손가락이 심하게 경직돼 있었다. “할 말 없어?” 갑자기, 유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요?” “나한테 할 말 없냐고?”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시연을 흘겨보았다. ‘이게 무슨 뜻이지?’ ‘장소미 일은 이미 다 알았을 텐데, 굳이 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남자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 침묵이 유건을 더 자극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떠봤는데도, 이 여자는 끝까지 모른 척인 거야?’ ‘아주 좋아. 그럼, 나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지.’ 그는 입술을 꽉 다물고, 기어를 한 단계 올렸다. 차는 빠른 속도로 본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도착하자, 유건은 차에서 내렸다. 시연도 조용히 따라 내려섰다. 그러나,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유건이 먼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여자의 손목이 다시 한번 붙잡혔다. “어디 가려고?” “나... 할아버지 뵈러 가려고요.” 시연은 애써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단둘이 같이 있는 건 너무 숨 막혀.’
그날 밤, 유건은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시연도 밤새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하루 종일 일어난 일들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다 새벽이 되기도 전에 그녀는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식사 중,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은범이?’ 그녀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떻게 됐어?” 반대편에서 은범이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상황이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아.] ‘역시...’ [상대방 측 입장이 워낙 강경하고, 거기다 주재호 변호사까지 붙었으니까.]‘주재호... 그 사람 능력으로 봐선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겠지.’ [그래도 아직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걱정하지 말라고?’ 그 말은 시연에게 별다른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알았어.” 그녀는 힘없이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고, 식탁 앞에 앉아 있었지만, 더 이상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 성빈이는 결국 나 때문에 다친 거나 마찬가지야.’ ‘나라도, 직접 장소미를 만나야 해.’ ...병원, VIP 병동. 본가에서 나온 후, 시연은 곧장 강울대학교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이 병원 의사라는 신분을 이용해 VIP 병동까지 무사히 들어왔고, 지금 병실 문 앞에서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손을 들어 노크했다. “들어와.” 시연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그리고 너무나 차가운 목소리. 장소미의 목소리였다.시연은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병실은 조용했다. 침대 위, 오른쪽 다리에 깁스한 소미가 다리를 높이 올린 채 느긋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시연을 보자마자 잠시 놀란 듯했다. “너였어?” 시연은 한 걸음씩 다가가, 침대 앞에서 멈춰 섰다. “사과하러 왔어요.” “사과?” 소미는 비웃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뭘 사과하겠다는 건데?” 시연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다치게 한 사람이 내 친구이고,
시연은 미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소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네가 유건 씨의 곁을 떠난다면, 고소를 취하해 주지.” 순간, 시연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그러나 그녀는 막상 직접 듣게 되니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소미는 매끄러운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여유롭게 덧붙였다. “잘 생각해 봐. 넌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가 될 거야. 한쪽은 너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 한쪽은 어릴 적부터 함께한 소중한 친구.” “이제 선택해.” 둘의 시선이 서늘하게 맞부딪혔다. 하지만, 시연은 오랜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떠날게요.” ‘...뭐?’ 소미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는데...’ “그러니까, 약속 지켜요. 고소는 반드시 취하해줘요.” 그 말을 남기고, 시연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소미는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됐다. 이건 기회야. 절대 놓칠 수 없는 제일 좋은 기회!!’ ...병원을 나서자마자, 시연은 곧장 본가로 향했다. ‘약속했으니까, 최대한 빨리 떠나야 해.’ ‘고소 취하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바로 본가에서 나와야 할 것 같아.’ 다행히, 지금은 본가에서 조용했다. 시연은 조심스럽게 2층으로 올라가 옷장으로 향했다. 그녀는 옷가지들을 하나둘 정리하며, 마음이 이상하게 가라앉았다. ‘그래도 다행이야. 짐을 전부 옮기지 않았으니까.’ 시연의 짐은 기숙사에 대부분의 물건이 남아 있어, 많이 챙길 필요도 없었다. 유건이 사준 옷들은 그녀가 손끝 하나도 대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애초부터 그녀 것이 아니었으니까. 시연은 그렇게 약 30분 만에 모든 정리를 끝낸 뒤, 캐리어를 조용히 끌고, 1층으로 내려왔다. 혹시라도 집사 이호민이 눈치채고 고상훈
‘이혼이라니...’전화기 너머에서 그 말이 들려온 순간, 유건은 가슴을 순간적으로 움켜쥐었다. 숨이 턱 막히고, 한순간 귓가가 먹먹해졌다. ‘...또 이혼이야? 벌써 두 번째...’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지.’ ‘처음과는 다르게, 이 여자... 이제 진짜 내 아내인데...’ ‘하지만, 이 여자 또 마치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이혼 이야기를 입에 올리다니!’ ‘그래, 결국 너한테는 나도 다른 놈들이랑 똑같은 거지?’ ‘필요 없으면 버려도 되는, 가볍고 하찮은 존재.’ 분노, 억울함, 배신감... 그 모든 감정이 뒤섞이며 유건도 한순간 폭발했다. [지시연, 또 이혼하자고?] 남자의 목소리가 위험하게 느껴질 정도로 낮아졌다. [너 혼자 결정하면 끝이야? 내 허락도 없이?]시연은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그럼에도 목이 타들어 갔다. “...왜요?”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유건 씨도 장소미 좋아하잖아요. 우리가 이혼하면, 이제 제대로 함께할 수 있잖아요.”[...헛소리하지 마.]유건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참아왔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폭발했다. [이혼? 그럴싸한 핑계를 대면서 떠날 생각 하지 마.][대체 이유가 뭐야? 갑자기 이혼하자는 이유가 뭐냐고!]시연이가 대답하지 않으면, 유건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이유를 알아낼 것이다. “...그게...” 순간, 시연이가 머뭇거렸다. 예전에 유건이 자신의 병원 실습을 중단시켰던 일이 떠올랐다 ‘고유건은 내가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야.’ 그녀는 자세를 낮추고,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건에게 간절히 부탁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시연이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장소미예요.” 그 순간, 유건의 눈빛이 위험하게 날카로워졌다. [장소미가 뭐라고 했는데?]시연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그가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내가... 장소미를 찾아갔어요.” “그 사
‘어쩌지?’시연은 막막했다. ‘결자해지라고 하잖아.’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장소미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고유건이 그렇게 장소미를 사랑하는데, 만약 장소미가 직접 부탁하면 놓아주지 않을까?’ ‘어쨌든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봐야 해.’ 한시가 급해서 시연은 곧장 강울대학교병원의 VIP 병동으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굳어버렸다. ‘이게 뭐야...’ 그녀는 눈앞의 광경에 발이 묶여버렸다. 자신이 너무 급한 나머지 생각 없이 들어왔는데, 유건이 있을 줄은 몰랐다. 유건은 병상 옆에 앉아 사과 껍질을 정성스럽게 깎고 있었고, 소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무언가 나지막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소미가 먼저 시연을 봤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린 그녀는 시연과 시선을 맞추더니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기분 좋은 듯 손을 흔들며 말했다. “진 선생님, 어서 와요.” “아... 네.” 시연은 발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옮겨가며 두 사람 앞에 섰다. 슬쩍 유건을 봤지만, 그는 마치 시연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사과 껍질을 끝까지 깎아낸 유건은 과육을 가지런히 잘라 접시에 담아 소미에게 건넸다. “자, 먹어.” “고마워요.” 소미는 자연스럽게 받아 한 조각을 입에 넣었고, 그러고 나서야 시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 선생님,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 그게...” 시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살짝 창백해지며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 “혹시... 소송은 이미 취하하셨나요?” “네?” 소미가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웃음기가 희미해졌다. “당연하죠. 왜요? 설마 제가 약속을 어길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그런 뜻은 아니에요.” ‘어쩌지...’ 시연은 속으로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이 병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은 유건을 향해 어렵게 시선을
“아, 그래요.” 유건이가 떠나자마자, 소미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자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지고, 눈빛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고유건... 왜 그렇게까지 진성빈을 놓아주지 않는 거야?’ ‘정말... 나를 위해 복수를 하려는 거야?’ ‘진성빈과 지시연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데, 고유건조차 봐주지 않는다면... 그 이유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는데...’ ‘아니면, 지시연의 이상한 행동들 때문에 고유건이 언짢아진 걸까?’ ‘하지만 나 역시 고유건에게 ‘특별한 존재’야...’ 소미는 유건이 정성껏 깎아준 사과를 한 조각 집어 들고 천천히 씹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러니까 지시연, 결국 누가 웃게 될지는 모르는 거야.” ...VIP 병동 입구. 시연은 멍하니 서서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유건이었다. 그가 시연 옆에 다가와 나란히 섰다. 시연은 낮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아직 안 갔어? 날 기다린 거야?” 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미 결과가 뻔한 일을 가지고, 더 이상 당신을 귀찮게 하진 않을 거예요.” “뻔한 결과?” 유건은 눈을 반쯤 내리깔고, 잠시 멈칫했다. 그는 시연이가 결국 자신에게 매달릴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이 여자, 여전히 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군.’ 이렇게 생각하자 유건은 화가 치밀어 올랐고, 냉소하며 물었다. “그래? 네가 아는 게 뭔데? 한번 말해봐.” 시연은 손가락을 꼭 쥐었고, 입술을 떼며 조용히 말했다. “고 대표님은 사랑하는 여자를 기쁘게 해주려고 하는 거잖아요.”“첫째, 장소미 앞에서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 싶으시죠? 둘째, 장소미가 다쳤으니 고 대표님도 가슴이 아파서... 그러니까 나도 다 이해해요.” “이해한다고?” 유건의 눈빛이 싸늘해졌고, 시
[너희 집안 때문에... 고 대표가 시연이더러 문란하다고 했어. 그래서, 시연이를 버린 거라고!]은범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고,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내가 시연이를 이렇게 만든 거야?’ ‘시연이가 이렇게까지 무너졌는데... 정작, 난... 그 이유도 모른 채...’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은범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고유건한테 가야 해. 오해든, 분노든, 뭐든 다 풀어야 해.’‘내가... 시연이 대신 말해야 해.’ 그날 밤, 은범은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부터 GP그룹 앞으로 향했다. 해가 채 뜨기도 전이었다. ‘여기서 마주친다면...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어젯밤부터 회사에 있었던 건가?’ 시계는 어느덧 오전 10시를 가리켰고, 불안해진 은범은 1층 로비로 들어가, 안내 데스크에 조심스레 물었다. 직원은 은범이 또 계약 관련 건으로 온 줄 알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대표님, 오늘 출근 안 하셨어요.” “안 나오셨다고요?” 은범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어디 계신지는...” “죄송합니다.” 직원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희가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은범은 더 묻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바로 백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군데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정보를 얻었다. [고 대표? 지금 태평컨트리클럽에 갔대.]“알겠어. 고마워.” 전화를 끊자마자, 은범은 곧장 차를 몰아 태평만으로 향했다. 그곳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고급 골프장. 다행히 은범도 회원권이 있어, 어렵지 않게 입장할 수 있었다. 프런트에 물으니, 유건은 성하그룹 대표와 라운딩 중이라고 했다. ‘협상 중이겠지... 괜히 방해하면 안 돼.’ 그래서 은범은 탈의실 근처에서 조용히
진료 시간엔 병실 출입이 어려워서 은범은 외과 병동 건물 아래를 한참 서성이다가, 응급실과 외래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래... 오늘 시연이가 외래 근무일 수도 있잖아.’ 먼저 응급실을 찾았지만, 그곳엔 시연이 없었다. 이후 외래로 가보니 운이 좋았다. 시연은 정말로 외래에 있었다. 간호사가 환자를 부르고, 문이 열릴 때마다 시연은 환자와 마주 앉아 진지하게 상태를 묻거나, 진찰대 앞에 서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었다.진지하게 집중한 듯한 그녀의 표정은 아주 안정되어 있었다. ‘별일 없나 보네. 고유건이 아무리 화가 났다지만, 그 분노는 나한테만 쏟은 건가...?’‘시연이는 건드리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그래도 고유건,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구나.’ 은범은 그냥 돌아설 수도, 직접 물을 수도 없었다. 예전에 시연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기 때문. ‘되도록 얼굴 보지 말자’는 그 약속을 말이다. 그래서 은범은 조용히 외래 복도 한쪽에 앉아, 시연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점심 무렵.오전 진료가 끝난 시연은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메더니 병원 건물을 나섰다. 은범은 조용히 그녀를 따라갔다. ‘근데... 이상하네. 고유건이 붙여놓은 경호원은 어디 갔지?’ ‘내가 못 본 건가? 아니면... 오늘은 따로 없었던 건가?’ 그보다 더 이상한 건 따로 있었다. 병원 문을 나와 좌측으로 꺾으면, 길은 세 방향으로 갈라진다. 하지만 시연이 선택한 길은... 진아 집이나 고씨 가문 본가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었다. ‘이 방향은 뭐지?’ 미간을 찌푸린 은범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만삭에 가까운 몸으로, 시연은 허리를 짚으며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힘들어 보였지만, 묵묵히 나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시장이었다. ‘시장?’ 마트보다 조금은 번잡하지만, 이곳의 채소와 고기들은 더 신선하고, 가격도 저렴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닭이 당긴
은범은 늘 그렇게 생각해 왔다. 만약 시연 때문이라면, 유건은 애초에 HUA테크와 손을 잡지 않았을 거라고.하지만, 일재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닐 수도 있지! 잘 생각해 봐. 우리랑 제일 먼저 계약 끊은 사람, 고 대표잖아. 그리고 그럴 능력 있는 사람도, 고유건밖에 없어.] 은범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야... 그렇게 따지면, 일재 말도 꽤 설득력이 있지.’ “그래도 난, 고 대표가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해.” ‘그 사람, 그 정도로 감정에 휘둘릴 인간은 아닌데...’ 쿵!갑자기 등 뒤에서 무언가 쾅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은범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엌 쪽에서 강수희가 당황한 얼굴로 반찬통 하나를 떨어뜨린 상태였다. 다행히 뚜껑이 단단히 닫혀 있어 내용물이 쏟아지진 않았다. 그런데도, 은범은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어머니... 왜 저렇게 당황한 눈빛이지?’ “일단 끊을게.” 전화를 서둘러 끊고, 은범은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수희 옆에 앉아 반찬통을 주워 정리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강수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은범아, 너 방금... 전화할 때 고 대표 얘기했지?” “네.” 은범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 척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떠보려면 지금이 기회였으니 말이다. “요즘 고 대표랑 우리 회사 계약도 끊겼고, 그 이후로 프로젝트가 두 개나 물 건너갔어요. 일재가 묻더라고요, 혹시 제가 고 대표한테 밉보인 건 아니냐고요.” “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수희가 눈을 질끈 감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반응을 본 순간, 은범의 가슴은 묘하게 쿵 내려앉았다. ‘뭔가 있다. 어머니... 뭔가 아는 거야.’ “어머니.” 은범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저한테 뭐 숨기고 있는 거 있어요?” “엄마... 엄마는...” 강수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입술
시연은 조용히 손바닥을 꼭 쥐었다.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고유건이 한 말, 틀린 건 아니야.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결국 사람 생명은 다 똑같잖아...’ ‘하지만 사람 생명을 구하는 일과 아버지를 용서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야... 구해야 할까?’ ... 한편, 은범이 유건을 만나지 못한 채, HUA테크와 GP그룹의 협업은 이달 말로 종료될 예정이었다. 요 며칠 은범은 정신없이 바빴지만, 골치 아픈 건 이 일 하나만이 아니었다. 어제는 성하그룹 쪽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 분기 협업을 끝으로, HUA테크와의 재계약은 없을 거라는 소식이었다. 은범은 친구이자 HUA테크 상무인 백일재와 함께 성하그룹 대표를 찾아갔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종일 밖에서 뛰어다니던 은범이 집으로 돌아온 건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는 샤워하고 약 먹고 겨우 몸을 뉘었는데, 눈을 감은지 얼마 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강수희가 서 있었다. 두 손엔 큼직한 장바구니와 비닐백. “은범아, 엄마가 국 좀 끓였어. 반찬도 몇 가지 가져왔고.” 은범은 말없이 돌아섰고, 강수희는 그 뒤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어머니.” 은범이 입을 열었다. “이런 거 인제 그만 좀 가져와요. 저, 이 정도 나이면 밥은 알아서 챙겨 먹어요.” 아들의 무뚝뚝한 반응에 강수희는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그렇지만 밖에서 먹는 건 질릴 때도 있잖아.” 강수희는 가져온 반찬들을 하나씩 꺼내 정리했고, 냉장고에 넣기 전엔 스티커를 붙였다. “위에 라벨도 붙였으니까 먹을 때 볼 수 있을 거야. 넌 데우기만 하면 돼.” 더는 설득이 안 통할 것 같아서, 은범은 그냥 입을 닫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는데, 박일재에서 온 전화였다. 은범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설마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순간, 마음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전화가 연결되자,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그럼 다행이네요.”시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다행이야... 아무 일도 아니어서.’“그나저나...”오선화는 진료차트를 정리하며, 마치 일상 대화하듯 조용히 말을 꺼냈다.“이제 6개월 차에 들어섰어. 곧 임신 후반기인데, 슬슬 휴식은 생각 안 해?”“휴식이요?”시연은 잠깐 멍해졌다. 그 생각은 진심으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오선화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부터는 배도 더 많이 나올 거고, 몸도 훨씬 무거워질 거야. 부기도 생기고, 움직이기도 불편해지고.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것도 괜찮지 않나?”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일할 수 있어요.”오선화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뭔가 걸리는 게 있어? 고 대표님이 계시니까, 병원에서도 대놓고 뭐라고 하진 않잖아.”“네... 알고 있어요.”시연은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야.’ “저보다 선배인 선생님들도 다들 만삭까지 일하세요. 7개월까지 야간 당직도 서시고요. 저야 그에 비하면 충분히 배려받고 있는 거죠.”‘그 배려가... 전부 고유건 덕분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어.’“게다가 가만히 있는 것보다 이렇게 일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출산도 더 수월하다고 하잖아요?”“그건 맞아.” 오선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더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나는 그냥 권유만 한 거야.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컨디션 안 좋을 땐 꼭 쉬어야 해, 알지?”“네. 그럴게요.”시연은 산모 수첩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교수님, 수고하세요.”“그래, 잘 가.”시연이 문을 나서자 방 안의 공기가 살짝 무거워졌다.오선화는 웃음을 거두고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그러고는 이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통화 목록을 스르륵 넘긴 오 교수의 손이, 한 이름에서 멈췄다.바로 ‘고유건’이었다. 오선화는 깊게 한숨을 쉬고, 전화를 걸 준비했다.
그날 오후, 은범은 곧장 회사로 향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부사장 이지혁과 비서가 며칠 사이 벌어진 상황을 보고했다.“GP그룹이 우리와의 협약을 전면 종료했어요.”“GP그룹?”은범의 표정이 굳어졌다. ‘GP그룹... 고유건... 왜 갑자기...?’이번 협약은 처음부터 은범이 직접 유건과 만나 성사한 것이었다. 물론, 사적인 일로 둘 사이에 약간의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연을 둘러싼 복잡한 사정.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일 뿐.‘우린 둘 다 공사 구분은 확실한 사람들이었잖아...’은범은 이해할 수 없었다.“협약은 계속 수익이 나고 있었잖아요. GP 측에서 계약 종료 사유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정확히 말하지 않았어요.”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입장은 아주 확고했어요. 위약금은 예정대로 지급하겠다고 했고요. 환불 어음은 이미 발송했다고 합니다.”‘그렇게 빨리?’은범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떤 설득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모든 절차가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더 불안했다.“그래서 일단 수령하진 않았습니다. 돌아오시면 같이 상의하려고 했거든요.” “잘하셨어요.”‘보상보다 중요한 건, 이 협력이 가진 미래 가능성이었는데...’은범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고 대표님한테 직접 연락해 볼게요.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야 하니까요.”“네, 애초에 사장님께서 직접 성사한 건이니까... 사장님께서 움직이는 게 맞죠.”은범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GP그룹으로 향했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GP그룹 본사 건물에 도착한 은범은 곧장 로비 데스크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고 대표님 뵈러 왔습니다. 전해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로비 데스크 직원은 정중하게 미소 지었다.“안녕하세요, 혹시 예약은 하셨을까요?”“아니요.”“죄송하지만, 고 대표님과의 면담은 반드시 사전 예약이 필요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그건 알지...’은범은 고개를
“고 대표님!”하은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유건 앞을 가로막았다. 눈빛엔 분노가 가득했다.“이렇게 그냥 가시면 안 되죠!”“뭐라고?”유건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어서 시선엔 의아함과 경멸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시연이 말이에요.” 하은은 안쪽을 가리켰다.“시연이는 고 대표님의 아내잖아요. 근데, 아내 앞에서 애인이랑 나가는 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애인’이라는 단어가 뱉어지는 순간, 유건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리고 눈가의 웃음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지금... 누가 감히 소미 씨한테 그런 말을 해?”그 말에 하은은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곧 더 큰 화가 치밀었다.“제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그리고, 장소미 씨는 또 뭐예요? 고 대표님한테 아내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행동하는 거, 무슨 의미인데요? 그리고 고 대표님이 장소미 씨를 감싸면, 시연이는 뭐가 되는 건데요?!” ‘시연이를 뭐로 보는 건지, 내가 대신 물어야겠어!’하지만 유건은 피식 웃었다. 차가운 비웃음이었다.‘그럼 지시연은 나를 뭐로 봤을까?’그러나 이런 생각을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비켜.”“싫어요!”그 말에 유건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목소리엔 더 이상 감정이 없었다.“솔직히, 너한텐 손쓸 가치도 못 느끼겠지만... 이쯤 되면 진짜 귀찮네.”“뭐라고요?”하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해졌다. ‘지금... 나한테 이런 말을...?’“비킬 거야, 안 비킬 거야?”“하은아!”그때, 시연이 급히 달려왔고, 하은의 팔을 잡아끌며 중간에 섰다.“이런 사람들이랑 뭐 하러 싸워? 가고 싶다잖아. 그냥 보내줘. 누가 어딜 가든, 그건 자유잖아.”그러면서 하은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가서 라면이나 먹자. 아까 건 너무 불었으니까, 새로 하나 뜯어야겠어.”시연의 말투는 덤덤했고, 시선은 여전히 유건을 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유건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유건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간 이식 얘기, 우주한테 물어본 적 있어?”“뭐라고요?”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그걸... 저 사람이... 지금 왜 묻지?’찰나의 정적. 그리고 곧, 시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나는 우주의 보호자예요. 우주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해요.”하지만 유건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내가 알기론, 우주는 올해로 만 14세야. 이미 법적으로 자기 결정권이 생긴 셈이지.”남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만큼 분명했다.“게다가 우주는 신체 조건도 아주 좋잖아.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기증 가능 기준에 부합해.”유건의 말은 아주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논리는, 결국 ‘장소미’를 위한 것이었다.‘하... 정말 대단하다, 고유건.’시연은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무심한 듯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장소미를 스치듯 바라봤다.‘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말이 되는구나.’“우주의 열네 살이, 일반 아이들의 열네 살과 같다고 생각해요?”시연은 미세한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우주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내가 결정하는 거라고요.”그 말에 유건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는 톤을 낮추면서도 힘을 실어 말했다.“지나치게 독단적이네.”“우주는 똑똑한 아이야. 심리적으로 결핍이 있는 거지, 지능이 낮은 건 아니잖아. 만약 언젠가 지 사장이 세상을 떠나고, 우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자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그 말에 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 입꼬리에 걸려 있던 억지 미소조차 사라졌다.“자책이요...?”시연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냉소가 섞인 차가운 어린 목소리로 유건을 향해 말했다.“잘 들어요. 우린 인생에서 많은 걸 후회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미안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그 ‘누군가’ 안에 지동성은 절대 포함되지 않아요.”그 말에 유건의 이
하은은 눈치가 빨라서 괜히 시연에게 짐이 될까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시연은 역시 장미리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우리 엄마요? 죽은 지 십몇 년 됐는데, 오늘 좀비처럼 부활이라도 한 거예요?”하은은 그제야 시연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다. “아! 그럼 내가 지금 바로 무당 선생님한테 연락할게!”“얼른 해줘.”두 사람은 말 그대로 티키타카였다. 장미리의 얼굴은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지시연! 넌 진짜 싹수가 없어!”“맞아요.”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라는 사람도 죽은 거나 다름없죠.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으니, 예의 따윈 배운 적 없어요.”그녀는 팔을 쭉 뻗어 문을 가리켰다.“무슨 용건인지는 상관없고, 지금 당장 나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엄마’라는 말 좀 들먹이지 마세요. 혹시라도 다음에 또 그런 말을 뱉는다면... 당신 입, 내가 부숴놓을 수도 있어요.”시연의 눈빛이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서릿발 같았다.“진심이에요. 장난 아니니까, 절대 시도하지 마세요.”“너... 너 진짜...!”장미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시연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말솜씨에서도, 기세에서도 밀렸으니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물러설 수 없었다.“네 아빠... 쓰러졌어. 지금 혼수상태야.”그 말에 시연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 정도라고...?’눈빛 속에 망설임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그럼 그분 옆에서 간병이라도 해주셔야죠. 여긴 왜 와서 소란인데요?”“너...”“지시연!”자기 엄마가 밀리는 걸 보다 못한 소미가 나섰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진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우리가 왜 너를 찾아왔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나야 모르지.”시연은 흰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그럼 알려줘 봐. 여기엔 왜 온 건지.”소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