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있던 직원들과 반하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다.“대표님, 감기 걸리셨어요?”“대표님, 병원 안 가보셔도 돼요?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여요. 안색이 어두운 게...”직원들의 걱정에 반하준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엄규민이 나서서 직원들에게 한마디 하려는데 반하준은 이미 회사 정문을 향해 곧장 걸어가고 있었다.엄규민은 서둘러 뒤따라가 반하준을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다.“대표님, 로비에서 한가하게 놀던 직원들 전부 기록해 뒀다가 월급 삭감하겠습니다.”차에 탄 반하준은 온몸으로 싸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고개를 들어 엄규민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왜, 내가 강민아의 한심한 전남편이라고 온 세상에 소문내려고?”굵직한 땀방울이 엄규민의 이마에서 뚝뚝 떨어졌다.그는 제자리에 굳어버린 채 입술만 달달 떨었다.“저... 전 그런 뜻이 아니라... 인터넷에 좋지 않은 말들이 너무 많아서요.”엄규민은 반하준에게 휴대전화를 건넸다.그제야 반하준은 인기 검색어 1위가 ‘강민아 전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콧방귀를 뀌었다.언젠가 강민아 덕분에 그가 유명해질 줄이야.반하준은 인기 검색어 아래 달린 댓글을 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발아래 존재하는 것들에겐 눈길조차 줄 생각이 없었다.만약 강민아가 결승에서 좋은 성적을 따낸다면...반하준은 아량을 베풀어 강민아를 회사에 데려와 연봉 수억의 자리를 줘서 자신을 위해 일하게 할 생각이었다.그 순간 반하준의 휴대폰이 울리고 강나현의 전화임을 확인한 그가 전화를 받았다.“하준 씨, 오늘 밤에 정수산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는데 민이 데리고 구경하러 가고 싶어.”반하준의 목소리가 다소 차가웠다.“민이가 갈 곳이 아니야.”“하준 씨, 내가 민이 데리고 산에 오르는 게 걱정되면 하준 씨도 같이 가.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강나현의 말이 반하준을 자극했다. 오늘은 반유하의 생일이다. 과거 반유하가 레이싱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반하준은 정수산 크로스컨트리 대회를 후원했다.“우리가 땅에
강나현 앞에 앉은 민이는 무척 신이 났다.“역시 현이 형밖에 없어요. 예전엔 아빠가 날 데리고 레이싱 경기에 가는 건 꿈도 못 꿨는데.”아이가 입을 삐죽거렸다.“그 촌스러운 시골 여자보다 형이 백배, 천배는 나아요!”강나현은 킥킥 웃으며 치솟는 눈썹을 억누르지 못했다.“네 엄마가 인터넷에서 사람들에게 욕먹는 거 알아?”민이가 정정했다.“그 여자는 이제 내 엄마가 아니에요!”강나현의 눈가에 머금은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민이는 호기심에 물었다.“왜 욕먹는데요?”“민아 언니가 부정행위로 수학 경시대회 예선에서 1등 했거든. 네티즌들이 성적이 거짓이라는 걸 알아냈어. 본인 실력으로는 절대 1등 할 수가 없으니까.”말하며 강나현이 SNS를 열어 민이에게 강민아를 욕하는 댓글을 읽어주려는데 인기 검색어가 ‘강민아 전남편’일 줄이야.검색어를 클릭한 강나현은 사람들의 댓글을 보고 당황했다.서둘러 강민아에 대한 댓글을 찾아보니 전에 강민아가 부정행위를 했다며 확신에 차서 말했던 블로거가 사과문을 올리고 자신의 오해라며 밝혔다.이후 강민아와 관련된 인기 댓글을 찾아보니 절반은 그녀의 미모를 칭찬하는 댓글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한심한 전 남편을 만난 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는 댓글이었다.강나현의 숨이 턱 막히며 휴대폰을 잡은 손이 떨렸다.“현이 형?”민이는 처음 보는 강나현의 무서운 표정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당장이라도 휴대전화에 들어가 상대를 때릴 것 같은 사악한 눈빛이었다.번뜩 정신을 차린 강나현이 웃으며 민이에게 물었다.“네가 보기엔 엄마가 예뻐, 내가 예뻐?”민이가 잠시 망설이나 강나현의 얼굴이 극도로 일그러졌다.“현이 형이 제일 예쁘죠!”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강나현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민이에게 말했다.“그 여자 얘기는 그만하자. 오토바이 운전해 보지 않을래?”민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공이 확장되며 설렘을 드러냈다.“정말 운전해도 돼요? 하지만 차가 무거운데...”강나현이 가슴
그동안 강나현은 민이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는 모습을 여러 번 찍어 SNS에 올렸다.계정을 개설한 지 5년이 지났지만 팔로워 수는 2천 명 남짓에 그쳤고 오토바이를 타는 멋진 영상을 올리면 ‘좋아요'를 눌러주는 것은 전부 그녀의 오합지졸 친구들이었다.강나현이 처음으로 민이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는 영상을 자신의 계정에 올렸을 때 하룻밤 사이 큰 화젯거리가 된 자신을 발견했다.그 후 자주 민이를 데리고 오토바이를 타게 되었고, 민이와 함께 찍은 영상은 매번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했다.강나현은 SNS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었기에 지난 한 달 동안 부지런히 업데이트를 해왔고, 그녀의 계정은 수백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리게 되었다.물론 강나현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컸지만 강나현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자신을 질투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치부했다.다섯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무거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건 그녀만 할 수 있는 짓이었다.하지만 강나현은 이번 주에 민이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는 영상을 다시 올렸을 때 조회수가 20만으로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네티즌들은 이제 이런 종류의 영상에 식상해하고 있었다.그래서 강나현은 절친한 친구와 의논해 크게 한 건을 준비했다.오토바이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데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다섯 살배기 아이가 조종하게 했다.그러더니 갑자기 와인 한 병과 잔을 꺼내 오토바이에 앉아서 술을 따랐고,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와중에도 술잔을 흔들며 느긋함을 보여줬다.그 모습을 찍은 친구는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완벽해. 나현, 이 영상에 ‘좋아요’가 최소 십만개는 달릴 거야.”...강민아의 일상은 여느 때와 같았다. 정이를 학교에 데려다준 후 집에 돌아와 온갖 과제를 연구했다. 대학 시절에 들었던 수업을 그대로 복습하며 강민아는 지난 5년 동안 놓쳤던 지식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저녁에는 정이와 함께 저녁을 먹은 후 정이를 데리고 심씨 가문으로 향했다.낮에 부딪혔던 문제들을 정리해 심한기에게 직접 가르침을
“이 빌어먹을 놈이 어딜 감히 주제도 모르고!” 심한기가 곧장 욕설을 퍼붓자 방연석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교수님!”“망할 놈의 자식, 머리 검은 짐승 같으니라고. 나라에서는 네 얼굴을 가져다 방탄조끼나 만들지 왜 그냥 두는 거냐? 허, 경기에서 물러나라고?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이 자식아! 경고하는데 민아는 절대 대회에서 나갈 리 없어. 민아 능력으론 충분히 금상을 받고도 남아!”방연석은 웃음이 났다.“교수님, 아직 모르시겠지만 많은 참가자들의 청원에 따라 이번 결승전에는 본선 20위 안에 든 참가자들이 서로 질의응답 대결을 펼치는 코너가 하나 더 생겼어요.”강민아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그녀가 망신당하길 기대하는 모습이었다.“교수님 대단한 제자는 대결에서도 이기기 쉽지 않을 텐데, 주부가 금상이라니요. 허, 꿈도 꾸지 마세요.”강민아가 말했다.“방연석, 내가 금상을 받으면 너뿐만 아니라 교수님 일상생활을 방해한 모든 사람이 교수님께 공개로 사과해야 할 거야!”방연석이 팔짱을 꼈다.“웃기는 소리. 네가 정말 이번 대회에서 모두를 이기고 금상을 받으면 내 머리를 비틀어서 너한테 공으로 던져줄게.”강민아가 비웃었다.“현실적으로 가능한 벌칙만 얘기해.”방연석 뒤에 있던 남자가 경멸하듯 말했다.“강민아가 금상 받으면 연석이가 거꾸로 서서 똥 쌀 거야.”그런 저급한 장면은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었다.방연석은 친구가 자신을 불구덩이에 떠미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그러자 친구가 조용히 대꾸했다.“넌 댄스 동아리 회장이니까 거꾸로 똥 싸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잖아?”방연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건 쉽고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정말 그런 짓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신고할 거다.“난 찬성.”심은호는 거실 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들어와서 심한기 옆으로 다가왔다.“아버지, 거꾸로 돌면서 똥 싸는 거 본 적 없죠? 보고 싶지 않으세요?”심한기는 코를 만지며 살짝
‘봉긋하고 하얀...’강민아의 머릿속에 이러한 생각이 떠오를 때쯤 심은호가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강민아는 순간 현행범으로 잡힌 기분이었다.그녀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다가와 말했다.“제가 도와드릴게요.”심은호는 내심 무척 신이 났다.강민아가 화장실에 들어갈 때부터 등에 약을 붓는 행동을 반복해서 연습하며 강민아가 그를 발견한 순간 약물을 바지에 쏟았다.강민아는 그의 손에서 약병을 가져가 면봉에 묻힌 뒤 남성의 등 상처에 살며시 발라주었다.상처를 봉합한 의사의 솜씨가 워낙 훌륭해서 상처 표면이 여전히 붉은 색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허리를 다쳤다는 사실도 몰랐을 거다.“미안해요.”강민아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정이를 구해줬는데 제대로 감사 인사를 못 드렸네요.”그렇게 말하던 그녀는 웃으며 심은호에게 물었다.“제가 밥 한 끼 대접할까요? 식당에 가기 싫으면 제가 직접 해도 돼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저 요리 금방 배워요.”심은호는 이미 다 계획이 있었다.“그럼 한 가지만 약속해 줘요.”“네?”남자는 셔츠를 집어 들고 느긋하게 입었다.강민아의 관심을 끌어당긴 그는 말하다 말았고, 그가 고개를 숙여 단추를 잠그자 강민아는 숨이 턱 막히며 방 안의 공기 흐름도 멈추는 것 같았다.심은호의 움직임이 어쩐지 조금 느려진 것 같았다.남자가 살짝 몸을 돌리고 있어 강민아는 남자의 튀어나온 가슴 근육과 복부의 선명한 조각들, 바지 속까지 쭉 이어진 치골까지 한눈에 보였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꾹 참았다. 강렬한 호르몬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일부러 이러는 거다!그는 단추를 잠그며 강민아의 시선을 유도해 복부에서 아래로 미끄러지게 했다.강민아가 넋이 나간 사이 심은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 순진한 눈빛은 마치 조금 전 느꼈던 유혹이 전부 그녀의 망상처럼 보이게 했다.번뜩 정신을 차린 강민아에게 심은호가 말했다.“오늘 밤 정수
심은호가 말했다.“내가 다쳐서 특별히 전문 레이서를 고용했어.”심은호를 본 민이는 고양이를 본 쥐처럼 반하준 뒤로 숨었다.정수산 레이스는 아마추어 경기지만 서경의 최상위층이 주최한 대회로 장소, 상금, 직원들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대회에 참가하는 재벌가 자제들은 1년 동안 수억 원을 들여 최고급 경주용 차를 개조했으니 당연히 전문 레이서도 고용했다.그래야만 레이스에서 3위 안에 진입할 수 있으니까.이 재벌가 자제들에게 순위권 진입은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물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역할을 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 재벌가 자제들은 보통 조수석에 앉아 드라이버의 내비게이터 역할을 하기도 했다.강민아는 이곳 정수산에 나타난 모든 인물을 알고 있었다.반하준과 결혼한 7년 동안 그녀는 남자가 크로스컨트리 레이스에도 참여할 줄은 전혀 몰랐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드림의 드라이버에 대해 무척 궁금해했다.강나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심은호, 그쪽 레이서한테 우리랑 인사나 나누자고 해.”하지만 강민아는 차에서 내릴 생각이 없는 듯 앉아만 있자 재벌 2세 중 한 명이 소리쳤다.“심은호, 네 레이서 무척 오만하네. 우릴 우습게 보는 거야?”심은호가 가소로운 듯 콧방귀를 뀌었다.“루나가 너희 같은 오합지졸을 우습게 볼 만도 하지.”루나라는 이름이 나오자 많은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일부는 잘못 들었다며 귀를 의심했다.참가자와 관중은 물론 열띤 수다를 떨던 스태프들까지 모두 일제히 조용해졌다.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드러내며 심은호와 드림 자동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세상에, 심은호, 네가 누구를 데려왔다고?”가늘게 뜬 남자의 눈 위로 풍성한 속눈썹이 드리워 눈가에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었다.“루나는 레이싱 업계에 한명밖에 없지. 달의 여신.”루나는 로마 신화에서 달을 의미하며 레이싱 서클에서 그 이름은 더더욱 전설적인 존재였다.재벌가 자제들은 환호성을 질렀다.“대박! 심은호,
루나를 데려왔다는 심은호의 말에 강나현은 시종일관 가식적인 미소만 유지하고 있었다.“전직 국내 여자 1위 레이서에 걸맞게 패기가 대단하네.”강나현은 농담 섞인 어투로 감탄하면서도 속으로는 욕하고 있었다.‘은퇴한 지 5, 6년도 지났는데 아직도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나 봐.’“루나는 지지 않아.”심은호가 자리에 있는 모두를 훑어보다가 반하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여기 있는 사람 중 누구도 그 여자를 이길 수 없어.”심은호는 돌아서서 드림을 향해 걸어갔다.강나현이 팔짱을 낀 채 그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루나가 1등 못 하면 내가 드림 좀 갖고 놀아도 돼?”심은호가 걸음을 멈추는 것을 본 강나현은 의기양양했지만 곧바로 돌아보는 그의 잘생긴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있는 것을 보자 바람이 불면서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뱁새 가랑이 찢어지겠네.”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뭐라 그랬어?” 강나현은 이해하지 못했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배를 감싼 채 웃었다.“하하하, 심은호가 너 보고 뱁새래. 하하하!”“닥쳐!” 강나현은 발을 들어 절친을 향해 발길질했다.심은호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갸웃하며 반하준에게 말했다.“루나도 왔는데 박 대표님께서 상금 추가 안 하시나?”이번 레이싱 대회 1등 상품은 160억 상당의 람보르기니 베놈이었다.반하준은 심은호가 루나를 이용해 거하게 뜯어내도 상관하지 않았다.“루나가 1등을 하면 내 차고에 있는 차 세 대를 가져가라고 해.”다른 재벌 2세들이 환호했다.“박 대표님 통이 크시네!”심은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콧방귀를 뀌었다.“차 세 대에 대표님께서 직접 세차하는 것까지, 어때?”강나현이 곧바로 반하준을 옹호했다.“그건 너무하잖아!”반하준은 심은호가 그를 저격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도 자신만의 생각이 있었다.“좋아.”그는 심은호가 제시한 조건에 흔쾌히 동의했다.강나현은 불안했다.“하준 씨, 어떻게 자존심도 다 버리고 남에게 세차를 해줄 수 있
반하준은 이번 경기의 승패에 집착하지 않았다. 프로 레이서도 아니었기에 단지 하늘에 있는 반유하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블랙홀을 몰고 레이스 코스를 달렸다.드림의 조수석에 앉은 심은호는 강민아가 멍하니 블랙홀을 쳐다보는 것을 발견했다.“왜 그래요?”강민아가 속눈썹을 깜빡였다. 헬멧을 쓰고 있어서 심은호는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난 저 차 싫어요.”심은호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1등을 하면 반하준 차고에서 차 세 대를 고를 수 있는데 그때 블랙홀을 택해서 폐차장으로 보내 버려요.”강민아는 그의 말에 웃음이 터지며 주위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완전히 사라졌다.과거 그녀는 반씨 가문 차고에서 ‘블랙홀'에 매료되었고, 차 문이 잠겨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그녀가 차 내부를 어루만지고 있을 때쯤 반하준이 그녀를 밖으로 끌어당겼다.그때 아직 두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그대로 무거운 배를 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차 문 옆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남자에게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가득한 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철벽처럼 보였다.“내 차 더럽히지 마.”“하준 씨, 난 당신 아내야...”그녀는 자신이 레이싱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데 반씨 가문 차고에 개조한 슈퍼카가 있을 줄은 몰랐다고 말하고 싶었다.동료 레이서를 만나서 기뻤다.차를 보자마자 그 차가 드림과 함께 질주하는 모습을 상상했다.그의 아내로서 반씨 가문 차고에서 반하준의 스포츠카에 타는 게 뭐가 문제일까.“블랙홀이 너보다 훨씬 비싸. 강민아, 다신 내 눈앞에서 이 차에 손대지 마.”아내에게 매정하게 경고한 반하준은 차 문을 잠그고 강민아를 일으켜 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지나쳐 가버렸다.강민아가 손을 뻗어 차 문에 기대어 일어나려는데 서늘한 기운이 화살처럼 그녀에게 꽂혔다.자리에 앉은 채로 뒤돌아보니 멀지 않은 곳에 남자가 가지 않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고고한 자태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강나현은 다급한 어조로 강민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이 모든 게 강민아가 우리를 해치려고 짠 계획이에요!”그런데 얼굴 전체가 돼지처럼 부어올라 말을 해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목소리가 어눌하게 들렸다.그런 그녀의 말에 강성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서둘러 벨트를 반으로 접은 뒤 강나현의 콧대를 조준해 휘둘렀다.“민아랑 내 부녀 사이 이간질할 생각 마!”강나현은 당황했다. 강성진이 왜 갑자기 강민아 편을 드는 걸까.“아빠가 키운 자식은 저예요! 강민아랑 무슨 감정이 있다고 그래요? 애초에 데려올 생각도 없었잖아요!”“닥쳐!”강성진은 화가 났다. 그의 평판은 무너졌지만 강민아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앞으로 그녀에게 의지해야 할 일이 많은데, 강나현이 대놓고 헛소리하는 걸 그냥 둘 리가 없었다.강성진이 소리를 질렀다.“테이프 가져와!”작고 하얀 손이 검은 테이프를 건넸다.강기성은 강성진에게 테이프를 건네는 김예나를 보고 날카로운 눈썹을 들썩였다.강성진이 테이프를 찢자 강나현이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아빠, 뭐 하는 거예요?”강성진이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네 망할 입을 막으려는 거지!”강성진은 본인과 강민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강민아가 강씨 가문에 돌아온 지 9년이 지났어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건 손에 꼽힐 정도였다.게다가 둘은 한때 팽팽하게 맞서 싸운 적도 있었다.하지만 이제 강성진은 강민아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다.“아빠! 하지 마요!”강나현이 비명을 질렀지만 강성진의 행동에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강성진이 곧장 테이프로 그녀의 입을 감자 김예나는 한쪽에 서서 진흙탕처럼 혼탁한 눈빛으로 싸늘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비슷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한때 강나현은 그녀를 화장실에 가두고 테이프를 붕대 삼아 눈과 머리, 입, 코를 감아 숨도 못 쉬고, 살려달라고 애원할 힘조차 없게 만들었다.그렇게 그녀가 죽기만을 기다리며 어둠 속에 잠식되어 갈 때 가위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강나현은 강성진의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고 상황을 뒤집을 희망이라도 본 듯 서서히 안도했다.‘그래, 이제 강민아가 맞아서 이빨이 뽑힐 차례야!’강성진은 강나현의 휴대폰 앨범 속 강민아와 관련된 영상을 지우고 숨을 고르더니 손을 들어 또다시 강나현의 뺨을 때렸다.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강나현의 얼굴을 강타했다.강나현의 입에 머금었던 솜뭉치가 끈적끈적한 피와 섞여 바닥에 튀어나왔다.“강나현, 이 망할 것! 날 해친 것도 모자라 민아까지 해치려고 들어? 강씨 가문을 무너뜨리고 싶은 모양이구나! 내가 오늘 너 때려죽인다.”강성진은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아니에요!”강나현이 피를 뱉자 혀끝에는 온통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소리를 질렀지만 그녀의 설명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강성진은 왜 그녀를 믿지 않는 걸까.휴대폰을 강나현에게 던진 뒤 강성진은 벨트를 풀었다.강나현은 강성진이 벨트로 자신을 채찍질하려는 것을 보고 겁에 질린 표정을 드러냈다.그 순간 강성진의 휴대폰이 울렸다.벨트로 강나현을 한 대 세게 내려친 뒤 다른 한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여보세요.”강성진은 발신자를 확인한 후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들어와요.”강승 테크의 주요 주주 몇 명이 들어왔고 맨 앞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성진, 지금 여론이 자네한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 옴 쪽에서는 입찰에서 빠지려고까지 해!”강성진은 그 말에 덩달아 조바심을 냈다.“네? 어떻게 멋대로 발을 뺀다는 거죠? 지금 당장 옴 테크 쪽 임원에게 연락해 봐야겠어요!”또 다른 주주가 강성진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지금 어디든 자네가 나서면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다는 걸 몰라? 사람들 웃음거리가 되고 싶어?”“난...”주주들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우린 고심 끝에 만장일치로 자네가 먼저 대표 사임 발표를 하길 바라네. 그래야 자네나 회사에 대한 불리한 여론이 잠잠해질 거야.”“어떻게 강승
그러자 강성진은 강나현에게 소리쳤다.“민아를 좀 봐! 우리 회사를 위해서 애쓰고 있잖아!”강민아가 덧붙였다.“그런데 오늘 파티에서 공개된 영상이 서경 상류층에 퍼졌어요.”그녀는 부드러운 한숨을 내쉬며 강나현에게 물었다.“나현아, 넌 상류층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니까 가서 확인해 봐. 다들 우리 집 얘기하고 있는지.”강나현은 심장이 철렁하고 소름이 돋았다.강민아가 지금 그녀를 골탕 먹이고 있다는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강성진이 곧바로 강나현을 재촉했다.“휴대폰 내놔.”강나현은 두 볼이 부어올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강민아가 또다시 함정을 파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그녀는 강성진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곧바로 강성진이 그녀의 뺨을 또 때렸고, 이미 빨갛게 부어오른 뺨 사이로 새빨간 피가 스며 나왔으며 살갗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강성진은 그녀의 앞에 서서 내려다보며 명령했다.“두 번 말하게 하지 마!”강성진의 위협적인 압박에 강나현은 순순히 휴대전화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부은 얼굴로 휴대폰 잠금이 풀리지 않자 지문으로 해제한 뒤 카톡 채팅 기록을 살펴보았다.곧 여러 명이 친구 추가 요청을 보냈고, 강나현을 삭제하지 않은 재벌 2세들이 파티에서 강나현이 당당하게 강성진이 바람피운 것을 공개한 영상 링크를 보냈다.[강나현, 너 멋있다!][나현, 이게 네가 말한 빅 뉴스야?][역시 너야. 나오자마자 아빠부터 건드리네. 강나현, 용감해! 너는 내가 인정한다!]강성진은 강나현을 칭찬하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두 눈에 담긴 불길이 거세게 번졌다.한심한 재벌 2세들은 부모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강나현이 파티에서 보여준 행동은 그들에게 ‘모범’ 역할을 했기에 강나현을 숭배하기 시작했다.강나현은 소파에 앉아 강성진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발바닥부터 올라오는 한기가 온몸을 휩쓸고 팔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래위 치아가 달달 떨리며 서로 부딪혀 딱딱 소리를 냈다.“아빠...”강성진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강나
강민아는 눈을 깜빡이며 물잔이 강나현의 가슴을 강타하고 뜨거운 물이 마침 강나현의 얼굴에 튀면서 그녀의 얼굴도 씻기는 것을 바라보았다.“아악! 젠장!”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강나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물이 그녀의 얼굴에 있던 핏자국과 뒤섞이며 연분홍색으로 바뀔 때쯤 그녀가 허둥지둥 소파에서 일어났다.“죄송해요...”김예나는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어두운 동공엔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이런 망할!”강나현은 욕설을 내뱉으며 뒤에서 쿠션을 잡아 김예나를 향해 세게 내리쳤다.김예나는 피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강나현이 던지는 딱딱한 물건에 맞아 머리에 피가 난 적도 있는데 이까짓 쿠션쯤이야.강기성이 손을 뻗어 쉽게 쿠션을 낚아채더니 김예나를 등 뒤로 보내면서 쿠션을 옆으로 던졌다.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예나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그의 눈에 강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미친개 같았다.강나현은 입에 솜을 물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당장이라도 김예나를 산 채로 잡아먹을 것 같은 위협적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일부러 그런 거야! 왜 아직도 우리 집에 살게 놔두는 거야? 저번에 내 그릇도 깨고, 내 옷도 잘못 빨고, 내 방 창문도 열어놔서 엄청나게 큰 벌레가 내 침대에 기어들어 왔어!”김예나는 벌벌 떨며 강기성 뒤로 숨었다.강나현의 말이 맞다. 일부러 그랬다.강기성의 손에 이끌려 강씨 가문에 살게 되면서 강나현은 일부러 그녀에게 집안일을 시켰다.김예나도 기꺼이 도우미를 자처했는데 청소도구를 들고 강나현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하지만 강씨 가문의 다른 도우미들이 너도나도 일을 도와주는 탓에 강나현의 방을 꼼꼼히 뒤져 불리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강나현에게 학창 시절 겪었던 괴롭힘을 하나하나 되갚아주는 것뿐이었다.2년 내내 강나현에게 괴롭힘을 당했기에 강씨 가문에서 강나현에게 했던 복수는 그녀가 한 짓에 비하면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어디서 목소리를 높여?
그녀가 강기성에게 약을 먹이고 나서야 그는 조금 나아질 기미가 보였다.강기성은 이 집안에서 강성진에게 맞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강나현은 어렸을 때부터 강성진에게 매를 맞으며 점차 폭력을 동경하게 되어 여성의 정체성을 버리고 남자 무리에 어울리려 했다. 마치 자신도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가 되어야만 매 맞는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는 것처럼.“그 사람이 도민영을 아끼는 것처럼 보여도 예전에 때려서 도민영 얼굴이 부은 걸 봤어. 난 어렸을 때부터 도민영이 저 사람한테 맞아서 머리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어젯밤에 왜 오빠를 때린 거야?”강기성은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내가 사람을 시켜서 친부모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았어.”강기성이 그녀를 돌아보았다.“강씨 가문은 남자가 물려받아야 한다면서 내가 친부모에게 가면 강씨 가문 대가 끊길 거래.”말하며 강기성이 경멸하듯 비웃었다.“난 언젠가 저 사람 죽여버릴 거야.”그저 홧김에 하는 말이었다. 강성진의 피가 튀는 것조차 더러운데 아무 상관 없는 사람 때문에 자신의 앞길까지 망칠 필요는 없었다.강민아는 숟가락으로 강기성에게 포도당 물을 먹여주었다.“언젠가 우리가 크면 저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날이 올 거야.”도민영이 아이를 바꿔치기했다는 걸 강성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강기성은 그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하지만 고리타분한 마인드와 강나현의 출생 이후 강성진은 큰딸을 되찾으려는 생각을 접었다.“다들 이만 돌아가세요.”직원들에게 말하던 강민아는 자리에 있던 임원들과 주주들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먼저 입을 열었다.“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단상 위에 꿇고 앉은 그녀의 발치에는 아직 기절한 척 시늉하는 도민영이 있었다.그녀의 단호한 눈빛에 임원들도 마음을 진정시켰다.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강민아의 차분한 모습은 임원들에게 구원의 지푸라기와 같았다.강민아는 심은호의 손바닥 위로 손을 올려놓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나현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강성진에게 설명했다.“아빠,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올린 영상이 아니라고요!”강성진은 이제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과 어린 비서의 동영상이 폭로되었고, 게다가 폭로한 당사자는 그의 잘난 딸이었다.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행복한 얼굴로 단상 아래에 있는 임직원들에게 두 딸이 강승 테크에 입사해 온 가족이 함께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그의 열정적인 연설이 아직도 귓가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효녀 강나현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강성진은 당장이라도 강나현의 목을 비틀어 머리를 공처럼 차버리고 싶었다.“개자식,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강성진은 발을 들어 강나현의 머리를 세게 걷어찼다.이대로 머리를 박살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강나현은 겁에 질려 오줌까지 지리며 서둘러 기어서 도망쳤다.그때 강민아를 돌아보았다.‘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냥 내버려두진 않겠지?’그런데 강민아가 무릎을 꿇고 앉아 도민영의 어깨를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엄마, 일어나봐요!”강민아가 손을 뻗어 도민영의 인중을 누르자 도민영은 미간을 깊게 찡그렸다.그러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뜨며 강민아를 노려보았다.“아파!”그리고 다시 기절했다.강민아는 연기라는 걸 알았다.지금 상황에서는 무고한 피해자인 척 연기하는 것만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그래서 그녀도 엄마를 걱정하는 효녀인 척 강성진에게 맞는 강나현을 무시하고 있었다.강나현의 비명이 끝없이 울려퍼졌지만 자리에 있던 직원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강성진은 그들의 대표였고 말 한마디로 그들을 해고할 수 있으니까.임원들과 주주들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거나 굳은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았다.강성진이 어린 비서와 놀아난 사실은 사내에서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적나라한 영상이 공개되고 현장에 기자까지 있으니 일의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그들은 지금 어떻게 하면 강승 테크에 미칠 부정
강나현의 목소리가 반하준의 귓가에 들리고, 그는 포박당한 채 매서운 눈빛으로 TV 화면을 응시했다.강민아를 저격하는 말인 건 안다.대체 강민아의 무슨 약점을 잡은 걸까.강민아가 강씨 가문을 파멸로 몰고 갈 만큼 위험한 짓을 한 건 그를 이곳에 가둔 것뿐이었다.하지만 강나현이 그가 감금되었다는 걸 어떻게 알고?반하준은 자신의 뇌 어딘가에서 신경이 거칠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안 돼!’절대 그가 이곳에 감금된 사실을 폭로해선 안 된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확장되며 스크린에는 적나라한 영상이 재생되었다.강성진의 얼굴이 단번에 퍼렇게 질렸다.“아아악!”도민영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었지만 미처 입을 가리지 못한 채 비참한 비명을 내뱉었다.강씨 가문의 다른 친척이나 주주들도 일제히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좋지 않았고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강나현은 단상에 서서 모두의 반응을 살피고는 단상 아래 손님들에게 말했다.“여러분, 다 보셨나요? 저런 사람이 강승의 리더가 될 자격이 있나요? 저렇게 사생활이 엉망인데 정말 강승 테크를 믿고 맡길 수 있나요?”강나현이 눈가에 악의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차갑게 웃었다.무죄로 석방된 후 강민아에게 주는 큰 선물이었다.‘그러게 누가 감히 도발하래?’반하준의 얼굴을 다른 남자로 바꿨으니 이제 강민아가 심은호와 사귀면서 다른 남자와 낯 뜨거운 행각을 벌인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었다.강나현은 심은호를 바라보며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했다.무대 맨 앞줄에 서 있던 심은호는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강나현 씨의 가족도 서슴없이 희생하는 용기는 대단하네요!”강나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심은호는 왜 저렇게 담담한 걸까.게다가 대놓고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강나현은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역시 심은호는 강민아를 그저 데리고 놀 생각이었고, 어쩌면 진작 그녀가 방탕하다는 걸 알고 있었나 보다.강나현이 승리의
강나현은 강민아의 게시물을 클릭해서야 이미 올렸던 영상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고개를 든 그녀가 매서운 눈빛으로 강민아를 쳐다보았다.영상을 삭제했다고 그녀를 도발했던 게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이미 강민아와 반하준의 영상을 저장해 놓았으니까!강민아의 입가에 번진 미소를 보며 강나현은 일부러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올렸다고 더더욱 확신했다.강민아는 분명 반하준이 합의서에 사인하고 아직 민이가 병원에 있는 데도 강나현이 보상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것에 화가 난 거다.그래서 다시 친구 추가를 한 뒤 일부러 그녀만 볼 수 있는 게시물을 올려 기선제압을 했다.강민아는 그녀가 반하준을 좋아해서 그의 체면 때문에 영상을 퍼뜨리지 않을 거라 확신하겠지만, 강나현은 강민아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강나현은 영상을 저장한 뒤 반하준의 얼굴을 다른 남자로 바꾸었다.이제 강민아에게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깨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주련다.“강민아, 내가 이미 경고했지. 날 건드리지 말라고! 심은호와 만나고 하준 씨랑 얽혀 있다고 해서 내 앞에서 거들먹거리지 마.”강나현의 경고가 끝나고 파티장 스피커가 울렸다.무의식적으로 단상 위를 돌아보니 강성진이 그쪽으로 다가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제가 이 자리에서 몇 마디 짧게 얘기하겠습니다...”강성진은 10분 넘게 열정적으로 연설한 뒤 도민영과 두 딸까지 무대 위로 데려갔다.그들은 저마다 다른 속셈을 품고 역겨움을 참아가며 사람들 앞에서 다정한 가족인 척 연기를 했다.마침내 강성진의 연설이 끝나고 강나현이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으며 말했다.“아빠의 딸로서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강나현의 발언은 약속된 게 아니었기에 강성진은 당황한 듯 강나현을 바라봤고, 강민아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우리 중엔 직책에 걸맞지 않은 품행을 지닌 사람이 있어요. 비록 가족이지만 사생활이 난잡해 강승 테크의 임원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호흡을 가다듬은 강나현은 강민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구치소에서 나온 뒤 미용실에 가서 브라운으로 염색하고 깔끔하게 묶은 포니테일이 걸을 때마다 흔들렸다.일부러 피부과에 가서 관리도 받았다. 그게 아니면 이 많은 사람 앞에 나설 용기도 없었을 거다.남성 정장을 입고 검은 가죽 구두를 신은 그녀의 발걸음은 당차 보였지만 나이 많은 임원이나 주주들 눈에는 무척 거슬리는 차림새였다.“언니, 축하해. 벌써 다른 사람 만나네.”강나현은 다가가 심은호를 돌아보며 부러움과 시샘이 섞인 눈빛을 감추었다.“심은호, 궁금한 게 있는데 어쩌다 우리 언니랑 만나게 됐어?”강나현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호기심을 드러냈지만 심은호는 무심하게 그녀를 흘겨볼 뿐이었다.“대단하네.”강나현이 눈이 휘어지게 히죽 웃었다.“심은호, 내가 물어보고 있는데 뭘 칭찬하는 거야?”“사고를 내고도 벌을 받지 않았잖아. 반씨 가문 도련님이 그 정도 다쳤는데 한 달도 안 돼서 나왔어. 참 운도 좋네. 반하준이 아마 불길 속에서도 구해줄 거야.”강나현의 표정이 다채롭게 바뀌었다.안 그래도 심은호는 존재만으로 눈에 띄고 주위에 어떻게든 그에게 말을 걸려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이제 그들이 전부 강나현을 조롱하듯 쳐다보고 있다.게다가 그들을 촬영하는 카메라도 있었다.지난달 강나현이 강변대로에서 큰 사고를 쳤다는 건 서경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심은호는 고개를 돌려 강민아에게 주변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산에 있는 불상 대신 반하준이 거기 앉아있으면 되겠네요.”강민아는 심은호의 팔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얘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요.”따스하고도 솔직한 심은호의 눈빛이 강민아의 얼굴에 머물렀다.“걱정되는데요.”강민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놀리듯 말했다.“얘가 날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서요?”두 사람은 거의 얼굴을 맞대고 있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강나현은 불쾌함에 입을 삐죽거렸다.“언니는 날 뭐로 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