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하준의 차에 앉은 강나현은 드림을 향해 달려가는 두 대의 레이싱카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레이싱 경기에 참여한 재벌 2세들도 자기들만의 전략이 있었다.많은 인원이 참가하는 레이스인 만큼 우승을 위해 일부 차량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두꺼운 헬멧을 쓴 강민아의 맑은 동공에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그녀는 단호하게 기어를 바꾸고 오른쪽 차 바퀴를 들어 올렸다.심은호는 자신의 시야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쿵쾅거리는 심장에선 거센 충돌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이것이야말로 일방통행인가!레이싱카의 오른쪽 앞바퀴와 뒷바퀴가 완전히 지면을 떠나고 차량 전체가 옆으로 45도 기울어진 채 달리고 있었다.원래 드림을 추돌하려던 차량의 운전자는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조수석에 앉아 있던 재벌 2세가 고개를 돌려보니 차창 옆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섀시가 보였다.마치 늪에 숨어 있던 거대한 짐승이 그들을 향해 피 묻은 입을 벌린 것 같았다.검은 타이어는 머리 위에 달린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들의 차량 지붕 위에서 돌아갔다.이미 호랑이 굴에 들어온 그들은 상대의 차 바퀴와 그들의 차 윗부분이 곧 충돌할 것을 알았다.“이런 젠장!”그저 취미로 소소하게 레이싱을 즐기는 재벌 2세들이 언제 이런 광경을 본 적이나 있겠나.“헉!”여전히 웅성거리며 환호하던 객석의 사람들이 모두 일제히 찬 공기를 들이켰다.이건 특급 레이싱 묘기였다.드림 레이서가 얼마나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으면 크로스컨트리 레이스에서 위기 상황에 이런 묘기를 펼치겠나.드림의 차체가 옆으로 기울어진 모습이 거대한 파도처럼 민이에게 충격을 선사했다.아이는 온몸에 소름이 돋고 흠칫 떨리기까지 했다. 검은 눈동자도 요동치고 있었다.강민아 쪽 차량이 그녀에게 다가올 무렵 조수석에 타고 있던 남자도 옆으로 달리는 드림의 자동차 지붕과 들어 올린 바퀴를 보았다.“젠장!”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본능이 그에게 빨리 물러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더
“기어 올리고 왼쪽으로 꺾어요.”“오른쪽 세 번째 내리막길, 기어 내려요.”강민아는 지도를 통해 오프로드 구간을 머릿속으로 최대한 외웠지만 레이서는 빠른 속도에서 미처 온전한 사고를 하기 어려웠다.이때 심은호가 그녀의 두뇌가 되어줬다.짧고 간결하게 지시를 내리던 심은호는 정수산의 복잡한 오프로드를 머릿속에서 3D 모델로 구축했다.마치 체스판 앞에 앉아 전체 상황을 바라보는 게임 플레이어처럼 강민아가 전진할 방향을 알려주었다.“하준 씨, 달려!”강나현은 반하준의 속도가 빨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내비게이터로 사용하던 지도는 진작 잊어버린 채 어딘가에 처박아두고 조수석에 앉아 반하준의 동반자 역할만 했다.반하준 역시 강나현의 내비게이터 역할이 필요 없었고 자기 판단력만을 믿었다.반하준은 정수산 경기장 기획과 설계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경기장의 복잡한 도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블랙홀은 2구간에서 다른 차들과 나란히 달리면서 드림에 멀리 뒤처졌다.드림이 큰 코너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U자형 덤프를 완성하자 반하준의 검은 눈동자가 확 커졌다.그도 레이스 트랙에서 드림이 네 코너를 모두 정복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반하준은 드림의 원래 주인이 루나라는 것과 여성 레이서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고, 그 외에는 외모나 구체적인 정보는 조사를 했지만 알아내지 못했다.그도 언젠가 드림과 함께 나란히 경기에 임할 줄은 몰랐다.“오빠, 루나를 우리 팀에 영입하자. 난 루나를 스승으로 모실래!”반유하의 목소리가 반하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가 중간책으로 루나의 연락처를 알아냈을 때 돌아오는 건 루나가 은퇴를 준비한다는 소식이었다.나중에 드림이 경매에 오르고 그 자리엔 반하준도 있었다.드림을 사고 싶었지만 경매 시작과 동시에 누군가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불렀다.사업가인 반하준은 레이싱카를 좋아하고 시장가치를 뛰어넘은 가격에도 살 수 있지만 그 가격에 드림을 사는 것은 그에게 손해 보는 거래였다.손해 보는 사업
심은호는 머릿속으로 코스 전체를 되뇌며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눈가에 미소가 반짝였다.“루나, 앞쪽은 평지니까 망설이지 말고 달려요!”“앞길은 평탄해, 루나, 앞으로 돌진해!”전조등도 없이 드림은 어둠 속에서 전속력으로 달렸다. 강민아는 심은호를 전적으로 믿었고 마침내 어둠을 뚫고 빛이 들어오는 순간을 맞이했다.멀리서부터 경주용 자동차의 굉음이 들려오고 결승선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목을 쭉 뻗었다.관중석 뒤쪽의 대형 스크린도 자동차가 어둠의 구역에 진입하는 순간 칠흑같이 어두워졌다.모두가 긴장하는 순간이었다.어느 차량이 가장 먼저 어둠의 구역을 뚫고 정상 트랙으로 진입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민이는 난간을 밟고 찬바람을 맞으며 먼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갑자기 관중들의 시야에 칠흑같이 검은 자동차 한 대가 나타나자 대형 스크린에 불이 켜지고 관중석에서는 환호성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바로 드림이었다!드림은 어둠의 구역을 돌파하고 1등을 차지했다.그리고 드림의 뒤에는 반하준이 조종하는 블랙홀이 있었다.“루나! 아빠!”민이는 목이 터지라 소리치며 두 손을 꼭 쥐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아빠와 루나가 모두 1등을 했으면 좋겠어요.’빛이 반하준의 새까만 눈동자를 비추자 드림이 눈앞에 보이며 그의 승부욕이 완전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재계에서 거듭되는 대치와 무한한 압박감에 시달릴 때도 그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하지만 드림을 쫓는 과정에서 아드레날린은 극도로 치솟았고, 반하준은 가장 원초적인 본능에 지배당했다.침착한 가면을 벗어던지자 오직 눈앞에 있는 먹잇감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전속력으로 다리는 짐승만이 남았다.하지만 결승선까지 2km도 채 남지 않았다.휙-드림이 결승선을 통과하자 그곳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형형색색의 꽃가루가 황금비처럼 쏟아져 나와 드림의 차 위로 떨어졌다.“우와!”민이는 입을 크게 벌리고 두 눈에는 오로지 드림만 보였다.그는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것처럼 심장을 움켜쥔 채 드림
강민아는 드림이 결승선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넋을 잃은 채 두 손으로 핸들을 잡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루나, 당신이 이겼어요!”강민아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헬멧을 벗은 심은호의 불사조 같은 눈동자에 별이 반짝이는 듯한 미소가 보였다.그가 손을 뻗어 강민아의 헬멧을 벗기자 비단처럼 고운 그녀의 머리카락이 아래로 떨어졌다.강민아는 극한의 운동으로 인해 크게 헐떡이는 호흡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고개를 들어 오로지 자신만 담은 심은호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바라봤다.“루나, 돌아온 걸 환영해요.” 심은호의 눈에 루나는 보물 같은 존재였다.“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속 챔피언이었어요.”확신에 찬 심은호의 목소리는 지상에서 날아갈 때의 쾌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들썩이는 그의 가슴을 따라 차 안의 온도가 상승했다.강민아는 그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드림을 본 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심은호 씨는 대체 어떻게 내가 루나인 걸 알았어요?”강민아가 강씨 가문에 들어오기 전 그녀의 이름은 육민아였고, 레이서 면허증에도 항상 육민아라는 이름을 써왔기 때문에 레이서라는 정체성을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다.심은호는 무심하게 왼쪽 어깨를 좌석 등받이에 기대고 입꼬리를 올리며 새하얀 치아를 자랑했다.“내가 문라이트 대표니까요.”강민아의 동공이 커졌다.“그러면 저를 문라이트 레이싱 클럽에 영입한 게 당신이에요?”“네.” 남자는 매력적인 눈을 가늘게 뜨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강민아가 멍하니 심은호를 바라보았다.“그쪽이 날 루나로 만들어줬어요.”당시 강민아는 딱 한 가지, 자기 외모와 실명을 공개하지 말고 사생활을 보호해달라는 조건을 걸고 클럽에 들어갔다.그땐 아직 유명세를 치르기 전이었고 레이싱계에는 여성 레이서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투자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그런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바로 문라이트 클럽의 대표였다.강민아는 이미 주식 시장에서 큰돈을 벌었지만 레이싱 때문에 무적의 ‘드림'을 만들기
반씨 가문의 정성 어린 보살핌으로 자란 어린 도련님은 대단한 인물과 장소에 익숙했지만 드림 앞에 서서 루나에게 인사를 건넬 땐 긴장해서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그러나 차 안에 앉은 사람은 아이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루나?”민이는 발끝으로 서서 고개를 들어 호기심에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강나현은 차에서 내려 드림의 차 문 앞에 서 있는 반씨 가문 부자를 보고 가슴에 위기감이 엄습했다.그녀가 성큼성큼 다가가 말했다.“루나라고 했죠? 얘기 많이 들었어요. 듣기론 오토바이도 잘 탄다던데 나도 오토바이 레이서거든요. 우리 둘이 일대일로 겨루는 건 어때요?”반하준이 루나에게 패했기에 강나현은 그 대신 이겨주고 싶었다.루나는 프로 레이서였고 강나현은 그녀가 오토바이도 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루나의 모터사이클 실력은 프로 수준이 아니었고 크로스컨트리 경기 이후 루나의 체력이 급격히 고갈된 상태였기에 이제 그녀와 대결한다면 강나현은 자신이 이길 확률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차에 앉은 여자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자 강나현이 불만스럽게 말했다.“그렇게 차갑게 굴지 말고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놀아요.”민이가 두 눈을 반짝거렸다.“루나가 오토바이도 타요?”아이는 루나를 더욱 동경했다.강나현은 루나가 자신에게 지면 민이의 눈빛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입술 한쪽을 들어 올렸다.반하준은 눈을 내리깔고 발밑에 놓인 명함을 바라보았다. 주제도 모르는 여자가 심은호가 떠받들어주니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것 같았다.“2억 줄 테니까 나현이랑 한번 놀아요.”우위에 익숙해져 있는 반하준의 눈에는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강민아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반하준이 이 정도로 강나현을 아꼈던가.남자가 계좌번호를 찍으라는 듯 휴대폰을 강민아에게 내밀었지만 강민아는 무시한 채 옆으로 몸을 돌려 심은호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반하준은 그녀와 심은호가 귓속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다정해 보이
민이의 말을 들은 강나현은 웃음을 터뜨렸고 반하준은 아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민이는 루나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착각이 분명하다.루나를 가식적인 엄마로 착각하다니, 이건 루나에 대한 모욕이었다.재벌가 자제들은 강나현이 오토바이를 타고 루나와 대결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루나에게 자신의 차를 들이밀었다.“루나, 내 차를 타요!”“루나, 내걸 타요. 내걸!”자신을 둘러싼 그들을 강민아는 전부 알고 있었다. 이 헬멧만 벗으면 그들은 그녀에게 지금처럼 열정적으로 달려들지 않을 거다.강나현과 친한 그들은 강민아가 18살에 강씨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부터 그녀에게 적대적으로 굴었다.나중에 반씨 가문 사모님이 되고 반하준의 체면을 생각해 그녀를 건드리지 말아야 했지만, 반하준의 태도가 그들이 강민아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해 버렸다.자신이 아끼는 차를 끌고 나온 강나현은 절친들이 루나 주위만 맴도는 모습을 보고 두 눈에 증오만 가득 찼다.강나현은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이 넘쳤다. 지금 그녀는 인터넷에서 유명한 여성 라이더였고 루나는 다른 사람의 차를 운전하니 강나현은 자신이 우승할 확률이 더 높다고 느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객석 쪽을 바라보았다.관객석에서 한 여자가 강나현을 향해 손짓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눈동자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담기며 10분 뒤 루나를 끌어내릴 생각에 들떴다.강민아의 시선이 사람들을 지나쳐 심은호가 누군가와 함께 개조한 오토바이를 끌고 오는 것을 보았다.고개를 돌린 심은호가 검은색 오토바이를 슬쩍 보고는 강민아에게 말했다.“이걸 타요.”강민아가 다가가 보니 차체 한쪽에 그려진 달이 보였다.강민아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설마 자신을 위해 맞춤 제작된 것일까?그녀는 서둘러 괜한 착각이라며 부정해 버리고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고마워요. 내가 이기면 상금은 내가 3, 그쪽이 7로 가져가죠.”심은호는 웃었다.“그쪽이 이기는 거야말로 나와 이 차에 대한 제일 좋은 선물이에요.”그는 좌석을 부드럽게
국내 최고의 여성 라이더로 불리는 루나도 고작 이 정도라니.오늘 밤 그녀는 루나를 이기고 내일부터 명성을 떨치게 될 거다.첫 번째 코너가 다가오고 있었다.휙-검은색 오토바이가 강나현의 앞을 스쳐 지나가자 강나현은 당황했다.어쩌다 루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을 앞지른 걸까?강나현은 속도를 올리며 따라잡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렸지만 연속되는 코너에서 둘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세상에, 루나는 코너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아.”“대단해. 이 트랙에서 처음 달리는 거야. 연습 경기도 안 했잖아.”“이게 바로 국내 1위 여성 레이서의 실력인가? 너무 무섭네.”강나현은 이가 부러질 정도로 꽉 깨물었다. 아무리 해도 강민아를 따라잡을 수 없으니 미리 부탁했던 친구의 도움을 바랄 수밖에.관중석에서 생수병이 날아오르더니 갑자기 활주로에 떨어졌다.고속 운행에서는 작은 돌멩이마저 큰 사고를 초래할 수 있었다.무거운 오토바이가 쏜살같이 지나가자 관중들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고, 다들 무의식적으로 강민아의 차가 생수병을 밟고 지나가며 큰 사고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그 생수병이 강민아의 앞길을 막지 않더라도 강민아에게는 걸림돌이 될 테고 그걸 피하기 위해서 속도를 줄일 것이다.강민아가 생수병에서 3미터 정도 떨어져 있을 때 갑자기 오토바이가 한쪽으로 30도 정도 심하게 기울더니 강민아가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생수병을 낚아챘다.관중석에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생수병이 장외에 있는 대형 쓰레기통에 던져졌다.문라이트가 홀연히 떠나고 나서야 관중들은 강민아가 한 행동에 반응했다.“세상에!”“꺄악!”누구는 머리를 탁 치며 입을 크게 벌렸고, 누구는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루나 앞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세상에, 내가 뭘 본 거야!”“빨리, 빨리 돌려봐!”재벌가 도련님들이 소리치자 제어 콘솔에 있던 직원이 코스 옆 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장면을 느린 속도로 대형 스크린에 띄웠다.“젠장, 무식한 나는 대단하다
오랫동안 오토바이를 타면서 강나현은 처음으로 무기력함과 절망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루나와 그녀는 같은 레벨이 아니었고 그녀가 일방적으로 짓밟힌 게임이었다.민이는 한참 동안 루나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강나현을 발견하고는 팔짱을 낀 채 불만이 가득한 듯 투덜거렸다.“현이 형은 너무 느리잖아, 거북이야.”반하준은 여전히 무거운 레이싱 슈트를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고 숨을 내쉴 때마다 탄탄한 가슴이 함께 오르내렸다.그의 깊은 시선이 루나의 모습을 쫓았다.누구도 그의 시선을 이렇게 사로잡은 적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극한 운동의 매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을 뗄 수 없는 순간이었다.세 바퀴를 먼저 완주한 강민아는 결승선에 멈춰 서서 심은호에게 신호를 보냈고, 심은호는 곧장 콘솔 스태프에게 연락을 취했다.스태프의 목소리가 강나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강나현 씨, 루나가 경기를 끝냈으니 약속대로 차에서 내려 결승까지 달려가세요.”강나현은 강민아보다 한 바퀴 반 정도 뒤처져 있었기 때문에 5km 가까이 달려야 했다.하지만 강나현은 스태프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그녀에게 말하는 동시에 스태프의 목소리가 현장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사람들은 강나현이 스태프의 말을 듣지 않자 야유를 보냈다.“내려! 내려!”“결과에 승복해!”“비열해. 저러면 조금이라도 적게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객석에 앉아 있던 강나현의 일행들은 주변 사람들의 고함을 듣고 모두 창피함을 느꼈다.몇몇 재벌가 자제들이 콘솔로 달려가 인이어를 착용한 강나현에게 전용 채널을 통해 연락을 취했다.“강나현, 차 세워. 다들 널 욕하고 있어.”멈칫한 강나현이 차를 세우고 헬멧을 벗자 객석에서 들려오는 비난이 파도처럼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거야?”“차에서 내려! 내려!”“루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으면서 결과를 받아들일 배짱은 없나 봐?”강나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조금 더 타면 적게 달
강나현은 다급한 어조로 강민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이 모든 게 강민아가 우리를 해치려고 짠 계획이에요!”그런데 얼굴 전체가 돼지처럼 부어올라 말을 해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목소리가 어눌하게 들렸다.그런 그녀의 말에 강성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서둘러 벨트를 반으로 접은 뒤 강나현의 콧대를 조준해 휘둘렀다.“민아랑 내 부녀 사이 이간질할 생각 마!”강나현은 당황했다. 강성진이 왜 갑자기 강민아 편을 드는 걸까.“아빠가 키운 자식은 저예요! 강민아랑 무슨 감정이 있다고 그래요? 애초에 데려올 생각도 없었잖아요!”“닥쳐!”강성진은 화가 났다. 그의 평판은 무너졌지만 강민아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앞으로 그녀에게 의지해야 할 일이 많은데, 강나현이 대놓고 헛소리하는 걸 그냥 둘 리가 없었다.강성진이 소리를 질렀다.“테이프 가져와!”작고 하얀 손이 검은 테이프를 건넸다.강기성은 강성진에게 테이프를 건네는 김예나를 보고 날카로운 눈썹을 들썩였다.강성진이 테이프를 찢자 강나현이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아빠, 뭐 하는 거예요?”강성진이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네 망할 입을 막으려는 거지!”강성진은 본인과 강민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강민아가 강씨 가문에 돌아온 지 9년이 지났어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건 손에 꼽힐 정도였다.게다가 둘은 한때 팽팽하게 맞서 싸운 적도 있었다.하지만 이제 강성진은 강민아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다.“아빠! 하지 마요!”강나현이 비명을 질렀지만 강성진의 행동에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강성진이 곧장 테이프로 그녀의 입을 감자 김예나는 한쪽에 서서 진흙탕처럼 혼탁한 눈빛으로 싸늘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비슷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한때 강나현은 그녀를 화장실에 가두고 테이프를 붕대 삼아 눈과 머리, 입, 코를 감아 숨도 못 쉬고, 살려달라고 애원할 힘조차 없게 만들었다.그렇게 그녀가 죽기만을 기다리며 어둠 속에 잠식되어 갈 때 가위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강나현은 강성진의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고 상황을 뒤집을 희망이라도 본 듯 서서히 안도했다.‘그래, 이제 강민아가 맞아서 이빨이 뽑힐 차례야!’강성진은 강나현의 휴대폰 앨범 속 강민아와 관련된 영상을 지우고 숨을 고르더니 손을 들어 또다시 강나현의 뺨을 때렸다.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강나현의 얼굴을 강타했다.강나현의 입에 머금었던 솜뭉치가 끈적끈적한 피와 섞여 바닥에 튀어나왔다.“강나현, 이 망할 것! 날 해친 것도 모자라 민아까지 해치려고 들어? 강씨 가문을 무너뜨리고 싶은 모양이구나! 내가 오늘 너 때려죽인다.”강성진은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아니에요!”강나현이 피를 뱉자 혀끝에는 온통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소리를 질렀지만 그녀의 설명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강성진은 왜 그녀를 믿지 않는 걸까.휴대폰을 강나현에게 던진 뒤 강성진은 벨트를 풀었다.강나현은 강성진이 벨트로 자신을 채찍질하려는 것을 보고 겁에 질린 표정을 드러냈다.그 순간 강성진의 휴대폰이 울렸다.벨트로 강나현을 한 대 세게 내려친 뒤 다른 한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여보세요.”강성진은 발신자를 확인한 후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들어와요.”강승 테크의 주요 주주 몇 명이 들어왔고 맨 앞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성진, 지금 여론이 자네한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 옴 쪽에서는 입찰에서 빠지려고까지 해!”강성진은 그 말에 덩달아 조바심을 냈다.“네? 어떻게 멋대로 발을 뺀다는 거죠? 지금 당장 옴 테크 쪽 임원에게 연락해 봐야겠어요!”또 다른 주주가 강성진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지금 어디든 자네가 나서면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다는 걸 몰라? 사람들 웃음거리가 되고 싶어?”“난...”주주들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우린 고심 끝에 만장일치로 자네가 먼저 대표 사임 발표를 하길 바라네. 그래야 자네나 회사에 대한 불리한 여론이 잠잠해질 거야.”“어떻게 강승
그러자 강성진은 강나현에게 소리쳤다.“민아를 좀 봐! 우리 회사를 위해서 애쓰고 있잖아!”강민아가 덧붙였다.“그런데 오늘 파티에서 공개된 영상이 서경 상류층에 퍼졌어요.”그녀는 부드러운 한숨을 내쉬며 강나현에게 물었다.“나현아, 넌 상류층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니까 가서 확인해 봐. 다들 우리 집 얘기하고 있는지.”강나현은 심장이 철렁하고 소름이 돋았다.강민아가 지금 그녀를 골탕 먹이고 있다는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강성진이 곧바로 강나현을 재촉했다.“휴대폰 내놔.”강나현은 두 볼이 부어올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강민아가 또다시 함정을 파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그녀는 강성진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곧바로 강성진이 그녀의 뺨을 또 때렸고, 이미 빨갛게 부어오른 뺨 사이로 새빨간 피가 스며 나왔으며 살갗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강성진은 그녀의 앞에 서서 내려다보며 명령했다.“두 번 말하게 하지 마!”강성진의 위협적인 압박에 강나현은 순순히 휴대전화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부은 얼굴로 휴대폰 잠금이 풀리지 않자 지문으로 해제한 뒤 카톡 채팅 기록을 살펴보았다.곧 여러 명이 친구 추가 요청을 보냈고, 강나현을 삭제하지 않은 재벌 2세들이 파티에서 강나현이 당당하게 강성진이 바람피운 것을 공개한 영상 링크를 보냈다.[강나현, 너 멋있다!][나현, 이게 네가 말한 빅 뉴스야?][역시 너야. 나오자마자 아빠부터 건드리네. 강나현, 용감해! 너는 내가 인정한다!]강성진은 강나현을 칭찬하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두 눈에 담긴 불길이 거세게 번졌다.한심한 재벌 2세들은 부모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강나현이 파티에서 보여준 행동은 그들에게 ‘모범’ 역할을 했기에 강나현을 숭배하기 시작했다.강나현은 소파에 앉아 강성진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발바닥부터 올라오는 한기가 온몸을 휩쓸고 팔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래위 치아가 달달 떨리며 서로 부딪혀 딱딱 소리를 냈다.“아빠...”강성진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강나
강민아는 눈을 깜빡이며 물잔이 강나현의 가슴을 강타하고 뜨거운 물이 마침 강나현의 얼굴에 튀면서 그녀의 얼굴도 씻기는 것을 바라보았다.“아악! 젠장!”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강나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물이 그녀의 얼굴에 있던 핏자국과 뒤섞이며 연분홍색으로 바뀔 때쯤 그녀가 허둥지둥 소파에서 일어났다.“죄송해요...”김예나는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어두운 동공엔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이런 망할!”강나현은 욕설을 내뱉으며 뒤에서 쿠션을 잡아 김예나를 향해 세게 내리쳤다.김예나는 피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강나현이 던지는 딱딱한 물건에 맞아 머리에 피가 난 적도 있는데 이까짓 쿠션쯤이야.강기성이 손을 뻗어 쉽게 쿠션을 낚아채더니 김예나를 등 뒤로 보내면서 쿠션을 옆으로 던졌다.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예나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그의 눈에 강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미친개 같았다.강나현은 입에 솜을 물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당장이라도 김예나를 산 채로 잡아먹을 것 같은 위협적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일부러 그런 거야! 왜 아직도 우리 집에 살게 놔두는 거야? 저번에 내 그릇도 깨고, 내 옷도 잘못 빨고, 내 방 창문도 열어놔서 엄청나게 큰 벌레가 내 침대에 기어들어 왔어!”김예나는 벌벌 떨며 강기성 뒤로 숨었다.강나현의 말이 맞다. 일부러 그랬다.강기성의 손에 이끌려 강씨 가문에 살게 되면서 강나현은 일부러 그녀에게 집안일을 시켰다.김예나도 기꺼이 도우미를 자처했는데 청소도구를 들고 강나현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하지만 강씨 가문의 다른 도우미들이 너도나도 일을 도와주는 탓에 강나현의 방을 꼼꼼히 뒤져 불리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강나현에게 학창 시절 겪었던 괴롭힘을 하나하나 되갚아주는 것뿐이었다.2년 내내 강나현에게 괴롭힘을 당했기에 강씨 가문에서 강나현에게 했던 복수는 그녀가 한 짓에 비하면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어디서 목소리를 높여?
그녀가 강기성에게 약을 먹이고 나서야 그는 조금 나아질 기미가 보였다.강기성은 이 집안에서 강성진에게 맞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강나현은 어렸을 때부터 강성진에게 매를 맞으며 점차 폭력을 동경하게 되어 여성의 정체성을 버리고 남자 무리에 어울리려 했다. 마치 자신도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가 되어야만 매 맞는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는 것처럼.“그 사람이 도민영을 아끼는 것처럼 보여도 예전에 때려서 도민영 얼굴이 부은 걸 봤어. 난 어렸을 때부터 도민영이 저 사람한테 맞아서 머리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어젯밤에 왜 오빠를 때린 거야?”강기성은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내가 사람을 시켜서 친부모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았어.”강기성이 그녀를 돌아보았다.“강씨 가문은 남자가 물려받아야 한다면서 내가 친부모에게 가면 강씨 가문 대가 끊길 거래.”말하며 강기성이 경멸하듯 비웃었다.“난 언젠가 저 사람 죽여버릴 거야.”그저 홧김에 하는 말이었다. 강성진의 피가 튀는 것조차 더러운데 아무 상관 없는 사람 때문에 자신의 앞길까지 망칠 필요는 없었다.강민아는 숟가락으로 강기성에게 포도당 물을 먹여주었다.“언젠가 우리가 크면 저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날이 올 거야.”도민영이 아이를 바꿔치기했다는 걸 강성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강기성은 그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하지만 고리타분한 마인드와 강나현의 출생 이후 강성진은 큰딸을 되찾으려는 생각을 접었다.“다들 이만 돌아가세요.”직원들에게 말하던 강민아는 자리에 있던 임원들과 주주들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먼저 입을 열었다.“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단상 위에 꿇고 앉은 그녀의 발치에는 아직 기절한 척 시늉하는 도민영이 있었다.그녀의 단호한 눈빛에 임원들도 마음을 진정시켰다.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강민아의 차분한 모습은 임원들에게 구원의 지푸라기와 같았다.강민아는 심은호의 손바닥 위로 손을 올려놓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나현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강성진에게 설명했다.“아빠,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올린 영상이 아니라고요!”강성진은 이제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과 어린 비서의 동영상이 폭로되었고, 게다가 폭로한 당사자는 그의 잘난 딸이었다.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행복한 얼굴로 단상 아래에 있는 임직원들에게 두 딸이 강승 테크에 입사해 온 가족이 함께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그의 열정적인 연설이 아직도 귓가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효녀 강나현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강성진은 당장이라도 강나현의 목을 비틀어 머리를 공처럼 차버리고 싶었다.“개자식,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강성진은 발을 들어 강나현의 머리를 세게 걷어찼다.이대로 머리를 박살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강나현은 겁에 질려 오줌까지 지리며 서둘러 기어서 도망쳤다.그때 강민아를 돌아보았다.‘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냥 내버려두진 않겠지?’그런데 강민아가 무릎을 꿇고 앉아 도민영의 어깨를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엄마, 일어나봐요!”강민아가 손을 뻗어 도민영의 인중을 누르자 도민영은 미간을 깊게 찡그렸다.그러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뜨며 강민아를 노려보았다.“아파!”그리고 다시 기절했다.강민아는 연기라는 걸 알았다.지금 상황에서는 무고한 피해자인 척 연기하는 것만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그래서 그녀도 엄마를 걱정하는 효녀인 척 강성진에게 맞는 강나현을 무시하고 있었다.강나현의 비명이 끝없이 울려퍼졌지만 자리에 있던 직원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강성진은 그들의 대표였고 말 한마디로 그들을 해고할 수 있으니까.임원들과 주주들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거나 굳은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았다.강성진이 어린 비서와 놀아난 사실은 사내에서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적나라한 영상이 공개되고 현장에 기자까지 있으니 일의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그들은 지금 어떻게 하면 강승 테크에 미칠 부정
강나현의 목소리가 반하준의 귓가에 들리고, 그는 포박당한 채 매서운 눈빛으로 TV 화면을 응시했다.강민아를 저격하는 말인 건 안다.대체 강민아의 무슨 약점을 잡은 걸까.강민아가 강씨 가문을 파멸로 몰고 갈 만큼 위험한 짓을 한 건 그를 이곳에 가둔 것뿐이었다.하지만 강나현이 그가 감금되었다는 걸 어떻게 알고?반하준은 자신의 뇌 어딘가에서 신경이 거칠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안 돼!’절대 그가 이곳에 감금된 사실을 폭로해선 안 된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확장되며 스크린에는 적나라한 영상이 재생되었다.강성진의 얼굴이 단번에 퍼렇게 질렸다.“아아악!”도민영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었지만 미처 입을 가리지 못한 채 비참한 비명을 내뱉었다.강씨 가문의 다른 친척이나 주주들도 일제히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좋지 않았고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강나현은 단상에 서서 모두의 반응을 살피고는 단상 아래 손님들에게 말했다.“여러분, 다 보셨나요? 저런 사람이 강승의 리더가 될 자격이 있나요? 저렇게 사생활이 엉망인데 정말 강승 테크를 믿고 맡길 수 있나요?”강나현이 눈가에 악의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차갑게 웃었다.무죄로 석방된 후 강민아에게 주는 큰 선물이었다.‘그러게 누가 감히 도발하래?’반하준의 얼굴을 다른 남자로 바꿨으니 이제 강민아가 심은호와 사귀면서 다른 남자와 낯 뜨거운 행각을 벌인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었다.강나현은 심은호를 바라보며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했다.무대 맨 앞줄에 서 있던 심은호는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강나현 씨의 가족도 서슴없이 희생하는 용기는 대단하네요!”강나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심은호는 왜 저렇게 담담한 걸까.게다가 대놓고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강나현은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역시 심은호는 강민아를 그저 데리고 놀 생각이었고, 어쩌면 진작 그녀가 방탕하다는 걸 알고 있었나 보다.강나현이 승리의
강나현은 강민아의 게시물을 클릭해서야 이미 올렸던 영상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고개를 든 그녀가 매서운 눈빛으로 강민아를 쳐다보았다.영상을 삭제했다고 그녀를 도발했던 게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이미 강민아와 반하준의 영상을 저장해 놓았으니까!강민아의 입가에 번진 미소를 보며 강나현은 일부러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올렸다고 더더욱 확신했다.강민아는 분명 반하준이 합의서에 사인하고 아직 민이가 병원에 있는 데도 강나현이 보상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것에 화가 난 거다.그래서 다시 친구 추가를 한 뒤 일부러 그녀만 볼 수 있는 게시물을 올려 기선제압을 했다.강민아는 그녀가 반하준을 좋아해서 그의 체면 때문에 영상을 퍼뜨리지 않을 거라 확신하겠지만, 강나현은 강민아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강나현은 영상을 저장한 뒤 반하준의 얼굴을 다른 남자로 바꾸었다.이제 강민아에게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깨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주련다.“강민아, 내가 이미 경고했지. 날 건드리지 말라고! 심은호와 만나고 하준 씨랑 얽혀 있다고 해서 내 앞에서 거들먹거리지 마.”강나현의 경고가 끝나고 파티장 스피커가 울렸다.무의식적으로 단상 위를 돌아보니 강성진이 그쪽으로 다가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제가 이 자리에서 몇 마디 짧게 얘기하겠습니다...”강성진은 10분 넘게 열정적으로 연설한 뒤 도민영과 두 딸까지 무대 위로 데려갔다.그들은 저마다 다른 속셈을 품고 역겨움을 참아가며 사람들 앞에서 다정한 가족인 척 연기를 했다.마침내 강성진의 연설이 끝나고 강나현이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으며 말했다.“아빠의 딸로서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강나현의 발언은 약속된 게 아니었기에 강성진은 당황한 듯 강나현을 바라봤고, 강민아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우리 중엔 직책에 걸맞지 않은 품행을 지닌 사람이 있어요. 비록 가족이지만 사생활이 난잡해 강승 테크의 임원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호흡을 가다듬은 강나현은 강민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구치소에서 나온 뒤 미용실에 가서 브라운으로 염색하고 깔끔하게 묶은 포니테일이 걸을 때마다 흔들렸다.일부러 피부과에 가서 관리도 받았다. 그게 아니면 이 많은 사람 앞에 나설 용기도 없었을 거다.남성 정장을 입고 검은 가죽 구두를 신은 그녀의 발걸음은 당차 보였지만 나이 많은 임원이나 주주들 눈에는 무척 거슬리는 차림새였다.“언니, 축하해. 벌써 다른 사람 만나네.”강나현은 다가가 심은호를 돌아보며 부러움과 시샘이 섞인 눈빛을 감추었다.“심은호, 궁금한 게 있는데 어쩌다 우리 언니랑 만나게 됐어?”강나현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호기심을 드러냈지만 심은호는 무심하게 그녀를 흘겨볼 뿐이었다.“대단하네.”강나현이 눈이 휘어지게 히죽 웃었다.“심은호, 내가 물어보고 있는데 뭘 칭찬하는 거야?”“사고를 내고도 벌을 받지 않았잖아. 반씨 가문 도련님이 그 정도 다쳤는데 한 달도 안 돼서 나왔어. 참 운도 좋네. 반하준이 아마 불길 속에서도 구해줄 거야.”강나현의 표정이 다채롭게 바뀌었다.안 그래도 심은호는 존재만으로 눈에 띄고 주위에 어떻게든 그에게 말을 걸려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이제 그들이 전부 강나현을 조롱하듯 쳐다보고 있다.게다가 그들을 촬영하는 카메라도 있었다.지난달 강나현이 강변대로에서 큰 사고를 쳤다는 건 서경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심은호는 고개를 돌려 강민아에게 주변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산에 있는 불상 대신 반하준이 거기 앉아있으면 되겠네요.”강민아는 심은호의 팔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얘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요.”따스하고도 솔직한 심은호의 눈빛이 강민아의 얼굴에 머물렀다.“걱정되는데요.”강민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놀리듯 말했다.“얘가 날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서요?”두 사람은 거의 얼굴을 맞대고 있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강나현은 불쾌함에 입을 삐죽거렸다.“언니는 날 뭐로 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