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반하준이 지금 강나현 앞에 있었다면 그녀의 수상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렸을 거다.“반 대표님, 사과문 다 작성했습니다.”휴대폰에서 변호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반하준은 강민아의 휴대폰에 속 시간을 슬쩍 보고는 강나현 측 변호사에게 명령했다.“그대로 읽게 하고 영상 찍어.”변호사는 삼각대를 가져와 휴대폰을 고정한 뒤 강나현이 카메라를 마주하고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을 수 있도록 종이를 휴대폰 옆에 놓았다.강나현은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강민아, 사람 괴롭히는 것도 정도가 있지!’하지만 국제 레이싱 대회 시범경기에 출전하면 반하준은 그녀가 반유하의 소원을 대신 이루어주었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때부터 그녀는 반하준 옆에서 가장 특별한 여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금세 떠올랐다.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지금 잃어버린 명예도, 자신과 형제라 칭하던 남자들도 모두 돌아올 것이다!코를 훌쩍이자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졌지만 강나현은 변호사가 대신 써 준 사과문 내용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갔다.“여,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강나현이라고 합니다. 제... 제가 구름 목장에서...”강나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혀를 깨물었다.눈꺼풀의 부기가 가라앉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서경팸' 단톡방을 확인했지만 그곳엔 강나현 혼자 남아 있었다.반하준이 단톡방을 나가니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그러다 강성진에게 죽도로 엉덩이를 맞으며 사과하는 영상을 반하준이 단톡방에 보내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보고 그녀를 비난했다.강나현은 바로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문자를 몇 통이나 보냈지만 재벌 2세들은 진작 그녀를 삭제한 지 오래였다.화가 나서 피까지 토한 강나현은 강민아에 대한 살기가 최고조에 달했다.절친한 친구들에게 다시 전화를 걸려고 할 때쯤 경찰이 강나현의 휴대전화를 압수해 갔다.이제 또다시 사과 영상을 찍고 SNS에 올려 창피를 당해야 하는데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1분 남았어.”강민아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변호사는 영상을 올린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반 대표님, 강나현 씨 사과 영상을 올렸습니다.”변호사가 강나현의 SNS를 새로 고침하자, 반하준이 가장 먼저 ‘좋아요'를 누른 것을 확인했다.반하준은 강나현의 SNS를 강민아에게 보여줬고 강민아는 자신의 휴대폰에서 스톱워치를 종료했다.반하준이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알아서 합의서에 사인하고는 경찰에게 건넨 뒤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하루빨리 ‘좋아요’ 999개를 모으길 바라.”반하준이 말하려는데 강민아가 덧붙였다.“빈센트 일행이 강나현을 데리고 시범 경기에 등장하는 날만 기다릴게. 당신이랑 강나현이 제대로 망신당하려면 아직 멀었어.”남자는 그녀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비웃었다.“빈센트도 알아?”윤세현을 돌아보는 그의 눈빛에는 짙은 적대감이 가득했다.강민아가 어떻게 레이싱에 대해 알겠나. 분명 윤세현이 그가 강나현을 위해 거금을 들여 문라이트 레이싱 클럽 엔지니어 팀을 데려갔다는 걸 말했을 거다.강민아는 두 경찰에게 말했다.“두 분은 빨리 반 대표님 데리고 나가주세요. 전처로서 제 생할 구역에 이 사람이 나타나는 게 반갑지 않거든요.”두 경찰 역시 반하준이 강민아의 집에서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았다.“반 대표님, 가시죠.”“강민아 씨, 합의서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더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강민아가 분명하게 말했다.“합의서를 제출했다고 용서한 건 아니에요. 강나현이 두 번이나 사과했어도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은 것처럼요.”그러고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우린 대회에서 봐.”강민아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너무도 싱그러워 반하준은 알 수 없는 무아지경에 빠졌다.그녀의 이런 표정은 평소 강민아가 그를 위해 특별히 깜짝선물을 준비했을 때 보이던 것이었다.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이혼했는데 이 여자는 대체 그를 위해 어떤 서프라이즈를 준비했을까?...레이싱 대회 당일.국제 레이싱 대회 개막 1시간 전, 관중석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다.평소 강나현과
강나현의 요란한 등장에 주변을 지나가던 스태프들이 옆으로 흘깃 쳐다보았다.“저 여자는 누구야? 등장 한번 요란하네. 연예인 같지도 않은데.”스태프들은 목을 쭉 빼서 강나현의 얼굴을 보고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또 다른 스태프는 팔짱을 낀 채 무시하듯 말했다.“대단하신 스폰서가 대회 시범 경기에 억지로 끼워 넣은 아마추어, 강나현이지.”국제 레이싱 대회의 시범 경기는 공식 레이스가 아니지만, 개막식에 등장하는 레이서들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현역 선수거나 은퇴했지만 한때 큰 상을 받은 레이서, 또는 레이싱 업계에 큰 공헌을 한 매니저나 대표였다.이런 사람만이 시범 경기에 출전할 자격이 주어지는 이유는 레이스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서였다.수상 경력도, 유명세도 없는 강나현이 대결 명단에 떡하니 이름을 올리니 다른 선수들은 하나같이 누구냐고 물었다.그러다 정체를 알아내고는 다들 깜짝 놀란다.강나현은 최근 다섯 살배기 남자아이와 오토바이를 타는 영상으로 큰 관심과 화젯거리를 모은 인플루언서였다.물론 그녀의 영상을 보고 욕설을 퍼붓고 신고하는 사람들도 많았다.하지만 그녀가 계약한 소속사가 부신 그룹 소속이고, 부신 그룹 대표의 처제인 만큼 부신 그룹에서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네티즌들이 아무리 강나현을 신고해도 소용이 없었다.지난주에는 레이싱계를 뒤흔든 또 하나의 큰 소식이 있었다.부신 그룹 대표가 거액을 쏟아부어 문라이트 레이싱 클럽을 위해 일하던 엔지니어, 기술자들을 모두 빼돌려 그들이 강나현만을 위해 일하게 만든 것이었다.레이싱 업계 사람들은 부신 그룹의 비겁한 행위에 경악했다.강나현은 전문가 촬영팀과 메이크업 스타일링 팀을 고용해 자신을 꾸몄다.레이서의 신분으로 국제 레이싱 대회에 참가하는 모습을 브이로그로 찍어 인터넷에 올릴 생각이었다.이런 영상이 공개되면 폭발적인 인기를 끌 것이 분명했다.그녀가 대회에 참가하는 게 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전부 그녀를 질투한다고 치부하며 강나현은 사람들의 질투를 즐겼다.
“루나, 만나서 반가워요!”민이의 또렷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휴게실에 앉아있는 상대를 보는 순간 굳어버렸다.드레스룸으로 들어가려던 강민아는 민이와 두 눈이 마주쳤다.민이의 들뜬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버리고 단호한 표정으로 가만히 강민아를 바라보았다.“왜 여기 있어요?”강나현과 민이 뒤에는 사람들로 우글거렸고 카메라맨이 강민아와 윤세현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댔다.윤세현은 많은 사람들이 출입구를 막고 있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강민아와 몸을 바짝 붙였다.“강민아, 네가 왜 루나 휴게실에 있어?”강나현은 너무 놀라서 말투까지 바뀌었고, 민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세현을 바라보았다.“그쪽이 루나에요?”말하며 민이는 머리를 긁적였다.윤세현은 헐렁한 그레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고, 키가 큰 데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머리를 아주 짧게 깎았기 때문에 처음 본 사람은 누구나 성별을 오해할 수 있었다.사람들은 그저 앳되게 생긴 미소년이라고만 생각했다.윤세현은 강민아의 소매를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난 루나가 아니야.”강나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강민아와 붙어있는 윤세현을 훑어보았다.눈앞에 있는 사람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그러다 강나현은 문득 7년 전에 이 ‘남자'를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강민아가 그녀의 언니라는 걸 알게 된 후 그녀는 직접 미행에 나섰고 여러 번 강민아를 미행할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어쩌다 강민아에게 소꿉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남자'는 운 좋게도 루나의 내비게이터가 되었다.윤세현이 유명해진 후 바로 강민아를 버리고 해외로 떠나버려 강나현은 오랫동안 행복해했다.이후 반하준으로부터 윤세현을 자신의 레이싱 코치로 영입하려 한다는 말을 듣게 된 강나현은 비천한 강민아의 ‘소꿉친구’에게 경멸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강나현은 팔짱을 낀 채 아니꼬운 시선으로 강민아와 윤세현을 훑어보았다.“민아 언니, 이건 너무 심하잖아. 여긴 루나의 휴게실이야. 멋대로 들어와서 루나의
아이는 자신이 한 말이 강민아에게 아픈 가시가 될 거라는 걸 알았다.그래서 일부러 가시 돋친 말로 강민아를 자극했다.말을 마친 민이가 승리자처럼 강민아를 주시하며 그녀가 아프고 고통스러운 기색을 드러내길 기다렸다.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어딜 찔러야 제일 아픈지 잘 알았다.시골에서 태어나 레이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강민아 같은 여자는 반씨 가문 도련님의 엄마가 될 자격이 없었다.“민아, 만약 내가 시범 경기에서 1등 하면?”강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서늘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민이의 말에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민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쏟아부었고 많은 공을 들였는데, 아이는 루나의 이름만 들으면 강나현에게 새엄마가 되는 걸 도와주겠다고 한 약속을 잊었다.구름 목장 비탈길에서 보낸 그날 밤 이후, 민이의 마음속 강하고 무적인 강나현의 이미지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그렇게 강한 사람이 왜 아빠에게 엉덩이를 맞겠나.그조차 아빠에게 고작 손바닥 열 대를 맞았을 뿐인데 말이다.강나현이 엉덩이를 맞고 울부짖으며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사과하는 모습을 민이는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게다가 다음 날 아침 강나현은 그대로 기절했다.민이가 본 강나현의 얼굴은 벌레에게 물려 돼지처럼 우락부락했고 눈꺼풀은 퉁퉁 부어오른 채 반하준의 부하들 손에 이끌려 비탈길에서 옮겨졌다.민이는 심지어 어디 가서 그녀와 아는 사이라는 걸 말하고 싶지 않았다.더 대단한 엄마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민이는 강나현의 시선을 피하며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현이 형이 1등 해도 생각해 볼게요.”말할수록 목소리는 더더욱 어눌해졌지만 강나현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민아 언니, 빨리 나가. 스태프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루나 휴게실에 멋대로 들어온 걸 알면 쫓겨날 거야. 그러면 망신인데?”강민아의 시선이 강나현의 허벅지로 향했다.“난 네가 참 대단한 것 같아. 역시 낯짝이 두꺼운 사람은 다른 가죽도 두껍나 봐.”강민아의 말에 강나현은 허벅지와 엉덩이가 다
“제가 누구인지 아세요?”강나현은 몇몇 스태프들을 향해 참가증을 번쩍 들어 보였다.그들이 눈 크게 뜨고 똑똑히 보길 바랐지만 스태프들은 그녀의 참가증을 보고도 어이없다는 표정만 지었다.강나현의 이름은 이미 대회 시작 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당연히 알죠. 레이싱 자격증도 없는 아마추어 선수 강나현 씨, 처음 국제 대회에 참가하는 거니까 제가 제대로 알려드릴게요.”스태프가 이를 악물고 힘을 주며 말했다.“멋대로 다른 선수 휴게실에 쳐들어오지 마세요.”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누가 당신들 들어오라고 했습니까?”조명을 든 사람들과 카메라맨 모두 강나현을 돌아보았고 그녀는 오만하게 소리를 질렀다.“제 사람들이에요!”스태프도 화가 잔뜩 나서 윽박질렀다.“대회 곧 시작합니다. 일부러 꿍꿍이가 있어서 이 많은 사람 데리고 루나 방해하러 온 거 아닙니까?”툭!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선반 위에 올려놓았던 레이싱 헬멧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조명 담당자 하나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서둘러 헬멧을 주워 제자리에 돌려놓았다.강민아는 그의 손에 미세한 바늘이 들려있는 것을 포착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았으면 평소 일할 때 쓰는 도구인 줄 알 거다.그는 이내 바늘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정말 촬영 때 쓰는 도구라면 왜 갑자기 치우는 걸까.강나현이 데려온 조명 담당자가 헬멧을 떨어뜨리자 스태프는 더더욱 화가 났다.“이건 루나 헬멧이에요. 가요!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 불러서 쫓아낼 거예요!”몇몇 스태프가 새처럼 손을 펄럭이며 강나현 일행을 쫓아냈다.“난 여기서 루나 기다릴 거예요!”민이가 말을 듣지 않자 스태프는 곧장 아이의 팔을 잡아 작은 몸을 들어 올렸다.민이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스태프의 다리를 걷어차려 했다.“난 부신 그룹 도련님이야!”씩씩거리며 고함을 지르는 민이의 살진 얼굴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부신 그룹 대표라도 멋대로 루나 휴게실에 들어와 대회 준비 방해하는 건 안 돼.”“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스태
미간을 찌푸린 강민아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5년 동안 민이의 버릇을 고쳐주고 싶었지만 반씨 가문 모두가 아이의 행동이 맞다고 말했다. 단지 반씨 가문의 장손이고 장차 부신 그룹의 후계자가 된다는 이유로 아이가 무슨 짓을 하든 옳다고 했다.아이가 엄마에 대한 선입견이 생긴 순간 둘 사이를 가로막는 거대한 산이 생겨버렸다.강민아는 캐비닛으로 걸어가 헬멧을 집어 들고 윤세현에게 말했다.“휴대폰으로 플래시 좀 켜줘.”윤세현이 자기 휴대폰으로 플래시를 켜고 다가갔다.“왜 그래?”강민아가 윤세현에게 휴대폰을 맡긴 채 헬멧 안을 비춰보니 곧바로 모래보다 더 작은 벌레 몇 마리가 날아다녔다.그 벌레들은 환한 플래시 불빛이 있어야만 똑똑히 보였다.윤세현은 경악했다.“헬멧에 왜 벌레가 있어?”이론적으로 서경의 건조하고 추운 날씨에서는 날벌레가 잘 생기지 않는다. 게다가 이 헬멧은 불과 반시간 전에 막 꺼내서 올려둔 새것이었다.그런데 어쩌다 날벌레가 들어갔을까.“헬멧 손을 댄 건 조명 담당자였어.”강민아의 말에 윤세현이 충격을 받고 소리를 질렀다.“그 사람이 헬멧에 손을 댄 거야?”이윽고 그녀는 무언가 떠오른 듯했다.“강나현이 시킨 짓이야!”확신에 찬 그녀의 말에 강민아는 침착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꺼내 심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은호 씨, 이번 시범 경기 참가자들의 헬멧에 누가 손을 쓰진 않았는지 빨리 가서 알아봐 주세요.”그러면서 당부했다.“아직 밖에서는 소란 일으키지 말고요.”이번 국제 레이싱 대회에서 높은 권위를 가진 사람을 뽑으라면 단연 심은호였다.비록 문라이트 레이싱 클럽은 이미 해체됐지만 심은호는 여전히 국제 레이싱 대회 주최 측의 큰 손이었다.강민아의 귓가에 남자의 낮은 중저음 목소리가 들렸다.“네, 바로 사람 보내서 알아볼게요.”강민아에게 왜 그러는지 묻지도 않았다.그녀의 판단을 전적으로 믿으니까.“부탁드려요.”강민아가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심은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마침 저도 흥
반하준은 발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려 레이싱 슈트를 입은 여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눈 부신 햇살이 반하준의 뒤에서 쏟아져 내리며 빛이 그의 어깨 위를 비추었다.그는 여자가 손에 들고 있는 헬멧을 알아보았다. 루나의 전용 헬멧으로, 짙은 남색에 황금빛 달이 별에 둘러싸여 있었다.여자의 상반신은 커다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고 그녀가 어둠에서 나올 때 반하준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루나가 헬멧을 쓰지 않았다는 건 그녀의 진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강민아도 제법 놀랐다. ‘반하준이 일부러 여기서 기다리는 건가?’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한 손을 정장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몸을 돌려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남자는 훤칠한 체격과 넓은 어깨를 가졌으며, 맞춤 정장으로 감싼 몸의 모든 선이 정교하게 조각된 듯했다.“루나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당신이 정해진 시간에 차를 가지러 내 차고에 오지 않아 원하던 스포츠카는 이미 새 주인에게 갔어요.”고작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반하준은 자신이 루나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그녀를 무너뜨리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일부러 놀리고 수치심을 선사해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자신에게 복종하길 바랐다.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매섭고 날카로웠다.그의 차가운 눈동자는 루나를 가리고 있는 그림자를 꿰뚫으려는 듯 날카로운 화살처럼 쏘아보았다.“마지막 기회를 주죠. 연봉 20억 받고 강나현의 코치가 되어줘요. 평범한 실력인 건 잘 알고 정상에 올려놓을 필요도 없어요. 내 요구는 간단해요. 3년 안에 전국에서 유명한 레이서로 만들어주는 것.”이건 반유하의 이루지 못한 소원이라 강나현이 반유하 대신 이루길 바라는 반하준의 의도였다.그는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은퇴 5년 만에 갑자기 시범경기 무대 복귀를 선택한 건 결국 돈 때문이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전성기가 지났고 과거 문라이트처럼 떠받들
순진한 정이의 목소리에 반하준 뒤에 있던 선생님들은 흥미로운 표정이었다.반하준은 당황하며 서둘러 해명했다.“아니야...”그는 고개를 들어 강민아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짜증이 솟구쳤다.“아빠는 강나현이랑 잔 적 없어!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마치 강민아에게 하는 말인 듯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그런데 반하준의 해명은 정이의 논리를 이길 수 없었다.“하지만 이모가 아빠의 친구인 것처럼 현이 씨도 엄마의 친구인데요?”“달라!”반하준이 부정하자 정이는 볼을 부풀리며 여전히 반박하려는 반하준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더니 오히려 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아저씨, 자기한테는 관대하고 남한테는 엄격하면 안 되죠. 그건 내로남불이에요!”말문이 막힌 반하준은 어른의 사생활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서 강민아에게 물었다.“대체 정이한테 무슨 말을 했길래 강나현과 내 사이를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강민아는 콧방귀를 뀌며 설명하고 싶지도, 그와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아저씨는 엄마를 오해하고 있어요.”딸이 입을 열자 반하준는 한결 마음이 풀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아빠가 했던 행동 때문에 네가 오해를 한 것 같으니까 지금 확실하게 말할게. 아빠와 이모는 그저 친구 사이야. 우리는 절대 네 엄마와 이 자식처럼...”윤세현은 몸을 돌려 강민아를 끌어안고 자기 머리를 강민아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그녀는 반하준을 향해 도발하듯 말했다.“엥? 친구랑 안은 적 없어요?”“...”반하준의 목소리가 뚝 멈추며 정이가 대신 대답했다 “내가 이모랑 아저씨 안고 있는 거 봤는데?”옆에 있던 선생님들은 구석에 숨어서 구경하기 바빴다.윤세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웃었다.“친구 사이에 서로 안는 건 당연하지. 가까운 사이면 뽀뽀도 하고.”말하며 그녀가 강민아의 얼굴에 쪽 입을 맞추자 반하준은 순식간에 속에서 피가 끓으며 입안에는 비릿한 피 맛이 가득 느껴졌다.주먹을 불끈 쥔 그의 손등
반하준은 자신의 역할을 부각하고 딸에게 아빠의 능력을 알려주기 위해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방송국 팀을 불러줄 수도 있고 춤추고 싶으면 아빠가 국내외 최고의 댄서들에게 연락할 수도 있어. 정아, 뭐가 됐든 넌 내 딸이니까 최대한 나한테 의지했으면 좋겠어.”정이는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이의 기억 속 반하준은 지금처럼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애정을 보이니 불편하기만 했다.“정아, 네가 나한테 의지했으면 좋겠어. 전에는 아빠가 미안했어. 넌 이제 겨우 다섯살이니까 지금부터라도 충분히 보상해 줄 수 있어.”정이는 반하준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었고, 그 뒤에 숨은 반하준의 의도도 분석할 수 없었다.그저 자신의 직감과 감정에만 근거해서 남자에게 대꾸했다.“아저씨, 엄마랑 날 방해만 하지 마세요.”반하준은 즉시 부인했다 “내가 왜 방해해...”“하지만 아저씨는 현이 씨를 좋아하지 않고 엄마와 현이 씨가 함께 있는 걸 반대하잖아요.”반하준은 칼로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통증과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그는 불쑥 말을 뱉을 뻔했다.‘당연히 반대하지!’강민아 곁에 다른 남자들이 나타나고 윤세현이 강민아의 진짜 사랑이라는 데 반대하지 않을 수가 있나.‘진짜 사랑’이라는 말이 씨앗처럼 반하준의 마음에 자리 잡아 싹을 틔우고 심장을 관통하는 가시로 자랐다.반하준은 위태롭게 요동치는 심장을 느꼈다.자기 핏줄인 딸이 강민아와 윤세현의 만남을 응원하고 있었다.젠장!반하준은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네 엄마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는데 네가 말하는 현이 씨가 같은 집에 살면서 엄마랑 자는 건 바람피우는 거야!”강민아의 감정사를 딸에게 너무 자세하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아 그는 씁쓸하게 말했다.“아빠는 엄마가 널 잘못 가르칠까 봐 걱정하는 거야.”강민아와 윤세현은 서로를 바라봤고, 윤세현은 입술을 달싹이며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힘겹게 참았다.강민아는 윤세현을 향해 어깨를 으쓱거렸다
강민아는 반하준을 차갑게 바라봤다.이미 조금 전 강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엘리베이터가 오작동하고 반하준이 우연히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그의 의도는 이미 뻔했다.강민아는 정이의 손을 잡은 채 식은땀이 삐질 났다. 정말 미친놈이다. 말로는 제 딸이라고 하면서 정이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하지만 구체적인 증거 없이는 본인이 엘리베이터 오작동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거다.강민아는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참았다.“반진경이 정이를 노리는 거 알고 있었어?”“요즘 어머니랑 가깝게 지내고 있어...”다시 말해 반진경은 연진숙의 지시를 받고 학교에서 오만방자하게 날뛴 것이다.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문화부 선생님 몇 명이 나타났다.그들은 반하준을 보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반 대표님.”정이도 그들을 안다. 별님반에서 축제에 참여할 때 그들이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었다.“안녕하세요. 저는 햇님반 강윤정이라고 합니다. 축제에서 단독으로 공연하고 싶은데 그래도 되나요?”정이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진지한 얼굴로 여러 선생님을 바라보았다.그들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반하준을 돌아보며 이사장인 그가 동의하면 그들도 그의 뜻에 따를 생각이었다.하지만 이런 암묵적인 규칙을 정이 앞에서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강민아가 반하준에게 물었다.“여기서 내가 애원하길 기다리는 거야?”반하준은 강민아가 부탁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에 깊은 동공에 웃음기가 번뜩였다.“나한테 부탁하면 정이가 축제에 참여하는 걸 쉽게 해결할 수 있지.”정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축제에 참여하고 싶지만 무슨 공연을 할지 생각은 못 했어요.”아이는 진지하게 선생님들을 향해 말했다.“연습하고 나서 선생님들께 보여드릴게요. 제 공연이 마음에 드시면 제가 무대에 올라가 친구들 앞에서 공연하는 걸 응원해 주세요.”반하준은 정이가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이렇게 물었다.“정아, 아빠 도움은 필요 없어? 네가 아빠 딸이
반하준은 강민아가 고개를 돌린 채 윤세현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짓는 모습에 멈칫했다.강민아가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본다. 심은호에게도 이렇게 웃어준 적이 없는데, 마치 윤세현이 하는 말은 다 들어준다는 표정이었다.날카로운 단검이 그의 심장을 연달아 찌르는 것 같아 반하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소꿉친구가 이토록 위협적인 존재였던가.윤세현과 강민아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라는 건 알지만 상대를 안중에도 둔 적이 없었다.반씨 가문의 후계자인 그가 외딴 마을에서 상경한 사람에게 눈길을 줄 리가 없으니까.강민아와 윤세현이 친한 친구 사이라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반하준은 윤세현을 경멸하고 있었다.그런데 강민아가 윤세현이 진짜 사랑이라는 말에 동의할 줄이야.윤세현이 진짜 사랑이고 심은호가 남자 친구이면 그는 뭐란 말인가.7년 동안 둘의 결혼은 그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걸까?무거운 쇠망치가 반하준을 내리치는 듯 뻥 뚫린 가슴에 차갑고 쌀쌀한 바람이 계속 쏟아져 들어와 오장육부를 후벼팠다.“강민아!”그의 어두운 눈동자는 짙은 먹물로 뒤덮인 것처럼 보였고 미간은 잔뜩 주름이 잡혀 있었다.“이 자식이 진짜 사랑이면 심은호는 뭐야?”“당신 심은호 좋아해?”강민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자신을 올곧게 쳐다보는 남자의 눈가에 씁쓸한 기색이 담긴 게 보였다.강민아는 풍성한 속눈썹을 깜박이면서 전남편을 마주하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어? 우린 모르는 사이야. 이혼할 땐 나보고 절대 돌아오지 말라더니 왜 이젠 당신이 계속 내 앞에 나타나는 건데?”강민아의 말에 남자의 말투도 차가워졌다.“네 착각이야. 설마 내가 일부러 너랑 마주치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반하준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비웃더니 어두운 눈동자에 경멸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찔려서 강민아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사실 일부러 강민아와 마주치려고 이곳에 나타난 거다.강민아가 정이를
잡아보니 윤세현의 깡마른 팔에 반하준의 눈에선 경멸의 빛이 번뜩였다.이렇게 깡마른 놈이 감히 그의 여자를 건드리다니.“반하준, 뭐 하는 거야!”강민아는 소리를 지르며 윤세현을 꽉 잡고 있는 반하준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손 풀어!”반하준은 윤세현을 뒤로 보내며 감싸는 강민아를 보고 왠지 모를 분노가 밀려왔다. 그는 역겨운 듯 윤세현의 팔을 뿌리치더니 강민아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왜 계속 이렇게 약해빠진 놈이랑 있는 거야? 이 자식도 심은호랑 똑같이 여우짓 하면서 연약한 척 너한테 지켜달라고 하잖아.”반하준이 씩씩거려도 강민아는 퉁명스럽게 대꾸할 뿐이었다.“난 이런 게 좋아.”남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강민아는 그와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반하준이 봤을 때 심은호와 윤세현은 지극히 닮았다. 둘 다 연약하고 그가 조금만 건드리면 손쉽게 제압할 것 같았다.하지만 그들이 계속해서 강민아의 뒤에 숨기 때문에 강민아는 점점 더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반하준의 턱이 굳게 다물리며 피부밑으로 튀어나온 핏줄이 꿈틀거렸다.그때 정이가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렸는데 현이 씨가 저와 엄마를 지켜줬어요. 아저씨, 현이 씨한테 그렇게 못되게 굴지 마세요!”정이가 단호하게 말하자 반하준이 물었다.“이 사람이 좋아?”정이는 반하준이 윤세현에 관해 물어본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난 현이 씨가 제일 좋아요!”“그럼 이 사람이 좋아, 심은호가 좋아?”반하준은 정이에게서 답을 찾고 싶었다.“음...”정이가 풍성한 속눈썹을 깜빡이며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난 현이 씨가 더 좋아요!”아이가 무슨 처세술을 알겠나. 그저 본인 생각대로 솔직하게 답할 뿐이었다.정이의 말을 들은 윤세현은 미소를 지으며 반하준 때문에 언짢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왜?”반하준이 묻자 정이가 동그란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었다.“현이 씨는 요리도 잘하고 좋은 향기도 나요. 나랑
“네가 강씨 가문으로 돌아가면서 우경아는 널 양딸로 데려가 네 보호자가 될 절차를 밟을 수 없게 되었어. 그러다 네가 결혼했다는 걸 알고... 너한테 완전히 흥미를 잃었지.”강민아는 먼 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우경아의 발목을 잡은 세력은 뭔데?”윤세현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우경아도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윤세현의 맑은 눈동자가 진지하게 반짝였다.“내 생각엔 그 힘이 널 지켜주는 것 같아.”강민아도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우경아에게 내 과거에 대해 말한 적 있어?”윤세현은 멍하니 고개를 흔들었다.“몇 번이나 날 떠보긴 했어도 난 네 일에 대해 조금도 털어놓지 않았어. 미린국에 오면서 너와 완전히 갈라졌다고 했거든.”강민아는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내가 볼 때 우경아는 오래전부터 날 지켜봤던 것 같아. 나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고 너조차 모르는 내 일을 다 알고 있었어.”강민아는 더 생각하기 싫어 다시 가벼운 어투로 윤세현에게 물었다.“우경아가 나한테 무슨 짓할까 봐 학교로 온 거야?”“서경에 오자마자 너 때문에 양자 테크가 억대 손해를 봤다는 소식을 들었어. 우경아가 직접 널 만나러 학교에 온다는 얘기도... 우경아는 무자비한 사람이라 건드리기만 하면 제자리에서 상도 엎어.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강민아의 두 눈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담겨 있었다 “난 아직 그 여자한테 거대한 이용 가치가 있어서 당분간은 나한테 아무 짓도 못 해.”오히려 윤세현을 달래며 말을 이어갔다.“걱정하지 마, 이미 우경아와 거래를 달성했거든.”윤세현은 어리둥절했다.“어떤 거래?”“내가 양자 테크의 통솔권을 가지고 우경아와 협업하는 동시에 1분기 투자금 4천억을 요구했어. 거기에 향후 양자 테크의 수익은 100% 나한테 돌아오기로 했지.”윤세현은 찬 공기를 들이켜며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동의했어?”“응.”“어떻게?”강민아와 우경아가 협상한 조건은 윤세현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강민아가
“현이 씨!”윤세현을 보자마자 정이의 눈이 환하게 빛나며 폴짝폴짝 윤세현을 향해 달려갔다.윤세현은 강민아에 대한 걱정에 코끝에서 열기 섞인 숨결이 흘러나왔다.“현이 씨, 너무 보고 싶었어요!”정이의 앳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윤세현은 쭈그리고 앉더니 정이의 의상을 보고 자기 외투를 벗어 아이에게 입혀주었다.“정이 너무 예쁘다.”정이의 머리가 조금 헝클어진 것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빗겨주었다.강민아는 윤세현을 향해 걸어갔다 “왔어?”지난주 윤세현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집을 나서면서 떠나기 전 곧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겼다.강민아는 윤세현에게 뭘 하러 가는 건지 묻지 않고 정이와 함께 윤세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그런데 뜻밖에도 윤세현이 서경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학교로 달려올 줄이야.우경아는 윤세현과 일정한 거리로 좁혀질 때쯤 말을 꺼냈다.“이번에 고생했어.”멈칫하던 윤세현의 조각상처럼 잘생긴 얼굴이 엄숙하게 바뀌었다.강민아는 우경아 앞에서 유독 경직된 윤세현을 알아차렸다.윤세현은 우경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긴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엄마, 민아는...”우경아는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렸고, 찬 바람에 풍성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더더욱 아름다움을 뽐냈다.“오랜만에 보는 건데 친구랑 좋은 시간 보내.”우경아는 강민아를 쳐다보지 않고 윤세현에게만 명령했다.“오늘 밤에 호텔로 와서 보고하고.”윤세현은 공손하게 우경아를 향해 답했다.“네.”우경아가 자리를 떠나서야 굳어있던 윤세현은 긴장이 풀리며 정이의 손을 잡고 강민아를 향해 걸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우 대표가 너 힘들게 했어?”강민아는 고개를 저었다.“미린국에 간 첫해에 한 거물이 널 눈여겨보고 거둬줘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했잖아. 그 거물이 우경아였어?”5년 전 윤세현은 강민아가 준 거금을 들고 미린국에 가면서 둘은 멀리 떨어지게 되었고, 윤세현은 나쁜 소식은 전부 감추고 좋은 소식만 전해주었다.그때 강민아는 두 아이를 낳은 터라 윤세현과
우경아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강민아에게 40억을 주고 쫓아냈는데 이제 그녀를 다시 데려오려니 상대가 4천억을 원하고 있었다.그리고 그녀는 강민아가 4천억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원한다는 걸 알고 있다.우경아의 목구멍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사업을 하면서 피를 말리는 협력자나 경쟁자를 만나본 적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녀는 여전히 강민아 앞에서 여유로웠다. “강민아 씨, 이 바닥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당신에게 수익의 70%를 줄 수는 있어요. 투자는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프로젝트 전체를 나한테 주지 않으면 전 그쪽이랑 일 안 해요.”“말도 안 되는 소리!”우경아가 낮게 윽박질렀다. 한 번도 그녀에게서 먹잇감을 통째로 가져가는 사람은 없었다.강민아는 여전히 사람 좋은 표정으로 부드럽게 한숨을 쉬었다.“전 우 대표님이 무서워서 시작부터 많은 걸 바라는 거예요. 이미 한번 절 아웃시켜서 아직 마음이 불안하거든요. 저한테 큰 조각을 넘기기 싫고 수익의 100%를 넘기지 않는다면 전 그쪽이랑 일 안 해요. 세상은 저 없이 잘만 돌아가고 우 대표님은 저 말고 다른 사람 알아봐도 되니까요.”강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경아를 지나쳐갔다.우경아는 자신이 소유한 양자 테크나 옴 테크에서 데려온 전문가들이 강민아가 건넨 대형 모델을 사흘 밤낮으로 연구해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강민아!”그녀가 소리쳐 부르자 강민아는 뒤에서 들려오는 우경아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강성진과 도민영 사이에서 당신 같은 딸이 나올 줄은 몰랐네요.”강민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우 대표님, 칭찬 감사합니다.” 우경아의 목구멍에서 차가운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강민아를 만나러 직접 승덕까지 찾아오고 반씨 가문 사람과 무례한 교사까지 혼내줬으니 강민아가 은혜를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면 그녀와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강민아가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줄이야.우경아는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강민아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너무 일찍 저에게 등 돌린 걸 후회하고 계시네요.”“강민아 씨, 우리한테 넘겨준 데이터를 조작한 거죠?”우경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눈빛에는 극도의 압박감이 느껴졌다.그녀에게서 음산한 냉기가 퍼져나갔지만 옆에 앉아 있던 강민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제가 왜 조작해요? 우 대표님 밑에 일하는 직원의 능력이 부족한 거죠. 섣불리 사람을 배신하니까 벌써 200억 정도 손해를 보셨죠?”팔짱을 낀 우경아의 정성껏 관리한 손톱이 연분홍빛을 띠고 있었다.강민아의 말에 그녀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그녀는 진작 자신이 없으면 우영 그룹의 양자 테크에서 억대 손해를 볼 것을 예상하였던 걸까?심지어 수백억을 손해 볼 때 우경아가 자신을 찾아올 거란 것도 예상했다.그 생각에 우경아는 살짝 놀랐다.조금 전 자신이 나타났을 때 강민아가 전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걸 떠올리며 우경아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여자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민아 씨는 함께 일하기 좋은 사람인 것 같네요. 내가 그쪽을 오해했어요. 7년 동안 집안에만 갇혀 지낸 여자가 아무리 성적이 뛰어나도 별 능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공부를 잘하는 건 아무 쓸데가 없어요. 날고 기는 천재도 이론만 빠삭하고 실전에는 멍청이니까. 확실히 그쪽은 날 놀라게 하네요.”강민아를 바라보는 우경아의 두 눈엔 그녀를 손에 쥐고 싶은 충동이 타올랐다.“강민아 씨, 우리 계속 같이 일합시다. 전에 일은 내가 미안했어요. 나는 지금 진심으로 협업을 제안하는 겁니다. 협업 말고도 여러 가지 도와줄 수 있어요. 예를 들면...”앞을 돌아보니 그녀에게 맞아서 얼굴이 부어오른 반진경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무대 위에서 발레하는 반연주에게 시선이 향했다.그녀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나랑 같이 일하면 그쪽 딸 센터로 만들어 줄게요.”“그건 됐어요.”강민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어른들 싸움에 아이들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