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간을 찌푸린 강민아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5년 동안 민이의 버릇을 고쳐주고 싶었지만 반씨 가문 모두가 아이의 행동이 맞다고 말했다. 단지 반씨 가문의 장손이고 장차 부신 그룹의 후계자가 된다는 이유로 아이가 무슨 짓을 하든 옳다고 했다.아이가 엄마에 대한 선입견이 생긴 순간 둘 사이를 가로막는 거대한 산이 생겨버렸다.강민아는 캐비닛으로 걸어가 헬멧을 집어 들고 윤세현에게 말했다.“휴대폰으로 플래시 좀 켜줘.”윤세현이 자기 휴대폰으로 플래시를 켜고 다가갔다.“왜 그래?”강민아가 윤세현에게 휴대폰을 맡긴 채 헬멧 안을 비춰보니 곧바로 모래보다 더 작은 벌레 몇 마리가 날아다녔다.그 벌레들은 환한 플래시 불빛이 있어야만 똑똑히 보였다.윤세현은 경악했다.“헬멧에 왜 벌레가 있어?”이론적으로 서경의 건조하고 추운 날씨에서는 날벌레가 잘 생기지 않는다. 게다가 이 헬멧은 불과 반시간 전에 막 꺼내서 올려둔 새것이었다.그런데 어쩌다 날벌레가 들어갔을까.“헬멧 손을 댄 건 조명 담당자였어.”강민아의 말에 윤세현이 충격을 받고 소리를 질렀다.“그 사람이 헬멧에 손을 댄 거야?”이윽고 그녀는 무언가 떠오른 듯했다.“강나현이 시킨 짓이야!”확신에 찬 그녀의 말에 강민아는 침착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꺼내 심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은호 씨, 이번 시범 경기 참가자들의 헬멧에 누가 손을 쓰진 않았는지 빨리 가서 알아봐 주세요.”그러면서 당부했다.“아직 밖에서는 소란 일으키지 말고요.”이번 국제 레이싱 대회에서 높은 권위를 가진 사람을 뽑으라면 단연 심은호였다.비록 문라이트 레이싱 클럽은 이미 해체됐지만 심은호는 여전히 국제 레이싱 대회 주최 측의 큰 손이었다.강민아의 귓가에 남자의 낮은 중저음 목소리가 들렸다.“네, 바로 사람 보내서 알아볼게요.”강민아에게 왜 그러는지 묻지도 않았다.그녀의 판단을 전적으로 믿으니까.“부탁드려요.”강민아가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심은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마침 저도 흥
반하준은 발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려 레이싱 슈트를 입은 여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눈 부신 햇살이 반하준의 뒤에서 쏟아져 내리며 빛이 그의 어깨 위를 비추었다.그는 여자가 손에 들고 있는 헬멧을 알아보았다. 루나의 전용 헬멧으로, 짙은 남색에 황금빛 달이 별에 둘러싸여 있었다.여자의 상반신은 커다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고 그녀가 어둠에서 나올 때 반하준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루나가 헬멧을 쓰지 않았다는 건 그녀의 진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강민아도 제법 놀랐다. ‘반하준이 일부러 여기서 기다리는 건가?’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한 손을 정장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몸을 돌려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남자는 훤칠한 체격과 넓은 어깨를 가졌으며, 맞춤 정장으로 감싼 몸의 모든 선이 정교하게 조각된 듯했다.“루나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당신이 정해진 시간에 차를 가지러 내 차고에 오지 않아 원하던 스포츠카는 이미 새 주인에게 갔어요.”고작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반하준은 자신이 루나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그녀를 무너뜨리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일부러 놀리고 수치심을 선사해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자신에게 복종하길 바랐다.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매섭고 날카로웠다.그의 차가운 눈동자는 루나를 가리고 있는 그림자를 꿰뚫으려는 듯 날카로운 화살처럼 쏘아보았다.“마지막 기회를 주죠. 연봉 20억 받고 강나현의 코치가 되어줘요. 평범한 실력인 건 잘 알고 정상에 올려놓을 필요도 없어요. 내 요구는 간단해요. 3년 안에 전국에서 유명한 레이서로 만들어주는 것.”이건 반유하의 이루지 못한 소원이라 강나현이 반유하 대신 이루길 바라는 반하준의 의도였다.그는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은퇴 5년 만에 갑자기 시범경기 무대 복귀를 선택한 건 결국 돈 때문이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전성기가 지났고 과거 문라이트처럼 떠받들
작고 동그란 턱에 얼굴은 갸름한 달걀형이었다.여자의 입술은 새콤달콤한 체리를 닮았고 코는 오뚝했으며 눈매는 부드러웠다.검은색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고 귓가에 몇 가닥 잔머리가 흘러내렸다.반하준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뜬 채 강민아를 똑바로 응시하며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그의 머릿속도 정지 버튼이 눌렸다.‘루나 얼굴이 왜 강민아로 보일까.’말도 안 된다.아직도 그 우스꽝스러운 꿈속에 있는 건가.객석에서 수만 명의 압도적인 함성이 거대한 파도처럼 반하준을 향해 밀려들자 그는 온몸이 흔들리며 번뜩 정신을 차렸다.강민아는 반하준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 그대로 무시하고 지나쳐가는데, 반하준이 돌아서서 달려가더니 강민아의 손을 낚아챘다.“네가 왜 여기 있어?”남자는 의심과 불신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이런 옷을 입고 있어?”고개를 숙여 강민아의 손에 들려 있는 헬멧을 내려다보니 그건 루나의 것이 맞았다.입을 벙긋하던 그는 종이 뭉텅이가 목구멍에 꽉 막힌 느낌이었다.“루나를 위해 자원봉사 하러 온 거야?”그의 목구멍에선 본인조차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래야만 했다.그는 마음속으로 단호하게 생각을 굳혔다.루나가 시범경기에 참가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제 레이싱 대회 자원봉사자 모집 이벤트에는 수천 명의 레이싱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많은 사람들은 월급이 깎일지라도 당장 하던 일을 내려놓고 레이스 자원봉사자로 지원했다.루나의 레이스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그리고 여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영광을 위해서였다.강민아는 반하준의 질문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얼마나 멍청하면 그런 질문을 하지?”레이싱 슈트를 입고 헬멧을 쓴 채 반하준 앞에 나타났는데도 남자는 여전히 그녀와 루나를 연관 짓지 못했다.멍청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뼛속까지 그녀를 경멸하고 있기 때문이다.순수하고 어렸던 시절에 진심으로 반하준을 사랑하고 용감하게 뛰어들었는데, 이 남자는 ‘진짜
반하준이 다가가 드림의 문을 당기며 강민아를 차 밖으로 끌어내려는데 몇몇 스태프들이 즉시 다가와 그를 떼어놓았다.“반 대표님, 곧 경기 시작해요!”“반 대표님, 루나 경기 준비하는 데 방해하지 마세요.”그러자 반하준이 말했다.“드림에 탄 사람은 강민아예요. 그 여자가 어떻게 루나인가요!”본인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문이 닫히고 강민아가 드림을 몰고 트랙으로 향했다.“비켜!”뛰어난 신체 능력 덕분에 반하준은 자신을 막고 있던 스태프들을 밀어내고 트랙 가장자리로 달려갔다.강민아는 드림을 예열한 후에도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드림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수만 명의 관중이 환호성을 질렀다.“루나! 루나!”수만 명의 레이싱 팬들은 트랙의 시작점을 향해 달리는 드림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강민아는 왜 드림에서 내리지 않을까.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레이스가 곧 시작되는데 왜 루나는 아직 안 나타나는 거지?’차에 앉아 있던 강나현은 트랙 가장자리에 나타난 반하준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창문을 내리고 반하준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다.VIP석에 앉아 경기를 관람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경기장까지 찾아왔다는 건 그녀에게 관심이 지대하다는 뜻이었기에 강나현은 내심 뿌듯했다.차창이 내려가고 강나현은 반하준을 향해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하준 씨!”그녀의 목소리는 헬멧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반하준은 강나현이 운전하는 레이스카는 쳐다보지도 않았다.“강나현 씨, 창문 열어놓고 뭐 하는 겁니까? 곧 경기 시작하는데!”콘솔에 있던 빈센트는 갑자기 창문을 여는 강나현을 보고 순간 혈압이 최고조로 치솟아 무전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며 연이어 욕설을 내뱉었다.빈센트가 외국어로 얘기하니 알아듣지 못하는 강나현은 제 쪽에서 되레 불쾌한 듯 소리를 질렀다.“왜 소리를 질러요!”통역사는 서둘러 무전기를 들고 다급한 목소리로 강나현을 재촉했다.“빨리 창문 닫고 레이스 준비하세요!”강나현의 통역을 담당한 청년 역시 호흡곤란이 올 지경이었
“쓸모없는 건 어딜 가나 똑같지.”“강나현의 실력은 아마추어 수준에도 못 미쳐요. 우리가 최고급 레이스카를 개조해 줬는데 액셀을 끝까지 밟지도 못하네요.”“난 먼저 짐 싸서 돌아갈 거예요. 강나현과 같이 망신당하고 싶지 않네요.”트랙에서 강나현과 다른 차들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고 강나현의 기대와 다르게 앞쪽에서 실수가 일어나진 않았다.왜 그들이 전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을까.어느 레이서도 속도를 줄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강나현은 조금 당황했다. 다른 차들이 실수하지 않으면 꼴찌는 그녀의 몫이었다.그녀의 두 눈에 점점 더 사나운 기운이 퍼져갔다. 절대 이대로 꼴찌를 할 수는 없다.아직 남아있는 비장의 카드가 있으니까.“루나 파이팅! 루나 파이팅!”VIP 룸에서 민이는 드림의 레이싱카 모형을 손에 들고 유리창 앞에 서서 신나게 방방 뛰었다.자리에 앉은 연진숙은 레이싱에 전혀 관심이 없지만 귀한 손자가 입이 닳도록 말하던 루나를 보려고 왔다.하지만 연진숙은 루나가 반씨 가문 저택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그녀가 알기로 루나는 5년 전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위해 은퇴했다.루나가 5년 만에 복귀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집안에서 그녀가 다시 일을 시작하고 경력을 쌓는 것에 동의했거나, 남편과 문제가 생겨서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건 아닌지 추측했다.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연진숙의 눈에 여자가 밖에서 돈을 번다는 건 남편이 쓰레기라는 의미였다.연진숙은 어떻게 하면 귀한 손자가 루나를 새엄마로 삼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을지 고민하며 민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루나 같은 여자가 부신 그룹 도련님의 눈에 들어 민이의 새엄마가 될 기회가 있다는 걸 알면 어떻게든 반하준을 꼬드길 거라고 생각했다.경기가 끝나면 루나를 찾아가 제대로 얘기해 볼 생각이다.“민아, 물 좀 마셔.”“민아, 포도 먹을래? 이리 와, 내가 먹여줄게.”“민아, 딸기 좀 먹어. 딸기 맛있네.”세 명의 재벌가 아가씨들은 물컵과 과일 접시
강나현은 드림의 보닛이 올라간 것을 알아차리고는 의기양양하게 입술을 말아 올렸다.이제 드림은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사고가 벌어져 차나 사람이나 무사하지 못할 거다.기술자가 깃발을 흔들며 강민아에게 피트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레이싱 경기에서는 가장 빠른 랩타임을 기록하는데 드림의 보닛을 조정해도 루나는 경기에서 최고 기록을 낼 수 있었다.하지만 드림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피트 앞을 지나쳐 속도를 높였다.“정비하러 가지 않았어!”“저렇게 됐는데 루나는 경기를 이어간다고?”기술자조차 입을 크게 벌리고 여전히 보닛이 들린 채 전속력으로 달리는 드림을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세상에!”서경의 도련님들이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몇몇은 망원경을 들고 대형 스크린을 조준했다.강기성은 그들 사이에 앉아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드림이 속도를 늦출 생각이 없음을 확인한 강기성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그의 옆에 앉은 김예나는 레이싱 경기를 처음 보는데도 보닛이 올라가고 운전자의 시야가 가려진 상황에서 차가 언제든 트랙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김예나는 입을 가리고 중얼거렸다.“왜 레이서가 차를 멈추지 않는 거죠?”강기성은 2초 동안 대형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스릴 넘치는 장면에 피가 끓어오르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국내 최고 여성 레이서에게 이건 아무것도 아니니까.”윤세현은 손을 뻗어 눈앞의 난간을 잡았다.과거 서경의 레이스를 준비하는 동안 강민아는 이 트랙에서 한 바퀴, 또 한 바퀴를 달리며 하루에 8, 9시간씩 연습하고 타이어를 수없이 마모시켰다.이 트랙의 모든 코너와 직선 구간은 강민아의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기에 5년이 지난 지금도 강민아는 눈을 감고도 이 트랙을 달릴 수 있었다.“말도 안 돼.”연진숙은 콧방귀를 뀌었다. 보닛이 열렸는데도 멈춰서 정비할 생각이 없는 무모한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을 거다.민이는 두 손을 통유리창에 댄 채 반석현과 놀랍도록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두 아이는 숨 쉬는
객석에서 강기성은 강성진에게 연락했다.“네, 아버지. 나현이가 졌어요. 네, 꼴찌 했어요. 그것도 앞사람과 격차가 아주 크게.”말하며 강기성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고 전화기 너머로 강성진의 욕설이 들렸다.“걔는 머리에 물만 들어찬 거 아니냐? 망신당할 짓을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이제 서경 전체가 쓸모없는 놈이라는 걸 알겠네.”전화기 반대편에 있던 강성진이 이마를 부여잡고 말했다.“걔가 강씨 가문 망신은 혼자 다 시키는구나!”강기성은 다른 재벌 2세들이 흥분하며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대박, 루나가 얼굴을 공개하기로 한 거야?”“세상에, 신비한 여신 루나가 직접 베일을 벗다니.”그들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몇몇은 망원경을 들고 트랙에 있는 루나를 보거나 휴대폰을 들고 카메라를 확대했다. 일부는 쌍안경으로 트랙에 있는 루나를 가리켰고, 다른 친구들은 휴대폰을 꺼내 휴대폰 렌즈를 가까이 가져갔다.무심코 대형 스크린을 올려다본 강기성은 그대로 굳어버리며 손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졌다.툭.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졌다....강민아는 한 손에 헬멧을 들고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돌아설 때마다 큰 환호를 불러일으켰다.“루나가 이렇게 어렸어?”“엇, 낯이 익은데? 왜 어디서 본 것 같지?”“강민아다! 얼마 전 ALI 수학 경시대회 금상 수상했던 천재 주부. 세상에, 그 여자가 루나였어!”“수학 천재 강민아? 그 사람이 루나라고? 세상에, 강민아는 신이야.”루나가 강민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많은 관중들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우와, 엄마다!”육성민, 윤세현과 함께 첫 번째 줄에 앉아 있던 정이는 대형 스크린에 나타난 강민아를 보자마자 흥분한 나머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난간에 기대어 발끝을 세우더니 잔뜩 들떠서 육성민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엄마가 레이싱도 해요! 너무 대단해요!”“너희 엄마가 국내 최고의 여성 카레이서야!”...“우와!”반석현은 유리 벽에 두 손을 갖다 댄 채 두 눈에는 수천
“왜... 왜 그 가식적인 여자가 루나야. 으아앙!”민이의 작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을 크게 벌리며 울부짖었다!...털썩.또 다른 VIP 룸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기술자는 결승선에 무사히 도착한 드림을 보자 마치 척추가 몸에서 빠져나간 듯 상반신이 푹 삶은 면처럼 무너졌다.그제야 용기를 내어 고개를 돌리며 뒤에 서서 자신의 생사를 좌우할 심은호를 바라볼 수 있었다.그는 시선을 스크린에 고정한 채 두 눈에 오로지 강민아만 담았다.심은호의 손은 장인이 정성스럽게 조각한 공예품 같았고 손등에는 흰 피부를 뚫고 나올 듯한 핏줄이 부풀어져 있었다.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유리에 닿아 반복해서 문질렀다.심은호의 각도에서 보면 저기 멀리 스크린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입꼬리가 올라가고 살짝 올라간 날카로운 눈매에는 미소가 번졌다.스크린 속 강민아가 무심코 고개를 들자 그녀의 밝고도 당찬 눈빛이 시공간을 가로질러 심은호와 마주하는 듯했다.유리 위에 올려놓은 그의 손이 흠칫 떨리며 꼭 무모한 장난을 치다가 상대에게 들킨 기분이었다.심은호의 심장이 조용히 요동치기 시작했다.입꼬리가 올라가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겁쟁이라 그저 이런 식으로만 마음속 밝은 달을 어루만지는 걸 상상할 뿐이다....강나현은 헬멧을 들고 차에서 내려 무덤덤한 표정으로 문을 닫았다.비록 꼴찌를 했지만 어쨌든 아마추어 선수라는 생각에 당당했다.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면 화제성과 인기를 끌 것이고, 설령 졌다고 해도 당당한 모습으로 마주해야 했다.취재진이 현장에 들어오자 그녀가 앞장서서 다가가는데 그들이 전부 드림 쪽으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강나현은 입을 삐죽거렸다. 반하준이 거금을 들여 루나를 그녀의 코치로 데려와 레이싱 라이선스 취득을 도와주려 한다는 생각에 다가가 인사를 건넬 작정이었다.백미러를 슬쩍 보니 메이크업을 완벽하게 해 아이를 낳은 여자와 함께 서 있으면 분위기나 미모로 절대 루나에게 뒤처
그러다 강민아가 반하준과 이혼하고 정이만 데리고 나왔을 때야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강민아는 손을 움직이며 육성민이 반하준에게 다시 한번 주먹을 날리는 모습을 지켜봤다.반하준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순백의 벽에 끔찍한 흔적을 남겼다.강민아는 반용화에게 물었다.“선생님, 저 어떻게 찾았어요?”“여기 스프링 가든이야. 반하준이 네 집 맞은편에 집을 샀어.”강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이 집을 언제 샀는데요?”“3일 전에.”강민아는 목구멍에서 울컥 역겨움이 밀려왔다.강나현에게서 반유하의 녹취록을 얻은 후 일부러 그녀에게 복수하려고 마음먹은 거다.그녀를 스프링 가든에 가둠으로써 마치 그녀가 집을 나가지 않은 것처럼 사람들 눈을 속이려고 했다.만약 그녀가 육성민의 경호원 없이 ‘시크릿’에 갔다면 그녀가 감금된 후 반하준은 육성민에게도 손을 써서 정이를 데려갔을 거다.반용화가 미간을 찌푸렸다.“이미 경찰에 신고했어.”이제 그는 자기 조카에 대한 혐오밖에 남지 않았다.강민아는 반하준이 다시 바닥에 쓰러져 턱을 따라 흐르는 피가 비싼 와이셔츠를 더럽히는 것을 보았다.사파이어 브로치는 진작 2, 3미터 떨어진 곳에 날아갔고 남자의 얼굴은 붉고 멍이 든 흔적이 가득했다.그는 볼품없이 한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그러면서도 여전히 고개를 들고 오만하게 눈을 치켜뜬 채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노려보았다.강민아가 반용화에게 물었다.“저를 납치한 지 얼마나 됐죠?”“두 시간.”“네.” 강민아가 대답했다.“사태가 심각하지 않고 사람을 다치게 한 것도 아니니 구치소에 들어가도 귀한 대접만 받겠네요.”오히려 육성민이 반하준을 적지 않게 다치게 했다.반하준은 바닥에 앉아 한 쪽 팔을 구부린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는 경찰서로 보내는 게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랫동안 재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그깟 법 하나 모를까.강민아는 머릿속에 어떠한 생각이 떠올라 반용화에게 물었다
반하준이 고개를 돌리자 문 밖의 하얀 빛이 휠체어에 앉은 남자의 실루엣을 비추었다.성큼성큼 들어오는 육성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순식간에 방 안의 공기를 집어삼켰다.반하준이 이제 막 몸을 일으키는데 육성민이 주먹을 휘둘렀고, 손을 들어 저항했지만 육성민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반하준은 프로 격투기를 배웠어도 힘에서 압도적인 재능을 자랑하는 육성민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육성민이 반하준의 복부를 펀치로 가격했고 반하준은 바닥에 쓰러졌다.바닥에 엎드린 그가 입을 벌리며 울컥 무언가를 뱉어냈다. 목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참으며 고개를 들자 육성민이 열쇠를 들고 강민아의 손목에 묶인 수갑을 풀고 있었다.반하준은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한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아픈 복부를 감쌌다.고개를 드니 휠체어를 탄 반용화가 눈앞에 와 있었다.남자는 찢어진 입술을 끌어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반용화, 이래도 저 여자한테...”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용화는 검은색 지팡이를 들고 반하준의 얼굴을 때렸다.5년 동안 반용화가 지팡이를 사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반하준을 때리려고 꺼내든 것이다.휘두르는 움직임이 크지 않았지만 단단한 나무 지팡이가 반하준의 얼굴에 얼음처럼 차갑게 부딪혔다.퍽!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반하준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오르며 부어올랐다.반용화는 발밑에 엎드린 개미를 바라보듯 그를 내려다보았다.“괜찮아?”반하준의 뒤에서 육성민의 걱정 어린 물음이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육성민의 훤칠하고 건장한 몸이 강민아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반하준의 목구멍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육성민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강민아를 향한 그의 마음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당시 육성민은 풋풋했고 군대 훈련도 받고 작전에도 참여했지만, 고귀한 재벌가 후계자에 비하면 밑바닥부터 한 걸음씩 올라온 그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육성민이 강민아에게 남매 이상의 감정이 있다는 증거는 없지만, 반하준은 적을 만났을 때
강민아는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반유하를 그렇게 만들어서 내가 얻는 게 뭔데?”반하준의 음침한 동공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죽을 줄은 몰랐겠지. 항상 널 괴롭혔으니까 그냥 한번 골려주고 싶었겠지.”강민아가 우아하게 눈을 흘기자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네가 인정 안 할 줄 알았어. 이 녹취록만 가지고는 절대 널 감옥에 보낼 수는 없겠지.”남자의 시선이 그의 손에 붙잡혀 억지로 고개를 든 강민아의 붉은 입술에 닿았다.그에게 온순하고 순종적이었던 시절도 잠시, 아이를 낳고 난 뒤부터 그녀는 온갖 수작을 부리며 그를 챙기지 않았다.“강민아, 난 너한테 뭐야? 네가 사는 집, 네가 타는 차, 매달 수억 원의 생활비까지 줬잖아. 근데 넌 나한테 쓰레기 음식이나 먹이고 싸구려 도시락을 회사에 가져왔어. 그러곤 내가 배탈이 날까 봐 끓인 차에 위장약을 탔지. 사모님 노릇 한번 편하게 하네.”눈을 깜박이던 강민아의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것도 잠시, 반하준은 그녀의 얼굴에서 그 어떤 당황스러움이나 부끄러움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오히려 그녀의 흑백이 분명한 맑은 눈동자는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었다.“세 번째 아이를 잃고 난 뒤엔 당신을 인간 취급도 하기 싫었어. 집안 음식과 살림은 내가 책임지는데 약으로 대머리를 만들 순 없잖아? 어르신이 민이를 정식 후계자로 삼을 때까지 몇 년만 참으려고 했어.”나른하게 흘러나오는 강민아의 목소리는 아주 가벼워 깃털처럼 날렸지만, 그게 반하준의 신경을 자극하며 사지를 휩쓸고 지나가는 아픔을 가져다주었다.그의 손끝이 미끄러져 강민아의 목을 움켜쥐었다.웃는 그의 선홍빛 얇은 입술이 어두운 밤의 뱀파이어처럼 광기를 띠었다.너무 똑똑한 여자는 독이 든 꽃과 같아서 쉽게 끌리지만 한번 건드리면 역으로 공격당한다.강민아와 결혼하기로 했을 때 할아버지 반영식은 심각한 얼굴로 그녀가 적절한 상대는 아니라고 말했다.“저는 정략결혼보다 쉽게 통제할 수 있고 진심으로 나만 사랑하는 여자를 원해요.
강민아는 우경아를 만나러 가기 전 육성민에게 이를 알렸다.그녀 혼자 우경아를 만나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육성민은 경호원 몇 명을 시켜 그림자 속에서 강민아를 보호하도록 했다.그때 주차장을 지키던 경호원들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누군가 타더니 곧바로 검은색 리무진이 그 앞에 멈춰 서는 것을 보았다.마스크를 쓴 남자가 의식을 잃은 강민아를 업고 밖으로 나갔다.경호원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즉시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다.검은색 리무진이 차에 던져진 강민아를 태운 채 빠르게 출구로 달려갔다.“강민아 씨가 납치되었다. 지원 바람!”경호원이 무전기를 통해 다른 동료들에게 외쳤다.그들 중 한 명이 차를 몰고 뒤를 쫓아가는데 갑자기 다른 차가 달려와 길을 막더니 순식간에 검은색 리무진은 도로 위 차량 사이로 사라졌다.정장을 차려입고 차 뒷좌석에 앉아 있던 반하준은 굳은 표정이었다.시트에 쓰러진 강민아는 남자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 고운 새틴 같은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시선을 아래로 떨군 반하준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검은 눈동자는 기나긴 밤과 닮아 있었다.손을 뻗은 그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강민아의 머릿결을 어루만지려는 걸 알아차리고 스스로를 제지했다....강민아가 정신을 차렸을 땐 다소 추운 느낌에 몸을 살짝 떨었다. 눈을 떠보니 낯선 곳에 와 있었다.벽은 새하얗고 불빛은 어두웠으며 반하준은 그녀와 1미터 떨어진 의자에 앉아 있었다.남자는 몸을 숙여 팔꿈치를 허벅지에 올려놓은 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두 손을 깍지 끼고 있었다.강민아가 몸을 움직이자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그녀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반하준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무릎을 꿇고 두 손이 위로 묶인 강민아는 발에 우경아가 선물한 신발이 신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누가 신겼을까.’강민아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요란하게 팔을 움직였다.속박당하는 게 싫다.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에 그녀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그녀의 첫 양부
아름다움은 그녀의 무기였고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영 그룹이 곧 그녀의 뒷심이었다.그런 사람과는 적이 되는 것도, 친구가 되는 것도 쉽지 않다.강민아는 손을 내밀어 그녀가 건넨 선물을 받아 들었다.“우 대표님 감사합니다. 주신 선물은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강민아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최대한 존재감을 죽이며 웅크리고 있는 장기명을 차갑게 훑어보았다.우경아는 떠나는 강민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무도 그녀의 공세를 당해낼 수는 없다. 게다가 강민아는 7년 동안 주부로 살아온 여자가 아니던가.누군가 잘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겠지.우경아는 떠나기 전 장기명에게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언감생심 주제도 모르고 어딜 넘봐. 시간 있으면 가서 거울이나 봐.”우경아가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외국인은 장기명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강민아라는 여자 반용화와 무슨 사이지?”장기명은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에 누워 있었다.“도운, 빨리 날 병원에 데려다줘!”도운이 거침없이 장기명의 어깨를 흔들자 그는 고통에 눈을 뒤집었다.“빨리 말해! 방금 당신이 매달리던 여자 반용화와 아는 사이지?”장기명은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부신 그룹 대표 전 와이프니까 당연히 반용화를 알겠지. 반용화 추천으로 고연대 영재반에도 들어갔는데.”장기명은 허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왜, 그 여자가 마음에 들어? 내가 이렇게 맞은 건 안중에도 없고?”도운은 장기명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일어서서 강민아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그냥 낯이 익어서. 5년 전에 빠져나간 사람일 수도 있어.”“빠져나갔다니?”장기명은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상대방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강민아는 우경아와 작별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간 뒤 휴대폰을 꺼내 심은호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민아 씨, 밖에서 다른 강아지 키워요?]그는 벽에 기대어 숨은 채 몰래 훔쳐보는 강아지 이모티
옆에 서 있던 외국인은 우경아의 고혹적인 외모에 매료되었다.우경아가 앞으로 다가가 장기명의 뺨을 때렸다.“어떤 개가 감히 시크릿을 함부로 돌아다녀? 여기가 아무 데나 똥오줌 싸는 곳인 줄 알아?”장기명이 반응하기도 전에 우경아는 그의 사타구니를 발로 찼다.“아악!”바닥에 털썩 쓰러진 장기명이 아우성을 질렀다.우경아는 칼 모양 케이스를 씌운 태블릿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손잡이' 부분을 잡고 태블릿을 칼처럼 사용하며 장기명의 머리를 내리쳤다.“감히 내 사람을 희롱해? 사는 게 지긋지긋하지? 이제 조상님 만나러 가.”장기명과 함께 있던 외국인은 나서서 말리고 싶었지만 우경아의 기세에 두 손을 든 채 한발짝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애원하던 장기명은 30초가 지나자 통곡과 비명만 내질렀다.우경아는 바닥에 엎드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그의 가장 약한 부위를 세게 발로 찼다.장기명의 몸이 삶은 새우처럼 말리자 우경아는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그녀의 행동에 강민아는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러다 우경아는 외국인이 휴대폰을 집어 드는 모습을 발견하고 다가가 상대방의 휴대폰 화면 위로 자신의 명함을 올려놓았다.“충고하는데 주제넘은 짓은 하지 마세요.”외국인이 서투른 우리말로 물었다.“우... 대표님?”장기명은 자신을 때린 사람이 우경아라는 말을 듣고 순간 굳어버렸다.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이제는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누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우경아는 강민아에게 다가가더니 뒤따라오던 근육질 남자에게 태블릿을 건네고, 상대방의 손에서 따뜻한 수건을 가져와 손을 닦았다.“때려서 해결하지 못할 건 없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더 때리면 돼요.”“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강민아는 장기명을 흘깃 쳐다보았다.“하지만 폭력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진 못해요.”우경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근육질 남자에게 명령했다.“신발 바꿔.”남자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우경아의 한쪽 발을 조심스럽게 들더니 끝이 뾰족한 검은색 하이힐을 신겨
“아악!”장기명이 비명을 지르자 강민아는 뒤로 물러서며 장기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민아 씨, 저예요!”장기명이 퉁퉁 부은 얼굴을 감싸고 강민아는 두 눈에 가득 담긴 역겨움을 덜어냈다.“장 교수님이었군요. 전 변태가 들이대는 줄 알았어요.”장기명은 외국인 한 명과 동행했는데, 그는 강민아의 얼굴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장기명은 맞은 얼굴을 문질렀다.“시크릿 같은 곳에 무슨 변태가 있어요. 그냥 왜 여기 있는지 물어보려고 왔죠.”강민아는 똑같이 상대에게 되물었다.“여기 왜 오셨는데요?”장기명은 옆에 있는 외국인을 바라보며 웃었다.“모임이 있어서요.”외국인은 강민아에게 고개만 끄덕였고, 강민아는 장기명을 돌아보며 말했다.“그럼 전 이만 갈게요.”그녀가 가려는데 장기명이 곧바로 그녀의 앞을 막았다.“민아 씨, 줄곧 강승 테크에 대해 만나서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쪽이 강승에 입사한 후 두 곳에서 인수할 의향을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거죠?”강민아가 물었다.“강승의 일이 장 교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죠?”말문이 막힌 장기명이 다소 초조한 듯 입을 열었다.“옴 테크에선 민아 씨가 강승 테크 인수를 도와주길 바라고 있어요. 옴 테크로 가서 다국적 기업의 임원이 되고 싶지 않아요?”강민아는 웃었다.“사업에선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이 이기죠. 두 회사가 강승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옴에서 정말로 강승을 원한다면 만족할 만한 가격을 제시해야 할 것 같네요.”장기명이 발끈했다.“그건 억지잖아요!”강민아는 속눈썹을 깜빡이며 화장기 없는 얼굴로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사실대로 말할게요. 방금 우영 그룹 대표 우경아 씨와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그분도 강승을 인수하고 싶어 해요.”장기명은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왜 우영 그룹도...”“최저 금액을 제시한 옴 테크를 선택하면 국내 대기업 3곳에 밉보이는 건데, 장 교수님께서 뒷감당하실 건가요?”장기명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서서 말했다.“그건 나랑 상관없는 일이죠! 이럴 줄
이어 강민아가 물었다. “그쪽과 손잡으면 전 뭘 얻을 수 있죠?”우경아는 미소를 지으며 강민아에게 태블릿을 건넸다.“여기 프로젝트가 있는데 지분을 가져가요. 강민아 씨는 기술을 투자하고 난 돈을 투자해서 수익금을 똑같이 나눠 갖는 거죠. 똑똑한 강민아 씨라면 이 프로젝트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강민아는 우경아가 건넨 프로젝트를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마침 자신도 이런 종류의 프로젝트에 대해 연구 중이었는데 기술을 알아내더라도 현장에서 구현할 수 있는 완벽한 시스템이 없어서 제자리를 맴도는 상황이었다.반면 우경아 손에 있는 프로젝트 북은 서경 정부에서 지원하고 부신 그룹이 새로운 기술을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다.우경아는 이미 이 프로젝트에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이를 가져와서 그녀와 공유한다는 것은 연막작전이거나 기술팀이 곤경에 처했다는 뜻이다.강민아와 반용화 사이를 알고 있으니 아마도 그녀를 통해 반용화 연구팀과 접촉하려는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강민아가 이 판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녀는 부신 그룹의 ‘갑’이 되는 셈이다.그녀가 웃었다.“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우경아가 한숨을 쉬었다.“큰 성과를 이룬 사람들은 매사 신중하게 움직이기에 많은 기회를 놓치게 되죠.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건 기꺼이 적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에요.”“제가 적인가요?” 강민아가 웃자 우경아의 화려한 이목구비에도 덩달아 부드러운 감정이 담겼다.“같은 여자끼리 서로 돕고 살죠.”강민아는 태블릿을 내려놓았다.“저희 아빠와 가까운 사이인 줄 알았는데요.”우경아는 환하게 웃었다.“영원한 친구는 없지만 영원한 이익은 있죠. 강성진을 감옥으로 보내는 게 내게 큰 이득이 된다면 주저하지 않고 나락으로 보낼 거예요.”우경아는 술잔 두 개를 집어 들고 그중 하나를 강민아에게 건넸다.“건배해요.”강민아는 술잔을 건네받았다.“그러면 우 대표님은 언젠가 저도 지옥으로 보낼 건가요?”우경아는 유리잔을 입술에
그녀는 곧바로 강민아의 턱을 잡고 강제로 그녀의 얼굴을 육지광 쪽으로 돌렸다.“그쪽같이 다리 불편한 고물상 아버지를 뒀으면 아들 장가가기엔 그른 것 같은데, 얘를 데려가서 며느리처럼 키워요. 60만원 줘요.”양어머니가 손가락을 내보이며 말하자 육지광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저축한 돈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그는 힘없이 강민아를 바라보았다.아이를 살 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양어머니가 또다시 욕을 하며 꺼지라고 말하자 육지광은 굳은 표정으로 육성민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그렇게 그녀는 하씨 가문에서 석 달을 더 지냈고, 그 사이 경찰이 집에 찾아와 하씨 가문 사람들의 정보를 등록하고 떠났다.강민아는 양부모가 때리고 욕하는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고열에 시달리며 부엌 싱크대 파이프 옆에 지쳐서 웅크리고 있던 날이 떠올랐다.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따뜻한 이불 아래에서 자는 자신을 발견했다.한 번도 이불 아래서 잠을 자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검은 솜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뒤늦게 그녀가 누워있는 곳이 다리 아래라는 걸 알아차렸고 육지광이 죽을 끓여 가져오는 것을 보았다.육성민은 숟가락으로 죽을 호호 불어서 식힌 뒤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죽을 다 먹은 후엔 육지광이 약을 먹였다.“나도 널 사 온 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어. 나와 성민이는 마땅히 지낼 곳도 없으니까.”강민아는 이불 속에 몸을 숨긴 채 까만 눈동자로 육지광과 육성민을 빤히 쳐다보았다.육성민이 그녀에게 물었다.“이름이 뭐야?”그녀가 고개를 젓자 육지광이 말했다.“얘는 이제 내 아이이자 네 동생이니까 이제부터 우리랑 같은 성을 쓸 거야. 성은 육, 이름은...”육지광이 그녀를 돌아보았다.“내가 널 하씨 가문에서 데리고 오던 날 밤 넌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어. 네 부모님은 네가 곧 잘못될 줄 알고 20만원으로 가격을 낮췄고, 난 16만원만 던져놓고 널 안은 채 도망쳤어. 그날 밤 달이 무척 밝았는데 꼭 하늘에서 떨어질 것처럼 지붕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