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아무리 표정 관리를 잘하는 성유리라도 그 말을 듣고 나서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한참 후에야, 성유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정말... 그랬어요?”“박한빈 씨가 이런 이야기를 너한테 했을 리가 없지.”연정우는 쓴웃음을 지었다.“그 사람은 절대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못해. 그렇게 더러운 과거를 들추고 싶겠어? 그래서 말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행복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는 거지?”“걱정 마. 이번에는 나도 반드시 박한빈 씨를 무너뜨릴 거니까.”“그리고 그때가 되면 네 여권도 찾아줄 테니까 너도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어.”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진지했다.사실 연정우는 성유리가 떠나지 않길 바랐다.박한빈과의 ‘싸움’에서 승리는 물론 원했다.하지만 만약 승리의 순간에 성유리가 자기 곁에 있어 준다면 그것보다 더 완벽한 것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최상의 자리에 올라서면 그때는 누군가가 불을 밝혀주는 것도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그리고 연정우는 그 누군가가 성유리이기를 바랐다.“고마워요.”그러나 성유리의 대답은 단순했다.연정우가 바랐던 대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지금 당장은 성유리가 자기편에 서 있기만 해도 충분했으니 말이다.“됐어. 이제 자러 가.”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앞으로 며칠만 기다려. 좋은 소식만 들려줄 테니까.”“네.”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하지만 몇 걸음 걷다가 문득 멈춰 서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연정우를 바라보았다.“그런데... 만약 연정우 씨가 진다면요?”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진지했다.연정우는 순간 성유리가 자신을 걱정하는 줄 알았다.하지만 나중에야 알았다.그녀는 단지 경고를 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승리가 그렇게 쉽게 주어질 리가 없었다.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고 하지 않나.높이 올라갈수록 추락할 때의 충격은 더욱 처참할 것이라는 사실은 어린아이도 잘 안다.그러나 연정
연정우는 며칠 전 저택에서 열린 축하 파티를 떠올렸다.그날, 죠지는 그를 사람들 앞에 세웠다.샴페인이 잔잔히 흔들리는 사이 그는 모두의 찬사와 인정을 받았다.그 순간, 그는 확신했다.과거에 자신을 의심하고 반대했던 이들이라도 그날 밤만큼은 모두 입을 다물었으리라고.그래서 죠지는 1차 목표가 달성되자마자 연정우를 위한 축하 파티를 열어줬다.연정우의 성과를 모두에게 공개해야만 그들 역시 기꺼이 자금을 맡길 테니까.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사실, 부르노 측이 최고점에 도달한 후에도 추가 투자를 계속하자 죠지는 연정우에게 위험 신호를 보냈다.그러나 시장은 변덕스러운 법이니 몇 초의 망설임도 패배로 이어질 수 있다.그래서 연정우는 주저하지 않았다.그는 박한빈 또한 같은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렇다면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연정우에게 필요한 건 단 하나. 완벽한 승리였다.이번만큼은 꼭 박한빈을 꺾을 것이라는 일념 하나로 모든 걸 걸었다.그렇지만 연정우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박한빈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젠 펀드가 아니라 진짜 목표는 마피 전체를 삼키는 것이라는 사실을.생각해 보면 이와 비슷한 상황이 과거에도 있었다.그때도 연정우는 자신의 회사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설령 패배하더라도 사씨 가문이 뒤를 받쳐주기에 완전히 망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박한빈이 노린 것은 단순한 한 회사가 아니었다.그는 사씨 그룹 전체를 원했다.마치 지금처럼.박한빈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젠 펀드가 아니라 마피 전체와 부르노 일당까지 모두 포함된 거대한 판이었다.아니, 사실 저들은 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짐승들이라고 해야 옳았다.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이익뿐.감정도, 인간성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자들이었다.마치 초원에서 먹잇감을 쫓는 맹수처럼 일단 상대의 목덜미를 물었다면 절대 놓아주지 않는 자들.결국, 마피는 끝장났다.연정우의 휴대전화가 계속해서
“*발, 내가 미쳤지! 네 말을 믿은 내가 병신이야. 지금 당장 여기서 죽어버려!”죠지는 연정우에게 더 이상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쾅!총성이 터지는 순간, 연정우는 깨달았다.박한빈은 애초에 그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마피를 삼키고 자신을 빈털터리로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빈은 자신을 반드시 죽이려 하고 있었다.도대체 왜?아마도 박한빈이 죠지에게 무언가를 말한 것이 틀림없었다.그를 배신자로 만들고 마피를 배반한 장본인이라 믿게 만들었을 것이다.이제 죠지에게는 물러설 길이 없었다.그러니 여기서 자신을 쏴 죽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박한빈이 원한 것은 단순한 몰락이 아니라 연정우의 죽음이었다.순식간에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그리고 다음 순간, 연정우는 반사적으로 총구를 붙잡고 강하게 비틀었다.탁!총알이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죠지는 지체 없이 다시 공격하려 했지만 연정우는 죠지의 손목을 틀어쥐고, 총구의 방향을 억지로 돌렸다.쾅!다시 울린 총성.그 순간, 죠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의 커다란 눈알은 마치 튀어나올 듯했고 그 안에는 지금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그리고 연정우의 모습이 비친 죠지의 동공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흐려졌다.하얀 얼굴엔 새빨간 피가 튀어 선명한 대비를 이뤘고 죠지의 가슴에는 구멍이 뻥 뚫려버렸다.죠지의 숨소리는 점점 희미해졌고 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마침내, 억지로 버티고 서 있던 죠지는 연정우의 품속으로 쓰러졌다.연정우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그러나 죠지의 몸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느낀 순간, 그는 비명을 지르며 죠지를 밀쳐냈다.쿵!죠지의 시체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크게 뜨인 채였다.마치 죽기 직전까지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을 겪은 듯한 표정으로.연정우는 발까지 헛디디며 몇 걸음 물러섰다.그제야 그는
연정우는 그곳에 머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곧장 자신의 거처로 향하려고 차를 몰았다.그는 성유리를 데리고 무작정 떠날 생각이었다.성유리에게 여권이 없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지금 분명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고 있을 테니까.하지만 어떻게든 그녀를 보호할 것이다. 설령 정처 없이 떠돌게 되더라도 괜찮으니 그저 두 사람만 함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비록 허름한 지붕 아래일지라도, 한 줄기 불빛만 있다면 그곳이 곧 그들의 집이 될 테니까.그렇지만 연정우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집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얼마 전 성유리가 가져왔던 짐들이 전부 사라져 있었고 테이블과 바닥도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그 모습을 본 연정우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현실을 인식했다. 그리고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것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터져 나오는 웃음이었다. 그는 온몸이 떨릴 정도로 이성을 놓고 웃었다.도대체 왜 성유리가 자신을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을까? 성유리가 어떻게 기다려줄 수 있단 말인가?그러니까 결국 처음의 판단이 맞았다. 이 모든 것은 애초부터 짜인 각본이었다.처음부터, 박한빈이 계획한 덫이었고 연정우는 한 치 앞도 모르는 바보였다.분명 의심도 했었고 일이 그렇게 간단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연정우는 그 함정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심지어 성유리가 밤늦게 건네준 차 한 잔에도 감동을 받았을 정도였다.지금 자신의 목숨이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상황인데도, 눈 깜빡할 순간이면 누군가 들이닥쳐 죠지처럼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연정우는 여전히 성유리가 생각했다.오직 성유리를 데리고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결과는?연정우는 또다시 속은 것이다.성유리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진심을 다한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은 철저한 이용과 기만이었다.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오직
에릭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입속으로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는 듯했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굳이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대신 고개를 돌려 연회장 안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귀를 찢을 듯한 음악이 계속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들떠있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원래 이들의 축하 파티는 이런 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이 모든 건, 박한빈이 성유리를 이곳에 적응시키고 받아들이게 만들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이 사실을 모르는 것도, 처음 알게 된 것도 아니었지만 다시금 깨닫게 되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언짢아졌다.그리고 문득, 며칠 전 연정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것은 그녀와 박한빈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였다.물론, 연정우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보장도 없었다.연정우가 말한 과거들 중, 진실은 얼마이며 거짓은 얼마나 될까?성유리는 지금의 삶이 만족스러웠고 과거의 선택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박한빈의 감정을 믿고 싶었다.그렇게 믿고 싶을 때도 있었다.하지만 때때로 지금의 자신이 마치 허상처럼 느껴졌다.박한빈과의 관계조차 마치 보이지 않는 얇은 막이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정작 그녀 자신도 자신의 본모습을 완전히 들여다볼 수 없는데 하물며 박한빈이 온전히 알 수 있을 리가 있을까?성유리는 손에 든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켰다.달콤한 맛과 함께 과일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그녀는 빈 잔을 내려놓으며,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기로 했다.이곳은 에릭이 통째로 빌린 사적인 공간이었다.주변에는 수시로 순찰을 도는 경호원들이 있어 안전은 보장된 곳이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이곳에서 연정우와 딱 마주치게 된 것이다.그리고 그의 총구는 성유리의 허리에 거의 닿아 있었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성유리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연정우를 바라보았다.그 반응이 오히려 연정우를
“에릭 씨!”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에릭은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며 울적한 기분을 달래고 있었다.이번 ‘전쟁’에서 그들은 승리했으니 그는 상당한 보상을 손에 넣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아마도 박한빈이 억지로 그를 이 판에 끌어들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이제 단순한 승패로는 에릭의 감정을 자극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몰랐다.처음에는 그래도 기대감이 있었다.연정우라는 상대는 꽤 까다로운 인물이었고 엄청난 위기를 초래하며 심지어 그들을 완전히 박살 낼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그랬다면 정말 볼만한 구경거리였을 것이다.그러나 정작 모든 일이 지나치게 순조롭게 끝나 버렸다.별다른 기복도 없이.이건 정말 따분했다.오늘 밤의 축하 파티도 마찬가지였다.박한빈이 꼭 성유리를 이 연회에 참석시키겠다고 고집했기 때문이었다.그녀도 이번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니 승리의 일부는 성유리의 몫이라는 말과 함께.그래서 오늘 밤의 축하는 유난히 ‘건전’했다.아니, ‘심심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에릭은 한숨을 쉬며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샴페인 잔에 던져 넣었다.한 잔에 5만 달러가 넘는 술이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그리고 뒤쪽에서 자신을 부른 사람에게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뭐죠?”“로얀이라는 분이 데리고 오신 동반자가 누군가에게 끌려갔습니다.”상대가 낮은 목소리로 보고하자 에릭의 눈이 가늘어졌다.“뭐라고요?”“아까 경호원들이 순찰 중에 봤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초대장을 가지고 있어서 특별히 의심하지 않았죠. 그런데 지금 보니 뭔가 이상합니다. 그래서...”“그래서 지금 그 사람은?”“이미 끌려갔습니다.”에릭은 보고한 사람을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그리고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그러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아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멈춰 섰다.에릭은 다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데려간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습니까?”“방금 CCTV를 확인했습니다. 아마도... 마피
에릭이 다시 묻기 위해 입을 열려던 순간, 갑자기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선생님, 아내 분이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아요.”박한빈은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이내 검은 머리에 커다란 눈을 가진 여자아이가 그들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방금 뒤쪽에 있는 화단 쪽에서 아내 분이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걸 봤어요. 제 착각이 아니라면... 그 남자는 전에 마피 쪽에 있던 연정우 씨였던 것 같은데요?”연정우라는 이름이 나오자 박한빈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그리고 즉시 소녀 앞으로 다가섰다.“그들이 어디로 갔지?”“그건 잘 모르겠지만 대신 차 번호를 기억해 뒀어요. 필요하세요?”“어디 있는데?”박한빈이 다급하게 소리치자 소녀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천 달러요, 선생님.”박한빈은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하지만 고민할 것도 없이 즉시 자신의 카드를 그녀에게 건넸다.“번호!”소녀는 카드에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박한빈이 누군지 생각해 보면 이 정도 돈을 떼먹을 사람은 아닐 터였다.결국 소녀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었다.박한빈은 주저 없이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았다.“선생님, 그건 제 휴대폰이에요!”소녀가 깜짝 놀라 소리치며 따라붙으려 했지만 에릭이 가로막았다.“넌 누구야?”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더니 순식간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안녕하세요, 에릭 씨.”에릭은 대답하지 않은 채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넌 이곳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소녀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손을 들어 보이며 가슴팍의 직원 명찰을 가리켰다.“저는 그냥 아르바이트생이에요. 서빙하러 들어온 거랍니다.”에릭은 코웃음을 쳤다.그리고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조용히 말했다.“그럼 이제 네가 해고됐다는 걸 알려 주지.”...한편, 성유리는 연정우의 차 안에 있었다.그가 어디로 차를 몰고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아주
“미쳤어? 성유리, 당장 손 놔!”연정우는 필사적으로 핸들을 되찾으려 했다.하지만 성유리는 마치 먹이를 물고 절대 놓지 않으려는 맹수처럼 손아귀에 힘을 주어 핸들을 꽉 붙잡았다.차의 속도는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광란의 질주를 이어갔다.이 모든 과정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아마도 몇십 초 정도였을 것이다.그렇지만 연정우에게는 단지 한순간처럼 느껴졌다.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정면에서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오는 차가 보였기 때문이었다.연정우는 더 이상 총을 찾을 겨를도 없었다.그는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으려 했다.그러나 그 찰나, 두 대의 차량이 엄청난 속도로 충돌했다.쾅!굉음이 울려 퍼졌고 차체가 한순간 공중으로 떠오른 후, 격렬한 충격과 함께 다시 도로로 떨어졌다.연정우는 크게 뜬 눈으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하지만 본능적으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성유리였다.그녀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마치 처음부터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처럼.성유리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연정우가 정말로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는 걸.그가 그녀를 납치한 진짜 이유가 박한빈을 협박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연정우는 생각했다.비록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성유리와 단둘이 대화를 나눌 기회는 있을 것이라고.그녀가 자신을 배신하고 함정에 빠뜨린 것에 대한 감정도 이제는 조금 덜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그냥 단순히 한 번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하지만 성유리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단 한 마디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그를 죽음으로 끌어들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연정우는 그녀에게 별다른 원망을 느끼지 못했다.오히려 어딘가 후련한 기분마저 들었다.그때 연정우는 불현듯 자신과 성유리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그날, 성유리는 박한빈과 함께 연회에 참석했었다.그리고 연정우는 그 연회장에서 질식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도망치듯이 정원으로 나왔었다.그는 당시 명문대 교수였고 외할아버지는 존경받는 화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
성유리는 처음엔 물밀듯 밀려오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다.하지만 박한빈이 그녀 앞에 국 한 그릇을 내려놓으며 손을 뻗는 순간, 풍겨온 성유정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그래서 성유리는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그녀는 입을 틀어막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사실 성유리는 저녁도 거의 먹지 못했기에 토할 것도 없는 빈속에서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세면대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던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너무 힘을 준 탓에 세면대를 짚고 있는 손이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사모님, 괜찮으세요?”문밖에서 가사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도우미가 문을 두드리다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설마 무슨 일 생긴 거 아니겠지?”“임신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심하게 입덧을 해? 앞으로 어쩌려고.”“그러게 말이야.”“근데 뭐... 이해는 가지. 복 많은 도련님의 아기를 가지려면 그만한 고생은 해야 하지 않겠어?”그들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딱 성유리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일부러 비꼰 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도우미들도 눈이 있으니 이 집에서 성유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당연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집안 어르신인 김난희가 성유리를 싫어하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고 김서영 역시 그저 고인이 된 남편의 뜻을 따라 돌봐주는 척하는 것뿐이라는 것을.박한빈, 그는 아예 성유리를 아내라고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고 그에게 성유리는 한낱 ‘도구’에 가까웠다.그 사실이 너무도 명확하게 떠오르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너무 굳어 있어서 한참이나 애써도 겨우 떨리는 듯 올라갈 뿐, 미소라고 볼 수도 없었다.거울 속에 비친 성유리의 모습에서 제일 잘 보이는 건 붉게 충혈된 눈동자였다.그러나 눈물은 흐르지는 않았다.왜냐하면 성유리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눈물이라는 건 자신을 아끼는 사람 앞
그때의 성유리는 진심으로 감동했고 더없이 행복했다.그 순간만큼은 박한빈의 모든 무심함과 냉랭함을 다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의 성유리는 알게 됐다.자신이 박한빈에겐 그저 하나의 장난감이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처럼 하찮은 존재였다는 걸.성유리가 처음으로 받은 단 하나의 선물, 그건 결국 성유정이 필요 없다고 내버린 사은품일 뿐이었다.박한빈의 아내는 성유리다.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일상에 관심을 가져준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성유리의 생각을 진심으로 존중해준 적이 없었다.그러니 성유리가 팔찌를 들고 박한빈에게 보여줬을 때 그렇게 놀란 눈빛을 보였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그건 성유리가 박한빈의 얼굴에서 본 몇 안 되는 감정의 변화였다.기뻐하는 성유리를 보며 박한빈은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이 여자 참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하다고, 이 정도 선물에 저렇게 감격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박한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그저 그런 사소한 물건 하나면 성유리는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 테니까.그녀의 감정과 진심은 박한빈에게 그렇게나 값싸고 하찮은 존재였다....성유정은 돌아오긴 했지만 저녁 식사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자신의 물건을 놓고 가서 잠깐 들른 것뿐이라며 떠났고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박한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유리 옆자리에 앉았다.박씨 저택의 주방은 매우 컸다.식사를 하는 사람은 네 명뿐이었지만 여전히 지름 2미터 가까이 되는 원형 테이블을 사용했다.성유리는 자신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박한빈이 평소보다 더 가까이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너무 가까워서 박한빈의 향수 냄새가 또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그 향은 성유리에게도 익숙한 냄새였다.왜냐하면 그것은 조금 전 성유정이 박한빈을 껴안으며 남긴 향기였으니까.고개를 숙였을 때 성유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텅 빈 손목뿐이었다.그 위에 끼고 있던 팔찌는 이미 그녀가 스스로 끊어내 버린 상태였다
방안의 보석을 다 둘러본 뒤, 김서영은 저녁 준비 상황을 보러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성유리는 화장실에 들렀다.손을 씻고 나오는 순간 조금 전 먼저 떠났던 성유정이 다시 돌아와 있는 걸 보게 됐다.지금 그녀는 정원에 서 있었는데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성유정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비록 성유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작게 떨리는 어깨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박한빈은 성유리 쪽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이나 반응은 볼 수 없었다.그런데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그 장면은 어쩐지 너무 자연스럽고 심지어 눈이 아릴 정도로 잘 어울렸다.성유리는 이제 그만 보고 얼른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마치 스스로를 학대하듯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그리고 이내 성유정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성유정이 팔을 뻗어 박한빈을 끌어안으려는 순간 성유리는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그녀는 마치 도둑처럼 급히 몸을 돌렸고 다급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사모님, 어디 안 좋으세요?”가사도우미가 가장 먼저 성유리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했다.성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냈다.“괜찮아요.”“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세요. 몸이 불편하신가요?”“아니에요. 그냥... 급히 움직였더니 좀 숨이 차네요. 조금만 쉬면 괜찮을 거예요.”도우미가 또 뭔가 말하려던 그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그 순간, 성유리의 몸이 바짝 굳었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성유정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성큼성큼 걸어와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갑자기 들은 소식이라 순간 좀 당황했나 봐.”“언니가 임신했다니... 나 진심으로 너무 기뻐. 언니랑 형부, 꼭 행복해야 해.”성유정의 연기는 늘 어릴 때부터 완벽했다.지금 이 순간, 그녀의 얼굴
성유정은 박한빈과 성유리의 결혼은 그저 잠깐의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확신했었다.시간이 지나 어머니가 자신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면 성유리와 이혼하고 결국 자신 곁으로 돌아올 거라고.그런데 지금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성유리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은 진짜 믿고 싶지가 않았다.그들이 정말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장면을 떠올리자 성유정은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미쳐버릴 것 같았다.아무리 애써 눌러도 눈가는 빨갛게 물들고 목소리는 떨렸으며 얼굴에는 힘들게 억누른 감정이 일그러진 채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성유리는 그런 성유정을 오랫동안 보고 있다 결국 조용히 입을 열었다.“고마워.”그때, 성유정이 김난희에게 얼버무리듯 말했다.“할머니, 저... 생각해 보니 급한 일이 있어서요. 먼저 가볼게요.”이 자리에 성유정은 더는 머물 수 없었다.그래서 김난희에게도 짧게 인사만 남긴 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쟤 왜 저래?”김난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곤 성유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어쨌든 지금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건 아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는 꼭 지켜야 해, 알겠니?”말투엔 여전히 집안 어르신의 권위가 잔뜩 실려 있었는데 마치 아이를 낳는 것이 성유리에게 내려진 대단한 영광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하지만 성유리는 이제 그런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몇 번 꾹 참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김서영이 곧 화제를 돌렸다.“며칠 전에 새로 들인 보석이 있는데 같이 올라가서 좀 볼래?”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임신 초기 석 달이 제일 중요해.”계단을 오르며 김서영이 말했다.“원래는 조용히 넘기려 했는데 이젠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비밀로 하는 것도 의미가 없겠더라.”“네 일도... 요즘은 좀 줄이는 게 좋겠어. 내가 사람 몇 명 골라서 보낼게. 하루 세 끼 챙겨주고 매일 태아 심장박동이랑 혈압 체크도 해줄
“유정이 왔니?”성유정은 밥을 얻어먹으러 왔다고 말했지만 김난희는 그래도 너무 반가운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성유정 또한 자연스레 김난희의 팔짱을 꼈는데 그 모습이 꼭 진짜 손녀처럼 친밀해 보였다.그러다 성유정은 성유리도 자리에 있는 걸 발견하곤 먼저 인사를 건넸다.“언니도 와 있었네?”성유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아, 맞다. 오늘이 음력설이지.”성유정은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요즘 졸업 준비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걸 깜빡했네.”“별일도 아닌데 잘 왔다. 저녁 같이 먹자.”김난희가 성유정의 말에 바로 대답했고 그녀도 군말 없이 수긍했다.그러다 성유리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걸 본 성유정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가 보려고 했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김난희가 성유정을 잡아끌며 말했다.“조심해라. 너희 언니 지금 아주 귀하신 몸이시다.”그 말은 진심인지 빈정거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성유정은 순간 멈칫하며 무심코 물었다.“왜요?”김서영이 입술을 다물고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김난희가 먼저 나섰다.“어이구, 바보야! 왜겠니? 당연히 네 언니가 임신했으니까 그렇지.”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유정의 얼굴에 띠고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던 성유정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임신? 임신했다고? 언니가... 진짜 임신한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한빈 오빠는 분명 언니를 좋아하지 않았잖아. 엄마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거 아니었어? 두 사람의 결혼은 명목뿐인 관계라고... 분명히 언니가 그때 인정했었는데?’수많은 생각이 들어 머릿속은 복답했지만 성유정의 시선은 성유리에게 고정돼 있었다.‘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거잖아!’성유정은 가슴 깊숙한 곳을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찌른 것처럼 아팠고 숨이 막힐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표정 관리를 할 틈도 없이 그 눈빛엔 마치 성유리를 갈기
오늘 밤 박한빈은 꽤 일찍 집에 돌아왔다.성유리가 저녁을 먹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평소와 달리 박한빈이 집에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하지만 박한빈은 태연하게 그녀를 불렀다.“밥 먹자.”그제야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결혼한 이후, 두 사람이 이렇게 같이 저녁을 먹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매달 한 번씩 박씨 저택에 돌아갈 때면 그들도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그렇지만 성유리가 말하는 건 지금처럼 단둘이 있는 상황이었다.비록 아침에 성유정이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지만 지금 박한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참 기뻤다.그녀가 바라는 건 사실 정말 많지 않았다.이렇게 박한빈의 곁에 앉아 있을 수 있고 박한빈이 자신을 위해 작은 자리를 내어주며 조금이나마 함께 있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이미 충분히 행복했다.그래서 성유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저녁을 먹었고 결국 기다리다 못한 박한빈이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일이 좀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넌 천천히 먹고 있어.”그 말을 끝으로 박한빈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는 성유리에게 대답하거나 반응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홀로 남겨진 성유리는 그대로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박한빈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왔다.그리고 이내 작은 상자를 성유리 앞에 내려놓았다.“선물.”예상치 못한 상황에 성유리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지금 성유리의 눈은 반짝였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성유리의 반응이 너무 컸던 탓인지 박한빈의 눈빛도 순간 흔들렸다.“저... 주시는 거예요?”성유리가 묻고 나서야 박한빈이 정신을 차린 듯 짧게 대답했다.“응.”“고마워요.”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매도 부드럽게 휘어졌다.원래도 예쁘고 화사했던 얼굴이 그 순간 더욱 생기 넘치게 변했다.박한빈은 너무 아름다운 성유리의 모습을 보며 무의식중에 눈을 가늘게 떴다.그와 눈이 마주치는
“언니!”모든 일이 끝난 후, 성유리가 저택을 떠나려 할 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왔다.성유정은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엄마는 언니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 방법이 조금 틀렸을 수도 있지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성유리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성유정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 언니랑 한빈 오빠... 아니, 형부 쪽은 내가 잘 설득해 볼게. 둘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잖아. 형부는 원래 언니한테 별다른 감정이 없었으니까 이런 일은 서두를 필요 없어. 그렇지?”성유정은 정말 진심인 듯 보였지만 그 말속에 성유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박한빈이 자신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을 계속 들먹였다.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성유정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고마워.”“나는 언니 동생이니까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성유정은 성유리의 팔짱을 끼며 계속 말했다.“오늘 별일 없지? 우리 둘이 쇼핑이라도 할까?”“아니, 몸이 좀 안 좋아서 쉬고 싶어.”“그렇구나. 원래는 언니랑 가면 형부랑 안 가려고 했는데...”성유정은 끼고 있던 목걸이를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봐. 형부가 지난번에 사준 건데 2주도 안 돼서 고장 났어. 그래서 오늘 매장에 가서 제대로 얘기해야 돼.”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성유정에게 물었다.“그걸 왜 나한테 말해?”“언니랑 형부는 부부 사이잖아. 그럼 매장 사람들도 언니를 알 거야. 그리고 형부 카드도 언니한테 있는 거 아니야?”“나한테 없어.”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고 성유정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실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구나. 그럼 난 먼저 가볼게.”성유리는 더 이상 성유정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차가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비로소 꽉 쥐고 있던 두 주먹을 풀었는데 손바닥에는 이미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 자국이 언제 남았는
성유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성유리를 한번 쓱 쳐다보았다.그 눈빛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성유리의 눈엔 조금은 도발적인 눈빛으로 보였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의 의미를 잘 알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성유정이 나타난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짧은 시간이었지만 윤청하와 점점 서먹해졌기 때문이다. 필경 수년간 엄마로서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그래서 성유정이 등장하자 성유리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을 무시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성유정은 눈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방금 전 장면이 마음에 남았는지 식사 중에도 윤청하에게 계속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다.“그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거야.”윤청하는 태연하게 대답했고 성유리는 그녀가 이 사실을 성유정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그러나 식사를 마친 후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한약 한 그릇을 준비해 주었다.“이건 네 몸을 위한 거야.”윤청하가 계속 말했다.“내가 특별히 좋은 것만 넣었어.”성유리는 윤청하가 부엌에서 뭔가를 바삐 준비하던 이유가 바로 이 한약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그리고 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감동을 받은 걸까? 어쩌면 오랜만에 느껴본 모성애 때문에 멍해졌을 수도 있지만 성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윤청하가 원하는 것은 그저 성유리의 뱃속 아이가 성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저는...”성유리는 거절하려 했지만 윤청하가 그녀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그냥 내 말 들어. 너 지금 너무 말랐어. 임신...”윤청하는 더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성유정의 눈치를 본 후 빠르게 말을 바꿨다.“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먼저 네 몸을 잘 챙기고 난 다음에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해야지.”성유리는 그 한약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 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