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흐르던 적막을 깨며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아까 너 밥도 별로 안 먹었잖아. 그래서 너랑 같이 매운탕 먹으러 가려고.”“매운탕?”성유리는 갑자기 웬 매운탕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쳐다봤다.마침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손을 꼭 잡으며 대답했다.“응. 예전에 정말 좋아했잖아. 가고 싶어?”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옅은 미소가 떠 있었는데 아까 연정우와 사씨 가문과 대화할 때의 차가운 표정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하지만 이런 모습은 성유리에게 낯설지 않았다.이런저런 생각이 든 성유리가 진지한 얼굴로 박한빈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봤다.“응?”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이 자신의 의견을 묻고 있다는 것이 떠올라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차는 그렇게 다른 길로 들어서더니 마지막엔 어느 한 쇼핑몰 앞에 멈춰 섰다.오늘은 마침 주말이라 쇼핑몰 안은 꽤 사람이 많았다. 그 바람에 박한빈과 성유리가 매운탕 집에 도착했을 때, 사람이 너무 많아 대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직원의 말에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는 고개를 돌려 성유리에게 다른 집으로 갈지 물어보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앞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그곳엔 아늑한 분위기의 케이크 가게가 있었는데 입구에는 귀여운 모양의 솜사탕이 한 줄로 진열되어 있었다.“솜사탕 먹고 싶어?”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곧 자신이 이제 그런 걸 먹을 나이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다시 고개를 저으려 했다.그러나 성유리가 말릴 틈도 없이 박한빈은 이미 케이크 가게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성유리는 멍한 상태로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잠시 후, 박한빈은 손에 솜사탕 하나를 든 채로 성유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핑크색과 귀여운 곰 모양은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그가 걸어오는 동안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몽땅 박한빈에게 집중되었지만 그는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 듯 자신 있게 성
박한빈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그날 밤, 사민혁은 정말로 병원에 실려 갔다.사실 그들의 작전이 실패할 것을 사민혁은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이렇게 감정적으로 흔들리게 만든 것은 바로 믿었던 연정우의 배신이었다.사민혁이 연정우를 얼마나 신뢰했는지는 주변 사람들 거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그는 이미 아내와 몰래 상의했었다. 앞으로 두 사람이 떠난 후, 남은 재산을 연정우에게 넘기겠다고.어차피 자식도 먼저 떠나보냈으니 자신이 그토록 믿는 연정우에게 남겨주는 것이 나쁜 선택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결국 사하나는 떠났고 만약 연정우가 아니었으면 그들이 그 시간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기에 그들에게 연정우는 더 이상 그들의 아들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사민혁은 자신이 그렇게 신뢰한 사람이 결국 뒤에서 칼을 꽂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사민혁이 병상에 누워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류수미는 모든 분노와 불만을 연정우에게 쏟아냈다.“어떻게 네가 이럴 수 있어? 나랑 우리 남편이 너를 얼마나 믿었는데!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그녀는 거의 목이 터져라 외쳤다.그때 류수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회사는 이제 완전히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워졌다.모든 것이 마치 천천히 기울어지는 빌딩 같았고 그들은 곧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그럼에도 류수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어머님,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연정우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오해? 지금도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 모든 일, 네가 다 계획한 거잖아! 항공권도 네가 예매했지?”“하지만 저는 한 번도 혼자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연정우의 대답에 류수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제가 전에 그랬죠. 저는 하나 씨와 친구였다고. 하나 씨가 떠나면 남겨진 부모님을 잘 돌보겠다고요. 그런 제가 어떻게 두 분을 버리고 홀로 떠날 수 있겠어요?”연정우의 말에 류수미는
“근데... 성유리는 과거의 일을 다 잊지 않았니?”“누가 유리가 정말 잊었는지, 아니면 연기인지 알겠습니까?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유리가 정말 잊었더라도 하나 씨가 하늘이를 구하려다 죽은 것은 사실이잖아요?”“그렇긴 하지...”“지금 성유리가 돌아서서 박한빈 씨와 함께 어머님과 대표님께 대적하려고 하는 게 과연 맞는 일입니까?”류수미는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아니면 어머님이 가셔서 성유리와 얘기 좀 해보시겠습니까?”연정우가 다시 묻자 류수미는 그를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지금 밖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주주들이 대표님에게 해명을 요구하고 있는데 대표님께서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머님, 정말 두고만 보실 겁니까?”연정우의 마지막 물음에 류수미는 금세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렇긴 하지.”“걱정 마십시오. 여기서 저는 대표님을 돌봐드릴 겁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박한빈 씨의 움직임을 막는 일이죠.”류수미는 연정우를 한 번 더 바라본 후, 병상에 누워 있는 사민혁을 쳐다보았다.충격이 너무 컸던 탓인지 사민혁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의사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지만 언제 깨어날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사실 류수미는 지금 당장 떠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연정우의 말도 맞다.지금은 박한빈의 행동을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사업적으로 그와 대립하는 것은 불가능했다.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연정우가 말한 대로 성유리에게 접근해서 그녀를 설득하는 것이었다.하지만 연정우의 말처럼 사하나가 이미 세상을 떴는데 성유리가 이제 와서 박한빈이 사씨 가문을 공격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 아닌가?류수미는 생각보다 빠르게 실버 포레스트에 도착했는데 성유리도 마침 안에 있었다.가사도우미에게 연락을 받은 성유리는 천천히 위층에서 내려왔다.그녀는 방금 자신 그린 과거 작품들을 보고 있었기에 머리는 대충 묶여 있었고 약간 헝클어져 있기도 했다.아래로 내려온 성유리는 류수미가 왜 여
류수미가 너무 강한 힘으로 성유리의 뺨을 때린 바람에 그녀의 얼굴은 맞은 즉시 빨갛게 부어올랐다.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사도우미가 잔뜩 굳은 얼굴로 달려들어 류수미를 막아섰다.“다 비켜!”류수미는 여전히 화를 못 이기겠다는 듯 이를 악물며 외쳤다.“성유리, 너는 정말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악랄한 년이야. 하나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만약 하나가 아니었으면 너는 벌써 죽었을 거야.”“그 몇 년 동안, 너는 개보다 못한 삶을 살았어. 하나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지도 기억 안 나? 우리 하나가 결국은 네 딸을 구하다가 죽었잖아. 그런데 지금 너는 네 딸을 구해준 사람의 부모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거야?”류수미의 감정은 너무도 격해져 있었다.가사도우미는 애써 류수미를 막으며 박한빈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성유리는 그들을 막고 자신이 직접 류수미 앞에 서서 물었다.“사모님.”가사도우미의 얼굴에는 걱정 근심이 가득했지만 성유리는 못 본척하며 류수미에게 다가가 말했다.“뭐 하나만 여쭤볼 게 있어요.”“뭔데? 너...”류수미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가 다시 물었다.“제가 전에 실종되고 다쳤던 일... 사모님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요?”그 짧은 말 한마디는 류수미의 모든 행동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담방이라도 폭발할 듯했던 분노도 한 순간 사그라든 것 같았다.“나...”류수미는 입을 뻥끗거렸지만 이미 낯빛은 새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그러니까 사모님은 다 알고 계셨던 거네요? 아니면... 사모님께서 주동자셨나?”“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내가 무슨 주동자라는 거야? 그건 분명히 사고였어. 그때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나는...”류수미는 급히 부인했지만 금세 깨달았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사실을.그리고 류수미는 성유리가 기억을 잃은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다 잊어버렸다며? 그럼 방금...’“너 지금 나를 떠보려는 거야?”류수미는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성유
“그때 박한빈 씨는 사실 당신들을 겨냥할 이유가 없었어요.”성유리의 말에 류수미는 순간 멍해졌다.“뭐... 뭐라고?”“설마 아니라고 생각하세요?”성유리는 의아하다는 듯 류수미를 쳐다보았는데 정말로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마치 정말로 순수한 의문을 품은 아이처럼.“박한빈 씨가 굳이 사씨 가문까지 끌어들인 건 결국 당신들이 연정우라는 사람의 앞잡이가 되었기 때문이잖아요?”“만약 당신 말대로 제가 그저 잘 살아가길 바랐다면 그때 연정우 씨가 절 그렇게 끌고 가도록 두지는 않았을 거예요.”“그래서 박한빈 씨가 당신들을 겨냥하기로 마음먹은 거고... 나중엔 제가 살아 있다는 걸 당신들도 알게 된 게 결과일 뿐이죠.”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지듯 말하는 성유리에게 류수미는 더 이상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사하나 씨 일도 전부 알고 있어요. 그리고 하늘이를 구해준 하나 씨에게 감사하고 있고요.”“만약 가능하다면... 하나 씨를 대신해 당신들을 잘 돌볼 수도 있었어요.”“그렇지만 결국 이 은혜는 사하나 씨가 저희 모녀에게 베푼 거죠. 당신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리 깊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당신이 악행에 동참하는 순간 전 그 은혜는 이미 다 갚았다고 생각했어요.”“그리고 지금 사씨 가문의 상황은... 죄송하지만 저는 도와줄 수 없을 것 같네요.”류수미는 원래 자신만만한 태도로 성유리를 찾아왔다.그리고 여전히 성유리 앞에서도 늘 당당했다.그녀는 성유리가 사씨 가문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성유리가 내뱉은 말 하나하나는 류수미가 반박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그래서 그때 류수미는 왜 연정우를 막지 않았을까?정말 단순히 그를 믿어서였을까?사실 류수미도 알고 있었다.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류수미는 사하나의 일로 성유리에게 원한이 있었다.한 사람의 어머니로서, 평생 이 일을 마음에 품고 살 수밖에 없었다.비록 성유리를 용서했다고 말했지만 밤이 깊어질 때마다 류수미 역시 한순간도 악한 마음이 들지 않은
박한빈이 집에 돌아왔을 때, 성유리는 여전히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녀는 박한빈이 이미 돌아왔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기 전까지는.“뭐 보고 있어?”성유리는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화면을 가렸고 동시에 고개를 돌려 따지듯 박한빈에게 물었다.“왜 박한빈 씨는 발걸음 소리도 안 나요?”박한빈은 성유리의 컴퓨터 화면을 흘끗 내려다보았다.사실 별거 아니었다.그녀가 예전에 작업했던 작품들, 그뿐이었다.그리고 그 작품들을 박한빈은 전부 다 알고 있었다.출판된 것은 물론, 그녀가 그동안 공개한 모든 작품을 이미 다 봤었다.한때 박한빈의 사무실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책상 위에서 익숙한 장면을 목격하곤 했다.수많은 서류 더미 사이에 놓인 몇 권의 컬러풀한 만화책.표지에는 한 쌍의 남녀가 다정하게 포옹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그 자체로는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장면이지만 그것이 박한빈이라는 사람과 어울리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그러니 직원들이 몰래 수군거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박한빈은 그런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성유리의 컴퓨터 화면을 스치듯 보기만 해도 박한빈은 그녀의 이야기가 어느 부분까지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아, 다음 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빗속에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장면이 나오겠네.”솔직히 말해 그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의 논리와 전개 방식을 이해하기 어려웠다.어떤 면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전부 미쳐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하지만 성유리가 떠나 있던 몇 년 동안 이 작품 덕분에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는 걸 알기에 박한빈은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어도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그리고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직업이라면 그는 그것을 존중해야 했다.원래라면 박한빈은 도대체 왜 이런 걸 가리는지 물었을 것이다.이미 출판까지 되었고 영상화도 된 작품인데 이제 와서 숨긴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하지만 성유
하지만 성유리는 금방 말을 덧붙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저 정말 안 다쳤으니까. 그냥... 뺨 한 대 맞은 것뿐이에요.”그 말이 끝날 무렵, 성유리는 박한빈이 화를 낼까 봐 불안해져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그러자 박한빈이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그냥 뺨 한 대? 그게 별거 아닌 거 같아? 그럼 뭘 해야 심각하다고 생각할 거야? 네가 장애를 입을 정도로 맞는 걸 봐야 이게 심각하다고 느끼겠다는 거야?”“이곳은 우리 집이야. 누가 와서 너한테 손을 댔는데 내가 그냥 참고 있어야 된다는 거야?”박한빈은 갈수록 점점 더 분노하는 것 같았다.그의 입술은 점점 더 꽉 다물어졌고 급히 몸을 돌려 뭔가 하려는 듯했다.더 불안해진 성유리가 급히 박한빈을 붙잡았다.“뭐 하시려고요?”“손 놔.”“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한빈 씨가 이러면 전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성유리가 그렇게 말하자 박한빈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마치 그가 나가버릴까 봐 성유리는 박한빈의 허리를 꽉 껴안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표정은 조금 진정된 것 같았다.그래서 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했다.“그리고 사실 저도 큰 손해 본 것도 아니야.”“너도 그대로 되돌려줬어?”“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그 사람한테 따졌죠. 그러니까 그냥 슬퍼하고 절망하며 떠났어요.”성유리가 마치 자랑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자 박한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었다.“그게 전부야?”“이거면 충분하지 않아요? 그럼 제가 진짜 그 사람이랑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싸우고 싶으면 싸워.”박한빈은 단호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진짜 너한테 맞거나 네 손에 의해 장애를 입었다면 내가 뒤처리 해줄게.”성유리는 농담으로 말했을 뿐인데 박한빈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마치 정말 성유리가 어떤 짓을 벌여도 뒤처리를 해줄 것 같은 표정이었다.성유리는 그 표정을 보며 순간적으로 박한빈은 말한 대로 할 수도 있겠다고 믿어버렸다.“그런 일은
류수미는 바로 병원에 돌아갔다.처음에는 연정우에게 오늘 실버 포레스트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려 했으나 병실에 도착했을 때 연정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간호사에게 물었지만 간호사도 연정우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류수미는 연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연결음을 계속 들리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불안한 마음에 류수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있는 남편을 한 번 바라보았다.원래는 감정을 제어할 수 있었지만 사민혁의 얼굴과 흰머리가 보이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여보... 이제 우리는 어떡해요?”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류수미의 눈가는 더욱 붉어졌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펑펑 울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발신자를 확인한 류수미는 급히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곧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사모님, 큰일 났습니다.”상대방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말을 이어갔다.“황 대표님이 회사의 자금을 들고 도망쳤어요!”류수미는 그 말을 들었지만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상대방은 류수미의 반응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말을 이어갔지만 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몇 초 후에 다시 소리쳤다.“사모님!”“듣고 있어요.”한참 뒤, 류수미는 겨우 대답했는데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황 대표가 저희랑 얼마나 오래 지내왔는데요? 제 남편이 가장 믿고 따르던 사람이었잖아요. 그런 사람이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사모님, 농담이 아니라 진짜예요.”상대방은 즉시 말을 이어갔다.“황 대표님 이미 하루 종일 연락이 끊긴 상태예요. 방금 경찰에 신고했는데 경찰 측에서는 황 대표가 금성시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게 도망친 게 아니라면 뭘까요?”“말도 안 돼...”류수미는 수화기 너머 상대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한 채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요? 도
그런 날들을 성유리는 대체 홀로 어떻게 버텨낸 걸까?배도 제대로 못 채우고 하루하루 지석민의 협박 속에서 벌벌 떨며 살아야 했던 그 시간 동안 성씨 가문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그들은 성유정을 진짜 딸처럼 아끼고 무용과 피아노까지 가르치며 키웠다.그래서 결국 성유정은 성유리보다 훨씬 더 귀한 집 딸처럼 보이게 되었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유리의 촌스럽고 무례한 행동을 비웃었다.하지만 아무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성유리는 단 한 번도 자기 인생이 원래는 그런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는걸.지금까지 살아온 그 10년이 사실은 애초에 잘못된 자리에 있었던 삶이란 걸.그때, 귀신처럼 성유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는데 박한빈은 마침 식탁에 앉아 있던 중이었다.주변 사람들은 잔을 들고 연신 술을 따라주며 극진히 대접해 줬고 박한빈은 그들이 무슨 속셈인지 이미 훤히 알고 있었다.길을 닦고 학교를 짓자는 말은 그냥 명분일 뿐, 그들이 지금 이렇게 그에게 들러붙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어떻게든 성유리와 인연을 맺어 박한빈으로부터 실질적인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그게 이들의 진짜 목적이었다.박한빈은 이런 상황이 익숙했기 때문에 능숙하게 응대하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이름이 뜬 화면을 보는 순간, 문득 정신이 흐트러졌다.곧바로 정신을 다잡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지금 어디예요?”수화기 너머 들리는 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잠시 망설였다.“밖에... 있어.”“누구랑 있는데요?”마을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는 밖으로 나와 조용한 자리를 찾아도 완전히 막을 수 없었고 당연하게도 수화기 너머로 그 소리가 성유리에게 전해졌다.고스란히 듣고 있던 성유리는 의아한 듯 물었다.“왜 이렇게 시끄러워요?”“음... 공사장 근처에 있어서 그래.”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자기가 이 마을에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크게 고민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내뱉었다.“그럼 거기서 밥 드셨겠네요?”다행
“저기요! 거기 들어가면 안 돼요!”곽단이 급하게 뒤에서 소리쳤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집 앞의 잡초가 워낙 무성했기 때문에 안쪽도 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박한빈은 이미 집 안의 방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발길을 옮기려 할 때마다 잡초가 앞을 가로막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그때 뒤에 있던 곽단이 조심스레 다가와 말했다.“혹시 뭐 찾으시는 거예요? 근데 이 집은 몇 년 전부터 방치된 곳이라 값나가는 건 다 누가 가져갔을 텐데... 이제 남은 건 하나도 없을걸요?”박한빈은 여전히 한마디 대꾸도 없이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그리고 곧장 작은 골목을 돌아 집 옆쪽으로 향했다.다행히 창문은 이미 깨져 있었기에 그는 무리 없이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실내는 예상한 그대로였다.오랜 시간 비워져 있던 만큼 바닥이며 창틀이며 온통 먼지투성이였다.한 바퀴 방안을 둘러본 후, 박한빈이 마지막으로 시선을 멈춘 곳은 방 안에 덩그러니 놓인 책상 하나였다.오래되어 삐걱거리는 책상이었는데 어딘가 학교에서 쓰던 책상을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그 위엔 천 조각이 덮여 있었고 휴대폰 손전등을 비추어보니 작은 꽃무늬가 박혀 있었다.그리고 책상 옆 바닥에 내팽개쳐진 책 몇 권이 눈에 들어왔다.박한빈은 몸을 숙여 책들을 주워들었고 마침 그때 방문이 갑자기 열렸다.문이 열리면서 쌓였던 먼지가 우수수 쏟아졌고 그 소리까지 들려올 정도였다.뭔가 이상한 기분에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 순간, 앞장선 남자가 급히 다가오며 소리쳤다.“이런 데를 들어오시게 어떡해요! 미리 말씀만 해주셨으면 제가 먼저 정리라도 해놨을 텐데.”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그제야 남자는 뭔가 깨달은 듯, 급히 손을 내밀었다.“아, 제가 소개를 깜빡했습니다. 저는 이 마을 이장, 지세찬이라고 합니다.”박한빈은 그와 짧게 악수를 나누며 대답했다.“그냥 궁금해서 한번 들어와 봤습니다.”“이 집은
화면 속 사람이 웃는 장면에 맞춰 가게 안의 여자도 따라 웃고 있었다.하지만 정작 어디가 웃기는지는 박한빈은 알 수 없었다.“거기서 왜 멍하니 있어?”여자는 화가 난 듯이 소리를 지르더니 카운터 위에 있던 장난감 상자 하나를 그대로 들고 상대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손님 온 거 안 보여!?”안쪽에 앉아 있던 여자는 원래 그 말조차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고 있었다.그렇지만 물건이 얼굴에 부딪히고 나서야 박한빈을 힐끔 쳐다보았다.그런데 단 한 번의 눈길 이후, 그녀의 얼굴빛이 확 바뀌더니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혹시... 당신은 그...”“아까 말했잖아. 이분은 지서연 남편, 큰 회사의 사장님이시라고!”여자는 다가가 딸의 팔을 세게 꼬집은 뒤, 박한빈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이쪽은 제 딸 곽단이에요. 서연이랑 같은 반 친구였답니다.”박한빈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그럼 제가 바로 이장님께 알리러 갈게요. 다만 지금 이 시간이면 다들 낮잠 자고 있을 수도 있어서 제가 직접 집마다 다녀볼게요. 곽단, 너는 얼른 사장님 모시고 마을 한 바퀴 돌면서 안내 좀 해드려!”이름이 불린 곽단은 마지못해 몇 걸음 앞으로 나섰는데 박한빈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잠시 후, 곽단은 안내를 하려는 듯 앞장서며 천천히 입을 뗐다.“따라오세요.”박한빈은 별말 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사실 두 사람이 굳이 안내하지 않아도 그는 처음부터 이 마을을 둘러볼 생각이었다.애초에 그것이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가이드’가 하나 생겼다 해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뉴스에서 본 적 있어요, 사장님에 대한 기사요.”마을을 걷던 중, 곽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진짜로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어요…”“그 사람 집은 어딥니까?”곽단은 뜻밖의 질문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쳐다봤다.“당신 옛 동창 말입니다.”박한빈은 성유리라는 이름을 직접 말하고 싶지 않았고 지서연이라고 부르기도 싫었기에 그냥 동창이라는 단어로
여자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침묵만 유지했다.하지만 그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해도 그 존재감만으로 주변 공기가 묵직해졌다.여자도 그 기운을 감지한 듯, 얼굴에 띠고 있던 미소도 서서히 사라졌다.처음에는 자기가 너무 성급하게 말을 꺼냈나 싶었지만 순간, 박한빈이 입을 열었다.“좋습니다.”“다만 그 사람은 이쪽에 아직 일이 있어서요. 지금은 저희와 함께 갈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먼저 다녀오는 게 좋겠네요.”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여자 얼굴에 다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좋아요, 좋아요!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원래 여자는 성유리 이야기를 미끼 삼아 박한빈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했었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순순히 따라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게다가 여자 입장에선 성유리가 오든 말든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여자가 진짜 원하는 건, 오직 박한빈이 가진 권력이었으니까.지금처럼 성유리를 건너뛰고 박한빈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아까 하신 말씀 중에... 유리랑 이웃사촌이었다고 하셨죠?”가는 길에 박한빈이 먼저 물었다.여자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그러다 잠시 뒤에야 박한빈이 말한 성유리가 예전에 자신이 말했던 그 이웃임을 떠올렸다.여자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맞아요, 맞아요! 우리 집이랑 서연이 집이 바로 옆에 있었거든요! 어릴 때는 유리가 아빠한테 자주 맞고 저희 집으로 도망 오기도 했어요! 제가 그럴 때마다 우유랑 빵도 챙겨줬답니다!”물론 이건 전부 여자가 직접 지어낸 이야기였다.어차피 지금 이 자리에 성유리가 없으니 반박할 사람도 없으니 뭐라 말하든 여자의 마음대로였다.박한빈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여자는 그런 박한빈을 힐끗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 제 딸도요. 전에 서연이랑 같은 반이었어요! 둘이서 꽤 친하게 지냈다니까요. 근데 서연이는 워낙 특별한 집안 출신이잖아요. 그래서
여자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아직 촬영이 시작되기 전이라 현장은 조용했다.그렇기에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성유리는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즉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리고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죠?”“내가 무슨 말을 할지... 너는 이미 알고 있잖아?”여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제는 재벌가 사모님이시라면서? 재벌 집안은 체면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과거에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들 알게 되면 어떨까? 그때도 지금처럼 네 곁에 있어 줄까?”말을 마친 여자는 성유리를 시험하듯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의 눈에는 그 어떤 감정도 서려 있지 않았다.그 조용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여자의 심장은 세차게 요동쳤다.마치 자신이 ‘위협’한 게 아니라 오히려 판단받고 있는 것만 같았다.여자는 재빨리 입을 열어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리가 먼저 입을 뗐다.“좋아요. 그럼 그렇게 해보세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그 태연한 반응에 여자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그저 그대로 뒤돌아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그러나 이건 여자의 입장에선 명백한 도발이라고 느껴졌다.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거기, 뭐 하는 거야?”감독이 여자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몇 번이나 불렀는데 왜 대답이 없어? 빨리 자리로 돌아와!”여자는 잠시 멈칫하다 곧장 대꾸했다.“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되는데? 나 안 해!”말을 마친 여자는 곧바로 촬영장을 나와 버렸다.그렇지만 몇 걸음 채 가지도 않아 그녀는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그래서 곧장 택시에 올라탔고 그녀가 향한 곳은 박한빈이 머무는 호텔이었다.호텔 앞, 여자는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들고 곧장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단아,
성유리의 앞을 막아선 사람은 며칠 전 호텔 앞에서 그녀를 붙잡았던 바로 그 여자였다.여자는 오늘도 여전히 스태프 복장을 하고 있었다.“너희 촬영팀에서 엑스트라 모집한다고 하길래 나도 지원했어.”여자는 웃으며 계속 말했다.“그냥 한 번 와봤는데 정말 너를 만날 줄은 몰랐네. 너, 지서연 맞지?”“네 말대로 너도 잘못한 거 없잖아. 근데 왜 나만 보면 도망가는 거야?”성유리는 조용히 손을 뺐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여자를 쳐다보았다.“대체 무슨 일이죠?”성유리의 냉랭한 반응에 여자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곧 다시 웃으며 말했다.“뭘 그렇게 겁먹어? 난 그냥 네가 돌아와서 반가운 거야.”“이렇게 얼굴 보는 게 얼마 만인지도 모르겠네.”‘거짓말.’성유리는 여자의 말을 단 한 글자도 믿지 않았다.하지만 뭐라 반박하지도 않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성유리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드러냈음에도 여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어갔다.“근데 너 이번에 돌아왔으면 고향에도 한 번 가봐야 하는 거 아냐? 동네 사람들이 전부 네 소식을 궁금해하고 있어. 다들 서연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예전에는...”“제가 왜 거길 가야 하죠?”성유리는 단칼에 여자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거긴 제 고향도, 제 집도 아니에요.”“볼일 없으시면 그냥 가세요. 전 일해야 하니까.”사실, 성유리는 낯선 사람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구는 편이 아니었다.실제로 감독이나 스태프들도 그녀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배경은 화려하지만 절대 잘난 척하지 않고 누구보다 스태프들에게 친절한 사람이라고.그렇지만 지금 성유리의 안색은 너무 어두웠다.성유리는 더 이상 이 여자와 대화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여자는 그렇게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녀는 성유리의 앞을 다시 가로막으며 말했다.“하긴... 마침 잘 만났다. 너한테 부탁할 게 하나 있거든.”성유리는 여자의 갑작스러운 말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처음부터 목적을 갖고 다가올 줄 알았으니까.아무
성유리는 입을 삐죽이며 계속 투덜거렸다.“이건 제 잘못도 아닌데 왜 저한테 화를 내는 건데요?”그 말에 박한빈의 걸음이 뚝 멈췄고 잠시 침묵하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 화 안 났어.”“그럼 왜 계속 앞만 보고 가고 저랑 말도 안 하세요?”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한숨을 쉬며 계속 말했다.“그리고 이우빈 씨가 대체 뭐라고 이러세요? 마음에 안 드시면 그냥 촬영장에서 내쫓아 버려요. 어차피 지금 이 영화, 박한빈 씨가 최대 투자자인데.”그 말에 박한빈이 흥미를 보이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이 영화, 이우빈 씨 소속사도 투자한 거라서 교체하려면 복잡해.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하면 이 프로젝트 자체가 날아갈 수도 있는데 괜찮아?”“망해도 상관없어요. 전 당신이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하니까.”성유리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그 순간, 박한빈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고 가라앉았던 눈빛이 다시 반짝였다. 그리고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진짜?”“당연하죠.”성유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이든 박한빈 씨보다 중요한 건 없어.”방금까지만 해도 차 안에서 박한빈의 한마디 때문에 얼굴이 새빨개졌던 성유리였다.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졌고 박한빈이 그녀와 똑같이 얼굴을 붉혔다.성유리는 자신의 손을 꽉 쥐고 있는 박한빈의 힘에 너무 아파 빼내려 했지만 곧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박한빈 씨, 당신 혹시 얼굴 빨개진 거예요?”“아니.”박한빈은 단호하게 부정했다.하지만 눈길을 돌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티가 났다.그 반응에 성유리는 더욱 확신했고 그녀는 빙글빙글 돌며 박한빈의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박한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맞는 것 같은데? 한빈 씨 지금 얼굴 빨개진 거 맞죠?”“설마... 부끄러운 거예요?”성유리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려던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허리를 갑자기 당겼다.그리고 이내 박한빈은 성유리의 입술을 덮쳐버렸다.멍해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박한빈은 처음엔 그녀도 자신처럼 화가 난 줄 알았다.하지만 잠시 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다시 성유리를 바라보자 그녀의 어깨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너... 울어?”박한빈은 성유리의 어깨를 살짝 붙잡으며 무슨 말을 더 하려 했다.그러나 정작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본 순간 박한빈이 굳어버리더니 입술을 꾹 다물었다.“너... 지금 웃고 있는 거야?”박한빈의 목소리는 낮았고 눈빛은 싸늘하게 식었다.사실 성유리도 아주 오랜만에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걸 보았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아... 아니요.”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지만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그럼 그 웃음부터 참아봐.”그 말에 성유리는 순간 움찔했지만 아직 제대로 해명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앞좌석에 있는 기사를 향해 말했다.“차 세워요.”“아니, 잠깐만요! 제 말 좀 들어보세요.”그러자 성유리가 다급히 말했다.그렇지만 박한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차에서 내려버렸고 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갔다.“미안해요. 제 잘못이에요. 박한빈 씨를 비웃으려고 한 게 아니에요...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요. 그리고... 사실 전 이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는데...”박한빈의 발걸음은 빨랐다.성유리는 그를 따라가며 거의 뛰듯이 걷고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박한빈이 뚝 멈춰 섰고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한 성유리는 그대로 그의 등에 부딪쳤다.뒤돌아본 박한빈의 안색은 한층 더 어두워져 있었다.“방금 뭐라고 했어?”그의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웠다.성유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다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러니까... 생각해 보세요. 이우빈 씨조차 한빈 씨를 좋아한다고요. 그만큼 당신 매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거잖아요? 이건... 좋은 일 아닌가?”처음엔 나름 진지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성유리는 점점 목소리를 줄였다.결
박한빈이 화가 난 채로 돌아왔을 때, 성유리는 마침 손에 들고 있던 게 게 껍질을 내려놓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미처 박한빈이 화가 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성유리는 돌아서면서 환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밀었다.“이거 보세요. 제가 한빈 씨 거 다 발라놨어요! 빨리...”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그릇을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더니 곧장 성유리의 손을 잡아끌었다.“나랑 가자.”박한빈의 얼굴은 잿빛처럼 어두워져 있었는데 성유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냉랭한 표정이었다.잔뜩 당황한 성유리가 천천히 웃음을 거두었다.“왜 그러는데요? 무슨...”하지만 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섰다.몇 걸음 가던 그는 문득 무언가 떠올렸는지 발걸음을 뚝 멈췄다. 그리고 성유리가 힘들게 발라놓은 게살이 담긴 그릇을 다시 집어 들더니 옆에 멍하니 서 있던 웨이터에게 내밀었다.“포장해 주세요.”웨이터는 박한빈의 기세에 놀라 움찔했지만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박한빈은 더 이상 웨이터를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성유리를 끌고 나섰다.성유리는 복도로 나오면서 이우빈을 쓱 쳐다보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는데 박한빈이 성유리를 끌고 나오는 모습을 보자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무슨 일인데요?”성유리는 이제야 벌어진 상황을 퍼즐조각처럼 맞춰 보려 박한빈에게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박한빈의 싸늘한 눈빛만 봐도 기분이 최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도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조금 후, 웨이터가 포장한 게살을 들고나오자 박한빈은 차창을 내리고 그것을 받아 들더니 바로 운전기사에게 명령했다.“출발.”박한빈의 태도는 마치 이곳에 단 1초도 더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했다.쌩쌩 달린 차가 일정 거리를 지나고 나서 성유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이우빈 씨가 뭐라고 했어요?”성유리가 말을 마치자마자 박한빈은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