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의 온기가 완전히 가신 것은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고, 성유리는 몇 분간 누워 있다가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우려 했다.박한빈은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었다. 그래서인지 성유리는 한참 동안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몇 번이나 잠옷 단추를 끼우고 옷매무시를 정리하려 했지만 잘 안되었다.곧이어 박한빈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는 키가 훤칠한 데다가 이목구비까지 뚜렷해서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였다.방금 샤워를 마친 박한빈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아직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그의 복근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성유리가 아직도 방에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성유리는 박한빈의 눈을 피하며 여전히 단추를 잠그려 애쓰고 있었다.“내일이 바로 유정이가 퇴원하는 날이야.”박한빈이 성유리의 곁을 지나며 말했다.“퇴원 절차를 밟아주고 집에 데려와 줘. 어머님께는 한동안 여기에 머물게 할 거라고 말씀드렸어.”성유리는 단추를 만지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나서 뒤돌아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지금 성유리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2년째 부부로 지내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자, 금성 지화 그룹의 후계자 박한빈이었다.그리고 방금 그가 말한 성유정은 성유리와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이었다.다섯 살 때, 성유리는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었고 그렇게 16년 가까이 실종됐었다. 열여섯이 되어서야 성씨 가문에 돌아왔을 때, 성씨 가문에는 이미 또 다른 딸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성유정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동생’이 되었다.아버지는 성유리가 실종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윤청하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육원에서 비슷한 나이대인 성유정을 입양했었다. 16년이 지나고 성유리가 다시 성씨 집안에 돌아오고 서로를 그리워했던 한 가족이 다시 상봉하게 되었지만, 그 후의 날들은 예상만큼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원유진은 성유정의 오랜 친구이자, 재벌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성유정과 함께 자라며 박한빈과 성유정의 관계를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랐던 사람 중 하나였다.하지만 성유리가 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한 현실이었기에 원유진은 성유리에게 결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성유리가 문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당황하거나 민망한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오히려 성유정이 먼저 말을 돌렸다.“언니, 왔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데리러 왔어. 짐은 다 챙긴 거지?”“다 챙겼어. 이제 출발하면 될 것 같아.”성유정은 평소처럼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원유진은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다. 그녀는 참지 않고 존댓말까지 해가며 비아냥거렸다.“사모님, 박 대표님은 어디 계신가요? 유정이가 퇴원하는데 설마 안 오셨어요?”“출근했어. 바쁜가 봐...”“정말 바쁜 거 맞아? 아니면 누군가가 바가지를 긁어대서 오고 싶어도 못 온 건 아닐지 모르겠네.”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유진아, 그만해.”그러나 원유진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뭘 그만해? 듣고 양심에 찔리기라도 했을까 봐?”성유리는 원유진을 가볍게 무시하고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박한빈의 번호를 찾아 원유진에게 내밀었다.“뭐 하는 거야?”성유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야! 너...”원유진이 화를 내려고 하자, 성유정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언니랑 싸우지 마.”원유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넌 정말 착한 거니? 아니면 바보인 거니? 성유리는 네 것을 탐내고 채간 사람이야!”성유리는 원유진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정의 짐을 들어 앞장서서 병실에서 나갔다.차에 타자마자 윤청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리야, 유정이 데리러 갔어?”친딸과의 통화였지만 윤청하의 목소리와 말투는 어색했다.“네.”“유정이는 좀 어때?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규
저녁 7시가 되자마자, 박한빈이 집으로 돌아왔다.성유정은 거실에 있다가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오빠, 이제 퇴근한 거야?”박한빈은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의 외투를 받아들이고 조용히 말했다.“저녁 식사 준비됐어.”식사 중에 성유정은 먼저 조심스럽게 성유리를 한번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오빠,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언니랑 오빠를 불편하게 하는 거라면... 사실 엄마한테도 혼자 있을 수 있다고 얘기했었거든... 그런데도 엄마가 걱정된다고...”박한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편하게 지내면 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정말? 여기서 지내는 게 민폐가 되는 건 아니겠지?”“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정 씨가 여기 계시면 저희도 좋아요.”숙자 아주머니가 식탁에 음식을 올리며 말했다.“오랜만에 집이 북적여서 정말 좋네요!”그 말을 들은 성유리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성유리는 조용하고 내성적이라 성유정처럼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데에는 서툴렀다.숙자 아주머니뿐만 아니라, 성유리는 박한빈이 집에서 오늘처럼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은 성유리는 서둘러 밥을 마저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난 먼저 올라가 볼게. 천천히 식사해.”“언니, 이거밖에 안 먹어?”성유정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내가 같이 올라가 줄까?”“괜찮아.”성유리는 성유정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말했다.“천천히 먹어. 나는 괜찮아.”그 말만을 남기고 성유리는 식탁에서 멀어졌다. 다이닝룸을 벗어나기 전, 성유정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언니... 화난 것 같지 않아? 내가 와서 두 사람을 방해한 거야?”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서운함과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성유리는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이 없었다. 박
성유리는 순간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 팔에 힘을 주어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더 세게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행동은 여전히 거칠고 이기적이었다.성유리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밖에 있는 성유정을 떠올리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샤워기의 물소리 때문인지 문밖에 있던 성유정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큰 소리로 말했다.“오빠? 샤워 중이야?”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노려보았다.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평소와 달리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평소의 조용하고 무기력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앙큼한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후끈 달아올라 다시 그녀를 밀어붙였다. 마치 그 안에 쌓인 감정을 풀어내듯,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두 사람의 몸은 완벽하게 맞물렸고 성유리는 절정에 달아올라 숨이 멎을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문밖에서 성유정은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박한빈이 다시 그녀를 벽 쪽에 밀어붙였을 때, 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그러자 문밖에서 들리던 성유정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그제야 성유리는 상황을 깨닫고 손을 꽉 쥐었다.바로 그때, 박한빈이 그녀를 들어 올렸고 그의 어깨가 성유리의 입술 가까이 다가왔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마음속에 억울함과 원망이 가득했지만, 있는 힘껏 물지는 못하고 가볍게 입을 대었다가 떼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자,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그렇게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숙자 아주머니가 그녀를 깨우며 말했다.“오늘은 본가에 가는 날이
성유정은 박한빈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였다. 그래서 박씨 가문의 본가에 대해선 성유리처럼 어색해하거나 낯설어하지 않았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김난희에게 다가갔다.“할머니!”“아이고! 우리 유정이가 왔구나!”김난희는 매우 기뻐하며 성유정을 반겼다.“얼굴은 왜 또 야위었어?”“아니에요...”성유정은 웃으며 말했다.“이것 좀 보세요. 할머니 드시라고 제가 게살 완자를 만들어 왔어요.”“유정이는 어쩜 이렇게 착해? 정말 마음이 예쁘구나!”두 사람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와 손녀처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김난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그러나 성유리가 다가오자, 김난희의 표정은 조금 굳어졌다.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중하게 인사했다.“할머니.”김난희는 성유리를 보고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는 눈을 돌려 계단 위에 서 있던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어머님...”“아줌마, 잘 지내셨어요...”김서영이 나타나자, 원래 김난희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성유정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비쳤다.“유정 씨도 왔네. 환영해.”김서영은 그녀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반가움도 비치지 않았다.김서영은 김난희를 향해 인사했다.“어머님, 오늘 컨디션은 괜찮으세요?”김난희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김서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성유정이 가져온 음식을 슬쩍 본 후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어머님은 요즘 소화가 잘 안되셔서 기름진 음식은 피해야 할 것 같네요.”그렇게 말하고 나서 김서영은 김난희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바로 지시했다.“정식 씨, 이 음식을 주방으로 가져가세요.”김서영은 성유정의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성유정이 주위의 호감을 쉽게 사는 재주가 있었지만, 김서영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김서영은 항상 차가운 모습을 유지했고 사람을 대하는 데도 격식을 차리고 일정한 거리
박한빈은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본가에 도착했다. 김난희는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미소 번진 얼굴로 그를 맞이하며 손을 잡고 안부를 물었다.“얼굴 좀 봐! 또 살이 빠졌네...”김난희는 약간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결혼 전보다 더 말라 보이잖아. 네 아내는 대체 집구석에서 뭐 하는 거야?”그 말은 성유리를 겨냥한 것이었다.성유리가 대답할 틈도 없이, 성유정이 나서서 말했다.“할머니, 언니를 오해하지 마세요. 언니는 정말 바쁜 사람이에요. 곧 새 만화가 출간된다고 하더라고요. 언니도 마음이 아플 정도로 많이 야위었더라고요.”성유정은 성유리를 변호하는 듯 말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왠지 모르게 불편하게 들렸다. 그녀의 가시가 돋친 말은 성유리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김난희는 성유정의 말을 듣고 더욱 불만스러워졌다.“만화라니? 또 그 하찮은 것들 하는 거야? 너는 애가 어쩜 그렇게...”김난희가 계속 잔소리하려는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저녁 준비는 다 됐나요?”“한빈아, 너...”김서영이 곧바로 끼어들었다.“어머님, 한빈이는 이제 다 컸으니 자기 관리도 잘 할 거예요.”그 말에 김난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불만들을 삼켰다. 그러고는 성유정을 보며 말했다.“우리 유정이는 착하고 자기 사람도 잘 챙기고... 쟤가 다시 돌아오지만 않았었어도...”김난희도 아차 싶었던지 말끝을 흐렸다. 김서영은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넘겼다.“유리야, 부모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니?”“네. 아직이요.”“유정 씨가 너희 집에서 오래 머무는 것도 불편할 테니, 이참에 아예 본가에서 머물게 하는 게 어떨까? 유정 씨도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잖아.”김서영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저는...”그러나 김서영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게다가 내가 요즘 괜찮은 청년 몇 명을 알아봤거든. 편한 시간 알려주면 한번 만나봐도 좋을 것 같아.”“그건 너무 이른
“오빠, 아까 도와줘서 고마웠어.”돌아가는 길에, 성유정은 뒷좌석에 앉아 계속 말을 이어갔다.“엄마가 내 결혼 이야기를 아줌마한테 꺼낼 줄은 정말 몰랐어. 정말 깜짝 놀랐잖아. 오빠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난 어쩔 줄 몰랐을 거야. 난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됐거든.”박한빈은 운전대를 잡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은 조금 무심해 보였지만, 성유정은 박한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성유리에게 말을 걸었다.“아참! 언니, 아까 아줌마랑 위층으로 올라가서 무슨 얘기 했어?”“별 얘기 아니야.”성유리는 마치 대화 자체를 피하고 싶은 듯 단호하게 답했다. 성유정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래... 그렇구나. 언니, 그거 알아? 무열 오빠가 곧 귀국한대.”그 말에 성유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마침 그 순간,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박한빈은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성유리는 앞으로 쏠리며 흠칫 놀란 듯해 보였다. 다행히도 안전벨트가 잡아주어 등이 다시 카시트에 닿게 되었다.박한빈은 곁눈질로 그녀를 한번 보았다.성유정은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말로는 무열 오빠도 해외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대. 두 사람은 그동안 연락은 안 했어?”“안 했어.”성유리는 눈을 내리깔고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참 안타깝네. 한때 서로의 전부였는데...”성유정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이번에는 박한빈을 힐끔 보았다.“오빠는 기억 못 하겠지? 무열 오빠는...”“알아. 진씨 집안의 혼외자잖아.”이번에는 박한빈이 빠르게 대답했다. 박한빈은 ‘혼외자’라는 단어를 쓰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성유리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성유정도 잠시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 진씨 집안의... 그 아들... 예전에는 언니랑 같은 학교에 다니는 절친이었지. 우리랑도 참 잘 지냈었는데... 나중에 말도 없이 해외로
성유리는 여전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무감각해졌으리라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 또다시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고통이 서서히 퍼져 나오고 있었다.마치 무언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녀를 갉아먹고 있는 듯했다.그 순간, 성유리는 오래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바로 그녀가 성씨 가문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성유리는 그날도 비가 내렸다는 것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직접 학교로 와서 그녀와 성유정을 데리고 돌아가던 하굣길이었다.그날, 세 사람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교통사고를 겪었었다. 사고는 심각하지 않았지만, 운전기사의 운전 미숙으로 차가 갓길보호대를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었다.성유리는 머리를 창문에 부딪히고 의식을 잃어가면서 어머니가 자신을 지나쳐 성유정에게 가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었다.어머니는 성유정을 안고 울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었다.그때 성유리는 부모님이 자신을 찾은 이유는 단지 그녀가 그들의 피를 물려받은 자식이기 때문일 뿐,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는 건 성유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성유정이야말로 그들의 ‘진짜 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성유리는 그때부터 자기가 두 눈으로 목격했던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했다. 떠올리기만 해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 그 기억이 다시 떠오르고 말았다. 지금 어머니 대신 성유정을 안고 있는 사람은 그녀의 남편 박한빈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성유리는 그렇게 덩그러니 차에 남아있었다.그러다 차에서 내렸을 때,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성유리는 발걸음을 서둘렀지만, 박한빈이 차를 세운 곳이 집과 꽤 거리가 있어서 흠뻑 젖고 말았다.집 앞에서 올려다보니 성유정의 방과 박한빈의 서재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박한빈은 내가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을 거야. 아니 관심조차 없겠지...’성유리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가운데에 있어야 할 벽이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안방과 서재가 하나로 합쳐져 있었고 그 덕에 작은 방과 거실이 넓어졌다.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성하늘은 성유리에게 안기자마자 그녀의 어깨 위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다. 아이는 지금 자신이 어디로 와 있는지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침구는 다 깨끗한데, 더 필요한 거 있어?”방 문 앞에 서 있던 박한빈이 물었다.“필요 없어요, 고마워요.”“너... 씻고 나서 잠옷으로 갈아입을 거야?”박한빈의 말에 성유리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반응에 박한빈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미안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그럼... 잘 자. 나는 앞방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불러.”말을 마친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뒤를 곧바로 따라나섰다.그때까지만 해도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건 줄로 알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성유리는 매정하게 방 문을 닫았다.뒤이어 문을 잠그는 듯한 소리까지 들려왔다.박한빈은 걸음을 멈추고 참았던 웃음을 피식 터뜨렸다.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성유리는 여전히 순진하기 그지없었다.아무리 문을 잠근다고 해도 이곳은 박한빈의 집이었고, 집주인인 그에게 스페어 키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박한빈 역시 성유리에게 허튼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지금이 적절한 때가 아닌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지금 이대로도 박한빈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수없이 박한빈은 거부했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엄청난 진전이나 다름없었으니까.박한빈은 계속 걸음을 옮겨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서재의 컴퓨터 책상 위에는 수많은 자료들이 쌓여 있었지만 박한빈은 그 자료들을 확인해 볼 의지도 없다는 듯 곧바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그날 밤, 박한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은 잠에 들었다.쓸데없는 꿈을 꾸지도 않았고,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았다.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CCTV는 내가 설치한 거야.”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재빨리 말했다.“저걸 설치한 이유는 너희의 안전을 위해서야. 오늘 밤처럼, 내가 없었으면...”“대표님이 굳이 이사 안 왔으면 저 사람이 우리 모녀의 삶에 등장하는 일도 없었겠죠.”성유리가 그의 말을 끊고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이 잠시 멍해지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야? 설마 이것도 내 잘못이라는 거야?”“그럼 아니에요?”성유리가 되물었다.“저 사람, 대표님이 부른 사람들이잖아요.”“난 그냥 이삿짐센터를 불렀을 뿐이야. 거기서 어떤 사람을 보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대표님이었잖아요. 대표님만 굳이 이사 안 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걸요.”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무슨 일이 생기든 모든 책임을 다 박한빈에게 떠넘기려 하고 있었고 박한빈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아무리 반박하고 변명해보려 해도 아무 소용없었다.성유리도 더는 박한빈은 신경 쓰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하지만 성유리가 뒤늦게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전선이 여전히 끊긴 상태가 집 안은 여전히 칠흑같이 어두웠다는 점이다.성유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결국, 그녀는 성하늘을 안고 다시 밖으로 나와야 했다.박한빈은 여전히 앞집 문 앞에 서 있었다.그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이 모든 일을 예상했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조금 전과는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치 성유리가 곤란해지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이 시간에 업체 부르긴 힘들 거야.”박한빈이 말했다.성유리는 그의 말에 아무 대꾸로 하지 않은 채 성하늘을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이미 한 시간 동안이나 시달리며 잘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탓에 성하늘의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이는 한 손으로 성유리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눈을 비비적대고 있었다.“이 늦은 시간에 애 데리고 어딜 가려는
그 광경에 성유리의 낯빛이 곧바로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재빨리 다가가 박한빈의 손에 들려있던 열쇠를 빼앗듯 가져갔다.“너...”성유리는 설마 훔친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곧장 입을 열었다.“아까 네가 밖에서 물건 꺼내다가 떨어뜨린 거야. 그걸 내가 주운 거고.”“그럼 왜 진작 안 줬는데요?”“네가 말할 틈을 안 줬잖아.”박한빈은 조금 억울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게다가 애가 그렇게 급하다는데, 병이라도 나면 안 되잖아.”박한빈의 말은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들렸다.잠시 할 말을 잃은 성유리는 가만히 박한빈을 노려보다가 성하늘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주스... 안 마실 거야?”박한빈이 뒤에서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단 한 번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박한빈이 일부러 이런 짓을 한다는 것쯤은 성유리도 눈치챘다. 그런 게 아니었다면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열쇠부터 건넸을 것이다.이런저런 생각에 열이 올랐던 건지 문을 닫던 성유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런 엄마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성하늘이 조심스레 물었다.“혹시 하늘이가 잘못한 거야?”이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유리가 다급히 사과했다.“아니야, 그런 거. 엄마가 실수로 문을 너무 세게 닫아서 그래. 엄마 화 안 났어.”성하늘은 그렇게 성유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 일로 성유리는 집까지 찾아와 준 업체 직원에게 오랫동안 상황 설명을 해줘야 했고, 먼 길 달려온 그에게 교통비까지 물어주고 나서야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그렇게 박한빈을 향한 성유리의 원망이 한층 더 추가됐다.그때까지만 해도 성유리는 그저 지나가면 끝일 작은 해프닝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자기 전, 샤워를 준비하던 그때, 머리 위에서 전등이 갑자기 깜빡이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집안 전체가 어둠에 휩싸여 버렸다.침대 위에서 놀고 있던 성하늘 역시 깜짝 놀
“잠깐만요.”엘리베이터 문밖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왔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성유리도 곧바로 열림 버튼을 눌러줬을 터였다.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여느 때와 달리 고개를 푹 숙인 채 미친 듯이 닫힘 버튼만 연속으로 눌러대고 있었다.그런데도 엘리베이터 밖의 사람보다 한발 늦고 말았다. 문이 천천히 닫히려던 그 순간, 남자가 닫히려는 문을 손으로 잡았던 탓이다.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렸다.성유리의 입술은 열려버린 엘리베이터 문과는 반대로 꽉 다물어졌다.남자는 분명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왔음에도 성유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성유리는 그런 남자의 인사에도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성하늘을 데리고 옆으로 물러섰다.그녀는 마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남자를 무서운 바이러스라도 되는 양 취급하며 최대한 그와 멀어지려 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런 모녀를 보면서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점점 올라가는 숫자판만 바라보고 있었다.곧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성유리와 성하늘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현관 앞으로 도착한 성유리는 열쇠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적였다.그녀는 그제야 뒤늦게 자신의 열쇠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어.”성하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는 대충 아이의 말에 대답해준 후 더욱 다급한 손길로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찾아보아도 가방 안에 있어야 할 그 열쇠들이 보이지 않았다.“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다니까.”시간이 꽤 걸리자 성하늘의 목소리도 더욱 다급해져 더 끌었다가는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들렸다.성유리가 아이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려던 그때, 모녀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집에서 해결할래?”그 소리에 가방을 뒤적이던 성유리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췄지만 아이는 여전히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박한빈은 더 고민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성하늘을 안아 들어 자신의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성유리는 다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이게 지금 무슨 짓
서훈은 박한빈의 비서실장으로서 평소 박한빈과 거의 붙어 다니는 사이였다. 그런 서훈을 시켜 짐을 옮기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는 뻔할 뻔 자였다.역시 예상했던 대로 성유리는 집 안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셔츠 하나만 걸친 채 소매를 걷어 올린 남자의 소매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다.그의 머리카락은 어느 정도 흐트러져 있었지만 오히려 그 허술함이 남자의 생기를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성유리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그 상태로 한참이나 성유리와 눈을 마주치다가 입을 열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우연이라니?성유리는 당장이라도 박한빈의 얼굴이 뭔가를 집어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이런 상황을 보고도 박한빈의 말을 믿을 사람은 바보가 아닌 이상 존재할 리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은 더 상대하지도 않은 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성하늘 역시 당연하게도 박한빈을 알아보았다.아이는 유심히 박한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순간, 성하늘은 곧장 성유리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엄마,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나도 몰라.”성유리의 대답은 아이의 마음에 드는 대답이 아니었다. 성하늘은 곧장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난 저 사람 진짜 싫어. 자꾸 거머리처럼 달라붙잖아.”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곧장 휴대폰을 꺼내 근처의 임대 정보를 확인하며 이사 갈 만한 집이 있는지 찾아보았다.이사가 번거롭긴 했지만 이미 이 동네에 익숙해진 성유리에게는 별 큰 문제도 아니었다.적어도 그녀는 자신만 이사하면 박한빈이 계속 따라붙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마음에 드는 집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오전 시간이 다 지나도록 웹사이트는 찾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집이 없었다. 집 창문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구조가 너무 별로였고, 동네가 너무 낡았다.무엇보다 성하늘이 이미 이곳에서 사귄 친구
하지만 진행자는 여전히 그 화제에서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관련 질문이 나올 때마다 성유리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부정하며 다른 억측들까지 차단해 버렸다.처음부터 끝까지 성유리는 단 한 번도 박한빈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성유리가 비협조적이라고 느껴졌던 탓인지 1시간으로 예정되어 있던 인터뷰는 30분도 진행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버렸다.인터뷰가 끝난 뒤, 성유리는 송효주에게서 사과의 메시지를 받았다.“나도 저쪽에서 이런 의도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어. 저 사람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지금 주인공들 인기가 어느 정도인데, 캐릭터 얘기나 할 것이지 왜 네 사생활까지 다 언급하고 난리래?”송효주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런 송효주의 연락에도 아무런 감흥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한참이나 말을 이어나가던 송효주는 아무 대답 없는 성유리의 반응에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혹시... 화 난 거야?”“두 번 다시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네.”그 말을 끝으로 성유리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일을 마친 그녀는 다시 불을 끄고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 화가 나는 것도 맞긴 했지만 그렇다고 오래 기억될 정도도 아니었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그녀는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거의 다 까먹어 버렸고 뒤늦게 뉴스를 통해 자신이 어제 진행했던 라이브 방송의 채널이 정지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정지된 그 채널은 무려 출판사의 공식 계정이었다.곧 출판사에서도 다른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는 전날 진행했던 인터뷰의 진행자가 사적인 감정으로 무례한 행동을 감행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과, 어제 인터뷰를 진행했던 그 진행자와는 계약을 해지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성유리는 어젯밤 진행했던 인터뷰 질문이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그녀는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식사를 이어나갔다.잠시 후, 앞집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어젯밤보다는 훨씬 조용하
두 팬덤의 싸움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지만 제작사와 영상 플랫폼 측은 오히려 그런 팬덤 싸움을 반기는 모양이었다.요즘은 다들 그렇듯 차라리 시끄럽게 이슈가 되는 게 조용히 묻히기보다는 수익성이 더 크니 그럴 만도 했다.그러던 중, 편집자가 성유리에게 연락해 원고를 요청해왔다.최근 두 달 동안 성유리는 딱히 새로운 작품을 낸다기보다는 이런저런 곳에서 들어오는 작은 일만 맡아왔다. 하지만 이번 드라마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만큼, 회사에서는 이 틈을 타 성유리를 한껏 밀어줄 계획이었다.“요즘은 시간도 없고 딱히 떠오르는 아이디어도 없어. 나중에 다시 얘기해.”“난 이 말만 벌써 몇 번째 듣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나도 알아. 그런데 어쩌겠어, 하늘이도 아직 어리고. 그렇다고 이 어린 애가 하루아침에 커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알겠어, 신작은 없다 치고, 인터뷰나 하나 잡아줄게. 이 정도는 괜찮지?”“무슨 인터뷰인데?”“웹에서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인터뷰야. 전에 우리랑 협업한 적 있는 출판사인데, 드라마가 인기를 끄니까 원작자라도 인터뷰해서 판매량 좀 올릴 생각인가 봐.”성유리는 대충 들어주는 척만 하고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성유리의 생각을 미리 읽기라도 한 것인지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걱정 마. 언니만의 원칙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언니 얼굴이 세상에 공개되는 일은 없을 거야. 이번 인터뷰도 굳이 얼굴을 노출할 필요는 없어.”그 말에 성유리는 뒤늦게 마음을 누그러뜨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오케이, 그럼 답장 보내둔다? 구체적인 시간은 내가 나중에 다시 연락해서 알려줄게.”편집자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만 성유리도 하늘이의 생체 리듬을 지켜주며 일을 해야 했던 탓에 인터뷰 시간은 밤 11시로 정해두고 아이가 완전히 잠든 후에야 인터뷰를 진행했다.성유리는 진행자가 단순히 드라마의 구상이나 여자 주인공의 성장 과정에 대한 질문만 할 것이라 예상
점심시간이 다 되었지만 앞집에서는 계속 이삿짐을 옮기고 있었다.성유리는 현관문을 꼭 잠가두었지만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꽤 시끄러웠고, 새로운 입주자는 집을 다시 리모델링이라도 하는지 짐 옮기는 소리와 공사 소리까지 계속해서 들려왔다.피곤했던 성하늘도 소음 때문에 침대에서 한참이나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성유리는 그런 성하늘의 곁에 누워 아이의 등을 살살 두드려주었다.성하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성유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그래서, 뭘 하고 싶은데?”“잠이 안 와.”“눈 감고 가만히 있으면 잠이 올 거야.”성유리의 말에 성하늘은 순순히 눈을 감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말했다.“엄마, 그래도 잠이 안 와.”“그럼 뭘 하고 싶은데?”“그림도 그리고 싶고, 책도 보고 싶어.”“그러니까, 자기 싫다는 뜻이네?”그 말에 성하늘은 민망한 듯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성유리가 무슨 말을 더 꺼내려던 그때,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싫다며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던 성하늘은 바로 성유리의 품에 파고들어 그녀의 팔을 꽉 껴안은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그런 아이의 반응에 성유리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의 손등을 살살 두드려주었다.“괜찮아, 엄마가 나가서 확인해 볼게.”“안돼, 엄마. 나가지 마.”성하늘은 그런 성유리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품에 안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그녀는 현관문 앞까지 가 스코프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복도에서는 여전히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바쁘게 짐을 옮기고 있었다.한 건장한 남자가 문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어린 딸과 단둘이 살다 보니 성유리의 경계심은 자연스레 높아져 있었다. 그녀는 현관문을 꼭 잠근 채 큰 소리로 물어보았다.“무슨 일이시죠?”“저희 대표님께서 이삿짐 때문에 시끄럽게 해드려서 죄송하다고, 케이크라도 드리고 싶다
“그렇긴 하죠. 노인 네 명에 어린애 둘 딸린 집인데 부부 중 한 명은 해고당하고 다른 한 명은 월급이 깎였다잖아요. 집 안 팔면 못 살죠.”“그러게요. 그러니까 직장을 들어가도 대기업으로 들어가라고 하잖아요. 대우도 좋고 안정적이니까!”“맞아요, 맞아.”“맞다, 하늘이 엄마. 그 친구분... 은 회사 운영하시죠? 요즘 어떻게 지낸대요?”성유리는 곁에서 그녀들의 대화를 한참이나 듣고 있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수다 화제가 성유리로 바뀔 때, 그녀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은 생각만 들었다.성유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되물었다.“어떤 친구요?”“그냥...”“하늘이 아빠요!”곁에 있던 누군가가 마침내 적절한 표현을 찾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하지만 곧이어 후회가 들었는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그 사람... 하늘이 아빠 맞죠?”“그 사람 일이라면 저도 잘 몰라요.”성유리의 대답은 단호했다.“이혼한 지도 꽤 됐고, 연락도 거의 안 하고 지내니까요.”“그래요? 그렇다고 하기엔... 꽤 자주 오는 것 같던데요? 혹시 모르죠, 그분이 아직도 유리 씨한테 관심이 있을지.”“제가 보기엔 두 분 꽤 어울리는 것 같던데요! 저희 시어머니도 그러셨어요. 하늘이가 예쁜 건 다 하늘이 부모님이 예쁘고 잘생겨서라고요!”“저희는 더 이상 부부가 아니에요.”성유리가 대답했다.얼핏 듣기엔 평범했지만 그녀의 말투에는 분명 약간의 경고가 담겨 있었다.갑자기 날카로워진 성유리의 말투에 시끄럽게 수다를 떨던 엄마들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이윽고 성유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저는 애 밥 차려줘야 해서요, 먼저 가 볼게요.”“저... 저기, 하늘이 엄마. 다음에 그 친구분 또 오시면 저한테도 얘기 좀 해줄래요? 우리 남편이 할 얘기가 했다고 그래서...”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걸음을 이어나갔다.하늘이도 충분히 놀았는지 성유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얌전히 그녀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