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은 어젯밤 발코니에서 보았던 하늘이가 연정우와 인사하며 웃는 모습을 떠올렸다. 솔직히 그 장면은 너무나도 조화로워 보였고 마치 진짜 가족처럼 느껴졌다.그리고 박한빈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하늘이가 먼저 박한빈에게 말을 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하지만 아이가 한 말은 다름 아닌 자신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박한빈은 차마 하늘이에게 내가 내 집에 왜 있으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순진무구한 하늘이의 눈을 마주친 순간 모든 생각을 접었고 짧게 대답해 줬다.“그래.”그의 대답은 단호했지만 하늘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성유리를 찾았다.박한빈은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가슴 한구석이 무겁고 아픈 감각이 점점 더 선명해질 때쯤 그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거실에는 김서영이 이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박한빈을 발견한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빨리 와서 아침 먹어라.”“괜찮아요."박한빈은 대답하며 집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저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갈게요.”“그래도 아침은 먹고 가야지...”김서영이 박한빈에게 말을 더 붙이려 했지만 박한빈은 이미 집 문을 나섰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하려던 말을 삼키며 식당 쪽을 돌아보았다.성유리와 하늘이는 그곳에 있었다.어젯밤 박한빈에게 주어진 기회는 이미 지나갔고 오늘 아침 함께 식탁에 앉을 드문 기회조차 그는 놓쳐버렸다.김서영은 속이 상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어 한숨만 내쉬며 식당으로 들어갔다.“한빈이는 먼저 나갔어.”김서영의 말에도 성유리는 고개만 숙인 채 하늘이에게 삶은 달걀 껍질을 까주고 있었다.그녀의 말이 몇 초간 허공을 맴돌았고 성유리는 뒤늦게 그 말을 이해한 듯 고개를 들어 김서영을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마치 자신에게 한 말이 맞는지를 묻는 듯했다.그 눈빛을 본 김서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고 그제야 성유리가 어색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그래요?”김서영은 답답한 듯 한숨을 푹
그로부터 며칠 동안 성유리는 박한빈을 다시 볼 수 없었다.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도 박한빈이 이곳에 자주 오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었으니까.그 안희연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사하나가 성유리에게 알려주었다.“전에 인터넷 방송하던 사람이래요. 지금도 스트리머로 활동 중인 것 같고요.”사하나는 말하며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눈에 인터넷 방송은 그다지 품격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특히 안염처럼 외모가 괜찮은 여자는 더더욱.사하나는 성유리에게 안희연이 진행했던 방송 영상을 보여주었다.화면 속의 안희연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카메라 앞에서 웃으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은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그게 다예요?"그러자 사하나는 눈을 부릅뜨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아무 의견도 없어요?"“내가 무슨 의견을 말해야 되는데?"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의아해하며 되물었다.“음... 예쁘긴 하네.”“그거 다 필터예요! 그리고 얼굴에 화장 얼마나 두껍게 발랐는지 안 보여요?”“그래도 이 업계가 원래 그런 거 아니야?”“그렇긴 해요. 그런데 이번엔 박한빈 씨 취향이 진짜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어떻게 이런 수준인 여자랑 만날 수 있죠? 눈이 이렇게 낮아졌나?”성유리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냥 둘이 좋으면 된 거지. 네가 왜 이렇게 신경 써?"“그냥 보기 불편해서 그래요.”사하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금세 화제를 돌렸다.“언니는요? 요즘 연정우 씨랑 만난 적 있어요?”“아니."“왜요? 그 사람이 언니한테 연락 안 했어요?”“그런 건 아닌데 그냥 내가 만나고 싶지 않아.”“왜요? 저는 연정우 씨 참 괜찮은 사람 같던데. 두 사람 옛날에 결혼까지 거의 갈 뻔했잖아요. 지금 다시 잘될 기회가 생긴 거면 좋은 거 아닌가요?”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건 다 지나간 일이야. 지금은 그런 거 생각하고 싶지 않아.”“좋
성유리는 사하나의 마지막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사실 유효정의 집안이 몰락한 이유가 누구 때문인지 성유리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이제 와서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하늘이가 회전목마에서 내려오자 둘은 함께 그곳을 나왔다.아이는 너무 신나게 놀아 얼굴에 땀이 잔뜩 맺혀 있었다.성유리가 하늘이의 땀을 닦아주기 위해 몸을 숙이려는 순간, 옆에 있던 사하나가 갑자기 손을 뻗어 성유리의 팔을 꽉 잡았다.너무 갑작스러운 사하나의 행동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는 한편 잡혀있는 팔이 너무 아팠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사하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성유리의 손을 잡은 채 앞쪽을 가리켰다.“언니, 저기 빨리 봐요! 저 사람 누구예요?"사하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었고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키지도 않았다.성유리는 대체 사하나가 왜 이러는지 궁금해 그녀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았다.현재 그들은 쇼핑몰에 있었고 방학 기간이라 오고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그렇기에 성유리는 사하나가 말한 사람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채지 못했다.사하나는 그런 성유리가 답답한 듯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언니 바로 앞에. 브랜드 매장 들어가려는 여자 말이에요!"성유리는 이날 안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멀리 있는 사람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다행히 매장 조명이 밝았고 그 여자의 검은 웨이브 머리가 눈에 띄었기에 뒤늦게 그녀가 누군지 알아챘다.그 여자는 다름 아닌 박한빈의 새 여자 친구, 안희연이었다.“봤어. 근데 그래서?"성유리가 물었다.“언니 진짜 둔하네요. 안희연 씨 옆에 있는 남자는 못 보셨어요?”성유리는 안희연을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기 때문에 옆에 있는 남자를 볼 여유는 없었다.안희연과 남자는 이미 매장 안으로 들어갔으니 사하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성유리를 끌고 같은 매장으로 향했다.“우리는 왜 들어가?”성유리는 사하나의 의도를 눈치채 재빨리 물었고 사하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당연히 확인해야죠! 둘이 무슨 관계인지 말이
“근데 이모는 왜 웃는 거야?"“갑자기 재밌는 일이 떠올라서 그래.”“맞아. 나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사하나는 성유리의 말에 따라 멋쩍게 웃어 보이더니 계속 말했다.“가자. 하늘이, 이모가 집에 데려다줄게."“음...”하늘이는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아이에게 진짜 이유를 설명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그래서 아이 또한 더 이상 캐묻지 않았고 사하나는 직접 차를 몰아 그들을 엔젤 월드로 데려다주었다.가는 길 내내 사하나의 기분은 최고조였다. 핸들을 잡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금 당장이라도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어 호텔에서 불륜을 적발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샘솟았다.하지만 그녀는 꾹 참았다.단순히 박한빈 혼자서만 불륜 현장을 적발해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사하나는 이 사실을 모임 사람들에게도 알려 박한빈의 체면이 바닥까지 떨어지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제발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마.”뒷좌석에서 앉아 있던 성유리가 차분히 말했다.그러자 사하나는 멈칫하며 되물었다.“제가 뭘요?”성유리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어쨌든 그건 남의 일이야. 괜히 끼어들지 마.”사하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성유리의 말에 대꾸했다.“그 말이 참 어이없네요. 제가 이 일을 박한빈 씨한테 말하면 그 사람은 저한테 고맙다고 해야 돼요. 제가 아니었으면 평생 속고만 살았을 거잖아요.” “하지만 제가 굳이 먼저 말할 필요는 없죠. 지금 사람들 눈에는 박한빈 씨가 완전 호구로 보일 테니까요. 그게 바로 자업자득 아니겠어요?”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한빈이 호구인지 아닌지 그것은 그녀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사하나는 혀를 끌끌 차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진짜 자업자득이죠. 지금 박한빈 씨 주변에 있는 여자들 중에 그 사람 돈이나 지위를 노리지 않는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솔직히 이 세상엔 언니 같은 사람은 없을...”말을 이어가던 사하나는 갑자기 뚝 멈췄고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
성유리의 대답을 들은 후, 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엔젤 월드를 떠났다.그가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마침 그곳에 서 있는 사하나와 딱 마주쳤다.성유리와의 관계 때문에 사하나는 박한빈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비록 사하나가 처한 위치에서는 박한빈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사하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마음이 없다 못해 겉으로 좋은 척, 마음에 드는 척조차 하지 않을 정도였다.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사하나는 박한빈을 보자마자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는 손까지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박 대표님, 안녕하세요?”박한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그리고는 바로 자신의 차에 오르려고 했다.그러나 사하나가 그를 그냥 보내줄 리 없었다.안희연의 일로 큰 한방을 터뜨리고 싶었던 사하나였지만 생각해 보면 성유리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겉으로 보면 사하나와 박한빈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이였다.그가 어떤 일을 당하든 그것은 다 사하나와 무관했다.그러나 만약 사하나가 일을 크게 만들면 박한빈은 분명 성유리와 연결 지어 생각할 것이고 어쩌면 그녀가 성유리를 통해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다.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넘어가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박한빈이 차에 타려는 순간, 사하나는 서둘러 그를 따라가며 말을 걸었다.“박 대표님, 제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새 여자 친구가 생기셨다면서요? 팬이 많다는 그 인플루언서 맞죠?”그 말을 들은 박한빈은 발걸음을 뚝 멈추고 사하나를 뒤돌아보았다.사하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의문과 함께 묘한 기대감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그녀는 그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하려던 말을 멈추지 않았다.“대표님과 안희연 씨 관계는 요즘 어떠신가요?”“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바로 하세요.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박한빈은 손목시계를 힐끗 보며 대답했고 그의 불쾌함은 행동과
그의 행동은 매우 빨랐다.어찌나 빠른지 사하나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받으려던 순간 손가락이 박한빈의 차 문에 끼일 뻔했다.그러나 박한빈은 사과 한마디 없이 운전기사에게 차를 출발시키라고 지시했고 그대로 떠나버렸다.사하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박한빈의 차를 향해 소리쳤다.“박한빈, 너 미쳤어? 감정 조절도 못 하는 미친놈!”“그래! 너 같은 놈이 그런 여자한테 배신당해도 싸지.”박한빈은 사하나의 말을 당연히 듣지 않았다.사실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차에 올라탄 후, 박한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안희연에게 연락하는 것이었다.그러자 안희연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박 대표님.”“오늘 성유리를 만났어?”박한빈은 안희연 앞에서 성유리라는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던 터였다.더군다나 그녀가 금성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모습을 감췄던 터라 성유리라는 이름은 안희연에게 낯설게 들렸다.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박한빈과 관련된 여자를 떠올리며 대상을 짚어낸 후 대답했다.“아뇨. 못 만났는데요.”“오늘 백화점에 갔다며?”“네.”“누구랑 같이 갔지?”안희연은 말이 없었다.그러자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계속 물었다.“안희연, 우리 계약 관계에 대해서 내가 굳이 다시 설명해 줘야 하나?”“그런 거 아니에요. 박 대표님, 제가 다 설명할게요.”박한빈은 지금 그녀의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안희연이 급히 말했다.“그래서 그 성유리라는 분이 박 대표님에게 고자질한 건가요? 그렇다면 박 대표님께 아직 미련이 있다는 뜻 아닌가요?”안희연은 박한빈이라는 사람은 잘 모르지만 남자의 심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난 몇 년간 라이브 방송에서 수많은 남자들을 보아왔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박한빈의 민감한 포인트를 정확히 짚었다.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그러자 안희연이 계속 말했다.“박 대표님, 그 여자가 뭐라고 말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하늘이는 깜짝 놀라 온몸을 성유리 품에 안겼다.아이의 눈은 박한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는 하늘이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성유리를 응시했다.“나와.”그가 입을 열자 하늘이는 성유리의 손을 꼭 붙잡았다.“엄마. 가지 마.”하늘이가 박한빈을 꺼리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진정으로 박한빈을 두려워하는 것이 느껴졌다.하늘이가 성유리를 꼭 붙잡고 있는 손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괜찮아. 엄마가 잠깐 일 보고 올게.”“싫어!"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떼를 부렸다.성유리는 문과 아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박한빈은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는데 그의 굳게 다문 입술과 굳은 표정은 날카롭고 위압적이었다.하늘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성유리의 손을 세게 붙잡았다.결국, 성유리는 옆에 있던 작은 사자 인형을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여기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 금방 올게. 알겠지?”하늘이는 여전히 싫다는 표정을 지었지 문 앞에 서 있는 박한빈을 보며 더 큰 두려움이 생겼는지 마지못해 성유리의 손을 놓았다.“엄마, 빨리 와. 나 무서워.”“알았어. 걱정하지 마.”성유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자 곧바로 뒤돌아섰다.두 사람은 그렇게 2층 거실의 발코니에 나란히 섰고 박한빈이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오늘 어디 갔었어?”성유리는 이 시간에 박한빈이 굳이 이런 식으로 찾아와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잠시 멍하니 서 있던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나 씨랑 백화점 갔어요. 왜요?” “그다음은? 너 나한테 할 말 없어?”박한빈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그의 시선은 성유리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그제야 성유리는 박한빈이 왜 이러는지 깨달았고 그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알게 되셨어요
박한빈은 계속 성유리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추궁하기 시작했다.성유리는 그에게 떠밀리듯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등 뒤로 발코니의 유리문이 닿고 나서야 더는 물러날 곳이 없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생각이 너무 많으신 거 아니에요?”성유리가 계속 말했다.“제가 굳이 말하지 않은 건 그 일이 저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던 박한빈이 뚝 멈췄다.성유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그건 박한빈 씨와 안희연 씨 사이의 문제예요. 제가 관여하거나 평가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박한빈 씨 주변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당신 곁에 있는지는 저와 전혀 상관없고요.”그녀는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이어갔다.“이제 비켜주실래요?”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얼굴에 띠고 있던 모든 표정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 얼굴 어딘가에서 감정의 틈이나 흔적을 찾아내려는 듯 말이다.그러나 성유리에게서 보이는 표정은 아무것도 없었다.성유리는 여전히 담담하게 박한빈과 두 눈을 마주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이 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돌려 그를 지나쳐 나가려 했다.그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팔을 꽉 잡았다.“내가 가도 된다고 말했나?”“이 손 놔요.”성유리의 목소리는 더 이상 차분하지 않았고 어딘가 지친 듯 낮고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그러나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계속 말했다.“내가 왜 놔야 하지? 아이 수술 끝났으니 이제 나랑은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상관없다면 왜 여기 살고 있는데?”그 말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지만 금세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그런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면 제가 죄송해요. 박 대표님.”그러자 박한빈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저와 하늘이가 여기 머무는 건 박한빈 씨 어머니의 부탁 때문이에요.”성유리는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어머니는 하
성유리의 팔목을 잡고 있는 박한빈의 힘은 상당했다.그 고통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아프다는 티도 내지 않고는 박한빈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그거 아세요? 사실 그때 하늘이가 아플 때 제가 제일 먼저 생각한 사람은 바로 박한빈 씨예요.”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박한빈 씨한테 전화를 너무 걸고 싶었는데 용기나 안 났어요.”“왜냐하면 저도 박한빈 씨가 상처받은 걸 잘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나... 제 아이한테 어떤 태도를 보일지 짐작이 안 됐어요.”“나중에야 하나 씨가 그러더라고요. 박한빈 씨가 소개팅까지 하면서 결혼할 준비를 한다고. 게다가 하늘이 상황도 알면서 신경도 안 쓰다고 있다는 말도 저한테 했어요.”“그건 다 오해야!”박한빈이 성유리의 말에 끼어들며 반박했다.“그때 내가 사하나 씨랑 만났을 때 난 그 사람이 현장 일에 대해 말하는 줄 알았어. 나는 절대...”“저도 알아요. 그다음은요?”성유리가 물었다.그러자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물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나중에 저희 상황을 다 알고 나서도 왜... 그렇게 모질게 구셨죠?”“하늘이가 저한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도 아시면서.”“사실 그때 만약 저희가 앉아 대화를 나눴더라면 아마... 다시 잘 될 가능성은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으셨죠.”“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박한빈 씨는 아이를 이용해 저를 협박하고 벼랑 끝까지 내모셨잖아요.”“박한빈 씨가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지 않고 계실 때, 하루하루 창백해져 가는 하늘이의 안색을 지켜만 봐야 하는 제 심정을 당신은 죽을 때까지 모르실 거예요.”“하늘이는 제 몸의 일부이고 제 피부이자 살이에요. 저랑 피를 나눈 아이가 저한테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세요?”성유리는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박한빈을 조롱하듯 물었다.“아니면 혹시 그걸 아시니까 일부러 더 그랬던 건가요?”“박한빈 씨, 전에 저를 어떻게 대하셨던 전 상관이 없었어요. 심지어
박한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본인이 어떤 의도로 말을 꺼냈는지는 박한빈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성유리가 말한 대로 그는 아직 그녀를 용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또한 지금 서로가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안다.하지만 오늘 재밌게 놀았으면 그만 아닌가?박한빈이 오늘 갑자기 같이 놀이공원에 가자는 제안을 한 것도 사실 연정우 때문이었다.그는 성유리 옆에 남아있는 사람이 절대로 연정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오늘 일부로 연정우에게 소심하게나마 “복수”를 한 것이다.성유리 또한 그의 제안을 수락했고 오늘 세 사람은 예상 밖으로 너무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그래서 박한빈은 할 수만 있다면 계속 이렇게 함께 즐겁게 살고 싶었다.그러나 이제 보니 박한빈의 생각은 어린아이처럼 마냥 순진하기만 했다. 성유리는 오늘 그저 아이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기 위함이었다.오직 추억 하나만 위해서였고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었다.이런 생각이 든 박한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성유리에게 물었다.“그럼 넌 누구랑 같이 있으면 즐거운데? 연 교수야?”그는 잘 알고 있다. 오늘 성유리와 하루 종일 문자를 나눈 사람이 바로 연정우라는 사실을.처음부터 박한빈은 성유리가 오늘 하늘이를 데리고 연정우와 함께 놀이공원으로 갈 계획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아이까지 함께 데리고 간다는 것은 성유리가 연정우를 하늘이의 아빠로 삼고 싶은 의미라고 박한빈은 스스로 해석했다.“전에 유효정 씨한테 납치당했던 일 잊었나?”박한빈이 물었다.“그 일도 연정우 씨가 계획한 거야. 알아? 연 교수는 유효정 씨랑 결혼하기 싫어서 너를 방패로 삼은 거라고. 유효정 씨가 너를 극도로 혐오하게 만들어놓고 만약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바로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어.”“연 교수가 알고 있...”“저도 알아요.”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을 뚝 끊어버렸고 짧디짧은 그녀의 대답에 그는 말문이 막혔다.“알고 있으면서
하늘이는 오늘 노느라 유달리 지쳤는지 성유리의 품에서 오랜 시간 잠에 들어 있었다.요즘 즐거운 시간들을 보낸 하늘이는 체중 또한 나날이 늘고 있었다. 박한빈의 차에서 내릴 때, 성유리는 아이를 계속 안고 있어 팔에 감각이 없어졌다. 그러자 박한빈이 얼른 성유리에게 다가오더니 말했다.“내가 안고 올라갈게.”“괜찮아요.”성유리는 단칼에 거절했지만 박한빈은 가녀린 그녀의 팔을 쳐다보고는 다시 말했다.“너 지금 하늘이 안고 올라갈 수 있어? 아니면 그냥 깨워서 직접 걸어가라고 해.”성유리는 확실히 지금 상태로는 아이를 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깊은 잠에 들어있는 아이를 보니 차마 깨울 수가 없어 망설였다.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슬쩍 쳐다보더니 그녀가 반응할 틈도 없이 허리를 숙여 아이를 안아 들었다.원래 박한빈은 작디작은 이런 아이가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 사람들이 힘들어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그러나 실제로 자신이 안아보니 아이는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다. 특히 아이가 잠에 들어 있으면 더더욱.박한빈은 조금만 힘을 준다면 하늘이가 아파서 깰까 봐 두려웠고 힘을 풀면 하늘이가 안정적인 느낌이 들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그래서 집으로 걸어가는 과정에서 박한빈의 몸은 잔뜩 긴장한 채로 뻣뻣하게 굳어있었다.그러던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유리는 과연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홀로 아이를 안고 있었을까?’“하늘이 침대에 내려놓으시면 돼요.”성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박한빈은 그제야 정신을 다잡고 조심스레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았다.하늘이는 너무도 피곤했는지 침대에 올려놓자마자 자세를 휙 바꾸더니 계속 잤다.박한빈은 그런 아이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고 그 순간,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뭐... 다른 일 더 있으세요?”그는 자신이 꽤 오랫동안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음을 깨달았고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오늘 정말 감사했어요.”성유리가 계속 말했다.“덕분에 하늘이도 너무 신나게 논 것 같아요.”“그래.”박한빈은 짧
차는 빠르게 달려 이내 놀이공원에 도착했다.오늘은 평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놀이공원은 인산인해였다.하지만 박한빈이 오기 전에 미리 관계자한테 연락을 해뒀는지 그들이 들어서자마자 직원들이 달려 나와 맞이해줬다.하늘이가 무슨 기구를 놀고 싶어 하든 다 그들만을 위한 통로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세 사람은 아예 줄을 설 필요도 없었다.성유리는 사실 이런 방식으로 아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오고 싶지 않았다. 필경 박한빈은 이제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오늘은 박한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늘이와 놀이공원에 오는 날일 것이다. 그렇기에 성유리는 하늘이에게 이런 습관을 들이기가 싫었다.그러나 지금 하늘이는 너무도 흥분한 상태였고 오늘 같은 날씨에 밖에서 오랫동안 줄을 서는 것 또한 아이의 몸에 좋지 않기에 성유리는 꾹 참았다.놀이공원에 도착하고 제일 처음으로 박한빈은 하늘이와 함께 회전목마를 타러 향했다.그 회전목마는 중간에 분수까지 설치되어있어 어느 한 범위 안에 들어서면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하늘이는 비옷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놀이기구에서 내릴 때는 이미 앞머리가 젖어버린 상태였다.성유리는 아이의 몸에 묻은 물을 닦아내 주고 싶었지만 하늘이는 고개를 돌린 채 박한빈만 바라보며 말했다.“더 타고 싶어요!”“그래. 그러자.”박한빈은 주저도 없이 아이의 말에 동의했다.그러자 하늘이는 재빨리 성유리의 손을 잡아끌었고 박한빈은 그런 아이에게 다정히 말했다.“엄마는 힘든 것 같아. 아니면 나랑 둘이 갈래?”그의 말에 하늘이의 표정이 굳어져 버렸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기만 했다.성유리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자 하늘이는 망설임 끝에 박한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그는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잡았다, 엄마의 손이 아닌 처음으로 잡아보는 커다란 남자의 손에 하늘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아이는 주저하다 박한빈의 손이 아닌 그의 옷깃을 살짝 움켜잡았다.박한빈 또한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와 함께 전용 통로로 들어섰다.비록
하늘이는 박한빈을 힐끔 쳐다보다 다시 성유리를 쳐다보기를 반복했다.“회전목마.”그러던 아이는 결국 박한빈의 질문에 대답해 줬다.“회전목마만 좋아해? 후룸라이드나 바이킹은 놀아봤어? 롤러코스터는? 놀이공원에는 밤이면 공연도 하고 퍼레이드도 하는데 본 적 있어? 하늘이는 공주들이나 다른 만화 캐릭터랑 같이 사진 찍고 싶지 않아?”놀이공원에 관한 프로젝트 또한 박한빈은 해본 적이 있다. 그렇기에 한 번도 직접 놀이공원으로 향한 적은 없어도 각종 놀이기구나 시설, 공연 등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신바 좋아한다고 했지?”박한빈은 문득 하늘이가 늘 가지고 다니던 사자 인형이 떠올랐다.“거기 있는 무대에는 아마 신바도 있을 거야. 네가 원한다면 난 너를 데리고 그곳으로 갈 수도 있고.”비록 성유리는 지금 박한빈의 말이 내키지 않았지만 하늘이는 달콤한 그의 유혹에 서서히 흔들리고 있었다.아이의 친엄마인 성유리는 당연하게도 하늘이가 지금 박한빈의 말에 많이 흔들리고 또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특히 공연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난 하늘이의 눈은 전보다 더 반짝였다.필경 전에 몇 번 놀이공원으로 향했을 때, 시간이 안 맞아 한 번도 무대 위에서 하는 퍼레이드나 공연을 아이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건 하늘이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장면 중 하나였다. 게다가 박한빈이 말한 놀이기구들 또한 아이는 타보지 못했었다.왜냐하면 성유리가 그런 기구들을 타기를 즐기지 않기에 하늘이도 엄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매번 포기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놀고 싶으면 내가 데리고 가줄게. 공연 완전 재밌거든? 아마 넌 본 적이 없을 거야.”하늘이가 망설이는 것을 눈치챈 박한빈은 계속해서 “미끼”를 던졌다.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봤고 그녀는 아이의 눈빛을 보고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솔직히 말하면 성유리는 내심 박한빈과 하늘이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그녀는 부녀 사이가 엄청 가까워지지는 못해도 적어
박한빈은 꿈속에 나타난 연정우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번쩍 떴다.꿈 내용이 너무 소름이 끼쳐서일까, 아니면 연정우의 등장에 놀라서였을까는 몰라도 박한빈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눈을 떠서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박한빈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스스로를 다독인 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방에서 나가자마자 박한빈은 하늘이와 딱 마주쳤다.이미 치마까지 갈아입고 머리도 예쁘게 땋은 하늘이는 자신의 물컵을 손에 든 채로 거실 소파에 앉아 성유리를 기다리고 있었다.인기척이 들리자 아이는 바로 뒤를 돌아보았고 박한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그리고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박한빈은 만약 예전 같았으면 그런 하늘이를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조금 망설이던 그는 하늘이한테 천천히 다가가며 먼저 말을 걸었다.“지금... 나가려는 거야?”어린아이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박한빈은 지금 아무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해도 말투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그렇기에 그가 한 질문은 마치 경찰이 죄인을 조사하는 것처럼 들렸다.하늘이는 그런 박한빈을 한동안 가만히 쳐다보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네.”“어디 가는데?”박한빈이 또 물었다.“저도 몰라요.”아이의 대답에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차린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가 무슨 물음을 더 물어보려고 입을 움찔거리는 그때, 성유리가 방 밖으로 나왔다.그녀는 연한 색의 티셔츠와 하얀색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전과 달리 머리는 한껏 밑으로 묶어져 있었고 화장도 연하게 했다.최근 많이 야윈 성유리는 지금 벨트를 매고 입음에도 허리는 너무 얇아 살짝 밀면 부러질 것 같았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어디 가?”성유리는 먼저 하늘이를 자신의 뒤에 세워두고는 대답했다.“아이랑 같이 밖에 가서 놀아주려고요.”“어디 가서 놀아줄 건데?”박한빈의 계속되는 물음에 성유리는 인상을 썼지만 멈칫하다 결국 순순히 대답을 이어갔다.“놀이공원이요. 근데 저희
박한빈은 계속 성유리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추궁하기 시작했다.성유리는 그에게 떠밀리듯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등 뒤로 발코니의 유리문이 닿고 나서야 더는 물러날 곳이 없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생각이 너무 많으신 거 아니에요?”성유리가 계속 말했다.“제가 굳이 말하지 않은 건 그 일이 저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던 박한빈이 뚝 멈췄다.성유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그건 박한빈 씨와 안희연 씨 사이의 문제예요. 제가 관여하거나 평가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박한빈 씨 주변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당신 곁에 있는지는 저와 전혀 상관없고요.”그녀는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이어갔다.“이제 비켜주실래요?”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얼굴에 띠고 있던 모든 표정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 얼굴 어딘가에서 감정의 틈이나 흔적을 찾아내려는 듯 말이다.그러나 성유리에게서 보이는 표정은 아무것도 없었다.성유리는 여전히 담담하게 박한빈과 두 눈을 마주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이 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돌려 그를 지나쳐 나가려 했다.그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팔을 꽉 잡았다.“내가 가도 된다고 말했나?”“이 손 놔요.”성유리의 목소리는 더 이상 차분하지 않았고 어딘가 지친 듯 낮고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그러나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계속 말했다.“내가 왜 놔야 하지? 아이 수술 끝났으니 이제 나랑은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상관없다면 왜 여기 살고 있는데?”그 말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지만 금세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그런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면 제가 죄송해요. 박 대표님.”그러자 박한빈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저와 하늘이가 여기 머무는 건 박한빈 씨 어머니의 부탁 때문이에요.”성유리는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어머니는 하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하늘이는 깜짝 놀라 온몸을 성유리 품에 안겼다.아이의 눈은 박한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는 하늘이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성유리를 응시했다.“나와.”그가 입을 열자 하늘이는 성유리의 손을 꼭 붙잡았다.“엄마. 가지 마.”하늘이가 박한빈을 꺼리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진정으로 박한빈을 두려워하는 것이 느껴졌다.하늘이가 성유리를 꼭 붙잡고 있는 손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괜찮아. 엄마가 잠깐 일 보고 올게.”“싫어!"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떼를 부렸다.성유리는 문과 아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박한빈은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는데 그의 굳게 다문 입술과 굳은 표정은 날카롭고 위압적이었다.하늘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성유리의 손을 세게 붙잡았다.결국, 성유리는 옆에 있던 작은 사자 인형을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여기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 금방 올게. 알겠지?”하늘이는 여전히 싫다는 표정을 지었지 문 앞에 서 있는 박한빈을 보며 더 큰 두려움이 생겼는지 마지못해 성유리의 손을 놓았다.“엄마, 빨리 와. 나 무서워.”“알았어. 걱정하지 마.”성유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자 곧바로 뒤돌아섰다.두 사람은 그렇게 2층 거실의 발코니에 나란히 섰고 박한빈이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오늘 어디 갔었어?”성유리는 이 시간에 박한빈이 굳이 이런 식으로 찾아와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잠시 멍하니 서 있던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나 씨랑 백화점 갔어요. 왜요?” “그다음은? 너 나한테 할 말 없어?”박한빈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그의 시선은 성유리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그제야 성유리는 박한빈이 왜 이러는지 깨달았고 그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알게 되셨어요
그의 행동은 매우 빨랐다.어찌나 빠른지 사하나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받으려던 순간 손가락이 박한빈의 차 문에 끼일 뻔했다.그러나 박한빈은 사과 한마디 없이 운전기사에게 차를 출발시키라고 지시했고 그대로 떠나버렸다.사하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박한빈의 차를 향해 소리쳤다.“박한빈, 너 미쳤어? 감정 조절도 못 하는 미친놈!”“그래! 너 같은 놈이 그런 여자한테 배신당해도 싸지.”박한빈은 사하나의 말을 당연히 듣지 않았다.사실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차에 올라탄 후, 박한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안희연에게 연락하는 것이었다.그러자 안희연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박 대표님.”“오늘 성유리를 만났어?”박한빈은 안희연 앞에서 성유리라는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던 터였다.더군다나 그녀가 금성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모습을 감췄던 터라 성유리라는 이름은 안희연에게 낯설게 들렸다.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박한빈과 관련된 여자를 떠올리며 대상을 짚어낸 후 대답했다.“아뇨. 못 만났는데요.”“오늘 백화점에 갔다며?”“네.”“누구랑 같이 갔지?”안희연은 말이 없었다.그러자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계속 물었다.“안희연, 우리 계약 관계에 대해서 내가 굳이 다시 설명해 줘야 하나?”“그런 거 아니에요. 박 대표님, 제가 다 설명할게요.”박한빈은 지금 그녀의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안희연이 급히 말했다.“그래서 그 성유리라는 분이 박 대표님에게 고자질한 건가요? 그렇다면 박 대표님께 아직 미련이 있다는 뜻 아닌가요?”안희연은 박한빈이라는 사람은 잘 모르지만 남자의 심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난 몇 년간 라이브 방송에서 수많은 남자들을 보아왔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박한빈의 민감한 포인트를 정확히 짚었다.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그러자 안희연이 계속 말했다.“박 대표님, 그 여자가 뭐라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