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엄마!” 성유리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느라 처음엔 아이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자그마한 딸아이가 주방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이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성유리에게 삐쳤는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엄마, 왜 내가 불러도 대답 안 해요?” “미안해.” 성유리는 환풍기를 급히 끄며 아이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화장실 다녀왔어요. 엉덩이 닦아야 돼요.” 성유리는 이미 바지를 스스로 다 입고 나온 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그럼 우리 닦는 김에 바지도 바꿔 입을까?” 아이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바지를 내려다보며 아무 반박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그런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성유리가 아이에게 겨우 새 바지로 갈아입히자마자 벨 소리가 집안에 울렸다. “이모 왔나 봐요!” 아이는 벨 소리를 듣고 잔뜩 신나 하며 현관으로 뛰어갔다. 벨을 누른 사람을 확인한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이모!” “역시 우리 하늘이가 나를 제일 반겨주네.” 사하나는 만족한 듯 옅은 미소를 지어주며 하늘이에게 물었다. “하늘이 요즘 이모 생각 자주 했어?” 하늘이는 사하나의 물음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모가 하나만 물어볼게. 이모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지?” 사하나가 이런 질문을 물어볼지 예상도 못 했는지 하늘이는 쭈뼛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고작 2살 된 어린아이일 뿐인 하늘이는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자 고개를 돌려 엄마인 성유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하늘이를 도와주려는 생각이 하나도 없는지 웃으며 옆에 물러섰고 하늘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은근히 기대를 하는 것 같았다. 하늘이는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더니 사하나에게 대답해 줬다. “여기로 이모 생각했어요.” 하늘이의 대답에 사하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얼른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쩜 이렇게 똑똑할까? 너 왜 이렇게 귀여워?” “나는
하지만 사하나의 말에 하늘이는 예전 기억이 떠올랐는지 주저하기 시작했다. 성유리를 잠시 바라보던 아이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난 엄마랑 잘래요.” 성유리는 하늘이의 의사를 확인한 뒤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사하나는 눈치를 살피다 그녀에게 물었다. “전에 제가 소개시켜 드린 그 남자는 왜 만나러 가지 않으세요?” “그러는 넌 왜 안 만나는데?” 성유리가 되물었다. “전... 아직 결혼에 관심이 없어서요.” “네 생각엔 난 결혼에 관심이 있어 보이나 보지?” 성유리의 말에 사하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조금 뒤, 사하나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꺼냈다. “언니 혼자 애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러죠. 딱 저번처럼 말이에요. 새벽에 하늘이가 갑자기 열이 올랐을 때 언니 혼자 밤을 새가면서 아이를 챙겼잖아요.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은데도 언니한테 물 한 잔 떠다 줄 사람도 옆에 없고.” “그건 그냥 우연일 뿐이야. 그리고 결혼하면 그 남자가 나를 챙겨줄 것 같아? 아마 내가 애를 둘 키우는 거랑 똑같아질걸.” 성유리의 말에 사하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필경 그녀 본인도 남자에 대해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기에 결혼을 미루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도대체 웬일인지 사하나는 이런 일을 자신이 맞닥뜨린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성유리가 이런 삶을 살고 있으니 자꾸만 분노가 치밀고 화가 났다. 사하나는 지금 본인이 표정 관리를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성유리는 단번에 그녀의 감정을 알아차렸다. 성유리는 머릿속에 어떠한 추측이 떠올랐는지 사하나에게 물었다. “금성 쪽에 무슨 일 생겼어?” “네? 무슨 일이요? 저는 모르는데? 언니 뭐 들으셨어요?” 서로를 본 시간이 늘면 늘 수록 사하나는 성유리 앞에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애써 부정하며 아무렇지 않은척 하지만 성유리는 그녀가 그럴수록 더욱 확신했다. 그래서
성유리가 그린 만화가 방영되는 곳은 경운시였다. 이미 이런 경험이 몇 번이나 있는 성유리지만 이번에 작가 팀에 합류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대본은 아직 검토 중이지만 드라마는 이미 시작되었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으니 그들은 만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을 때 빨리 기회를 뺏어야 했다. 성유리는 처음으로 현장에 간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 종일 그들과 같이 있은 적은 처음이었다. 하늘이도 당연히 성유리와 함께였다. 그러나 너무 바빠 하늘이를 챙길 여력이 부족해 성유리는 가정부를 고용했다. 이러면 자신이 하늘이를 미처 챙기지 못해도 가정부가 챙기기에 안전할 뿐만 아니라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성유리가 너무 쉽게 생각한 탓일까, 큰 규모의 제작이기도 하니 영화사에서는 제일 잘 나가는 배우들만 요청했다. 두 사람은 겉으론 사이가 좋은 척 하하 호호 웃었지만 팀은 하나같이 너무 실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대본마저 하루에도 몇 번씩 고치고 바꾸기 일쑤였다. 성유리는 매일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하늘이를 며칠이나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하늘이는 성유리를 원망하지도 않고 매일 호텔에서 얌전히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사하나가 하늘이를 세뇌시킨 건지, 하늘이는 성유리가 돌아올 때마다 그녀에게 잘생긴 삼촌이랑 사귀냐고 물었다. 성유리는 아이가 말한 잘생긴 삼촌이 누군지 안다. 그건 바로 이번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자 올해 제일 많은 인기를 누리는 이우빈이였다. 하늘이는 호텔에서 그와 두 번을 마주쳤기에 이우빈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는 성유리에게 저 남자가 자기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성유리는 몇 번이나 하늘이에게 설명을 해주며 안 된다고 대답했지만 아이는 새까맣게 잊은 건지 자꾸 물었고 그게 반복되자 성유리는 포기해 버렸다. 그날은 업무가 평소처럼 바쁘지 않았기에 성유리는 하늘이를 데리고 현장에 향했다. 이우빈을 발견한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인사를 건넸다.
현장에 사람이 너무 많기에 그들은 하늘이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너무 예쁘게 생겨 그들은 아역 배우인 줄 알아 부감독을 불러오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하늘이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두 주먹을 꽉 쥐고 머리카락을 찰랑찰랑 흔들며 걸어가는 하늘이의 모습은 잔뜩 성난 수탉 같았다. 성유리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대본에 대해 상의하고 있다가 씩씩거리며 걸어오는 하늘이를 보고는 잔뜩 당황하며 물었다. “왜 그래?” 하늘이는 아무 말도 없이 의자에 앉더니 자신의 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셔대기 시작했다. 성유리는 옆에 있는 사람한테 양해를 구한 뒤, 하늘이에게 다가가 다시 물었다. “왜 그래? 심심해서 그러는 거야?” “오늘 평소보다 빨리 끝날 것 같아. 엄마가 끝나면 하늘이 데리고 백화점 가서 놀아줄게. 응?” 하늘이는 성유리를 지그시 쳐다만 볼 뿐이었다. 그녀는 아이가 먼저 대답할 때까지 천천히 기다려줬고 한참 후, 하늘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있기 싫어. 이우빈 아저씨 보기도 싫어.” 하늘이가 계속 말했다. “집에 갈래요. 가서 이모랑 놀고 싶어.” “지금? 엄마는 지금 못 가는데.” 성유리는 아이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이렇게 하자. 하늘이가 엄마랑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주면 엄마가 이모한테 전화할게. 오늘 밤에 시간 있으면 하늘이 데리러 오라고 할까?” 성유리의 목소리는 다정다감하기 그지없었고 아이를 달래며 머리도 쓰다듬어줬다. 하늘이는 성유리의 위로를 받고는 서서히 진정되었고 코를 쓱 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잡고 자신이 일해야 하는 자리로 돌아갔고 아이를 안은 채로 업무를 봤다. 촬영은 빠르게 끝났지만 이우빈 일행은 성유리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 “성유리 선생님, 할 말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이우빈을 주위를 둘러보다 여자 주인공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평등하게 “대결”을 펼칠 수 있었지만
“그러니까 이모! 꼭 그 삼촌보다 저 잘생긴 남자를 찾아야 돼요. 삼촌보다 백배, 아니 만 배 잘생긴 사람!” 어느 한 패스트푸드 점, 하늘이는 감자튀김을 먹으며 사하나에게 말했다. 사하나는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줄 알고 헐레벌떡 뛰어왔지만 아이의 말을 듣고 나서야 별일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하늘이의 말에 대답했다. “그런 말들은 다른 사람이 한 거지 이우빈 그 사람이랑 상관이 없잖아. 이모 생각엔 이우빈 씨도 네 엄마한테 관심이 있어 보이는데?” 하늘이는 사하나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안 돼요. 그 삼촌은 제 아빠가 될 자격이 없어요.” 사하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웃어 보였다. 감자튀김을 맛있게 먹고 있던 하늘이는 갑자기 차가운 액체가 자신의 입가에 닿는 느낌을 받았고 손으로 쓱 만져보았다. 어린아인지라 하늘이는 케첩인 줄 알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사하나가 깜짝 놀라며 다가와 말했다. “왜 갑자기 코피가 나는 거야? 빨리 업혀. 이모랑 병원 가자!” ... 이건 성유리가 현장에서 날밤을 샌 두 번째 날이었다. 이우빈의 설득 하에 성유리는 결국 그에게 두 장면을 더 추가해 줬고 내용은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랑 상의하며 하나씩 적어 갔다. 감독마저 아주 흡족해하며 박수를 쳤지만 여자 주인공 쪽은 불만이 가득한 눈치였다. 여자 주인공이랑 마주치기를 꺼리던 성유리는 끝나면 바로 몰래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 주인공의 매니저는 어느새 성유리를 찾아와 먼저 말을 걸었다. “성유리 선생님, 저희 그 추가된 두 장면 때문에 할 말이 있어서...” 매니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의 핸드폰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더니 정신없이 현장을 떠나갔다. “선생님! 성유리 선생님!” 매니저는 뒤에서 몇 번이나 성유리를 불렀지만 그녀는 망설이지도 않고 발걸음을 옮겼고 매니저는 화가 나 이빨을 꽉 깨물었다. “어떻게 됐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사하나는 성유리의 감정을 알아차리곤 곧바로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언니도 결국 하늘이의 미래를 위해 이렇게 하는 거잖아요.” “이렇게 합시다. 어차피 전 별로 바쁜 일도 없으니까 이번에 하늘이가 다 나으면 내가 애를 데리고 금청으로 먼저 돌아가죠. 가서 우리 부모님 댁에서 지낼게요.” “그분들도 손녀 얘기를 오래전부터 하셨거든요. 비록 의붓손녀지만 똑같이 사랑해 주실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하나는 그녀가 자신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기에 지금 당장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일단 이렇게 합시다. 언니도 피곤할 테니 오늘 밤은 내가 있을게요. 언니는 들어가서 좀 쉬세요.” “아니. 네가 먼저 들어가. 난 여기 있을게.” “하지만...” “지금 내가 들어가면 제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아?” 성유리의 이 질문에 사하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사하나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성유리는 한참 후에야 하늘이의 침대 옆으로 천천히 다가가 앉았다. 아이는 오늘 채혈을 해서 그런지 팔뚝에는 여전히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작은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하늘이에게 손을 뻗어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혹시 깰까 봐 망설이다가 성유리는 결국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한참 동안 가만히 하늘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하늘아.” 그 목소리는 아이를 깨우지 않을 만큼 작았는고 성유리 혼자만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며칠간 성유리는 더 바빠졌고 촬영 현장과 병원을 오가며 바삐 뛰어다녔다. 때로는 하늘이가 갑자기 뭔가 먹고 싶다고 하면 호텔로 돌아가 직접 만들어 오기도 했다. 고작 일주일 만에 그녀는 몸무게가 5kg이나 빠졌고 얼굴은 많이 초췌해졌다. 사하나조차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성유리는 마
2년 하고도 4개월. 성유리는 그와 다시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 그 상상을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두 사람은 이미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의 곁에는 늘 샴페인과 꽃다발로 둘러싸인 화려한 삶이 있었고 그녀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교차할 일이 없는 평행선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등장은 성유리의 그런 믿음을 단번에 깨뜨렸다. 하늘이를 안고 있던 성유리는 그를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엄마, 저 사람 알아?” 하늘이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아니, 몰라.” 행여나 자신의 감정이 들킬까 성유리는 서둘러 대답했다. 한편, 박한빈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성유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을 들어버린 순간, 그의 발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버렸다. 방금 전까지 뛰던 심장은 순간 멈춘 듯 잠잠해졌고 뜨겁게 끓던 피는 차갑게 식어갔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제 더 이상 박한빈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만, 하늘이는 박한빈의 시선을 느꼈는지 계속 뒤를 돌아보며 그를 쳐다보았다. 이혼 당시, 두 사람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았다. 성유리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조차 박한빈은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잠들지 못한 채로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그러다 보니 박한빈은 심장과 위가 아파 견딜 수 없을 정도까지 되였다. 버티던 박한빈이 결국 병원을 찾아갔지만 의사는 그의 몸이 건강하다고 말했다. 그가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자 의사는 단지 “심리적 긴장”일 수도 있다고 알려줬다. 박한빈이 긴장했던 걸까? 아마 단순한 긴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긴장보다
이것은 박한빈이 처음으로 그들의 아이를 직접 본 순간이었다. 흐릿한 사진도 교묘한 각도로 찍힌 이미지도 아닌 눈앞에서 생생하게 움직이는 아이였다. 작은 소녀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박한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호기심과 함께 낯선 누군가를 관찰하는 듯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이를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박한빈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걸었고 이내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 성유리와 아이의 모습이 가려져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한참 뒤, 박한빈은 비로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그는 자신의 감정을 빠르게 추스르며 평정을 찾으려 했지만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그날 밤, 그는 예상대로 잠에 쉽게 들지 못했다. 박한빈은 새벽녘까지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고 나서야 간신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꿈속에서도 그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장면이 계속 반복되었고 그 장면은 성유리가 한 소녀와 함께 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장면은 따뜻하고 행복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낯선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박한빈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는 강렬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옆에 둔 핸드폰은 계속해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그는 울리는 전화를 바로 받지 않았다. 대신 창밖의 햇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방금 꾼 꿈의 장면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새겼다. 박한빈은 그 꿈을 이전에도 꾼 적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느낌이 달랐다. 너무나 생생하고 현실 같았다.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소녀가 다른 누군가를 아빠라고 부르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박한빈의 심장과 위장은 다시금 은은히 아파지기 시작했다.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그는 그 감정을 억누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화를 받았다. 그는 이번에 경운시로 출장 온 상황이었다.
오히려 사하나는 연정우의 일로 성유리에게 사과를 했다.“제가 상황파악도 제대로 못 하고 억지로 엮어주려고 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솔직히 저도 연정우가 그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사하나는 한껏 찌푸린 얼굴로 변명해보았지만 성유리는 그녀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성유리의 눈빛에 사하나는 다시금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물었다.“언니... 혹시 제 탓하는 건 아니죠?”“내가 네 탓을 왜 해?”성유리가 웃기다는 듯 말했다.“이게 너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그래도... 그때 제가 부추기지만 않았다면...”“난 어른이잖아. 이런 기본적인 판단능력도 없으면 나중에 무슨 결정을 내리든 다 다른 사람 탓이나 하게?”성유리가 별수 없다는 듯 말했다.“게다가 나도 그때는 연정우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뒤늦게 둘이 안 맞는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뿐이고.”“안 맞는 게 아니라, 연정우가 언니한테 안 어울리는 거죠!”사하나가 곧장 대답했다.“언니 그거 알아요? 요즘 박한빈 버린 여자가 연정우한테 차였다고 소문 돌고 있던데요.”“그 새끼 완전 미친놈 아니에요? 박한빈한테 사업으로 밀리니까 그딴 식으로 물어뜯는 거잖아요. 싸울 거면 자기들끼리 싸우든지, 왜 언니까지 끌어들인대요? 언니가 뭘 잘못했다고!”사하나는 말할수록 점점 화가 치미는지 언성을 높였다.성유리는 그런 사하나의 모습에 오히려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물이나 좀 마시고 진정하지 그래?”사하나는 태연한 성유리의 모습에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성유리는 그저 가만히 서서 사하나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사하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성유리를 빤히 쳐다보았다.그 시선에 어딘가 머쓱해진 성유리가 물었다.“왜 그래?”“언니는 화도 안 나요?”사하나가 물었다.“왜 화가 나야 하는데?”“그러니까... 연정우가 언니를 그런 식으로 대했던 것도 그렇고,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도 그렇고, 화가 나야 하잖아요.”사하나의 앞에
문이 열리는 순간, 성유리는 박한빈의 몸에서 풍겨오는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그녀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문손잡이를 꽉 잡은 채 몸으로 문을 막았다.“대체 여긴 왜 찾아온 거예요?”때는 해가 완전히 저물어 버린 캄캄한 밤이었다.같은 층에는 성유리네 말고도 세 가구가 더 거주 중이었다. 이웃들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던 탓에 성유리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문을 열라며 난동을 부리던 박한빈은 정말 문이 열리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그저 그윽한 눈으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잠시 박한빈과 눈을 맞추고 있던 성유리는 다급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할 말 없으면 이만 돌아가요.”말을 끝낸 그녀는 문을 닫으려 했지만 이내 박한빈의 손에 의해 가로막혀 버렸다.“이렇게까지 날 피하고 싶은 거야?”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물었다.“옆집으로 이사 온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도망치듯 이사를 가버리는 건데?”“성유리, 너 정말 매정하다. 어떻게 나한테 단 한 번의 기회조차... 안 주는 건데?”한참이나 박한빈을 가만히 바라보던 성유리가 대답했다.“대표님, 제발 대표님의 인생을 사세요.”“저도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게다가 대표님 같은 조건과 위치라면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요. 굳이 저한테 이렇게 집착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여자들이 줄을 선다고...”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넌 정말 그 여자들이 날 진심으로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만약 내가...”“애초에 접근할 기회도 안 주면서, 진심일지 아닐지 어떻게 확신하는데요?”성유리가 박한빈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더군다나, 지금 저랑 그 여자들이 다를 게 뭔데요?”“박한빈 씨, 저는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적어도 그 여자들은 돈 때문에라도 한빈 씨를 사랑하겠지만 저는 이제 그럴 수도 없어요.”“한빈 씨 사업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럼 가장 치명적인 투자가 어떤 건지도 잘
“감사합니다.”성유리는 결재서류를 받아들고 사인하며 말했다.“우리 남편 들어오면 담배라도 한 갑 사 오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아쉬운 대로 몇만 원 더 드릴 테니까 돌아가시는 길에 뭐라도 사드세요.”“아뇨, 괜찮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직원들은 극구 사양하는 척하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성유리가 건네주는 현금을 받았다.성유리는 직원들이 떠나자마자 곧장 상자 속에 있던 신발을 현관에 놓고는 남자 옷까지 몇 벌 더 꺼내 베란다에 걸어두었다.“엄마, 우리 이제 여기서 사는 거야?”성하늘이 물었다.“맞아.”“그럼 우리가 원래 살던 집은 어떻게 됐어?”“방 뺐어.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야.”“그럼... 난 이제 승민이 오빠 못 만나는 거야?”“아니야, 여기서 얼마 멀지도 않으니까 나중에 하늘이가 유치원 들어가면 또 만날 수 있을 거야.”그제야 성하늘은 안심한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하루 종일 짐 정리를 하느라 저녁도 차리지 못했다.그래도 성하늘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성유리가 저녁을 직접 차리지 못한다면 배달 음식으로 먹게 되는 것은 밖에서 파는 정크푸드였기 때문이다.새로운 환경으로 옮겨서인지 성하늘은 밤이 되어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한참이나 뒤척이다가 겨우 눈을 감았다.아이가 잠든 줄 알았던 성유리는 남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깊은 잠에 빠져있던 줄만 알았던 성하늘이 눈을 떴다.“그럼 난 이제 그 사람도 못 보는 거야?”“그 사람이 누군데?”성유리가 무심코 물었다.하지만 성하늘은 그녀의 질문에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침대 곁에 서 있던 성유리는 한참이나 지나서야 아이가 얘기한 ‘그 사람’이 박한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성유리는 아이에게 무슨 말이든 해주고 싶었지만 이미 눈을 질끈 감은 성하늘은 정말로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결국, 그녀는 잠든 아이를 두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성유리는 얼마 전에 받았던 커미션의
박한빈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평소 성유리와 아이의 외출 시간은 오전과 초저녁으로 나뉘었다.보통 오전 11시쯤이면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돌아와 간단히 점심을 먹고 잠깐의 낮잠을 자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하지만 오늘은 왜인지 모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박한빈은 앞집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느꼈다.그는 그 소리가 곧바로 문을 열었다.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낯선 남자 무리였다.박한빈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남자들이 깜짝 놀라 박한빈을 돌아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그쪽은 누구신데요?”“지금 뭐 하시는 거냐고요?”박한빈은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전선 고치러 오신 거예요? 무슨 전선 하나 고치는 데 이렇게 많이 몰려와요?”“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저희는 이 집으로 이사 온 건데요.”남자들 중 한 명이 대답했다.그 말에 박한빈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이사요?”“네, 이사 왔어요.”남자는 대답을 하면서도 다시 문 앞에 적힌 번호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5동 904호, 맞는데요.”그 말과 함께 남자는 이미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들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그저 자신의 집 현관 앞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가장 행복해야 할 놀이공원에서 모두에게 버림받은 아이라도 된 듯, 믿기 힘든 감정과 함께 몰려온 혼란스러운 감정이 쓰나미처럼 박한빈을 덮쳐왔다.박한빈은 천천히 집안으로 돌아왔다.모니터에는 여전히 알아보기도 힘든 다양한 데이터 수치들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평소 작은 움직임 하나로 박한빈을 흥분시키던 데이터였지만 지금은 아무리 날뛰어도 그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던 박한빈은 이내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성유리가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가운데에 있어야 할 벽이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안방과 서재가 하나로 합쳐져 있었고 그 덕에 작은 방과 거실이 넓어졌다.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성하늘은 성유리에게 안기자마자 그녀의 어깨 위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다. 아이는 지금 자신이 어디로 와 있는지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침구는 다 깨끗한데, 더 필요한 거 있어?”방 문 앞에 서 있던 박한빈이 물었다.“필요 없어요, 고마워요.”“너... 씻고 나서 잠옷으로 갈아입을 거야?”박한빈의 말에 성유리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반응에 박한빈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미안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그럼... 잘 자. 나는 앞방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불러.”말을 마친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뒤를 곧바로 따라나섰다.그때까지만 해도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건 줄로 알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성유리는 매정하게 방 문을 닫았다.뒤이어 문을 잠그는 듯한 소리까지 들려왔다.박한빈은 걸음을 멈추고 참았던 웃음을 피식 터뜨렸다.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성유리는 여전히 순진하기 그지없었다.아무리 문을 잠근다고 해도 이곳은 박한빈의 집이었고, 집주인인 그에게 스페어 키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박한빈 역시 성유리에게 허튼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지금이 적절한 때가 아닌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지금 이대로도 박한빈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수없이 박한빈은 거부했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엄청난 진전이나 다름없었으니까.박한빈은 계속 걸음을 옮겨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서재의 컴퓨터 책상 위에는 수많은 자료들이 쌓여 있었지만 박한빈은 그 자료들을 확인해 볼 의지도 없다는 듯 곧바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그날 밤, 박한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은 잠에 들었다.쓸데없는 꿈을 꾸지도 않았고,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았다.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CCTV는 내가 설치한 거야.”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재빨리 말했다.“저걸 설치한 이유는 너희의 안전을 위해서야. 오늘 밤처럼, 내가 없었으면...”“대표님이 굳이 이사 안 왔으면 저 사람이 우리 모녀의 삶에 등장하는 일도 없었겠죠.”성유리가 그의 말을 끊고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이 잠시 멍해지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야? 설마 이것도 내 잘못이라는 거야?”“그럼 아니에요?”성유리가 되물었다.“저 사람, 대표님이 부른 사람들이잖아요.”“난 그냥 이삿짐센터를 불렀을 뿐이야. 거기서 어떤 사람을 보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대표님이었잖아요. 대표님만 굳이 이사 안 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걸요.”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무슨 일이 생기든 모든 책임을 다 박한빈에게 떠넘기려 하고 있었고 박한빈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아무리 반박하고 변명해보려 해도 아무 소용없었다.성유리도 더는 박한빈은 신경 쓰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하지만 성유리가 뒤늦게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전선이 여전히 끊긴 상태가 집 안은 여전히 칠흑같이 어두웠다는 점이다.성유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결국, 그녀는 성하늘을 안고 다시 밖으로 나와야 했다.박한빈은 여전히 앞집 문 앞에 서 있었다.그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이 모든 일을 예상했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조금 전과는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치 성유리가 곤란해지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이 시간에 업체 부르긴 힘들 거야.”박한빈이 말했다.성유리는 그의 말에 아무 대꾸로 하지 않은 채 성하늘을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이미 한 시간 동안이나 시달리며 잘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탓에 성하늘의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이는 한 손으로 성유리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눈을 비비적대고 있었다.“이 늦은 시간에 애 데리고 어딜 가려는
그 광경에 성유리의 낯빛이 곧바로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재빨리 다가가 박한빈의 손에 들려있던 열쇠를 빼앗듯 가져갔다.“너...”성유리는 설마 훔친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곧장 입을 열었다.“아까 네가 밖에서 물건 꺼내다가 떨어뜨린 거야. 그걸 내가 주운 거고.”“그럼 왜 진작 안 줬는데요?”“네가 말할 틈을 안 줬잖아.”박한빈은 조금 억울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게다가 애가 그렇게 급하다는데, 병이라도 나면 안 되잖아.”박한빈의 말은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들렸다.잠시 할 말을 잃은 성유리는 가만히 박한빈을 노려보다가 성하늘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주스... 안 마실 거야?”박한빈이 뒤에서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단 한 번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박한빈이 일부러 이런 짓을 한다는 것쯤은 성유리도 눈치챘다. 그런 게 아니었다면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열쇠부터 건넸을 것이다.이런저런 생각에 열이 올랐던 건지 문을 닫던 성유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런 엄마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성하늘이 조심스레 물었다.“혹시 하늘이가 잘못한 거야?”이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유리가 다급히 사과했다.“아니야, 그런 거. 엄마가 실수로 문을 너무 세게 닫아서 그래. 엄마 화 안 났어.”성하늘은 그렇게 성유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 일로 성유리는 집까지 찾아와 준 업체 직원에게 오랫동안 상황 설명을 해줘야 했고, 먼 길 달려온 그에게 교통비까지 물어주고 나서야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그렇게 박한빈을 향한 성유리의 원망이 한층 더 추가됐다.그때까지만 해도 성유리는 그저 지나가면 끝일 작은 해프닝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자기 전, 샤워를 준비하던 그때, 머리 위에서 전등이 갑자기 깜빡이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집안 전체가 어둠에 휩싸여 버렸다.침대 위에서 놀고 있던 성하늘 역시 깜짝 놀
“잠깐만요.”엘리베이터 문밖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왔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성유리도 곧바로 열림 버튼을 눌러줬을 터였다.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여느 때와 달리 고개를 푹 숙인 채 미친 듯이 닫힘 버튼만 연속으로 눌러대고 있었다.그런데도 엘리베이터 밖의 사람보다 한발 늦고 말았다. 문이 천천히 닫히려던 그 순간, 남자가 닫히려는 문을 손으로 잡았던 탓이다.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렸다.성유리의 입술은 열려버린 엘리베이터 문과는 반대로 꽉 다물어졌다.남자는 분명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왔음에도 성유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성유리는 그런 남자의 인사에도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성하늘을 데리고 옆으로 물러섰다.그녀는 마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남자를 무서운 바이러스라도 되는 양 취급하며 최대한 그와 멀어지려 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런 모녀를 보면서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점점 올라가는 숫자판만 바라보고 있었다.곧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성유리와 성하늘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현관 앞으로 도착한 성유리는 열쇠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적였다.그녀는 그제야 뒤늦게 자신의 열쇠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어.”성하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는 대충 아이의 말에 대답해준 후 더욱 다급한 손길로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찾아보아도 가방 안에 있어야 할 그 열쇠들이 보이지 않았다.“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다니까.”시간이 꽤 걸리자 성하늘의 목소리도 더욱 다급해져 더 끌었다가는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들렸다.성유리가 아이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려던 그때, 모녀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집에서 해결할래?”그 소리에 가방을 뒤적이던 성유리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췄지만 아이는 여전히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박한빈은 더 고민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성하늘을 안아 들어 자신의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성유리는 다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이게 지금 무슨 짓
서훈은 박한빈의 비서실장으로서 평소 박한빈과 거의 붙어 다니는 사이였다. 그런 서훈을 시켜 짐을 옮기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는 뻔할 뻔 자였다.역시 예상했던 대로 성유리는 집 안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셔츠 하나만 걸친 채 소매를 걷어 올린 남자의 소매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다.그의 머리카락은 어느 정도 흐트러져 있었지만 오히려 그 허술함이 남자의 생기를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성유리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그 상태로 한참이나 성유리와 눈을 마주치다가 입을 열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우연이라니?성유리는 당장이라도 박한빈의 얼굴이 뭔가를 집어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이런 상황을 보고도 박한빈의 말을 믿을 사람은 바보가 아닌 이상 존재할 리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은 더 상대하지도 않은 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성하늘 역시 당연하게도 박한빈을 알아보았다.아이는 유심히 박한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순간, 성하늘은 곧장 성유리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엄마,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나도 몰라.”성유리의 대답은 아이의 마음에 드는 대답이 아니었다. 성하늘은 곧장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난 저 사람 진짜 싫어. 자꾸 거머리처럼 달라붙잖아.”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곧장 휴대폰을 꺼내 근처의 임대 정보를 확인하며 이사 갈 만한 집이 있는지 찾아보았다.이사가 번거롭긴 했지만 이미 이 동네에 익숙해진 성유리에게는 별 큰 문제도 아니었다.적어도 그녀는 자신만 이사하면 박한빈이 계속 따라붙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마음에 드는 집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오전 시간이 다 지나도록 웹사이트는 찾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집이 없었다. 집 창문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구조가 너무 별로였고, 동네가 너무 낡았다.무엇보다 성하늘이 이미 이곳에서 사귄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