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이혼합의서를 박한빈에게 건넸다. 박한빈은 위에 적힌 성유리의 사인을 확인하고는 실성한 듯 웃더니 말했다. “너는 전부터 다 준비해 뒀구나.”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한빈은 굳은 표정으로 조금 서 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펜을 꺼내 들며 합의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어릴 때 글을 배우고부터 자기 이름 석 자를 수없이 썼던 박한빈이기에 그는 펜을 꺼내 들자마자 빠른 속도로 사인을 마쳤다. 그는 이혼합의서를 성유리에게 툭 던지듯 건네며 물었다. “이러면 만족해?” 성유리는 그가 건넨 서류를 받아들어 확인하더니 박한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고맙다고? 도대체 뭐가? 자기 자유를 되찾았다고 생각해서 고맙다는 건가?’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듣는 순간 그녀를 비웃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는 지금 만약 성유리에게 다른 말을 더 한다면 자기 자신을 조롱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짧은 한마디만 던졌다. “후회할 거야.” 성유리는 여전히 침묵했다. 그러자 박한빈이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너는 네가 되게 특별하다고 생각하나 본데 절대 아니야. 나도 꼭 네가 아니어도 된다고!” “나는 다른 여자를 또 찾을 거야. 그리고 그 여자랑 잘살아 볼 거고. 너한테 해준 거나 못 해준 거 다 그 여자한테 해줄 거라고!” “다시는 너한테 나를 이렇게 처참하게 짓밟을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 ‘조용히 떠나야 했는데.’ 박한빈은 그간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눴었기에 당연히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허점이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 자기 자신이 끝없이 말을 한다면 성유리의 눈에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그는 쉽게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 초등학생처럼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해 고개를 숙이지 않고 고집을 부르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러나 박한빈이 하는 말들은 성유리에게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높게 올라가는 지화 그룹의 주식은 박한빈의 승리를 증명해 줬다. 그때가 돼서야 최정민이 뛰어내린 일에 대한 사실이 공개적으로 드러났다. 배후에서 모든 일은 조정하던 사람은 예상했던 대로 박세빈이었고 그 시간 동안 그는 최정민의 은밀한 신체 부위가 찍힌 사진들로 그녀를 협박한 사실도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최정민은 박세빈에게 그간 너무 시달려 자살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녀의 옷차림이 왜 흐트러져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부검 결과에 의하면 최정민이 뛰어내린 원인은 박한빈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확정되었다. 모든 진실은 다 밝혀졌고 전에 끝없이 구설수를 퍼뜨리고 박한빈을 꾸짖던 사람들도 그제야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는 사하나마저 자기가 박한빈을 오해했다고 자책하기까지 했다. 성유리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하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럼 두 사람은...” “됐어.” 성유리는 사하나가 무슨 물음을 물어볼지 알기에 서둘러 대답을 이어갔다. “사실 전부터 나랑 그 사람 사이는 많이 흔들렸어. 서로 애쓰며 같이 있던 시간 동안 우리 둘 다 얼음 빙판을 걷는 것처럼 지냈고,” “그냥 그런대로 시간을 보내며 서로 노력하고 참는 사이는 그 누구라고 해도 다 질릴 거야.” “어떨 땐 서로한테 좋은 사이는 굳이 같이 있지 않아도 되는 거야. 평화롭게 헤어지는 것도 좋은 결과지.” 성유리의 대답에 사하나는 멍해졌다. 그러나 이내, 사하나는 성유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평화롭게 헤어진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성유리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보면... 평화롭다고 할 수 있지?” 사하나는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었지만 성유리가 행여나 불쾌해할까 봐 꾹 참았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겨울이 다 지나갔고 봄 끝자락에 성유리는 딸아이를 낳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성유리는 자기 핏줄인 아이를 갖고 싶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성유리에게 아이가 태어나면 위
“엄마, 엄마!” 성유리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느라 처음엔 아이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자그마한 딸아이가 주방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이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성유리에게 삐쳤는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엄마, 왜 내가 불러도 대답 안 해요?” “미안해.” 성유리는 환풍기를 급히 끄며 아이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화장실 다녀왔어요. 엉덩이 닦아야 돼요.” 성유리는 이미 바지를 스스로 다 입고 나온 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그럼 우리 닦는 김에 바지도 바꿔 입을까?” 아이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바지를 내려다보며 아무 반박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그런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성유리가 아이에게 겨우 새 바지로 갈아입히자마자 벨 소리가 집안에 울렸다. “이모 왔나 봐요!” 아이는 벨 소리를 듣고 잔뜩 신나 하며 현관으로 뛰어갔다. 벨을 누른 사람을 확인한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이모!” “역시 우리 하늘이가 나를 제일 반겨주네.” 사하나는 만족한 듯 옅은 미소를 지어주며 하늘이에게 물었다. “하늘이 요즘 이모 생각 자주 했어?” 하늘이는 사하나의 물음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모가 하나만 물어볼게. 이모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지?” 사하나가 이런 질문을 물어볼지 예상도 못 했는지 하늘이는 쭈뼛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고작 2살 된 어린아이일 뿐인 하늘이는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자 고개를 돌려 엄마인 성유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하늘이를 도와주려는 생각이 하나도 없는지 웃으며 옆에 물러섰고 하늘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은근히 기대를 하는 것 같았다. 하늘이는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더니 사하나에게 대답해 줬다. “여기로 이모 생각했어요.” 하늘이의 대답에 사하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얼른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쩜 이렇게 똑똑할까? 너 왜 이렇게 귀여워?” “나는
하지만 사하나의 말에 하늘이는 예전 기억이 떠올랐는지 주저하기 시작했다. 성유리를 잠시 바라보던 아이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난 엄마랑 잘래요.” 성유리는 하늘이의 의사를 확인한 뒤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사하나는 눈치를 살피다 그녀에게 물었다. “전에 제가 소개시켜 드린 그 남자는 왜 만나러 가지 않으세요?” “그러는 넌 왜 안 만나는데?” 성유리가 되물었다. “전... 아직 결혼에 관심이 없어서요.” “네 생각엔 난 결혼에 관심이 있어 보이나 보지?” 성유리의 말에 사하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조금 뒤, 사하나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꺼냈다. “언니 혼자 애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러죠. 딱 저번처럼 말이에요. 새벽에 하늘이가 갑자기 열이 올랐을 때 언니 혼자 밤을 새가면서 아이를 챙겼잖아요.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은데도 언니한테 물 한 잔 떠다 줄 사람도 옆에 없고.” “그건 그냥 우연일 뿐이야. 그리고 결혼하면 그 남자가 나를 챙겨줄 것 같아? 아마 내가 애를 둘 키우는 거랑 똑같아질걸.” 성유리의 말에 사하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필경 그녀 본인도 남자에 대해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기에 결혼을 미루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도대체 웬일인지 사하나는 이런 일을 자신이 맞닥뜨린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성유리가 이런 삶을 살고 있으니 자꾸만 분노가 치밀고 화가 났다. 사하나는 지금 본인이 표정 관리를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성유리는 단번에 그녀의 감정을 알아차렸다. 성유리는 머릿속에 어떠한 추측이 떠올랐는지 사하나에게 물었다. “금성 쪽에 무슨 일 생겼어?” “네? 무슨 일이요? 저는 모르는데? 언니 뭐 들으셨어요?” 서로를 본 시간이 늘면 늘 수록 사하나는 성유리 앞에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애써 부정하며 아무렇지 않은척 하지만 성유리는 그녀가 그럴수록 더욱 확신했다. 그래서
성유리가 그린 만화가 방영되는 곳은 경운시였다. 이미 이런 경험이 몇 번이나 있는 성유리지만 이번에 작가 팀에 합류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대본은 아직 검토 중이지만 드라마는 이미 시작되었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으니 그들은 만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을 때 빨리 기회를 뺏어야 했다. 성유리는 처음으로 현장에 간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 종일 그들과 같이 있은 적은 처음이었다. 하늘이도 당연히 성유리와 함께였다. 그러나 너무 바빠 하늘이를 챙길 여력이 부족해 성유리는 가정부를 고용했다. 이러면 자신이 하늘이를 미처 챙기지 못해도 가정부가 챙기기에 안전할 뿐만 아니라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성유리가 너무 쉽게 생각한 탓일까, 큰 규모의 제작이기도 하니 영화사에서는 제일 잘 나가는 배우들만 요청했다. 두 사람은 겉으론 사이가 좋은 척 하하 호호 웃었지만 팀은 하나같이 너무 실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대본마저 하루에도 몇 번씩 고치고 바꾸기 일쑤였다. 성유리는 매일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하늘이를 며칠이나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하늘이는 성유리를 원망하지도 않고 매일 호텔에서 얌전히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사하나가 하늘이를 세뇌시킨 건지, 하늘이는 성유리가 돌아올 때마다 그녀에게 잘생긴 삼촌이랑 사귀냐고 물었다. 성유리는 아이가 말한 잘생긴 삼촌이 누군지 안다. 그건 바로 이번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자 올해 제일 많은 인기를 누리는 이우빈이였다. 하늘이는 호텔에서 그와 두 번을 마주쳤기에 이우빈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는 성유리에게 저 남자가 자기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성유리는 몇 번이나 하늘이에게 설명을 해주며 안 된다고 대답했지만 아이는 새까맣게 잊은 건지 자꾸 물었고 그게 반복되자 성유리는 포기해 버렸다. 그날은 업무가 평소처럼 바쁘지 않았기에 성유리는 하늘이를 데리고 현장에 향했다. 이우빈을 발견한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인사를 건넸다.
현장에 사람이 너무 많기에 그들은 하늘이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너무 예쁘게 생겨 그들은 아역 배우인 줄 알아 부감독을 불러오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하늘이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두 주먹을 꽉 쥐고 머리카락을 찰랑찰랑 흔들며 걸어가는 하늘이의 모습은 잔뜩 성난 수탉 같았다. 성유리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대본에 대해 상의하고 있다가 씩씩거리며 걸어오는 하늘이를 보고는 잔뜩 당황하며 물었다. “왜 그래?” 하늘이는 아무 말도 없이 의자에 앉더니 자신의 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셔대기 시작했다. 성유리는 옆에 있는 사람한테 양해를 구한 뒤, 하늘이에게 다가가 다시 물었다. “왜 그래? 심심해서 그러는 거야?” “오늘 평소보다 빨리 끝날 것 같아. 엄마가 끝나면 하늘이 데리고 백화점 가서 놀아줄게. 응?” 하늘이는 성유리를 지그시 쳐다만 볼 뿐이었다. 그녀는 아이가 먼저 대답할 때까지 천천히 기다려줬고 한참 후, 하늘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있기 싫어. 이우빈 아저씨 보기도 싫어.” 하늘이가 계속 말했다. “집에 갈래요. 가서 이모랑 놀고 싶어.” “지금? 엄마는 지금 못 가는데.” 성유리는 아이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이렇게 하자. 하늘이가 엄마랑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주면 엄마가 이모한테 전화할게. 오늘 밤에 시간 있으면 하늘이 데리러 오라고 할까?” 성유리의 목소리는 다정다감하기 그지없었고 아이를 달래며 머리도 쓰다듬어줬다. 하늘이는 성유리의 위로를 받고는 서서히 진정되었고 코를 쓱 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잡고 자신이 일해야 하는 자리로 돌아갔고 아이를 안은 채로 업무를 봤다. 촬영은 빠르게 끝났지만 이우빈 일행은 성유리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 “성유리 선생님, 할 말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이우빈을 주위를 둘러보다 여자 주인공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평등하게 “대결”을 펼칠 수 있었지만
“그러니까 이모! 꼭 그 삼촌보다 저 잘생긴 남자를 찾아야 돼요. 삼촌보다 백배, 아니 만 배 잘생긴 사람!” 어느 한 패스트푸드 점, 하늘이는 감자튀김을 먹으며 사하나에게 말했다. 사하나는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줄 알고 헐레벌떡 뛰어왔지만 아이의 말을 듣고 나서야 별일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하늘이의 말에 대답했다. “그런 말들은 다른 사람이 한 거지 이우빈 그 사람이랑 상관이 없잖아. 이모 생각엔 이우빈 씨도 네 엄마한테 관심이 있어 보이는데?” 하늘이는 사하나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안 돼요. 그 삼촌은 제 아빠가 될 자격이 없어요.” 사하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웃어 보였다. 감자튀김을 맛있게 먹고 있던 하늘이는 갑자기 차가운 액체가 자신의 입가에 닿는 느낌을 받았고 손으로 쓱 만져보았다. 어린아인지라 하늘이는 케첩인 줄 알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사하나가 깜짝 놀라며 다가와 말했다. “왜 갑자기 코피가 나는 거야? 빨리 업혀. 이모랑 병원 가자!” ... 이건 성유리가 현장에서 날밤을 샌 두 번째 날이었다. 이우빈의 설득 하에 성유리는 결국 그에게 두 장면을 더 추가해 줬고 내용은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랑 상의하며 하나씩 적어 갔다. 감독마저 아주 흡족해하며 박수를 쳤지만 여자 주인공 쪽은 불만이 가득한 눈치였다. 여자 주인공이랑 마주치기를 꺼리던 성유리는 끝나면 바로 몰래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 주인공의 매니저는 어느새 성유리를 찾아와 먼저 말을 걸었다. “성유리 선생님, 저희 그 추가된 두 장면 때문에 할 말이 있어서...” 매니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의 핸드폰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더니 정신없이 현장을 떠나갔다. “선생님! 성유리 선생님!” 매니저는 뒤에서 몇 번이나 성유리를 불렀지만 그녀는 망설이지도 않고 발걸음을 옮겼고 매니저는 화가 나 이빨을 꽉 깨물었다. “어떻게 됐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사하나는 성유리의 감정을 알아차리곤 곧바로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언니도 결국 하늘이의 미래를 위해 이렇게 하는 거잖아요.” “이렇게 합시다. 어차피 전 별로 바쁜 일도 없으니까 이번에 하늘이가 다 나으면 내가 애를 데리고 금청으로 먼저 돌아가죠. 가서 우리 부모님 댁에서 지낼게요.” “그분들도 손녀 얘기를 오래전부터 하셨거든요. 비록 의붓손녀지만 똑같이 사랑해 주실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하나는 그녀가 자신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기에 지금 당장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일단 이렇게 합시다. 언니도 피곤할 테니 오늘 밤은 내가 있을게요. 언니는 들어가서 좀 쉬세요.” “아니. 네가 먼저 들어가. 난 여기 있을게.” “하지만...” “지금 내가 들어가면 제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아?” 성유리의 이 질문에 사하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사하나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성유리는 한참 후에야 하늘이의 침대 옆으로 천천히 다가가 앉았다. 아이는 오늘 채혈을 해서 그런지 팔뚝에는 여전히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작은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하늘이에게 손을 뻗어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혹시 깰까 봐 망설이다가 성유리는 결국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한참 동안 가만히 하늘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하늘아.” 그 목소리는 아이를 깨우지 않을 만큼 작았는고 성유리 혼자만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며칠간 성유리는 더 바빠졌고 촬영 현장과 병원을 오가며 바삐 뛰어다녔다. 때로는 하늘이가 갑자기 뭔가 먹고 싶다고 하면 호텔로 돌아가 직접 만들어 오기도 했다. 고작 일주일 만에 그녀는 몸무게가 5kg이나 빠졌고 얼굴은 많이 초췌해졌다. 사하나조차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성유리는 마
하늘이는 박한빈을 힐끔 쳐다보다 다시 성유리를 쳐다보기를 반복했다.“회전목마.”그러던 아이는 결국 박한빈의 질문에 대답해 줬다.“회전목마만 좋아해? 후룸라이드나 바이킹은 놀아봤어? 롤러코스터는? 놀이공원에는 밤이면 공연도 하고 퍼레이드도 하는데 본 적 있어? 하늘이는 공주들이나 다른 만화 캐릭터랑 같이 사진 찍고 싶지 않아?”놀이공원에 관한 프로젝트 또한 박한빈은 해본 적이 있다. 그렇기에 한 번도 직접 놀이공원으로 향한 적은 없어도 각종 놀이기구나 시설, 공연 등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신바 좋아한다고 했지?”박한빈은 문득 하늘이가 늘 가지고 다니던 사자 인형이 떠올랐다.“거기 있는 무대에는 아마 신바도 있을 거야. 네가 원한다면 난 너를 데리고 그곳으로 갈 수도 있고.”비록 성유리는 지금 박한빈의 말이 내키지 않았지만 하늘이는 달콤한 그의 유혹에 서서히 흔들리고 있었다.아이의 친엄마인 성유리는 당연하게도 하늘이가 지금 박한빈의 말에 많이 흔들리고 또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특히 공연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난 하늘이의 눈은 전보다 더 반짝였다.필경 전에 몇 번 놀이공원으로 향했을 때, 시간이 안 맞아 한 번도 무대 위에서 하는 퍼레이드나 공연을 아이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건 하늘이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장면 중 하나였다. 게다가 박한빈이 말한 놀이기구들 또한 아이는 타보지 못했었다.왜냐하면 성유리가 그런 기구들을 타기를 즐기지 않기에 하늘이도 엄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매번 포기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놀고 싶으면 내가 데리고 가줄게. 공연 완전 재밌거든? 아마 넌 본 적이 없을 거야.”하늘이가 망설이는 것을 눈치챈 박한빈은 계속해서 “미끼”를 던졌다.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봤고 그녀는 아이의 눈빛을 보고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솔직히 말하면 성유리는 내심 박한빈과 하늘이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그녀는 부녀 사이가 엄청 가까워지지는 못해도 적어
박한빈은 꿈속에 나타난 연정우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번쩍 떴다.꿈 내용이 너무 소름이 끼쳐서일까, 아니면 연정우의 등장에 놀라서였을까는 몰라도 박한빈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눈을 떠서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박한빈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스스로를 다독인 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방에서 나가자마자 박한빈은 하늘이와 딱 마주쳤다.이미 치마까지 갈아입고 머리도 예쁘게 땋은 하늘이는 자신의 물컵을 손에 든 채로 거실 소파에 앉아 성유리를 기다리고 있었다.인기척이 들리자 아이는 바로 뒤를 돌아보았고 박한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그리고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박한빈은 만약 예전 같았으면 그런 하늘이를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조금 망설이던 그는 하늘이한테 천천히 다가가며 먼저 말을 걸었다.“지금... 나가려는 거야?”어린아이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박한빈은 지금 아무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해도 말투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그렇기에 그가 한 질문은 마치 경찰이 죄인을 조사하는 것처럼 들렸다.하늘이는 그런 박한빈을 한동안 가만히 쳐다보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네.”“어디 가는데?”박한빈이 또 물었다.“저도 몰라요.”아이의 대답에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차린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가 무슨 물음을 더 물어보려고 입을 움찔거리는 그때, 성유리가 방 밖으로 나왔다.그녀는 연한 색의 티셔츠와 하얀색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전과 달리 머리는 한껏 밑으로 묶어져 있었고 화장도 연하게 했다.최근 많이 야윈 성유리는 지금 벨트를 매고 입음에도 허리는 너무 얇아 살짝 밀면 부러질 것 같았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어디 가?”성유리는 먼저 하늘이를 자신의 뒤에 세워두고는 대답했다.“아이랑 같이 밖에 가서 놀아주려고요.”“어디 가서 놀아줄 건데?”박한빈의 계속되는 물음에 성유리는 인상을 썼지만 멈칫하다 결국 순순히 대답을 이어갔다.“놀이공원이요. 근데 저희
박한빈은 계속 성유리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추궁하기 시작했다.성유리는 그에게 떠밀리듯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등 뒤로 발코니의 유리문이 닿고 나서야 더는 물러날 곳이 없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생각이 너무 많으신 거 아니에요?”성유리가 계속 말했다.“제가 굳이 말하지 않은 건 그 일이 저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던 박한빈이 뚝 멈췄다.성유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그건 박한빈 씨와 안희연 씨 사이의 문제예요. 제가 관여하거나 평가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박한빈 씨 주변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당신 곁에 있는지는 저와 전혀 상관없고요.”그녀는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이어갔다.“이제 비켜주실래요?”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얼굴에 띠고 있던 모든 표정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박한빈은 성유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 얼굴 어딘가에서 감정의 틈이나 흔적을 찾아내려는 듯 말이다.그러나 성유리에게서 보이는 표정은 아무것도 없었다.성유리는 여전히 담담하게 박한빈과 두 눈을 마주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이 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돌려 그를 지나쳐 나가려 했다.그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팔을 꽉 잡았다.“내가 가도 된다고 말했나?”“이 손 놔요.”성유리의 목소리는 더 이상 차분하지 않았고 어딘가 지친 듯 낮고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그러나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계속 말했다.“내가 왜 놔야 하지? 아이 수술 끝났으니 이제 나랑은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상관없다면 왜 여기 살고 있는데?”그 말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지만 금세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그런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면 제가 죄송해요. 박 대표님.”그러자 박한빈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저와 하늘이가 여기 머무는 건 박한빈 씨 어머니의 부탁 때문이에요.”성유리는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어머니는 하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하늘이는 깜짝 놀라 온몸을 성유리 품에 안겼다.아이의 눈은 박한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는 하늘이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성유리를 응시했다.“나와.”그가 입을 열자 하늘이는 성유리의 손을 꼭 붙잡았다.“엄마. 가지 마.”하늘이가 박한빈을 꺼리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진정으로 박한빈을 두려워하는 것이 느껴졌다.하늘이가 성유리를 꼭 붙잡고 있는 손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괜찮아. 엄마가 잠깐 일 보고 올게.”“싫어!"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떼를 부렸다.성유리는 문과 아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박한빈은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는데 그의 굳게 다문 입술과 굳은 표정은 날카롭고 위압적이었다.하늘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성유리의 손을 세게 붙잡았다.결국, 성유리는 옆에 있던 작은 사자 인형을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여기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 금방 올게. 알겠지?”하늘이는 여전히 싫다는 표정을 지었지 문 앞에 서 있는 박한빈을 보며 더 큰 두려움이 생겼는지 마지못해 성유리의 손을 놓았다.“엄마, 빨리 와. 나 무서워.”“알았어. 걱정하지 마.”성유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자 곧바로 뒤돌아섰다.두 사람은 그렇게 2층 거실의 발코니에 나란히 섰고 박한빈이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오늘 어디 갔었어?”성유리는 이 시간에 박한빈이 굳이 이런 식으로 찾아와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잠시 멍하니 서 있던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나 씨랑 백화점 갔어요. 왜요?” “그다음은? 너 나한테 할 말 없어?”박한빈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그의 시선은 성유리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그제야 성유리는 박한빈이 왜 이러는지 깨달았고 그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알게 되셨어요
그의 행동은 매우 빨랐다.어찌나 빠른지 사하나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받으려던 순간 손가락이 박한빈의 차 문에 끼일 뻔했다.그러나 박한빈은 사과 한마디 없이 운전기사에게 차를 출발시키라고 지시했고 그대로 떠나버렸다.사하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박한빈의 차를 향해 소리쳤다.“박한빈, 너 미쳤어? 감정 조절도 못 하는 미친놈!”“그래! 너 같은 놈이 그런 여자한테 배신당해도 싸지.”박한빈은 사하나의 말을 당연히 듣지 않았다.사실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차에 올라탄 후, 박한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안희연에게 연락하는 것이었다.그러자 안희연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박 대표님.”“오늘 성유리를 만났어?”박한빈은 안희연 앞에서 성유리라는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던 터였다.더군다나 그녀가 금성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모습을 감췄던 터라 성유리라는 이름은 안희연에게 낯설게 들렸다.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박한빈과 관련된 여자를 떠올리며 대상을 짚어낸 후 대답했다.“아뇨. 못 만났는데요.”“오늘 백화점에 갔다며?”“네.”“누구랑 같이 갔지?”안희연은 말이 없었다.그러자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계속 물었다.“안희연, 우리 계약 관계에 대해서 내가 굳이 다시 설명해 줘야 하나?”“그런 거 아니에요. 박 대표님, 제가 다 설명할게요.”박한빈은 지금 그녀의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안희연이 급히 말했다.“그래서 그 성유리라는 분이 박 대표님에게 고자질한 건가요? 그렇다면 박 대표님께 아직 미련이 있다는 뜻 아닌가요?”안희연은 박한빈이라는 사람은 잘 모르지만 남자의 심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난 몇 년간 라이브 방송에서 수많은 남자들을 보아왔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박한빈의 민감한 포인트를 정확히 짚었다.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그러자 안희연이 계속 말했다.“박 대표님, 그 여자가 뭐라고 말
성유리의 대답을 들은 후, 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엔젤 월드를 떠났다.그가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마침 그곳에 서 있는 사하나와 딱 마주쳤다.성유리와의 관계 때문에 사하나는 박한빈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비록 사하나가 처한 위치에서는 박한빈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사하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마음이 없다 못해 겉으로 좋은 척, 마음에 드는 척조차 하지 않을 정도였다.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사하나는 박한빈을 보자마자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는 손까지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박 대표님, 안녕하세요?”박한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그리고는 바로 자신의 차에 오르려고 했다.그러나 사하나가 그를 그냥 보내줄 리 없었다.안희연의 일로 큰 한방을 터뜨리고 싶었던 사하나였지만 생각해 보면 성유리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겉으로 보면 사하나와 박한빈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이였다.그가 어떤 일을 당하든 그것은 다 사하나와 무관했다.그러나 만약 사하나가 일을 크게 만들면 박한빈은 분명 성유리와 연결 지어 생각할 것이고 어쩌면 그녀가 성유리를 통해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다.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넘어가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박한빈이 차에 타려는 순간, 사하나는 서둘러 그를 따라가며 말을 걸었다.“박 대표님, 제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새 여자 친구가 생기셨다면서요? 팬이 많다는 그 인플루언서 맞죠?”그 말을 들은 박한빈은 발걸음을 뚝 멈추고 사하나를 뒤돌아보았다.사하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의문과 함께 묘한 기대감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그녀는 그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하려던 말을 멈추지 않았다.“대표님과 안희연 씨 관계는 요즘 어떠신가요?”“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바로 하세요.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박한빈은 손목시계를 힐끗 보며 대답했고 그의 불쾌함은 행동과
“근데 이모는 왜 웃는 거야?"“갑자기 재밌는 일이 떠올라서 그래.”“맞아. 나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사하나는 성유리의 말에 따라 멋쩍게 웃어 보이더니 계속 말했다.“가자. 하늘이, 이모가 집에 데려다줄게."“음...”하늘이는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아이에게 진짜 이유를 설명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그래서 아이 또한 더 이상 캐묻지 않았고 사하나는 직접 차를 몰아 그들을 엔젤 월드로 데려다주었다.가는 길 내내 사하나의 기분은 최고조였다. 핸들을 잡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금 당장이라도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어 호텔에서 불륜을 적발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샘솟았다.하지만 그녀는 꾹 참았다.단순히 박한빈 혼자서만 불륜 현장을 적발해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사하나는 이 사실을 모임 사람들에게도 알려 박한빈의 체면이 바닥까지 떨어지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제발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마.”뒷좌석에서 앉아 있던 성유리가 차분히 말했다.그러자 사하나는 멈칫하며 되물었다.“제가 뭘요?”성유리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어쨌든 그건 남의 일이야. 괜히 끼어들지 마.”사하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성유리의 말에 대꾸했다.“그 말이 참 어이없네요. 제가 이 일을 박한빈 씨한테 말하면 그 사람은 저한테 고맙다고 해야 돼요. 제가 아니었으면 평생 속고만 살았을 거잖아요.” “하지만 제가 굳이 먼저 말할 필요는 없죠. 지금 사람들 눈에는 박한빈 씨가 완전 호구로 보일 테니까요. 그게 바로 자업자득 아니겠어요?”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한빈이 호구인지 아닌지 그것은 그녀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사하나는 혀를 끌끌 차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진짜 자업자득이죠. 지금 박한빈 씨 주변에 있는 여자들 중에 그 사람 돈이나 지위를 노리지 않는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솔직히 이 세상엔 언니 같은 사람은 없을...”말을 이어가던 사하나는 갑자기 뚝 멈췄고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
성유리는 사하나의 마지막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사실 유효정의 집안이 몰락한 이유가 누구 때문인지 성유리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이제 와서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하늘이가 회전목마에서 내려오자 둘은 함께 그곳을 나왔다.아이는 너무 신나게 놀아 얼굴에 땀이 잔뜩 맺혀 있었다.성유리가 하늘이의 땀을 닦아주기 위해 몸을 숙이려는 순간, 옆에 있던 사하나가 갑자기 손을 뻗어 성유리의 팔을 꽉 잡았다.너무 갑작스러운 사하나의 행동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는 한편 잡혀있는 팔이 너무 아팠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사하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성유리의 손을 잡은 채 앞쪽을 가리켰다.“언니, 저기 빨리 봐요! 저 사람 누구예요?"사하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었고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키지도 않았다.성유리는 대체 사하나가 왜 이러는지 궁금해 그녀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았다.현재 그들은 쇼핑몰에 있었고 방학 기간이라 오고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그렇기에 성유리는 사하나가 말한 사람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채지 못했다.사하나는 그런 성유리가 답답한 듯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언니 바로 앞에. 브랜드 매장 들어가려는 여자 말이에요!"성유리는 이날 안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멀리 있는 사람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다행히 매장 조명이 밝았고 그 여자의 검은 웨이브 머리가 눈에 띄었기에 뒤늦게 그녀가 누군지 알아챘다.그 여자는 다름 아닌 박한빈의 새 여자 친구, 안희연이었다.“봤어. 근데 그래서?"성유리가 물었다.“언니 진짜 둔하네요. 안희연 씨 옆에 있는 남자는 못 보셨어요?”성유리는 안희연을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기 때문에 옆에 있는 남자를 볼 여유는 없었다.안희연과 남자는 이미 매장 안으로 들어갔으니 사하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성유리를 끌고 같은 매장으로 향했다.“우리는 왜 들어가?”성유리는 사하나의 의도를 눈치채 재빨리 물었고 사하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당연히 확인해야죠! 둘이 무슨 관계인지 말이
그로부터 며칠 동안 성유리는 박한빈을 다시 볼 수 없었다.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도 박한빈이 이곳에 자주 오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었으니까.그 안희연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사하나가 성유리에게 알려주었다.“전에 인터넷 방송하던 사람이래요. 지금도 스트리머로 활동 중인 것 같고요.”사하나는 말하며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눈에 인터넷 방송은 그다지 품격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특히 안염처럼 외모가 괜찮은 여자는 더더욱.사하나는 성유리에게 안희연이 진행했던 방송 영상을 보여주었다.화면 속의 안희연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카메라 앞에서 웃으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은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그게 다예요?"그러자 사하나는 눈을 부릅뜨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아무 의견도 없어요?"“내가 무슨 의견을 말해야 되는데?"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의아해하며 되물었다.“음... 예쁘긴 하네.”“그거 다 필터예요! 그리고 얼굴에 화장 얼마나 두껍게 발랐는지 안 보여요?”“그래도 이 업계가 원래 그런 거 아니야?”“그렇긴 해요. 그런데 이번엔 박한빈 씨 취향이 진짜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어떻게 이런 수준인 여자랑 만날 수 있죠? 눈이 이렇게 낮아졌나?”성유리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냥 둘이 좋으면 된 거지. 네가 왜 이렇게 신경 써?"“그냥 보기 불편해서 그래요.”사하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금세 화제를 돌렸다.“언니는요? 요즘 연정우 씨랑 만난 적 있어요?”“아니."“왜요? 그 사람이 언니한테 연락 안 했어요?”“그런 건 아닌데 그냥 내가 만나고 싶지 않아.”“왜요? 저는 연정우 씨 참 괜찮은 사람 같던데. 두 사람 옛날에 결혼까지 거의 갈 뻔했잖아요. 지금 다시 잘될 기회가 생긴 거면 좋은 거 아닌가요?”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건 다 지나간 일이야. 지금은 그런 거 생각하고 싶지 않아.”“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