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451화

Author: 송진
얼마 안 지나 박한빈은 실은 차는 도연제에 도착했다.

박한빈은 요 며칠 머릿속으로 항상 성유리의 상황을 생각하고 걱정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그는 박세빈이 설계한 “덫”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진즉에 눈치챘다.

필경 그날 밤, 만약 그 전화 한 통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곳에 성유리가 최정민과 함께 있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박한빈은 늦은 시간에 최정민을 만나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박한빈은 그 사람들이 행여나 성유리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을까 봐 걱정되었다.

경찰서에 있는 내내 불안하고 급한 마음에 안절부절 하던 박한빈이었지만 항상 성유리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고 어떻게 해야 빨리 벗어날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막상 집에 도착하니 박한빈은 망설였다. 한참을 현관에 서 있던 그는 가사도우미가 문을 열어줘서야 집으로 들어섰다.

박한빈을 발견한 도우미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미소를 띤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오셨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도우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박한빈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을 둘러보더니 물었다.

“성유리는요?”

입을 여는 순간 박한빈은 지금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요즘 유리는 어떻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사모님 아주 잘 지내고 계셨어요.”

분명 박한빈이 원하던 대답이었지만 아무 일도 없다는 성유리의 근황을 듣자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도우미는 박한빈의 기분을 눈치 차렸는지 말을 덧붙였다.

“제 말은 걱정하실 필요 없다는 말이었어요. 사모님은 요즘 무탈하게 지내고 계셨으니까.”

말을 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 심각해졌고 도우미는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닫아버렸다.

박한빈은 그런 도우미를 쓱 쳐다보고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시각 성유리는 자신의 방에 있었다. 그녀는 컴퓨터를 켜 미리 그려놓은 그림에 색을 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하도 평온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52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러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저녁에는... 누가 나한테 전화가 왔더라고. 네가 최정민이랑 같이 있다는 소식을 알려줘서 급히 그곳으로 간 거야.” “근데 내가 도착했을 때는 최정민을 만나지도 못했어. 걔가 자기 자신을 방안에 가두고는 바로 발코니에서 뛰어내린 거고.” “나는 도대체 왜 걔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겠어!” “나랑 걔 사이는 정말 결백해.” 박한빈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성유리에게 그날 상황을 설명해 줬다. 성유리는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박한빈의 말을 듣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박세빈이 짜놓은 판이야.” “전엔 내가 너무 방심했어. 난 걔가 최정민을 죽음으로까지 내몰 줄은 몰랐어. 근데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다 해결할게. 넌 먼저...” “됐어요.” 박한빈은 다른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성유리가 그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 가벼운 한마디일 뿐이지만 박한빈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져 갔다. 그는 성유리를 가만히 쳐다보다 물었다. “무슨 뜻이야?” “박한빈 씨 스스로 말했잖아요. 이건 박세빈 씨가 짜놓은 판이라고. 그럼... 이건 두 형제지간의 싸움 아니겠어요?” “전 이런 일에 참견하는 것은 딱 질색이에요. 이번엔 그냥 얼굴을 다쳤을 뿐이지만 다음에는요? 혹시나 죽을지 누가 알아요?”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일은 꽤 심각하지 않나요? 요즘 지화 그룹의 주식들을 확인해 보세요. 그냥 풍비박산 났다고 볼 수 있어요. 투자자들이나 이사회 쪽 사람들은 박한빈 씨에게 대가를 치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지금 당신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박한빈 씨가 제일 잘 알 거예요.” “그래서? 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성유리는 평온하게 말을 이어갔지만 박한빈이 갑자기 묻자 순간적으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53화

    그 눈빛에는 성유리의 진심이 가득 담겨있었고 마치 박한빈에게 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익의 평행. 이건 박한빈이 어릴 때부터 배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늘 이 방면에서 자신은 우수하다고 생각했다. 업계에서나 다른 방면에서 박한빈은 자신의 실력으로 높은 위치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는 꿈에서도 지금 자신이 평행한 이익 관계에서 질 줄은 몰랐고 이렇게 처참하게 버려질 줄도 몰랐다. 박한빈은 꼭 잡고 있던 성유리의 손을 놓아주더니 뒤로 물러섰다. “무슨 뜻이야?”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성유리에게 계속 물었다. “나를 떠나려는 이유가 바로 이거야?” “성유리. 지금 네가 최정민 때문이라고 한마디만 했으면 나는 널 용서할 거야.” “그 말을 하면 네가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확실하니까. 내가 다른 여자랑 이런저런 구설수에 올랐다는 사실에 불쾌해한다는 거니까. 안 그래?” 박한빈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니야. 네가 어떻게 질투했겠어? 정말 나를 신경 썼다면 요즘 이렇게 잘 지내지도 못했을 거야. 유리야, 내가 경찰서에 있던 며칠 동안 넌 나를 걱정이나 했어?” “아니면 넌 내가 그 안에서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었니? 며칠 동안 넌 나랑 어떻게 해야 이혼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그는 입꼬리를 올린 채 웃고는 있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끝없는 냉랭함과 음침함, 그리고 눈빛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낯선 감정도 보였다. 성유리는 박한빈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박한빈이 말한 것대로 성유리는 그를 속일 생각마저 없는 것 같았다.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보며 이빨을 꽉 깨물었다. 요즘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 또다시 위가 아팠지만 신기하게도 지금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지그시 감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지금 지화 그룹 상황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지. 원래 난 바로 회사로 갔어야 하는데 그래도 난 회사가 아닌 너를 먼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54화

    성유리는 이혼합의서를 박한빈에게 건넸다. 박한빈은 위에 적힌 성유리의 사인을 확인하고는 실성한 듯 웃더니 말했다. “너는 전부터 다 준비해 뒀구나.”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한빈은 굳은 표정으로 조금 서 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펜을 꺼내 들며 합의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어릴 때 글을 배우고부터 자기 이름 석 자를 수없이 썼던 박한빈이기에 그는 펜을 꺼내 들자마자 빠른 속도로 사인을 마쳤다. 그는 이혼합의서를 성유리에게 툭 던지듯 건네며 물었다. “이러면 만족해?” 성유리는 그가 건넨 서류를 받아들어 확인하더니 박한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고맙다고? 도대체 뭐가? 자기 자유를 되찾았다고 생각해서 고맙다는 건가?’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듣는 순간 그녀를 비웃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는 지금 만약 성유리에게 다른 말을 더 한다면 자기 자신을 조롱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짧은 한마디만 던졌다. “후회할 거야.” 성유리는 여전히 침묵했다. 그러자 박한빈이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너는 네가 되게 특별하다고 생각하나 본데 절대 아니야. 나도 꼭 네가 아니어도 된다고!” “나는 다른 여자를 또 찾을 거야. 그리고 그 여자랑 잘살아 볼 거고. 너한테 해준 거나 못 해준 거 다 그 여자한테 해줄 거라고!” “다시는 너한테 나를 이렇게 처참하게 짓밟을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 ‘조용히 떠나야 했는데.’ 박한빈은 그간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눴었기에 당연히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허점이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 자기 자신이 끝없이 말을 한다면 성유리의 눈에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그는 쉽게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 초등학생처럼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해 고개를 숙이지 않고 고집을 부르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러나 박한빈이 하는 말들은 성유리에게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55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높게 올라가는 지화 그룹의 주식은 박한빈의 승리를 증명해 줬다. 그때가 돼서야 최정민이 뛰어내린 일에 대한 사실이 공개적으로 드러났다. 배후에서 모든 일은 조정하던 사람은 예상했던 대로 박세빈이었고 그 시간 동안 그는 최정민의 은밀한 신체 부위가 찍힌 사진들로 그녀를 협박한 사실도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최정민은 박세빈에게 그간 너무 시달려 자살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녀의 옷차림이 왜 흐트러져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부검 결과에 의하면 최정민이 뛰어내린 원인은 박한빈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확정되었다. 모든 진실은 다 밝혀졌고 전에 끝없이 구설수를 퍼뜨리고 박한빈을 꾸짖던 사람들도 그제야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는 사하나마저 자기가 박한빈을 오해했다고 자책하기까지 했다. 성유리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하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럼 두 사람은...” “됐어.” 성유리는 사하나가 무슨 물음을 물어볼지 알기에 서둘러 대답을 이어갔다. “사실 전부터 나랑 그 사람 사이는 많이 흔들렸어. 서로 애쓰며 같이 있던 시간 동안 우리 둘 다 얼음 빙판을 걷는 것처럼 지냈고,” “그냥 그런대로 시간을 보내며 서로 노력하고 참는 사이는 그 누구라고 해도 다 질릴 거야.” “어떨 땐 서로한테 좋은 사이는 굳이 같이 있지 않아도 되는 거야. 평화롭게 헤어지는 것도 좋은 결과지.” 성유리의 대답에 사하나는 멍해졌다. 그러나 이내, 사하나는 성유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평화롭게 헤어진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성유리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보면... 평화롭다고 할 수 있지?” 사하나는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었지만 성유리가 행여나 불쾌해할까 봐 꾹 참았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겨울이 다 지나갔고 봄 끝자락에 성유리는 딸아이를 낳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성유리는 자기 핏줄인 아이를 갖고 싶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성유리에게 아이가 태어나면 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56화

    “엄마, 엄마!” 성유리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느라 처음엔 아이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자그마한 딸아이가 주방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이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성유리에게 삐쳤는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엄마, 왜 내가 불러도 대답 안 해요?” “미안해.” 성유리는 환풍기를 급히 끄며 아이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화장실 다녀왔어요. 엉덩이 닦아야 돼요.” 성유리는 이미 바지를 스스로 다 입고 나온 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그럼 우리 닦는 김에 바지도 바꿔 입을까?” 아이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바지를 내려다보며 아무 반박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그런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성유리가 아이에게 겨우 새 바지로 갈아입히자마자 벨 소리가 집안에 울렸다. “이모 왔나 봐요!” 아이는 벨 소리를 듣고 잔뜩 신나 하며 현관으로 뛰어갔다. 벨을 누른 사람을 확인한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이모!” “역시 우리 하늘이가 나를 제일 반겨주네.” 사하나는 만족한 듯 옅은 미소를 지어주며 하늘이에게 물었다. “하늘이 요즘 이모 생각 자주 했어?” 하늘이는 사하나의 물음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모가 하나만 물어볼게. 이모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지?” 사하나가 이런 질문을 물어볼지 예상도 못 했는지 하늘이는 쭈뼛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고작 2살 된 어린아이일 뿐인 하늘이는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자 고개를 돌려 엄마인 성유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하늘이를 도와주려는 생각이 하나도 없는지 웃으며 옆에 물러섰고 하늘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은근히 기대를 하는 것 같았다. 하늘이는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더니 사하나에게 대답해 줬다. “여기로 이모 생각했어요.” 하늘이의 대답에 사하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얼른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쩜 이렇게 똑똑할까? 너 왜 이렇게 귀여워?” “나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57화

    하지만 사하나의 말에 하늘이는 예전 기억이 떠올랐는지 주저하기 시작했다. 성유리를 잠시 바라보던 아이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난 엄마랑 잘래요.” 성유리는 하늘이의 의사를 확인한 뒤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사하나는 눈치를 살피다 그녀에게 물었다. “전에 제가 소개시켜 드린 그 남자는 왜 만나러 가지 않으세요?” “그러는 넌 왜 안 만나는데?” 성유리가 되물었다. “전... 아직 결혼에 관심이 없어서요.” “네 생각엔 난 결혼에 관심이 있어 보이나 보지?” 성유리의 말에 사하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조금 뒤, 사하나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꺼냈다. “언니 혼자 애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러죠. 딱 저번처럼 말이에요. 새벽에 하늘이가 갑자기 열이 올랐을 때 언니 혼자 밤을 새가면서 아이를 챙겼잖아요.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은데도 언니한테 물 한 잔 떠다 줄 사람도 옆에 없고.” “그건 그냥 우연일 뿐이야. 그리고 결혼하면 그 남자가 나를 챙겨줄 것 같아? 아마 내가 애를 둘 키우는 거랑 똑같아질걸.” 성유리의 말에 사하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필경 그녀 본인도 남자에 대해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기에 결혼을 미루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도대체 웬일인지 사하나는 이런 일을 자신이 맞닥뜨린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성유리가 이런 삶을 살고 있으니 자꾸만 분노가 치밀고 화가 났다. 사하나는 지금 본인이 표정 관리를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성유리는 단번에 그녀의 감정을 알아차렸다. 성유리는 머릿속에 어떠한 추측이 떠올랐는지 사하나에게 물었다. “금성 쪽에 무슨 일 생겼어?” “네? 무슨 일이요? 저는 모르는데? 언니 뭐 들으셨어요?” 서로를 본 시간이 늘면 늘 수록 사하나는 성유리 앞에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애써 부정하며 아무렇지 않은척 하지만 성유리는 그녀가 그럴수록 더욱 확신했다. 그래서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58화

    성유리가 그린 만화가 방영되는 곳은 경운시였다. 이미 이런 경험이 몇 번이나 있는 성유리지만 이번에 작가 팀에 합류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대본은 아직 검토 중이지만 드라마는 이미 시작되었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으니 그들은 만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을 때 빨리 기회를 뺏어야 했다. 성유리는 처음으로 현장에 간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 종일 그들과 같이 있은 적은 처음이었다. 하늘이도 당연히 성유리와 함께였다. 그러나 너무 바빠 하늘이를 챙길 여력이 부족해 성유리는 가정부를 고용했다. 이러면 자신이 하늘이를 미처 챙기지 못해도 가정부가 챙기기에 안전할 뿐만 아니라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성유리가 너무 쉽게 생각한 탓일까, 큰 규모의 제작이기도 하니 영화사에서는 제일 잘 나가는 배우들만 요청했다. 두 사람은 겉으론 사이가 좋은 척 하하 호호 웃었지만 팀은 하나같이 너무 실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대본마저 하루에도 몇 번씩 고치고 바꾸기 일쑤였다. 성유리는 매일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하늘이를 며칠이나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하늘이는 성유리를 원망하지도 않고 매일 호텔에서 얌전히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사하나가 하늘이를 세뇌시킨 건지, 하늘이는 성유리가 돌아올 때마다 그녀에게 잘생긴 삼촌이랑 사귀냐고 물었다. 성유리는 아이가 말한 잘생긴 삼촌이 누군지 안다. 그건 바로 이번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자 올해 제일 많은 인기를 누리는 이우빈이였다. 하늘이는 호텔에서 그와 두 번을 마주쳤기에 이우빈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는 성유리에게 저 남자가 자기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성유리는 몇 번이나 하늘이에게 설명을 해주며 안 된다고 대답했지만 아이는 새까맣게 잊은 건지 자꾸 물었고 그게 반복되자 성유리는 포기해 버렸다. 그날은 업무가 평소처럼 바쁘지 않았기에 성유리는 하늘이를 데리고 현장에 향했다. 이우빈을 발견한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인사를 건넸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59화

    현장에 사람이 너무 많기에 그들은 하늘이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너무 예쁘게 생겨 그들은 아역 배우인 줄 알아 부감독을 불러오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하늘이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두 주먹을 꽉 쥐고 머리카락을 찰랑찰랑 흔들며 걸어가는 하늘이의 모습은 잔뜩 성난 수탉 같았다. 성유리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대본에 대해 상의하고 있다가 씩씩거리며 걸어오는 하늘이를 보고는 잔뜩 당황하며 물었다. “왜 그래?” 하늘이는 아무 말도 없이 의자에 앉더니 자신의 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셔대기 시작했다. 성유리는 옆에 있는 사람한테 양해를 구한 뒤, 하늘이에게 다가가 다시 물었다. “왜 그래? 심심해서 그러는 거야?” “오늘 평소보다 빨리 끝날 것 같아. 엄마가 끝나면 하늘이 데리고 백화점 가서 놀아줄게. 응?” 하늘이는 성유리를 지그시 쳐다만 볼 뿐이었다. 그녀는 아이가 먼저 대답할 때까지 천천히 기다려줬고 한참 후, 하늘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있기 싫어. 이우빈 아저씨 보기도 싫어.” 하늘이가 계속 말했다. “집에 갈래요. 가서 이모랑 놀고 싶어.” “지금? 엄마는 지금 못 가는데.” 성유리는 아이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이렇게 하자. 하늘이가 엄마랑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주면 엄마가 이모한테 전화할게. 오늘 밤에 시간 있으면 하늘이 데리러 오라고 할까?” 성유리의 목소리는 다정다감하기 그지없었고 아이를 달래며 머리도 쓰다듬어줬다. 하늘이는 성유리의 위로를 받고는 서서히 진정되었고 코를 쓱 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잡고 자신이 일해야 하는 자리로 돌아갔고 아이를 안은 채로 업무를 봤다. 촬영은 빠르게 끝났지만 이우빈 일행은 성유리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 “성유리 선생님, 할 말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이우빈을 주위를 둘러보다 여자 주인공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평등하게 “대결”을 펼칠 수 있었지만

Latest chapter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53화

    성유정은 박한빈과 성유리의 결혼은 그저 잠깐의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확신했었다.시간이 지나 어머니가 자신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면 성유리와 이혼하고 결국 자신 곁으로 돌아올 거라고.그런데 지금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성유리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은 진짜 믿고 싶지가 않았다.그들이 정말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장면을 떠올리자 성유정은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미쳐버릴 것 같았다.아무리 애써 눌러도 눈가는 빨갛게 물들고 목소리는 떨렸으며 얼굴에는 힘들게 억누른 감정이 일그러진 채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성유리는 그런 성유정을 오랫동안 보고 있다 결국 조용히 입을 열었다.“고마워.”그때, 성유정이 김난희에게 얼버무리듯 말했다.“할머니, 저... 생각해 보니 급한 일이 있어서요. 먼저 가볼게요.”이 자리에 성유정은 더는 머물 수 없었다.그래서 김난희에게도 짧게 인사만 남긴 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쟤 왜 저래?”김난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곤 성유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어쨌든 지금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건 아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는 꼭 지켜야 해, 알겠니?”말투엔 여전히 집안 어르신의 권위가 잔뜩 실려 있었는데 마치 아이를 낳는 것이 성유리에게 내려진 대단한 영광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하지만 성유리는 이제 그런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몇 번 꾹 참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김서영이 곧 화제를 돌렸다.“며칠 전에 새로 들인 보석이 있는데 같이 올라가서 좀 볼래?”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임신 초기 석 달이 제일 중요해.”계단을 오르며 김서영이 말했다.“원래는 조용히 넘기려 했는데 이젠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비밀로 하는 것도 의미가 없겠더라.”“네 일도... 요즘은 좀 줄이는 게 좋겠어. 내가 사람 몇 명 골라서 보낼게. 하루 세 끼 챙겨주고 매일 태아 심장박동이랑 혈압 체크도 해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52화

    “유정이 왔니?”성유정은 밥을 얻어먹으러 왔다고 말했지만 김난희는 그래도 너무 반가운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성유정 또한 자연스레 김난희의 팔짱을 꼈는데 그 모습이 꼭 진짜 손녀처럼 친밀해 보였다.그러다 성유정은 성유리도 자리에 있는 걸 발견하곤 먼저 인사를 건넸다.“언니도 와 있었네?”성유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아, 맞다. 오늘이 음력설이지.”성유정은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요즘 졸업 준비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걸 깜빡했네.”“별일도 아닌데 잘 왔다. 저녁 같이 먹자.”김난희가 성유정의 말에 바로 대답했고 그녀도 군말 없이 수긍했다.그러다 성유리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걸 본 성유정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가 보려고 했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김난희가 성유정을 잡아끌며 말했다.“조심해라. 너희 언니 지금 아주 귀하신 몸이시다.”그 말은 진심인지 빈정거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성유정은 순간 멈칫하며 무심코 물었다.“왜요?”김서영이 입술을 다물고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김난희가 먼저 나섰다.“어이구, 바보야! 왜겠니? 당연히 네 언니가 임신했으니까 그렇지.”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유정의 얼굴에 띠고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던 성유정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임신? 임신했다고? 언니가... 진짜 임신한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한빈 오빠는 분명 언니를 좋아하지 않았잖아. 엄마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거 아니었어? 두 사람의 결혼은 명목뿐인 관계라고... 분명히 언니가 그때 인정했었는데?’수많은 생각이 들어 머릿속은 복답했지만 성유정의 시선은 성유리에게 고정돼 있었다.‘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거잖아!’성유정은 가슴 깊숙한 곳을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찌른 것처럼 아팠고 숨이 막힐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표정 관리를 할 틈도 없이 그 눈빛엔 마치 성유리를 갈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51화

    오늘 밤 박한빈은 꽤 일찍 집에 돌아왔다.성유리가 저녁을 먹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평소와 달리 박한빈이 집에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하지만 박한빈은 태연하게 그녀를 불렀다.“밥 먹자.”그제야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결혼한 이후, 두 사람이 이렇게 같이 저녁을 먹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매달 한 번씩 박씨 저택에 돌아갈 때면 그들도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그렇지만 성유리가 말하는 건 지금처럼 단둘이 있는 상황이었다.비록 아침에 성유정이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지만 지금 박한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참 기뻤다.그녀가 바라는 건 사실 정말 많지 않았다.이렇게 박한빈의 곁에 앉아 있을 수 있고 박한빈이 자신을 위해 작은 자리를 내어주며 조금이나마 함께 있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이미 충분히 행복했다.그래서 성유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저녁을 먹었고 결국 기다리다 못한 박한빈이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일이 좀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넌 천천히 먹고 있어.”그 말을 끝으로 박한빈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는 성유리에게 대답하거나 반응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홀로 남겨진 성유리는 그대로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박한빈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왔다.그리고 이내 작은 상자를 성유리 앞에 내려놓았다.“선물.”예상치 못한 상황에 성유리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지금 성유리의 눈은 반짝였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성유리의 반응이 너무 컸던 탓인지 박한빈의 눈빛도 순간 흔들렸다.“저... 주시는 거예요?”성유리가 묻고 나서야 박한빈이 정신을 차린 듯 짧게 대답했다.“응.”“고마워요.”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매도 부드럽게 휘어졌다.원래도 예쁘고 화사했던 얼굴이 그 순간 더욱 생기 넘치게 변했다.박한빈은 너무 아름다운 성유리의 모습을 보며 무의식중에 눈을 가늘게 떴다.그와 눈이 마주치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50화

    “언니!”모든 일이 끝난 후, 성유리가 저택을 떠나려 할 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왔다.성유정은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엄마는 언니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 방법이 조금 틀렸을 수도 있지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성유리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성유정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 언니랑 한빈 오빠... 아니, 형부 쪽은 내가 잘 설득해 볼게. 둘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잖아. 형부는 원래 언니한테 별다른 감정이 없었으니까 이런 일은 서두를 필요 없어. 그렇지?”성유정은 정말 진심인 듯 보였지만 그 말속에 성유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박한빈이 자신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을 계속 들먹였다.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성유정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고마워.”“나는 언니 동생이니까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성유정은 성유리의 팔짱을 끼며 계속 말했다.“오늘 별일 없지? 우리 둘이 쇼핑이라도 할까?”“아니, 몸이 좀 안 좋아서 쉬고 싶어.”“그렇구나. 원래는 언니랑 가면 형부랑 안 가려고 했는데...”성유정은 끼고 있던 목걸이를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봐. 형부가 지난번에 사준 건데 2주도 안 돼서 고장 났어. 그래서 오늘 매장에 가서 제대로 얘기해야 돼.”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성유정에게 물었다.“그걸 왜 나한테 말해?”“언니랑 형부는 부부 사이잖아. 그럼 매장 사람들도 언니를 알 거야. 그리고 형부 카드도 언니한테 있는 거 아니야?”“나한테 없어.”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고 성유정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실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구나. 그럼 난 먼저 가볼게.”성유리는 더 이상 성유정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차가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비로소 꽉 쥐고 있던 두 주먹을 풀었는데 손바닥에는 이미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 자국이 언제 남았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49화

    성유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성유리를 한번 쓱 쳐다보았다.그 눈빛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성유리의 눈엔 조금은 도발적인 눈빛으로 보였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의 의미를 잘 알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성유정이 나타난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짧은 시간이었지만 윤청하와 점점 서먹해졌기 때문이다. 필경 수년간 엄마로서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그래서 성유정이 등장하자 성유리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을 무시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성유정은 눈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방금 전 장면이 마음에 남았는지 식사 중에도 윤청하에게 계속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다.“그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거야.”윤청하는 태연하게 대답했고 성유리는 그녀가 이 사실을 성유정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그러나 식사를 마친 후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한약 한 그릇을 준비해 주었다.“이건 네 몸을 위한 거야.”윤청하가 계속 말했다.“내가 특별히 좋은 것만 넣었어.”성유리는 윤청하가 부엌에서 뭔가를 바삐 준비하던 이유가 바로 이 한약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그리고 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감동을 받은 걸까? 어쩌면 오랜만에 느껴본 모성애 때문에 멍해졌을 수도 있지만 성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윤청하가 원하는 것은 그저 성유리의 뱃속 아이가 성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저는...”성유리는 거절하려 했지만 윤청하가 그녀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그냥 내 말 들어. 너 지금 너무 말랐어. 임신...”윤청하는 더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성유정의 눈치를 본 후 빠르게 말을 바꿨다.“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먼저 네 몸을 잘 챙기고 난 다음에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해야지.”성유리는 그 한약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 약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48화

    성유리는 임신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로 결심하지 않았다.필경 의사가 말한 대로 첫 3개월은 아기집이 안정되지 않아 조심할 필요도 있었고 박한빈이 데려간 병원은 바로 전문적으로 박씨 가문 사람들을 돌봐주는 의사였다.그들이 병원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김서영에게 임신 소식이 전해졌고 이어서 성씨 가문 사람들도 알게 되었다.그래서인지 윤청하가 곧바로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성유리는 그때 차 안에 있었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윤청하가 급하게 말했다.“얼른 집에 와.”“저 내일...”“먼저 집에 돌아오면 그때 얘기하자.”윤청하는 말을 끝내자마자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고 성유리는 하는 수 없이 입술을 꽉 깨물며 운전사에게 말했다.“먼저 성씨 저택으로 가주세요.”운전사는 신속하게 움직였고 이내 방향을 틀어 달리다 성씨 저택 앞에 멈춰 섰다.그 시각, 성씨 저택 입구는 텅 비어 있었고 윤청하는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도우미가 성유리의 도착을 알리고 나서야 그녀는 성유리에게 다가갔다.오늘 윤청하는 평소와는 달리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성유리를 보자마자 윤청하는 그녀의 손을 꼭 잡더니 배부터 살폈다.성유리는 불쾌한 마음에 본능적으로 자신의 배를 감쌌는데 윤청하는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지금 뭐 하는 거야? 부끄러워? 난 네 친엄만데?”성유리는 윤청하의 다정한 모습에 여전히 적응할 수 없었다. 윤청하의 따뜻한 태도는 그녀에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윤청하는 성유정을 재벌가 아가씨로 곱게 키웠고 친딸인 성유리보다 더 챙겨주고 아껴주며 모든 애정을 쏟아부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늘 사랑이 고팠고 성유정을 부러워하며 윤청하의 애정이 자신에게 조금만 돌아오기를 바랐다.하지만 지금, 막상 바라던 ‘애정’이 현실로 다가오니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두려웠다.“한빈이가 너한테 관심이 없을까 봐 걱정했어. 결혼한 지 거의 1년이 지나는데 아직 애도 없고...”“유정이는 너희가 감정도 없이 급하게 결혼했으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47화

    성유리는 잠시 멈칫했다. 처음에는 박한빈이 몸이 아픈 건가, 아니면 회사의 중요한 인물이 아프다고 그들을 부른 건가 싶었다.박한빈이 자신을 진료실까지 데리고 들어가기 전까지는.“마지막 생리가 언제였나요?”의사의 질문에 성유리가 미처 반응하지 못하자 박한빈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의사가 묻고 있잖아.”그제야 성유리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저... 지난달 7일이에요.”“그럼 혈액검사를 해보겠습니다.”박한빈은 의사의 말에 짧은 대답을 하고는 내미는 서류를 받아들였다.진료실을 나온 뒤, 성유리는 천천히 박한빈 옆으로 다가갔다.“저 괜찮아요. 그냥 저체온증이었어요. 오늘은 많이 나아졌어요!”하지만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의 발걸음 또한 멈추지 않았다.결혼한 지 1년이 지난 현재, 성유리는 박한빈의 침묵과 냉랭한 태도에 익숙해졌다.잠시 후, 망설이던 성유리가 다시 말했다.“그냥 저 혼자 할게요. 당신 너무 바쁘잖아요. 여기서... 저랑 같이 안 있으셔도 돼요.”성유리는 박한빈이 이 일로 인해 김서영에게 또 잔소리를 듣지 않을까 걱정했다.원래부터 김서영은 그들의 결혼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고 성유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성유리가 아닌 성유정이야말로 김서영이 늘 원했던 며느리였고 세상 사람들, 심지어 부모님도 그랬다.김서영의 강력한 요구사항에도 박한빈은 엄마의 말을 무시한 채 성유리와의 결혼을 선택했었다.이내 성유리는 혈액 검사를 마쳤고 기다림 끝에 드디어 검사 결과를 받을 시간이 왔다.“축하합니다. 성유리 씨, 임신하셨어요.”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성유리의 표정은 잠시 굳어졌다.그리고 두 주먹도 자연스레 꽉 쥐게 됐다.몇 초 후, 성유리는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임신... 이라고요?”의사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네, 혈액 검사 결과 확실합니다. 다만 현재 초기 단계인데 산모님 체중도 너무 낮으니 조심해야 합니다.”의사는 계속 말을 했지만 성유리는 들을 정신이 없었고 본능적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46화

    그해 여름.박한빈이 집으로 돌아왔지만 성유리는 미처 그것을 알지도 못했다.하루 종일 이어진 미열 때문에 성유리는 온몸에 힘이 빠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체온이 그리 높지 않아서 약을 먹지는 않았고 저녁에는 혼자 죽을 조금 먹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그때 옆에 있던 휴대폰이 두 번 진동했지만 성유리는 전혀 알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곧 한 통의 메시지가 또 오고 나서야 성유리는 비로소 눈을 떴다.메시지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그녀는 내용이 뭔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또 박한빈이 자신에게 방으로 오라는 문자를 남겼다는 것을.성유리는 갑자기 박한빈이 너무 귀찮게 느껴졌다.그래서 그가 보낸 메시지를 무시한 채 그냥 몸을 돌려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방문이 열렸다.복도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에 성유리는 눈을 떴고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또 얼마나 귀찮게 하려고 온 거지?’원래는 박한빈이 왜 이렇게 급하게 굴고 고작 하룻밤만 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어 소리라도 지르려고 했지만 그 순간, 따뜻하고 건조한 손바닥이 성유리의 이마에 닿았다.그 느낌은 성유리로 하여금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가 처음 지씨 가문에 갔을 때, 긴 여행과 큰 충격으로 고열에 시달렸던 기억이 떠올랐다.당시 지석민은 성유리를 버리려 했고 오직 양어머니만이 그녀를 돌봐주었다.하지만 막상 친엄마는 한 번도 그렇게 해준 적이 없었고 성유리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엄마는 자신을... 더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그래서 이렇게 누군가가 자신을 돌봐주는 느낌을 받는 것은 성유리가 정말 오랫동안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손바닥에서 전달된 온도가 느껴지자 성유리의 눈시울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그러던 그녀는 무심결에 낮은 목소리로 엄마라는 단어를 내뱉었다.그 말에 상대의 손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그런데 성유리가 더 이상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다음에 성유리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945화

    박한빈은 빠르게 에릭의 의도를 알아차렸고 이내 두 사람의 술잔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해 보였다. 그 화기애애함에 알리는 심지어 뭔가 불편함을 느꼈다.박한빈의 말을 듣던 알리는 처음에 두 사람이 싸울 거라 예상했었고 이미 구경할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그런데 에릭은 그렇게 모든 걸 가볍게 넘겨버렸다.평소와 다른 형의 모습에 알리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고 뭔가 불만을 토로할까 했지만 박한빈이 갑자기 그를 바라보았다.그 눈빛에 알리의 가슴이 한순간 뜨거워졌다.그러나 알리는 금방 고개를 치켜들며 박한빈과 눈을 맞췄다.“오늘 일 다 들었습니다.”박한빈이 천천히 말했다.“제 아내가 부끄러워해서...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것 같네요. 실례했습니다. 죄송해요.”박한빈의 말에는 진심이 느껴졌으나 알리는 피식 웃기만 할 뿐이었다.‘이게 사과인가? 아니, 이건 자랑하는 거 아니야?’더 큰 문제는 알리가 화를 낼 수도, 그럴 자격도 없다는 것이었다.결국 알리는 일방적으로 고백한 거였고 성유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들은 합법적인 부부였으니 알 리가 여리저리 뛰어다니는 꼴이 오히려 마치 광대처럼 보였다.그래서 알리는 술잔을 꽉 쥐고 괜찮다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박한빈은 알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그렇게 저녁 식사는 평온하고 화기애애하게 끝났고 박한빈은 기사에게 그들을 호텔로 데려다 주라고 지시했다.차 문을 닫기 전에 박한빈은 에릭에게 한마디 했다.“네가 라온시로 돌아가면 다시 연락하자.”에릭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고 알리는 여전히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박한빈이 차 문을 닫고 나서야 알리는 마치 다시 살아난 것처럼 에릭을 향해 돌아앉았다.“형한텐 분명히 다른 계획이 있을 거야. 그렇지? 저 사람이 형 약혼녀를 빼앗았는데 이걸 그냥 참을 수 있어?”“두 사람이 몇 년 동안 협력했으니까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약점도 알고 있을 거야. 맞지? 우리 같이 힘을 합쳐서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