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이 가장 뜨거웠던 며칠 동안, 박한빈은 경찰서에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며 상황이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지만 박한빈의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언론 기사들이 쏟아지며 발칵 뒤집혔다. 그날 아침, 경찰서 정문 앞은 이미 기자들로 가득했다. 마이크와 카메라가 준비된 채, 모두가 박한빈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최신 뉴스를 잡으려는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서훈은 이런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니 박한빈에게 다른 시간이나 경로로 나가는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서훈은 박한빈이 무언가 계획이 있음을 깨닫고 더는 자신의 의견을 내지 않았고 대신 경찰의 절차에 따라 모든 과정을 마쳤다. 문밖의 기자들은 숨을 죽인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박한빈이 모습을 드러내자 기자들은 마치 상어가 신선한 피를 발견한 듯 일제히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박한빈을 둘러싸자 경찰서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박 대표님, 이번 사건에 대해 해명하실 부분이 있습니까?” “고인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다는 소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재 고인의 부모님이 지화 본사 앞에서 울부짖으며 박 대표님의 처벌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지화의 향후 경영은 누가 맡게 될 것 같습니까?”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쏟아지는 마이크들은 마치 박한빈의 머리를 조준하고 있는 총구처럼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그런 선 넘는 질문들에도 놀라운 침착함을 보였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기자들이나 사람들을 한 바퀴 쓱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입니다. 저는 경찰이 공정한 판단을 내려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이어 이런 말을 덧붙였다.“또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고인과 어떠한 부적절한 관계도 없었으며 제 아내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도 없습니다.” 기자들은 그가 이 사건과 지화의 미래에 대해 답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
얼마 안 지나 박한빈은 실은 차는 도연제에 도착했다. 박한빈은 요 며칠 머릿속으로 항상 성유리의 상황을 생각하고 걱정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그는 박세빈이 설계한 “덫”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진즉에 눈치챘다. 필경 그날 밤, 만약 그 전화 한 통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곳에 성유리가 최정민과 함께 있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박한빈은 늦은 시간에 최정민을 만나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박한빈은 그 사람들이 행여나 성유리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을까 봐 걱정되었다. 경찰서에 있는 내내 불안하고 급한 마음에 안절부절 하던 박한빈이었지만 항상 성유리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고 어떻게 해야 빨리 벗어날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막상 집에 도착하니 박한빈은 망설였다. 한참을 현관에 서 있던 그는 가사도우미가 문을 열어줘서야 집으로 들어섰다. 박한빈을 발견한 도우미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미소를 띤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오셨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도우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박한빈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을 둘러보더니 물었다. “성유리는요?” 입을 여는 순간 박한빈은 지금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요즘 유리는 어떻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사모님 아주 잘 지내고 계셨어요.” 분명 박한빈이 원하던 대답이었지만 아무 일도 없다는 성유리의 근황을 듣자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도우미는 박한빈의 기분을 눈치 차렸는지 말을 덧붙였다. “제 말은 걱정하실 필요 없다는 말이었어요. 사모님은 요즘 무탈하게 지내고 계셨으니까.” 말을 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 심각해졌고 도우미는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닫아버렸다. 박한빈은 그런 도우미를 쓱 쳐다보고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시각 성유리는 자신의 방에 있었다. 그녀는 컴퓨터를 켜 미리 그려놓은 그림에 색을 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하도 평온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러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저녁에는... 누가 나한테 전화가 왔더라고. 네가 최정민이랑 같이 있다는 소식을 알려줘서 급히 그곳으로 간 거야.” “근데 내가 도착했을 때는 최정민을 만나지도 못했어. 걔가 자기 자신을 방안에 가두고는 바로 발코니에서 뛰어내린 거고.” “나는 도대체 왜 걔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겠어!” “나랑 걔 사이는 정말 결백해.” 박한빈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성유리에게 그날 상황을 설명해 줬다. 성유리는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박한빈의 말을 듣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박세빈이 짜놓은 판이야.” “전엔 내가 너무 방심했어. 난 걔가 최정민을 죽음으로까지 내몰 줄은 몰랐어. 근데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다 해결할게. 넌 먼저...” “됐어요.” 박한빈은 다른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성유리가 그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 가벼운 한마디일 뿐이지만 박한빈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져 갔다. 그는 성유리를 가만히 쳐다보다 물었다. “무슨 뜻이야?” “박한빈 씨 스스로 말했잖아요. 이건 박세빈 씨가 짜놓은 판이라고. 그럼... 이건 두 형제지간의 싸움 아니겠어요?” “전 이런 일에 참견하는 것은 딱 질색이에요. 이번엔 그냥 얼굴을 다쳤을 뿐이지만 다음에는요? 혹시나 죽을지 누가 알아요?”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일은 꽤 심각하지 않나요? 요즘 지화 그룹의 주식들을 확인해 보세요. 그냥 풍비박산 났다고 볼 수 있어요. 투자자들이나 이사회 쪽 사람들은 박한빈 씨에게 대가를 치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지금 당신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박한빈 씨가 제일 잘 알 거예요.” “그래서? 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성유리는 평온하게 말을 이어갔지만 박한빈이 갑자기 묻자 순간적으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
그 눈빛에는 성유리의 진심이 가득 담겨있었고 마치 박한빈에게 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익의 평행. 이건 박한빈이 어릴 때부터 배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늘 이 방면에서 자신은 우수하다고 생각했다. 업계에서나 다른 방면에서 박한빈은 자신의 실력으로 높은 위치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는 꿈에서도 지금 자신이 평행한 이익 관계에서 질 줄은 몰랐고 이렇게 처참하게 버려질 줄도 몰랐다. 박한빈은 꼭 잡고 있던 성유리의 손을 놓아주더니 뒤로 물러섰다. “무슨 뜻이야?”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성유리에게 계속 물었다. “나를 떠나려는 이유가 바로 이거야?” “성유리. 지금 네가 최정민 때문이라고 한마디만 했으면 나는 널 용서할 거야.” “그 말을 하면 네가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확실하니까. 내가 다른 여자랑 이런저런 구설수에 올랐다는 사실에 불쾌해한다는 거니까. 안 그래?” 박한빈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니야. 네가 어떻게 질투했겠어? 정말 나를 신경 썼다면 요즘 이렇게 잘 지내지도 못했을 거야. 유리야, 내가 경찰서에 있던 며칠 동안 넌 나를 걱정이나 했어?” “아니면 넌 내가 그 안에서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었니? 며칠 동안 넌 나랑 어떻게 해야 이혼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그는 입꼬리를 올린 채 웃고는 있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끝없는 냉랭함과 음침함, 그리고 눈빛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낯선 감정도 보였다. 성유리는 박한빈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박한빈이 말한 것대로 성유리는 그를 속일 생각마저 없는 것 같았다.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보며 이빨을 꽉 깨물었다. 요즘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 또다시 위가 아팠지만 신기하게도 지금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지그시 감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지금 지화 그룹 상황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지. 원래 난 바로 회사로 갔어야 하는데 그래도 난 회사가 아닌 너를 먼저
성유리는 이혼합의서를 박한빈에게 건넸다. 박한빈은 위에 적힌 성유리의 사인을 확인하고는 실성한 듯 웃더니 말했다. “너는 전부터 다 준비해 뒀구나.”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한빈은 굳은 표정으로 조금 서 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펜을 꺼내 들며 합의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어릴 때 글을 배우고부터 자기 이름 석 자를 수없이 썼던 박한빈이기에 그는 펜을 꺼내 들자마자 빠른 속도로 사인을 마쳤다. 그는 이혼합의서를 성유리에게 툭 던지듯 건네며 물었다. “이러면 만족해?” 성유리는 그가 건넨 서류를 받아들어 확인하더니 박한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고맙다고? 도대체 뭐가? 자기 자유를 되찾았다고 생각해서 고맙다는 건가?’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듣는 순간 그녀를 비웃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는 지금 만약 성유리에게 다른 말을 더 한다면 자기 자신을 조롱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짧은 한마디만 던졌다. “후회할 거야.” 성유리는 여전히 침묵했다. 그러자 박한빈이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너는 네가 되게 특별하다고 생각하나 본데 절대 아니야. 나도 꼭 네가 아니어도 된다고!” “나는 다른 여자를 또 찾을 거야. 그리고 그 여자랑 잘살아 볼 거고. 너한테 해준 거나 못 해준 거 다 그 여자한테 해줄 거라고!” “다시는 너한테 나를 이렇게 처참하게 짓밟을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 ‘조용히 떠나야 했는데.’ 박한빈은 그간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눴었기에 당연히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허점이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 자기 자신이 끝없이 말을 한다면 성유리의 눈에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그는 쉽게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 초등학생처럼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해 고개를 숙이지 않고 고집을 부르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러나 박한빈이 하는 말들은 성유리에게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높게 올라가는 지화 그룹의 주식은 박한빈의 승리를 증명해 줬다. 그때가 돼서야 최정민이 뛰어내린 일에 대한 사실이 공개적으로 드러났다. 배후에서 모든 일은 조정하던 사람은 예상했던 대로 박세빈이었고 그 시간 동안 그는 최정민의 은밀한 신체 부위가 찍힌 사진들로 그녀를 협박한 사실도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최정민은 박세빈에게 그간 너무 시달려 자살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녀의 옷차림이 왜 흐트러져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부검 결과에 의하면 최정민이 뛰어내린 원인은 박한빈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확정되었다. 모든 진실은 다 밝혀졌고 전에 끝없이 구설수를 퍼뜨리고 박한빈을 꾸짖던 사람들도 그제야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는 사하나마저 자기가 박한빈을 오해했다고 자책하기까지 했다. 성유리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하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럼 두 사람은...” “됐어.” 성유리는 사하나가 무슨 물음을 물어볼지 알기에 서둘러 대답을 이어갔다. “사실 전부터 나랑 그 사람 사이는 많이 흔들렸어. 서로 애쓰며 같이 있던 시간 동안 우리 둘 다 얼음 빙판을 걷는 것처럼 지냈고,” “그냥 그런대로 시간을 보내며 서로 노력하고 참는 사이는 그 누구라고 해도 다 질릴 거야.” “어떨 땐 서로한테 좋은 사이는 굳이 같이 있지 않아도 되는 거야. 평화롭게 헤어지는 것도 좋은 결과지.” 성유리의 대답에 사하나는 멍해졌다. 그러나 이내, 사하나는 성유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평화롭게 헤어진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성유리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보면... 평화롭다고 할 수 있지?” 사하나는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었지만 성유리가 행여나 불쾌해할까 봐 꾹 참았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겨울이 다 지나갔고 봄 끝자락에 성유리는 딸아이를 낳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성유리는 자기 핏줄인 아이를 갖고 싶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성유리에게 아이가 태어나면 위
“엄마, 엄마!” 성유리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느라 처음엔 아이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자그마한 딸아이가 주방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이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성유리에게 삐쳤는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엄마, 왜 내가 불러도 대답 안 해요?” “미안해.” 성유리는 환풍기를 급히 끄며 아이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화장실 다녀왔어요. 엉덩이 닦아야 돼요.” 성유리는 이미 바지를 스스로 다 입고 나온 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그럼 우리 닦는 김에 바지도 바꿔 입을까?” 아이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바지를 내려다보며 아무 반박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그런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성유리가 아이에게 겨우 새 바지로 갈아입히자마자 벨 소리가 집안에 울렸다. “이모 왔나 봐요!” 아이는 벨 소리를 듣고 잔뜩 신나 하며 현관으로 뛰어갔다. 벨을 누른 사람을 확인한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이모!” “역시 우리 하늘이가 나를 제일 반겨주네.” 사하나는 만족한 듯 옅은 미소를 지어주며 하늘이에게 물었다. “하늘이 요즘 이모 생각 자주 했어?” 하늘이는 사하나의 물음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모가 하나만 물어볼게. 이모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지?” 사하나가 이런 질문을 물어볼지 예상도 못 했는지 하늘이는 쭈뼛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고작 2살 된 어린아이일 뿐인 하늘이는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자 고개를 돌려 엄마인 성유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하늘이를 도와주려는 생각이 하나도 없는지 웃으며 옆에 물러섰고 하늘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은근히 기대를 하는 것 같았다. 하늘이는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더니 사하나에게 대답해 줬다. “여기로 이모 생각했어요.” 하늘이의 대답에 사하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얼른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쩜 이렇게 똑똑할까? 너 왜 이렇게 귀여워?” “나는
하지만 사하나의 말에 하늘이는 예전 기억이 떠올랐는지 주저하기 시작했다. 성유리를 잠시 바라보던 아이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난 엄마랑 잘래요.” 성유리는 하늘이의 의사를 확인한 뒤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사하나는 눈치를 살피다 그녀에게 물었다. “전에 제가 소개시켜 드린 그 남자는 왜 만나러 가지 않으세요?” “그러는 넌 왜 안 만나는데?” 성유리가 되물었다. “전... 아직 결혼에 관심이 없어서요.” “네 생각엔 난 결혼에 관심이 있어 보이나 보지?” 성유리의 말에 사하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조금 뒤, 사하나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꺼냈다. “언니 혼자 애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러죠. 딱 저번처럼 말이에요. 새벽에 하늘이가 갑자기 열이 올랐을 때 언니 혼자 밤을 새가면서 아이를 챙겼잖아요.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은데도 언니한테 물 한 잔 떠다 줄 사람도 옆에 없고.” “그건 그냥 우연일 뿐이야. 그리고 결혼하면 그 남자가 나를 챙겨줄 것 같아? 아마 내가 애를 둘 키우는 거랑 똑같아질걸.” 성유리의 말에 사하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필경 그녀 본인도 남자에 대해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기에 결혼을 미루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도대체 웬일인지 사하나는 이런 일을 자신이 맞닥뜨린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성유리가 이런 삶을 살고 있으니 자꾸만 분노가 치밀고 화가 났다. 사하나는 지금 본인이 표정 관리를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성유리는 단번에 그녀의 감정을 알아차렸다. 성유리는 머릿속에 어떠한 추측이 떠올랐는지 사하나에게 물었다. “금성 쪽에 무슨 일 생겼어?” “네? 무슨 일이요? 저는 모르는데? 언니 뭐 들으셨어요?” 서로를 본 시간이 늘면 늘 수록 사하나는 성유리 앞에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애써 부정하며 아무렇지 않은척 하지만 성유리는 그녀가 그럴수록 더욱 확신했다. 그래서
이것은 박한빈이 처음으로 그들의 아이를 직접 본 순간이었다. 흐릿한 사진도 교묘한 각도로 찍힌 이미지도 아닌 눈앞에서 생생하게 움직이는 아이였다. 작은 소녀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박한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호기심과 함께 낯선 누군가를 관찰하는 듯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이를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박한빈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걸었고 이내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 성유리와 아이의 모습이 가려져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한참 뒤, 박한빈은 비로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그는 자신의 감정을 빠르게 추스르며 평정을 찾으려 했지만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그날 밤, 그는 예상대로 잠에 쉽게 들지 못했다. 박한빈은 새벽녘까지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고 나서야 간신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꿈속에서도 그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장면이 계속 반복되었고 그 장면은 성유리가 한 소녀와 함께 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장면은 따뜻하고 행복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낯선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박한빈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는 강렬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옆에 둔 핸드폰은 계속해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그는 울리는 전화를 바로 받지 않았다. 대신 창밖의 햇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방금 꾼 꿈의 장면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새겼다. 박한빈은 그 꿈을 이전에도 꾼 적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느낌이 달랐다. 너무나 생생하고 현실 같았다.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소녀가 다른 누군가를 아빠라고 부르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박한빈의 심장과 위장은 다시금 은은히 아파지기 시작했다.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그는 그 감정을 억누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화를 받았다. 그는 이번에 경운시로 출장 온 상황이었다.
2년 하고도 4개월. 성유리는 그와 다시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 그 상상을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두 사람은 이미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의 곁에는 늘 샴페인과 꽃다발로 둘러싸인 화려한 삶이 있었고 그녀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교차할 일이 없는 평행선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등장은 성유리의 그런 믿음을 단번에 깨뜨렸다. 하늘이를 안고 있던 성유리는 그를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엄마, 저 사람 알아?” 하늘이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아니, 몰라.” 행여나 자신의 감정이 들킬까 성유리는 서둘러 대답했다. 한편, 박한빈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성유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을 들어버린 순간, 그의 발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버렸다. 방금 전까지 뛰던 심장은 순간 멈춘 듯 잠잠해졌고 뜨겁게 끓던 피는 차갑게 식어갔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제 더 이상 박한빈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만, 하늘이는 박한빈의 시선을 느꼈는지 계속 뒤를 돌아보며 그를 쳐다보았다. 이혼 당시, 두 사람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았다. 성유리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조차 박한빈은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잠들지 못한 채로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그러다 보니 박한빈은 심장과 위가 아파 견딜 수 없을 정도까지 되였다. 버티던 박한빈이 결국 병원을 찾아갔지만 의사는 그의 몸이 건강하다고 말했다. 그가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자 의사는 단지 “심리적 긴장”일 수도 있다고 알려줬다. 박한빈이 긴장했던 걸까? 아마 단순한 긴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긴장보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사하나는 성유리의 감정을 알아차리곤 곧바로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언니도 결국 하늘이의 미래를 위해 이렇게 하는 거잖아요.” “이렇게 합시다. 어차피 전 별로 바쁜 일도 없으니까 이번에 하늘이가 다 나으면 내가 애를 데리고 금청으로 먼저 돌아가죠. 가서 우리 부모님 댁에서 지낼게요.” “그분들도 손녀 얘기를 오래전부터 하셨거든요. 비록 의붓손녀지만 똑같이 사랑해 주실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하나는 그녀가 자신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기에 지금 당장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일단 이렇게 합시다. 언니도 피곤할 테니 오늘 밤은 내가 있을게요. 언니는 들어가서 좀 쉬세요.” “아니. 네가 먼저 들어가. 난 여기 있을게.” “하지만...” “지금 내가 들어가면 제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아?” 성유리의 이 질문에 사하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사하나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성유리는 한참 후에야 하늘이의 침대 옆으로 천천히 다가가 앉았다. 아이는 오늘 채혈을 해서 그런지 팔뚝에는 여전히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작은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하늘이에게 손을 뻗어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혹시 깰까 봐 망설이다가 성유리는 결국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한참 동안 가만히 하늘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하늘아.” 그 목소리는 아이를 깨우지 않을 만큼 작았는고 성유리 혼자만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며칠간 성유리는 더 바빠졌고 촬영 현장과 병원을 오가며 바삐 뛰어다녔다. 때로는 하늘이가 갑자기 뭔가 먹고 싶다고 하면 호텔로 돌아가 직접 만들어 오기도 했다. 고작 일주일 만에 그녀는 몸무게가 5kg이나 빠졌고 얼굴은 많이 초췌해졌다. 사하나조차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성유리는 마
“그러니까 이모! 꼭 그 삼촌보다 저 잘생긴 남자를 찾아야 돼요. 삼촌보다 백배, 아니 만 배 잘생긴 사람!” 어느 한 패스트푸드 점, 하늘이는 감자튀김을 먹으며 사하나에게 말했다. 사하나는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줄 알고 헐레벌떡 뛰어왔지만 아이의 말을 듣고 나서야 별일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하늘이의 말에 대답했다. “그런 말들은 다른 사람이 한 거지 이우빈 그 사람이랑 상관이 없잖아. 이모 생각엔 이우빈 씨도 네 엄마한테 관심이 있어 보이는데?” 하늘이는 사하나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안 돼요. 그 삼촌은 제 아빠가 될 자격이 없어요.” 사하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웃어 보였다. 감자튀김을 맛있게 먹고 있던 하늘이는 갑자기 차가운 액체가 자신의 입가에 닿는 느낌을 받았고 손으로 쓱 만져보았다. 어린아인지라 하늘이는 케첩인 줄 알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사하나가 깜짝 놀라며 다가와 말했다. “왜 갑자기 코피가 나는 거야? 빨리 업혀. 이모랑 병원 가자!” ... 이건 성유리가 현장에서 날밤을 샌 두 번째 날이었다. 이우빈의 설득 하에 성유리는 결국 그에게 두 장면을 더 추가해 줬고 내용은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랑 상의하며 하나씩 적어 갔다. 감독마저 아주 흡족해하며 박수를 쳤지만 여자 주인공 쪽은 불만이 가득한 눈치였다. 여자 주인공이랑 마주치기를 꺼리던 성유리는 끝나면 바로 몰래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 주인공의 매니저는 어느새 성유리를 찾아와 먼저 말을 걸었다. “성유리 선생님, 저희 그 추가된 두 장면 때문에 할 말이 있어서...” 매니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의 핸드폰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더니 정신없이 현장을 떠나갔다. “선생님! 성유리 선생님!” 매니저는 뒤에서 몇 번이나 성유리를 불렀지만 그녀는 망설이지도 않고 발걸음을 옮겼고 매니저는 화가 나 이빨을 꽉 깨물었다. “어떻게 됐
현장에 사람이 너무 많기에 그들은 하늘이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너무 예쁘게 생겨 그들은 아역 배우인 줄 알아 부감독을 불러오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하늘이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두 주먹을 꽉 쥐고 머리카락을 찰랑찰랑 흔들며 걸어가는 하늘이의 모습은 잔뜩 성난 수탉 같았다. 성유리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대본에 대해 상의하고 있다가 씩씩거리며 걸어오는 하늘이를 보고는 잔뜩 당황하며 물었다. “왜 그래?” 하늘이는 아무 말도 없이 의자에 앉더니 자신의 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셔대기 시작했다. 성유리는 옆에 있는 사람한테 양해를 구한 뒤, 하늘이에게 다가가 다시 물었다. “왜 그래? 심심해서 그러는 거야?” “오늘 평소보다 빨리 끝날 것 같아. 엄마가 끝나면 하늘이 데리고 백화점 가서 놀아줄게. 응?” 하늘이는 성유리를 지그시 쳐다만 볼 뿐이었다. 그녀는 아이가 먼저 대답할 때까지 천천히 기다려줬고 한참 후, 하늘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있기 싫어. 이우빈 아저씨 보기도 싫어.” 하늘이가 계속 말했다. “집에 갈래요. 가서 이모랑 놀고 싶어.” “지금? 엄마는 지금 못 가는데.” 성유리는 아이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이렇게 하자. 하늘이가 엄마랑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주면 엄마가 이모한테 전화할게. 오늘 밤에 시간 있으면 하늘이 데리러 오라고 할까?” 성유리의 목소리는 다정다감하기 그지없었고 아이를 달래며 머리도 쓰다듬어줬다. 하늘이는 성유리의 위로를 받고는 서서히 진정되었고 코를 쓱 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잡고 자신이 일해야 하는 자리로 돌아갔고 아이를 안은 채로 업무를 봤다. 촬영은 빠르게 끝났지만 이우빈 일행은 성유리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 “성유리 선생님, 할 말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이우빈을 주위를 둘러보다 여자 주인공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평등하게 “대결”을 펼칠 수 있었지만
성유리가 그린 만화가 방영되는 곳은 경운시였다. 이미 이런 경험이 몇 번이나 있는 성유리지만 이번에 작가 팀에 합류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대본은 아직 검토 중이지만 드라마는 이미 시작되었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으니 그들은 만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을 때 빨리 기회를 뺏어야 했다. 성유리는 처음으로 현장에 간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 종일 그들과 같이 있은 적은 처음이었다. 하늘이도 당연히 성유리와 함께였다. 그러나 너무 바빠 하늘이를 챙길 여력이 부족해 성유리는 가정부를 고용했다. 이러면 자신이 하늘이를 미처 챙기지 못해도 가정부가 챙기기에 안전할 뿐만 아니라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성유리가 너무 쉽게 생각한 탓일까, 큰 규모의 제작이기도 하니 영화사에서는 제일 잘 나가는 배우들만 요청했다. 두 사람은 겉으론 사이가 좋은 척 하하 호호 웃었지만 팀은 하나같이 너무 실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대본마저 하루에도 몇 번씩 고치고 바꾸기 일쑤였다. 성유리는 매일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하늘이를 며칠이나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하늘이는 성유리를 원망하지도 않고 매일 호텔에서 얌전히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사하나가 하늘이를 세뇌시킨 건지, 하늘이는 성유리가 돌아올 때마다 그녀에게 잘생긴 삼촌이랑 사귀냐고 물었다. 성유리는 아이가 말한 잘생긴 삼촌이 누군지 안다. 그건 바로 이번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자 올해 제일 많은 인기를 누리는 이우빈이였다. 하늘이는 호텔에서 그와 두 번을 마주쳤기에 이우빈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는 성유리에게 저 남자가 자기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성유리는 몇 번이나 하늘이에게 설명을 해주며 안 된다고 대답했지만 아이는 새까맣게 잊은 건지 자꾸 물었고 그게 반복되자 성유리는 포기해 버렸다. 그날은 업무가 평소처럼 바쁘지 않았기에 성유리는 하늘이를 데리고 현장에 향했다. 이우빈을 발견한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사하나의 말에 하늘이는 예전 기억이 떠올랐는지 주저하기 시작했다. 성유리를 잠시 바라보던 아이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난 엄마랑 잘래요.” 성유리는 하늘이의 의사를 확인한 뒤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사하나는 눈치를 살피다 그녀에게 물었다. “전에 제가 소개시켜 드린 그 남자는 왜 만나러 가지 않으세요?” “그러는 넌 왜 안 만나는데?” 성유리가 되물었다. “전... 아직 결혼에 관심이 없어서요.” “네 생각엔 난 결혼에 관심이 있어 보이나 보지?” 성유리의 말에 사하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조금 뒤, 사하나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꺼냈다. “언니 혼자 애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러죠. 딱 저번처럼 말이에요. 새벽에 하늘이가 갑자기 열이 올랐을 때 언니 혼자 밤을 새가면서 아이를 챙겼잖아요.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은데도 언니한테 물 한 잔 떠다 줄 사람도 옆에 없고.” “그건 그냥 우연일 뿐이야. 그리고 결혼하면 그 남자가 나를 챙겨줄 것 같아? 아마 내가 애를 둘 키우는 거랑 똑같아질걸.” 성유리의 말에 사하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필경 그녀 본인도 남자에 대해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기에 결혼을 미루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도대체 웬일인지 사하나는 이런 일을 자신이 맞닥뜨린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성유리가 이런 삶을 살고 있으니 자꾸만 분노가 치밀고 화가 났다. 사하나는 지금 본인이 표정 관리를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성유리는 단번에 그녀의 감정을 알아차렸다. 성유리는 머릿속에 어떠한 추측이 떠올랐는지 사하나에게 물었다. “금성 쪽에 무슨 일 생겼어?” “네? 무슨 일이요? 저는 모르는데? 언니 뭐 들으셨어요?” 서로를 본 시간이 늘면 늘 수록 사하나는 성유리 앞에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애써 부정하며 아무렇지 않은척 하지만 성유리는 그녀가 그럴수록 더욱 확신했다. 그래서
“엄마, 엄마!” 성유리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느라 처음엔 아이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자그마한 딸아이가 주방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이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성유리에게 삐쳤는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엄마, 왜 내가 불러도 대답 안 해요?” “미안해.” 성유리는 환풍기를 급히 끄며 아이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화장실 다녀왔어요. 엉덩이 닦아야 돼요.” 성유리는 이미 바지를 스스로 다 입고 나온 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그럼 우리 닦는 김에 바지도 바꿔 입을까?” 아이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바지를 내려다보며 아무 반박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그런 아이의 손을 꼭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성유리가 아이에게 겨우 새 바지로 갈아입히자마자 벨 소리가 집안에 울렸다. “이모 왔나 봐요!” 아이는 벨 소리를 듣고 잔뜩 신나 하며 현관으로 뛰어갔다. 벨을 누른 사람을 확인한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이모!” “역시 우리 하늘이가 나를 제일 반겨주네.” 사하나는 만족한 듯 옅은 미소를 지어주며 하늘이에게 물었다. “하늘이 요즘 이모 생각 자주 했어?” 하늘이는 사하나의 물음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모가 하나만 물어볼게. 이모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지?” 사하나가 이런 질문을 물어볼지 예상도 못 했는지 하늘이는 쭈뼛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고작 2살 된 어린아이일 뿐인 하늘이는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자 고개를 돌려 엄마인 성유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하늘이를 도와주려는 생각이 하나도 없는지 웃으며 옆에 물러섰고 하늘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은근히 기대를 하는 것 같았다. 하늘이는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더니 사하나에게 대답해 줬다. “여기로 이모 생각했어요.” 하늘이의 대답에 사하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얼른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쩜 이렇게 똑똑할까? 너 왜 이렇게 귀여워?” “나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높게 올라가는 지화 그룹의 주식은 박한빈의 승리를 증명해 줬다. 그때가 돼서야 최정민이 뛰어내린 일에 대한 사실이 공개적으로 드러났다. 배후에서 모든 일은 조정하던 사람은 예상했던 대로 박세빈이었고 그 시간 동안 그는 최정민의 은밀한 신체 부위가 찍힌 사진들로 그녀를 협박한 사실도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최정민은 박세빈에게 그간 너무 시달려 자살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녀의 옷차림이 왜 흐트러져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부검 결과에 의하면 최정민이 뛰어내린 원인은 박한빈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확정되었다. 모든 진실은 다 밝혀졌고 전에 끝없이 구설수를 퍼뜨리고 박한빈을 꾸짖던 사람들도 그제야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는 사하나마저 자기가 박한빈을 오해했다고 자책하기까지 했다. 성유리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하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럼 두 사람은...” “됐어.” 성유리는 사하나가 무슨 물음을 물어볼지 알기에 서둘러 대답을 이어갔다. “사실 전부터 나랑 그 사람 사이는 많이 흔들렸어. 서로 애쓰며 같이 있던 시간 동안 우리 둘 다 얼음 빙판을 걷는 것처럼 지냈고,” “그냥 그런대로 시간을 보내며 서로 노력하고 참는 사이는 그 누구라고 해도 다 질릴 거야.” “어떨 땐 서로한테 좋은 사이는 굳이 같이 있지 않아도 되는 거야. 평화롭게 헤어지는 것도 좋은 결과지.” 성유리의 대답에 사하나는 멍해졌다. 그러나 이내, 사하나는 성유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평화롭게 헤어진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성유리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보면... 평화롭다고 할 수 있지?” 사하나는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었지만 성유리가 행여나 불쾌해할까 봐 꾹 참았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겨울이 다 지나갔고 봄 끝자락에 성유리는 딸아이를 낳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성유리는 자기 핏줄인 아이를 갖고 싶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성유리에게 아이가 태어나면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