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얼마나 배려심이 많은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유리 씨도 저 좀 배려해 주세요. 움직이려고 애쓰지 마시고요. 알아들으셨어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 칼이 실수로 당신의 배에 떨어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저도 되게 민망해질 텐데?” 유효정은 말하면서 손에 점점 더 세게 힘을 주었고 성유리는 선명하게 느껴지는 강한 고통을 견뎠다. 그녀의 칼이 그어지는 곳에서는 빨간 피가 쏟아져 내렸고 방안은 소름 끼칠 정도로 추웠다. 이 상황에 성유리는 문득 박한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성유리는 혹시 자기가 먼저 떠나버려 박한빈이 기분이 나빠졌는지, 아니면 지금 다른 곳에서 미친 듯이 자신을 찾고 있는지 몰랐다. 둘 다 아니면 최정민의 전화를 받느라 성유리의 실종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성유리는 감히 다른 경우들을 생각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씁쓸해졌기 때문에. 통증은 점점 더 뚜렷해졌지만 그녀는 몸부림치지도 못했다. 유효정의 말대로 아직 뱃속에 아이가 있으니 말이다. 그녀의 심기를 다시 건드려 한 번 더 화를 낸다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할 것인지 성유리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성유리 얼굴의 살이 점점 벗겨지자 유효정은 피를 본 상어처럼 눈이 번쩍이고 눈빛에는 광기가 서렸다. 그러더니 유효정의 손에 힘이 더 더해졌다. 성유리가 자신의 목에 곧 칼날이 꽂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의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유효정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칼을 쥐고 있던 손마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그쪽에 있던 사람들이 벌써 달려들어 그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 순간, 유효정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땅에 툭 떨어졌다. 원래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성유리는 천천히 눈을 떴고 도대체 언제 이렇게 많은 경찰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비추는 환한 불빛에 성
다친 성유리를 실은 구급차는 얼마 안 지나 바로 병원에 도착했다.성유리의 얼굴에 흐르던 피는 이미 멈췄지만 의사는 봉합을 계속 진행해야 했다. 마취주사 때문에 얼굴에 감각이 없는 상태였음에도 성유리는 의사가 자신의 피부를 바늘과 실로 꿰매는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작은 봉합 수술이라 성유리의 치료는 응급실 안에서 진행되었고 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 응급실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지금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성유리조차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의사가 봉합을 끝마칠 때까지도 박한빈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에 반면 연정우는 줄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유리가 응급실 밖으로 나오자 연정우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괜찮아? 많이 아프진 않아?” 성유리는 묻는 연정우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네. 집에 데려다줄게.” 연정우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가던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을 본 연정우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정우는 내색하지 않았고 이내 미소를 띠며 물었다. “왜 그래?” “유효정 씨 일은 처리 안 해도 돼?” 침묵하던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 “지금쯤 경찰 손에 잡혀 아무것도 못 할 텐데 너는...” “괜찮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연정우는 화를 억누르는 듯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원래대로라면 성유리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그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효정 씨 아버지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연정우는 빠르게 표정을 바꾸며 다시 말을 이어갔고 성유리는 조용히 그가 하는 말을 들어주었다. “이번에 유효정이 건드린 사람이 너니까 박한빈 씨가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근데 박한빈 씨는 오늘 밤 왜 안 왔을까?” 그의 말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이 왜 안 왔는지는 모르겠어. 근데 이제 보니 유효정 씨가 대체 왜 그렇
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에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채 정리할 틈도 없이 성유리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죽었다는 그 사람이 혹시 최정민 씨야?” ... 연정우가 말한 죽은 자는 정말로 최정민이었다. 그녀는 아파트 단지 21층 발코니에서 추락해 현장에서 즉사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녀가 죽었을 당시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바로최정민의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 집 안에는 그녀외에 오직 박한빈만 있었다. 늦은 시각, 다 큰 성인인 남녀 단둘만 남겨진 상황.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미 사람들의 온갖 추측과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박한빈의 신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각종 소문이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최정민과 박한빈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는 최근 그들 사이에서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그녀가 옷차림이 흐트러진 채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두 사람이 지나치게 방탕한 놀이를 하다 사고로 발코니에서 떨어져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살을 결심한 여자가 그런 상태로 죽을 리 없으니까 말이다. 원래 재벌가의 이야기는 연예계의 가십보다 더 자극적이다. 그렇기에 대중의 관심은 더욱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들이 성유리에게 연락을 시도해 이번 사건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얼마 전 박한빈이 성유리의 결혼식에서 그녀 대신 칼을 맞아준 일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때 그의 행동에 충격받는 한편 또 많은 감동을 받았다. 모두가 박한빈이 성유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벌어진 일은 이 모든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박한빈과 최정민의 관계에 대해 그녀가 남들보다 더 아는 것도 없었으니 최정민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성유리는 그때 자신이 김서영에게 무슨 대답을 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통화를 끝낸 후, 그녀는 방에 혼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요즘 성유리는 기자들이 자신을 행여나 쫓아오며 귀찮게 할까 봐 무서워서 지난 며칠 동안 외출을 하지 않았다. 청소하러 온 도우미도 분명 뉴스를 봤을 테니 요즘 성유리를 볼 때마다 그녀는 아주 조심스러웠다. 가사도우미는 조심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성유리를 어딘가 동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성유리는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만나기보다는 방에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됐다. 성유리가 다른 일에 자신의 주의를 돌리려고 태블릿을 열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러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윽고 도우미가 올라와 성유리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사모님, 박 대표님 남동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만나시겠습니까?” 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표정만으로 도우미는 감히 어떤 것도 추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네. 만날게요.”결국 만나겠다는 결정을 내린 성유리는 바로 몸을 일으키며 방 밖으로 나갔고 도우미는 곧 박세빈을 집안으로 들였다. 전과 달리 박세빈은 최근 아주 잘 지내는 것 같아보였고 여전히 단정하고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는 더욱 꼼꼼하게 빗어 넘겼다. 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박세빈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형수님.” 그의 말에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바로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형수님, 최근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습니다. 제 형이 너무 걱정되어서 그런가요?” “할 말이 있으면 그냥 바로 말하세요.” 성유리는 그와 쓸데없는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형수님은 역시 제 의도를 알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박세빈이 옅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성유리는 어딘가 기뻐 보이는 그를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이건 다 박세빈 씨가 계획한 거죠?” “최정민 씨의 목숨을 앗아가
“최정민 씨가 전에 그러더군요. 형이 가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볼 때가 있다고. 마치 그녀에게서 다른 누군가의 그림자를 보는 것처럼요. 제 추측이 맞다면 그 사람은 아마... 형수님이겠죠?” 박세빈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의 형수님이겠죠. 지금의 형수님은 너무 이성적이고 차분하니까요. 이번 일만 봐도 그렇습니다. 다른 여자라면 남편이 이런 사건에 연루됐다는 걸 듣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을 겁니다. 아니면 최소한 남편을 위해 무언가를 도모하든지 아니면 화를 내든지 했겠죠. 그런데 형수님은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박세빈의 말투는 가볍다 못해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점은 형이 저보다 더 잘 알 테고 그걸 더 직접적으로 느낄 테니 다른 여자에게서 그런 감정을 찾으려는 것도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가 마치 같은 남자 입장에서 박한빈이 이해가 된다는 듯한 태도로 이야기하자 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갑작스러운 웃음에 박세빈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해버렸다. “그래서요? 오늘 여기 온 이유가 이 얘기를 하려고 온 거예요?” “물론 그것뿐만은 아닙니다.” 박세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형수님께 한마디 해주려고 왔습니다. 형수님, 진지하게 하는 얘긴데 형이랑 이혼하세요.” 그의 말투는 사뭇 진지했다. “그런 남자와 더는 무슨 미련을 두고 계시는 겁니까? 이번 기회를 틈타 이혼하시고 자유로워지세요.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성유리는 미소를 억지로 띠며 조용히 박세빈의 말에 반박했다. “우리가 이혼하든 말든 박세빈 씨하고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당연히 있죠.” 박세빈은 웃으며 대답했다. “곧 박씨 그룹 소유의 그룹은 제가 이어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죠.” 그는 조금 더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이런 말을 덧붙였다. “형이 형수님 태도에 얼마나 실망하고 상처받았는지 알잖아요. 그래서 다른 여자에게서 위안을 구했겠
여론이 가장 뜨거웠던 며칠 동안, 박한빈은 경찰서에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며 상황이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지만 박한빈의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언론 기사들이 쏟아지며 발칵 뒤집혔다. 그날 아침, 경찰서 정문 앞은 이미 기자들로 가득했다. 마이크와 카메라가 준비된 채, 모두가 박한빈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최신 뉴스를 잡으려는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서훈은 이런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니 박한빈에게 다른 시간이나 경로로 나가는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서훈은 박한빈이 무언가 계획이 있음을 깨닫고 더는 자신의 의견을 내지 않았고 대신 경찰의 절차에 따라 모든 과정을 마쳤다. 문밖의 기자들은 숨을 죽인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박한빈이 모습을 드러내자 기자들은 마치 상어가 신선한 피를 발견한 듯 일제히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박한빈을 둘러싸자 경찰서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박 대표님, 이번 사건에 대해 해명하실 부분이 있습니까?” “고인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다는 소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재 고인의 부모님이 지화 본사 앞에서 울부짖으며 박 대표님의 처벌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지화의 향후 경영은 누가 맡게 될 것 같습니까?”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쏟아지는 마이크들은 마치 박한빈의 머리를 조준하고 있는 총구처럼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그런 선 넘는 질문들에도 놀라운 침착함을 보였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기자들이나 사람들을 한 바퀴 쓱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입니다. 저는 경찰이 공정한 판단을 내려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이어 이런 말을 덧붙였다.“또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고인과 어떠한 부적절한 관계도 없었으며 제 아내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도 없습니다.” 기자들은 그가 이 사건과 지화의 미래에 대해 답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
얼마 안 지나 박한빈은 실은 차는 도연제에 도착했다. 박한빈은 요 며칠 머릿속으로 항상 성유리의 상황을 생각하고 걱정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그는 박세빈이 설계한 “덫”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진즉에 눈치챘다. 필경 그날 밤, 만약 그 전화 한 통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곳에 성유리가 최정민과 함께 있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박한빈은 늦은 시간에 최정민을 만나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박한빈은 그 사람들이 행여나 성유리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을까 봐 걱정되었다. 경찰서에 있는 내내 불안하고 급한 마음에 안절부절 하던 박한빈이었지만 항상 성유리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고 어떻게 해야 빨리 벗어날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막상 집에 도착하니 박한빈은 망설였다. 한참을 현관에 서 있던 그는 가사도우미가 문을 열어줘서야 집으로 들어섰다. 박한빈을 발견한 도우미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미소를 띤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박 대표님, 오셨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도우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박한빈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을 둘러보더니 물었다. “성유리는요?” 입을 여는 순간 박한빈은 지금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요즘 유리는 어떻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사모님 아주 잘 지내고 계셨어요.” 분명 박한빈이 원하던 대답이었지만 아무 일도 없다는 성유리의 근황을 듣자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도우미는 박한빈의 기분을 눈치 차렸는지 말을 덧붙였다. “제 말은 걱정하실 필요 없다는 말이었어요. 사모님은 요즘 무탈하게 지내고 계셨으니까.” 말을 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 심각해졌고 도우미는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닫아버렸다. 박한빈은 그런 도우미를 쓱 쳐다보고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시각 성유리는 자신의 방에 있었다. 그녀는 컴퓨터를 켜 미리 그려놓은 그림에 색을 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하도 평온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러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저녁에는... 누가 나한테 전화가 왔더라고. 네가 최정민이랑 같이 있다는 소식을 알려줘서 급히 그곳으로 간 거야.” “근데 내가 도착했을 때는 최정민을 만나지도 못했어. 걔가 자기 자신을 방안에 가두고는 바로 발코니에서 뛰어내린 거고.” “나는 도대체 왜 걔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겠어!” “나랑 걔 사이는 정말 결백해.” 박한빈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성유리에게 그날 상황을 설명해 줬다. 성유리는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박한빈의 말을 듣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박세빈이 짜놓은 판이야.” “전엔 내가 너무 방심했어. 난 걔가 최정민을 죽음으로까지 내몰 줄은 몰랐어. 근데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다 해결할게. 넌 먼저...” “됐어요.” 박한빈은 다른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성유리가 그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 가벼운 한마디일 뿐이지만 박한빈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져 갔다. 그는 성유리를 가만히 쳐다보다 물었다. “무슨 뜻이야?” “박한빈 씨 스스로 말했잖아요. 이건 박세빈 씨가 짜놓은 판이라고. 그럼... 이건 두 형제지간의 싸움 아니겠어요?” “전 이런 일에 참견하는 것은 딱 질색이에요. 이번엔 그냥 얼굴을 다쳤을 뿐이지만 다음에는요? 혹시나 죽을지 누가 알아요?”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일은 꽤 심각하지 않나요? 요즘 지화 그룹의 주식들을 확인해 보세요. 그냥 풍비박산 났다고 볼 수 있어요. 투자자들이나 이사회 쪽 사람들은 박한빈 씨에게 대가를 치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지금 당신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박한빈 씨가 제일 잘 알 거예요.” “그래서? 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성유리는 평온하게 말을 이어갔지만 박한빈이 갑자기 묻자 순간적으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
그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그리곤 반사적으로 하늘이를 자신의 뒤로 숨겼는데 그녀의 행동에 여자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잖아요? 전... 유리 씨가 절 잊은 줄 알았는데.”‘잊는다고?’성유리는 그날 끔찍했던 그 기억을 쉽게 잊을 수 없었고 심지어는 칼을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대던 유효정의 얼굴도, 느낌마저 생생했다.그때 성유리의 얼굴엔 꽤 큰 흉터까지 남았었지만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점점 옅어지더니 이젠 잘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유효정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보이자 성유리는 그 당시 느껴지던 고통과 두려움이 다시 떠올라 힘들었다.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저도 모르게 꽉 쥐었고 유효정은 아무렇지 않아 하며 계속 말을 걸었다.“따님이 너무 귀엽더라고요.”유효정은 말하며 은근슬쩍 성유리 뒤에 숨어있는 하늘이를 쳐다봤고 자신의 딸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성유리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성유리는 항상 어정쩡하게 굽혀져 있던 어깨까지 쫙 편 채 유효정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마치 새끼를 지키려는 암탉처럼 말이다.그 모습을 본 유효정은 깔깔거리며 크게 웃더니 조롱하듯 물었다.“아니, 지금 그게 무슨 표정이세요? 설마 제가 성유리 씨 딸까지 건드릴까 봐 그러세요? 걱정하지 마요. 여긴 탁 트인 밖이고 보는 눈도 많으니까 그런 짓은 안 할 거예요. 그리고... 전 두 번 다신 지옥 같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대체 뭐 하시려는 거죠?”성유리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유효정은 원래 하늘이를 주려고 꺼내 들었던 사탕 껍질을 까 자기 입에 넣더니 대답했다.“뭐 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3년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해서 그래요.”“보니까... 잘 살고 계시는 것 같은데.”“정우 씨랑 다시 만나신다고요? 진짜 뒤끝 없는 분이셨네요. 그 사람 때문에 성유리 씨가 죽을 뻔했는데 말이죠.”성유리는 대답이 없었고 유효정은 천천히 시선을 하늘이에게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진
연정우는 성유리와 한 달 내로 장성 그룹 일을 다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었다.게다가 그는 미리 전부터 바다 위에 있는 놀이공원을 가고 싶다는 하늘이의 말에 표까지 다 예매해 둔 상태였다.하늘이는 너무도 기대가 되어 성유리에게 자신의 수영복을 사러 백화점에 가겠다고 부탁하기도 했다.하지만 약속일 이틀 전, 연정우는 갑자기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미안해. 그 약속 못 지킬 것 같은데.”“해외에 있는 투자자 쪽에서 나를 한 번 만나보겠다고 했어. 만약 얘기가 잘 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올지도 몰라. 그래서...”연정우의 목소리는 두 사람에 대한 미안한 감정과 죄책감이 그득히 담겨있었다.“괜찮아. 너 바쁘면 먼저 가서 일해야지. 나 혼자 하늘이랑 가도 돼.”성유리는 괜찮다는 듯 미소 띤 얼굴로 연정우에게 대답해 줬다.“그럼 내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까? 너랑 하늘이 데리고 같이 가라고? 너 혼자 애 데리고 가면 얼마나 힘들어.”“괜찮다니까. 언제는 뭐 안 이랬어?”성유리는 걱정하는 연정우를 안심시키듯 말을 이어갔다.“그래서 회사엔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거네?”기분이 좋은 듯 들뜬 말투로 묻는 성유리의 목소리를 들은 연정우는 그녀가 신경 쓰는 게 결코 돈이나 이익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성유리는 지금 진신으로 연정우의 일에 기뻐하고 그를 대신해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필경 연정우가 어떤 삶을 좋아한다고 한들 그가 장성 그룹을 위해 들였던 시간과 노력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일이 어떻게 된다고 한 대도 장성 그룹의 막은 결코 이렇게 내려가면 안 되지 않은가?연정우는 성유리의 감정에 동기화된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아마도 그렇겠지? 근데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그래도 괜찮지. 적어도 희망은 남아있는 거니까.”성유리가 물었다.“그래서 어디로 출장 갈 예정인데?”“강원국. 비행기 티켓도 다 끊어뒀어.”“응. 조심히 다녀와.”“그래. 올 때 너랑 하늘이 선물도 가져올까?”“성유리는 그 말에 웃으며 대답
하지만 지금, 연정우는 주동적으로 유효정의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유효정은 은근히 이 상황을 즐겼고 연정우는 어느새 그녀를 회사 안까지 데리고 들어섰다.사람이 그다지 없는 곳에 다다르자 연정우는 바로 유효정의 손을 놓더니 어두운 안색으로 물었다.“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유효정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연정우의 온기에 마음이 공허해졌는지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제가 왜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죠? 저 만기출소 했어요.”그녀의 대답에 연정우는 입술을 오므리며 다시 물었다.“제 말이 지금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그럼 무슨 뜻인데요?”유효정은 연정우의 의도를 도통 모르겠다는 듯 계속 말했다.“설마... 저는 연정우 씨를 찾아오면 안 되는 사람인 거예요?”“그렇지만 잘 아시잖아요. 저희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셨고 옛 친구들도 저를 피해요. 아무도 저를 만나주지 않는다고요. 이 도시에서 전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어버렸죠.”“이런 상황에 연정우 씨를 찾아오지 않으면 제가 또 누구를 찾을 수 있겠어요?”유효정은 말하며 연정우에게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갔다.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그러나 연정우는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흠칫 놀라더니 표정 또한 삽시간에 변했고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그는 마치 유효정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싫은 사람처럼 그녀를 피했고 심지어는 같이 서 있으려 하지도 않았다.연정우의 행동에 유효정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고 그 순간, 연정우가 말을 꺼냈다.“왜 감옥에 갇히셨는지 잊으셨습니까?”“저야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유효정은 연정우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대답했다.“정우 씨가 절 신고했잖아요. 아니에요?”“그리고 나중에야 저도 생각 정리를 마쳤죠. 분명 제가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로 제 앞에서 성유리 씨한테 얼마나 많은 감정이 남아있는지 드러냈잖아요.”“만약 정우 씨가 정말 진심으로 성유리 씨를 사랑했다면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박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유효정은 지금 자신이 그와 잡담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래서 유효정은 에둘러 말하지 않기로 하고 바로 말하기 시작했다.“박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저희 집 재산이나 회사 다 뺏기고 제 부모님마저 세상을 뜨셨다는 사실을요.”“그래서 전 출소한대도 별 소용이 없었어요. 이 도시에 믿을 수 있는 사람 한 명 없기 때문이죠. 심지어 생계를 유지할 방법도 없고요.”“근데 요즘 박 대표님께서 골치가 아파하는 일이 하나 생겼다고 들었어요. 만약 제가 대표님 대신에 그 일을 해결해 주면 박 대표님께서 저한테 돈을 주실 수 있나 해서요.”박한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유효정을 쳐다보며 웃더니 물었다.“네?”“대표님께서 왜 연정우 씨를 벼랑 끝까지 내모는지 저도 잘 알아요. 성유리 때문이 아닌가요? 근데 아마 대표님은 모르실 거예요. 연정우 그 인간은... 자기 지위나 권력에는 별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러니 박 대표님이 하신 공격은 번지수를 잘못 짚으신 거죠.”“그리고 사실... 연정우 씨와 성유리 씨 사이를 갈라놓으려면 이렇게 번거롭게 하실 필요도 없어요.”박한빈은 말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저한테 기회를 주신다면 꼭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다고 보장할게요. 그때가 되면 성유리 씨도 자연스레 대표님 곁으로 돌아올 거고요. 어때요?”유효정의 말은 아주 단순했다. 그녀는 지금 박한빈에게 모 아니면 도의 선택지를 던져주는 것이었다.박한빈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유효정에게 물었다.“무슨 뜻입니까? 뭘 어떻게 하실 셈이죠?”“제가 뭘 하든 그건 박 대표님이 신경 쓸 일이 아니죠. 대표님께서는 그냥 제가 방금 제시한 조건에 대해... 답해주시면 돼요.”“많은 돈은 안 바라요. 100억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지금 대표님 몸값만 얼마나 되는지 잘 알아요. 이정도 돈은 박 대표님에게 있어 껌값 아닌가요? 껌값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되찾으면 좋은 거잖아요.”박한
“그리고 나도 믿어. 정말 하루아침에 회사가 부도가 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때가 와도 난 잘 살 수 있을 거야. 잘 살지 못한다고 해도 절대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거고. 특히 유리 너를 원망할 일은 죽어도 없을 거야.”연정우의 대답에 긴장감에 바짝 굳어있던 성유리는 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래서 오늘 종일 이것 때문에 걱정했어?”“응...”성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도 어머니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그래도 사모님은 널 위해서 이러는 거니까.”“응. 안 그럴게.”연정우는 빠르게 대답했지만 성유리는 그의 대답이 성의 없어 보여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러자 연정우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사람처럼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아까 화난 건 네가... 나를 버리고 떠날까 봐 그런 거야. 그렇지만 이제 보니 오해였던 것 같네. 그러니까 너도 걱정하지 마. 어머니랑 안 싸울 테니까.”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는 그나마 안심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너 지금 어딘데?”“회사. 근데 곧 집에 가려고.”“알겠어. 집에 가서 푹 쉬어.”“너도. 일찍 자.”연정우의 다정다감한 말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고 성유리는 간단한 대답만 마치고는 통화를 끝냈다.한편, 연정우도 회사를 떠나려고 주차장에 내려갔지만 평소와 달리 싸한 기분에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에 심호흡 한 번 하고는 바로 뒤돌아보았지만 텅 빈 주차장엔 아무도 없었다.연정우는 제 자리에서 한참 사방을 둘러보다 확실히 자기 빼고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요즘 너무 피곤해 환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여겼다.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차 문을 닫고는 바로 시동을 걸어 지하 주차장을 벗어났다. 하지만 연정우가 떠나자마자 기둥 뒤에 숨어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짧은 머리였고 모자까지 꾹 눌러쓴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절반쯤 드러난 얼굴에는 너무
연정우가 성유리와 약속한 시간은 11시였다. 하지만 12시가 다 되어서도 연락 없는 연정우를 성유리는 뜬눈으로 기다렸다.“하늘이 잠들었어?”12시가 넘은 자정이 되어서야 연정우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 왔다.“응. 지금 자.”성유리는 핸드폰을 들고 거실 발코니로 향하며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미안해. 원래는 10시쯤에 전화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또 일이 생겨서 지금까지 바빴어.”“괜찮아. 나도 아직 안 자고 있었어.”연신 사과를 하는 연정우에게 성유리는 거듭 괜찮다고 강조했고 둘 사이엔 빠르게 적막이 찾아왔다.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금세 감지한 연정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무슨 일 있어?”“아니.”성유리는 재빨리 대답하고는 연정우에게 물었다.“너... 요즘도 그렇게 바빠?”“응. 그렇지 뭐. 그냥 투자자들이 제일 중요한 문제야. 너도 알잖아. 아직 회사는 제대로 파산 신청도 안 했는데 그 사람들이 다 같이 발을 빼버리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래서 나...”연정우는 말하다 문득 목이 막히는지 뚝 멈추더니 이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봐. 내가 이런 말을 너한테 뭣하러 하겠어. 사실 별거 아니야. 그저 그런 평범한 과정일 뿐이지.”“요즘 너 너무 고생하는 거 아니야?”조용히 연정우의 말을 듣고만 있던 성유리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그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성유리는 연정우에게 묻고 싶은 것이 더 많았지만 이번엔 그가 먼저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인데?”이번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잠시 후, 성유리가 대답했다.“아무 일도 없어. 그냥... 갑자기 너한테 너무 미안해서 그래.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힘든 것 같아서.”연정우는 대답이 없었다.“만약 나만 아니었다면 너도 아마...”성유리는 두 손을 움켜쥐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고 그때, 연정우가 뭔가 눈치 차린 듯 물었다.“우리 엄마가 너한테 찾아갔었어?”연정우는 성유리의 말을 채 들어보지도 않고 정확히 그녀에게 발생한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우는 너와 함께하기를 선택했어. 그러니 성유리, 너희 관계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내 아들이 끊임없이 참고 양보했기 때문 아니야? 그런데 너는 정우를 위해 뭘 했지?”금미라는 마지막 말을 툭 던지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그녀의 마지막 말은 전에 말보다 악독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무거운 돌덩이가 성유리의 가슴을 세게 내려친 것처럼 가슴 속에서 강렬하게 울려 퍼졌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늘이가 방에서 나오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걱정과 의문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엄마?”하늘이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바라보았다.“아까 그 사람이 아저씨의 엄마야?”하늘이가 물었다.“근데 왜 그렇게 무섭게 구는 거야?”성유리는 하늘이에게 굳은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건 무서운 게 아니라 그게 바로... 엄마로서의 본능이야. 마치 엄마가 하늘이를 위해서라면 나쁜 사람을 다 쫓아낼 수 있는 것처럼, 그분도 자기 아이를 보호하려고 했던 거야.”“하지만 엄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잖아.”하늘이는 여전히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내가 나쁜 사람이지 않을까?’성유리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최근 며칠 동안 성유리는 스스로를 또 다른 의문 속에 가둬두고 있었다.연정우가 그 삶에 지쳤다고 말했을 때, 그리고 자신을 선택했다는 기쁨에 그녀는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하지만 금미라가 말한 것처럼 연정우가 성유리를 위해 이 모든 것을 감내했는데 정작 그녀는 연정우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심지어 성유리가 연정우에게 준 감정적인 보답조차도 너무나 미미했다.“모든 일에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어.”성유리는 결국 하늘이에게 이런 대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나중에 네가 크다 보면 자연스레 다 알게 될 거야.”그러나 성유리의 이런 대답은 하늘이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아이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왜 뭐든 다 커야지만 알 수 있는 거야? 도
금미라의 말이 다 끝나자 성유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긴 침묵에 잠겼다.“그러니까 너도 결국 네가 정우를 망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지?”금미라는 그런 성유리를 쳐다보며 그녀를 비웃는 듯한 웃음을 더 크게 지었다.“그럼 사모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시는데요?”그때, 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그걸 몰라서 묻는 거니? 당연히 정우 옆에서 떠나야지!”성유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침착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사모님, 연정우는 이제 성인이에요. 자신이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죠. 더군다나... 저희는 이미 약속을 했어요. 정우가 떠나지 않기로 했는데 제가 이런 상황에서 그런 정우를 버릴 수는 없잖아요.”“버린다고?”금미라는 더더욱 성유리를 조롱하듯이 웃음을 빵 터뜨렸다.“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는 상황이 어떤지 잘 알잖아. 정우 회사가 왜 갑자기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말이야. 그게 다 누구 때문인 것 같아?”“바로 성유리 너 때문이잖아! 너를 만난 뒤로 정우에게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이 있었어? 매번 너 때문에 하던 일마저 다 잘못되고 있잖아! 심지어 그전에도! 정우의 외할아버지가 왜 돈세탁에 연루됐다고 고발당했을까? 그 일이 박한빈이랑 관련돼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거야?”“그 일만 없었어도 정우는 그 누구와도 약혼하지 않았을 거야. 우리 가문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이제 겨우 정우의 삶이 정상으로 돌아오려는 찰나에 네가 다시 나타나 버린 거야. 도대체 정우한테 힘든 시간을 얼마나 더 버텨 달라고 하려는 거지? 유리 넌 결국 정우가 죽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거니?”금미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앙되었고 눈에는 눈물마저 고여 있었다.“그런데도 네가 무슨 자격으로 정우를 버리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건데? 너만 아니었다면 정우가 이런 일을 겪을 일이 있겠어? 정우는 원래 행복하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이야. 그런데 다 유리 너 때문에 틀려버렸다고!”금미라는 성유리 앞에서 차마 울음을 터뜨
“지금 이게 무슨 의미야?”금미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정우가 며칠 전까지 여기 있었던 건 맞지만 어젯밤에 이미 떠났어요.”“그래?”금미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잘됐네.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 왔어.”성유리는 금미라의 말에 순순히 몸을 옆으로 비켜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서게 했다.금미라는 고급스러운 맞춤 드레스와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그녀의 표정에는 이 집에 대한 명백한 불쾌감이 드러나 있었다.“무슨 음료 드릴까요?”성유리가 물었지만 금미라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천천히 시선을 하늘이에게로 돌렸다.하늘이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아이의 직감은 누구보다 정확했다. 누가 선한 사람인지, 누가 날카로운 사람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금미라가 자신을 쳐다보는 동안 하늘이는 성유리 뒤로 숨으며 그녀를 몰래 쳐다봤다. 아이의 눈빛에는 평소에 잘 없던 두려움이 그득하게 서려 있었다.금미라는 그런 하늘이를 보며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고 성유리는 하늘이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이며 달래기 시작했다.“하늘아, 엄마 말 잘 듣고 방에 가서 잠깐만 기다려줄래?”하늘이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엄마는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하늘이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성유리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금미라를 힐끔 쳐다본 후 빠르게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아이가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한 성유리는 이내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따라 금미라 앞에 놓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집이 좀 어수선하네요. 미처 정리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방문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성유리의 말에 금미라는 갑자기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너 지금 나한테 이런 걸 묻는 거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도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닌가?”“정우를 찾으러 오신 거 아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