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439화

작가: 송진
성유리의 눈을 마주 보게 된 순간, 최정민은 말을 잇기가 어려워졌다.

“최정민 씨?”

성유리가 다시 물었다.

그제야 최정민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고 성유리를 바라봤다. 잠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최정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박 대표님과 관련된 일로 왔습니다.”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최정민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계속 말했다.

“당신들이 이미 결혼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저도 정말 방법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죄송합니다. 사모님. 혹시 박 대표님을 저에게 양보해 주실 수 있나요?”

그 말을 마친 최정민은 죄책감 탓인지 고개를 푹 떨궜다.

그녀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동공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성유리는 그런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 물었다.

“임신했나요?”

“아니에요!”

그 질문에 최정민은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고개를 연신 절레절레 저었다.

“저... 저희가 만난 지 사실 고작 2주밖에 안 됐어요. 임신일 리가 없잖아요?”

성유리는 다시 침묵했다.

“하지만 저희 정말로 사귀고 있어요. 믿기 힘드시면 제가 사진도 보여드릴게요.”

말을 하며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고 곧바로 화면에 두 사람이 찍은 사진이 보였다.

단 한 번 쳐다보았을 뿐인데도 성유리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최정민을 쳐다보던 성유리가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것도 알고 제가 임신 중이라는 것도 알면서 어떻게 저에게 그런 걸 요구할 수 있나요?”

최정민은 나지막한 소리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진실되지 않는 남편을 곁에 두지 않을 분이니까요.”

그녀는 담담하게 계속 말했다.

“전에 당신이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도 제가 직접 봤거든요.”

“그때 당신과 박 대표님은 아직 화해하지 않
잠긴 챕터
GoodNovel에서 계속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관련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40화

    비록 어젯밤 성유리가 박한빔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이미 온천 호텔을 예약해 두었다. 내일 시간을 여유롭게 쓰기 위해 오늘 일찍 도연제로 돌아온 그는 그날 밤 먼저 성유리와 함께 가려고 했다. 하지만 별장에 도착했을 때, 평소와 달리 집안은 어두컴컴했다. 얼마 전 성유리가 집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박한빈은 집안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정해진 시간에만 청소하러 오라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 이 집에는 성유리 혼자뿐이었다. 지금 그녀가 없으니 집 안은 더욱 어두워 보였고 차가운 정적만이 맴돌았다. 그 분위기에 박한빈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고 이 늦은 시간에 그녀는 어디로 간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박한빈은 곧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는 차가운 음성 안내만 들려왔다. 그는 한층 더 굳어진 얼굴로 바로 가사도우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성유리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오늘 저희가 왔을 때는 이미 집에 안 계셨어요. 요즘 도자기 수업을 계속 듣고 계셨는데 혹시 거기에 계신 거 아닐까요?” ‘도자기 수업?’ 박한빈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 수업 어디에서 하죠? 주소 좀 주십시오.” 가사도우미에게서 주소를 받은 박한빈은 곧바로 도자기 학원으로 향했고 그곳의 불은 켜져 있었지만 안을 둘러봐도 성유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박한빈은 잔뜩 불안해하며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곧 학원 직원이 다가오며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유리 씨 여기 있습니까?” “성유리 씨요?” 직원이 잠시 당황하더니 대답했다.“오늘 수업 예약은 하셨는데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못 오신다고 하셨어요. 혹시 남편분이신가요?” 박한빈은 직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학원을 나섰다. 그녀가 이곳에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발걸음은 한층 더 무거워졌다. 밖으로 나왔지만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을지 감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41화

    “난 이미 전에 한번 봤었어.” “저도 봤어요! 근데 볼 때마다 눈물이 나는 걸요?” 사하나는 뭐가 그리 슬픈지 휴지로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고 성유리는 그저 물만 마셔댔다.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됐죠?” 사하나는 순간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성유리에게 물었다. “제가 빨리 모셔다 드릴 까요?” “그럴 필요 없어.” 성유리는 여전히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고 사하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무슨 뜻이에요? 두 분 혹시 싸우셨어요?” 사하나는 문득 어제 자기가 해줬던 말들이 떠올랐는지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계속 물었다. “아니면... 어제 제가 말한 그 일들에 관해 박 대표님께 물어보신 거예요?” 성유리는 그저 사하나만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 대표님께서 정말...” 사하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벨이 울렸다. 그녀는 늦은 시간에 들리는 벨 소리에 의아해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아무 말 없는 성유리를 보던 사하나는 그제야 눈치챘는지 다시 말했다. “박한빈 씨 아니에요? 언니가 가서 문 열어주세요.” “나도 모르지.” 성유리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문을 열어주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사하나가 그녀를 다시 앉히며 말했다. “됐어요. 그냥 제가 갈게요. 언니는 앉아계세요.” 사하나는 뚜벅뚜벅 걸어 현관으로 향했고 영화를 보려고 켜놓은 작은 조명 때문에 현관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마침 현관에 있던 등이 인기척을 감지하고 켜졌고 박한빈을 환하게 비췄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은 박한빈이 문 앞에 나타나자 사하나는 예상했음에도 화들짝 놀랐다. 잠시 멍해 있던 사하나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박한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박 대표님,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오셔서 저를 놀라게 하는 거예요?” “성유리 여기 있어?” 박한빈은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 사하나가 다른 무슨 말을 내뱉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집안으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42화

    박한빈은 원래 무표정한 얼굴로 사하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하나의 마지막 말에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더니 반박했다. “내가 집에 안 들어온다고?” “제 말이 틀렸나요? 정말 사람을 바보로 아시나...” 사하나는 점점 더 격분했고 성유리는 빨리 다가가 그녀를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사하나는 성유리의 손을 뿌리치더니 계속 말했다. “언니는 상관하지 마세요! 오늘 꼭 제대로 한번 말해봐야겠어요.” 사하나는 고개를 휙 돌려 박한빈을 쳐다보며 물었다. “말씀해 보세요. 잘나신 박 대표님. 박 대표님이랑 그 여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업계에 소문이 쫙 났어요. 사람들 입이 얼마나 싼지 설마 모르고 계실 리는 없겠죠?” “아니면 그 소문이 사실이라 반박할 자격이 없는 건가요?” “정말 대단하세요. 유리 언니랑 화해하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이러세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언니를 말렸어야 해요. 영원히 절대로 박 대표님을 용서하지 말라고 할 걸 그랬다고요!” 사하나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박한빈은 오히려 아까보다 더 평온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은 마치 그녀에게 사하나와 똑같이 자신을 의심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소파에 앉은 채로 침묵할 뿐이었다. “이건 저희 부부 사이의 일이니 사하나 씨가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박한빈은 사하나에게 짧은 대답을 해주고는 바로 성유리의 손을 잡고 떠나려 했다. 아무렇지 않은 박한빈의 태도에 사하나는 더욱 분노가 치밀어 두 사람을 가로막아 서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리가 사하나를 조용히 바라봐줬다. ‘뭐지?’ 사하나는 그녀의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성유리는 사하나를 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박한빈은 이곳까지 직접 운전을 하고 왔기에 성유리는 순순히 그의 차에 올라타며 안전벨트까지 맸다. 이런 순한 모습에 박한빈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운전석에 앉아 운전대를 꽉 잡은 채로 입을 열었다. “사하나 씨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43화

    박한빈은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이번엔 전화를 바로 끊어버리지 않았다. 성유리는 그 모습에 안전벨트를 풀어버리더니 말했다. “됐어요. 그냥 저 혼자 갈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차 문을 벌컥 열고 내릴 채비를 했다. 이때, 박한빈이 재빨리 성유리의 손을 꽉 잡더니 물었다. “어디 가려고?” “바쁘신 것 같아서 저 혼자 택시 타고 가려고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택시를 어떻게 혼자 타!” “길 가다 보면 널리고 널린 게 택신데 제가 왜 못 타죠?” “빨리 앉아. 나 곧...” 박한빈의 뭐라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세 번째 전화가 걸려 왔고 성유리는 그를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봐요. 많이 바빠 보이시니까 저 그냥 혼자 갈게요. 방해되지 않게.”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을 뿌리쳤지만 그는 다시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성유리의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차에서 내려서는 바로 길 맞은편으로 향했다. 박한빈은 그녀를 따라가려고 안전벨트를 풀어버리려고 했지만 마침 신호등 불빛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 해도 금성 도로엔 쌩쌩 달리는 차가 꽤 많았다. 그래서 박한빈은 아예 차를 몰고 그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빨간 불이 다시 초록 불로 바뀌는 순간, 박한빈은 재빨리 길 맞은편을 쳐다보았지만 성유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박한빈은 핸드폰을 열어 성유리에게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그녀의 폰은 여전히 꺼져있는 상태였다. 화가 난 박한빈은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세게 차버렸다. 그러더니 다시 차로 올라타 도연제로 향했다. 빠르게 운전을 한 박한빈이기에 그는 성유리보다 먼저 도연제에 도착했다. 그는 무서울 만큼 조용한 별장이 너무 싫어 모든 조명을 다 환하게 켜놓았다. 그리고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성유리가 오기를 기다리려고 마음먹었다. 그때 시간은 이미 12시가 넘은 자정이었으니 박한빈의 생일이라고 해도 되는 시간이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단 한 번도 자기 생일을 이토록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44화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박한빈의 차에서 내려 길을 건넜다는 것만 기억했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세게 때린 것 같았다.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보기도 전에, 그 사람은 이미 그녀의 입과 코를 가려버렸고 그 직후 그녀는 모든 의식을 잃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성유리는 이상한 방에 누워 있었다.그녀의 손과 발은 묶여 있었고 방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심하게 났으며 달빛이 조금 비추는 창문을 제외하면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성유리는 누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상대방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집 안에서 자신이 묶여있는 밧줄을 끊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깜짝 놀란 성유리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눈앞의 사람을 보자 성유리의 동공은 심하게 떨렸고 그와 동시에 살짝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에요?” “많이 놀란 것 같네요?” 유효정은 성유리의 모습을 비웃으며 깔깔 웃었다. “유효정 씨, 당신의 신분으로 왜 굳이 이런 일을 하시는 거죠?” “굳이라고요? 굳이?” 유효정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대답했다. “이런 당신의 모습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아요. 너무 힘들고 마음이 불편하게 사는 저와 성유리 씨를 비교해보면 자꾸만 질투가 나서요.” 유효정은 말을 하는 동안 시선이 조금씩 내려가더니 성유리의 배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신 몇 개월 되셨죠?” 성유리는 그녀가 갑자기 이런 물음을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녀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었고 몸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웅크렸다. 이 어설픈 성유리의 행동에 유효정이 웃으며 물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러면 제 마음이 약해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유효정은 손을 뻗어 성유리의 배를 쿡쿡 찔러보았다. 그녀의 힘은 별로 세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충격에 휩싸였고 눈으로는 유효정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45화

    “제가 얼마나 배려심이 많은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유리 씨도 저 좀 배려해 주세요. 움직이려고 애쓰지 마시고요. 알아들으셨어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 칼이 실수로 당신의 배에 떨어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저도 되게 민망해질 텐데?” 유효정은 말하면서 손에 점점 더 세게 힘을 주었고 성유리는 선명하게 느껴지는 강한 고통을 견뎠다. 그녀의 칼이 그어지는 곳에서는 빨간 피가 쏟아져 내렸고 방안은 소름 끼칠 정도로 추웠다.  이 상황에 성유리는 문득 박한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성유리는 혹시 자기가 먼저 떠나버려 박한빈이 기분이 나빠졌는지, 아니면 지금 다른 곳에서 미친 듯이 자신을 찾고 있는지 몰랐다. 둘 다 아니면 최정민의 전화를 받느라 성유리의 실종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성유리는 감히 다른 경우들을 생각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씁쓸해졌기 때문에. 통증은 점점 더 뚜렷해졌지만 그녀는 몸부림치지도 못했다.  유효정의 말대로 아직 뱃속에 아이가 있으니 말이다. 그녀의 심기를 다시 건드려 한 번 더 화를 낸다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할 것인지 성유리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성유리 얼굴의 살이 점점 벗겨지자 유효정은 피를 본 상어처럼 눈이 번쩍이고 눈빛에는 광기가 서렸다. 그러더니 유효정의 손에 힘이 더 더해졌다. 성유리가 자신의 목에 곧 칼날이 꽂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의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유효정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칼을 쥐고 있던 손마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그쪽에 있던 사람들이 벌써 달려들어 그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 순간, 유효정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땅에 툭 떨어졌다. 원래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성유리는 천천히 눈을 떴고 도대체 언제 이렇게 많은 경찰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비추는 환한 불빛에 성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46화

    다친 성유리를 실은 구급차는 얼마 안 지나 바로 병원에 도착했다.성유리의 얼굴에 흐르던 피는 이미 멈췄지만 의사는 봉합을 계속 진행해야 했다. 마취주사 때문에 얼굴에 감각이 없는 상태였음에도 성유리는 의사가 자신의 피부를 바늘과 실로 꿰매는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작은 봉합 수술이라 성유리의 치료는 응급실 안에서 진행되었고 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 응급실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지금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성유리조차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의사가 봉합을 끝마칠 때까지도 박한빈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에 반면 연정우는 줄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유리가 응급실 밖으로 나오자 연정우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괜찮아? 많이 아프진 않아?” 성유리는 묻는 연정우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네. 집에 데려다줄게.” 연정우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가던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을 본 연정우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정우는 내색하지 않았고 이내 미소를 띠며 물었다. “왜 그래?” “유효정 씨 일은 처리 안 해도 돼?” 침묵하던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 “지금쯤 경찰 손에 잡혀 아무것도 못 할 텐데 너는...” “괜찮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연정우는 화를 억누르는 듯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원래대로라면 성유리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그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효정 씨 아버지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연정우는 빠르게 표정을 바꾸며 다시 말을 이어갔고 성유리는 조용히 그가 하는 말을 들어주었다. “이번에 유효정이 건드린 사람이 너니까 박한빈 씨가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근데 박한빈 씨는 오늘 밤 왜 안 왔을까?” 그의 말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이 왜 안 왔는지는 모르겠어. 근데 이제 보니 유효정 씨가 대체 왜 그렇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47화

    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에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채 정리할 틈도 없이 성유리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죽었다는 그 사람이 혹시 최정민 씨야?” ... 연정우가 말한 죽은 자는 정말로 최정민이었다. 그녀는 아파트 단지 21층 발코니에서 추락해 현장에서 즉사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녀가 죽었을 당시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바로최정민의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 집 안에는 그녀외에 오직 박한빈만 있었다. 늦은 시각, 다 큰 성인인 남녀 단둘만 남겨진 상황.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미 사람들의 온갖 추측과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박한빈의 신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각종 소문이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최정민과 박한빈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는 최근 그들 사이에서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그녀가 옷차림이 흐트러진 채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두 사람이 지나치게 방탕한 놀이를 하다 사고로 발코니에서 떨어져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살을 결심한 여자가 그런 상태로 죽을 리 없으니까 말이다. 원래 재벌가의 이야기는 연예계의 가십보다 더 자극적이다. 그렇기에 대중의 관심은 더욱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들이 성유리에게 연락을 시도해 이번 사건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얼마 전 박한빈이 성유리의 결혼식에서 그녀 대신 칼을 맞아준 일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때 그의 행동에 충격받는 한편 또 많은 감동을 받았다. 모두가 박한빈이 성유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벌어진 일은 이 모든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박한빈과 최정민의 관계에 대해 그녀가 남들보다 더 아는 것도 없었으니 최정민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최신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57화

    “저 아직 밥도 못 먹었는데 같이 가서 식사 하시겠습니까?”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그러나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윤도준은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박한빈이 멀리서 가볍게 손짓을 한 뒤 그대로 성유리를 차에 태웠다.이 차는 어제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반짝이던 차체는 마을의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온통 흙탕물로 뒤덮여 있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차가 한참을 달린 뒤에야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엄마가 알게 되면 어떡해요!”“걱정 마십시오. 혹시 유리 씨한테 화를 내면 제가 가서 설명할 테니까.”“아마 엄마는 분명 당신을 때릴 거예요.”박한빈은 여전히 운전대를 잡은 채 성유리를 슬쩍 바라보았다.“왜요? 걱정되십니까?”“당연히 그건 아니에요.”성유리는 즉각 반박하더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잡았다.“당신...”놀란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가만히 있으세요. 지금 저 운전 중이니까.”“게다가 손에 아직 상처가 있습니다.”그 말에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췄다.고개를 숙여 보니 그의 흰 셔츠 아래로 여러 겹의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리고 그 아래로 스며 나온 붉은 피가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아직 안 나았어요?”성유리는 무심결에 눈썹을 찌푸렸다.“걱정 마십시오. 안 아픕니다.”박한빈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런 그를 한참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결국 손을 거두었다.그러나 박한빈의 손이 닿아 있는 곳에서부터 이상한 감각이 퍼졌다.마치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성유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하더니 결국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박한빈이 성유리를 읍내로 데려간 것은 단순히 밥을 먹고 장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그녀를 병원에 데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는 성유리가 자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56화

    할머니는 마을에서 작은 땅을 갖고 있었다.예전에는 옥수수를 심었지만 몇 년 전 이웃 마을에서 계약 농사를 제안하면서 딸기로 바꿨다.그러니 지금은 딸기 씨앗을 심을 시기였다.아침부터 소란을 피운 할머니를 성유리는 억지로 집에서 쉬게 하고 자신이 대신 밭일을 맡았다.일 자체는 힘들지 않았지만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다 보니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쪼그려 앉아 씨앗을 심던 성유리가 잠시 눈을 감고 쉬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손을 뻗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지금 뭐 하십니까?”고개를 들어보니 박한빈이 찌푸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순간 얼어붙었고 이내 허둥지둥 그의 손을 밀어냈다.그리고는 황급히 몇 걸음 물러나 박한빈과의 거리를 벌린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저... 근데 왜 여기 계세요?”박한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절 무서워하시는 겁니까?”“아... 아니에요!”성유리는 서둘러 부정했다.마치 그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말이다.“다만... 엄마가 당신이랑 같이 있는 걸 싫어해요.”한참을 망설이다가 성유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엄마가 화낼 거예요.”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성유리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왜죠? 그쪽 어머니는 제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네.”“하지만 유리 씨는 제가 나쁜 놈이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요?”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을 따르는 겁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의 질문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냥 혼란스러운 건지 알 수 없지만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게다가 유리 씨가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모를 텐데 말이죠.”“그럼... 그건 속이는 거잖아요.”“속이는 게 아닙니다. 그냥 말하지 않는 것뿐이지.”성유리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박한빈 또한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여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55화

    박한빈은 많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환경은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더구나, 이번에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창문 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할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누군가를 쫓아내고 있었다.이미 백발이 성성했지만 기운만큼은 넘쳤다.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몰아내는 동안, 마을 안팎 사람들이 소란에 놀라 몰려들었고 할머니는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까지 싸잡아 한바탕 호통을 쳤다.그 뒤에는 성유리가 조용히 서 있었다.마치 어미 닭에게 보호받는 병아리처럼.주변을 궁금한 듯 둘러보면서도 절대 할머니의 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박한빈이 그 장면을 바라보던 순간, 성유리도 마침 그의 시선을 느낀 듯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려 할머니의 손을 붙잡았다.소동이 한참 이어진 끝에, 할머니는 성유리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쾅!그 문이 닫히는 소리는 깜짝 놀랄 정도로 컸다.그러고 나서야, 할머니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겁먹지 마라. 저런 놈이 뭐라고!”“우리 딸처럼 좋은 아가씨가 결혼할 상대를 못 찾을 것 같아? 걱정 마. 엄마가 더 좋은 사람 골라줄 테니!”“엄마... 사실 저는 결혼 서두를 생각 없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말했다.“그건 안 돼!”할머니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칼에 잘랐다.“여자는 크면 시집가야 하는 법이야.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으면 어쩌자는 거냐?”“게다가 내가 지금은 네 곁을 지켜주지만 언젠가는 나도 떠나야 한다. 그때 네가 혼자 남으면 누가 널 지켜주겠어?”엄마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야?”아직 화가 덜 풀린 할머니는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하지만 문밖의 사람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안녕하세요. 문 좀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이번엔 또 누구야?”할머니는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단정한 흰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54화

    그 목소리에 성유리는 황급히 돌아섰는데 마치 얼굴에 ‘당황’이라는 글자를 적어 놓은 듯했다.할머니는 가느다란 눈을 좁히며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다녀온 거야?”“저... 밖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서 좀 보고 오느라...”“고양이?”할머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이 마을에 고양이 몇 마리 있는 게 뭐가 그렇게 신기해?”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할머니도 깊이 따지지는 않았다.“얼른 자라.”그저 짧은 말만 남긴 채, 제 방으로 돌아갔다.성유리도 조용히 뒤따라 방으로 향했다.그녀의 방 창문은 길 건너편 박한빈이 머무는 집과 마주 보고 있었다.그곳의 창문에는 어제 새롭게 창호지를 발라놓아 이제 더 이상 구멍이 나 있지 않았다.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노란빛 조명은 성유리의 방 조명과 똑같은 따뜻한 색이었다.성유리는 그 창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누워 잠을 청했다.그렇게 밤이 지나갔다.할머니는 원래 잠이 적었기에 해가 뜨기도 전에 괭이를 들고 밭으로 나갔다.성유리는 침구를 정리한 후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계란을 깨려고 고개를 숙인 순간, 갑자기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는 분명 할머니의 것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순간 긴장했다.그래서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문밖으로 나섰다.그러나 마주한 사람을 보고는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그러나 이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아주머니, 어쩐 일이세요?”“너희 어머니 계시니? 볼 일이 있어서 왔어.”여자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아마 밭에 계실 거예요. 불러올까요?”“그래, 다녀와.”여자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그러더니 성유리를 한 번 훑어보곤,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하지만 성유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별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마침 그 순간, 할머니가 밭에서 돌아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길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53화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에릭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흠, 듣고 보니 꽤 재미있을 것 같군.”“그럼 이 일은 네게 맡길게.”“뭐라고?”“너도 알다시피 난 이미 죽은 사람이야. 그리고 사씨 가문 쪽도...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내가 직접 손을 대긴 어려워.”“예전부터 네가 한국 시장에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 지금이 바로 기회 아닌가?”에릭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박한빈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이 마을 사람들은 일찍 잠드는 편이었다.지금은 사방이 조용했기에 그 작은 소리조차 유난히 또렷하게 들려왔다.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내려놓고 물었다.“누구십니까?”아직도 업무 모드였던 탓에 목소리에는 저절로 냉기가 서려 있었다.그랬더니 문밖에서 들리던 노크 소리가 멈췄다.하지만 대답은 없었다.불안해진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연정우 씨가 또 사람을 보낸 걸까?’그는 반사적으로 방 안을 둘러보며 무기로 쓸 만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문밖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저예요.”박한빈은 순간 멍해졌다.그리고는 에릭이 뭐라고 하는지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대로 전화를 끊고 문 쪽으로 향했다.느슨하게 걸린 낡은 나무문을 밀어 열자 문 앞에는 성유리가 서 있었다.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 한 그릇이 들려 있었고 발치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주전자도 놓여 있었다.“아직 안 주무셨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물었다.어딘가 머뭇거리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는 이내 시선을 떨구며 덧붙였다.“저... 저녁을 드셨는지 몰라서요. 그리고 여기 불 때는 곳도 없길래... 그냥 면을 좀 끓였어요. 따뜻한 물도요.”박한빈은 그녀가 들고 있는 그릇을 바라보았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둔탁하게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박한빈이 문득 물었다.“제가 누구인지 아십니까?”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52화

    마을에서는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았다.윤도준이 일부러 사람들을 데려와 집을 정리해 준 덕분에 겨우 머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신호 문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다행히 박한빈은 집 안 구석구석을 돌며 신호가 잡히는 곳을 찾아냈고 마침내 에릭과의 통화를 연결할 수 있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에릭은 비꼬듯이 물었다.“난 또 네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네?”“실망시켜서 미안한데 난 아주 잘 살아 있었어.”박한빈이 대답했다.“난 안 좋아.”에릭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지금 회사 쪽에서 어떤 난리가 났는지 알아? 전부 나한테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고! 이제야 확실히 알겠어. 네가 전에 말했던 불편해서 직접 나서지 못한다는 말, 결국 다 핑계였잖아. 나보고 대신 뒤집어쓰라는 거였지?”“일이 끝나면 내 몫의 이익 절반을 넘기지.”박한빈이 제시한 그 금액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하지만 돈은 이미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숫자나 다름없었다.그들이 하는 일에서 중요한 건 오직 짜릿함이었다.애초에 한 번에 일을 끝낼 수도 있었다.에릭은 심지어 축하 파티에서 마실 술까지 이미 골라 두었었다.그런데 갑자기 박한빈이이 모든 걸 멈추라고 했다.그 순간, 에릭은 마치 새벽녘 힘차게 울 준비를 하던 수탉이 갑자기 누군가에게 목을 눌린 듯한 기분이었다.숨이 막히고 무엇보다 기분이 몹시 나빴다.그때 박한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만약 네가 파티장에서 사고 치지만 않았어도 내가 너를 급하게 건지러 가지 않았어도, 성유리는 애초에 위험에 빠지지 않았을 거야.”“뭐야? 지금 나한테 책임이라도 묻겠다는 거냐?”“책임을 묻겠다는 건 아냐. 다만 우리나라엔 이런 말이 있지. 한 방울의 은혜에도 샘물처럼 보답하라는 말.”“너...”“됐고, 본론부터 들어가자.”박한빈이 그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성유리를 찾았어.”“오, 그건 축하할 일이네.”그러나 에릭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기쁨도 담겨 있지 않았다.오히려 실망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그도 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51화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저희 또 만났네요.”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여기 사는 겁니까?”성유리는 묻는 남자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여기 삽니다.”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네. 오늘 막 이사 왔거든요.”“아...”성유리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어딘가 찜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런데 이 집, 꽤 오래됐어요. 비라도 오면 새는 곳이 있을지도 몰라요.”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상했다. 정작 상대방의 이름조차 모르는 데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도 박한빈이 이곳에 산다는 말에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이 집과 그 남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그럼 그는 어디에 살아야 할까?성유리는 스스로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할머니는 박한한이 성유리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 순간, 할머니의 표정이 확 변했다.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휘두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이 망할 놈아! 감히 내 딸한테 손을 대?”“어서 손 안 놔! 당장 안 놓으라고!”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가 먼저 할머니를 꼭 끌어안았다.“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엄마, 진정하세요. 그냥 얘기 좀 나누고 있었던 것뿐이니까.”할머니는 조금 전까지 윤도준을 쫓아 몇 바퀴나 뛰었는지 이미 숨이 가빠져 있었다.그런데도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박한빈을 보는 시선엔 노골적인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엄마, 우리 들어가서 밥 먹어요.”성유리가 부드럽게 말했다.할머니가 아직 노려보는 와중에도 성유리는 서둘러 상황을 정리했다.“그쪽도 오늘 새로 이사 온 이웃이에요.”그 말에 할머니의 주의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성유리의 엄마라고 주장하는 할머니는 박한빈을 다시 한번 훑어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50화

    “설아?”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성유리는 정신을 차렸다.“네. 엄마, 왜 그러세요?”“그건 내가 물어볼 말이지.”할머니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성유리의 밥그릇을 탁탁 두들겼다.“밥 먹는데 무슨 넋을 놓고 앉아 있어?”성유리가 그 말에 재빨리 고개를 숙여 밥을 먹기 시작했다.그럼에도 할머니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오늘 일에 대해 생각하는 거지? 그 경찰들 다 헛소리 지껄이는 거야.”“어쨌든 결혼 날짜는 이미 정해졌으니 결혼식은 먼저 치러. 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 만큼 결혼하자마자 빨리 애 낳아. 내가 돌봐줄 수 있게.”“제가 누구랑 결혼해요?”성유리가 물었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복섭이지! 예물도 이미 받았는데 뭘 더 바라?”할머니의 언성이 높아지며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그 모습을 본 성유리가 재빨리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그냥... 물어본 거예요.”“네가 지금 행복에 겨워서 정신이 없는 모양이구나. 예전에 다 정해진 일 아니었니? 게다가 너랑 복섭이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결혼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어?”“제가 우섭이랑 오래 사귀었어요?”“그럼! 너희 어릴 때부터 함께 목욕도 했잖아. 몇 년이 아니라 2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라는 거야!”할머니의 말이 끝나가도 성유리는 아무런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녀가 애써 기억을 더듬으려는 순간, 머리가 격렬하게 아파지기 시작했다.고통을 무릅쓰고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밖에서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마을 길이 고르지 못해 차체가 격하게 흔들리며 지나가더니 성유리와 할머니가 앉아 있는 식탁 앞으로 먼지가 고스란히 날려왔다.그러자 할머니의 얼굴이 확 붉어졌고 젓가락까지 내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눈이 안 달렸냐! 밥 먹는데 먼지를 날리다니! 망할 놈의 새끼들아!”시간이 지나도 그칠 줄 모르는 할머니의 욕설은 매 한 마디가 다 아주 더러운 말들이었다.마을 누구나 아는 할머니의 억척스러움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49화

    “할머니, 보세요. 이게 바로 박한빈 씨의 아내 사진인데 여성분이랑...”“무슨 사진? 저 남자 아내가 생긴 거랑 우리 설이랑은 무슨 상관인데? 이 애는 내 딸이야!”“알겠습니다만 의혹이 제기된 이상 검사 한번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DNA 검사라도...”“DNA는 무슨 DNA! 너희들 다 미친 거 아냐? 내 딸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왜 남의 아내가 되냐고? 설아, 따라와!”할머니는 성유리의 손을 단호히 잡아끌며 몸을 돌렸다. 윤도준이 막 말을 걸려는 순간 박한빈이 오히려 그를 제지했다.“박한빈 씨, 이건...”“저 사람들 사는 마을이 어딥니까?”박한빈이 한없이 차가운 태도로 물었다.“네?”“저 사람들이 사는 마을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습니다.”...세상에 닮은 사람이 둘 있는 건 흔한 일이란 말을 누구나 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확신했다. 자신이 틀릴 리 없다는 것을.그녀의 눈동자 깊이 스민 습관, 손가락을 깨무는 버릇까지 모든 게 36일 전 사라진 아내와 일치했다.사실 그는 강제로 성유리를 데려갈 수도 있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만 한다면 설령 그녀가 저항해도 가장 가까운 신분으로 법적 조치가 가능했다.그러나 박한빈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이 선택을 하기까지 결정했던 순간은 성유리가 노파의 품으로 달려가 엄마라고 부르는 모습이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성유리가 어린 시절 엄마에게서 느끼지 못한 가족의 온기를 이 할머니에게서 찾고 있음을.병상에 누워 생명이 사라져가는 엄마와 달리 옆에서 챙겨주는 노파의 따스함이 지금 성유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이다.만약 강제로 성유리를 데려간다면 그녀가 무조건 자신을 혐오하고 증오할 것이라고 믿었다.게다가 성유리를 데려간 사람들 또한 잘해주는 것 같았고 그녀 스스로도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가짜라고 한들 동년의 아쉬움과 공허한 마음 한구석을 채워주고 있으니 박한빈은 어쩌면 성유리에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당연하게도 염우섭이라는 남자의 존재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그래서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