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의 눈을 마주 보게 된 순간, 최정민은 말을 잇기가 어려워졌다. “최정민 씨?” 성유리가 다시 물었다. 그제야 최정민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고 성유리를 바라봤다. 잠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최정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박 대표님과 관련된 일로 왔습니다.”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최정민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계속 말했다. “당신들이 이미 결혼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저도 정말 방법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죄송합니다. 사모님. 혹시 박 대표님을 저에게 양보해 주실 수 있나요?” 그 말을 마친 최정민은 죄책감 탓인지 고개를 푹 떨궜다. 그녀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동공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성유리는 그런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 물었다. “임신했나요?” “아니에요!” 그 질문에 최정민은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고개를 연신 절레절레 저었다. “저... 저희가 만난 지 사실 고작 2주밖에 안 됐어요. 임신일 리가 없잖아요?” 성유리는 다시 침묵했다. “하지만 저희 정말로 사귀고 있어요. 믿기 힘드시면 제가 사진도 보여드릴게요.” 말을 하며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고 곧바로 화면에 두 사람이 찍은 사진이 보였다. 단 한 번 쳐다보았을 뿐인데도 성유리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최정민을 쳐다보던 성유리가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것도 알고 제가 임신 중이라는 것도 알면서 어떻게 저에게 그런 걸 요구할 수 있나요?” 최정민은 나지막한 소리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왜냐하면 당신은 진실되지 않는 남편을 곁에 두지 않을 분이니까요.” 그녀는 담담하게 계속 말했다. “전에 당신이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도 제가 직접 봤거든요.” “그때 당신과 박 대표님은 아직 화해하지 않
비록 어젯밤 성유리가 박한빔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이미 온천 호텔을 예약해 두었다. 내일 시간을 여유롭게 쓰기 위해 오늘 일찍 도연제로 돌아온 그는 그날 밤 먼저 성유리와 함께 가려고 했다. 하지만 별장에 도착했을 때, 평소와 달리 집안은 어두컴컴했다. 얼마 전 성유리가 집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박한빈은 집안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정해진 시간에만 청소하러 오라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 이 집에는 성유리 혼자뿐이었다. 지금 그녀가 없으니 집 안은 더욱 어두워 보였고 차가운 정적만이 맴돌았다. 그 분위기에 박한빈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고 이 늦은 시간에 그녀는 어디로 간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박한빈은 곧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는 차가운 음성 안내만 들려왔다. 그는 한층 더 굳어진 얼굴로 바로 가사도우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성유리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오늘 저희가 왔을 때는 이미 집에 안 계셨어요. 요즘 도자기 수업을 계속 듣고 계셨는데 혹시 거기에 계신 거 아닐까요?” ‘도자기 수업?’ 박한빈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 수업 어디에서 하죠? 주소 좀 주십시오.” 가사도우미에게서 주소를 받은 박한빈은 곧바로 도자기 학원으로 향했고 그곳의 불은 켜져 있었지만 안을 둘러봐도 성유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박한빈은 잔뜩 불안해하며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곧 학원 직원이 다가오며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유리 씨 여기 있습니까?” “성유리 씨요?” 직원이 잠시 당황하더니 대답했다.“오늘 수업 예약은 하셨는데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못 오신다고 하셨어요. 혹시 남편분이신가요?” 박한빈은 직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학원을 나섰다. 그녀가 이곳에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발걸음은 한층 더 무거워졌다. 밖으로 나왔지만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을지 감
“난 이미 전에 한번 봤었어.” “저도 봤어요! 근데 볼 때마다 눈물이 나는 걸요?” 사하나는 뭐가 그리 슬픈지 휴지로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고 성유리는 그저 물만 마셔댔다.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됐죠?” 사하나는 순간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성유리에게 물었다. “제가 빨리 모셔다 드릴 까요?” “그럴 필요 없어.” 성유리는 여전히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고 사하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무슨 뜻이에요? 두 분 혹시 싸우셨어요?” 사하나는 문득 어제 자기가 해줬던 말들이 떠올랐는지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계속 물었다. “아니면... 어제 제가 말한 그 일들에 관해 박 대표님께 물어보신 거예요?” 성유리는 그저 사하나만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 대표님께서 정말...” 사하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벨이 울렸다. 그녀는 늦은 시간에 들리는 벨 소리에 의아해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아무 말 없는 성유리를 보던 사하나는 그제야 눈치챘는지 다시 말했다. “박한빈 씨 아니에요? 언니가 가서 문 열어주세요.” “나도 모르지.” 성유리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문을 열어주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사하나가 그녀를 다시 앉히며 말했다. “됐어요. 그냥 제가 갈게요. 언니는 앉아계세요.” 사하나는 뚜벅뚜벅 걸어 현관으로 향했고 영화를 보려고 켜놓은 작은 조명 때문에 현관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마침 현관에 있던 등이 인기척을 감지하고 켜졌고 박한빈을 환하게 비췄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은 박한빈이 문 앞에 나타나자 사하나는 예상했음에도 화들짝 놀랐다. 잠시 멍해 있던 사하나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박한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박 대표님,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오셔서 저를 놀라게 하는 거예요?” “성유리 여기 있어?” 박한빈은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 사하나가 다른 무슨 말을 내뱉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집안으
박한빈은 원래 무표정한 얼굴로 사하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하나의 마지막 말에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더니 반박했다. “내가 집에 안 들어온다고?” “제 말이 틀렸나요? 정말 사람을 바보로 아시나...” 사하나는 점점 더 격분했고 성유리는 빨리 다가가 그녀를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사하나는 성유리의 손을 뿌리치더니 계속 말했다. “언니는 상관하지 마세요! 오늘 꼭 제대로 한번 말해봐야겠어요.” 사하나는 고개를 휙 돌려 박한빈을 쳐다보며 물었다. “말씀해 보세요. 잘나신 박 대표님. 박 대표님이랑 그 여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업계에 소문이 쫙 났어요. 사람들 입이 얼마나 싼지 설마 모르고 계실 리는 없겠죠?” “아니면 그 소문이 사실이라 반박할 자격이 없는 건가요?” “정말 대단하세요. 유리 언니랑 화해하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이러세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언니를 말렸어야 해요. 영원히 절대로 박 대표님을 용서하지 말라고 할 걸 그랬다고요!” 사하나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박한빈은 오히려 아까보다 더 평온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은 마치 그녀에게 사하나와 똑같이 자신을 의심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소파에 앉은 채로 침묵할 뿐이었다. “이건 저희 부부 사이의 일이니 사하나 씨가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박한빈은 사하나에게 짧은 대답을 해주고는 바로 성유리의 손을 잡고 떠나려 했다. 아무렇지 않은 박한빈의 태도에 사하나는 더욱 분노가 치밀어 두 사람을 가로막아 서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리가 사하나를 조용히 바라봐줬다. ‘뭐지?’ 사하나는 그녀의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성유리는 사하나를 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박한빈은 이곳까지 직접 운전을 하고 왔기에 성유리는 순순히 그의 차에 올라타며 안전벨트까지 맸다. 이런 순한 모습에 박한빈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운전석에 앉아 운전대를 꽉 잡은 채로 입을 열었다. “사하나 씨가
박한빈은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이번엔 전화를 바로 끊어버리지 않았다. 성유리는 그 모습에 안전벨트를 풀어버리더니 말했다. “됐어요. 그냥 저 혼자 갈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차 문을 벌컥 열고 내릴 채비를 했다. 이때, 박한빈이 재빨리 성유리의 손을 꽉 잡더니 물었다. “어디 가려고?” “바쁘신 것 같아서 저 혼자 택시 타고 가려고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택시를 어떻게 혼자 타!” “길 가다 보면 널리고 널린 게 택신데 제가 왜 못 타죠?” “빨리 앉아. 나 곧...” 박한빈의 뭐라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세 번째 전화가 걸려 왔고 성유리는 그를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봐요. 많이 바빠 보이시니까 저 그냥 혼자 갈게요. 방해되지 않게.”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을 뿌리쳤지만 그는 다시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성유리의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차에서 내려서는 바로 길 맞은편으로 향했다. 박한빈은 그녀를 따라가려고 안전벨트를 풀어버리려고 했지만 마침 신호등 불빛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 해도 금성 도로엔 쌩쌩 달리는 차가 꽤 많았다. 그래서 박한빈은 아예 차를 몰고 그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빨간 불이 다시 초록 불로 바뀌는 순간, 박한빈은 재빨리 길 맞은편을 쳐다보았지만 성유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박한빈은 핸드폰을 열어 성유리에게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그녀의 폰은 여전히 꺼져있는 상태였다. 화가 난 박한빈은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세게 차버렸다. 그러더니 다시 차로 올라타 도연제로 향했다. 빠르게 운전을 한 박한빈이기에 그는 성유리보다 먼저 도연제에 도착했다. 그는 무서울 만큼 조용한 별장이 너무 싫어 모든 조명을 다 환하게 켜놓았다. 그리고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성유리가 오기를 기다리려고 마음먹었다. 그때 시간은 이미 12시가 넘은 자정이었으니 박한빈의 생일이라고 해도 되는 시간이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단 한 번도 자기 생일을 이토록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박한빈의 차에서 내려 길을 건넜다는 것만 기억했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세게 때린 것 같았다.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보기도 전에, 그 사람은 이미 그녀의 입과 코를 가려버렸고 그 직후 그녀는 모든 의식을 잃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성유리는 이상한 방에 누워 있었다.그녀의 손과 발은 묶여 있었고 방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심하게 났으며 달빛이 조금 비추는 창문을 제외하면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성유리는 누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상대방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집 안에서 자신이 묶여있는 밧줄을 끊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깜짝 놀란 성유리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눈앞의 사람을 보자 성유리의 동공은 심하게 떨렸고 그와 동시에 살짝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에요?” “많이 놀란 것 같네요?” 유효정은 성유리의 모습을 비웃으며 깔깔 웃었다. “유효정 씨, 당신의 신분으로 왜 굳이 이런 일을 하시는 거죠?” “굳이라고요? 굳이?” 유효정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대답했다. “이런 당신의 모습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아요. 너무 힘들고 마음이 불편하게 사는 저와 성유리 씨를 비교해보면 자꾸만 질투가 나서요.” 유효정은 말을 하는 동안 시선이 조금씩 내려가더니 성유리의 배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신 몇 개월 되셨죠?” 성유리는 그녀가 갑자기 이런 물음을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녀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었고 몸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웅크렸다. 이 어설픈 성유리의 행동에 유효정이 웃으며 물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러면 제 마음이 약해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유효정은 손을 뻗어 성유리의 배를 쿡쿡 찔러보았다. 그녀의 힘은 별로 세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충격에 휩싸였고 눈으로는 유효정
“제가 얼마나 배려심이 많은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유리 씨도 저 좀 배려해 주세요. 움직이려고 애쓰지 마시고요. 알아들으셨어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 칼이 실수로 당신의 배에 떨어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저도 되게 민망해질 텐데?” 유효정은 말하면서 손에 점점 더 세게 힘을 주었고 성유리는 선명하게 느껴지는 강한 고통을 견뎠다. 그녀의 칼이 그어지는 곳에서는 빨간 피가 쏟아져 내렸고 방안은 소름 끼칠 정도로 추웠다. 이 상황에 성유리는 문득 박한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성유리는 혹시 자기가 먼저 떠나버려 박한빈이 기분이 나빠졌는지, 아니면 지금 다른 곳에서 미친 듯이 자신을 찾고 있는지 몰랐다. 둘 다 아니면 최정민의 전화를 받느라 성유리의 실종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성유리는 감히 다른 경우들을 생각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씁쓸해졌기 때문에. 통증은 점점 더 뚜렷해졌지만 그녀는 몸부림치지도 못했다. 유효정의 말대로 아직 뱃속에 아이가 있으니 말이다. 그녀의 심기를 다시 건드려 한 번 더 화를 낸다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할 것인지 성유리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성유리 얼굴의 살이 점점 벗겨지자 유효정은 피를 본 상어처럼 눈이 번쩍이고 눈빛에는 광기가 서렸다. 그러더니 유효정의 손에 힘이 더 더해졌다. 성유리가 자신의 목에 곧 칼날이 꽂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의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유효정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칼을 쥐고 있던 손마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그쪽에 있던 사람들이 벌써 달려들어 그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 순간, 유효정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땅에 툭 떨어졌다. 원래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성유리는 천천히 눈을 떴고 도대체 언제 이렇게 많은 경찰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비추는 환한 불빛에 성
다친 성유리를 실은 구급차는 얼마 안 지나 바로 병원에 도착했다.성유리의 얼굴에 흐르던 피는 이미 멈췄지만 의사는 봉합을 계속 진행해야 했다. 마취주사 때문에 얼굴에 감각이 없는 상태였음에도 성유리는 의사가 자신의 피부를 바늘과 실로 꿰매는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작은 봉합 수술이라 성유리의 치료는 응급실 안에서 진행되었고 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 응급실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지금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성유리조차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의사가 봉합을 끝마칠 때까지도 박한빈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에 반면 연정우는 줄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유리가 응급실 밖으로 나오자 연정우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괜찮아? 많이 아프진 않아?” 성유리는 묻는 연정우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네. 집에 데려다줄게.” 연정우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가던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을 본 연정우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정우는 내색하지 않았고 이내 미소를 띠며 물었다. “왜 그래?” “유효정 씨 일은 처리 안 해도 돼?” 침묵하던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 “지금쯤 경찰 손에 잡혀 아무것도 못 할 텐데 너는...” “괜찮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연정우는 화를 억누르는 듯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원래대로라면 성유리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그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효정 씨 아버지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연정우는 빠르게 표정을 바꾸며 다시 말을 이어갔고 성유리는 조용히 그가 하는 말을 들어주었다. “이번에 유효정이 건드린 사람이 너니까 박한빈 씨가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근데 박한빈 씨는 오늘 밤 왜 안 왔을까?” 그의 말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이 왜 안 왔는지는 모르겠어. 근데 이제 보니 유효정 씨가 대체 왜 그렇
그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그리곤 반사적으로 하늘이를 자신의 뒤로 숨겼는데 그녀의 행동에 여자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잖아요? 전... 유리 씨가 절 잊은 줄 알았는데.”‘잊는다고?’성유리는 그날 끔찍했던 그 기억을 쉽게 잊을 수 없었고 심지어는 칼을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대던 유효정의 얼굴도, 느낌마저 생생했다.그때 성유리의 얼굴엔 꽤 큰 흉터까지 남았었지만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점점 옅어지더니 이젠 잘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유효정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보이자 성유리는 그 당시 느껴지던 고통과 두려움이 다시 떠올라 힘들었다.성유리는 하늘이의 손을 저도 모르게 꽉 쥐었고 유효정은 아무렇지 않아 하며 계속 말을 걸었다.“따님이 너무 귀엽더라고요.”유효정은 말하며 은근슬쩍 성유리 뒤에 숨어있는 하늘이를 쳐다봤고 자신의 딸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성유리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성유리는 항상 어정쩡하게 굽혀져 있던 어깨까지 쫙 편 채 유효정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마치 새끼를 지키려는 암탉처럼 말이다.그 모습을 본 유효정은 깔깔거리며 크게 웃더니 조롱하듯 물었다.“아니, 지금 그게 무슨 표정이세요? 설마 제가 성유리 씨 딸까지 건드릴까 봐 그러세요? 걱정하지 마요. 여긴 탁 트인 밖이고 보는 눈도 많으니까 그런 짓은 안 할 거예요. 그리고... 전 두 번 다신 지옥 같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대체 뭐 하시려는 거죠?”성유리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유효정은 원래 하늘이를 주려고 꺼내 들었던 사탕 껍질을 까 자기 입에 넣더니 대답했다.“뭐 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3년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해서 그래요.”“보니까... 잘 살고 계시는 것 같은데.”“정우 씨랑 다시 만나신다고요? 진짜 뒤끝 없는 분이셨네요. 그 사람 때문에 성유리 씨가 죽을 뻔했는데 말이죠.”성유리는 대답이 없었고 유효정은 천천히 시선을 하늘이에게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진
연정우는 성유리와 한 달 내로 장성 그룹 일을 다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었다.게다가 그는 미리 전부터 바다 위에 있는 놀이공원을 가고 싶다는 하늘이의 말에 표까지 다 예매해 둔 상태였다.하늘이는 너무도 기대가 되어 성유리에게 자신의 수영복을 사러 백화점에 가겠다고 부탁하기도 했다.하지만 약속일 이틀 전, 연정우는 갑자기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미안해. 그 약속 못 지킬 것 같은데.”“해외에 있는 투자자 쪽에서 나를 한 번 만나보겠다고 했어. 만약 얘기가 잘 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올지도 몰라. 그래서...”연정우의 목소리는 두 사람에 대한 미안한 감정과 죄책감이 그득히 담겨있었다.“괜찮아. 너 바쁘면 먼저 가서 일해야지. 나 혼자 하늘이랑 가도 돼.”성유리는 괜찮다는 듯 미소 띤 얼굴로 연정우에게 대답해 줬다.“그럼 내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까? 너랑 하늘이 데리고 같이 가라고? 너 혼자 애 데리고 가면 얼마나 힘들어.”“괜찮다니까. 언제는 뭐 안 이랬어?”성유리는 걱정하는 연정우를 안심시키듯 말을 이어갔다.“그래서 회사엔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거네?”기분이 좋은 듯 들뜬 말투로 묻는 성유리의 목소리를 들은 연정우는 그녀가 신경 쓰는 게 결코 돈이나 이익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성유리는 지금 진신으로 연정우의 일에 기뻐하고 그를 대신해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필경 연정우가 어떤 삶을 좋아한다고 한들 그가 장성 그룹을 위해 들였던 시간과 노력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일이 어떻게 된다고 한 대도 장성 그룹의 막은 결코 이렇게 내려가면 안 되지 않은가?연정우는 성유리의 감정에 동기화된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아마도 그렇겠지? 근데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그래도 괜찮지. 적어도 희망은 남아있는 거니까.”성유리가 물었다.“그래서 어디로 출장 갈 예정인데?”“강원국. 비행기 티켓도 다 끊어뒀어.”“응. 조심히 다녀와.”“그래. 올 때 너랑 하늘이 선물도 가져올까?”“성유리는 그 말에 웃으며 대답
하지만 지금, 연정우는 주동적으로 유효정의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유효정은 은근히 이 상황을 즐겼고 연정우는 어느새 그녀를 회사 안까지 데리고 들어섰다.사람이 그다지 없는 곳에 다다르자 연정우는 바로 유효정의 손을 놓더니 어두운 안색으로 물었다.“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유효정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연정우의 온기에 마음이 공허해졌는지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제가 왜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죠? 저 만기출소 했어요.”그녀의 대답에 연정우는 입술을 오므리며 다시 물었다.“제 말이 지금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그럼 무슨 뜻인데요?”유효정은 연정우의 의도를 도통 모르겠다는 듯 계속 말했다.“설마... 저는 연정우 씨를 찾아오면 안 되는 사람인 거예요?”“그렇지만 잘 아시잖아요. 저희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셨고 옛 친구들도 저를 피해요. 아무도 저를 만나주지 않는다고요. 이 도시에서 전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어버렸죠.”“이런 상황에 연정우 씨를 찾아오지 않으면 제가 또 누구를 찾을 수 있겠어요?”유효정은 말하며 연정우에게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갔다.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그러나 연정우는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흠칫 놀라더니 표정 또한 삽시간에 변했고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그는 마치 유효정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싫은 사람처럼 그녀를 피했고 심지어는 같이 서 있으려 하지도 않았다.연정우의 행동에 유효정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고 그 순간, 연정우가 말을 꺼냈다.“왜 감옥에 갇히셨는지 잊으셨습니까?”“저야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유효정은 연정우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대답했다.“정우 씨가 절 신고했잖아요. 아니에요?”“그리고 나중에야 저도 생각 정리를 마쳤죠. 분명 제가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로 제 앞에서 성유리 씨한테 얼마나 많은 감정이 남아있는지 드러냈잖아요.”“만약 정우 씨가 정말 진심으로 성유리 씨를 사랑했다면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박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유효정은 지금 자신이 그와 잡담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래서 유효정은 에둘러 말하지 않기로 하고 바로 말하기 시작했다.“박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저희 집 재산이나 회사 다 뺏기고 제 부모님마저 세상을 뜨셨다는 사실을요.”“그래서 전 출소한대도 별 소용이 없었어요. 이 도시에 믿을 수 있는 사람 한 명 없기 때문이죠. 심지어 생계를 유지할 방법도 없고요.”“근데 요즘 박 대표님께서 골치가 아파하는 일이 하나 생겼다고 들었어요. 만약 제가 대표님 대신에 그 일을 해결해 주면 박 대표님께서 저한테 돈을 주실 수 있나 해서요.”박한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유효정을 쳐다보며 웃더니 물었다.“네?”“대표님께서 왜 연정우 씨를 벼랑 끝까지 내모는지 저도 잘 알아요. 성유리 때문이 아닌가요? 근데 아마 대표님은 모르실 거예요. 연정우 그 인간은... 자기 지위나 권력에는 별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러니 박 대표님이 하신 공격은 번지수를 잘못 짚으신 거죠.”“그리고 사실... 연정우 씨와 성유리 씨 사이를 갈라놓으려면 이렇게 번거롭게 하실 필요도 없어요.”박한빈은 말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저한테 기회를 주신다면 꼭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다고 보장할게요. 그때가 되면 성유리 씨도 자연스레 대표님 곁으로 돌아올 거고요. 어때요?”유효정의 말은 아주 단순했다. 그녀는 지금 박한빈에게 모 아니면 도의 선택지를 던져주는 것이었다.박한빈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유효정에게 물었다.“무슨 뜻입니까? 뭘 어떻게 하실 셈이죠?”“제가 뭘 하든 그건 박 대표님이 신경 쓸 일이 아니죠. 대표님께서는 그냥 제가 방금 제시한 조건에 대해... 답해주시면 돼요.”“많은 돈은 안 바라요. 100억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지금 대표님 몸값만 얼마나 되는지 잘 알아요. 이정도 돈은 박 대표님에게 있어 껌값 아닌가요? 껌값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되찾으면 좋은 거잖아요.”박한
“그리고 나도 믿어. 정말 하루아침에 회사가 부도가 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때가 와도 난 잘 살 수 있을 거야. 잘 살지 못한다고 해도 절대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거고. 특히 유리 너를 원망할 일은 죽어도 없을 거야.”연정우의 대답에 긴장감에 바짝 굳어있던 성유리는 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래서 오늘 종일 이것 때문에 걱정했어?”“응...”성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도 어머니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그래도 사모님은 널 위해서 이러는 거니까.”“응. 안 그럴게.”연정우는 빠르게 대답했지만 성유리는 그의 대답이 성의 없어 보여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러자 연정우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사람처럼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아까 화난 건 네가... 나를 버리고 떠날까 봐 그런 거야. 그렇지만 이제 보니 오해였던 것 같네. 그러니까 너도 걱정하지 마. 어머니랑 안 싸울 테니까.”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는 그나마 안심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너 지금 어딘데?”“회사. 근데 곧 집에 가려고.”“알겠어. 집에 가서 푹 쉬어.”“너도. 일찍 자.”연정우의 다정다감한 말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고 성유리는 간단한 대답만 마치고는 통화를 끝냈다.한편, 연정우도 회사를 떠나려고 주차장에 내려갔지만 평소와 달리 싸한 기분에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에 심호흡 한 번 하고는 바로 뒤돌아보았지만 텅 빈 주차장엔 아무도 없었다.연정우는 제 자리에서 한참 사방을 둘러보다 확실히 자기 빼고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요즘 너무 피곤해 환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여겼다.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차 문을 닫고는 바로 시동을 걸어 지하 주차장을 벗어났다. 하지만 연정우가 떠나자마자 기둥 뒤에 숨어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짧은 머리였고 모자까지 꾹 눌러쓴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절반쯤 드러난 얼굴에는 너무
연정우가 성유리와 약속한 시간은 11시였다. 하지만 12시가 다 되어서도 연락 없는 연정우를 성유리는 뜬눈으로 기다렸다.“하늘이 잠들었어?”12시가 넘은 자정이 되어서야 연정우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 왔다.“응. 지금 자.”성유리는 핸드폰을 들고 거실 발코니로 향하며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미안해. 원래는 10시쯤에 전화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또 일이 생겨서 지금까지 바빴어.”“괜찮아. 나도 아직 안 자고 있었어.”연신 사과를 하는 연정우에게 성유리는 거듭 괜찮다고 강조했고 둘 사이엔 빠르게 적막이 찾아왔다.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금세 감지한 연정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무슨 일 있어?”“아니.”성유리는 재빨리 대답하고는 연정우에게 물었다.“너... 요즘도 그렇게 바빠?”“응. 그렇지 뭐. 그냥 투자자들이 제일 중요한 문제야. 너도 알잖아. 아직 회사는 제대로 파산 신청도 안 했는데 그 사람들이 다 같이 발을 빼버리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래서 나...”연정우는 말하다 문득 목이 막히는지 뚝 멈추더니 이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봐. 내가 이런 말을 너한테 뭣하러 하겠어. 사실 별거 아니야. 그저 그런 평범한 과정일 뿐이지.”“요즘 너 너무 고생하는 거 아니야?”조용히 연정우의 말을 듣고만 있던 성유리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그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성유리는 연정우에게 묻고 싶은 것이 더 많았지만 이번엔 그가 먼저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인데?”이번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잠시 후, 성유리가 대답했다.“아무 일도 없어. 그냥... 갑자기 너한테 너무 미안해서 그래.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힘든 것 같아서.”연정우는 대답이 없었다.“만약 나만 아니었다면 너도 아마...”성유리는 두 손을 움켜쥐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고 그때, 연정우가 뭔가 눈치 차린 듯 물었다.“우리 엄마가 너한테 찾아갔었어?”연정우는 성유리의 말을 채 들어보지도 않고 정확히 그녀에게 발생한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우는 너와 함께하기를 선택했어. 그러니 성유리, 너희 관계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내 아들이 끊임없이 참고 양보했기 때문 아니야? 그런데 너는 정우를 위해 뭘 했지?”금미라는 마지막 말을 툭 던지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그녀의 마지막 말은 전에 말보다 악독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무거운 돌덩이가 성유리의 가슴을 세게 내려친 것처럼 가슴 속에서 강렬하게 울려 퍼졌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늘이가 방에서 나오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걱정과 의문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엄마?”하늘이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바라보았다.“아까 그 사람이 아저씨의 엄마야?”하늘이가 물었다.“근데 왜 그렇게 무섭게 구는 거야?”성유리는 하늘이에게 굳은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건 무서운 게 아니라 그게 바로... 엄마로서의 본능이야. 마치 엄마가 하늘이를 위해서라면 나쁜 사람을 다 쫓아낼 수 있는 것처럼, 그분도 자기 아이를 보호하려고 했던 거야.”“하지만 엄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잖아.”하늘이는 여전히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내가 나쁜 사람이지 않을까?’성유리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최근 며칠 동안 성유리는 스스로를 또 다른 의문 속에 가둬두고 있었다.연정우가 그 삶에 지쳤다고 말했을 때, 그리고 자신을 선택했다는 기쁨에 그녀는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하지만 금미라가 말한 것처럼 연정우가 성유리를 위해 이 모든 것을 감내했는데 정작 그녀는 연정우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심지어 성유리가 연정우에게 준 감정적인 보답조차도 너무나 미미했다.“모든 일에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어.”성유리는 결국 하늘이에게 이런 대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나중에 네가 크다 보면 자연스레 다 알게 될 거야.”그러나 성유리의 이런 대답은 하늘이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아이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왜 뭐든 다 커야지만 알 수 있는 거야? 도
금미라의 말이 다 끝나자 성유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긴 침묵에 잠겼다.“그러니까 너도 결국 네가 정우를 망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지?”금미라는 그런 성유리를 쳐다보며 그녀를 비웃는 듯한 웃음을 더 크게 지었다.“그럼 사모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시는데요?”그때, 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그걸 몰라서 묻는 거니? 당연히 정우 옆에서 떠나야지!”성유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침착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사모님, 연정우는 이제 성인이에요. 자신이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죠. 더군다나... 저희는 이미 약속을 했어요. 정우가 떠나지 않기로 했는데 제가 이런 상황에서 그런 정우를 버릴 수는 없잖아요.”“버린다고?”금미라는 더더욱 성유리를 조롱하듯이 웃음을 빵 터뜨렸다.“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는 상황이 어떤지 잘 알잖아. 정우 회사가 왜 갑자기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말이야. 그게 다 누구 때문인 것 같아?”“바로 성유리 너 때문이잖아! 너를 만난 뒤로 정우에게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이 있었어? 매번 너 때문에 하던 일마저 다 잘못되고 있잖아! 심지어 그전에도! 정우의 외할아버지가 왜 돈세탁에 연루됐다고 고발당했을까? 그 일이 박한빈이랑 관련돼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거야?”“그 일만 없었어도 정우는 그 누구와도 약혼하지 않았을 거야. 우리 가문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이제 겨우 정우의 삶이 정상으로 돌아오려는 찰나에 네가 다시 나타나 버린 거야. 도대체 정우한테 힘든 시간을 얼마나 더 버텨 달라고 하려는 거지? 유리 넌 결국 정우가 죽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거니?”금미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앙되었고 눈에는 눈물마저 고여 있었다.“그런데도 네가 무슨 자격으로 정우를 버리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건데? 너만 아니었다면 정우가 이런 일을 겪을 일이 있겠어? 정우는 원래 행복하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이야. 그런데 다 유리 너 때문에 틀려버렸다고!”금미라는 성유리 앞에서 차마 울음을 터뜨
“지금 이게 무슨 의미야?”금미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성유리에게 물었다.“정우가 며칠 전까지 여기 있었던 건 맞지만 어젯밤에 이미 떠났어요.”“그래?”금미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잘됐네.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 왔어.”성유리는 금미라의 말에 순순히 몸을 옆으로 비켜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서게 했다.금미라는 고급스러운 맞춤 드레스와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그녀의 표정에는 이 집에 대한 명백한 불쾌감이 드러나 있었다.“무슨 음료 드릴까요?”성유리가 물었지만 금미라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천천히 시선을 하늘이에게로 돌렸다.하늘이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아이의 직감은 누구보다 정확했다. 누가 선한 사람인지, 누가 날카로운 사람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금미라가 자신을 쳐다보는 동안 하늘이는 성유리 뒤로 숨으며 그녀를 몰래 쳐다봤다. 아이의 눈빛에는 평소에 잘 없던 두려움이 그득하게 서려 있었다.금미라는 그런 하늘이를 보며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고 성유리는 하늘이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이며 달래기 시작했다.“하늘아, 엄마 말 잘 듣고 방에 가서 잠깐만 기다려줄래?”하늘이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엄마는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하늘이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성유리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금미라를 힐끔 쳐다본 후 빠르게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아이가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한 성유리는 이내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따라 금미라 앞에 놓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집이 좀 어수선하네요. 미처 정리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방문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성유리의 말에 금미라는 갑자기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너 지금 나한테 이런 걸 묻는 거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도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닌가?”“정우를 찾으러 오신 거 아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