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은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이번엔 전화를 바로 끊어버리지 않았다. 성유리는 그 모습에 안전벨트를 풀어버리더니 말했다. “됐어요. 그냥 저 혼자 갈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차 문을 벌컥 열고 내릴 채비를 했다. 이때, 박한빈이 재빨리 성유리의 손을 꽉 잡더니 물었다. “어디 가려고?” “바쁘신 것 같아서 저 혼자 택시 타고 가려고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택시를 어떻게 혼자 타!” “길 가다 보면 널리고 널린 게 택신데 제가 왜 못 타죠?” “빨리 앉아. 나 곧...” 박한빈의 뭐라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세 번째 전화가 걸려 왔고 성유리는 그를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봐요. 많이 바빠 보이시니까 저 그냥 혼자 갈게요. 방해되지 않게.”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을 뿌리쳤지만 그는 다시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성유리의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차에서 내려서는 바로 길 맞은편으로 향했다. 박한빈은 그녀를 따라가려고 안전벨트를 풀어버리려고 했지만 마침 신호등 불빛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 해도 금성 도로엔 쌩쌩 달리는 차가 꽤 많았다. 그래서 박한빈은 아예 차를 몰고 그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빨간 불이 다시 초록 불로 바뀌는 순간, 박한빈은 재빨리 길 맞은편을 쳐다보았지만 성유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박한빈은 핸드폰을 열어 성유리에게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그녀의 폰은 여전히 꺼져있는 상태였다. 화가 난 박한빈은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세게 차버렸다. 그러더니 다시 차로 올라타 도연제로 향했다. 빠르게 운전을 한 박한빈이기에 그는 성유리보다 먼저 도연제에 도착했다. 그는 무서울 만큼 조용한 별장이 너무 싫어 모든 조명을 다 환하게 켜놓았다. 그리고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성유리가 오기를 기다리려고 마음먹었다. 그때 시간은 이미 12시가 넘은 자정이었으니 박한빈의 생일이라고 해도 되는 시간이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단 한 번도 자기 생일을 이토록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박한빈의 차에서 내려 길을 건넜다는 것만 기억했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세게 때린 것 같았다.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보기도 전에, 그 사람은 이미 그녀의 입과 코를 가려버렸고 그 직후 그녀는 모든 의식을 잃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성유리는 이상한 방에 누워 있었다.그녀의 손과 발은 묶여 있었고 방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심하게 났으며 달빛이 조금 비추는 창문을 제외하면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성유리는 누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상대방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집 안에서 자신이 묶여있는 밧줄을 끊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깜짝 놀란 성유리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눈앞의 사람을 보자 성유리의 동공은 심하게 떨렸고 그와 동시에 살짝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에요?” “많이 놀란 것 같네요?” 유효정은 성유리의 모습을 비웃으며 깔깔 웃었다. “유효정 씨, 당신의 신분으로 왜 굳이 이런 일을 하시는 거죠?” “굳이라고요? 굳이?” 유효정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대답했다. “이런 당신의 모습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아요. 너무 힘들고 마음이 불편하게 사는 저와 성유리 씨를 비교해보면 자꾸만 질투가 나서요.” 유효정은 말을 하는 동안 시선이 조금씩 내려가더니 성유리의 배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신 몇 개월 되셨죠?” 성유리는 그녀가 갑자기 이런 물음을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녀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었고 몸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웅크렸다. 이 어설픈 성유리의 행동에 유효정이 웃으며 물었다. “이제 와서 이러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러면 제 마음이 약해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유효정은 손을 뻗어 성유리의 배를 쿡쿡 찔러보았다. 그녀의 힘은 별로 세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충격에 휩싸였고 눈으로는 유효정
“제가 얼마나 배려심이 많은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유리 씨도 저 좀 배려해 주세요. 움직이려고 애쓰지 마시고요. 알아들으셨어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 칼이 실수로 당신의 배에 떨어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저도 되게 민망해질 텐데?” 유효정은 말하면서 손에 점점 더 세게 힘을 주었고 성유리는 선명하게 느껴지는 강한 고통을 견뎠다. 그녀의 칼이 그어지는 곳에서는 빨간 피가 쏟아져 내렸고 방안은 소름 끼칠 정도로 추웠다. 이 상황에 성유리는 문득 박한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성유리는 혹시 자기가 먼저 떠나버려 박한빈이 기분이 나빠졌는지, 아니면 지금 다른 곳에서 미친 듯이 자신을 찾고 있는지 몰랐다. 둘 다 아니면 최정민의 전화를 받느라 성유리의 실종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성유리는 감히 다른 경우들을 생각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씁쓸해졌기 때문에. 통증은 점점 더 뚜렷해졌지만 그녀는 몸부림치지도 못했다. 유효정의 말대로 아직 뱃속에 아이가 있으니 말이다. 그녀의 심기를 다시 건드려 한 번 더 화를 낸다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할 것인지 성유리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성유리 얼굴의 살이 점점 벗겨지자 유효정은 피를 본 상어처럼 눈이 번쩍이고 눈빛에는 광기가 서렸다. 그러더니 유효정의 손에 힘이 더 더해졌다. 성유리가 자신의 목에 곧 칼날이 꽂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의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유효정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칼을 쥐고 있던 손마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그쪽에 있던 사람들이 벌써 달려들어 그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 순간, 유효정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땅에 툭 떨어졌다. 원래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성유리는 천천히 눈을 떴고 도대체 언제 이렇게 많은 경찰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비추는 환한 불빛에 성
다친 성유리를 실은 구급차는 얼마 안 지나 바로 병원에 도착했다.성유리의 얼굴에 흐르던 피는 이미 멈췄지만 의사는 봉합을 계속 진행해야 했다. 마취주사 때문에 얼굴에 감각이 없는 상태였음에도 성유리는 의사가 자신의 피부를 바늘과 실로 꿰매는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작은 봉합 수술이라 성유리의 치료는 응급실 안에서 진행되었고 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 응급실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지금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성유리조차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의사가 봉합을 끝마칠 때까지도 박한빈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에 반면 연정우는 줄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유리가 응급실 밖으로 나오자 연정우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괜찮아? 많이 아프진 않아?” 성유리는 묻는 연정우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네. 집에 데려다줄게.” 연정우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가던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을 본 연정우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정우는 내색하지 않았고 이내 미소를 띠며 물었다. “왜 그래?” “유효정 씨 일은 처리 안 해도 돼?” 침묵하던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 “지금쯤 경찰 손에 잡혀 아무것도 못 할 텐데 너는...” “괜찮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연정우는 화를 억누르는 듯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원래대로라면 성유리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그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효정 씨 아버지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연정우는 빠르게 표정을 바꾸며 다시 말을 이어갔고 성유리는 조용히 그가 하는 말을 들어주었다. “이번에 유효정이 건드린 사람이 너니까 박한빈 씨가 가만히 있진 않을 거야. 근데 박한빈 씨는 오늘 밤 왜 안 왔을까?” 그의 말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이 왜 안 왔는지는 모르겠어. 근데 이제 보니 유효정 씨가 대체 왜 그렇
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에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채 정리할 틈도 없이 성유리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죽었다는 그 사람이 혹시 최정민 씨야?” ... 연정우가 말한 죽은 자는 정말로 최정민이었다. 그녀는 아파트 단지 21층 발코니에서 추락해 현장에서 즉사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녀가 죽었을 당시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바로최정민의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 집 안에는 그녀외에 오직 박한빈만 있었다. 늦은 시각, 다 큰 성인인 남녀 단둘만 남겨진 상황.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미 사람들의 온갖 추측과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박한빈의 신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각종 소문이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최정민과 박한빈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는 최근 그들 사이에서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그녀가 옷차림이 흐트러진 채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두 사람이 지나치게 방탕한 놀이를 하다 사고로 발코니에서 떨어져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살을 결심한 여자가 그런 상태로 죽을 리 없으니까 말이다. 원래 재벌가의 이야기는 연예계의 가십보다 더 자극적이다. 그렇기에 대중의 관심은 더욱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들이 성유리에게 연락을 시도해 이번 사건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얼마 전 박한빈이 성유리의 결혼식에서 그녀 대신 칼을 맞아준 일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때 그의 행동에 충격받는 한편 또 많은 감동을 받았다. 모두가 박한빈이 성유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벌어진 일은 이 모든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성유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박한빈과 최정민의 관계에 대해 그녀가 남들보다 더 아는 것도 없었으니 최정민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성유리는 그때 자신이 김서영에게 무슨 대답을 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통화를 끝낸 후, 그녀는 방에 혼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요즘 성유리는 기자들이 자신을 행여나 쫓아오며 귀찮게 할까 봐 무서워서 지난 며칠 동안 외출을 하지 않았다. 청소하러 온 도우미도 분명 뉴스를 봤을 테니 요즘 성유리를 볼 때마다 그녀는 아주 조심스러웠다. 가사도우미는 조심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성유리를 어딘가 동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성유리는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만나기보다는 방에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됐다. 성유리가 다른 일에 자신의 주의를 돌리려고 태블릿을 열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러자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윽고 도우미가 올라와 성유리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사모님, 박 대표님 남동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만나시겠습니까?” 성유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표정만으로 도우미는 감히 어떤 것도 추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네. 만날게요.”결국 만나겠다는 결정을 내린 성유리는 바로 몸을 일으키며 방 밖으로 나갔고 도우미는 곧 박세빈을 집안으로 들였다. 전과 달리 박세빈은 최근 아주 잘 지내는 것 같아보였고 여전히 단정하고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는 더욱 꼼꼼하게 빗어 넘겼다. 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박세빈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형수님.” 그의 말에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바로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형수님, 최근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습니다. 제 형이 너무 걱정되어서 그런가요?” “할 말이 있으면 그냥 바로 말하세요.” 성유리는 그와 쓸데없는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형수님은 역시 제 의도를 알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박세빈이 옅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성유리는 어딘가 기뻐 보이는 그를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이건 다 박세빈 씨가 계획한 거죠?” “최정민 씨의 목숨을 앗아가
“최정민 씨가 전에 그러더군요. 형이 가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볼 때가 있다고. 마치 그녀에게서 다른 누군가의 그림자를 보는 것처럼요. 제 추측이 맞다면 그 사람은 아마... 형수님이겠죠?” 박세빈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의 형수님이겠죠. 지금의 형수님은 너무 이성적이고 차분하니까요. 이번 일만 봐도 그렇습니다. 다른 여자라면 남편이 이런 사건에 연루됐다는 걸 듣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을 겁니다. 아니면 최소한 남편을 위해 무언가를 도모하든지 아니면 화를 내든지 했겠죠. 그런데 형수님은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박세빈의 말투는 가볍다 못해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점은 형이 저보다 더 잘 알 테고 그걸 더 직접적으로 느낄 테니 다른 여자에게서 그런 감정을 찾으려는 것도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가 마치 같은 남자 입장에서 박한빈이 이해가 된다는 듯한 태도로 이야기하자 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갑작스러운 웃음에 박세빈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해버렸다. “그래서요? 오늘 여기 온 이유가 이 얘기를 하려고 온 거예요?” “물론 그것뿐만은 아닙니다.” 박세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형수님께 한마디 해주려고 왔습니다. 형수님, 진지하게 하는 얘긴데 형이랑 이혼하세요.” 그의 말투는 사뭇 진지했다. “그런 남자와 더는 무슨 미련을 두고 계시는 겁니까? 이번 기회를 틈타 이혼하시고 자유로워지세요.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성유리는 미소를 억지로 띠며 조용히 박세빈의 말에 반박했다. “우리가 이혼하든 말든 박세빈 씨하고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당연히 있죠.” 박세빈은 웃으며 대답했다. “곧 박씨 그룹 소유의 그룹은 제가 이어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죠.” 그는 조금 더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이런 말을 덧붙였다. “형이 형수님 태도에 얼마나 실망하고 상처받았는지 알잖아요. 그래서 다른 여자에게서 위안을 구했겠
여론이 가장 뜨거웠던 며칠 동안, 박한빈은 경찰서에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며 상황이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지만 박한빈의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언론 기사들이 쏟아지며 발칵 뒤집혔다. 그날 아침, 경찰서 정문 앞은 이미 기자들로 가득했다. 마이크와 카메라가 준비된 채, 모두가 박한빈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최신 뉴스를 잡으려는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서훈은 이런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니 박한빈에게 다른 시간이나 경로로 나가는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서훈은 박한빈이 무언가 계획이 있음을 깨닫고 더는 자신의 의견을 내지 않았고 대신 경찰의 절차에 따라 모든 과정을 마쳤다. 문밖의 기자들은 숨을 죽인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박한빈이 모습을 드러내자 기자들은 마치 상어가 신선한 피를 발견한 듯 일제히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박한빈을 둘러싸자 경찰서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박 대표님, 이번 사건에 대해 해명하실 부분이 있습니까?” “고인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다는 소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재 고인의 부모님이 지화 본사 앞에서 울부짖으며 박 대표님의 처벌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지화의 향후 경영은 누가 맡게 될 것 같습니까?”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쏟아지는 마이크들은 마치 박한빈의 머리를 조준하고 있는 총구처럼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그런 선 넘는 질문들에도 놀라운 침착함을 보였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기자들이나 사람들을 한 바퀴 쓱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입니다. 저는 경찰이 공정한 판단을 내려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이어 이런 말을 덧붙였다.“또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고인과 어떠한 부적절한 관계도 없었으며 제 아내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도 없습니다.” 기자들은 그가 이 사건과 지화의 미래에 대해 답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
성유리는 박한빈이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래서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저 화장실 가고 싶습니다.”박한빈이 웃으며 말했다.“네?”성유리는 조금 당황했지만 빠르게 몸을 비켜주었다. 하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고 성유리는 그런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그때, 박한빈이 웃으며 물었다,“지금 손이 다쳤잖습니까. 밥 먹는 것도 힘든데 제가 혼자 화장실 갈 수 있을 것 같아요?”그 말에 성유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무슨 뜻이에요?”박한빈은 손을 내밀어 묻는 성유리의 손을 잡았다.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살짝 거칠었다."도와줘요."성유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안... 안 돼요.”말을 하면서 성유리는 잡힌 손을 빼려고 노력했다.하지만 한 손에 밖에 힘을 주고 있었지만 여전히 박한빈의 힘은 그대로였다.그는 손을 놓지 않았고 오히려 손가락이 성유리의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손바닥이 완전히 닿게 만들었다.그 뜨겁고 건조한 체온에 성유리의 얼굴은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마치 이 순간, 성유리가 잡고 있는 것이 박한빈의 손이 아닌 것처럼.“박한빈 씨, 이거 놔요!”성유리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고 눈물이 날 듯한 표정이 되었다.박한빈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방금 저를 돌본다고 했잖습니까. 이제 저를 도와주지 않으실 겁니까?”“제...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는데요? 언제 제가 한빈 씨를 돌본다고 했죠?”“죽도 가져다주시고 직접 먹여도 주셨는데 이게 돌보는 거 아닙니까?”“전...”성유리는 더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몸을 갑자기 확 끌어당겼다.그대로 몇 걸음 앞으로 넘어진 성유리는 박한빈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게 되었다.다행히도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에 있는 붕대를 보고 바로 자신의 손을 침대 난간에 짚어 버티며 겨우 떨어지지 않았다.그 순간, 두 사람의 거리는 더 이상 멀지 않았고 많이 좁혀졌다
성유리가 들고 온 것은 아침 일찍 정성껏 끓인 죽이었다.새벽부터 장에 나가 사 온 닭고기와 표고버섯을 넣고 쌀과 함께 뚝배기에서 30분 넘게 고아 낸 것이었다.뚜껑을 여는 순간, 은은한 향이 병실 가득 퍼졌다.그 순간, 박한빈은 문득 그날 밤 성유리가 건넸던 그 한 그릇의 면을 떠올렸다.그는 평생 맛있는 음식을 못 먹어본 적과 부족했던 적이 없었다.음식은 그저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 별다른 특별한 의미를 두지도 않았다.하지만 그날 밤, 단출한 면 한 그릇 앞에서 박한빈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왜냐하면 드디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성유리를 찾았으니까.한때 박한빈은 성유리가 영영 사라졌다고 믿었다.더 이상 세상 어디에도 그녀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확신했던 순간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성유리가 자신의 삶에서 어떤 존재였는지.사람들이 흔히 말하지 않던가.[한 번 빛을 본 사람은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갈 수 없다.]박한빈은 원래 그런 어둠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심지어 그의 어머니조차도 박한빈에게 따뜻한 한 끼를 만들어 준 적 없었다.어릴 때부터 박한빈은 그런 인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성유리가 나타났었다.그녀는 마치 박한빈의 삶 속에서 잃어버린 마지막 퍼즐 조각 같았다.성유리가 박한빈을 찾아왔었고 늘 그의 곁에 있었다.그녀야말로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온전한 존재로 만든 것이다.그런데, 그 완전함을 또다시 잃으라고?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박한빈은 천천히 손을 뻗어 성유리가 내민 따뜻한 죽 그릇을 바라보았다.그러자 또다시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저 멍하니 죽만 바라봤다.그러다 성유리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렸다.“이거... 안 좋아하세요?”성유리의 손이 살짝 움츠러들었다.그러자 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누가 그랬습니까?”되묻는 박한빈의 목소리는 어딘가 살짝 쉰 듯했다.‘내 착각일까?’성유리는 박한빈을
성유리는 박한빈을 바라볼 때마다 자신이 그의 눈 속에 비치는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박한빈이 가로등 아래 서서 미소 지을 때마다, 그 모든 순간마다 그를 향한 감정은 더 이상 불확실하지 않았다.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눈을 감아도 박한빈의 얼굴이 생각났고 어둠 속에서도 쉽게 그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아주 예전처럼 수없이 반복해 본 일처럼.비록 기억 속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박한빈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은 격하게 뛰었다.이 감정은 낯설었지만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그 감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성유리는 이미 박한빈을 좋아하고 있었다.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그를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그날 밤, 박한빈은 결국 병원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외부에 철저히 비밀로 유지되고 있었지만 이미 이 지역에서는 박한빈의 존재가 알려진 상태였다.윤도준의 보고를 받은 서장은 곧바로 사람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찾아왔다.“차라리 시내 병원으로 옮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현 서장은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했다.“이곳 환경은 좀...”“괜찮습니다.”박한빈은 오히려 아주 담담했다.“여기서도 충분합니다.”“그러면 제가 몇 사람을 배치해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아닙니다.”현 서장의 말을 박한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아직 한 손은 멀쩡하니 그런 자원 낭비는 필요 없습니다.”“하지만...”박한빈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기에 먼저 몸을 일으켰다.“이번 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행방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신경 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그야 당연한 일입니다!”현 서장은 즉시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병원 쪽도 이미 단속을 해놨으니 정보가 새어 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박한빈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몇 마디 더 나눈 뒤, 사람들을 보냈다.그러자 병실이 다시 조용해졌고 그는 천천히 시계를 보
이번에는 성유리도 미처 말리지 못했다.할머니의 괭이가 내려오는 순간, 박한빈은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다.그러자 방금 병원에서 새로 감싼 상처가 다시 터져버렸다.순간,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아무리 박한빈이라도 그 순간 찾아온 극심한 통증에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고 얼굴은 한순간에 굳어졌다.“엄마!”성유리는 다급하게 뛰어가 할머니를 붙잡았다.그러나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은 할머니는 성유리를 밀쳐내며 다시 박한빈을 공격하려 했다.그때, 신고를 받고 출동한 윤도준이 도착했다.박한빈의 피 묻은 팔을 보자 윤도준은 눈앞이 아찔해졌다.그래서 즉시 사람들을 시켜 할머니를 제지했다.“뭐 하는 거야! 이놈들아, 당장 이거 놔!”할머니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소리를 질렀다.결국 윤도준은 고민 끝에 날뛰는 할머니를 경찰서로 데려가려고 했다.그러나 박한빈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일단 저부터 병원에 데려다주십시오.”그의 얼굴은 이미 창백해져 있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하지만...”“저분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유리를 힐끗 본 뒤, 이런 말을 덧붙였다.“제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니 일단 저부터 병원에 데려다주시죠.”피해자인 박한빈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윤도준도 더는 강하게 나갈 수 없었다.게다가 할머니가 연세도 많고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경찰서에 데려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박한빈이 직접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오히려 윤도준은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의 요청에 따르기도 결정했다.서둘러 사람들을 시켜 마을 주민들을 해산시킨 후, 그는 박한빈을 차에 태웠다.하지만 피를 흘리고 있는 박한빈과는 달리 할머니의 분노는 여전히 사그라 들지 않았다.오히려 경찰차가 떠나려 하자 윤도준이 박한빈을 도망시키려는 거라 생각한 듯, 경찰차를 향해 욕설을 몇 마디 쏟아내기도 했다.결국 옆에 있던 성유리가 필사적으로 할머니를 붙잡아야만 했다.겨우 집
“저 아직 밥도 못 먹었는데 같이 가서 식사 하시겠습니까?”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그러나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윤도준은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박한빈이 멀리서 가볍게 손짓을 한 뒤 그대로 성유리를 차에 태웠다.이 차는 어제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반짝이던 차체는 마을의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온통 흙탕물로 뒤덮여 있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차가 한참을 달린 뒤에야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엄마가 알게 되면 어떡해요!”“걱정 마십시오. 혹시 유리 씨한테 화를 내면 제가 가서 설명할 테니까.”“아마 엄마는 분명 당신을 때릴 거예요.”박한빈은 여전히 운전대를 잡은 채 성유리를 슬쩍 바라보았다.“왜요? 걱정되십니까?”“당연히 그건 아니에요.”성유리는 즉각 반박하더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잡았다.“당신...”놀란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가만히 있으세요. 지금 저 운전 중이니까.”“게다가 손에 아직 상처가 있습니다.”그 말에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췄다.고개를 숙여 보니 그의 흰 셔츠 아래로 여러 겹의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리고 그 아래로 스며 나온 붉은 피가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아직 안 나았어요?”성유리는 무심결에 눈썹을 찌푸렸다.“걱정 마십시오. 안 아픕니다.”박한빈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런 그를 한참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결국 손을 거두었다.그러나 박한빈의 손이 닿아 있는 곳에서부터 이상한 감각이 퍼졌다.마치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성유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하더니 결국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박한빈이 성유리를 읍내로 데려간 것은 단순히 밥을 먹고 장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그녀를 병원에 데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는 성유리가 자
할머니는 마을에서 작은 땅을 갖고 있었다.예전에는 옥수수를 심었지만 몇 년 전 이웃 마을에서 계약 농사를 제안하면서 딸기로 바꿨다.그러니 지금은 딸기 씨앗을 심을 시기였다.아침부터 소란을 피운 할머니를 성유리는 억지로 집에서 쉬게 하고 자신이 대신 밭일을 맡았다.일 자체는 힘들지 않았지만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다 보니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쪼그려 앉아 씨앗을 심던 성유리가 잠시 눈을 감고 쉬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손을 뻗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지금 뭐 하십니까?”고개를 들어보니 박한빈이 찌푸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순간 얼어붙었고 이내 허둥지둥 그의 손을 밀어냈다.그리고는 황급히 몇 걸음 물러나 박한빈과의 거리를 벌린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저... 근데 왜 여기 계세요?”박한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절 무서워하시는 겁니까?”“아... 아니에요!”성유리는 서둘러 부정했다.마치 그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말이다.“다만... 엄마가 당신이랑 같이 있는 걸 싫어해요.”한참을 망설이다가 성유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엄마가 화낼 거예요.”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성유리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왜죠? 그쪽 어머니는 제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네.”“하지만 유리 씨는 제가 나쁜 놈이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요?”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을 따르는 겁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의 질문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냥 혼란스러운 건지 알 수 없지만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게다가 유리 씨가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모를 텐데 말이죠.”“그럼... 그건 속이는 거잖아요.”“속이는 게 아닙니다. 그냥 말하지 않는 것뿐이지.”성유리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박한빈 또한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여기
박한빈은 많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환경은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더구나, 이번에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창문 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할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누군가를 쫓아내고 있었다.이미 백발이 성성했지만 기운만큼은 넘쳤다.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몰아내는 동안, 마을 안팎 사람들이 소란에 놀라 몰려들었고 할머니는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까지 싸잡아 한바탕 호통을 쳤다.그 뒤에는 성유리가 조용히 서 있었다.마치 어미 닭에게 보호받는 병아리처럼.주변을 궁금한 듯 둘러보면서도 절대 할머니의 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박한빈이 그 장면을 바라보던 순간, 성유리도 마침 그의 시선을 느낀 듯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려 할머니의 손을 붙잡았다.소동이 한참 이어진 끝에, 할머니는 성유리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쾅!그 문이 닫히는 소리는 깜짝 놀랄 정도로 컸다.그러고 나서야, 할머니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겁먹지 마라. 저런 놈이 뭐라고!”“우리 딸처럼 좋은 아가씨가 결혼할 상대를 못 찾을 것 같아? 걱정 마. 엄마가 더 좋은 사람 골라줄 테니!”“엄마... 사실 저는 결혼 서두를 생각 없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말했다.“그건 안 돼!”할머니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칼에 잘랐다.“여자는 크면 시집가야 하는 법이야.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으면 어쩌자는 거냐?”“게다가 내가 지금은 네 곁을 지켜주지만 언젠가는 나도 떠나야 한다. 그때 네가 혼자 남으면 누가 널 지켜주겠어?”엄마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야?”아직 화가 덜 풀린 할머니는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하지만 문밖의 사람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안녕하세요. 문 좀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이번엔 또 누구야?”할머니는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단정한 흰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
그 목소리에 성유리는 황급히 돌아섰는데 마치 얼굴에 ‘당황’이라는 글자를 적어 놓은 듯했다.할머니는 가느다란 눈을 좁히며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다녀온 거야?”“저... 밖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서 좀 보고 오느라...”“고양이?”할머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이 마을에 고양이 몇 마리 있는 게 뭐가 그렇게 신기해?”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할머니도 깊이 따지지는 않았다.“얼른 자라.”그저 짧은 말만 남긴 채, 제 방으로 돌아갔다.성유리도 조용히 뒤따라 방으로 향했다.그녀의 방 창문은 길 건너편 박한빈이 머무는 집과 마주 보고 있었다.그곳의 창문에는 어제 새롭게 창호지를 발라놓아 이제 더 이상 구멍이 나 있지 않았다.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노란빛 조명은 성유리의 방 조명과 똑같은 따뜻한 색이었다.성유리는 그 창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누워 잠을 청했다.그렇게 밤이 지나갔다.할머니는 원래 잠이 적었기에 해가 뜨기도 전에 괭이를 들고 밭으로 나갔다.성유리는 침구를 정리한 후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계란을 깨려고 고개를 숙인 순간, 갑자기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는 분명 할머니의 것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순간 긴장했다.그래서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문밖으로 나섰다.그러나 마주한 사람을 보고는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그러나 이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아주머니, 어쩐 일이세요?”“너희 어머니 계시니? 볼 일이 있어서 왔어.”여자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아마 밭에 계실 거예요. 불러올까요?”“그래, 다녀와.”여자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그러더니 성유리를 한 번 훑어보곤,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하지만 성유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별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마침 그 순간, 할머니가 밭에서 돌아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길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에릭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흠, 듣고 보니 꽤 재미있을 것 같군.”“그럼 이 일은 네게 맡길게.”“뭐라고?”“너도 알다시피 난 이미 죽은 사람이야. 그리고 사씨 가문 쪽도...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내가 직접 손을 대긴 어려워.”“예전부터 네가 한국 시장에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 지금이 바로 기회 아닌가?”에릭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박한빈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이 마을 사람들은 일찍 잠드는 편이었다.지금은 사방이 조용했기에 그 작은 소리조차 유난히 또렷하게 들려왔다.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내려놓고 물었다.“누구십니까?”아직도 업무 모드였던 탓에 목소리에는 저절로 냉기가 서려 있었다.그랬더니 문밖에서 들리던 노크 소리가 멈췄다.하지만 대답은 없었다.불안해진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연정우 씨가 또 사람을 보낸 걸까?’그는 반사적으로 방 안을 둘러보며 무기로 쓸 만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문밖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저예요.”박한빈은 순간 멍해졌다.그리고는 에릭이 뭐라고 하는지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대로 전화를 끊고 문 쪽으로 향했다.느슨하게 걸린 낡은 나무문을 밀어 열자 문 앞에는 성유리가 서 있었다.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 한 그릇이 들려 있었고 발치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주전자도 놓여 있었다.“아직 안 주무셨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물었다.어딘가 머뭇거리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는 이내 시선을 떨구며 덧붙였다.“저... 저녁을 드셨는지 몰라서요. 그리고 여기 불 때는 곳도 없길래... 그냥 면을 좀 끓였어요. 따뜻한 물도요.”박한빈은 그녀가 들고 있는 그릇을 바라보았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둔탁하게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박한빈이 문득 물었다.“제가 누구인지 아십니까?”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