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이 평양후부를 나선 직후, 한참 동안 멍하니 있던 평양후는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고, 그의 눈동자는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갑자기 가의 군주의 옷깃을 움켜쥐더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그러자 가의 군주가 미친 듯이 소리쳤다. "감히 나를 때려? 네가 감히? 이 비겁한 놈아!" 평양후는 분노로 눈이 충혈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가장의 권위를 보여주었다. "때리기만 할까? 내가 너를 버릴 것이다!" "버려?" 순간 멈칫하던 가의 군주는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다시 한 번 말해 보거라!" "그럼 너 같이 악독한 년이 평양후부를 해치게 놔두란 말이냐?" 그 순간 도자기 주전자가 평양후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치며 '쾅' 하는 소리가 났고, 이어서 도자기 파편이 바닥에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평양후는 비틀거리며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가의 군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하늘이 빙빙 도는 듯한 느낌을 느낀 그는 그만 바닥에 쓰러져 버렸고, 이윽고 머리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다. "나리!" 그 광경에 하인들이 황급히 뛰어와 평양후를 부축했다."어서 의부를 불러라!" "감히 나를 버려? 네가 나를? 어디 한번 끝까지 싸워보지." 바닥에 쓰러진 평양후를 차갑게 내려다보는가의 군주에게서 조금의 애석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막 평양후부 대문을 나서던 송석석은 안쪽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필명을 불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해 보라 지시하고 대리사에 보고하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먼저 진술을 정리해야겠다고 했다.평양후부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다행히도 노부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저택에 상주하는 의원이 항시 있었기에 신속히 손을 쓸 수 있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상처는 심각했다. 필명은 상황을 살펴보고 나서 대리사로 돌아와 송석석에게 보고했다. "상처가 심각하더냐?" 평양후의 머리에서 흐르던 피에 필명도 깜짝 놀랐다."의원이 말하길,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반역 사건 이후로 그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에 집에 돌아가서도 몇 마디 나누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져 잠들곤 했다. 사여묵이 송석석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 "당신이 실망하지 않도록 내가 미리 말해야겠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사온을 처형하지 않으실 거란 말이지요?" 송석석은 그의 넓은 가슴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전쟁터에서도 지치지 않았던 그녀지만 여기저기 탐문하여 증언을 듣고, 그 속에서 날아드는 비꼬는 말투에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었다. 사여묵이 조용히 분석했다."나는 이미 연왕을 언급했지만, 전하께서는 당신에게 연왕을 조사하라고 하지 않았소. 의심 많은 성격인데 어찌 연왕을 조사하지 않을 수 있겠소? 아마 다른 사람을 보내어 조사하게 했을 것이고 그들은 아마 어전시위와 호위무사일 것이오. 이들은 당신 관할이 아니오. 설령 어전시위가 당신 관할이라고 해도, 그것은 명목상일 뿐. 명확히 조사하기 전까지 사온을 죽이지 않을 것이고 사온이 살아 있는 한 연왕은 하루도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오." 송석석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공주부는 두 가지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는 반역이고, 다른 하나는 첩들을 감금하고 살해해 많은 아이들의 목숨도 빼앗아 간 죄이지요. 그러니 사온을 처형하지 않으면, 민심을 잠재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물어야 하오.”사여묵의 눈에는 서늘한 빛이 스쳤다.“반역이 묻힌다면, 그 많은 생명들은 오직 한 사람만이 짊어질 수 있소." 그러자 송석석의 눈이 번쩍 띄었다."고부진!" 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소. 그는 결코 억울하지 않소. 그는 이미 공범이고, 자신이 어쩔 수 없었다며 그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고 변명해도 소용없소. 그는 고후부 사람이오. 그 당시 황조부께서도 아직 살아계신 시점이었으니 사온이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던 것은 아니었소. 그는 굴복을 택했을 뿐
숙청제가 송석석에게 물었다. "공주부와 교류가 잦았던 세가들에서 알아낸 것이 있느냐?" 송석석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았고, 현재까지는 흥녕후부에 고부진의 서녀 한 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심문 결과, 이 서녀는 아무 임무도 수행하지 않았사옵니다. 흥녕후부의 사람이 된 지 이틀째 되는 날, 그녀의 생모가 죽었고, 그로 인해 사온이 그녀를 통제하지 못하였고 더불어 그녀는 흥녕후세자의 총애를 받아 장공주부와의 관계를 끊었사옵니다." 숙청제의 눈에 한 줄기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흥녕후부에서 그녀의 신분을 아는 자가 있는가?" "흥녕후부에서는 모른다 하였고, 하인들에게도 물었사오나 고부진의 서녀는 거의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고 하였사옵니다." 그러자 숙청제가 물었다. "그렇다면 고부진의 서녀는 아직도 후부에 있는가?" "그녀는 입문 후 아들과 딸을 낳았기에 쫓겨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사찰로 보내졌다 하옵니다." 말이 마치자마자 숙청제가 명령했다. "흥녕후부는 경계하여야 하니 주의 깊게 지켜보아라. 또한 그들이 예전에는 누구와 자주 교류했는지 조사해 보라." "폐하께서는 염려하실 필요 없사옵니다. 이미 조사 중이옵니다." 하지만 숙청제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기색을 보였다. "고부진이 보낸 서녀가 그리도 많다더니, 찾아낸 자는 왜 하나뿐이더냐?" "그들을 관리하던 자들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교체되었고 교체된 자들은 대부분이 살해되었사옵니다. 또한 한 명만은 아니옵니다. 승은백부에 들어간 기생 출신 여인은 본명이 고청무이고 지금은 이름과 외모를 바꾸었사옵니다. 부중의 관리가 자백한 바에 따르면, 그녀는 이미 진성을 떠났다고 하옵니다." "계속해서 찾거라. 모두를 찾아내 더 이상 이용당하지 않도록 해라. 그들은 모두 불쌍한 자들이로다." 숙청제의 한숨에 송석석은 약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 서녀들의 거처를 이미 알아냈지만, 아직 직접 방문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위
사여묵은 그녀의 판단을 존중했다. 결국 모두 억울하게 누명 쓴 사람들이기에 그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이용당할 운명이었다. 이 점만 보아도, 장공주는 불충한 마음을 품고 있은 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사여묵이 사건의 주모자 아무리 지껄인들 황제는 믿지 않으실 것이며, 문무백관과 백성들 또한 믿지 않을 것이다.“이미 그들을 보호했으니, 이제는 잘 감시해야 하오. 그들 중 많은 자들은 여러 해 동안 귀족 가문에서 지내왔으니, 집안의 약점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니 그들이 누구에게도 이용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오.”"명심하겠습니다. 분명 잘 처리할 것입니다." 지의가 하달되어 가의 군주는 신분을 박탈당했고 식읍마저 회수당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내명부의 봉록을 받지 못하고, 평민으로 강등되어 평생 명예를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사람을 죽인 혐의가 없더라도 평양후가 그녀의 명예 회복을 신청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반면 그녀가 사람을 죽였거나,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법에 따라 처벌될 것이다.지의를 들고 평양후부에 찾아온 이는 오대반이었다. 가의 군주는 미친 듯이 오대반에게 달려들었다.“차라리 나를 죽여라!” 그러자 금군이 급히 오대번 앞을 막아서더니, 그녀에게 발길질을 서슴치 않았다. 그 충격에 가의 군주는 바닥에 쓰러지며 피를 토했다.평양후의 노부인은 당장 그녀를 내쫓지 않았다. 그녀는 먼저 조사하도록 명하였고 조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감금시켰다.내치는 것은 확정된 것이었다. 평양후를 죽일 뻔했던 그녀이기에 평양후부에서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다음날, 송석석은 필명과 함께 위국공부를 찾아갔다. 위국공은 과거에 송석석을 꾸짖으며, 증거도 없이 경위를 이끌고 연왕부로 간 것이 왕실의 체면을 무시한 행위라고 비난한 적이 있었다. 위국공은 성격이 곧고, 성질이 급하기로 유명하였으며,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의를 보면 참지 않았다.그는 송석석이 감히 경위를 이끌고 위국공부에 온다면, 들어올 수
위국공부, 관직이 있는 아들들은 이미 외출하였고, 그 외 모든 이들을 정청에 모이게 하였다. 밖에서는 주기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위국공은 모든 감정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는 자로 한치의 숨김이 없었다. 그는 전장에서 공을 세워 얻은 위국공이었으며, 비록 그의 아들과 자손들이 조정에서 벼슬로 지냈지만, 관직이 높지 않아 시기를 받거나 황제의 의심도 받지 않았다. 하여 그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한, 누구도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했다. 현갑군 지휘사라고 하지만, 그는 '현갑군'이라는 세 글자만 중시했을 뿐, 지휘사는 하찮다고 여겼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리자, 위국공은 천천히 차를 들이켰다. 그러더니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자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저대로 내버려두어라." "문전박대는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황명을 받고 일을 처리하는 중이지 않습니까?" 위이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위이준은 무장 출신으로, 한때 금군 지휘사로 있었으나, 선제께서 붕어하시기 전에 물러났다. 그는 위국공부의 세자였고, 위국공이 세상을 떠나면 그가 국공의 작위를 이어받을 것이었다. 국공의 작위는 3대째 이어지고 있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부귀는 이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온화한 성격의 위이준은 항상 신중했다. 반면 그의 부친인 위국공은 과단성이 없다 여기어 그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위국공은 다섯 아들 중에서도 특히 넷째 아들, 위해철을 가장 아꼈다. 위해철은 서자였고, 넷째였기에 적장자가 있는 데다 둘째, 셋째까지 있어 그가 작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은 없었다. "뭐가 지나치다는 것이냐?" 위국공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뭘 두려워하느냐? 소심한 것이 대업을 이룰 기질이 없구나. 한낮 여인이지 않더냐!" 위해철은 아버지의 말을 거들었다."맞습니다, 형님. 헌데 대체 무엇이 두려우신 것입니까? 내버려두시지요. 저러다 돌아갈 것입니다." 그는 병부에서 무고사
위국공은 평소부터 위해철의 말을 가장 일리가 있다 여겼다. 게다가 그의 생각과 위국공의 생각은 항상 일치하였다. 사실 위국공도 전에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위해철의 말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하였다. 무엇보다 위국공이 먼저 그 의견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위국공은 위해철을 아낌없이 지지했다.위이준의 반대는 무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의견을 표명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경위는 그들만의 방식이 있다. 송석석은 장군가 출신으로 남강에서 공을 세운 바 있다. 그녀에게 능력이 없다면 전하께서 그녀에게 중책을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단순한 사건이 아니고 반역이니 황명을 받아 일을 처리하는 위치로 우리를 대리사로 데려가서 심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하지 않고 직접 여기까지 행차하여 벌써 반 시진이 지나도록 기다리고 있으니 이는 우리 위국공부에 대한 충분한 존중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부친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번 사건은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그들도 여유가 없으니,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방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차라리 그들이 묻는 것에 협조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부친과 아우가 말한 대로 그들이 우리 위국공부를 이용해 위세를 떨치려 한다면, 오래도록 밖에서 기다릴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우리 위국공부에 대한 배려일 것이고 부친을 향한 존중때문이 아니겠..." 장황하게 늘어놓은 위이준의 말에 마음이 불편해진 그는 말을 끊고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닥쳐라! 정말로 존중했다면 아예 찾아 오지 않았어야 했다. 우리가 장공주부와 어떤 교류가 있었단 말이냐? 장공주가 그렇게 많은 초대장을 보냈어도 고작 몇 번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혼처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위이준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렇다면 왕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닥치라고 하지 않았느냐?" 위국공은 분노에 차 외쳤다. 그는 이 아들에 대한
위해철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에 있던 시위들에게 호통을 쳤다. "어찌 된 일이냐? 분명 문을 열지 말라고 했거늘, 누가 문을 연 것이냐!" 송석석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내가 스스로 들어온 것이오. 반 시진을 기다려도 문은 열지 않고 오히려 오물을 퍼부어 부득이하게 실례하게 되었소." 그러고는 앞으로 나아가며 방 안을 둘러보았는데, 가장 연로한 이는 위국공이었고, 그 옆에 있는 두 사람은 아마 그의 동생들, 즉 이방과 삼방의 사람으로 보인다.송석석은 미리 조정에 출사한 위국공부 사람들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어 대강 알아볼 수 있었다. 그중 청색 비단옷을 입은 중년 남성은 초조해 보였고 그녀를 보더니 약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 사람은 분명 위국공의 세자, 위이준일 것이다. 방금 화를 내며 말하던 이는 그녀가 아는 인물이었고 위국공의 넷째 아들 위해철이었다. 그는 병부의 무기고를 관리하고 있었고 이번에 그녀가 찾아온 것도 위해철과 그의 첩, 유청 때문이었다. 위국공은 그녀가 스스로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더욱 분노했다."감히 내 허락도 없이 들어왔단 말이냐? 일품 국공부에 감히 무단침입을 하다니 무례하다!" 예의를 다하였지만 통하지 않으니, 무력을 행사할 수 밖에 없었다. "국공께 실례를 범하였소." 하지만 위국공은 참지 않고 탁자를 세차게 두드렸다."당장 여기에서 나가지 못할까! 그렇지 않으면 내 손에 죽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야!" 송석석이 응수했다. "그대는 이미 충분히 불친절하였소. 하지만 묻고자 하는 것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절대 떠날 수 없소. 화가 나신다면, 전하께 아뢰어도 되오." 위국공은 일생 동안 누구에게도 굽힌 적 없었기에 후배의 도발이 못마땅했다. 그는 즉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하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여봐라! 이자를 당장 끌어내리거라!" 송석석의 관복은 넓은 소매로 이루어져 있어 싸울 때는 다소 불편했지만, 소매를 휘두르는 기술을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송석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위해철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필요 없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빨리하고 당장 나가시오!" "위해철!" 그러자 위이준도 버럭 화를 냈다."무례하다!" 위해철은 그 태도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을 흘겼다."그리 약해 빠져서 어떡합니까?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우리는 떳떳하니, 그림자가 비뚤어질 걱정 하지 않아도 됩니다!" 위해철을 바라보던 송석석은 위국공과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위국공은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기에 감당하기 힘들더라도 세운 군공을 생각해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위해철은 달랐다. 그는 아버지의 권세를 등에 업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마구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었다. 군부에서도 그의 성질을 알기에 아무도 그와 엮이려 하지 않았고, 그 점이 그를 더욱 오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송석석은 쉽게 봐주지 않았다."주부를 부를 필요 없다 여기신다면 내가 직접 기억하겠소. 그래도 되겠소? 당신의 유청아씨를 불러오도록 하오.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소." 위국공부에 들어온 지 7년이 된 유청은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아 위해철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정실부인을 몰아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실의 지위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실과 다른 첩들이 낳은 아이들은 모두 딸이었지만 유청은 아들을 두 명이나 낳았기에 더욱 아꼈던 것이다.유청이를 찾는다는 말에 방 안의 사람들의 얼굴이 급변했다. 장공주의 서녀들이 여러 가문으로 흩어졌다는 소문을 그들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해철만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고 상대방이 자신이 유독 아끼는 첩을 찾자 더 크게 분노할 뿐이었다."내실의 여인에게 대체 무엇을 물으려는 것이오? 모욕이라도 하려는 것이오? 할 말이 있으면 나에게 직접 물어보시오!" 하지만 송석석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한자 한자 정확하고 침착하게 말했다."유청, 성은 고 씨고 아버지는 고부진이오. 본가는 고후부 혹은 장공주부라 할 수
고청우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역겹다는 눈빛이 새어 나왔다. ‘버러지 같은 놈, 능력도 없고 용맹하지도 못하면 마음이라도 독하게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천하의 멍청한 놈!’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했다.“역시 저희 서방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제가 서방님을 참 잘 만난 것 같네요.”한편, 결심을 하고 나니 왕표는 되레 마음이 너무 편했다. 그는 고청우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눈앞의 이 여자와 남은 평생 신분을 숨긴 채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상상을 하고 있었다.지금까지 남들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삶도 살아봤고 나라를 위해 목숨도 잃을 뻔했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왕표는 절대 잘못한 게 없으며 더군다나 그가 남강에 있든 없든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어차피 제린과 방천허 등 부하들은 그를 원수로 인정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가서 왕진을 불러오게. 이곳을 떠나기로 했으니 그자와 논의해서 우리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가야지.”왕진은 본래 평서백부의 교두였는데 왕표를 따라 남강 전쟁에 뛰어든 것이었다.왕표는 전에 최씨가 그의 곁에 몰래 사람을 붙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부인 고청우가 남강에 오고나서 최씨가 심어놓은 사람들을 전부 제거한 것이다.때문에 지금 저택에 남아있는 부하들은 왕표의 믿음을 듬뿍 받고 있는 자들이다.한편, 왕표의 계획을 들은 왕진이 흠칫 놀랐지만 이내 찬성했다.남강에 오기 전, 왕진은 진성에서 더할 나위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고 평서백부에서 교두로 지내던 나날들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하지만 왕표를 따라 남강에 오고 나서부터 좋은 술을 마셔본 적도 없고 입맛에 맞는 요리를 먹어본 적도 없었다.지금 그 부귀영화를 누리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데 그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더군다나 전쟁이 터져서 왕표가 전장에 나가면 왕진도 따라가서 목숨 걸고 피 터지게 싸울 수밖에 없다.왕진 등 사람들은 정식적인 사병이 아니기에 지금 도망간다고 해도 그들의
몰래 저택 안으로 들어온 무당은 10분 뒤, 다시 뒷문으로 빠져나갔다.한편, 저택에 앉아있던 왕표는 온몸에 힘이 쫙 풀렸으며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조금 전, 무당은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쓱 훑어보더니 담담하게 한 마디만 뱉었다.“장군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그리고 나서는 고청우가 아무리 울며 빌어도 무당은 입을 꾹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굿을 해달라고 해도 단호하게 거절하며 소용없는 짓이라고 얘기했다.그러다가 저택을 떠나기 전, 무당은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이 땅은 장군의 무덤입니다. 장군님께서는 가족들을 달 대피시키십시오.”무당의 말에 왕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이 남강 땅에 얼마나 많은 장군의 뼈들이 묻혀 있단 말인가! 더할 나위 없이 용맹하고 전쟁 경험이 많은 송회안 부자도 이 땅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왕표는 송회안 부자를 존경하지만 두 사람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만약 전장에서 죽는다면 평서백부가 아무리 대대손손 흥한다고 해도 왕표는 전혀 그 영광을 누리지도 못할 것이고 심지어 그의 부인과 아들도 이를 누릴 수 없다.이때, 고청우가 뒤에서 왕표를 끌어안고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서방님, 서방님께서 전장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면 저와 아들도 서방님을 따라 가겠습니다.”“아니, 난 절대 죽을 수 없어!”눈물을 뚝뚝 흘리는 고청우를 보며 왕표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고청우의 손을 덥석 잡더니 결심한 듯 말을 이어갔다.“우린 아무도 안 죽을 것이오. 전에도 약속하지 않았소? 전쟁이 일어나면 바로 남강 땅을 떠날 것이오!”흠칫하던 고청우가 당황한 기색으로 왕표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저희가 정녕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요? 이 저택에 저희 사람만 있는 건 아닙니다. 더군다나 모든 걸 버리고 몸만 떠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왕표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안일한 생활을 오랫동안 보낸 왕표는 절대 가난하게 살 수는 없었다.반드시 당당하고 순조롭게 금은보화를 저택 밖으로
한편, 남강에서 왕표는 며칠동안 계속 좌불안석이었다. 그는 사국 병사들이 정말 쳐들어올 줄은 몰랐으며 시씨 가문 도련님이 보낸 서신이 사실일 줄도 전혀 몰랐다.왕표는 방천허 등 사람들과 몇 번이고 논의를 했지만 그자들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으며 쳐들어오면 바로 전쟁을 치르면 된다고 했다.방천허가 보인 자신감에 왕표는 조금이나마 안심이 됐지만 전쟁이 일어난 순간 왕표는 절대 군영에서 지휘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그리고 방천허 등 병사들에게 정말 그만한 실력이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송씨 가문 군대와 북명군은 평소에도 건방진 태도로 왕표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병사 훈련을 진행하지 않았기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승산이 높지 못할 것이다.왕표는 자신의 다리를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비가 내리면 다친 무릎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으며 전장에서 다리도 잃을 뻔했다.진성으로 돌아가 오랜 시간의 치료를 통해 겨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가끔 다리가 불편했다.왕표는 전장에서 죽음에 이르렀던 그 순간을 여전히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살인으로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심지어 칼을 들 힘도 없었다.그뿐만 아니라 몸에 입고 있는 갑옷이 너무 무거웠던 탓에 적에게 공격을 당했을 때 누군가가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왕표는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렸을 것이다.물론 이제 원수가 된 왕표는 굳이 전장에 직접 나갈 필요가 없지만 남강에는 원수가 숨어서 지휘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앞장서서 싸워야 한다는 전통이 있었다.그 전통을 만든 사람이 바로 송회안과 사여묵이었고, 제린과 방천허도 이 전통을 찬성하는 바였다. 원수가 전장에 직접 나서야만 병사들의 투지와 열정을 끌어올릴 수 있어, 짧은 시간 내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바로 그때, 대문이 열리며 고청우가 인삼차를 들고 들어왔다.왕표는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긴 채 고청우를 쳐다보았고 고청우는 조금 전에 울고 온 듯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
임 태의는 북명왕의 상태가 걱정되어 황실에 남아 밤을 보내려고 했지만 저녁쯤 돌아온 단 신의가 한걸음에 황실로 달려와 북명왕에게 단설환 한 알을 건네 주었다.단설환을 복용한 북명왕은 흉부 통증이 바로 완화되었고 임 태의가 맥을 짚어보니 그가 처방한 약보다 효과가 훨씬 좋았다.임 태의는 오래 전부터 단 신의의 명성을 익히 전해 들었기에 굳이 자신이 황실에 남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위로 몇 마디를 남긴 뒤 황실을 떠났다.임 태의가 가자마자 단 신의는 북명왕을 위해 처방을 했고 제자를 시켜 약왕당에서 가서 약재를 구해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약을 먹은 사여묵은 가슴에 꽉 막혀 있던 큰 돌멩이가 사라진 기분이었으며 겨우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다.“임 태의가 내일도 찾아올 걸세. 때문에 왕야께서 진성을 떠난다고 해도 내일 저녁까지 저택에 계시다가 출발하셔야 하네.”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임 태의께서 내일 다시 장군님의 맥을 짚어본다면 모든 게 들통나는 거 아닙니까?”“사람을 시켜 저택 밖에서 지켜보다가 임 태의가 나타나면 내가 다시 왕야께 약을…”“약을 또 드셔야 한다는 겁니까? 더 이상 중독되면 안 됩니다.”송석석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다급하게 말하자 단 신의가 송석석을 힐끗 쳐다보았다.“그렇게 걱정됐다면 그 반 알도 드시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송석석이 후회 막심한 표정을 지었고 단 신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남은 반 알을 먹이려는 게 아니네. 현빙환이라는 약이 있는데 조울증을 치료하는 약이라 이 약을 복용하면 맥박이 여전히 이상하게 보일 걸세.”그제야 마음이 놓인 송석석이 다시 물었다.“그 전에 드신 약이 이미 심장을 손상시켰는데 거기에 이 현빙환까지 드시면 몸 상태가 더 악화되지 않겠습니까?”“큰 문제는 없을 것이네. 그래서 치료제로 이런저런 약을 많이 드리지 않았나?”단 신의의 말에 곁에 서있던 동동이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그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왕야께 현빙환을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친위병 몇 명을 거느린 척귀가 임 태의와 오대반과 함께 북명 황실로 향했다.송석석은 며칠동안 공무를 내려놓기로 하고 모든 업무를 필명과 오진에게 맡겼다.시만자도 송석석을 통해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고 오늘 임 태의와 오대반이 저택에 왔다는 소식에 시만자는 괜히 어설픈 모습을 들키기 싫어서 나타나지 않았다.임 태의와 오대반은 이내 두 눈이 퉁퉁 부은 송석석을 만나게 되었고 오대반이 조심스럽게 위로했다.“왕비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임 태의가 계시니 왕야께서도 조만간 호전될 것입니다.”“감사합니다.”송석석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한편, 척귀 등 친위병은 왕야와 왕비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기에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척귀는 침실 밖에 나타난 염구진을 보자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물었다.“염 선생, 폐하께서 왕야를 걱정하셔서 이렇게 소인을 보냈습니다. 혹시 왕야께서 예전에도 이런 질병을 앓으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왜 갑자기 쓰러지신 겁니까?”염구진은 척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왠지 모르게 마음속으로 짜증이 확 났고 요즘 따라 이런 감정을 자주 느끼는 것 같았다.그는 황제의 이러한 조사가 결국 불신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염구진은 짜증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왕야께서 이토록 바쁘신데 쓰러지지 않을 수가 없지요. 언젠가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낮에는 대리사에서 공무를 처리하시고 저녁에는 잡다한 일로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찍 조정에 참석하시느라 한 시간도 채 못 주무시는데 몸이 어떻게 건강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노주로 가셨을 때 산속에 숨어 지낸 탓에 추위에 약해지셨고 진성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제대로 휴식을 취하신 적이 없었지요.”척귀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어명을 받고 탐문하러 온 척귀는 지금 이 순간 북명왕이 너무 대단하게 느껴졌으며 북명왕처럼 매일 바쁘게 살면 쓰러지지 않을 사람이 없
저녁쯤, 숙청제가 송석석을 궁으로 불렀고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송석석을 보며 숙청제는 사여묵이 아프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너무 걱정하진 말거라. 임 태의가 있으니 상황이 호전될 것이야.”숙청제의 말에 송석석은 영혼을 잃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감사합니다, 폐하. 소인이 단 신의께 소식을 전했으니 단 신의께서도 곧 돌아오실 겁니다. 단 신의에게 좋은 약이 있으십니다.”“단설환을 얘기하는 것이냐?”숙청제도 단설환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으며 진성에 있는 황족과 세가들은 돌발 상황을 대비하여 한두 알 정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2년 전부터 이 약은 거의 판매를 하지 않았기에 매우 귀한 약이 되었다.“네.”“단 신의는 언제쯤 돌아올 수 있다고 하더냐? 그 약을 약왕당에서 구할 수는 없는 것이냐?”숙청제의 물음에 송석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아무리 빨라도 삼일 정도는 걸릴 것입니다. 약왕당에도 현재 이 약을 판매하고 있지 않습니다. 홍작한테서 들었는데 단 신의께서 단설환 두 알을 가지고 계신다고 합니다.”“그럼 단설환 외에는 다른 약이 없느냐?”숙청제는 단설환의 약효가 좋다는 건 인정하지만 들리는 소문처럼 그리 신통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저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하다고 여겼다.“다른 약은 약효가 그리 좋지 못합니다.”머뭇거리던 송석석은 살짝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전북망 장군님 모친께서도 심각한 심장 질병으로 거의 사망하시기 직전이셨는데 단설환을 드시고 목숨을 부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뒤로 매달 단설환 한두 알씩 드셨다고 하는데 효과가 확실했다고 합니다.”숙청제도 이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망자를 언급하는 건 재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이내 송석석을 위로했다.“임 태의한테서 들었는데 상황이 조금은 호전되고 있으니 치료를 받고 충분히 휴식하면 곧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네, 폐하. 오늘 임 태의가 계셔서 너무 다행이었습니다.”송석석의 눈시울은
어서방에서, 임 태의가 허리를 숙인 채 황제에게 사여묵의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두 시간 전, 대리사 소경 진이가 북명왕의 옥패를 들고 태병원으로 달려와 북명왕이 갑자기 쓰러졌다고 외쳤다.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숙청제도 이내 보고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소인이 보기엔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의심됩니다. 상황이 매우 위험한데 소인이 도착했을 때 왕야는 이미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계셨습니다. 침술을 몇 번이나 사용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셨는데 제대로 걷지 못하셔서 마차에 태워 황실로 보내 드렸습니다.”“왜 갑자기 발작을 한 것인가? 전에는 한 번도 이런 병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 없는 것 같은데.”숙청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며 속으로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찌 됐든 사여묵과 피를 나눈 형제였기에 평소에 의심하고 경계한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소인도 황실에 계신 염 선생한테서 들었는데 왕야는 얼마전 진성으로 돌아오고 나서부터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했고 가끔 기침을 심하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가슴이 답답할 때도 있었는데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고뿔이 악화되면서 발작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숙청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지만 조금 의심이 들기도 했다.“고뿔을 앓고 있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상태가 악화될텐데, 왜 그동안 아무도 몰랐던 것이냐?”“폐하, 염 선생께서는 왕야가 진성에 돌아온 뒤로부터 너무 바빠서 쉴 시간도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고뿔 외에도 마음에 걱정되는 일이 있어서 고뿔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뿔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평소에 풍채가 좋은 분들은 증상이 확실하게 티가 나지 않아서 자신이 아프다는 것도 잘 모릅니다. 왕야도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숙청제는 의학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그저 물을 수밖에 없었다.“그럼 이젠 조금 나아졌느냐?”“폐하, 왕야는 현재 상태가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충분한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절대 과로해서는
이날 저녁, 송석석은 약왕당에서 받아온 약을 사여묵에게 건넸고 약의 위험성까지 자세하게 얘기했다.사여묵은 망설이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위로했다.“이 정도 상해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 그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약들도 이렇게 잔뜩 가지고 오지 않았소? 나중에 어의에게 진단만 받으면 바로 단설환을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남강으로 가는 길에도 단 신의의 당부를 잊지 않고 매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겠소.”“그래도 결국 독약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보기엔 지금으로써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소. 단 신의가 말을 무섭게 해서 그렇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 못할 거요. 그렇게 위험한 약이었다면 애당초 꺼내지도 않았겠지.”“그럼 일단 염 선생과 상의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그럴 필요 없소!”사여묵이 약을 내려놓은 뒤, 커다란 손으로 송석석의 허리를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하오. 나중에 내가 대리사에서 쓰러지면 진이가 내 옥패를 들고 어의를 찾아갈 것이고 황실로 달려온 어의가 우왕좌왕하는 염 선생을 보아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사여묵의 가슴팍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전 장군님이 너무 걱정됩니다.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남강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가는 내내 제대로 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남강에 가서도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으면 전장에 어떻게 나가시려고 그러십니까?”송석석의 걱정에 기분이 좋아진 사여묵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난 왕표를 무조건 대체하겠다는 게 아니오. 일단 제린을 찾아 병사들 속에 숨어 있다가 왕표가 제대로 군을 이끈다면 난 남강 구경이나 하다 올 것이오.”사여묵의 위로에도 송석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왕표가 군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화가 난 단 신의는 송석석의 말에 설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난 멍청한 사람을 돕지 않소. 당신들은 그런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소!”“세상에 이런 멍청이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한번만 더 모험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할게요.”송석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단 신의가 미간을 찌푸렸다.“모험을 하고 싶어도 이제 못할 수도 있소. 돌아오면 황제께서 그 죄를 어떻게 물으실 줄 알고 이러는 것이오. 그러다가 머리가 잘릴 수도 있소.”“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단 신의는 고집을 부리는 송석석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백성들에게는 두 사람과 같은 멍청이들이 필요하긴 했지만, 단 신의는 그 멍청이가 송석석과 사여묵은 아니길 바랐다.결국 단 신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은 상자를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곤 조심스럽게 열었다.상자 안에는 땅콩 만한 검은 알약 하나가 있었다.“똑똑히 기억하시게. 이건 독이오. 이 약을 먹고 나면 맥박이 이상해지고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네. 그리고 짧은 시간내에 심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이건 그저 보여지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 이 약을 먹고 3일 정도 버틸 수 있는데 3일 뒤에는 반드시 단설환을 복용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심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소.”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그럼 당연하지. 이건 독이오.”“그럼 단설환을 먹고 나면 바로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그렇지 않소.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네. 눈속임을 하고 나서 바로 출발하면 절대 안 되오.”위험할 수도 있다는 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은 단 신의가 건네는 약을 받지 않았다.“그럼 혹시 다른 약은 없는지요? 폐하를 속이고 나서 장군님은 바로 출발하려고 할 겁니다. 실제로 중독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