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은 부친을 끌어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황제가 무엇을 말하든 부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에 부친의 충군애국을 계속 강조하며 답해야 할 질문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은 황제의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듣고 있습니다."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고통으로 인해 숙청제는 예전처럼 우회적으로 묻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는 사여묵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일 테지. 만약 짐이 죽으면 그가 섭정왕이 되어 어린 황제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느냐?"송석석의 마음은 세차게 가라앉았고, 분노가 눈에 가득 차올랐다. 남강에서 막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 그가 이렇게 노골적인 의심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사여묵을 대신해 억울함을 느끼며 차갑고 빠른 말투로 말했다. "폐하, 저는 그와 부부가 된지 겨우 삼 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 세상에서 그를 가장 잘 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의 형님이신 폐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는 그가 그런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화낼 필요 없다. 짐은 상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다. 너는 신하로서 네 부친과 마찬가지로…...""폐하!" 송석석은 바로 그의 말을 끊었다.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든 아니든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제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저 자신을 대변하는 것이지, 제 부친과는 관계없습니다. 부친은 이미 남강 전장에서 전사하셨고, 그의 공로는 후세 사람들이 평가할 것입니다."숙청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송석석,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 너와 네 부친이 한 일이 서로 다르다고 말하려는 것이냐?"오 대반이 깜짝 놀라 급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폐하, 진정하십시오. 화를 내시면 안 됩니다." 송석석이 벌떡 일어나 단호히 말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이 질문은
송석석이 무릎을 꿇고 있던 순간이 비록 아주 잠깐이었지만, 마치 한 세기가 지나간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숙청제의 미묘한 한숨과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녀석아, 어쩌다 이렇게 버럭 화를 내는 거냐?"숙청제의 말에 송석석의 마음이 조금 놓였다.처음에는 분노와 억울함이 가득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렇게 말을 쏟아낸 것이었고, 그 뒤의 말들은 약간의 도박과도 같았다.그녀의 마음속에도 두려움이 가득했다. 생명이 거의 다한 황제가 잔혹해지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가 그 질문을 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증명해 보이려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오직 이렇게 버럭 화를 내는 것만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행동한 것이었다."일어나라." 숙청제의 목소리는 이미 훨씬 부드러워졌고, 앙상하고 누런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너는 여전히 어릴 적 그대로 입에 발린 말을 절대 못 참는구나. 그냥 한마디 물어봤을 뿐인데 하늘을 뒤엎을 듯이 짐을 꾸짖어 대는 거 하고는. 정말 네게는 당해낼 수가 없구나."송석석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너 말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언쟁하여 어디에 쓰려고 그러느냐? 하늘에 올라가 네 둘째 오라버니에게 네가 짐을 괴롭혔다고 말할까 봐 걱정되지는 않느냐? 어렸을 때 너 또한 짐에게 형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그리고 지금도 짐은 네 형님이다."송석석은 고개를 돌렸다.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이제 와서 형님이라 하다니……"왕비님, 일어나십시오." 오 대반이 곁에서 가볍게 몸을 일으키는 시늉을 하자, 송석석이 일어나고는 몸을 돌려 눈물을 닦았다.반면, 숙청제는 여전히 고통을 참지 못해, 손을 들어 그녀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한 뒤, 우원정을 불러들였다.잠시 후 들려오는 고통의 신음소리에 송석석은 한동안 멈춰 서 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그녀는 황제에 대한 감정이 복잡했다. 때로는 군주이자 형님 같았고, 때로는 그렇게
송석석이 태후에게 말했다. "단신의께서 궁에 들어오신다면 분명 최선을 다해 치료하실 겁니다."넋이 나간 채 있던 태후의 눈에서 이내 눈물이 쏟아졌다. "최선을 다해도 생명을 구하는 것은 어려울 테니, 그저 조금만 더 오래 살게 해주어 국본의 큰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태후의 눈물을 보자 송석석도 마음이 아팠다. 예전에 모친께 듣기로, 태후는 강인한 성품을 가진 여성이라 큰 일에도 눈물 한 방울 쉽게 흘리지 않으신다고 하였다.송석석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했다. 하지만 이내 지금 태후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묵묵히 곁에 있어주는 것임을 깨달았다.같은 시간, 사여묵은 약왕당에 가서 단신의를 만났다.오늘 궁에 호출된 후, 염선생이 약왕당에 가서 단신의에게 이 일을 바로 알렸기에 단신의는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는 이번에 제자를 데려오지 않고 혼자서 사여묵을 따라나섰다.청작과 홍작은 그를 따라가려 했지만 단신의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으며 돌려보냈다.마차 안에서 사여묵은 단신의에게 안전하게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단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이것저것 살펴보며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진짜 머리가 잘리게 된다면 그것 또한 제 선택입니다.""그럴 일 없을 겁니다." 그러자 사여묵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모시고 온 것이니, 가실 때 또한 반드시 안전하게 모셔다 드릴 것입니다."단신의는 약상자를 잠근 후, 마차의 부드러운 방석에 기대어 앉았는데, 그의 눈빛은 어두웠으며 무엇을 생각하는지 보이지 않았다.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단신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이름은 운지입니다. 세 살에 약방를 외우고 다섯 살에 모든 약초를 다 알았으며, 열여섯에 출사하여 스물다섯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 자야 말로 진정한 신의였지요."사여묵은 등을 곧게 펴고 진지한 표정으로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의관은 어진 마음을 가져야 하며, 병을 치료할 때 신분을 가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의 눈에는 장사꾼
건양궁에서 우원정과 임 태의가 한쪽에 서 있고, 사여묵과 오 대반도 침상 옆에서 조용히 단신의가 진맥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단신의는 진맥을 마친 후, 이전의 진단 기록과 약 처방에 대해 묻자, 임 태의가 바로 그것을 가져다주며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천천히 보십시오, 단의관.”이 궁 안에서는 더 이상 누구도 감히 그를 신의라고 부를 수 없었다. 태의원이 한 차례 피바람을 겪었었기 때문이다.단신의는 그것을 받아 한 장 한 장 넘겨보았고, 전각에는 그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이것이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만약 단신의가 석 달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정말로 그 정도 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숙청제는 긴장하지 않은 듯 보였지만, 동공은 살짝 줄어들었고 손에는 땀이 가득했다.그는 마지막 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단신의는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모두 읽어본 후, 고개를 들고 물었다. “진단 기록에 따르면 통증이 한 달 이상 지속되었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며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하는데, 맞습니까?”이는 숙청제의 진술이었지만 진단 기록에도 쓰여 있었으므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이는 모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에게 방법이 있다는 말을 해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그러나 단신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다시 약 처방 기록을 처음부터 살펴보았다.특히나 우원정과 임 태의가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에게 내렸던 처방이 적절하지 않다고 말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들이 시도했던 몇 가지 치료 방안은 모두 일반적인 처방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을 시도한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큰 효과를 보지 못했었다.“단 백부, 어떻습니까?” 사여묵도 잔뜩 긴장해서 물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침상 옆에 앉아 마치 자신의 넓은 몸으로 숙청제를 무엇인가로부터 보호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이것은 본능적인 행동이었기에, 예의에 어긋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
숙청제는 잠시 침묵한 후, 곁채를 정리하라고 명했다. 동시에 태병원의 의관을 보내 그의 시중을 들게 하였으며, 장기문과 척귀를 보내 직접 그를 보호하며 동행하게 했다.그는 장기문이 시만자를 사부로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장기문을 시켜 단신의를 보호하도록 한 것은 단신의를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다.단신의가 안심해야 숙청제 자신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척귀까지 보냈다.그는 또한 태병원 전체가 단신의에게 협력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그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삼게 했다.이 권한은 매우 컸지만, 사실 숙청제는 태병원에서 제공하는 약을 사용하기를 원했다.단신의는 이를 개의치 않았고, 단지 명령한 일이 실행되기만을 바랐다.하지만 숙청제가 장기문과 척귀를 보낸 것을 보면, 그가 후궁의 사람들도 믿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제 그는 단신의와 한 목숨이 되었다. 단신의가 죽으면 그도 죽고, 단신의가 살면 그는 적어도 삼 년은 더 살 수 있으니 말이다.삼 년은 짧은 기간이지만, 그가 많은 준비를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단신의 일정을 정리한 후, 그들은 침전에서 치료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태병원의 모든 사람들이 마치 학생처럼 단신의의 곁에 모여 그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었다.그러자 단신의가 말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통증을 멈추는 것입니다. 통증을 멈추지 못하면 살아도 고통뿐이니까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통증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정에 나가 정사를 처리할 수 없으며, 이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통증을 멈추어야 한다는 말은 숙청제의 마음속 깊이 와닿았다. 그는 이미 거의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통증을 멈추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두 가지를 병행해야 합니다. 하나는 약을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침을 놓아 혈을 막아 통증을 마비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궁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혈을 한 번 막고 나면 두 시진마
그들이 흥분하는 사이, 그들은 깨달았다. 단신의가 침 놓는 것을 보나 마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단신의는 각 손가락 사이에 침을 한 개씩 끼우고, 눈 깜짝할 사이에 네 개의 침을 모두 놓았다. 그들은 마치 단 한 손의 환영만 본 듯했고, 모든 것이 이미 끝나 있었다.네 개의 혈은 서로 멀지 않았지만, 먼저 혈을 정확히 찾아내고 신중하게 침을 놓아야 했다. 아무리 빠르게 하더라도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숨에 네 개의 침을 안정적으로 놓았다.침을 다 놓은 후, 그는 숙청제에게 쾌적단을 주어 통증을 완화시켰다.그러자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숙청제의 안색이 조금 나아졌으며 더 이상 창백해지지 않았다.단신의는 침을 뽑은 후 처방을 내리고는, 약상자에서 한 병의 단설환을 꺼내며 말했다.“모두 이 단설환이 심맥을 보호하는 것만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근본을 튼튼히 하고 원기를 기르며 오장육부를 돕는 효과도 있습니다. 폐하께서 앞으로 강한 약을 사용하실 테니 단설환으로 간과 신장을 보호해야 합니다. 원래는 일주일에 한 알씩 복용해야 하지만, 지금 단설환이 부족한 관계로 제가 보관해 둔 것까지 꺼내서 사용할 것입니다. 나중에 약재를 구하면 다시 천천히 제조할 것입니다.”모두가 단설환이 귀중한 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약왕당에서도 지금은 이 약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이 한 병은 단신의의 보물과도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통증이 완화되자, 숙청제는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상을 내리려 했지만, 무슨 상을 내릴지 말하기도 전에 단신의는 황제께 휴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마침 지쳐 있었다.숙청제는 잠시 당황했지만, 금은보화로 상을 내리는 것 또한 속된 일이라고 생각했다.단설환을 먹은 후, 숙청제는 단신의를 데려가 쉬게 하라고 명하였고 오직 사여묵만을 전각에 남겼다.그는 오 대반에게 장부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이제 통증이 많이 줄어들어 정사를 처리할 정신이 생긴 모양이었다.사여묵은 의자를 가져와 송석석이 앉아있
숙청제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점차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단신의는 짐이 아직 삼 년은 더 살 수 있다고 했지. 원래 태의들은 짐이 일 년은 더 살 수 있다고 했는데, 결과는 고작 반년이었다. 짐이 생각하기에, 의관들의 말이 짐에게 적용될 때 항상 반으로 줄여서 생각해야 하는 것 같다. 일 년 반, 어쩌면 그조차도 못 살지 모르지.”“황형,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그러자 숙청제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짐의 말부터 먼저 들어보거라. 짐은 지금 머리가 매우 맑은 상태이며 혼란스럽지도 않다. 태자를 세우는 일도 서둘러야 하지만 누구를 세워야 할지도 모르겠으며, 신임황제가 집정을 시작하기까지는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다. 승상도 늙었으니 종사를 그 누구에게 맡겨도 안심이 되지 않는구나. 너 말고는 아무도.”사여묵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황형이 자신을 신뢰하는 것과 의심하는 것이 모두 일정한 규칙 없이 번갈아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짐에게는 아들이 세 명 있으니, 적장자가 있어 국본 문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대황자는 너무나 평범하다. 평범하기만 하면 괜찮은데 그는 게으르고 오만하며 이기적이지. 큰 뜻이 없고 귀가 얇아서 일곱 여덟 살이 되었는데도 아직 젖을 갓 뗀 아이 같으니. 그의 황조모와 태부가 열심히 가르치지만, 그를 억압하는 정도이지 바꿀 수는 없었다. 황후가 옆에서 조금만 귀여워해 주면, 그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심지어 이전보다 더 심해지지.”“반면, 이황자는 총명하고 영리하며 효심이 지극하고 덕이 깊다. 겨우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학당에 들어가자마자 글을 잘 짓기 시작했다더군. 덕비가 그를 많이 가르친 게 분명하다."“그리고 삼황자는 아직 너무 어려서, 겨우 세 살이라 품성을 알 수 없다.”사여묵은 숙청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분명 대황자에게 매우 실망하고 있었지만, 아직 절망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숙청제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대황자는
사여묵이 말했다.“그렇다면 황형께서는 지금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숙청제가 대답했다.“만약 짐의 수명이 원래 생각했던 대로 석 달밖에 남지 않았다면, 짐은 대황자를 세우려 했다. 그리고 너를 섭정왕으로 삼아 몇 명의 보좌 대신을 세우고, 이황자를 남강으로 분봉하여 보낸 후, 황후를 폐위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하면 제씨 가문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사여묵이 말했다.“그렇지만 신은 그 큰 책임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그가 섭정왕이 된다면, 반드시 그에게 어떤 요구가 따를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식을 낳지 말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비록 그가 제위를 찬탈한다 해도 나중에는 다시 되돌려주어야 할 상황이 올 것이다.숙청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한 듯한 그의 표정을 보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네게 숨길 수 없는 것들이 참 많구나. 짐은 네가 평생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맹세하길 바랐다. 이기적인 걸 알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사여묵은 그의 뜻을 이해했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아이를 낳는 것은 그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를 낳을지 말지 결정할 권리는 석석에게 있었다. 그에게 결정권이 없기에 약속을 할 수 없었으며, 맹세를 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숙청제는 마치 그가 모르는 것처럼, 분명하게 말을 전했다.“너도 알다시피 이 말은 네가 살아있는 한, 제왕의 권력이 네게 있음을 의미한다. 네가 제위에 오른다 해도 아무도 너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짐이 원래 계획했던 것은 너를 대우하기 위한 것이다. 자식은 없지만 제왕의 권력을 가지는 것이지.”사여묵이 물었다.“이것이 폐하의 원래 생각이라고 하신다면, 지금은 어떠십니까?”숙청제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는데, 그가 섭정왕의 자리에 대해 어떤 관심도 없다는 것을 단숨에 알 수 있었다.“지금은 단신의의 치료가 효과가 있는지 지켜보려 한다. 하지만 단신의가 궁에 들어오면, 조정의 신하들도 짐에게 태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
이황자의 출가하기 전의 이름은 사범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황자가 가장 많이 들었던 평가는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세 황자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진짜라고 믿으며, 자신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이런 말로 인해 자랑스러워할 때마다 덕비는 매번 그를 바닥으로 밀쳤다. 그녀는 늘 연민과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내 뱃속에서 태어나 평생 그 바보에게 밀리게 생겼구나. 바보 주제에 운은 또 얼마나 좋은 지.” 그는 어릴 때부터 그런 말을 귀에 익힐 정도로 들었다. 하지만 덕비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않고 매번 사적으로만 그에게 말했다. 그는 어렸을 때 어마마마가 대황형을 가장 싫어하면서 왜 매번 자애롭고 온화한 눈빛으로 대황형을 보며, 분명 바보라고 해놓고 총명하다고 칭찬하는지 몰랐다. 이해가 안 돼서 몰래 청이에게 물어보았더니 청이는 한숨을 쉬며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황자 님, 마마께서는 이황자 님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계신 거예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가 말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는 기뻐하셨고 그에게 한숨을 쉬거나 애처로운 눈빛을 보이지 않았다. 숙청제가 그를 보러 올 때마다 덕비는 그가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려주었다. 그러자 숙청제는 그에게 어떤 책을 읽는지, 그리고 어떤 내용을 기억했는지도 물었다.그는 매번 대답을 아주 잘해서 숙청제를 흡족하게 했다. 답은 모두 미리 외운 것이기 때문에 어려울 건 없었다.가끔은 숙청제가 그에게 대황형이 괴롭히거나 장난감을 빼앗지는 않는지 물어보기도 했다.하지만 그런 질문에도 정답이 있었는데, 그는 매번 자기가 동생이니 황형에게 양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이황자가 매번 그렇게 대답할 때마다 숙청제의 눈빛은 몹시 복잡했는데, 이황자는 그 눈빛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숙청제가 잠시 침묵한 후에 그의 머리
어릴 때부터 친했던 두 친구는 각자의 분야에서 항상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수철이 약을 접하게 되면서 약과 의리는 그가 신약산장을 의지하는 모든 것이 되었다. 산에 내려가 의관을 차리고 사람들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매번 참기만 했는데 서우가 왔다 간 후 보내온 편지를 본 그는 산에서 내려갈 희망이 생겨 마음이 부풀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 부상에 시달린 적이 있어서 열심히 통증과 부상을 치료하는 약을 연구했는데, 의술이 전면적인 나머지 뒤처지지도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지난 몇 년동안 한 번도 타오르지 않았던 한 줄기의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신약산장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설령 살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이번 생은 그곳에서 지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신분과 얼굴을 바꾸고, 배운 것을 가지고 산에서 내려갈 수 있다면, 그는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더 이상 숨지 않고 떳떳하게 살 수 있었다. 그 생각에 그는 며칠 동안 흥분한 상태로 제약 공장에서 먹고 마셨다. 사부님은 그런 그의 모습이 조금 두렵게 느껴져 사공에게 편지를 써 알리려고 했다. 그는 사부에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환한 미소를 띠었다. 그 웃음에 놀란 사부님은 심지어 무당을 불러 귀신이 씐 건 아닌지 보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서우 형이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그는 사부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나중에 너무 실망하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항상 해야 했다. 날이 지나고 더위와 추위가 오가더니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추분, 날씨가 상쾌한 어느 가을, 하늘의 밝은 태양은 사람을 뜨겁게 하지 않았고 하얀 구름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서우는 다시 한번 신약산장에 발을 들였는데, 이번엔 그의 서동인 진소설을 데리고 왔다. 진소설은 몽동이를 따라 무술을 익혔다. 그런데 노력한 사람은 역시 보답을 받는다고, 비록
“사정언, 너 말 좀 그만해.” 송석석은 눈살을 찌푸리고 서우에게 매달려 쉴 새 없이 말하는 딸을 혼냈다. 새빨갛게 그을린 작은 얼굴에 닭장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한 눈에 봐도 밖에서 뛰어놀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우가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쉬지도 않고 사촌 오빠에게 길에서 본 재미있는 일들을 물었다. “어머니.” 사정언은 눈을 크게 떴다.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니 왠지 억울해 보였다. 그녀의 외모는 부모님의 장점만 닮아 있었다. “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사촌 오라버니를 만나지 못했으니, 당연히 할 말이 많지요. 하루만 못 봐도 3년 못 본 것처럼 길게 느껴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대체 누가 그런 말을 가르쳐줬어?” 송석석이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 “왕사백이요. 그가 며칠 전에 매산으로 갔었는데, 돌아오자마자 시 고모를 안고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시만자는 고개를 숙여 송석석의 눈빛을 피했다. 그녀는 그때 정언이 나무 위에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아이 앞에서 껴안고 그런 오글거리는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녀는 이 아이가 말을 따라 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나이의 아이들이 왜 어른들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이맘때쯤에 최대한 어른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말이다. 사정언은 대답한 후에도 계속 서우를 잡고 말했다. “오라버니, 혹시 상서에 갔어? 상서에서 시신 업는 것을 봤어? 정말 소국이 말한 것처럼 앞에서 종을 흔드는 도인이 있고, 뒤에 좀비들이 따라가는 거야? 그들은 걸어가 아님 뛰어가? 꼭 밤에만 볼 수 있는 거야? 낮에는 햇볕이 쨍쨍해서 볼 수 없는 거야? 그들은 말할 줄 알아? 뭘 먹어? 그리고 그곳엔 주술을 잘한다고 들었는데 혹시 미인을 본 적이 있어? 그런 미인은 오라버니가 마음에 드는지…….” “그만해!” 송석석도 이내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보주, 서주, 어서
송석석은 이번에 외출할 때 황제에게 유람하러 간다고 했다.하지만 그녀는 신약산장에 오래 머물지 않고 7일 만에 떠나 만종문으로 향했다.그녀는 원래 진성으로 돌아가 홍현 고모를 찾고 싶었지만 평무종 고모를 직접 찾아가서 분장술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분장술은 어렵지 않지만 능숙하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하려면 한두 달 만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간단한 분장술은 기존의 얼굴에도 할 수 있었지만 비가 오기만 해도 쉽게 흔적이 드러날 수 있었다.그러니 간단한 분장술만 배워서는 안 되었다.그리고 또 다른 미용술은 가면을 만드는 것인데 일반적인 가면은 일정한 두께가 있어 답답하고 오랫동안 착용하면 얼굴에 상처가 날 수 있다.게다가 가면을 착용할 때는 특수 물약을 묻혀야 했기에, 뜯을 때도 얼굴에 상처가 입을 수 있었다.운익각 사람들은 가면을 착용할 때 오래 착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탐꾼들은 무공도 괜찮고 경공도 높아 임무를 수행할 때만 가면을 착용해서 물약을 묻힐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벗겨져도 얼굴에 검은 천으로 복면을 쓰고 있어서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일반인들이 변장해서 탐문할 때 사용하는 것은 변장의 첫 번째 방법이었다.평무종은 서우의 요구를 듣고 말했다.“얼굴에 오래 쓰고 있을 수 있으면서도 원래 피부를 해치지 않고 잘 벗겨지지 않는 가면이라, 그럼 상어가죽으로 만드는 것은 어떠냐.”“상어가죽이 무엇입니까?”서우는 매미의 날개처럼 얇고 물에 젖어도 흔들리지 않는 상어비단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건 엄청 귀중한 비단이었다.그러자 평무종이 설명했다.“상어가죽은 분장술에서 쓰이는 가장 좋은 소재이다. 통풍이 잘 되고, 얼굴에 단단히 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아 빗물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눈으로 보나 만지나 모두 진짜 피부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상어가죽으로 가면을 만들려면 상어 눈물을 사용해서 실을 짜내고 다시 밑감을 만들어야 해서 매우 번거롭다.”그러자 서우가 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촛불을 들고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조정의 일은 일절 말해주지 않은 탓에, 수철은 지금 나라가 안정적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미 대황자가 아니다. 따라서 지금 그가 지켜야 할 것은 자신의 목숨뿐이고, 다른 것은 이미 그와 상관이 없어졌다. 그는 조정에 관한 화제를 꺼내면 모두가 예민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릴 때 그는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는지 몰랐지만, 나중에 단 사공이 와서 조금씩 분석해 주었고, 그의 사부님도 이해관계에 대해 이야기해준 적이 있었다. 그와 셋째 동생 사이에 가족의 정으로 목숨을 걸고 불안정한 여생을 걸어야 한다면 결코 모두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받아들기로 한 것이었다. 삶은 계속될 텐데, 매일을 의미 있게 잘 보내야 목숨을 건진 보람이 있기 때문이다. 서우가 그의 다리에 대해 물었다. “내가 오기 전에, 고모가 그러던데 넌 다리를 다쳐서 일어날 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걸을 수 있게 된 거야?” 그러자 수철이 말했다. “부황께서 승하하신 해에 산장에서 몇 사람이 와서 진찰해 보더니 정말 심하게 다쳤다며 이대로 두었다가는 계속 아플 테니 반드시 극단적인 방법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하더군.” 그러자 서우는 호기심에 물었다. “어디서 온 신의야? 그럼 그때부터 치료한 거야?” 그 물음에 수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북당에서 왔는데 그 사람은 그 말만 하고 날 치료해주지 않고 당일에 떠났어. 그러다가 지난달에 와서 약주를 줘서 그걸 마셨는데, 난 하루 종일 혼수상태에 빠졌어. 심지어 깨어나니 다리가 아파 죽을 것 같았지.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점점 좋아지더니 누군가 부축하면 일어날 수 있게 되었어. 처음에는 잘 일어나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점점 똑바로 설 수 있게 되었지. 그리고 지금은 혼자 몇 걸음은 걸을 수 있게 됐어.” 그러자 서우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북당신의? 그분께서 아직 살아 계셔?” “아니, 돌아가셨어. 내가 일어나
[번외편]신약산장의 진달래가 온 산천지에 피었다. 다채로운 경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황홀하게 만들었다. 특히 신약산장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마저 그곳에 살고 싶어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예외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말을 타고 산 아래에 도착해 말을 잘 배치한 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직 눈앞의 길만 보았고 찬란한 꽃들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걸으며, 가끔 경공을 사용하기도 했다. 신약산장이 비록 높지는 않았지만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고 많은 갈림길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도를 수도 없이 봐 온 덕분에 신약산장으로 향하는 길을 이미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있었다. 약관 때 그가 작위를 계승했을 당시, 작은 고모가 많은 선물을 주었는데 그중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지도였다. 그리고 그에게 온몸의 피가 끓게 하는 소식을 알려주었는데 바로 수철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그는 한숨도 자지 못했고 옛날의 모든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작위를 받은 후 입궁해서 사은하고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낸 후 답방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작은 고모의 말로는 인맥을 굳건히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래서 무려 보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신약산장으로 출발했다. 산 아래에 도착하자 그는 날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산문을 본 순간, 강한 슬픔에 휩싸여 발걸음을 멈추고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작은 고모는 그에게 수철이가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고, 불행 중 다행히 치료 후에 목숨은 건졌지만 약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그것은 평생 약을 달고 의자에 앉아 있거나 침대에 누워서 지낼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그의 기억 속의 수철의 모습은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제멋대로며 횡포한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실하고 열심히 공부하며 태후마마와 황제폐하를 실망시킬까 봐 무술이든 공부든 최선을 다 했던 모습이었다. 특히 무술은 고모부가 재미있게 가르쳐 준 덕분에 그들은 항상 활기차게 뛰어다닐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