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기도 전에 왕표는 이미 저택에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조금 뒤, 마차들이 저택을 연이어 떠났다. 대외적으로 얘기한 건 마차 다섯 대였지만 왕표 일행이 저택을 떠나고 나서 마차 몇 대가 더 뒤따랐으며 이 또한 왕표가 미리 준비한 것이다.왕진 등 몇 명이 말을 타고 앞에서 길을 트고 있었고 심지어 그들이 탄 말은 전쟁에 투입되는 군마였지만 어차피 들켜도 중간까지 호송했다가 바로 돌아올 거라고 얘기하면 그만이었다.하지만 저녁이 되어서도 왕표가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자, 저택의 친위병들은 그제야 마음이 조급해져서 바로 제린과 방천허에게 찾아갔다.그 결과, 제린도 방천허도 만날 수가 없었다. 어젯밤 집으로 돌아간 두 사람은 바로 어지러움과 구토를 호소했지만 병사들은 그저 두 사람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라고 생각하여 해장국을 준비했다.해장국을 마신 뒤에도 두 사람의 증상은 여전했으며 위액이 나올 정도로 전부 토하고 나서야 잠이 들었는데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나도 일어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그제야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병사들은 수소문 끝에 어젯밤 왕표 저택에 갔던 사람들이 같은 증상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바로 군의관을 불렀다.조금 뒤, 진맥을 하던 군의관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말했다.“이자들이 독이 든 인삼을 먹은 것 같습니다.”제린의 부하 진 교위는 바로 왕표 저택에 찾아갔다. 어젯밤 왕표도 함께 식사를 했기에 만약 손님들이 중독되었다면 원수도 중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곧 전장에 나가야 할 원수와 장군들이 중독되었다는 건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저택에 도착한 진 교위는 부인을 호송하러 떠난 왕표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에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왕표가 이렇게 도주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그저 호송하는 도중에 문제가 생겨서 늦어진 것이라고 여겼다.이제 누가 일부러 탕에 독을 탄 건지 아니면 실수로 독이 든 탕을 마신 건지 조사해야 했다.저택 주방에서 사용한 인삼은 평서백 부인이 특별히 사람을 시켜
왕표의 갑작스러운 도주로 군심이 흔들렸을 뿐만 아니라 제린과 방천허 등 사람들 마저도 배신감에 기운이 쭉 빠졌다.왕표가 전장에서 싸우다가 죽었다고 해도 이만큼의 악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남강에서의 첫 싸움이 사국의 승리로 끝난다면 남강군은 그 뒤로도 일방적으로 공격만 당하게 된다.한편, 이 소식이 진성에 전해지기도 전에 숙청제는 사여묵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먼저 알게 되었다.사여묵이 심장 질병으로 갑자기 발작한지 5일째 되던 날, 숙청제는 임 태의와 오대반에게 북명 황실에 다시 한번 다녀오라고 했다.염구진은 갑자기 찾아온 두 사람에게 계획대로 왕야께서 고향에 잠시 휴양하러 떠났다고 얘기하려고 했다가 잠시 망설였다.숙청제는 사여묵의 상황이 호전되고 있고 곁에는 단 신의까지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렇게 임 태의를 보냈다는 건 여전히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다.이 상황에서 염구진이 계획대로 둘러댄다고 해도 황제는 임 태의를 사여묵 고향까지 찾아가게 할 것이고 그때 가서 사여묵을 만나지 못한다면 어차피 들통날 일이다.이런 생각에 염구진은 오대반과 임 태의에게 왕야께서 어제 몸과 마음을 치유하러 매산으로 떠났다고 했다.황제는 이 말도 믿지 않겠지만 그대로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는 않을 것이며 사여묵이 뭔가 몰래 도모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숙청제는 혹시 사여묵이 연왕이 반역을 일으킨 틈에 몰래 게으름을 피우러 떠났다 거나 그보다 더 안 좋은 상상을 할 수도 있지만 숙청제가 가장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야 나중에 사여묵이 남강에 싸우러 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덜 분노할 수 있다.그리고 이런 추측 때문에 숙청제는 황실에 함부로 손을 쓰지 않고 일단 지켜만 볼 생각이었다.아니나 다를까 오대반의 보고에 숙청제는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일그러진 채 오월을 궁으로 불렀다.“사람 시켜서 북명 황실과 송석석을 확실하게 지켜보거라. 송석석 그자가 매일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기록하고 저택에 있는 염 선생의 움직임도 지켜보거라.”오월은
송석석은 어서방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숙청제의 날카로운 시선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한 치의 불안함도 없었고 야망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예전처럼 공손하고 예의가 발랐다. 심지어 숙청제는 그녀의 신분을 떠올리며 이전에 했던 의심이 다소 황당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송회안의 딸이었다. 송회안의 딸이 어찌 반역을 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신뢰는 단지 순간적인 것이었으며, 그것도 이미 전사한 송회안에만 해당되는 것이었다.송석석은 이미 출가한 몸이니, 그녀와 사여묵은 같은 편에 서 있으며 그들의 이익은 동일하기 때문이다.“짐이 태의를 보내어 사여묵의 상태를 살펴보게 하였다.” 숙청제가 평정심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마치 그가 품고 있던 격렬한 의심의 파도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염선생이 말하길 사여묵이 매산에서 정양 중이라고 하더구나.”송석석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숙청제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짧은 감사인사는 어딘가 적당히 둘러대는 느낌을 주었다.“짐이 보기에 사여묵은 과로 때문인 듯하다. 너 또한 얼마 전에 노주에 동행하지 않았느냐. 현재 현갑군과 공방, 그리고 여학까지 맡고 있으니. 집안에는 반드시 일을 주관할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부부가 둘 다 병들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느냐. 어차피 너는 얼마 전에 이미 휴가를 요청하였었지. 짐이 이번에 반 년간 더 휴가를 허락할 테니 공방과 여학을 잘 정비하거라. 현갑군은 잠시 오월에게 맡기겠다.”송석석은 얼굴에 잠깐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궁에 들어오기 전 염선생이 이미 분석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황제께서 왕야가 반역의 뜻을 품었다고 여긴다면, 가장 먼저 그녀에게서 현갑군 사령관직을 빼앗아 내외가 연계되지 못하게 막으실 것이다. 반대로 단순히 왕야의 상황을 묻기만 하고 그녀의 관직에 손을 대지 않으신다면, 이는 황제께서 왕야를 신뢰하고 있음
밀고에는 왕표가 전장에서 도망쳤으며, 남강에서는 유언비어가 난무하며 군심이 흔들리고 있고, 심지어는 이탈병이 발생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심지어 기존의 남강군마저 동요하며 물러서려는 기색을 보이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제린은 밀고에서 조정에 상황을 진정시킬 수 있는 무장을 파견해 줄 것을 청하며, 그렇지 않으면 남강이 함락될 수 있다는 경고를 덧붙였다.숙청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관원들에게 소리쳤다.“남강에 갈 무장을 추천하라!”그러나 모두 서로 눈치만 보며 추천을 주저했다. 현재 북명왕을 제외하면 파면된 소 대장군만이 있을 뿐이었다.다른 무장들, 즉 주 장군, 방시원 혹은 이전의 진청 장군은 지금 남강의 혼란을 진압하고 군심을 안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북명왕이 가장 적합한 선택이었으나, 최근 북명왕이 심질환으로 고생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으니, 병을 안고 있는 그가 전장을 지휘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사국의 군대가 성문 가까이까지 접근했기에 서둘러 달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질환을 앓고 있는 북명왕이 이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소 대장군에 대한 논의도 이어졌지만, 현재 성릉관에 있는 그가 남강으로 출발하려면 아무리 서둘러도 최소 반달은 걸릴 것이었다.또한 그의 고령 또한 큰 걸림돌이었다.이 둘 외에 적합한 인물이 더 있을까? 어쩌면 아직 있을지도 모른다.일부 대신들은 은근히 시선을 숙청제에게로 돌렸다. 황제가 친히 전장에 나서는 것이 군심을 안정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일 것이었다,그러나 그 누구도 이 제안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황제가 전장에 나가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를 먼저 제안한 사람이 엄청난 죄를 뒤집어쓸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결정적인 순간, 목 승상이 침착하게 나섰다.그는 먼저 물었다.“북명왕의 현재 상황은 어떠합니까? 병세는 호전되었습니까?”숙청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답했다.“그는 매산에서 정양 중이다.”대신들은 이 말을 듣고 놀란
황후는 금족령을 받은 이후로 장춘궁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그러나 오랜 세월 궁중을 관리해 온 덕분에 바깥의 일들은 여전히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오늘 목 승상이 황제께 친히 전장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는 소식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이는 그녀의 심장을 격렬히 뛰게 했다. 흥분과 기대가 그녀를 사로잡았다.황제가 친히 전장에 나서게 된다면 태자를 세워야 할 것이고, 지금 상황에서 태자로 지명될 후보는 그녀의 대황자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북명왕이 이번에 병을 얻은 것이 너무나도 절묘한 타이밍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흥분을 조금 가라앉힌 뒤, 그녀는 점차 냉정을 되찾으며 이번 일이 쉽게 성사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생각했다. 황제는 오랫동안 전장에 나서지 않았고, 지금의 위험을 감수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게다가 조정에는 여전히 사용할 만한 무장들이 있고, 지금 연왕의 반란까지 더해져 내외부의 혼란이 심각한 상황이었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황제가 친히 전장에 나서면 민심을 크게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연왕의 반란도 더 이상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황후는 밤새 뒤척이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날이 밝기도 전에 궁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고, 밤을 지키던 궁녀 동이가 급히 들어와 보고했다.“마마, 황제께서 대황자를 데려오라 명하셨습니다!”황후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서 본궁의 옷을 준비하라!"금족령 이후 황제는 한 번도 황후를 찾아오지 않았고, 대황자를 부른 적도 없었다. 황후는 조급했지만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었기에 그저 묵묵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이번 전란은 조정과 황제에게 있어 내우외환의 위기였지만, 그녀와 대황자에게는 하늘이 내린 절호의 기회였다.“황제께서 본궁도 부르셨느냐?” 황후는 세수를 마친 후 문득 생각나 물었다. “아니옵니다. 오 대반께 대황자를 데려오라고만 명하셨습니다.” 동이가 대답했다.황후는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황제가 친히 전장에 나선
제 황후는 대황자를 오 대반에게 보내면서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너무 이른 시간이라 대황자가 아직 잠에서 덜 깼소. 가는 길에 공공께서 잘 살펴주시어 그가 헛소리를 하거나 전각에서 예를 잃지 않도록 해주시오."제 황후가 말을 마치자 란주가 앞으로 나아가 은표를 건넸다. 그러나 오 대반은 받지 않고 공손히 말했다."마마, 안심하십시오. 전각에서 예를 잃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자제를 보고 싶어 하시어 소인이 부름을 받은 것뿐입니다."오 대반은 수많은 얼굴과 마음을 읽어온 사람이었다. 제 황후는 그로 하여금 황제가 대황자에게 무엇을 물을지 미리 알려주고, 길에서 대황자에게 답을 가르쳐 주기를 바란 것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하사품을 받았겠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받을 수 없었다.황후는 얼굴에 약간의 굳은 기색을 띠었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부탁드리겠소."오 대반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대황자의 손을 잡고는 물러났다.숙청제는 금화전 앞을 서성이다 걸음을 옮겼다. 그는 전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전장에 나서야 한다는 말이 가시가 돋친 덩굴처럼 그를 단단히 휘감았다.전장에 나서기 위해 고려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그가 전장에 나서야 한다면 태자를 세워야 했다. 그러나 대황자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자질 또한 평범했다. 성격은 교만하고 나태하여 어느 면에서 보아도 황태자로 적합하지 않았다. 황제의 자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하필이면 그가 자신의 적장자였다."오 대반이 떠난 지 얼마나 되었느냐?" 그는 옆에 있던 귀생 공공에게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귀생은 공손히 대답했다."반 시진 정도 지났사옵니다."실제로는 반 시진을 훨씬 넘겼으나, 귀생은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황제의 얼굴빛이 이미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반 시진이라고 해도 황제에게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그는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장춘궁이 여기서 그렇게 먼 것도 아닌데, 어찌 반 시진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 것이냐?"귀생
벼루는 당연히 대황자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오 대반이 막아섰기 때문이다. 이 중요한 시점에 대황자에게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됐다.비록 맞지는 않았지만, 대황자는 놀라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숙청제는 분노에 차 말했다."내가 네 나이였을 때는 천자문을 이미 술술 외웠다. 그런데 너는 두 구절조차 외우지 못하다니! 오늘부터 네 할마마마의 궁으로 가서 살아라!""싫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할마마마는 정말 싫습니다!" 대황자는 태후와 살라는 말을 듣고 울음을 더 크게 터뜨렸다.그는 태후를 싫어했다. 태후께 매번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갈 때마다 마치 아버지처럼 공부에 대해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대황자는 왜 이토록 공부를 강요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질문이 정말로 싫었다."당장 데리고 가서 지안궁으로 보내라!" 숙청제가 분노를 터뜨리며 말했다.귀생은 얼른 두 명의 어린 환관을 불러 대황자를 지안궁으로 데려갔다.숙청제는 분노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마음 한편에는 깊은 슬픔이 밀려들었다. 자신의 적장자가 어쩌다 이토록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단 말인가?오 대반은 벼루를 정리하면서 복잡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폐하, 고정하십시오."숙청제는 숨을 고르며 분노와 불안을 억누르려 했지만 도저히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는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를 대비해 어머니께 수렴청정을 청하고, 대황자가 성장한 뒤에 정권을 돌려줄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그러나 이렇게 쓸모없는 인물이라면, 어머니가 아무리 고생하며 길러도 제대로 된 인재가 될 수 없을 것이었다.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숙청제는 두 눈을 감았다. 한숨도 못 자지 못해 피로감이 몰려왔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또렷했다.한참 후 그는 눈을 떠 오 대반을 주시하며 물었다."북명왕이 어디로 갔다고 생각하느냐?"오 대반은 나름 추측하고 있던 것이 있었으나 감히 말하지 못했다."소인은 알지 못하옵니다."숙청제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
오늘이 비록 상조하는 날은 아니었지만 황실 서재에서는 밤새 잠을 자지 못한 숙청제가 관리를 소집해서 남강전사에 대해 계속 논의하는데 바빴다. 하지만 사람들은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전장으로 가는 것 말고는 해 줄 조언이 없었고 추천할 사람도 마땅치 않았다. 그러자 숙청제가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로 그들에게 한바탕 화를 냈다. “문무백관 중에 중요한 때에 쓸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임금의 은혜는 받으면서 임금의 근심은 덜어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들을 남겨둬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서재의 문무백관들 중 아무도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들에겐 아무 방법도 없었다. 황제는 항상 젊은 무장을 발탁해야 한다고 하면서 북명군과 송가군 중에서 선택하지는 않았다. 또한, 전쟁터에 오래 나가지 않는 왕표를 발탁할지 언정 제린 등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겠다며 말했다. 숙청제는 냉정하게 한 번 훑어보더니 왕표가 자신이 발탁한 사람이라는 것이 생각나면서 분노와 분통이 더욱 치밀어 올랐다. “공양, 너는 사람을 데리고 평서백부를 조사해. 왕표의 식솔들은 감옥에 가두어 놓고 처분을 기다리게 하고.” 경조부윤의 공양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명을 받은 후 그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눈빛 속에서 물러났다. 공양이 떠난 후 백관들이 침묵하는 것을 본 숙청제가 다시 화를 내려고 할 때 오대반이 헐레벌떡 달려오며 말했다. “황제폐하, 송대인께서 폐하를 뵙기를 청합니다.” 숙청제는 입가에까지 나온 욕설을 순식간에 삼키며 흔들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먼저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내가 조정의 문무와 군무를 상의하고 있다고 말해.” 그는 오대반에게 송석석이 그에게 단독으로 말을 하려는 건지 아니면 조정의 문무에게 알릴 수 있는 말인지 묻게 한 것이었다. 그러자 오대반이 걸음을 멈춰서서 말했다. “송대인께서도 바로 이 일을 듣고 오셔서 어르신들과 함께 의논하고자 하십니다.”숙청제는 그녀가 사여묵의 행방을 알리러 온 것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