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허문덕 부부를 죽인 이유는 단순한 갈등 때문이 아니었다. 모두 9년 전 내가 당한 일에 대해 복수하기 위한 것이다. 아빠는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죽기 전에 나를 위해 그 후환을 제거하고자 했다. 나는 왼팔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목 위로 흉터들이 얼기설기 엉켜 있었다. “그해, 저는 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른 거지!”이건욱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화를 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 두 사람은 우리 아빠가 명예를 중시한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래서 그런 짓을 저지른 거예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건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죽인 겁니까? 당신이 겪은 일은 안타깝지만, 어쨌든 살인은 살인이에요.” “허문덕이 나를 범했다고 해서 내가 허문덕을 죽였다고 단정 짓는 건가요?” 나는 손을 꽉 쥐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 형사님, 그건 너무 단순한 추측 아닌가요?” “단순하다고요?” 이건욱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연기가 공기 속으로 퍼지며 그의 얼굴을 흐릿하게 감췄다. “하지만 지금 모든 증거가 당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증거요?” 나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솔직히, 당신이 만든 밀실 살인 사건은 정말 대단합니다. 아직까지도 그 트릭을 완전히 풀지 못했으니까요.” 이건욱은 갑자기 날카로운 시선을 내게 고정했다. “하지만 제가 단서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치명적인 단서 말입니다.” “유혜정의 시신이 매달려 있던 대들보에는 작은 고리가 달려 있었죠. 그 고리는 슬라이딩 후크에 쓰이는 겁니다.” 이건욱의 시선은 더욱 매서워졌다. “제가 마을 가게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조사했습니다. 사건 발생 며칠 전, 당신이 그것을 구매했잖아요.”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표정을 감췄다. “맞아요. 하지만 그것은 아빠가 가구를 처리하려고
“그다음 당신은 과일 칼에 남은 자신의 지문을 지우고, 유혜정 씨의 지문을 묻혔죠. 그리고 잠긴 대문과 함께 유혜정이 남편을 살해한 뒤 죄책감으로 자살한 것처럼 완벽히 현장을 조작했습니다.” 이건욱의 논리적 추론을 듣는 순간, 내 몸이 떨렸고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더는 감출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사실, 아빠는 나를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이제 아빠는 세상을 떠났고, 나는 그의 마지막 명예를 더럽힐 수 없었다. 어차피 이 세상에 미련은 남아 있지 않았다. “맞아요. 사람은 내가 죽였어요. 그들은 죽어 마땅했으니까요.” 그 말을 뱉고 나니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건욱은 내가 이렇게 쉽게 자백할 줄 몰랐는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금세 사건이 해결된 듯한 안도감이 그의 얼굴에 드러났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건욱은 담배를 피우며 담담히 물었다. “유혜정은 분명히 목이 졸려 죽었는데, 왜 오른쪽 발목에도 줄 자국이 있던 걸까요? 그리고 당신은 대체 어떻게 현장을 빠져나간 겁니까?” 나는 숨을 가다듬고 천천히 답했다. “문을 잠그고 나왔습니다. 그런 다음 집 뒤쪽 창문에서 낚싯줄을 이용해 열쇠를 유혜정의 주머니로 돌려보냈어요.” “그게 가능할까요? 창문과 시신 간 거리가 2미터나 넘는데, 그렇게 정확히 성공할 수 있을까요?” 이건욱은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리를 줄인다면 가능하죠.” 나는 웃은 뒤 설명하기 시작했다. “유혜정의 오른발에 밧줄을 묶었습니다. 밧줄의 반대쪽 끝은 창문 밖으로 던졌고, 낚싯줄은 유혜정의 주머니와 연결된 상태였어요. 문을 잠그고 나와 창문 밖으로 돌아가 밧줄을 뒷마당의 나무에 고정시켰죠. 그렇게 하면 시신이 대들보와 창문 사이에서 기울어진 상태로 만들어져요.” “계산을 해본다면 간단해요. 대들보에서 땅까지의 높이와 창문에서 나무까지의 거리를 삼각형의 변으로 두고, 피타고라스
“구체적인 수치를 말해보세요.” 이건욱은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날 밤의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다. 하지만 정확한 숫자는 기억나지 않았다. 이건욱은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내 초조함을 즐기는 듯했다. “어서 말하세요.”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생각해 볼게요... 생각을.” 머리카락을 점점 더 심하게 쥐어짜다 보니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소용없었다. “당신은 모를 거라 생각했어요. 차라리 내가 말해드릴게요.” 이건욱이 입을 열었다. “유혜정 씨의 집 대들보에서 바닥까지의 높이는 3.5미터, 시신이 매달린 위치에서 창문까지는 2.1미터, 창문에서 뒤뜰의 나무까지는 1미터입니다. 유혜정 씨의 키와 시신을 매단 줄의 길이를 합치면 약 2.9미터가 됩니다.” “피타고라스 정리에 따르면, 대들보에서 나무까지의 사선 길이는 4.68미터입니다. 여기서 줄과 시신의 길이, 그리고 창문에서 나무까지의 거리를 빼면 남은 거리는 약 1.2미터로 줄어들죠. 이 정도면 낚싯줄로 열쇠를 유혜정 씨의 주머니에 돌려보낼 확률이 충분히 높아집니다.” 이건욱은 담담히 설명을 이어갔다. “당신이 이미 자백했으니, 굳이 이런 세부적인 작전까지 숨길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갑자기 이건욱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당신은 마치 범인이 범행하는 모습을 봤지만, 구체적인 데이터는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그리고 방금 당신의 태도가 내 추측을 더욱 확신하게 만들었죠.” 이건욱은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어요. 바로 이미 세상을 떠난 수학 선생님입니다.” “당신은 그 사람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있군요.” 이건욱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내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제야 나는 그가 치밀하게 짜놓은 덫으로 나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형사님, 근거 없는 가설은 그만두시죠. 저도 더 이상
오늘, 길에서 또 허문덕을 마주쳤다. 나는 정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허문덕만 없었다면, 나연이가 이렇게까지 고향을 떠나 고통받으며 살지 않았을 텐데.2016년 12월 5일. 벌써 8년이 지났다. 과연 나연이가 결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모든 게 내 탓이다. 그때 나연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내가 잘못이다. 죽은 뒤, 나연이 엄마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2017년 7월 30일.나연이가 돌아왔기에 너무 기뻤다. 하지만 허문덕이 또다시 우리 나연이를 괴롭혔다. 왜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나연이를 내버려두지 않는 걸까. 나연이를 위해 내가 뭔가를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2017년 8월 4일.오늘, 가구를 처리할 핑계로 나연이더러 슬라이딩 후크를 사 오라고 부탁했다. 나는 완벽한 밀실 살인 방법을 떠올렸다.2017년 8월 9일.그 역겨운 인간들이 마침내 죽었다. 이제 아무도 우리 나연이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집에 온 경찰이 나연이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혹시 범인이 나연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안 되겠다. 내가 자수해야 한다. 절대 나연이를 이 일에 휘말리게 해선 안 된다. 어차피 난 늙었으니 오래 살지 못한다....“그만 읽으세요!”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그동안 강한 척하던 감정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나는 일기장을 빼앗아 들고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건욱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일기는 1년 전에 당신 아버지가 쓴 것이며, 필체와 잉크의 침투 정도가 당시의 날짜와 일치한다는 검증 결과가 나왔습니다. 모든 증거가 당신 아버지가 살인자임을 증명합니다.” 이건욱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나도 딸을 둔 아버지로서, 당신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들을 위해 사실을 밝혀줄 의무가 있습니다.” 나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외쳤다. “그럼 그 쓰레기들 때문에 망가져버린 전 누가 도와주나요?” 이건
그날 밤, 아빠는 무리한 행동과 격한 감정 기복으로 인해 심장에 큰 무리를 입었다.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아 아빠는 심장 문제로 쓰러졌고, 자수도 하기 전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아빠는 내게 너무나도 큰 사랑을 주신 분이었다. 그리고 오로지 나를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그런 아빠를 위해, 나는 아빠를 향한 모든 증거를 숨기고 묻었다. 나는 허문덕 부부의 죽음을 다른 원인으로 돌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결국 진실은 드러났고, 나는 모든 죄를 스스로 짊어질 준비를 했다. 아빠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진실을 더듬거리며 고백했다. “정말 좋은 아버님이십니다.” 이건욱은 안타깝다는 듯 말하다가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잠깐만요. 그런데 손수현 씨는 당신의 친아버지가 아니라 계부 아닌가요?”“당신 어머니께서 결혼한 뒤 성을 바꾸신 거지, 손수현 씨의 친자식은 아니잖아요?” 그의 말에 나는 순식간에 숨이 멎는 듯했다. “맞아요. 제 계부입니다. 하지만 저를 친자식처럼 사랑해 주셨죠.” 나는 울음으로 쉰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계부께서 쓰러지셨을 때 어느 병원으로 이송됐나요?” “하늘병원이요.” 내 대답을 듣자 이건욱은 한쪽 구석으로 가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그는 돌아와 말했다. “제가 너무 예민한 것 같네요. 사인은 심부전으로 확인됐습니다. 몸에 어떤 상처도 없고, 독극물 반응도 없었어요.” 이건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이제 사건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건욱은 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당신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법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난 범인은 아니지만 계부의 죄를 덮어주려 했기에, 법의 심판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게 제가 받아야 할 벌입니다. 어쨌든...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는 몇 년은 감옥살이를 해야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뜻
“이젠 은퇴했습니다.” 이건욱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가슴을 가리켰다. “과로로 몸이 망가졌어요. 여기 심장박동기를 삽입했죠.” “의사 말로는 전자기 환경을 멀리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제 더는 일을 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은퇴했죠.” 이건욱은 잠시 말을 멈추다, 갑자기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어렸다. “잠깐, 내가 기억하기로 가방에 전기 충격기가 있었잖아요. 나연 씨 계부도 심장박동기를 장착했었고, 사인은 심부전이라고 했는데... 설마 나연 씨였어요?” 나는 이건욱의 시선을 받아들이며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전 아빠 덕분에 제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웃음을 머금고 차분히 대답했다. “게다가 전기 충격기로 사람을 공격하면 분명 상처가 남을 겁니다. 병원의 부검 보고서를 보셨을 테니, 잘 아시잖아요?” 이건욱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맞아요. 시신에는 어떤 흔적도 없었죠. 내가 괜히 의심했나 봅니다.” 우리는 몇 마디를 더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태연하게 손을 흔들었지만, 마음속은 복잡했다. 햇빛이 너무 밝아 눈이 부셨다. 그리고 곧 내 오른 손바닥에 선명한 화상 자국이 비쳤다. 나는 그 자국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손수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해.’ ‘그때의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모든 삶을 먹어치운 건 단 하나, 끝도 없는 복수심이었다.’ 사실 범인은 손수현이 아니었다. 진짜 살인자는 나였다. 그뿐만 아니라, 손수현 역시 내가 죽였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계부 손수현이 나를 보는 눈빛은 전과 달라졌다. 그의 시선은 불길했고, 나는 매일이 무서웠다. 그러나 겨우 18살이었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난 항상 모든 걸 모른 척하며 참아야 했다. 중학교 졸업 후 외삼촌이 나를 데려가겠다는 약속만을 믿고 버텼다. 그러나 그해 여름,
나는 9년 전, 그 소파에서 허문덕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그것이 내 첫 살인이었다. 놀랍게도, 내 심장은 두려움보다 묘한 해방감에 빠졌다. 허문덕의 비명을 듣고 유혜정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나는 이미 계단 모퉁이에 숨어 있었고 그녀가 내려오자마자, 뒤에서 그녀의 목에 밧줄을 걸었다. 나는 모든 단서를 정리하며 자살한 듯한 흔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집을 나서던 찰나, 문 앞에서 계부 손수현과 마주쳤다. 사방은 고요했고, 달빛은 처참하게 희끄무레했다. 나는 공구 상자를 들고 있었고, 손수현의 옷을 입은 내 몸과 얼굴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나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죽인 거니?”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에요.” 달빛 아래 비친 내 얼굴은 섬뜩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세요. 당신이 8년 전에 저에게 했던 일을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다면요.” 손수현은 두려움에 떨며 조용히 물었다. “설마 나까지 죽이려는 거야?”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당신은 제 아빠잖아요.” 손수현은 나의 말에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가지 않고, 뒤뜰로 향했다. 거기서 마지막 단서를 남기기 위해 나무껍질 속에 손수현의 머리카락을 심었다. 그날 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허문덕 부부의 죽음으로 사건은 첫 번째 가짜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손수현까지 죽는다면, 세 명의 연관된 죽음은 지나치게 뚜렷한 의문을 남길 것이었다. 다음 날, 이건욱이 방문했을 때,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욱을 속이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나는 거실에서 마지막 일기를 썼다. 그것은 이미 1년 전부터 손수현을 위해 준비해둔 일기였다. 그의 필체를 모방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렵지 않았다. 일기를 다 쓰고 고개를 돌리자, 손수현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나는 아빠가 사람을 죽이는 걸 봤다. 아빠는 이웃집 남자를 칼로 찌르고, 남자의 아내의 목을 졸라 죽였다. 그리고 현장을 완벽하게 조작하였다.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순간적으로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핸드폰을 꺼내 든 그 순간, 망설이고 말았다.어쨌든 그 사람은 내 아빠였다.이웃 부부는 십 년 넘게 아빠를 괴롭혔다. 이번에 아빠 머리에 오물을 퍼부었기에 아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살인을 저질렀다. 내 아빠는 강에서 아이 두 명을 구한 적도 있었던 동네에서 인정받는 착한 사람이었다. 반면 이웃 부부는 늘 약자를 괴롭혔기에, 그들의 죽음을 기뻐하는 사람이 많았다. 더구나, 아빠는 병세가 악화되어 이미 세상을 떠났다. 나는 죽은 아빠에게 살인자의 낙인을 씌울 수는 없었기에 경찰에게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심문실에 끌려와 있다. 사건을 맡았던 이건욱 형사가 살인 사건의 사진을 내 눈앞에 펼쳐 놓고 냉소를 띤 채 물었다. “이 사진에 대해 하고 싶은 말 없나요?”사진 속 이웃집 남자 허문덕의 가슴에 과일 칼이 박혀 있었고, 팔에는 긁힌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의 아내 유혜정은 천장 들보에 목을 맨 채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창문은 쇠창살로 막혀 있었다. 게다가 방 안에서 발견된 열쇠는 두 개뿐이었다. 하나는 탁자 위에, 다른 하나는 사망자 유혜정의 주머니 속에 있었다. 완벽한 밀실 살인 사건이었다.다시 조작된 현장을 보자, 나는 입을 떼지도 못하고 공포에 휩싸인 눈빛만 보였다. 순간적으로, 이건욱이 이미 내 비밀을 알아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형사님,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미 유혜정이 허문덕을 죽이고 자살한 걸로 결론 내렸잖아요. 왜 다시 이걸 저한테 보여주는 거죠?”나는 간신히 침착한 척하며 물었다. 이건욱은 가만히 공기를 들이마시고 눈을 번뜩이더니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손나연 씨, 지난번에 거짓말했었죠.” 난 오른손에 감긴
나는 9년 전, 그 소파에서 허문덕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그것이 내 첫 살인이었다. 놀랍게도, 내 심장은 두려움보다 묘한 해방감에 빠졌다. 허문덕의 비명을 듣고 유혜정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나는 이미 계단 모퉁이에 숨어 있었고 그녀가 내려오자마자, 뒤에서 그녀의 목에 밧줄을 걸었다. 나는 모든 단서를 정리하며 자살한 듯한 흔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집을 나서던 찰나, 문 앞에서 계부 손수현과 마주쳤다. 사방은 고요했고, 달빛은 처참하게 희끄무레했다. 나는 공구 상자를 들고 있었고, 손수현의 옷을 입은 내 몸과 얼굴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나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죽인 거니?”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에요.” 달빛 아래 비친 내 얼굴은 섬뜩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세요. 당신이 8년 전에 저에게 했던 일을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다면요.” 손수현은 두려움에 떨며 조용히 물었다. “설마 나까지 죽이려는 거야?”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당신은 제 아빠잖아요.” 손수현은 나의 말에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가지 않고, 뒤뜰로 향했다. 거기서 마지막 단서를 남기기 위해 나무껍질 속에 손수현의 머리카락을 심었다. 그날 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허문덕 부부의 죽음으로 사건은 첫 번째 가짜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손수현까지 죽는다면, 세 명의 연관된 죽음은 지나치게 뚜렷한 의문을 남길 것이었다. 다음 날, 이건욱이 방문했을 때,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욱을 속이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나는 거실에서 마지막 일기를 썼다. 그것은 이미 1년 전부터 손수현을 위해 준비해둔 일기였다. 그의 필체를 모방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렵지 않았다. 일기를 다 쓰고 고개를 돌리자, 손수현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이젠 은퇴했습니다.” 이건욱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가슴을 가리켰다. “과로로 몸이 망가졌어요. 여기 심장박동기를 삽입했죠.” “의사 말로는 전자기 환경을 멀리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제 더는 일을 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은퇴했죠.” 이건욱은 잠시 말을 멈추다, 갑자기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어렸다. “잠깐, 내가 기억하기로 가방에 전기 충격기가 있었잖아요. 나연 씨 계부도 심장박동기를 장착했었고, 사인은 심부전이라고 했는데... 설마 나연 씨였어요?” 나는 이건욱의 시선을 받아들이며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전 아빠 덕분에 제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웃음을 머금고 차분히 대답했다. “게다가 전기 충격기로 사람을 공격하면 분명 상처가 남을 겁니다. 병원의 부검 보고서를 보셨을 테니, 잘 아시잖아요?” 이건욱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맞아요. 시신에는 어떤 흔적도 없었죠. 내가 괜히 의심했나 봅니다.” 우리는 몇 마디를 더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태연하게 손을 흔들었지만, 마음속은 복잡했다. 햇빛이 너무 밝아 눈이 부셨다. 그리고 곧 내 오른 손바닥에 선명한 화상 자국이 비쳤다. 나는 그 자국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손수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해.’ ‘그때의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모든 삶을 먹어치운 건 단 하나, 끝도 없는 복수심이었다.’ 사실 범인은 손수현이 아니었다. 진짜 살인자는 나였다. 그뿐만 아니라, 손수현 역시 내가 죽였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계부 손수현이 나를 보는 눈빛은 전과 달라졌다. 그의 시선은 불길했고, 나는 매일이 무서웠다. 그러나 겨우 18살이었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난 항상 모든 걸 모른 척하며 참아야 했다. 중학교 졸업 후 외삼촌이 나를 데려가겠다는 약속만을 믿고 버텼다. 그러나 그해 여름,
그날 밤, 아빠는 무리한 행동과 격한 감정 기복으로 인해 심장에 큰 무리를 입었다.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아 아빠는 심장 문제로 쓰러졌고, 자수도 하기 전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아빠는 내게 너무나도 큰 사랑을 주신 분이었다. 그리고 오로지 나를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그런 아빠를 위해, 나는 아빠를 향한 모든 증거를 숨기고 묻었다. 나는 허문덕 부부의 죽음을 다른 원인으로 돌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결국 진실은 드러났고, 나는 모든 죄를 스스로 짊어질 준비를 했다. 아빠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진실을 더듬거리며 고백했다. “정말 좋은 아버님이십니다.” 이건욱은 안타깝다는 듯 말하다가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잠깐만요. 그런데 손수현 씨는 당신의 친아버지가 아니라 계부 아닌가요?”“당신 어머니께서 결혼한 뒤 성을 바꾸신 거지, 손수현 씨의 친자식은 아니잖아요?” 그의 말에 나는 순식간에 숨이 멎는 듯했다. “맞아요. 제 계부입니다. 하지만 저를 친자식처럼 사랑해 주셨죠.” 나는 울음으로 쉰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계부께서 쓰러지셨을 때 어느 병원으로 이송됐나요?” “하늘병원이요.” 내 대답을 듣자 이건욱은 한쪽 구석으로 가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그는 돌아와 말했다. “제가 너무 예민한 것 같네요. 사인은 심부전으로 확인됐습니다. 몸에 어떤 상처도 없고, 독극물 반응도 없었어요.” 이건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이제 사건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건욱은 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당신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법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난 범인은 아니지만 계부의 죄를 덮어주려 했기에, 법의 심판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게 제가 받아야 할 벌입니다. 어쨌든...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는 몇 년은 감옥살이를 해야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뜻
오늘, 길에서 또 허문덕을 마주쳤다. 나는 정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허문덕만 없었다면, 나연이가 이렇게까지 고향을 떠나 고통받으며 살지 않았을 텐데.2016년 12월 5일. 벌써 8년이 지났다. 과연 나연이가 결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모든 게 내 탓이다. 그때 나연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내가 잘못이다. 죽은 뒤, 나연이 엄마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2017년 7월 30일.나연이가 돌아왔기에 너무 기뻤다. 하지만 허문덕이 또다시 우리 나연이를 괴롭혔다. 왜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나연이를 내버려두지 않는 걸까. 나연이를 위해 내가 뭔가를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2017년 8월 4일.오늘, 가구를 처리할 핑계로 나연이더러 슬라이딩 후크를 사 오라고 부탁했다. 나는 완벽한 밀실 살인 방법을 떠올렸다.2017년 8월 9일.그 역겨운 인간들이 마침내 죽었다. 이제 아무도 우리 나연이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집에 온 경찰이 나연이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혹시 범인이 나연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안 되겠다. 내가 자수해야 한다. 절대 나연이를 이 일에 휘말리게 해선 안 된다. 어차피 난 늙었으니 오래 살지 못한다....“그만 읽으세요!”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그동안 강한 척하던 감정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나는 일기장을 빼앗아 들고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건욱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일기는 1년 전에 당신 아버지가 쓴 것이며, 필체와 잉크의 침투 정도가 당시의 날짜와 일치한다는 검증 결과가 나왔습니다. 모든 증거가 당신 아버지가 살인자임을 증명합니다.” 이건욱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나도 딸을 둔 아버지로서, 당신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들을 위해 사실을 밝혀줄 의무가 있습니다.” 나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외쳤다. “그럼 그 쓰레기들 때문에 망가져버린 전 누가 도와주나요?” 이건
“구체적인 수치를 말해보세요.” 이건욱은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날 밤의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다. 하지만 정확한 숫자는 기억나지 않았다. 이건욱은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내 초조함을 즐기는 듯했다. “어서 말하세요.”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생각해 볼게요... 생각을.” 머리카락을 점점 더 심하게 쥐어짜다 보니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소용없었다. “당신은 모를 거라 생각했어요. 차라리 내가 말해드릴게요.” 이건욱이 입을 열었다. “유혜정 씨의 집 대들보에서 바닥까지의 높이는 3.5미터, 시신이 매달린 위치에서 창문까지는 2.1미터, 창문에서 뒤뜰의 나무까지는 1미터입니다. 유혜정 씨의 키와 시신을 매단 줄의 길이를 합치면 약 2.9미터가 됩니다.” “피타고라스 정리에 따르면, 대들보에서 나무까지의 사선 길이는 4.68미터입니다. 여기서 줄과 시신의 길이, 그리고 창문에서 나무까지의 거리를 빼면 남은 거리는 약 1.2미터로 줄어들죠. 이 정도면 낚싯줄로 열쇠를 유혜정 씨의 주머니에 돌려보낼 확률이 충분히 높아집니다.” 이건욱은 담담히 설명을 이어갔다. “당신이 이미 자백했으니, 굳이 이런 세부적인 작전까지 숨길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갑자기 이건욱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당신은 마치 범인이 범행하는 모습을 봤지만, 구체적인 데이터는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그리고 방금 당신의 태도가 내 추측을 더욱 확신하게 만들었죠.” 이건욱은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어요. 바로 이미 세상을 떠난 수학 선생님입니다.” “당신은 그 사람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있군요.” 이건욱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내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제야 나는 그가 치밀하게 짜놓은 덫으로 나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형사님, 근거 없는 가설은 그만두시죠. 저도 더 이상
“그다음 당신은 과일 칼에 남은 자신의 지문을 지우고, 유혜정 씨의 지문을 묻혔죠. 그리고 잠긴 대문과 함께 유혜정이 남편을 살해한 뒤 죄책감으로 자살한 것처럼 완벽히 현장을 조작했습니다.” 이건욱의 논리적 추론을 듣는 순간, 내 몸이 떨렸고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더는 감출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사실, 아빠는 나를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이제 아빠는 세상을 떠났고, 나는 그의 마지막 명예를 더럽힐 수 없었다. 어차피 이 세상에 미련은 남아 있지 않았다. “맞아요. 사람은 내가 죽였어요. 그들은 죽어 마땅했으니까요.” 그 말을 뱉고 나니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건욱은 내가 이렇게 쉽게 자백할 줄 몰랐는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금세 사건이 해결된 듯한 안도감이 그의 얼굴에 드러났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건욱은 담배를 피우며 담담히 물었다. “유혜정은 분명히 목이 졸려 죽었는데, 왜 오른쪽 발목에도 줄 자국이 있던 걸까요? 그리고 당신은 대체 어떻게 현장을 빠져나간 겁니까?” 나는 숨을 가다듬고 천천히 답했다. “문을 잠그고 나왔습니다. 그런 다음 집 뒤쪽 창문에서 낚싯줄을 이용해 열쇠를 유혜정의 주머니로 돌려보냈어요.” “그게 가능할까요? 창문과 시신 간 거리가 2미터나 넘는데, 그렇게 정확히 성공할 수 있을까요?” 이건욱은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리를 줄인다면 가능하죠.” 나는 웃은 뒤 설명하기 시작했다. “유혜정의 오른발에 밧줄을 묶었습니다. 밧줄의 반대쪽 끝은 창문 밖으로 던졌고, 낚싯줄은 유혜정의 주머니와 연결된 상태였어요. 문을 잠그고 나와 창문 밖으로 돌아가 밧줄을 뒷마당의 나무에 고정시켰죠. 그렇게 하면 시신이 대들보와 창문 사이에서 기울어진 상태로 만들어져요.” “계산을 해본다면 간단해요. 대들보에서 땅까지의 높이와 창문에서 나무까지의 거리를 삼각형의 변으로 두고, 피타고라스
아빠가 허문덕 부부를 죽인 이유는 단순한 갈등 때문이 아니었다. 모두 9년 전 내가 당한 일에 대해 복수하기 위한 것이다. 아빠는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죽기 전에 나를 위해 그 후환을 제거하고자 했다. 나는 왼팔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목 위로 흉터들이 얼기설기 엉켜 있었다. “그해, 저는 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른 거지!”이건욱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화를 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 두 사람은 우리 아빠가 명예를 중시한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래서 그런 짓을 저지른 거예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건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죽인 겁니까? 당신이 겪은 일은 안타깝지만, 어쨌든 살인은 살인이에요.” “허문덕이 나를 범했다고 해서 내가 허문덕을 죽였다고 단정 짓는 건가요?” 나는 손을 꽉 쥐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 형사님, 그건 너무 단순한 추측 아닌가요?” “단순하다고요?” 이건욱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연기가 공기 속으로 퍼지며 그의 얼굴을 흐릿하게 감췄다. “하지만 지금 모든 증거가 당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증거요?” 나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솔직히, 당신이 만든 밀실 살인 사건은 정말 대단합니다. 아직까지도 그 트릭을 완전히 풀지 못했으니까요.” 이건욱은 갑자기 날카로운 시선을 내게 고정했다. “하지만 제가 단서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치명적인 단서 말입니다.” “유혜정의 시신이 매달려 있던 대들보에는 작은 고리가 달려 있었죠. 그 고리는 슬라이딩 후크에 쓰이는 겁니다.” 이건욱의 시선은 더욱 매서워졌다. “제가 마을 가게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조사했습니다. 사건 발생 며칠 전, 당신이 그것을 구매했잖아요.”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표정을 감췄다. “맞아요. 하지만 그것은 아빠가 가구를 처리하려고
조사가 계속 이어진다면 아빠의 범행이 드러날지도 모른다.아빠가 화장되던 날, 이건욱이 다시 우리 집을 찾아왔다. 결국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아빠를 마지막으로 배웅한 뒤 경찰서로 가겠다고 했다. 심문실은 여전히 전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허문덕 부부는 타살당했습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건욱이 말했다. 그의 말에 내 신경이 다시 한번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당신은 정말로 똑똑하군요.” 이건욱의 시선이 날카롭게 나를 꿰뚫었다. “지난번에 두 집안의 사이가 나빠서 열쇠를 훔치기가 어렵다고 일부러 말했죠. 그 덕에 조사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려놨습니다.” 이건욱의 말투는 점점 압박감을 더해갔다. 나는 떨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건 단순한 사실을 말한 겁니다. 경찰 조사를 방해할 의도는 없었어요.” 그러나 이건욱은 내 말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도 실수를 했습니다. 우리가 유혜정의 내연남을 다시 심문했을 때, 그 사람은 유혜정이 허문덕과 이혼하고 자신과 함께할 계획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유혜정이 단순히 향수 냄새 때문에 남편을 죽였다는 가설은 더욱 설득력을 잃게 되었죠.” 이건욱은 잠시 말을 멈추고,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남자가 비밀 하나를 저에게 말해줬습니다.” 이건욱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더니 더욱 무거워졌다. “9년 전, 유혜정과 허문덕이 당신에게 저지른 일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을 텐데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공포에 휩싸였다. 아물지 못한 상처가 다시 드러났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텅 빈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 인생은 그때 일로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더는 희망도, 빛도 없었다.2008년 6월, 매미 소리가 멈춘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 맞은 첫 여름, 나는 18살이었다. 원래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천둥번개와 함
허문덕의 몸에 남은 향수 냄새는 확실히 내가 남긴 것이다.몇 년 전, 아빠는 심장 박동기를 삽입한 이후로 건강이 점점 나빠졌다. 2017년 7월 25일. 나는 해외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아빠를 돌보게 되었고, 그제야 집을 비운 지난 8년 동안 이웃인 허문덕이 아빠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빠는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고지식하고 정직한 성격 탓에 허문덕의 횡포에도 그저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 돌아온 다음 날, 허문덕의 집 발코니에 걸린 옷이 바람에 날려 우리 집 앞 웅덩이에 떨어졌다. 별일도 아닌 사소한 일이었다. 그러나 허문덕은 그 책임을 전부 우리 아빠에게 뒤집어씌웠다. 허문덕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는 아빠를 ‘겉만 번드르르한 쓰레기’라느니 ‘썩어빠진 벌레’라느니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평생 교직에 몸담아온 아빠는 명예를 생명처럼 여겼다. 그런 모욕을 듣자마자, 아빠는 가슴을 움켜쥐며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격분했다. 나는 허문덕과 말다툼을 벌이기 위해 나섰다. 그런데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논쟁을 가장해 고의로 내 가슴에 손을 스치고 지나갔다. 결국 아빠가 주방 칼을 들고 나와야 겨우 그를 집 밖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허문덕은 기회를 틈타 나에게 손을 대는 일을 습관처럼 반복했다. 아빠는 매번 칼을 들고 그를 쫓아내긴 했지만, 그의 행실은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나는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우리 부녀는 절대 평화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계획을 세웠다. 허문덕의 몸에 일부러 향수를 뿌리고, 그의 집 문틈으로 내연녀인 척 편지를 써서 끼워 넣었다. 그 결과, 그는 아내 유혜정과 싸우기 빚기 시작했고,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틈이 없어졌다. 그러나 사건 당일 밤, 또다시 일이 벌어졌다. 나는 약을 사러 나갔다가 취한 허문덕을 길에서 만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