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남준은 여러 사람의 불안한 표정을 보며 서둘러 대답했다. “구체적인 상황은 아직 모릅니다. 의사가 안에서 응급조치를 하고 있어요.”이 말에 고다정과 여진성 내외의 표정에는 걱정이 더욱 짙어졌다.고다정 역시 점점 더 자책하며 손을 올려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어떻게 이런 일이, 왜 난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다정아, 이러지 마!”여진성 내외는 고다정의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심해영은 곧바로 고다정을 말리기 위해 앞으로 나서며 다정하게 말했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란 거 아니까 그만해. 이러다 너까지 다쳐.”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말할수록 고다정은 더욱 자책했다.여진성 역시 그녀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아내의 말을 거들었다.“다정아, 이번 일은 우리도 다 알아. 네 잘못이 아니라 뒤에서 너를 계략으로 밀어 넣은 사람 잘못이지. 결국 우리가 방심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고다정은 이 말을 들을수록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를 본 여진성 역시 솔직하게 말했다.“넌 기억을 잃기 전 누군가의 계략에 당했고, 그 사람은 너에게 정신적으로 세뇌시켜서 널 조종하려 했어. 그 사람을 잡긴 했는데, 나중에 여러 일들이 생기고 네가 임신하면서 아이를 낳은 뒤에 세뇌한 걸 지우려고 했지. 그러다가 또다시 누군가가 네 정신을 조종한 거고.”이 말을 들은 고다정의 표정은 금세 심각해졌다.“전 왜 이런 걸 하나도 모르죠?”“대표님께서는 범인이 잡혔기에 사모님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게다가 사모님은 기억까지 잃었으니 더 걱정시키기 싫었던 겁니다.”구남준이 여준재를 대신해 말했고, 그 말을 들은 고다정은 만감이 교차하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한편 여진성은 구남준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왜 배후에 있는 사람까지 잡혔는데도 다정이 정신을 조종하는 사람이 있는 거니? 그때 깔끔하게 처리하지 않았어?”구남준은 이런 상황을 보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여 회장님, 저 돌아가
이상철을 보내고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다.고다정은 재빨리 씻고 다시 여준재의 곁으로 돌아왔다.적막한 공기가 사람을 졸리게 만들었다.고다정은 아기를 임신한 데다 이미 잠이 부족했던 터라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악몽을 꾼 듯 미간을 찌푸린 채 불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바깥 하늘이 서서히 밝아질 무렵, 병실의 정적을 깨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안 돼!”꿈에서 깨어난 고다정은 당황스러운 눈빛이었다. 악몽을 꿨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워 있는 여준재를 돌아보다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침대에 누워 있는 여준재의 이마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원래 창백하던 뺨은 비정상적으로 붉어져 있었다.고다정이 손을 뻗어 만져보니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깜짝 놀랐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문밖을 나서서 소리쳤다.“의사 선생님, 선생님, 거기 누구 없어요!”너무도 다급한 마음에 병실 안에 비상 호출 벨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다행히 누구도 이 점에 대해 뭐라 하지는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당직 의사가 간호사와 함께 재빨리 찾아왔다.의사는 여준재의 상태를 확인한 후 곧바로 응급처치에 들어갔다.10여 분 후 의사는 고다정에게 말했다.“상처가 감염된 것은 아니고, 여 대표님 몸의 스트레스 반응인 것 같습니다. 해열제 처방했으니 열이 내릴 겁니다. 그래도 걱정 되시면 물리적인 방법으로 열을 내려도 됩니다. 그러면 열이 빨리 떨어질 겁니다.”“알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고다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의사와 간호사가 떠나는 모습을 눈으로 배웅했다.병실은 다시 조용해졌다.고다정은 여전히 얼굴이 빨개진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여준재를 바라보며 화장실로 가서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나왔다.수건을 적셔 여준재의 이마에 올려놓은 뒤, 다른 수건을 가져와 여준재의 손바닥을 닦아주며 물리적으로 체온을 낮추도록 했다.한 시간 가까이 지나자 마침내 여준재의 열이 내렸다.고다정
“아빠가 조금 다쳐서 어젯밤에 병원에 갔고, 엄마는 병원에서 아빠를 돌보고 있어.”“아빠가 왜 다쳤어요, 심각한 건가요?”심해영의 말을 들은 두 아이는 잔뜩 긴장했고, 심해영은 재빨리 설명했다.“아빠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그럼에도 두 아이는 여전히 걱정되어 심해영에게 병원에 있는 아빠를 보러 가자고 재촉했다.한편 병원에서 여준재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강한 빛이 조금 불편한 듯 손을 들어 가려보려다가 몸에 난 상처를 건드려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그때 어젯밤 일이 떠오르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살벌하게 바뀌었다.“구남준.”나지막이 이름을 부르던 여준재는 상처의 아픔도 참으며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침대 옆에 누워 깊은 잠에 빠진 고다정과 그녀의 얼굴에 검푸른 흔적을 보며 안타까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고다정은 병원에서 밤새 그를 돌봐준 게 분명했다.여준재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고다정을 침대에 눕혀 쉬게 하려고 했다.그러다 결국 고다정을 건드려서 깨우게 되었다.“준재 씨?”고다정은 꿈인지 현실인지 다소 혼란스러운 듯 졸린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여준재가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내가 깨운 거야?”“아니요.”고다정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손을 뻗어 눈앞의 남자를 잡았고, 손에 잡히는 단단한 느낌에 얼른 의자에서 일어났다.너무 급히 일어난 탓에 저혈압으로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몸이 비틀거렸다.여준재가 제때 안아주지 않았다면 그냥 바닥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물론 여준재가 고다정을 일으키면서 상처 부위를 건드렸고, 그 고통에 여준재는 차가운 숨을 훅 들이켰다.“미안해요, 미안해요.”고다정은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들었다. 황급히 여준재의 품에서 벗어나자 그녀는 여준재의 가슴에서 붉은 흔적이 스며 나오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그녀는 여준재가 좋은 마음에 자신을 일으켜 세운 것임을 알면서도 그를 나무랐다.“그냥 침대에 누워 있지 왜 일어났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건 고다정과 여준재였다.두 사람은 재빨리 떨어졌다.수줍어하던 고다정은 불쑥 들어온 사람이 유라라는 것을 확인하자, 수줍던 표정이 금세 굳어지며 불만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유라 씨, 들어오기 전에 노크하라고 안 배웠어요?”고다정의 불만 가득한 표정을 마주한 유라는 이미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거리는 질투를 억누를 수 없었다.그러나 다행히도 그녀의 이성이 여준재가 아직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하고 있었다.“준재가 깼다는 소식을 듣고 급한 마음에 막 들어왔네요.”그녀는 변명을 하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여준재를 바라봤다. “준재야, 몸은 좀 어때?” 고다정은 말끝마다 준재라고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가 거슬려 표정을 굳혔다.“유라 씨, 제 약혼자와 그쪽은 사이가 안 좋은 걸로 아는데요. 앞으로 여 대표님, 혹은 여준재 씨라고 부르고 혹시라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호칭으로는 부르지 마세요.”“오해의 소지가 있는 호칭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그리고 어딜 봐서 내가 준재랑 사이가 안 좋다는 거예요?”유라는 짜증이 폭발했고, 여준재가 아직 그 자리에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다정과 맞섰다.고다정은 화가 난 그녀의 표정에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옆에 있는 여준재를 바라보았다.그 위험한 눈빛의 의미는 분명했다.이를 본 여준재는 자연스럽게 고다정의 말에 동조하며 유라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내 약혼녀 말이 맞아. 과거의 친분은 중요하지 않아. 여 대표님이나 내 이름 세 글자로 불러.”그 말에 유라의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가 슬픔으로 뒤바뀌었다.“준... 꼭 그렇게까지 매정하게 굴어야겠어? 널 다치게 한 사람 때문에 10년 가까이 쌓아온 우정을 무너뜨려?”유라는 계속 준재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여준재의 차가운 눈빛에 곧바로 말을 바꾸었다.여준재는 냉정하게 말했다.“우정을 무너뜨린 건 너야.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유라는 그 말에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후회가 밀려왔다.여준재가 이렇게 자
심해영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그녀는 조용히 고다정과 여준재를 살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준재 깨어났네. 몸은 좀 어때?”이때 두 어린아이도 병상 옆으로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여준재를 바라보았다.“아빠, 괜찮아요?”그들의 걱정에 여준재는 곧바로 표정이 풀렸다.“난 괜찮아. 너희는 왜 왔어? 오늘 주말 아니지 않아?”이 말을 들은 심해영이 대신 답했다.“어제 사건이 인터넷에 기사로 났어. 준이, 윤이가 학교에 가면 다른 애들이 하는 말이라도 들을까 봐 하루 쉬게 했어.”그러자 두 아이도 오는 길에 찾아봤던 인터넷 정보를 떠올리고 엄마, 아빠를 번갈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두 아이의 눈빛에 고다정과 여준재도 자연스럽게 눈치를 챘다.여준재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독였다.“걱정하지 마. 아빠랑 엄마 안 싸웠어.”“우리도 아빠와 엄마가 싸운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빠랑 엄마는 정말 사랑하잖아요.”두 아이는 한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에 고다정과 여준재가 서로를 마주 보자 다소 불쾌했던 분위기가 사라졌다.유라가 매달리는 걸 여준재 탓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여준재는 이미 오래전부터 입장을 분명히 밝혔지만 그럼에도 굳이 찾아오는 건 유라였다.그 생각에 고다정은 앞으로 다가가 하윤이의 볼을 꼬집으며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는 사랑한다는 게 뭔지 알아?”“당연히 알죠.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는 거랑 같은 거죠.”하윤은 앳된 목소리로 말하며 고다정을 바라봤다.고다정은 그런 아이의 귀엽고 말랑한 모습에 마음이 녹아내려 입꼬리가 싱긋 올라갔다.이를 본 여준재도 고다정의 화가 풀렸다는 걸 알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고다정을 달래야 할지 몰랐다.이윽고 그는 고다정의 눈가에 푸른색으로 그늘진 모습을 보며 애틋하게 말했다.“엄마랑 준이, 윤이 왔으니까 다정 씨는 집에 가서 쉬어요. 임신한 몸으로 밤까지 지샜는데 그러다 몸 망가져요.”이 말을 들은 심해영도 고다정이 임
“그쪽이랑 준재의 결혼 생활에 대한 소문 때문에 오늘 YS그룹이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알아요? 프로젝트는 말할 것도 없고 주식으로 수십억이 날아갔어요. 정말 준재를 사랑한다면 지금 당장 준재한테서 떨어져요.”유라의 허무맹랑한 말을 들은 고다정은 곧바로 조롱하듯 큰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경멸에 찬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대꾸했다.“조금 전에 나보고 속셈 있다고 하더니 이젠 내가 그 말을 그대로 돌려줘야겠네요. 방금 유라 씨가 한 말의 목적은 결국 마지막 한마디였어요. 날 준재 씨 곁에서 떠나보내고 그 틈을 타서 준재 씨에게 접근하려는 것.”상대가 단번에 목적을 짚어내자 유라는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인정하는 표정을 지었다.“그렇다면요? 그쪽이랑 만나는 건 준재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고 끝없는 골칫거리만 생길 뿐이에요. 난 달라요. 난 세계 100위 안에 드는 마투린 가문을 책임지고 있고, 준재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도움을 주는 현명한 조력자가 될 수 있어요.”“안타깝지만 그쪽은 원할지 몰라도 준재 씨는 아니에요. 그쪽이 먼저 나서서 도와주겠다고 해도 눈길 한 번 안 주잖아요. 그건 내 문제가 아니죠.”고다정은 차가운 어투로 유라를 공격했다.이윽고 그녀는 유라의 일그러진 얼굴도 개의치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난 질투가 많아요. 다음 번에 또다시 내 약혼자에게 준재준재거리면서 이름 부르면, 그땐 가루 정도로 안 끝납니다.”그 말의 뜻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유라는 몸이 근질거렸고, 손으로 긁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이를 악물고 고다정을 노려보았다.“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그냥 가려움증 유발하는 가루에요. 한 시간만 지나면 저절로 없어질 겁니다!”말을 마친 고다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라를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경고했다.“명심해요. 더 이상 약혼자에게 매달리는 꼴 내 눈에 보이지 마요. 난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이 말을 끝으로 그녀는 곧장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유라는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
“당신이 기억 못하겠지만 성시원 어르신과 채성휘 선생한테 들었을 거예요. 당신이 그분들과 함께 개발한 특효약이 지금 임상시험 단계에 있고 일단 약효가 증명되면 공개할 거잖아요. 그러면 당신과 어르신, 채성휘 선생은 정부와 전체 사회의 찬사를 받게 되겠죠. 특효약 외에도 당신은 저렴하고 효능이 좋은 약품을 많이 개발했어요.”“그러니까 당신은 나한테 폐를 끼칠까 봐 걱정할 필요 없어요. 걱정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저예요. 이렇게 출중한 당신을 언젠가는 따라잡지 못할까 봐 두려워요.”여준재는 진심을 담아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었다.이전의 고다정은 여건이 안 되는 데다 고씨 집안의 억압 때문에 재능을 펴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YS그룹을 제외하더라도 고다정의 뒤에는 일류 가문을 능가하는 은둔 가문이 있다.그러므로 고다정의 미래 성과는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을 것이다.고다정은 그런 걸 모르지만 여준재가 방금 한 말에 기분이 달짝지근해져 전화기를 든 채로 이내 잠들어버렸다.여준재는 전화기에서 전해지는 고르로운 숨소리를 들으며 사랑 가득한 눈빛을 지었다.그는 전화를 끊기 싫었지만 처리할 일이 있어 결국 끊을 수밖에 없었다. 이쪽에서 말하는 소리가 시끄러워 고다정이 깨면 안 되니까.사실 여준재는 소담한테 보고받아 유라가 찾아왔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고다정에게 말하지 않았다.그 소식을 듣고 구남준을 불러다 유라를 좀 혼내주라고 지시하려는 찰나에 고다정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전화를 끊은 후 여준재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구남준에게 지시했다.“유라가 최근 몇 개 부지를 임차해 공사를 시작하려나 봐. 애들을 보내서 예정대로 착공하지 못하게 방해해. 신분을 숨길 필요는 없어.”그가 한 일이라는 것을 유라가 알게 하고, 이게 바로 그를 건드린 결과라는 것을 명백히 알려주려는 것이다.구남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준재가 말머리를 돌렸다.“손건우한테서는 뭔가 알아낸 게 있어?”심해영이 와서 어젯밤에 그가 쓰러진 후 발생한 일을 여준재에게 대충 말해주
빌라에서 고다정은 오후 1시까지 쭉 자고 전화벨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그녀는 고다정의 잠긴 목소리를 듣고 다소 의외인 듯했다.“자고 있었어? 나 때문에 깬 거야?”“괜찮아. 무슨 일로 전화했어?”고다정은 물으면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뒤이어 임은미의 관심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별일 없어. 그냥 여 대표님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서. 그리고 어제 너와 여 대표님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너한테 가려고 했는데, 얄미운 채성휘 씨가 나를 침대에서 못 내려오게 해.”“어제 까불다가 하마터면 아이가 떨어질 뻔했잖아요. 의사 선생님께서 일주일간 누워있고 상황을 봐야 한다고 했어요.”채성휘의 언짢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어쩌다 애가 떨어질 뻔했어?”“어... 채성휘 씨가 헛소리한 거야. 사실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 이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너랑 여 대표님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해 봐. 네가 여준재 씨를 죽이려 했다고 사람들이 떠들고 있어.”마지막 한마디에서 임은미의 무거운 마음이 느껴졌다.고다정은 몸을 일으켜 침대 머리에 기댄 후 되물었다.“너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최면에 걸렸던 걸 알지?”그녀는 임은미가 무슨 말이든지 다 하는 절친이니 그 일에 대해 자기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임은미가 놀라 소리쳤다.“설마 누군가가 또 너한테 최면을 걸었어?”말하고 나서 그녀는 고다정이 입을 열기 전에 한마디 덧붙였다.“잠깐만, 아닌데. 너한테 최면을 걸었던 범인은 여 대표님이 잡지 않았어?”고다정은 이 말을 듣고 나지막이 말했다.“범인이 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잖아?”“그렇다면 나도 잘 모르겠어. 이 일에 대해서는 들은 게 많지 않아.”이쯤 되자 임은미는 고다정이 자기한테서 정보를 캐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그녀는 개의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방법까지 알려주었다.“이 일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으면 여 대표님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